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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간[叉磵]서로 교차한 시내를 말함.
♣ 차간구실[此間句失]서경의 단(段)이 끝난 뒤 대부(大夫)의 평이 있었겠고, 다음 북경(北京 송도)에 관한 대부의 물음에 대한 담수(談叟)의 대답 중 앞의 부분이 궐했은즉, 아마 몇백 자, 몇십 귀가 빠진 듯하다.
♣ 차계기환[借鷄騎還]닭을 빌려 타고 돌아간다는 뜻. 손님을 박대하는 것을 비꼰다는 뜻의 고사성어.
♣ 차고[Ꟃ股]차고는 절차고(折釵股)로 필법을 이름.
♣ 차공광[次公狂]한(漢) 나라 개관요(蓋寬饒)의 자(字)이다. 황실의 외척인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이 새로 집을 짓고 입택(入宅)하여 잔치를 베풀고 개관요를 초청하니 마지못해 참석하였는데 그에게 친히 술을 권하자, 개관요가 “나에게 술을 많이 따르지 마시오. 나는 술미치광이오.[無多酌我 我乃酒狂]”고 하자, 승상 위후(魏侯)가 웃으면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빗대어 놀리기를 “차공은 깨어도 미친 사람이니, 꼭 술 때문에 미치겠는가. .[次公醒而狂 何必酒也]”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蓋寬饒傳》
♣ 차공하사작무다[次公何事酌無多]한(漢) 나라 합관요(蓋寬饒)의 자(字)이다. 귀족 허백(許伯)의 집 연회에 갔더니, 허백이 제 손으로 술을 부어 권하였다. 관요는, “나한테 술잔을 많이 권하지 마시요. 나는 주광(酒狂)이 있소.” 하였다. 승상(丞相) 위상(魏相)이 옆에 있다가 웃으며, “차공(次公)은 깨었을 때에도 미쳤는데 하필 술만이랴.” 하였다.
♣ 차과창[差科瘡]차과(差科)의 헌데란 곧 조세(租稅) 독촉으로 매맞은 데의 상처를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오금언시(五禽言詩)에 “어젯밤 남산에 비가 와서 서쪽 시내를 건널 수 없는데 시냇가의 포곡조가 나에게 해진 바지 벗으라 하네 그 말 따라 바지 벗고 찬 물에 들어가니 조세 독촉에 매맞아 다친 데가 물속에 비춰 보이네[昨夜南山雨 西溪不可渡 溪邊布穀兒 勸我脫破袴 不辭脫袴溪水寒 水中照見催租瘢]”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二十》
♣ 차구[借寇]차구는 곧 구순(寇恂)을 빈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지방관의 유임(留任)을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름. 후한 때 구순이 일찍이 영천태수(潁川太守)를 지냈는데, 그 뒤에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영천(潁川)의 적(賊)들을 평정하고 돌아오려 할 적에 백성들이 광무제의 수레 앞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구군(寇君)을 이 영천에 1년만 더 빌려 주소서.” 하며 구순을 1년 동안만 더 그곳에 유임시켜 달라고 애원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寇恂傳》
♣ 차군[此君]대나무의 별칭이다.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대나무를 몹시도 사랑하여 사는 곳마다 대나무를 심었는데, 남의 빈 집에 잠깐 거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대나무를 심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어찌 하루인들 차군(此君)이 없어서야 되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王羲之傳》
♣ 차군상대억상군[此君相對憶湘君]차군은 대[竹]의 이칭(異稱)이고, 상군은 순(舜) 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순 임금이 죽었을 때 아황ㆍ여영 두 비가 소상강(瀟湘江) 가에서 슬피 울어, 떨어진 눈물이 대나무에 배어 얼룩이 져서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한다. 소상반죽(瀟湘斑竹).
♣ 차군정[此君亭]차군정은 화순현 관아에 있던 정자의 이름이다.
♣ 차군헌[此君軒]차군은 대[竹]의 별칭으로,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빈 집에 대를 심게 하자,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찌 하루인들 차군(此君)이 없어서 되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소식(蘇軾)에게는 차군헌시(此君軒詩)가 있다.
♣ 차군휴아[此君携兒]차군은 대나무를 말한다. 진서(晉書) 왕휘지전(王徽之傳)에 “일찍이 빈집에 있으면서 문득 대나무를 심으니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고 그 대나무를 가리키며 ‘어떻게 하루라도 이 군[此君]이 없을 수 있겠는가.’ 했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은 더부룩한 대순이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과 흡사하므로 한 말이다.
♣ 차녀[姹女]단약(丹藥)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수은(水銀)의 별칭이다.
♣ 차대[次對]삼상(三相)ㆍ옥당(玉堂)ㆍ대간(臺諫) 등이 정무(政務)를 상주하던 일.
♣ 차대질[嗟大耋]주역(周易) 이괘(離卦) 구삼효(九三爻)에 “해가 기우는 것이 이(離)이니, 질장구 치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대질(大耋)을 탄식하게 되는지라, 흉하리라.” 하였는데, 이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때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 차도[次道]진(晉) 나라 때 대장군 왕돈(王敦)의 주부(主簿)를 지냈던 하충(何充)의 자(字)이다.
♣ 차래불식[嗟來不食]제(齊) 나라 검오(黔敖)는 흉년에 밥을 지어서 길가에 왕래하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데 어느 한 사람이 굶주려서 기운 없이 오는 것을 보고, “아아, 불쌍하다. 와서 먹어라.” 하니, 그 사람은, “나는, ‘불쌍하다, 먹어라’하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면서 먹지 않았다.
♣ 차령[車嶺]공주(公州)와 천안(天安)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인조(仁祖) 2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입하자 왕이 백관을 이끌고 이 고개를 넘어 공주(公州)로 피신하였다.
♣ 차리야[遮梨夜]행(行)이라고 번역한다.
♣ 차막[遮莫]차막은 속어로 신교(儘敎)와 같은 뜻인데, 제한을 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
♣ 차문차답[且問且答]한편으로는 물으면서 한편으론 대답함.
♣ 차보[차보]차보는 길이가 짧고 바닥이 깊은 거룻배를 가리킨다.
♣ 차복배중록[且覆杯中淥]날이 어두워져서 그만 떠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시간 연장해 주지 않는 서산의 해를 가리키며, 아쉬움과 탄식 속에 마시던 술잔 뒤엎누나.[共指西日不相貸 喧呼且覆杯中淥]”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8 醉爲馬墜諸公携酒相看》
♣ 차비[佽飛]본디 춘추시대 초(楚)나라 용사의 이름인데, 한 나라 때 사냥을 담당한 관청을 가리키기도 한다. 승(丞) 9명과 위(尉) 2명이 있었다.
♣ 차비[佽飛]차비는 초(楚) 나라 검사(劍士)의 이름이다. 일찍이 강을 건너다 두 마리의 교룡이 배를 습격하자 그 목을 베고 물결을 잠잠하게 하였다 한다. 《淮南子 道德訓》
♣ 차비인[佽飛刃]차비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검사(劍士)의 이름이다. 일찍이 강을 건너가던 도중에 두 마리의 용이 배를 습격해 오자 칼을 빼어 모두 머리를 베어 버렸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 차사[差使]특정한 임무를 부여하여 파견하는 임시 직책
♣ 차산[次山]원결(元結)의 자(字). 원결은 나이 40이 넘어 친척들 강권에 못 이겨 겨우 용릉승(舂陵丞)이 되었다가 금방 그만두고 돌아와 말하기를, “인생이 옷 입고 밥 먹으면 되었지 그 밖에 더 필요한게 뭐 있겠는가.” 하고 밭 가꾸고 나무하는 것으로 만족을 취하였음. 《唐書 卷一百四十三》
♣ 차서환서구일치[借書還書俱一癡]예원자황(藝苑雌黃)에 “이제옹(李濟翁)이 말하기를 ‘책을 빌려주는 것도 어리석고 책을 아끼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며, 책을 찾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고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했다. 하였음.
♣ 차수[叉手]두 손을 나란히 합장함.
♣ 차수국[遮須國]조식이 죽은 뒤에 임금 노릇을 하였다는 전설 속의 나라 이름이다. 《類說 卷32 洛浦神女感甄賦》
♣ 차승[借乘]인심이 순후함을 뜻함.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나도 오히려 사관(史官)이 모르는 글을 빼놓은 것과 말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한 것을 보았었는데, 지금은 없구나.[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衛靈公》
♣ 차안당시[遮眼唐詩]당시를 눈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 차언[此言]먼저 시 지은 것을 가리킴.
♣ 차엽사[遮葉事]고개지(顧顗之)는 진(晉) 나라 무석(無錫) 사람이고 자는 장강(長康)인데 당시 사람들이 그의 재절(才絶)ㆍ예절(藝絶)ㆍ치절(癡絶)을 들어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일찍이 버들잎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서 남이 자기를 못 본다고 하므로 환온(桓溫)이 옆에 가서 그에게 오줌을 누었다고 함.
♣ 차오산[車五山]오산은 차천로(車天輅)의 호이다.
♣ 차운[次韻]남의 시를 화답하면서 운을 차례 그대로 하는 것을 차운(次韻)이라 하고, 그 운을 쓰되 차례를 바꾸는 것을 용운(用韻)이라 한다.
♣ 차윤[車胤]진(晉) 나라 사람으로, 집이 가난해서 등불 기름을 살 돈이 없어 반딧불이를 주머니에 많이 잡아넣어 그 불빛으로 글을 읽었다 한다. 그 뒤 벼슬해서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다.
♣ 차율[次律]차율은 당(唐) 나라 방관(房琯)의 자(字)이다. 현종(玄宗) 때 음보(蔭補)로 홍문생(弘文生)이 되었다가 봉선서(封禪書)를 지어 올리면서 장열(張說)에게 기재(奇才)로 인정을 받고 출세 가도를 달려 숙종(肅宗) 때 벼슬이 형부 상서에 이르렀다. 《新唐書 卷139》
♣ 차일피일[此日彼日]오늘 내일 하며 일을 핑계하고 자꾸 기한을 늦춤.
♣ 차재두량[車載斗量]아주 흔하거나 쓸모 없는 평범한 것만이 많이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 차저[借箸]원대한 전략을 말한다.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책사 역이기(酈食其)의 꾀를 배척하며 유방(劉邦)의 밥상에 있던 젓가락을 잠깐 빌려[借箸] 자신의 계책을 설명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留侯世家》
♣ 차저[借著]젓가락을 빌린다는 것은, 초(楚)의 항우(項羽)와 한(漢)의 유방(劉邦)이 천하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툴 당시,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에게 지난날 제후들의 자손을 왕으로 세워 그들과 함께 초를 공격하라고 권하자, 그것을 옳지 않게 생각한 장량(張良)이 유방에게 가서 때마침 밥을 먹고 있는 유방에게 말하기를 “앞에 놓인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계책을 그려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 張良傳》
♣ 차저기주[借筯奇籌]장량이 일찍이 한왕(漢王)의 밥상 앞에서 젓가락을 빌려 그것으로 이리저리 그으며 자기 계획을 진언(陳言)했던 것을 말한다. 《漢書 卷四十 張良傳》
♣ 차저병[差底病]두보(杜甫)의 시에 “文章差底病 回首興滔滔”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差底病’은 주자(朱子)의 주석에 의하면 ‘무슨 병을 낫게 하리요’라는 뜻이다.
♣ 차저편능성한업[借箸便能成漢業]장량(張良)이 한 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에게로 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다. 어느 날 일을 의논할 때에 유방에게, “그 밥상에 있는 젓가락을 좀 빌려 주시오. 계산 좀 하여 보겠습니다.”고 한 적이 있었다.
♣ 차저한장량[借筯漢張良]장량은 한나라를 건국할 때에 참모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는 임금과 말할 때에, “그 젓가락 좀 빌려주십시요. 계산 좀 해 보아야겠습니다.”라고 한 말이 있었다.
♣ 차제[次第]차례로.
♣ 차주[借籌]차저(借箸)와 같은 말로, 모신(謀臣)이 작전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고조(高祖)에게 “앞에 있는 젓가락을 잠깐 빌려서 대왕을 위해 계책을 설명드리겠다.[臣請借前箸爲大王籌之]”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漢書 張良傳》
♣ 차진[借津]차진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뜻하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차현 이남과 공주(公州)의 강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地勢)가 모두 배역(背逆)의 상이니, 그 지역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차차[次次]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불안한 모양 , 어떤 일이 조금씩 순서대로 되어가는 상태, 점점
♣ 차차[嗟嗟]탄식하며 슬퍼하는 소리, 거듭 감탄하며 칭찬하는 소리, 바닷속 괴물의 울음 소리
♣ 차차[㤞㤞]정하지 못한 모양
♣ 차창주[車滄洲]창주는 차운로(車雲輅)의 호이다.
♣ 차천로[車天輅]이조 시대의 문인으로 호는 오산(五山),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그는 문명이 명 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특히 한시에 뛰어나 한 호(韓濩)의 글씨, 최입(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 라 일컬어졌다. 저서에 오산집(五山集)ㆍ오산설림(五山說林)이 있음.
♣ 차풍례[遮風禮]주객이 함께 음식을 먹던 자리에서 객이 소마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주인이 ‘바람을 막은 벌’이라는 뜻으로 음식을 권함에 따라 객이 음식을 먹는 것을 차풍례라 하고, 이때 드는 술잔을 차풍배(遮風杯)라 한다.
♣ 차현[車峴]충청도 공주(公州)의 북쪽 57리 지점에 있는 재 이름이다.
♣ 차형[車螢]차윤(車胤) 반디. 동진(東晉) 때 차윤이 집이 가난하여 등불을 밝힐 수 없자 반딧불을 주머니에 많이 잡아넣어 그 불빛으로 글을 읽은 고사를 말한다.
♣ 차호[鹺戶]차호는 곧 어염(漁鹽)을 생업으로 하는 백성들을 말함.
♣ 착[錯]얽히다. 교착하다.
♣ 착[浞]예의 신하로서 예를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다.
♣ 착곡[錯穀]수레에 축이 얽히어 있는 것
♣ 착곡음[鑿谷吟]한유(韓愈)의 도원도(桃源圖) 시에, “바위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는 구절이 있다.
♣ 착규번신공[鑿竅煩神功]자연을 훼손하면서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였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혼돈(渾沌)의 몸에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 나갔는데 7일만에 그만 혼돈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착륜[斲輪]춘추 시대에 제 환공(齊桓公)에게 조박론(糟粕論)을 개진했다는 수레바퀴 공. 제환공(齊桓公)의 뜰 앞에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들던 대목이 환공에게 말하기를 “바퀴를 깎는 것은 천천히 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는 것이 익숙한 기술이라야 하는데 손으로는 하지마는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 신이 신의 아들에게 일러줄 수가 없고, 신의 아들도 신에게 받을 수가 없는지라 공의 읽으시는 글도 옛 성인의 뜻을 바로 다 말한 것은 못 될 것입니다.” 하였다. 《莊子 天道》
♣ 착륜감환[斲輪感桓]오묘한 경지를 깨달았다는 뜻. 수레바퀴를 깎는 노련한 목수가 “지극한 경지는 입으로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제 환공(齊桓公)에 말하였다 한다. 《莊子 天道》
♣ 착륜대환[斲輪對桓]나무를 깎아 바퀴를 만드는 목수가 제환공(齊桓公)에게, “바퀴를 깎을새 천천히도 말고 빠르게도 않고 손어림으로 알아 마음에 응하나니, 신(臣)이 아들에게 이를 수가 없고 신의 아들도 신에게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읽고 있는 옛 글도 역시 그 깊은 참뜻을 전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장자(莊子)
♣ 착만비[斲墁鼻]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영(郢) 땅에 유명한 공인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코끝에 백토가루를 얇게 바르고는 이 공인을 시켜서 깎아내게 하였더니 그는 자귀를 돌려 바람을 일으켜서 코는 조금도 상하지 않고 백토만 깨끗이 깎아내었다.” 하였다.
♣ 착문[鑿門]착문은, 옛날 군대의 지휘자를 출정시킬 때 흉문(凶門)인 북쪽 문을 허물고 나가게 하면서 필사(必死)의 결의를 다지게 했던 일종의 의식이다. 《淮南子 兵略訓》
♣ 착반[錯盤]착절반근(錯節盤根)의 준말로, 뿌리와 줄기가 뒤엉키듯 처리하기 복잡한 일을 뜻한다.
♣ 착방[笮駹]착과 방 모두 중국의 서쪽에 있던 부족의 이름이다.
♣ 착배은[鑿坏隱]벼슬을 마다하고 도망쳐 숨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노(魯) 나라 임금이 안합(顔闔)에게 정승 자리를 주려고 먼저 폐백을 가지고 그 집에 가게 하자, 안합이 집 뒤의 담장을 뚫고 도망쳤다는 ‘착배이둔(鑿坏而遁)’의 고사가 전한다. 《淮南子 齊俗訓》
♣ 착벽환수대린사[鑿壁還須待鄰舍]전한(前漢)의 광형(匡衡)이 집이 가난해서 등불을 켤 수 없자 이웃집의 벽에 구멍을 뚫어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읽었던 고사가 있다. 《蒙求 上 匡衡鑿壁》
♣ 착비영인[斲鼻郢人]옛날 영인(郢人)이 코 끝에 흰 흙덩어리를 얇게 바르고 서면, 장석(匠石)이 바람 소리가 나게 자귀를 휘둘러[運斤成風] 그 흙을 떼어 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徐无鬼》
♣ 착색산[着色山]착색산은 채색으로 그린 산수화(山水畫). 소식의 왕진경소장착색산(王晉卿所藏著色山) 시에 “그동안 한 번 변하여 풍류가 없어졌으니 누가 장군의 착색산을 보겠는가[爾來一變風流盡 誰見將軍著色山]" 하였다.
♣ 착악비[斲堊鼻]악비(堊鼻)란 코끝에 백토를 묻힌 것을 이르는데, 기예가 매우 초절함을 뜻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영 땅의 사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것을 깎아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내어 백토를 다 깎아내었는데도 코를 다치지 않고 그 영 땅의 사람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하였다.
♣ 착안배[鑿顔坏]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 임금이 안합(顔闔)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먼저 사람을 시켜 폐백을 전하였는데, 안합이 아마도 사자가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집 뒤의 담장을 뚫고[鑿坏] 도망쳤던 고사가 있다.《淮南子 齊俗訓》 두보(杜甫)의 시에 “꿈꾸고 얻은 부열(傅說)처럼 현신(賢臣)도 못 되는 몸, 숨어사는 그 모습 착안배와 비슷하네.[賢非夢傅野 隱類鑿顔坏]”라는 구절이 있다.《杜少陵詩集 卷21 秋日荊南述懷 三十韻》
♣ 착월선후[捉月獮猴]무모하게 탐혹(貪惑)만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승기율(僧祇律)에 “5백 마리 원숭이들이 사는 나무 밑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속에 달이 비쳤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나뭇가지를 잡고 손과 꼬리를 서로 연결하여 우물로 들어가 달을 잡으려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착정경전[鑿井耕田]요(堯) 임금 때에 한 노인이 노래하기를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농사 지어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미친 것이 무엇인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천하가 태평함을 이른 말이다. 《樂府 擊壤歌》
♣ 착착[娖娖]일이나 행동을 삼가는 모양
♣ 착처가[着處家]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미천한 이 몸을 누가 기억해 주리요, 방향 잃고 여기저기 그곳을 내 집인 양.[賤子何人記 迷方著處家]”이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1 遠遊》
♣ 착치[鑿齒]착치는 고대 부족의 이름, 혹은 짐승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치 끌과 같은 이를 가지고 백성을 해쳤으므로 요(堯) 임금이 예(羿)를 시켜 쏘아 죽이게 하였다 한다. 《山海經 海外南經 注ㆍ淮南子 本經訓 注》
♣ 착치[鑿齒]착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로서, 끌과 같은 이빨이 5‧6척이나 되어 ‘鑿齒’라 부른다.
♣ 착편[著鞭]착편은 말에 채찍질을 하는 것인데 출발을 의미한다. 동진(東晉)의 유곤(劉琨)이 조적(祖逖)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 함께 중원을 회복할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적이 조정에 기용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친우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매일 창을 베고 누워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오랑캐를 무찌를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휘두르며[着鞭] 치달리게 될까 두려운 생각만 든다.”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劉琨傳》
♣ 착혼돈규[鑿混沌竅]남해의 임금이 숙이고, 북해의 임금이 흘이며, 중앙의 임금이 혼돈인데, 숙과 흘이 혼돈의 땅에서 만나서 혼돈이 매우 잘 대접하였다. 숙과 흘이 혼돈의 덕을 갚으려 꾀하여 가로되, “사람은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쉬는데 이 분은 없으니 시험하여 뚫어 주자.” 하고, 날마다 한 구멍을 뚫으니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 착화[着花]꽃이 피다.
♣ 찬[贊]상례(相禮)하는 사람이 행례(行禮)의 절차를 부르는 것을 찬이라 이름.
♣ 찬계취옥[爨桂炊玉]객지에서의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비유한 말. 전국 시대에 소진(蘇秦)이 초(楚) 나라에 간 지 3일 만에야 위왕(威王)을 만나 보고는 바로 떠나려 하자, 위왕이 왜 급히 떠나려 하느냐고 물으니, 소진이 대답하기를 “초 나라에는 밥이 옥(玉)보다 귀하고, 땔나무는 계수나무[桂]보다 귀하며, 알자(謁者) 만나기는 귀신 만나기만큼 어렵고, 임금 만나기는 천제(天帝) 만나기만큼 어려운데, 지금 신(臣)에게 계수나무로 옥밥을 지어 먹으면서 귀신을 통하여 천제를 만나도록 하시렵니까?”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楚威王》
♣ 찬귀수사은[鑽貴樹私恩]편벽한 사람은 진(晉) 나라 왕융(王戎)을 가리킨다. 왕융이 지나치게 인색하여 자기 집에 좋은 오얏이 있었는데, 이것을 저자에 내다 팔 때, 남들이 이것을 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송곳으로 씨를 뚫은 다음 팔았다 한다. 《晉書 王戎傳》
♣ 찬노[瓚老]당(唐) 나라 명찬선서(明瓚禪師)를 가리킨다. 명찬선사는 나태하여 먹을 양식이 없었는데, 이필(李泌)이 이상히 여겨 찾아가 보니 토란을 구워먹고 있었다 한다.
♣ 찬도[菆塗]임금의 빈소(殯所)를 말한 것. 천자(天子)가 죽어 초빈을 할 때는 용을 그린 영구차에다 관(棺)을 얹고 그 주위에다 나무를 쌓아 외곽(外槨)처럼 만든 다음 흙으로 겉을 바름. 《禮記 檀弓上》
♣ 찬란생불봉[燦爛生不逢]춘추시대 때 제 환공(齊桓公)이 밖에 나갔더니 영척(寧戚)이 소를 먹이다가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남산이 번쩍[燦], 흰 돌이 반짝[爛] 세상에 나서 요순(堯舜)을 만나지 못했네.” 하였다. 환공이 그를 뒷수레[後車]에 싣고 가 정승을 삼았다.
♣ 찬로장승동[餐露掌承銅]한 나라 무제(武帝)가 건장궁(建章宮) 신명대(神明臺)에 구리[銅]로 선인(仙人)의 상을 만들어 세우고, 손에 쟁반을 들고 이슬을 받도록 해서, 그 이슬에 옥가루를 타서 먹었다고 한다.
♣ 찬미객[攢眉客]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에게 들어오기를 권하였으나 도연명은 눈살을 찌푸리고[攢眉] 가버렸다.’눈살 찌푸린 사람[攢眉客]’이란 곧 도연명을 가리킨다. 《事文類聚 前集 卷三十五 仙佛部 儈》
♣ 찬미대원공[攢眉對遠公]동진(東晉) 때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설치하고 고사(高士)인 도잠에게 백련사에 들어와 수도하기를 권유하자, 도잠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뿌리치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원공(遠公)은 혜원법사를 말한다. 《廬山記》
♣ 찬봉송초[攢峯竦誚]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나온 말인데, 은거하다가 변심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주옹(周顒)을 나무란 것이다.
♣ 찬앙[鑽仰]성인의 도와 덕을 우러르고 학문 등을 깊이 탐구함. 안자(顔子)가 공자(孔子)의 도를 따를 수 없음을 한탄하여 말하기를 “뚫을 수록[鑽] 더욱 굳고 우러를 수록[仰] 더욱 높다[鑽之彌堅 仰之彌高]”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 찬양공[贊襄功]임금을 보좌하여 정치를 이룩하는 공로.’찬’은 보좌(輔佐), ‘양’은 성취(成就)의 뜻.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의 “찬찬양재(贊贊襄哉)"에서 나온 문자.
♣ 찬영[餐英]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아침엔 난초에 맺힌 이슬로 목 축이고, 저녁엔 국화 꽃잎 주워서 배 채우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이 나온다.
♣ 찬옥[餐玉]선술(仙術)을 얻은 사람이 옥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서 밥처럼 복용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찬옥법[餐玉法]신선이 되는 방법을 말한다. 옛날 이예(李預)는 신선들이 옥가루를 먹는 법을 부러워하여 날마다 먹었더니, 1년이 지나자 효험이 있었다. 그러나 주색(酒色)을 삼가지 않아 마침내 죽었는데, 이때는 7월이라 무더위가 심하였는데도 오래도록 시체가 상하지 않았다. 《魏書 卷三十三 李預傳》
♣ 찬자[粲者]아름다운 사람을 이름. 시경(詩經) 당풍(唐風)주무(綢繆)에 “그대여, 그대여, 어찌 이렇게 아름다운가[子兮子兮 如此粲者何]”하였다. 여기서는 매화를 말한 것이다.
♣ 찬장[竄藏]도망가서 숨다.
♣ 찬지객[餐芝客]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세상 명리를 떠나 수신(修身) 양성(養性)하는 사람을 말한다.
♣ 찬파수[餐巴水]두로는 두보(杜甫). 그의 시에 “학질에 걸린 채 파수에서 먹고 살며, 전란의 와중에 촉도에서 늙고 있네.[瘧病餐巴水 瘡痍老蜀都]”라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哭台州鄭司戶蘇少監》
♣ 찬하객[餐霞客]신선을 말함. 도가(道家)의 수련법에 이슬 먹는 법이 있음. 진고(眞誥)에 “해는 노을의 손님이고 노을은 해의 정기인데 그대는 오직 해를 복종시키는 법만 안다.” 하였음.
♣ 찬하음[爨下音]찬하는 초미금(炒尾琴)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오(吳) 나라 사람이 오동나무로 불을 때는 자가 있었는데 채옹이 불타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좋은 재목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청하여 그것으로 거문고를 만드니 과연 아름다운 소리가 났는데 꼬리 부분에 타다 남은 흔적이 있었으며 이를 당시 사람들이 초미금이라 불렀다.” 하였음.
♣ 찬핵[鑽核]진(晉)의 왕융(王戎)이 인색하여 집에 좋은 오얏이 있어 내다 파는데 사람들이 종자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씨를 뚫었다. 《晉書 王戎傳》
♣ 찬호우굴곡[鑽瓠憂屈轂]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外儲說左)에 “송 나라 사람 굴곡(屈穀)이 제(齊)의 거사(居士) 전중(田仲)을 찾아가 ‘선생은 천성이 고결하여 남의 신세는 일체 지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돌처럼 단단하고 또 워낙 두꺼워 구멍을 뚫을 수 없는 박[瓠]을 드리겠다.’ 하니, 전중이 ‘박이란 쓸모가 있어야 하는데 그처럼 물건을 담는 그릇도, 술을 마시는 표주박도 만들 수 없는 박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하자 굴곡이 ‘그럼 나도 일찌감치 내버리겠다.’ 했다.” 하였다.
♣ 찰진[刹塵]국토가 무수하게 많아 티끌 같은데, 그 티끌 속에는 또다시 무수하게 많은 국토가 있다는 뜻의 불가어(佛家語)이다.
♣ 찰찰[察察]맑고 깨끗한 것. 밝고 자세한 모양, 결백한 모양, 조사가 세밀한 모양.
♣ 찰찰[札札]매미 우는 소리의 형용, 쟁기로 밭을 가는 소리, 베 짜는 소리.
♣ 찰찰[擦擦]진흙으로 만든 작은 탑
♣ 찰찰불찰[察察不察]너무 세밀하여도 실수가 있다는 말.
♣ 참[驂]세 필의 말.
♣ 참간[慚幹]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처리함을 말한다. 《周易 蠱卦 初六爻》
♣ 참곡궤[斬曲几]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굽은 궤를 베는 글[斬曲几文]을 지었는데, “악(惡)에는 굽은 것이 첫째이므로 나는 굽은 궤를 벤다.” 하였다.
♣ 참군[參軍]고려 때 개성부(開城府)의 정7품 벼슬.
♣ 참군[參軍]입대하다, 종군하다. 명청시대에 출납문서를 맡은 관직. 한말 군사막료. 당대(唐代)에 유행된 참군희(參軍戱) 연극의 배우, 현재의 정각(凈角)에 해당함.
♣ 참군[參軍]평사(評事)의 별칭이다.
♣ 참덕[慚德]참덕은 덕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으로, 즉 주 무왕(周武王)이 태공망(太公望)의 계책에 의해 당시 천자였던 은 나라 주(紂)를 정벌한 것을 뜻한다.
♣ 참덕[慚德]참덕이란 덕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탕(湯)은 걸(桀)의 신하이면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진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걸을 내쫓고 자기가 나라를 빼앗고는, “나는 부끄러운 덕이 있다.” 하였다.
♣ 참도역후[慙淘礫後]진서(晉書) 손작전(孫綽傳)에 “淘之汰之 瓦礫在後"라 하였음. 정한 것은 앞서고 거친 것은 뒤에 있다는 것임.
♣ 참동계[參同契]글 이름인데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한(漢) 나라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것으로 되었다. 그 실상인즉, 주역(周易)의 효상(爻象)을 빌어 단(丹) 만드는 뜻을 논하였는데. 뒤에 오면서 노화(爐火)를 말하는 자는 다 이 글로써 시조를 삼았다. 서명을 참동계라 한 것은 주역ㆍ황로(黃老)ㆍ노화 삼가(三家)를 서로 참동하여 일방으로 돌아와 대로(大道)에 합치했다는 것이다. 주희(朱熹)ㆍ채원정(蔡元定) 같은 이도 이 법을 다스렸음.
♣ 참동계[參同契]일명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 한(漢) 나라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선가(仙家) 양생술(養生術)의 요령을 기록한 책으로 두 권인데, 주역(周易)ㆍ황로(黃老)ㆍ노화(爐火) 3가(家)를 하나로 귀결시킨다는 의미를 서명(書名)에 내포하고 있다 함. 그 내용은 주역(周易)을 토대로 수화(水火)ㆍ용호(龍虎)ㆍ연홍(鉛汞) 등 도가(道家)의 수련 방법을 말하였다. 도가서(道家書)의 비조(鼻祖)이다. 주희(朱熹)가 참동계고이(參同契考異) 1권을 지으면서부터 유학자들도 많이 읽게 되었음.
♣ 참료[參寥]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현명(玄冥)이 참료에게 들었다.”에서 나온 것으로, 요원하고 적막하다는 의미의 가설적인 사람 이름이다.
♣ 참방[參訪]중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도(道)를 탐구하고 수행하는 일을 말한다.
♣ 참방이영거[讒謗已盈車]한퇴지(韓退之)의 시에 “환락이나 영화는 눈에도 차지 않건마는, 비난과 질책이 천지간에 가득 찼네.[歡華不滿眼 咎責塞兩儀]”라는 표현이 있다. 《韓昌黎集 卷2 寄崔二十六立之》
♣ 참부[讖符]참서(讖書)와 같음. 즉 중요한 보배라는 뜻.
♣ 참부식지동[饞夫食指動]참부는 식탐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고, 식지(食指)가 절로 움직이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고사가 있는데, 전하여 욕심이 생김을 비유한 말이다.
♣ 참상[參商]삼성(參星)과 상성(商星)을 말하는데, 삼성은 서남방에, 상성은 동방에 서로 등져 있어 동시에 두 별을 볼 수 없으므로, 친한 사람과 이별하여 만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 참상[參商]옛날 고신씨(高辛氏)의 두 아들 알백(閼伯)과 실침(實沈)이 서로 화복하지 못해 날마다 간과(干戈)로 싸우므로, 임금이 알백을 상구(商丘)에 옮겨 상별[商星]을 주장하게 하고 실침을 대하(大夏)에 옮겨 참별[參星]을 주장하게 하였다. 《左傳》
♣ 참수[饞守]문동(文同)의 시에 “料得淸貧饞太守 渭川千畝在胸中"이 있음.
♣ 참승[驂乘]참승은 임금의 수레에 모시고 타는 것을 말한다.
♣ 참승초종[驂乘初終]하후 영(夏侯嬰)이 한 패공(漢沛公)의 태복(太僕)으로 늘 봉거(奉車)하였기 때문에 일컬어진 말이다. 《漢書 卷四十一 樊酈滕灌傳》
♣ 참어등[饞魚燈]참어등은 물고기의 기름을 달여서 그것을 등유(燈油)로 사용하여 켜는 것을 말한다. 《開元天寶遺事》
♣ 참연[槧鉛]인쇄한 서적을 말함이다.
♣ 참연[饞涎]참연은 식욕(食欲)으로 침을 흘림을 말한다.
♣ 참인투유호[讒人投有昊]주(周) 나라 때 현인(賢人)을 참소하는 자들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에, “저 참소하는 자를 잡아다가, 승냥이나 호랑이에게 던져 주리. 짐승들도 더럽다 안 먹거든, 머나먼 북극에 던져 주리. 북극에서도 더럽다 안 받거든, 하느님께나 던져 주리[取彼讒人 投畀豺虎 豺虎不食 投畀有北 有北不受 投畀有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詩經 小雅 巷伯》
♣ 참지흑서약[叅之黑黍龠]옛날에는 도량형의 기본을 황종(黃鐘)으로 삼았는데, 길이의 경우 중간 크기의 기장알 90개를 포갠 것이 황종의 길이다. 기장 한 알을 1푼(分), 10푼을 1촌(寸), 10촌을 1척(尺), 10척을 1장(丈)으로 하였다. 《漢書 卷二十一 律曆志》
♣ 참진[參辰]삼상(參商)과 같은 말로, 삼성(參星)은 서방에, 상성(商星)은 동방에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두 별을 볼 수 없으므로, 전하여 친한 사람과 이별하여 만나지 못하는 비유로 쓰인다.
♣ 참진사[斬秦蛇]고조(高祖)가 일찍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길을 막고 있는 흰 뱀을 칼로 쳐서 죽였다. 그날 밤 어떤 노파가 길에서 울고 있다가 말하기를, “흰 뱀은 나의 아들로 백제(白帝)인데, 뱀으로 화해 있다가 적제(赤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백제는 진 나라를 가리키고, 적제는 한 나라를 가리킨다. 《漢書 卷1上 高帝紀》
♣ 참참[摻摻]“참참”이 아니고, 바른 음은 “섬섬”
♣ 참참[漸漸]산이 높고 험한 모양, 눈물이 흐르는 모양.
♣ 참참[參參]긴 모양, 왕성한 모양,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 들쭉날쭉한 모양.
♣ 참참[憯憯]몹시 근심하는 모양
♣ 참참[慘慘]비통한 모양, 걱정하는 모양, 암담한 모양
♣ 참참[巉巉]산이 높고 험한 모양
♣ 참창[欃槍]전쟁의 전조(前兆)가 된다고 불길하게 여겼던 흉성(凶星)의 하나로, 보통 혜성(彗星)을 말한다.
♣ 참창성[攙搶星]참창성은 병란(兵亂)을 주관으로 혜성(彗星)으로, 보통 전쟁이나 반역을 상징하는 말이다.
♣ 참처[慘悽]마음이 슬프고 쓰리다.
♣ 참천양지[參天兩地]삼천양지(參天兩地)와 같은 말로서 하늘의 숫자는 홀수인 3이고 땅의 숫자는 짝수인 2라는 뜻인데 주역(周易) 괘(卦)에서 숫자를 설정한 것임. 여기서는 천지 이치를 말함. 주역(周易) 說卦에 “하늘은 3이고 땅은 2로서 서로 숫자가 어울린다.[參天兩地而倚數]" 하였음.
♣ 참첨[讒諂]참소와 아첨. 즉 간신을 말함.
♣ 참최복[斬衰服]굵은 삼베로 짓고 단을 꿰매지 않은 상복을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입는 기간은 만 2년, 즉 24개월이다. 주로 아버지의 상(喪)에 아들, 며느리, 딸이 입는다.
♣ 참측[憯惻]마음이 상하고 아프다
♣ 창간사[槍間射]행궁(行宮)의 내진(內陣)에서 창(槍)을 든 군사와 궁시(弓矢)를 찬 군사가 사이사이 기어 둘러서서 숙위(宿衛)하는 것.’간(間)’을 ‘간(干)’으로 쓴 데도 있다.
♣ 창공[倉公]창공은 한(漢) 나라 때의 명의(名醫)인 순우의(淳于意)를 이름. 그가 일찍이 태창장(太倉長)을 지냈으므로 창공이라 한다. 창공이 한번은 꿈에 봉래산(蓬萊山)에서 노닐다가 금빛이 찬란한 높은 궁실(宮室)을 만났는데, 갑자기 한 동자(童子)가 일배수(一杯水)를 갖다 주므로 창공이 그것을 다 마시고 나니 오장(五臟)이 서늘하였다. 인하여 그 궁전을 쳐다보니 ‘상지선관(上池仙館)’이라 쓰여 있으므로, 그제야 자기가 상지수를 마셨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그가 진맥(診脈)에 신통력을 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창광[昌光]창광은 서기(瑞氣)의 이름이다.
♣ 창구[蒼狗]구름을 형용한 말. 두보(杜甫)의 가탄시(可歎詩)에 “하늘에 뜬 구름이 흰옷과 같았는데 잠시 뒤에 변하여 푸른 개[蒼狗]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 한 데서 온 말로, 즉 세상 변화의 신속함을 탄식한 것이다.
♣ 창구백의[蒼狗白衣]세상의 변천을 비유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가탄시(可歎詩)에 “하늘에 뜬 구름이 흰 옷과 같았는데, 잠깐 뒤에 변하여 푸른 개와 같구나[天上浮雲似白衣 須臾改變如蒼狗].”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十一》
♣ 창구운[蒼狗雲]두보(杜甫)가 구름을 두고 지은 시에, ‘잠깐 동안에 푸른 개 모양으로 변화한다.’는 구절이 있다.
♣ 창귀[倀鬼]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다. 종종 호랑이의 사역을 받으며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한다. 《事物異名錄 神鬼 虎傷鬼》
♣ 창기[昌期]이명준(李命俊)의 자(字)이다.
♣ 창낭고설가[滄浪鼓枻歌]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쫓겨나서 강담(江潭)에 노닐 적에, 한 어부가 굴원이 세상을 불평하는 말을 듣고서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하였다.
♣ 창낭독진의[滄浪獨振衣]높고 깨끗한 풍도를 지니고 세상을 피해 탈속(脫俗)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굴원의 ‘어부사’에 ‘창랑지수(滄浪之水)’의 노래와 ‘탄관 진의(彈冠振衣)’의 구절이 나온다.
♣ 창당사[倉唐事]창당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 문후(魏文侯)의 아들 무후(武侯) 격(擊)의 스승으로 무후를 간하여 효도하게 한 고사를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위 문후가 아들 격(擊)을 중산(中山)에 봉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창당은 ‘아버지는 아들을 잊을지언정 아들은 아버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간하자, 격은 ‘부릴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핑계하므로 창당은 ‘부릴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가겠다.’ 했다.” 하였다.
♣ 창두[蒼頭]창두는 곧 머리에 푸른 색 두건(頭巾)을 쓴 복례를 가리킨다.
♣ 창랑[滄浪]동해(東海)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곳. 즉 창랑주(滄浪洲)의 준말임.
♣ 창랑[滄浪]창랑은 강물 이름인데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을 때는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릴 때는 내 발을 씻으리.”에서 나온 것으로, 은자가 사는 강변을 뜻한다.
♣ 창랑가[滄浪歌]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쫓겨나서 강담(江潭)에 노닐 적에 한 어부(漁父)가 굴원이 세상을 불평하는 말을 듣고서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 창랑객[滄浪客]강호(江湖)를 물결처럼 떠도는 나그네라는 말이다.
♣ 창랑곡[滄浪曲]창랑가는 맹자(孟子)와 초사(楚辭)에 실린 노래로 즉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한 것인데, 맹자(孟子)에서는 유자(孺子)가 한 노래로서 길흉ㆍ화복은 모두 자초(自招)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초사(楚辭)에서는 어부(漁父)가 굴원(屈原)에 대하여 부른 노래로서 세상이 태평하면 벼슬을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은둔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孟子 離婁上, 楚辭 漁父》
♣ 창랑구산인[滄浪舊散人]창랑가(滄浪歌)를 부른 어부(漁父)를 말한다.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발이나 씻어야지.”라고 하여, 용사행장(用舍行藏)의 도리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뜻을 피력하였다.
♣ 창랑선리론[滄浪禪理論]창랑은 청 나라 엄우(嚴羽)의 호. 그가 지은 창랑시화(滄浪詩話)에 선리(禪理)로 시를 해설하였음.
♣ 창랑자[滄浪子]최명길(崔鳴吉)의 호이다.
♣ 창랑청탁[滄浪淸濁]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쫓겨나서 강담(江潭)에 노닐 적에, 한 어부가 굴원이 세상을 불평하는 말을 듣고는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말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하였다.
♣ 창랑호탁영[滄浪好濯纓]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은둔 생활을 즐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서 어부가 노래하기를, “창랑수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며, 창랑수 흐리거든 내 발이나 씻으리.” 하였다.
♣ 창량[蒼凉]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두 아이가 해[日]를 두고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한 아이가 말하기를, “해가 처음 뜰 때에는 창창량량(滄滄凉凉)하다가 하늘 가운데 와서는 뜨거우니, 그것은 가까우니 더웁고 멀리 있을 때에는 서늘한 것이다.” 하였다.
♣ 창려[昌黎]창려백(昌黎伯)에 봉해진 당(唐) 나라 문장 한유(韓愈)의 호이다.
♣ 창려노[昌黎老]창려(昌黎)의 늙은이란 바로 창려 사람으로 창려백(昌黎伯)에 추봉된 한유(韓愈)를 가리킴.
♣ 창려부삼신[昌黎賦三辰]창려는 한유(韓愈)의 호로, 한유가 시를 지어서 자기의 생년월일에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이 끼어 있어서 평생의 운수가 나쁘다고 한탄하였다.
♣ 창려유복[昌黎留服]창려는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별호(別號)이다. 한유가 태전(太顚)이라는 승려와 친하게 지내었는데, 그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원주로 돌아올 무렵, 의복을 남겨 두어 이별의 정표로 삼았으니, 이것은 인정에서 발로된 것이요, 불교를 믿고 복덕을 구하려 함이 아니었다.[及來袁州 留衣服爲別 乃人之情 非崇信其法求福田利益也]”라는 구절이 있다.
♣ 창려자[昌黎子]당 나라 한유(韓愈)의 별호.
♣ 창려환박수요소[昌黎宦薄愁饒笑]창려는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봉호. 한유는 특히 직간(直諫)으로 인하여 누차 폄적(貶謫)되어 미관(微官)으로 전전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창롱[窓櫳]격자무늬가 있는 창.
♣ 창룡[蒼龍]28수(宿) 가운데 동방의 7수(宿)를 총칭하는 말이다.
♣ 창룡궐[蒼龍闕]서한(西漢) 미앙궁(未央宮)의 동궐(東闕) 이름인데, 시절이 봄이기 때문에 이로써 궁궐을 표현한 것이다.
♣ 창룡성[蒼龍牓]28수(宿)의 하나로 동방의 7수(宿)를 말하는데, 옛날 술수가들이 별의 위치가 흉방(凶方)이라 하여 흉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창룡수[蒼龍宿]동쪽의 일곱 별인 즉, 각(角)ㆍ항(亢)ㆍ저(氐)ㆍ방(房)ㆍ심(心)ㆍ미(尾)ㆍ기(箕)의 총칭. 용(龍)으로 나타내며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함.
♣ 창린[昌麟]문왕의 이름이 창(昌)이고, 또 문왕의 자손들을 기린으로 묘사한 ‘인지지(麟之趾)’라는 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창망귀[悵忘歸]슬피 돌아갈 것을 잊는다.
♣ 창명[滄溟]명(明) 나라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호이다.
♣ 창명집[滄溟集]명(明) 나라 때의 문장가 이반룡(李攀龍)의 문집. 창명은 이반룡의 호이다.
♣ 창문[閶門]오(吳) 나라 성(城) 서쪽의 문 이름인데, 이 문 밖이 가장 번화하기로 유명했다.
♣ 창방[唱榜]창방은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
♣ 창부[食부]새 이름. 기산(基山)에 사는 창부는 생김이 닭 비슷한데, 머리와 날개가 각각 셋이고 눈과 발은 여섯 개를 가진 이상한 새로서 그것을 먹으면 누워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山海經 南山經》
♣ 창상[滄桑]창해(滄海)가 상전(桑田)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세상의 엄청난 변화.
♣ 창상지변[滄桑之變]푸른 바다와 뽕나무 밭의 변화
♣ 창생기[蒼生起]다시 나라에 중용될 것이라는 뜻이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젊어서부터 명망이 높았는데 조지(朝旨)에 응하지 않고 회계(會稽)에 우거(寓居)하여 동산(東山)에서 기생(妓生)을 데리고 우유자적(優遊自適)하니, 고영조(高靈祖)가 말하기를 “안석(安石)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창생을 어찌하리.” 하였는데, 사안은 뒤에 등용되어 재상에 이르렀다.
♣ 창성[昌城]창녕(昌寧)의 옛이름이다.
♣ 창수[傖叟]하천한 사람을 이른 말이다.
♣ 창승조[蒼蠅弔]먼 데 귀양가서 죽으매 파리[蠅]밖에 조객(吊客)이 없다는 뜻이다. 오(吳) 나라 우번(虞翻)이 남방에 귀양가서 한탄한 말이다.
♣ 창씨[倉氏]창씨는 그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창고지기를 했으므로 창씨란 성을 가졌다. 《通志 氏族略》
♣ 창업수성[創業守成]일을 시작하는 것과 이룬 일을 지킴. 일을 시작하여 이루기는 쉽고, 이미 이루어진 일을 지키기는 어려움.
♣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일을 이루기는 쉬어도 지키기는 어렵다.
♣ 창여창구백여의[蒼如蒼狗白如衣]두보(杜甫)의 시에 “하늘 위 뜬 구름 흰 옷 같더니, 어느새 변덕부려 푸른 개가 되었네.[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21 可歎》
♣ 창염[蒼髥]창염은 소나무의 별칭이다.
♣ 창염수[蒼髥叟]소나무의 이명(異名)이다.
♣ 창오[蒼梧]순(舜) 임금을 장사지낸 곳으로, 지하에 묻힌 성군(聖君)을 뜻한다. 순(舜)이 39년 동안 제위(帝位)에 있다가 남쪽을 순수(巡狩)하던 중에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죽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五帝本紀》
♣ 창오공수장[蒼梧共壽藏]순(舜) 임금이 붕어하여 창오산에 장사하였으므로 비유한 말이다.
♣ 창오묘[蒼梧墓]순 임금의 무덤을 말함. 사략(史略) 권1에 “순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죽었다.” 했는데, 그 주에 “창오는 산 이름으로서 구의(九疑)라고도 하는데, 순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 창오산[蒼梧山]중국의 산명으로, 순(舜)임금이 창오의 들판에서 죽어 창오산 남쪽에 장사지냈음. 흔히 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 창오제[蒼梧帝]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崩)하였으므로 일컫는 말이다.
♣ 창외청산[窓外靑山]남제(南齊) 때의 시인 사조(謝脁)가 청산 남쪽에 집을 짓고 살았던 데서 온 말이다.
♣ 창우[蒼牛]을축(乙丑)을 가리킴.
♣ 창우철검[倡優鐵劍]문약(文弱)과 무강(武强), 문란한 정치와 엄정한 기강을 말한다. 창우(倡優)는 악공(樂工)이나 기인(伎人) 등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범수전(范睢傳)에 “鐵劍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이라는 말이 있다.
♣ 창유[槍楡]작은 새는 고작 날아봤자 느릅나무에 다다른다는 뜻으로, 재능이 아주 천단함을 비유한 말. 붕(鵬)새가 9만 리나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작은 새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훌쩍 날아보았자, 겨우 느릅나무에 다다랐다가 땅바닥에 떨어지곤 할 뿐인데, 어떻게 9만 리나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 창유각소배풍핵[槍楡却笑培風翮]세상의 소인들이 군자를 비웃는다는 말이다. 창유(槍楡)는 참새, 배풍(培風)의 날개는 붕조(鵬鳥)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培風背負靑天”하는 붕새를 보고 참새떼들이 비웃으면서 “우리가 힘껏 날아도 유와 방 나무에 부딪히기 일쑤인데[槍楡榜] 어떻게 구만 리를 난단 말인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창유방[槍楡枋]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의하면, 붕새[鵬]가 9만 리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비둘기가 비웃기를 “나는 느릅나무와 박달나무[楡枋]에만 이르려 해도 때로는 이르지 못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창유소만리[搶楡笑萬里]매미나 쓰르라미도 자기의 차원에서 대붕(大鵬)을 충분히 비웃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대붕이 하늘 높이 떠올라 남명(南溟)을 향해 비행할 적에 매미와 쓰르라미가 이를 비웃으며 “우리는 기껏 날아 봤자 느릅나무와 방나무 사이가 고작인데,[我決起而飛 搶楡枋] 저 새가 어떻게 구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奚以之九萬里而南爲]”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 창음[菖飮]단오(端午). 단오에 창포를 마시므로 이름.
♣ 창잠[창잠]단오절의 음식인 창포(菖蒲) 김치와 창포 술을 말한다.
♣ 창전혈지승[窓前穴紙蠅]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선을 공부하는 사람을 마치 광명(光明)을 찾는 파리가 창문을 바른 종이 한 장을 뚫으려고 애쓰는 데에 비유하였다.
♣ 창정[蒼精]창정은 용(龍)의 이름. 신선전(神仙傳)에 “호공(壺公)이 ‘내가 함영(含景)을 차고 창정을 탄다.’ 했다.” 하였다.
♣ 창제[倉帝]창제는 문자(文字)를 처음 만들어낸 창힐(倉頡)을 높인 것으로 뒷사람들이 맨 처음 글자를 만든 창힐의 공을 훌륭하게 여겨 마침내 제황(帝皇)의 존호(尊號)를 붙인 것이라 한다. 《廣雅 釋詁》
♣ 창조[蒼鳥]매, 독수리.
♣ 창주[滄洲]주자(朱子)의 호. 창주에 정사(精舍)를 짓고 호를 창주라 했음.
♣ 창주[滄洲]창주는 원래 해변가 은자(隱者)의 거처를 말하는데, 남조 제(南朝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宣城)에 부임하여 창주의 풍류를 즐겼다는 고사에서 기인하여, 당시(唐詩)에서 강남(江南)의 유벽(幽僻)한 주군(州郡)을 가리킬 때 곧잘 쓰는 표현이 되었다.
♣ 창주[滄洲]창주는,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의 “창주를 굽어보며 지백에게 사례하고, 기산에 올라 허유에게 절을 한다.[臨滄洲而謝支伯 登箕山以揖許由]”라는 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산수 좋은 은사(隱士)의 거처로 쓰이게 되었다.
♣ 창주기[蒼州期]선경(仙境) 속에 함께 숨어살기로 기약한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의 ‘위정충권진왕전(爲鄭沖勸晉王箋)’에 “창주를 굽어보며 지백에게 사례하고, 기산에 올라가 허유에게 읍을 한다.[臨蒼州而謝支伯 登箕山而揖許由]”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창주가 은자(隱者)의 거처로 쓰이게 되었다. 참고로 원문과 비슷한 구절에 두보(杜甫)의 “옛날 혜원(惠遠) 및 허순(許詢)과 함께, 중년에 창주에서 살기로 약속했지.[往與惠詢輩 中年蒼州期]”라는 표현이 있다. 《文選 卷40ㆍ杜少陵詩集 卷23》
♣ 창주독유향[昌州獨有香]해당화(海棠花)가 향기가 없는데, 오직 창주(昌州)의 해당화는 향기가 있다 한다.
♣ 창주미불의[滄洲未拂衣]창주(滄洲)는 선경(仙境)을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에 “공을 이루면 옷 떨치고 떠나가서, 창주 물가 찾아 소요하리라.[功成拂衣去 搖曳滄洲旁]”라는 구절이 있고, 두보(杜甫)의 시에 “벼슬에 얽매인 몸 창주는 요원한 꿈이라서, 옷 떨치지 못하는 걸 그저 슬퍼할 따름일세.[吏情更覺滄洲遠 老大徒傷未拂衣]”라는 구절이 있다.
♣ 창주이로[蒼洲二老]옛날 주(紂)의 학정을 피해 물가에서 숨어살았던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을 말한 것.
♣ 창중서[倉中鼠]이사(李斯)는 초(楚) 나라 사람인데 일찍이 고향에서 소리(小吏)로 있다가 칙간[厠]에 들어가서 똥을 먹는 쥐를 보고는 탄식하기를, “이 쥐가 이 더러운 데 있지 않고 나라의 쌀창고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편하고 배부를 것인가. 사람도 이와 같다.” 하고는 곧 진(秦) 나라에 들어가서 승상(丞相)이 되어 부귀를 누리다가 필경에 혹독한 형벌을 받아 죽었다. 여기서는 부귀가 화(禍)가 될 줄 깨닫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 창중수[窓中岫]사조(謝脁)가 여법조(呂法曹)에 화(和)한 “창문 정면에 먼 멧부리 늘어섰고 뜰 가에 높은 수목 우거졌네.” 하는 시를 말한 것이다.
♣ 창창[倀倀]갈질을 잃어 헤매는 모양
♣ 창창[凔凔]냉랭한 모양
♣ 창창[惝惝]넋을 잃고 멍하게 있는 모양
♣ 창창[倡倡]빛깔이 화려한 모양
♣ 창창[摐摐]소리가 크면서 명랑한 모양, 뒤얽혀 어지러운 모양
♣ 창창[愴愴]슬픈 모양, 슬퍼 상심하는 모양
♣ 창창[滄滄]추운 모양, 하늘의 넓고 푸른 모양
♣ 창창[悵悵]한탄하는 모양
♣ 창창[暢暢]화락한 모양
♣ 창창비정색[蒼蒼非正色]하늘은 푸르른 색깔처럼 정대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으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하늘이 푸른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다를 수 없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 창천불은노성인[蒼天不憖老成人]노성인(老成人)은 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선배를 말한다. 공자(孔子)가 죽자 노 애공(魯哀公)의 뇌사(誄辭)에 “호천(昊天)이 돕지 않아 한 노인을 남겨두지 않았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孔子家語》
♣ 창촉[菖歜]창포(菖蒲)로 담근 김치를 말한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삼십(三十)에 “향례(饗禮)에 창촉이 있었다.” 한 주에 “창촉은 창포저(菖蒲葅)이다.” 하였다. 황정견(黃庭堅)의 발서덕수초서(跋徐德修草書)에 “德修之嗜吾書 與楚文之昌歜 屈到之芰 點也之羊棗 何異哉"라 하였다. 또 육유(陸游)의 시에 “尙有愛書心 還若嗜昌歜"이라는 구가 있음.
♣ 창평[昌平]현 북평(北平)의 북쪽 고을. 북평 북방의 첫째 요해지.
♣ 창포[菖蒲]사람을 오래 살게 하는 풀로 일명 창양(昌陽)이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창양은 장수하게 한다.[昌陽引年]" 하였다.
♣ 창포고[菖蒲苦]단오일에 창포가루를 술에 타 마신다.
♣ 창포주[菖蒲酒]단오절에 창포즙을 넣어 빚은 술을 먹으면 역질(疫疾)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 창피[猖被]이소경(離騷經) 주에 “창피는 옷 입고 띠를 묶지 않은 것과 같다.” 하였음.
♣ 창합[閶闔]하늘 위의 백옥경. 창합은 신선이 사는 하늘 궁궐의 문으로, 보통 도성 문을 가리킨다.
♣ 창합낭간[閶闔琅玕]창합은 원래 하늘로 통하는 문이나 전하여 궁문(宮門)을 말하고, 낭간은 아름다운 문장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시 ‘착착(齪齪)’에, “구름을 헤치고 창합을 향해 부르짖으며, 마음을 열고 낭간을 올리리라.[排雲叫閶闔 披腹呈琅玕]”라고 한 구절이 있다.
♣ 창합풍[閶闔風]태괘(兌卦)의 바람, 즉 정서풍(正西風)으로 가을바람을 가리킨다. 《史記 律書》
♣ 창해[漲海]남해(南海)의 고칭(古稱)이다.
♣ 창해검무흔[蒼海劒無痕]잘 드는 칼로 물을 베면 벤 흔적이 없다는 뜻이다.
♣ 창해구석[滄海驅石]진 시황의 고사. 진 시황이 해가 뜨는 곳을 보려고 바다에 다리를 놓을 때, 어떤 신인(神人)이 돌을 몰고 오면서 더디면 돌에 채찍질을 하는데 돌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三齊略記》
♣ 창해군[滄海君]장량(張良)이 한(韓)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을 만나 거기서 역사(力士)를 얻어가지고 철퇴를 만들어 진 시황을 저격했었다.
♣ 창해상전[滄海桑田]푸른 바다가 변하여 뽕밭으로 된다는 말로 곧 덧없는 세상이라는 뜻.
♣ 창해생연적[滄海生涓滴]작은 데에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룸.
♣ 창해수병[滄海戍兵]창해는 동해 즉 발해(渤海)로,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 나라 군대를 가리킨다.
♣ 창해유주[滄海遺珠]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현자(賢者) 또는 명작(名作)을 비유하는 말.
♣ 창해일속[滄海一粟]넓고 큰 바다에 떨어진 한 톨의 좁쌀. 아주 큰 것 중에 아주 작은 것. 흔히 광대한 우주 속의 인간의 하찮음을 비유.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천지간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 같은 목숨, 망망한 바다 속 한 알의 좁쌀일세.[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라는 표현이 있다.
♣ 창화[菖花]양서(梁書) 태조장황후전(太祖張皇后傳)에 “初后嘗於室內 忽見庭前 菖蒲生花 光彩照灼 非世中所有 后驚視 謂侍者曰 汝見不 對曰 不見 后曰 嘗聞見者富貴 因遽取呑之 是月生高祖"라 하였음.
♣ 창황[惝怳]슬퍼서 실의에 찬 모양.
♣ 창힐칠장[蒼頡七章]창힐(蒼頡)은 황제(黃帝) 때 사관(史官). 여기서는 책 이름.
♣ 채각관[豸角冠]해채(獬豸)라는 동물이 부정(不正)한 사람을 보면 뿔로 떠받는다고 하므로 어사(御史)가 채각관(豸角冠)을 쓴다.
♣ 채갈[采葛]시경(詩經)에, “칡을 캐노라, 하룻동안 보지 못하니 몇 달이나 된 것 같도다.” 하였다.
♣ 채공화[蔡公禾]한(漢) 나라 채무(蔡茂)가 꿈에 태극전(太極殿) 위에 세 이삭의 벼가 나 있는 것을 보고 뛰어 올라 벼를 잡았다. 그리고서 주부(主簿) 곽하(郭賀)에게 그 꿈의 길흉을 물으니, 곽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하면서 “대궐 대들보에 벼가 있는 것은 신하로서 상록(上祿)을 받을 징조입니다.[極而有禾 人臣之上祿也]"하더니, 그 후 과연 순월(旬月) 만에 사도(司徒)가 되었다. 《後漢書 蔡茂傳》
♣ 채국음[採菊吟]도연명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 본다”하였음.
♣ 채군모[蔡君謨]송(宋) 나라 때의 문인으로 자가 군모인 채양(蔡襄)을 이르는데, 그는 특히 글씨에 뛰어나서 송대(宋代) 제일(第一)로 평가되었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宋史 卷三百二十》
♣ 채궐[採蕨]시경(詩經)의 채미(採薇)편은 미적(薇狄)을 정벌하는데 군사를 보내는 시(詩)이다. 여기서는 음운(音韻) 때문에 궐(蕨)을 미(薇)와 통용하였다.
♣ 채근백사[菜根百事]송(宋) 나라 때 왕혁(汪革)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먹고살면 온갖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내가 보건대 지금 사람들은 나물 뿌리를 먹고사는 것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 본심(本心)을 위배하는 지경에 이른 자가 많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善行》
♣ 채남[采藍]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록(采綠)에 의하면, 행역(行役)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여 부른 노래로 “아침 내내 쪽풀을 캤지만, 행주치마도 다 안 차네. 닷새만 되면 온다더니, 엿새가 되어도 오지를 않네.[終朝采藍 不盈一襜 五日爲期 六日不詹]" 한 데서 온 말이다.
♣ 채녀가[蔡女笳]채녀는 후한(後漢)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을 가리킨다. 흉노(匈奴)의 포로가 되어 호중(胡中)에서 12년 동안 살다가 조조(曹操)의 구원을 받고 중국에 돌아온 뒤 비분강개의 심정을 읊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 한다. 《樂府詩集 琴曲歌辭 胡笳十八拍》
♣ 채단[彩團]재인(才人)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
♣ 채도주[蔡道州]채도주는 송(宋) 나라 때 위학(僞學)으로 몰리어 도주에 유배된 채원정(蔡元定)을 이르는데, 그가 도주에 가서 편지를 보내 제자(諸子)들에게 훈계하기를 “혼자 다닐 때는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홀로 잠잘 적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내가 죄를 얻었다 하여 사도(斯道)에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四》
♣ 채두[釵頭]비녀처럼 생긴 불똥지우개.
♣ 채란[采蘭]채란은 진(晉) 나라 속석(束晰)의 ‘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에서 나온 말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 채란시[採蘭詩]부모를 효도로 봉양하는 일을 읊은 시이다. 속석(束晳)의 남해(南陔)시에, “저 남쪽 언덕에 올라 그 난초를 뜯네.[循彼南陔 言采其蘭]”하였다.
♣ 채련[彩輦]영여(靈輿)를 말한다.
♣ 채련[採蓮]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것을 뜻함. 생원과(生員科)ㆍ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名簿)를 연방(蓮榜)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채련곡[採蓮曲]악부 가사명으로 내용은 대부분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태도를 기술하였다.
♣ 채련사[採蓮詞]연밥을 따는 모습을 읊은 노래로,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가운데 하나인 채련곡(採蓮曲)을 말한다.
♣ 채륜[蔡倫]채륜은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108 箋紙譜》
♣ 채모팽기[蔡謨蟛蜞]진(晉) 나라 때 채모가 방게를 보고 대단히 좋아하여 이를 삶아 먹고 나서는 속이 좋지 않아 다 토해 내고 힘이 쭉 빠지므로, 이것이 먹는 게가 아닌 줄을 알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晉書 蔡謨傳》
♣ 채묘등몽[菜苗登夢]송 진종(宋眞宗)이 일찍이 난간에 나와서 선비를 선발했는데, 꿈에 전각 아래에 채소 한 포기가 매우 무성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채제(蔡齊)가 일등으로 뽑혔다.
♣ 채무[彩舞]채색옷을 입고 추는 춤. 곧 늙은 부모를 위로하는 일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 고대(古代)에 노래자(老萊子)라는 효자가 나이 70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 모양으로 노친 앞에서 재롱을 부려, 노친으로 하여금 나이 든 것을 잊게 하였다 한다. 《蒙求 下 老萊斑衣》☞ 반의지희(斑衣之戲).
♣ 채묵[蔡墨]채(蔡)는 거북을 말한 것으로, 채묵은 바로 거북점을 칠 적에 거북껍데기에 먹으로 획을 그은 다음 이를 태워서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 채문도사[蔡門倒屣]손님을 반갑게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위지(魏志) 왕찬전(王粲傳)에 “채옹(蔡邕)이 문 밖에 왕찬(王粲)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을 거꾸로 끌고 나가 영접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채미[蠆尾]행서(行書)에 벌의 꼬리처럼 날카로운 필법(筆法)을 말한다.
♣ 채미가[採薇歌]금곡(琴曲)의 가사(歌詞) 이름. 주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주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 폭력으로 폭력과 바꾸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모르도다.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이제는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거나[登彼西山兮 採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 나라를 칠 때, 백이와 숙제(叔齊)가 간하니 병사들이 죽이려 했으나, 무왕은 의인(義人)이라 하여 놓아주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는데 그들이 남긴 채미가가 전해진다.” 하였다.
♣ 채미시[採薇詩]채미조(採薇操)라고도 하는데, 악부(樂府) 금곡가사(琴曲歌辭) 이름.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불렀다는 노래. 《史記 伯夷傳》
♣ 채미인[採薇人]무왕(武王)이 주(紂)를 치자, 백이(伯夷)는 주(周) 나라의 불의(不義)한 곡식을 먹지 아니하겠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었다.
♣ 채백창[蔡伯昌]백창은 채유후(蔡裕後)의 자이다.
♣ 채번[綵幡]금(金)ㆍ은(銀)ㆍ나(羅)ㆍ채(綵) 등으로 만든 꾸미개임. 옛날 입춘일이면 백관(百官)에게 이것을 나누어주어서 이를 머리에 달고 입조(入朝)하여 하례를 하게 하였는데, 하례를 마치고 나면 이를 머리에 단 채로 각각 귀가(歸家)했다고 한다.
♣ 채번[綵幡]음력 정월 7일에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여먹고, 오색 종이로 깃발ㆍ제비ㆍ나비ㆍ금전 등의 형상을 만들어 머리 위에 꽂는 것을 채번 혹은 채승(綵勝)이라고 한다. 《太平御覽 卷976》
♣ 채번은[綵幡恩]채색의 표기인데, 옛날에 신년 원단(元旦)이 되면 조정에서 오색(五色)의 표기를 베풀고 군신(군臣)들을 조회시켜 잔치를 베풀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채복[綵服]색동옷이라는 말로, 어버이에게 재롱을 떨어 기쁘게 해 드리는 효자를 표현한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효자(孝子)인 노래자(老萊子)가 70세의 나이에 채색옷을 입고 어버이 앞에서 어린애의 장난을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입주행(入奏行)’에 “繡衣春當霄漢立 綵服日向庭闈趨”라는 구절이 있다.
♣ 채복승환원[綵服承歡願]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며 기쁘게 해 드리려는 소망을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7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던 ‘채의오친(綵衣娛親)’의 고사가 있다. 《藝文類聚 卷20 注》
♣ 채복인[彩服人]효행(孝行)을 일컫는 말이다. 전국 시대 초(楚) 나라 현인(賢人)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린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같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老子傳》
♣ 채봉인[蔡封人]채봉인은 정 장공(鄭莊公)의 경(卿)으로 이름은 족(足)이며 자(字)는 중(仲). 장공을 위하여 등(鄧) 나라에 장가들게 하여 소공 홀(昭公忽)을 낳자, 그를 세우려 하였으나, 여공 돌(厲公突)을 세우려는 송(宋) 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여공을 세웠으며, 뒤에 다시 자기를 죽이려는 여공을 몰아내고 소공을 세웠으나 고거미(高渠彌)에게 시해되자, 소공의 아우 자의(子儀)를 세우는 등, 반복 무상하였다. 《左傳 桓公 五年ㆍ十一年ㆍ十五年ㆍ十八年》
♣ 채부다탈락[菜部多脫落]명(明)의 장개빈(張介賓)이 쓴 경악전서(景岳全書) 내에 본초편(本草篇)이 있는데, 거기에다 채소 종류를 다 수록하지 않고서 빠뜨린 것이 있다는 말.
♣ 채붕[彩棚]공중에 가설하여 아래를 가리는 것을 이름.
♣ 채상단[采桑壇]몸소 양잠을 하는 후비의 근면한 덕을 보여 주기 위하여 쌓은 단으로, 선잠단(先蠶壇)의 서북쪽에 있었다 한다. 《後漢書 禮儀志上》
♣ 채색[菜色]굶주린 사람의 얼굴에 누르스름한 빛깔을 띤 것을 말한다.
♣ 채석[采石]이태백이 채석기(采石磯)에서 술에 취해 뱃놀이하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채석이백명[采石李白名]이태백이 채석기(采石磯)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취중에 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는데, 그 뒤에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 채석적선[采石謫仙]이적선(李謫仙) 즉 이태백(李太白)을 말한다. 채석기(采石磯)에서 술에 취해 뱃놀이하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채석전광[采石顚狂]이백(李白)이 채석강(采石江)에서 농월(弄月)한 고사를 말함.
♣ 채석주중금[采石舟中錦]의상만은 현실을 초월한 낭만이 있다는 뜻. 이백(李白)이 채석기(采石磯)에서 밤에 비단 장포(長袍)를 입고 낚싯배에 앉아 뱃놀이를 즐기다가 물에 빠졌다고 함. 매요신(梅堯臣)의 시에, “채석강 달빛 아래 적선을 찾았더니, 비단 장포 밤에 입고 낚싯배에 앉아 있네.[采石月下訪謫仙 夜披錦袍坐釣船]”하였음.
♣ 채수[債帥]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을 기롱하여 이르는 말이다.
♣ 채수[債帥]뇌물을 받고 벼슬을 알선해 주는 권요자(權要者)를 가리키는 말.
♣ 채수[綵樹]채수는 채화수(綵花樹)와 같은 말로, 즉 조화(造花)를 이르는데, 당 중종(唐中宗) 때 입춘일(立春日)이면 시신(侍臣)들에게 봄맞이를 하게 하고, 대궐에서 채화수를 내다가 한 사람에 한 가지씩 하사했다고 한다.
♣ 채숙[蔡叔]주 무왕(周武王)의 아우. 희도(姬度).
♣ 채승[彩勝]부인(婦人)의 머리에 장식하는 조화(造花)인데, 옛날에 주로 입춘일(立春日)이면 이것을 머리에 꽂았다.
♣ 채승[綵勝]입춘일(立春日)에 오색 종이로 깃발, 금전(金錢), 나비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매어 다는 장식물이다.
♣ 채승[綵勝]정월 초에 머리에 꽂는 일종의 조화(造花)로서 화승(花勝)과 같은 뜻이다.
♣ 채승[綵勝]채승은 머리에 꽂는 조화(造花)인데, 옛날 입춘일(立春日)이면 임금이 삼성(三省)의 관원들에게 이 채승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한다.
♣ 채시[蔡蓍]거북 점과 시초(蓍草) 점이라는 뜻으로, 귀신과 같은 묘산(妙算)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 채시관[采詩官]풍속과 정치를 살펴보기 위해 각 지방의 시가(詩歌)를 채집했던 주(周) 나라의 관원 이름이다. 《禮記 王制ㆍ漢書 藝文志》
♣ 채신지우[采薪之憂]자기 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파서 나무를 할 수 없다는 뜻. 부신지우(負薪之憂)
♣ 채씨롱[蔡氏弄]오롱곡(五弄曲)은 다섯 가지의 금곡(琴曲)으로 유춘(遊春)ㆍ녹수(淥水)ㆍ유거(幽居)ㆍ좌수(坐愁)ㆍ추사(秋思)인데,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지었다.
♣ 채약동남[採藥童男]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 채영[彩楹]단정한 기둥
♣ 채옹[蔡邕]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백개(伯喈). 시부(詩賦)를 잘하였으며, 저서에는 채중랑전집(蔡仲郞全集)이 있음.
♣ 채옹초미금[蔡邕焦尾琴]채옹이 일찍이 이웃 집에서 밥을 짓느라고 때는 오동나무가 타는 소리를 듣고는,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 줄을 알고 그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얻어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채운저처권상렴[彩雲低處捲緗簾]대궐에서도 이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리라는 말이다. 대궐 위에는 보통 상서로운 채색 구름이 감도는 것으로 묘사가 된다.
♣ 채원정[蔡元定]채도주(蔡道州). 송(宋) 나라 때 위학(僞學)으로 몰리어 도주에 유배되었다. 그가 도주에 가서 편지를 보내 제자(諸子)들에게 훈계하기를 “혼자 다닐 때는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홀로 잠잘 적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내가 죄를 얻었다 하여 사도(斯道)에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四》
♣ 채의[綵衣]빛깔이 고운 옷, 즉 때때옷ㆍ색동옷.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칠십에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채색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
♣ 채의[彩衣]채색옷인데,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가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유희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 채의오친[綵衣娛親]채의(綵衣)를 입고 어버이를 즐겁게 하다
♣ 채의환[彩衣歡]옛날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일흔 살에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떨었던 고사가 있다. 《藝文類聚 卷20 列女傳》
♣ 채익[彩鷁]뱃놀이에 사용하는 호화로운 배를 말함. 익(鷁)은 백로와 비슷한 큰 물새로 그 새가 풍파를 잘 견딘다 하여 그 모양을 뱃머리에 장식함.
♣ 채익[綵鷁]화려하게 꾸민 배를 가리킨다. 익(鷁)은 바람을 잘 타는 새로, 뱃사람들이 뱃머리에다 채색 비단으로 익새의 모양을 만들어 달아서 배가 난파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 채제[采齊]예기(禮記) 옥조(玉藻)에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허리에 차고 …… 추창(趨蹌)할 때에는 채제의 박자에 맞추고 걸을 때에는 사하(肆夏)의 박자에 맞추었다.” 하였는데, 채제는 문외(門外)에서의 옛 음악이고 사하는 등당(登堂)할 때의 옛 음악이었다.
♣ 채주소역[蔡疇邵易]송(宋) 나라 채침(蔡沈)의 홍범황극내외편(洪範皇極內外篇)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가리킨다.
♣ 채중[蔡仲]주(周) 나라 채숙도(蔡叔度)의 아들. 아버지 숙도가 무경(武庚)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귀양가 죽자, 채중은 덕을 닦고 착한 일을 하기에 노력하여 성왕(成王)으로부터 다시 채(蔡)에 봉해지는 신임을 받고 이어 자기 아버지 숙도의 제사를 받들었음. 《書經 蔡仲之命》
♣ 채중기[蔡仲耆]채팽윤(蔡彭胤)의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 조선조 영조 때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을 지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희암집(希菴集)이 있음.
♣ 채중랑[蔡中郞]채중랑은 후한 때 중랑장을 지낸 유명한 문사(文士) 채옹(蔡邕)을 이르는데, 거문고를 잘하였다. 그의 딸 염(琰)은 어려서부터 음률(音律)에 통하여 9세 때에 자기 아버지가 거문고를 탈 적에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어느 줄이 끊어졌음을 알아맞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거문고는 그 딸 채염(蔡琰)이 계승하였다
♣ 채진[采眞]진실의 이치를 캔다는 뜻.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古者謂是采眞之遊"라 하였음.
♣ 채진지유[采眞之遊]장자(莊子) 천운(天運)에 “소요(逍遙)의 뜨락에서 노닐고, 구간(苟簡)의 밭에서 먹고살며, 부대(不貸)의 구역에서 있나니, 소요면 무위(無爲)요 구간이면 이양(易養)이요 부대면 무출(無出)이라, 이를 일러 옛사람들이 채진지유(采眞之遊)라 하였다.” 하였다.
♣ 채취생[彩翠生]전국 시대 초(楚) 나라 시인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초왕(楚王)과 무산(巫山) 신녀(神女)의 연애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서로 작별할 적에 무산 신녀가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를 내리면서 언제까지나 양대 아래에 있겠다.[旦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文選 卷19》 한편 당(唐) 나라 왕유(王維)의 시에 “비취빛이 때때로 분명도 한데, 저녁 산기운은 처소를 알 수 없네.[彩翠時分明 夕嵐無處所]”라는 표현이 있다. 《王右丞集 卷13 木蘭柴》
♣ 채침[蔡沈]채침은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며, 주희(朱熹)의 제자였는데, 자기 아버지 원정이, 당시 학자들이 잘 모르는 홍범(洪範)의 수(數)에 관하여 자기 혼자 깨닫고는 있었으나 미처 논저(論著)를 못하고는 이르기를, “내 뒤를 이어 내 학설을 완성시킬 사람은 침(沈)일 것이다.” 하였고, 주희는 늘그막에 서경의 전(傳)을 쓰려다가 못하고 역시 채침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음.《宋史 卷四百三十四》
♣ 채택[蔡澤]전국 시대 연(燕) 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하여 조(趙)ㆍ한(韓)ㆍ위(魏)에 유세하였으나 모두 쓰임을 받지 못하였다가 얼마 뒤에 진(秦)에 들어가 응후(應侯)의 인도로 진 소왕(秦昭王)에게 객경(客卿), 승상까지 되었더니, 그 뒤 남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 승상의 인(印)을 돌려주었다.
♣ 채팽윤[蔡彭胤]조선조 영조 때 사람. 자는 중기(仲耆), 이름은 팽윤(彭胤), 호는 희암(希菴). 형조 참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음. 저서에는 희암집(希菴集)이 있음.
♣ 채필[綵筆]남조(南朝)의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곽박(郭璞)에게 돌려준 뒤로부터 미문(美文)이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와, 이태백(李太白)이 붓 끝에 꽃이 피는 꿈을 꾸고 난 뒤로부터 더욱 시상(詩想)이 풍부해졌다는 ‘채필생화(綵筆生花)’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傳ㆍ開元天寶遺事 夢筆頭生花》
♣ 채필[彩筆]뛰어난 문장 솜씨를 이름. 양(梁) 나라 때 문장가인 강엄(江淹)이 어릴 적에, 자칭 곽박(郭璞)이란 사람으로부터 채색 붓을 받는 꿈을 꾸고부터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한번은 꿈에 자칭 곽박(郭璞)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내 붓이 그대에게 다년간 있었으니 이제는 돌려달라.” 하므로, 강엄이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 그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꿈을 꾼 이후로는 강엄의 재주가 다해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梁書 卷十四》
♣ 채필[綵筆]뛰어난 문장 실력을 뜻한다. 이백(李白)이 붓 머리에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는 “綵筆生花”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채필무공[彩筆無功]재능이 떨어졌다고 스스로 비유한 말. 양(梁)나라 때 강엄(江淹)이 젊어서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었는데, 한번 야정(冶亭)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바,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곽박(郭璞)이라 자칭하면서 “내 붓이 그대에게 가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제는 돌려줘야겠다.” 하므로, 강엄이 자기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 주었더니, 그 후로는 재주가 떨어져서 시를 지어도 미사여구가 전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梁書 卷十四》
♣ 채필토홍예[彩筆吐虹蜺]훌륭한 문장을 짓는 것을 비유한 말. 채색 붓이란, 양(梁) 나라 때 강엄(江淹)이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어느 날 꿈에 곽박(郭璞)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자기 붓을 돌려 달라고 하자, 강엄이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 사람에게 주었던바, 그 후로는 강엄에게 훌륭한 문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고, 무지개를 토한다는 것 또한 시문의 재주가 풍부함을 형용한 말이다. 《南史 江淹傳》
♣ 채혈각이도강[蔡血脚而途僵]송 나라 때 채원정(蔡元定)이 간신인 한탁주(韓侂冑) 등으로부터 위학(僞學)이란 배척을 받고 도주(道州)로 귀양가면서 짚신을 신은 채 3천여 리를 계속 가고 나니,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는 고사이다. 《宋史 卷四百三十三》
♣ 채호재고진[彩毫才告盡]양(梁) 나라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곽박(郭璞)으로부터, 맡겨 놓았던 붓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를 받고 품속을 더듬어 5색의 붓을 내준 뒤로는 뛰어난 글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재주가 다했다.” 하였다.
♣ 채호제구벽롱사[彩毫題句碧籠紗]당나라 왕파(王播)가 어릴 때 곤궁하여 양주(楊州) 혜소사(惠昭寺) 목란원(木蘭院)에서 거처할 때 그곳의 중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가 나중에 존귀한 신분으로 다시 그곳을 찾아가서 보니 지난날 그가 절의 벽에 써붙였던 시구를 푸른 비단으로 감싸놓았다 한다. 곧 미천할 때 지었던 글이 신분이 존귀해짐과 동시에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뜻한다.
♣ 채홍준사[採紅駿使]연산군 때 삼남의 미녀와 양마(良馬)를 뽑아 올리도록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 채화지[採華芝]당(唐) 나라 이상은(李商殷)의 동환(東還)이란 시에 “신선의 재능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해, 십 년 동안 길이 꿈속에서 영지를 캐었구나.” 하였는데, 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음을 뜻한다.
♣ 책객[冊客]벼슬아치들의 자제(子弟)나 친빈(親賓)
♣ 책궁시[責躬詩]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꾸짖는 시문이라는 뜻으로, 조식의 글 가운데 ‘상책궁응조시표(上責躬應詔詩表)’가 있다.
♣ 책기지심[責己之心]스스로 제 허물을 꾸짖는 마음.
♣ 책난[責難]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임금에게 꼭 하도록 권면하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는 것을 공(恭)이라 이르고, 선한 일을 진언하고 부정한 일을 막아버리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
♣ 책명[策名]신하된 자를 기록한 간책(簡策)에다 이름을 기입한다는 말로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하는데, 좌전(左傳) 희공(僖公) 2년 ‘책명(策名), 위질(委質)하고서 두 마음을 가지면 죄를 받는다.’하였는데 주(注)에 “옛사람들은 벼슬할 때에 죽간(竹簡)에다 자기의 이름을 써서 임금에게 바침으로써 신하의 절의를 다할 것을 밝혔다.” 하였다. 참고로 이능이 소무에게 답한 편지에, “勤宣令德 策名淸時”라 하였음.
♣ 책부[策府]고대에 제왕의 서책을 간직해 둔 곳인데, 전하여 한림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 책비[責備]책비는 훌륭한 사람에게 조그마한 잘못도 지적하여 완전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태종기찬(太宗紀贊)에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에게 책비한다.” 하였는데, 현자의 잘못을 두둔하지 않고 바로 쓰는 것을 춘추 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 책비[責備]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어진 사람에게 책비(責備)하였는데, 책비란 것은 구비(具備)하기를 책(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에 대하여는 여간한 허물을 용서하거나 비판하지 않지만, 어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조그만 허물이라도 비판하여 이런 어진 사람이 왜 이런 허물을 지었는가 하고 애석히 여기는 뜻으로 책망한다는 말이다
♣ 책색리[冊色吏]책을 관리하는 관리라는 말로, 경연(經筵)이 오랫동안 열리지 않고 있을 때,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옥당(玉堂) 관원을 조롱하는 말로 쓰였음.
♣ 책석[策石]진 시황(秦始皇)이 석교(石橋)를 놓아 바다를 건너서 해뜨는 곳을 보려 하였다. 이때 신인(神人)이 있어 돌을 몰아 바다로 내려보냈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으면 신인이 채찍질해 갔다고 한다.
♣ 책시[簀尸]책시(簀尸)는 시체를 대자리에 싼 것을 이름. 전국 시대 위(魏) 나라 범수(范睢)가 중대부(中大夫)수가(須賈)를 따라 제(薺) 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갔다가 제 양왕(齊襄王)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자, 이에 수가가 크게 노하여 본국에 돌아와서는, 범수가 위 나라의 기밀을 제 나라에 고해 주고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재상위제(魏齊)에게 참소하였다. 그리하여 위제가 범수를 잡아다가 매를 때려서 갈비뼈를 부러뜨리고는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대자리에 싸서 측간에 버렸는데, 이때 범수는 그곳 수자(守者)를 꾀어 그곳을 탈출하여 진(秦) 나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범수는 진 소왕(秦昭王)의 신임을 크게 얻어 재상이 되었는데, 소왕이 범수의 원수를 갚아주고자 하여 위 나라를 협박해서 위제의 머리를 잘라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위제는 자결하였고, 그의 머리는 끝내 진 나라에 바쳐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七十九》
♣ 책시범자[簀尸范子]범자는 전국 시대 위(魏) 나라 범수(范睢)를 말함. 범수가 위 나라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따라 제 나라에 사신갔을 때, 제 양왕(齊襄王)이 그의 구변(口辯)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그에게 금(金)과 우주(牛酒)를 내렸는데, 귀국 후 위 나라 정승 위제(魏齊)가 “범수가 위 나라의 기밀을 제 나라에 고해 주고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수가의 말을 믿고서 대노하여 그를 매질하여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이빨을 끊으므로, 범수가 거짓 죽은 체하자, 그는 범수를 대자리에 싸서 측간 안에 두었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이때 범수는 그곳을 지키는 자를 꾀어 결국 그곳을 탈출하여 진(秦) 나라로 망명해서 뒤에 진 나라의 정승이 되었다. 《史記 卷七十九》
♣ 책책[嘖嘖]시끄럽게 떠드는 모양, 언쟁하는 모양,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평판하는 모양, 새 우는 소리
♣ 책책[策策]오동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 책훈[策勳]공훈(功勳)을 기록하여 책(策)에 올리는 것
♣ 처[凄]차고 쓸쓸함.
♣ 처간[處干]고려 때의 소작민을 일컫던 말.
♣ 처당차연작[處堂嗟燕雀]집에 불이 나서 온통 타들어오는데 당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제비는 알지 못하고 어리석게 지저귄다 하여 불쌍하다는 것이니, 이것은 반역자가 곧 그 제비의 신세가 될 것이나 알지 못하고 여전이 뽐낸다는 뜻이다.
♣ 처량부복[凄涼賦鵩]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長沙)로 폄척된 뒤 복조(鵩鳥)가 집에 날아와 앉자, 불길한 조짐이라 여겨 이를 비관하여 복조부를 짓고 과연 그곳에서 죽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처비일조[萋斐日組]참소하는 소인(小人)이 남의 조그만 허물을 가지고 꾸며서 큰 죄를 만들거나, 분명하지 않은 일을 자꾸 부각시켜 사실로 만들어 해치는 것을 말한다. 《詩經 小雅 巷伯》
♣ 처사[處士]국화를 의인화(擬人化)하여 말한 것임. 《花史》
♣ 처성자옥[妻城子獄]아내의 성과 자식의 감옥에 갇혀 있다. 처자(妻子)가 있는 사람은 집안 일에 완전히 얽매여서 다른 일에 꼼짝도 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 처용[處容]신라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에 유람하고 개운포(開雲浦)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의복 차림으로 임금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고, 이어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달빛 아래 시가(市街)에서 춤추고 노래한 데서 온 말이다. 그는 마침내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 하였고, 그가 가무(歌舞)하던 곳을 월명항(月明巷)이라 이름했으며, 후세의 처용가(處容歌)ㆍ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一》
♣ 처음식영[處陰息影]장자(莊子) 어부에 “그늘에 처하여 그림자를 없애고[處陰息影] 고요하게 살면서 행적을 숨긴다.” 하였다.
♣ 처인[處仁]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마을의 인심이 인후(仁厚)한 것이 아름다우니, 그러한 마을을 가려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어짊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처제[妻齊]이 말은 백호통(白虎通) 가취 조(嫁娶條)에 보이는데, 아내는 남편과 신분이 동등하다는 뜻임.
♣ 처중[處仲]진(晉) 나라 조정에 반기(叛旗)를 들었다가 피살된 왕돈(王敦)의 자(字)이다. 그는 진 원제(晉元帝)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뒤에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晉書 卷九十八》
♣ 처처[悽悽]마음이 매우 구슬픈 모양, 굶어 병든 모양, 입은 은혜를 갚으려고 마음먹는 모양, 마음의 안정을 잃은 모양
♣ 처처[凄凄]신선한 바람, 차고 쓸쓸한 모양, 초목의 무성한 모양, 흐르는 모양,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모양
♣ 척[擲]내던지다.
♣ 척강조석망[陟岡朝夕望]형(兄)을 그리는 마음을 뜻함.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호(陟岵)에 “저 언덕에 올라서 형을 바라본다[陟彼岡兮 瞻望兄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척강좌우[陟降左右]주 문왕(周文王)이 죽은 뒤 그 영혼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상제(上帝)의 좌우에 있다는 말이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나온다.
♣ 척계광[戚繼光]명 나라 산동(山東) 봉래(蓬萊) 사람으로, 병법에 조예가 깊어 기효신서(紀效新書)ㆍ연병기실(練兵紀實) 등 저명한 병서를 저술하였으며, 절강(浙江)의 참장(參將)으로 있으면서 왜구(倭寇)를 무찌르는 데에 힘을 쏟아 변방이 태평하였다 한다.
♣ 척공사륙[척仜사륙]요사(遼史) 악지(樂志)에 의하면, 대악성(大樂聲)이 있어 각조(各調) 가운데 협음(協音)한 소리가 모두 열 가지인바, 즉 오(五)ㆍ범(凡)ㆍ공(工)ㆍ척(尺)ㆍ상(上)ㆍ일(一)ㆍ사(四)ㆍ육(六)ㆍ구(勾)ㆍ합(合)이라 하였으니, 아마 여기서 나온 말인 듯한데, 여기서 네 글자마다 인부(人部)를 붙인 것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 척교[蹠蹻]옛날의 큰 도적인 도척(盜蹠)과 장교(莊蹻)를 말한다.
♣ 척금인[擲金人]세설(世說) 덕행편(德行篇)에 “관녕(管寧)과 화흠(華歆)이 함께 후원(後園)에서 채전(菜田)의 풀을 매다가 땅에 금조각이 있는 것을 보고 관영은 못 본 듯이 호미질하여 돌 기와장이나 다름없이 여겼는데 화흠은 그 금을 쥐어보고서 내던졌으며, 또 일찍이 동석(同席)하여 글을 읽을 때 수레를 타고 문앞을 지나는 자가 있었는데 관녕은 여전히 글을 읽었고 화흠은 글 읽기를 폐하고 나가 구경하였다. 그러자 관녕은 자리를 쪼개어 갈라 앉으며 하는 말이 그대는 나의 벗이 아니다고 하였다.” 하였음.
♣ 척기[陟屺]시경(詩經) 위풍 척호(陟岵)에 “저 산에 올라 어머니를 생각한다.[陟彼屺兮 瞻望母兮]" 하였다.
♣ 척기[滌器]전한(前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집이 가난하여 아내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쇠코잠방이를 입고 시장에서 술을 팔며 그릇을 닦았다. 《漢書 司馬相如傳》
♣ 척기시[陟屺詩]척기시는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호(陟岵)의 시를 말하는데, 제2장(章)에 “저 기(屺)에 올라 어머니를 바라노라.” 하였다. 기(屺)는 곧 산(山)의 뜻이다.
♣ 척기첨[陟屺瞻]효자(孝子)가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를 사모한 데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고(陟岵)에 “저 기(屺)에 올라 어머니를 바라보네.” 하였다. 기(屺)는 초목이 무성한 산을 말한다.
♣ 척기회요[跖耆回夭]도척은 고대(古代)의 큰 도적의 이름. 일설에는 유하혜(柳下惠)의 아우라고도 한다. 안회(顔回)는 공자(孔子)의 제자 가운데 으뜸가는 현인으로서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 척등공장[擲騰空杖]당(唐) 도사(道士) 나공원(羅公遠)이 개원(開元) 연간 추석날 밤에 현종(玄宗)을 모시고 궁중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계수나무 지팡이를 공중에 던지니 큰 다리[橋]가 되는지라, 현종을 청하여 함께 올라 월궁(月宮)에 이르렀다 한다.
♣ 척령[鶺鴒]척령은 할미새인데, 걸어다닐 때에 항상 꽁지를 위아래로 흔들어 화급한 일을 고하는 것 같으므로, 이는 형세가 급난한 때를 당해서 서로 돕는 비유로 쓰인다. 《齊諧記ㆍ詩經 小雅 常棣》
♣ 척령비차명[脊令飛且鳴]시급히 구원해 주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위급한 처지에 빠져 있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라고 하였다.
♣ 척령사[鶺鴒辭]시경(詩經)에 칙령편(鶺鴒篇)이 있는데, 형제의 우애를 읊은 것이다.
♣ 척령시[鶺鴒詩]친형제처럼 지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鶺鴒在原 兄弟急難”이라고 하였다.
♣ 척령원[鶺鴒原]형제의 정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나니, 형제가 급난하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 하였다.
♣ 척령지원[鶺鴒之原]형제간의 우애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형제를 뜻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물새가 언덕에 있음에 형제가 위급함을 구원하는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이라 하였다.
♣ 척령최령[鶺鴒摧翎]형제가 죽었다는 뜻으로, 척령(鶺鴒)은 형제를 뜻하는바,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물새가 언덕에 있음에, 형제가 위급함을 구원하는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하였다.
♣ 척리[尺鯉]옛날에 어떤 나그네가 잉어를 사서 배를 갈라 보니 그 속에서 고향 편지가 나왔다고 한다.
♣ 척리도환[隻履徒還]달마를 중국 웅이산(熊耳山)에 장사하였는데, 위(魏)의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사자로 갔다 돌아오던 중 총령(葱嶺)에서 달마를 만났다. 달마는 손에 신 한짝만 들고 있었으므로 송운이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대사가 “나는 서역으로 가오.” 하였다. 이 말을 임금에게 상세히 전하여 임금의 명으로 달마의 묘를 파고 관(棺)을 열어보니 신이 한짝만 있었다 한다. 《傳燈錄》
♣ 척리훈가[戚里勳家]척리는 임금의 외척을 뜻하고 훈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집안을 말한다.
♣ 척문[尺文]이두(吏讀)로 ‘자문’ 또는 ‘잣문’이라 읽는데, 이 경우는 관부(官附)에서 백성이 바친 물건을 받고서 영수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 물건의 이름과 수량을 적어서 내어 주는 문서를 뜻한다.
♣ 척벽비보[尺璧非寶]“한 자 구슬이 귀하지 않고, 촌음이 중하다.”는 옛말이 있다.
♣ 척사[擲梭]척사는 베를 짤 때 북을 이쪽저쪽으로 던지는 것을 이른 말로 빠른 것을 뜻한다.
♣ 척사욕[擲梭辱]죽림 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晉) 나라 사곤(謝鯤)은 이웃집의 예쁜 여자를 꾀다가 던지는 북을 맞아 이 2개가 부러졌다. 《晉書 卷四十九 謝鯤傳》
♣ 척시[戚施]곱사등이를 말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척시는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다.” 하였다.
♣ 척안[隻眼]뛰어난 견식(見識)의 안목을 이름.
♣ 척안[斥鷃]척안은 사마표(司馬彪)의 주에, “척(斥)은 작은 늪[小澤]을 말하고 안(鷃)은 작은 새이다.” 했으니, 늪에서 노는 작은 새. 메추라기.
♣ 척안곤붕등유희[斥鷃鵾鵬等遊戱]척안은 아주 작은 새이고, 곤붕은 매우 큰 새이다. 이 세상에서 같이 살고 같이 즐긴다는 말이다.
♣ 척안사증선대붕[斥鷃伺曾羨大鵬]제 분수를 편히 여긴다는 뜻.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면서 남명(南溟)을 향하여 나는 것을 보고, 뱁새가 비웃기를 ‘나는 나무 사이를 날다가 지치면 내려앉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구만 리 남명으로 날아가는가.’했다.” 하였는데, 이에서 온 말이다.
♣ 척안일지[斥鷃一枝]대붕(大鵬)이 9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옮아감을 가지 사이로 팔짝팔짝 나는 조그만 새[斥鷃]가 웃으며 나는 한 가지[一枝]로도 족하다 하였다. 《莊子》
♣ 척안하증선대붕[斥鷃何曾羨大鵬]붕새는 9만 리를 솟아올라 북명(北冥)에서 남명(南冥)으로 훨훨 날아가는데, 메추리가 가지와 가지 사이로 팔짝팔짝 날며 하는 말, “저 붕새는 뭘 하러 9만 리씩 남쪽으로 가는고.” 하였다. 《莊子》
♣ 척연[尺椽]한 자쯤의 서까래란 뜻으로, 전하여 작은 집을 의미한다.
♣ 척오[尺五]한 자 다섯 치로 매우 가까운 것을 말하는데, 곧 왕의 친척이나 귀족을 가리킨다. 신씨삼진기(辛氏三秦記)에 “성 남쪽의 위(韋)ㆍ두(杜)는 하늘과 거리가 한 자 반이다.[城南韋杜 距天尺五]”하였음. 당(唐)시대에 위씨와 두씨가 대대로 망족(望族)이 되어, 위씨가 사는 곳은 위곡(韋曲)이요, 두씨가 사는 곳은 두곡(杜曲)이었음.
♣ 척오천[尺五天]명문 거족(名門巨族)을 뜻함. 당대(唐代)에 위씨(韋氏)와 두씨(杜氏)의 가문에서 대대로 고관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에 “도성 남쪽 위씨와 두씨, 하늘과의 거리가 불과 일 척 오 촌[城南韋杜 去天尺五]”이라는 말이 민간에 유행했다고 한다. 《辛氏三秦記》
♣ 척이[跅弛]척이는 예의를 좇지 않는 방종한 선비를 가리킨다.
♣ 척일[尺一]임금의 조서(詔書)를 뜻함. 옛날 조서를 쓸 적에 일척 일촌(一尺一寸)의 목판(木版)을 사용한 데서 온 말이다.
♣ 척일[隻日]홀수[奇數]의 날.
♣ 척전과신라[隻箭過新羅]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에 진정한 도의 체득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는 ‘동념즉괴(動念卽乖)’의 뜻과 같은 말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한 승려가 금강 일척전(金剛一隻箭)에 대해서 물으니, 조사(祖師)가 ‘벌써 신라를 지나갔다.[過新羅國去]’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소식(蘇軾)의 시에도 “나의 삶 역시 자연의 변화 따라 밤낮으로 물처럼 흘러가나니, 찰나(刹那)의 한 생각이 신라를 이미 지나간 것을 깨닫겠노라.[我生乘化日夜逝 坐覺一念逾新羅]”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7 百步洪》
♣ 척지금성[擲地金聲]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으니 글이 매우 공(工)하였다. 그가 벗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며 하는 말이, “자네 시험삼아 땅에 던져 보게. 금석 소리가 나리.” 하였다.
♣ 척지성[擲地聲]시문을 땅에 던지면 쇠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는 말로, 문장이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짓고는 친구인 범영기(范榮期)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이 글을 한 번 땅에 던져 보라. 그러면 쇠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날 것이다.” 하였는데, 범영기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한 번 읽어 본 뒤에는 찬탄하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卷56 孫綽列傳》
♣ 척지신성우설배[擲地新聲虞薛輩]진서(晉書) 손작전(孫綽傳)에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어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그대가 시험삼아 땅에 던져 보면 금석(金石)의 소리가 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좋은 문장을 뜻하는 말이고, 장열(張說)이 지은 위숙륜(魏叔▣)의 신도비(神道碑)에 “공이 초서와 예서를 잘 썼는데, 그 필법을 그의 아들 화(華)와 생질인 설직(薛稷)에게 전하였으니, 세상에서 ‘전에는 우세남(虞世南)과 저수량(褚遂良)이 있고 후에는 설직과 위숙륜이 있다’ 했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우설은 우세남과 설직을 말한다.
♣ 척척[慽慽]근심에 싸여 생각하고 있는 모양
♣ 척척[惕惕]몹시 두려워하는 모양, 염려하는 모양, 사랑하는 모양
♣ 척척[戚戚]서로 친밀한 모양,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마음이 동하는 모양,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양
♣ 척척[倜倜]얽매이지 않고 독립된 모양, 척연(倜然)한 모양
♣ 척촉[戚促]자신을 위하는 계책이 매우 급하고 협소함을 이름.
♣ 척총병[戚總兵]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다. 그는 군사를 잘 훈련시켰고, 전공이 많아서 벼슬이 복건 총독(福建總督)에 이르렀으므로, 총병이라 한 것이다. 저술로는 기효신서(紀效新書)ㆍ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이 있다. 《明史 二百十二》
♣ 척호[陟岵]아버지를 생각하는 데 쓰는 말이다. 시경(詩經) 위풍 척호(陟岵)에 “저 호에 올라 아버지를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 하였다.
♣ 척확신[尺蠖伸]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펴기 위함이란 뜻에서, 사람도 갖은 간난 신고를 참고 견디어 후일에 성공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척획동문료우혜[蹠獲同門了愚慧]옛날 큰 도둑이었던 도척(盜蹠)과 역사(力士)였던 맹획(孟獲)이 한 곳에 있으면 누가 어리석고 누가 슬기로운지 판이하게 나타난다.
♣ 천[倩]청하다. 부탁하다.
♣ 천가[天家]천가(天家)는 제왕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조정을 뜻한다.
♣ 천가수[天假手]하늘이 어느 죄 많은 나라를 패망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 손을 빌어서[假手] 한다는 옛말이 있다.
♣ 천개지열[天開地裂]한(漢) 나라 경방(京房)의 역점(易占) 가운데 “하늘이 뚫려도 양기는 아직 부족하고, 땅이 찢어져도 음기는 아직 남음이 있으니, 모두 병란이 일어나는 조짐이요, 아랫사람이 위를 해치는 상이다.[天開陽不足 地裂陰有餘 皆兵起下害上之象]”라는 말이 있고, 두보(杜甫)의 시에 “천지가 열리고 찢어진 장안의 거리, 겨울 가고 봄이 오는 낙양의 전각.[天開地裂長安陌 寒盡春生洛陽殿]”이라는 구절이 있다.
♣ 천객주[泉客珠]천객은 연객(淵客), 즉 교인(鮫人)을 말한다. 남해 바다 속에서 베를 짜면서 울 때마다 눈물 방울이 모두 진주로 변한다고 하는데, 세상에 나왔다가 주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한 그릇 가득 눈물을 쏟아 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文選 左思 吳都賦 注》
♣ 천거과[薦擧科]조광조(趙光祖)등의 건의에 따라 중외에서 천거된 120인중에서 예조가 분변하여 의정부에 신보해서 결정된 인원을 중종 14년(1519) 4월 13일에 근정전 뜰에서 임금이 친히 나아가 책시(策試)하여 김식(金湜) 등 28인을 뽑은 과거. 흔히 현량과(賢良科)라 하나 그 당시에는 현량과란 말이 없이 천거과라 일컬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후 조광조 등의 기묘사림을 폄하하는 무리들이 왕안석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 빗대어 천거과를 현량과로 불렀음.
♣ 천견고사진월행[天遣孤楂趁月行]사명(使命)을 받들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천하(天河)와 바다가 서로 통하는 곳이 있다.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부사(浮槎)가 왕래하는데, 어떤 이가 그 배를 타고 떠나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그 사람을 장건(張騫)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원숭이 울음 세 번 들으면 눈물이 주르르, 사명 받들고 헛되이 팔월의 배 따라가네.[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槎]”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7 秋興八首》
♣ 천경[天傾]공공씨(共工氏)와 전욱(顓頊)이 싸울 때 공공씨가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걷어차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며 서북쪽으로 기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 천경절[天慶節]천서(天瑞)가 첫 번째 내린다는 정월 3일.
♣ 천계[天雞]전설 속에 나오는 하늘에 사는 닭이다. 땅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으며, 그 꼭대기에 있는 큰 나무에 천계가 사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울고, 그 소리를 따라 온 천하의 닭들이 운다고 한다. 《述異記》
♣ 천계[天械]한유(韓愈) 이중기맹형부시(爾中寄孟刑部詩)에 “아름답도다 그대가 도(道)의 참뜻을 알아, 뛰어난 재주 하늘의 형틀을 사절했도다[美君知道腴逸步謝天械]"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 천계계해[天啓癸亥]천계(天啓)는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로, 계해년은 바로 인조(仁祖) 원년(1623)에 해당된다.
♣ 천고마비[天高馬肥]하늘은 높고 말은 살찜. 가을날의 맑고 풍성한 정경을 뜻함. 기후가 청량하고 만물이 살지는 가을의 쾌적과 풍요를 나타내는 말로, 가을 일컫는 대명사로 애용되는 표현. 그러나 원래는 중국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경계하는 말임.
♣ 천고사[千古事]영원히 불후(不朽)하게 될 문장의 사업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우제(偶題)’라는 시에 “문장은 천고토록 썩지 않을 일, 그 이해득실은 내 마음이 잘 알도다.[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8》
♣ 천고청불난[天高聽不難]“하늘은 높아도 낮은 것을 듣는다.”는 말이 있다.
♣ 천공[天工]자연의 힘, 또는 능력을 말함.
♣ 천공[天公]천공(天公)은 하늘을 의인화한 말로, 조물주를 뜻한다.
♣ 천공전각[天公剪刻]재단하고 조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곧 봄이 되면 조물주의 힘에 의해 초목의 잎이나 꽃이 마치 조각해 낸 것처럼 피어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천과[天戈]천과는 옛날에 임금을 하늘에 비견하기 때문에 그가 사용하는 무기(武器)를 천과라 한 것이다. 한첨(韓僉) 석고가(石鼓歌)에 “선왕이 분기하여 천과를 휘둘렀네[先王憤起 揮天戈].” 하였다.
♣ 천관[天官]주례(周禮) 주관(周官)에 의하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천관에 해당한다.
♣ 천관사[天官寺]천관(天官)은 김유신(金庾信)이 정을 주었던 창녀(娼女) 이름. 어머니의 훈계로 유신이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가 하루는 술이 취한 중에 말[馬]이 옛 길을 찾아 그 집에 들리게 되었다. 그가 말의 머리를 베고 돌아가므로 천관(天官)도 애원(哀怨)하여 ‘가시리’ 노래를 지었다. 천관사는 그녀의 집 자리에 선 절이며, 경주오릉(五陵) 동쪽에 있었다.
♣ 천광[天光]영묘한 광채.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사람의 마음이 태연하게 안정되면 천광이 나타나게 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천광영자보[天光永自葆]지덕(智德)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떠내도 다하지 않아서 그 소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을 ‘빛을 감추는 것[葆光]’이라고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천광운영[天光雲影]주자시(朱子詩)의 “반 이랑 모진 못에 거울 열렸으니 하늘과 구름 함께 배회하도다. 묻노니 저 물은 어찌 저렇게도 맑은가. 근원에 활발한 물 솟아나기 때문이리[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謂有源頭活水來]"에서 인용한 것임.
♣ 천교[天驕]천지교자(天之驕子)의 준말로 하늘이 강교(剛驕)하도록 내버려둔 자식이란 뜻에서 즉 흉노(匈奴)를 말한다. 특히 선우(單于)를 가리키기도 한다. 《漢書 匈奴傳上》
♣ 천교목[遷喬木]지위가 상승해서 높은 곳으로 옮겨 간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도다.[出自幽谷 遷于喬木]”하였다.
♣ 천교불폐고[天驕不吠高]천교는 하늘이 내려준 것처럼 강성하다는 말로 곧 흉노(匈奴)를 가리킨 것이다. 흉노가 백등(白登)에서 한 고조(漢高祖)를 7일 동안이나 포위하였으나, 고조가 진평(陳平)의 비계(祕計)를 써서 포위를 풀고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었다. 《漢書 匈奴傳》
♣ 천교쇄경핵[遷喬刷勁翮]높은 나무 운운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의 “出自幽谷 遷于喬木”이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신분 상승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시에 “司空出東夷 童稚刷勁翮”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16 八哀詩 1》
♣ 천교자[天驕子]힘이 강성하여 마치 하늘이 놓아먹이는 것 같은 자를 말한 것으로 북쪽의 호족(胡族)을 이른다. 《漢書 匈奴傳》
♣ 천구[天衢]걸릴 것 없는 공중이라는 뜻으로, 벼슬길이 훤히 트여 있음을 비유한다. 주역(周易) 대축 상구효(大畜 上九爻)에 “저 하늘 거리이니 형통하리도다.[何天之衢亨]" 했는데, 그 상(象)에 “저 하늘거리라는 말은 도(道)가 크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했다.
♣ 천구[天球]옛날 옹주(雍州)에서 공물(貢物)로 바쳤던 옥의 이름. 그 빛이 하늘색과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書經 顧命》
♣ 천구[天廏]임금의 마구간.
♣ 천구영독윤[天球暎櫝潤]훌륭한 천품과 자질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천구(天球)는 하늘색을 띤 보옥(寶玉) 이름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아름다운 옥을 궤 속에 넣어 감추어 두고만 계시겠습니까? 제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라는 대목이 나온다.
♣ 천군[天君]마음을 이름.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에, “天君泰然 百軆從令”이라고 보임.
♣ 천군[天軍]천군은 별 이름이다.
♣ 천군만마[千軍萬馬]천 명의 군사와 만 마리의 말. 즉 많은 수의 군사와 말
♣ 천궁[泉宮]천궁은 묘지의 별칭이다.
♣ 천균[千鈞]서른 근이 일균. 매우 무거운 것을 지칭.
♣ 천균[天囷]창름(倉廩) 따위를 맡았다는 별 이름이다. 《星經》
♣ 천귤[千橘]한(漢) 나라 때 이형(李衡)은 벼슬살이가 청렴했는데, 만년에 시골에 천 그루의 감귤나무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 아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너는 내가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시골에 일천 두(一千頭)의 목노(木奴)를 길러 두었으니 너희들 의식 걱정은 없을 것이며, 매년 비단 한 필씩이 올라올 테니 또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三國志 吳志 孫休傳》
♣ 천극중중간백전[栫棘重重看白戰]가시 울타리는 곧 과거장(科擧場)에 둘러친 것이고, 백전(白戰)은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으로 즉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 천근[天根]천근(天根)ㆍ육기(六氣)ㆍ삼전(三田)은 모두 수련(修煉)의 특수한 용어이다.
♣ 천근[天根]천근은 저수(氐宿)의 별칭임. 이아(爾雅)에 “천근(天根)은 저(氐)별이다.” 하였고, 그 주에 “각(角) 항(亢)이 아래로 저(氐)에 매여 마치 나무의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 하였음.
♣ 천근월굴[天根月窟]천근(天根)은 주역(周易)의 복괘(復卦)를 가리키고 월굴(月窟)은 구괘(姤卦)를 가리킨다. 동지(冬至)에는 한 양(陽)이 처음 아래에서 생기는데 이것을 복괘라 하며, 하지(夏至)에는 한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기는데 이것을 구괘라 하는바, 동지는 자월(子月)이고, 하지는 오월(午月)이므로 남쪽이다. 소옹(邵雍)의 관물시(觀物詩)의, “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予不爲貧 須探月窟方知物 未躡天根豈識人 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見天根 天根月窟閒來▣ 三十六宮都是春”이라고 한 데 보임. 주자는 강절선생화상찬(康節先生畵像贊)에서, “手探月窟 足躡天根”이라 했음.
♣ 천금[千金]옛날에 시집가지 않은 남의 집안 딸을 존칭하는 말로 천금소저(千金小姐)라고도 한다.
♣ 천금구강로[千金購降虜]한신이 한(漢)의 대장이 되어 조(趙)나라를 칠 때에 조(趙)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대장 진여(陳餘)에게 한신을 파(破)할 기이한 계책을 말하니 진여가 듣지 않았다. 한신이 간첩(間諜)을 시켜 정탐하여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음을 알고는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부수었다.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광무군을 생금(生擒)하여 오는 자가 있으면 천금(千金)을 주겠다.” 하여 광무군을 찾아서는 그에게 절하고 계책을 물었다.
♣ 천금구광무군[千金購廣武君]한신은 조 나라를 탈취한 다음, 진여에게 지구전을 주장하다가 받아지지 않은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의 뛰어난 지혜를 인정하여, 만일 광무군을 생포해 오는 자가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광무군을 데려다가 그의 꾀를 써서 연 나라와 제(齊) 나라를 쉽게 점령하였다. 《漢書 韓信傳》
♣ 천금라묵[千金螺墨]고금명화기(古今名畫記)에 “이성(李成)이 그림을 그릴 때 먹[墨]을 금(金)처럼 아꼈다.” 하였다.
♣ 천금방[千金方]천금요방(千金要方)의 준말로 의서의 이름인데, 이는 당(唐) 나라 때 도사인 손사막(孫思邈)이 찬한 것이다.
♣ 천금상여부[千金相如賦]한 무제(漢武帝) 때 총애를 잃은 진 황후(陳皇后)가 황금 백 근(斤)을 가지고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글을 지어 주도록 간청하여 다시금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천금매부(千金買賦)’의 이야기가 상여의 장문부(長門賦) 서문에 실려 있다.
♣ 천금요방[千金要方]의서의 이름인데, 이는 당(唐) 나라 때 도사인 손사막(孫思邈)이 찬한 것이다.
♣ 천금척[千金擲]"글을 땅에 던지면 금석 같은 소리가 난다.[擲地作金石聲]"는 뜻으로 훌륭한 글을 말한다.
♣ 천금하필하감대[千金何必河監貸]장자(莊子)가 하감후(河監侯)에게 양식을 꾸어 주기를 청하니, 하감후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읍(邑)의 금(金)을 얻어서 자네에게 꾸어 주리라.” 하였다.
♣ 천금학도룡[千金學屠龍]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서 용을 잡는 기술을 배우느라 천금이나 되는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였는데, 3년 만에 그 기술을 완전히 터득했으나 그것을 써먹을 길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 천금호[千金壺]배를 타고 가다가 중류(中流)에 파선이 되면 뒤웅박[壺] 하나에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다. 장자(莊子)
♣ 천기[千騎]고악부(古樂府)인 맥상상(陌上桑)에, 나부(羅敷)라는 미녀가 한 성읍(城邑)의 어른이 된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동쪽으로 떠나는 일천 기마병, 우리 남편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네.[東方千餘騎 夫婿居上頭]”라고 노래한 가사가 실려 있는데, 이로부터 천기(千騎)를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의 별칭으로 쓰게 되었다.
♣ 천기[天機]만물 속에 내재(內在)한 하늘의 기틀, 즉 자연의 이법(理法)을 뜻한다.
♣ 천기절[天祺節]북송(北宋)의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 4월 1일에 하늘에서 천서(天瑞)가 두 번째로 내려온 상서(祥瑞)가 있다 하여 국경일로 지정된 날.
♣ 천난규관측단예[天難闚筦測端倪]즉 큰 것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이다. 반고(班固) 유통부(幽通賦)에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旣傾蠡而酌海 遂側管而窺天]" 라고 하였다.
♣ 천남[天南]서울의 남쪽 지방을 가리킨다.
♣ 천낭[天狼]옛날에 침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별 이름이다.
♣ 천낭성[天狼星]옛날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별이 나타나 요기(妖氣)를 부린다고 믿었다.
♣ 천녀[天女]직녀성을 이름.
♣ 천녀목성[天女目成]천녀는 곧 신녀(神女)인데, 초사(楚辭) 구가(九歌) 대사명(大司命)에 “당에 가득한 미인들이여 갑자기 유독 나와 뜻을 통하도다[滿堂兮美人 忽獨與余兮目成]” 한 데서 온 말이다.
♣ 천년우주[千年遇主]천 년 만에 한 번이나 만날 수 있는 성군(聖君).
♣ 천년일청[千年一淸]황하(黃河)같은 탁류(濁流)가 맑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을 바라는 것.
♣ 천년주[千年柱]한(漢) 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죽은 뒤에 학(鶴)으로 변해서 요동 땅 고향에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내려 앉았는데, 어떤 소년이 활을 쏘려고 하자,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기를 “집 떠난 지 천 년만에 돌아왔는데 성곽은 의구하나 사람은 다르구나.” 하고 떠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搜神後記》
♣ 천노[千奴]양양(襄陽) 이형(李衡)이 가족 몰래 무릉(武陵) 용양주(龍陽洲)에 감자(柑子) 천(千)나무를 심어 두었다가 죽을 때에 아들에게 말하기를, “용양주에 천두(千頭) 목노(木奴)가 있으니 해마다 비단 수천 필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 천노[千奴]천 그루의 귤나무. 이형(李衡)이 귤나무 1천 주를 심고서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 목노(木奴) 1천 두(頭)가 있으니, 네가 의식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襄陽記》
♣ 천노대장견수감[千奴待長絹輸柑]한(漢) 나라 때 이형(李衡)은 벼슬살이가 청렴했는데, 만년에 시골에 천 그루의 감귤나무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 아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너는 내가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시골에 일천 두(一千頭)의 목노(木奴)를 길러 두었으니 너희들 의식 걱정은 없을 것이며, 매년 비단 한 필씩이 올라올 테니 또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三國志 吳志 孫休傳》
♣ 천단[天壇]도교(道敎)에서 황제(黃帝)가 하늘에 제사했다는, 왕옥산(王屋山)의 절정을 이르는 말이다.
♣ 천단[天壇]하늘에 제사지내는 단(壇). 북경(北京)의 정양문(正陽門) 밖 남교(南郊)에 있다.
♣ 천단조로[天壇阻路]위의방(韋義方)의 처형인 장노(張老)가 의방의 포전(圃田)에 물을 주니 친척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장노가 아내와 함께 천단산(天壇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위의방이 찾아가 보니 참으로 신선의 마을이었다. 그 뒤에 다시 찾아갔으나 첩첩 산과 겹겹 물이 가로막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 천대[泉臺]천대는 땅속의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 천대[天台]천대는 천대(天臺)와 같으며 신선이 사는 곳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한 나라 때에 유신원(劉晨院)이 처음으로 천대산에 들어가 신선을 만났다는 말이 있다.
♣ 천도[天都]봉우리 이름인데, 중국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 황산(黃山)의 최고봉임.
♣ 천도[天弢]하늘 주머니란 말로, 곧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하늘 주머니에서 노는 것과 같다고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莊子 知北遊》
♣ 천도무지[天道無知]진(晋)나라 등백도(鄧伯道)가 난리를 만나, 자기의 어린 아들과 부모 없는 어린 조카를 데리고 피란을 가다가, 일이 급하여 두 아이를 함께 보전할 수 없게 되자 아내와 의논하고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더니, 후일에 그는 마침내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천도(天道)가 알지 못하여 등백도가 아들을 못 두었다.” 하였다.
♣ 천도시비[天道是非]세상의 불공정을 한탄하고 하늘의 정당성을 의심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천도휴영이익겸[天道虧盈而益謙]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천도는 가득 차면 허물어뜨리고 겸손하면 복을 주며, 지도는 위에 가득 차면 떨어뜨리고 아래에 겸허하면 계속 흐르게 하며, 귀신은 가득 차면 재앙을 내려 해치고 겸손하면 복을 준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라는 말이 나온다.
♣ 천독[薦牘]천독은 추천서를 말한다.
♣ 천동[天童]진(晉) 나라 때에 중 의흥(義興)이 산간에 집을 짓고 사는데, 한 동자(童子)가 날마다 섶과 물을 져다 주더니 뒤에 동자가 하직하고 가만히 말하되, “나는 태백성(太白星)입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후세에 그 터에 절을 지어 천동사(天童寺)라 이름하였다.
♣ 천두비시요신비[千頭非是要身肥]삼국 시대 때 이형(李衡)이 관직 생활을 청렴하게 하였는데, 그가 가산을 일구고자 하면 매번 그의 부인이 반대하였으므로 몰래 종을 보내어 무릉(武陵)의 물가에다가 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이형이 죽을 때에 임해서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무릉에 천 그루의 귤나무가 있으니 먹고 살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그 귤나무가 자라 무릉에서 매년 비단 수천 필씩을 바쳐 왔으므로 집안이 부유해졌다. 《三國志 吳書 卷48 孫休傳》
♣ 천등[千燈]천의 등불이 이어짐은 전도(傳道)를 말한다.
♣ 천랑[天狼]별 이름으로 침략을 주로 하는 주신(主神)이라 한다. 이것을 쏘는 장시(長矢)가 곧 햇살을 상징한다. 탐잔(貪殘)한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 천랑[天狼]천랑성(天狼星)은 별 이름인데, 그 이름이 낭(狼)이라는 글자가 들었으므로 예전부터 천랑(하늘이리)를 쏜다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악한 짐승에 비유한 것이다.
♣ 천려일득[千慮一得]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에 하나를 얻음. 지혜로운 사람의 생각이 면밀할지라도 실수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의견이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음.
♣ 천려일실[千慮一失]여러 번 생각하여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한 일에도 때로는 실수가 있음.
♣ 천령[川寧]여주(驪州)의 속현(屬縣)이다.
♣ 천령[天嶺]함양(咸陽)의 고호임.
♣ 천록[天祿]천록은 술을 가리킨다.
♣ 천록[天祿]천록은 한(漢) 나라 때 장서하던 천록각(天祿閣)을 말한다.
♣ 천록각[天祿閣]천록각은 한(漢) 나라 때 비서(祕書)를 소장했던 전각 이름인데, 일찍이 유향(劉向)과 양웅(楊雄) 등이 여기에서 서적을 수교(讐校)했었다.
♣ 천록조청려[天祿照靑藜]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한번은 천록각에서 교서(校書)를 하다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밤에 한 노인(老人)이 청려장을 가지고 들어와 캄캄한 방에 홀로 앉아 글을 읽는 유향을 향하여 그 청려장 끝을 불어서 불이 환하게 켜지자, 그것을 유향에게 비춰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천록청려[天祿靑藜]한 성제(漢成帝) 말년에 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에서 밤늦도록 교정을 보고 있을 때, 태일(太一)의 정(精)이라고 자처하는 황의노인(黃衣老人)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켜서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는, 홍범오행(洪範五行) 등의 글을 전수해 준 뒤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拾遺記 卷6》
♣ 천뢰[天籟]대자연의 음향(音響)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첫머리에, 자신의 집착을 떨쳐 버린[喪我]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안에 기대어 앉아 하늘 피리 소리[天籟]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인뢰(人籟)는 퉁소 같은 것이 그것이요 지뢰(地籟)는 바람이 나오는 땅의 모든 구멍이 그것이요 천뢰(天籟)는 모든 소리를 각각 나도록 만드는 자연(自然)이라 하였다.
♣ 천뢰[天籟]천뢰는 자연의 소리이고, 만규(萬竅)는 지뢰(地籟) 즉 땅 위에 있는 물건의 소리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네가 지뢰는 들었으나 천뢰는 듣지 못했다.[女聞地籟未聞天籟矣]" 하였다.
♣ 천룡일지[天龍一指]천룡일지선(天龍一指禪)을 말함. 전등록(傳燈錄) 금화구지전(金華俱胝傳)에 “어느 중이 천룡을 찾아가니 천룡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법을 보여주므로 중은 크게 깨쳤다. 그는 죽으 서 ‘나는 천룡의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어 일생 동안 다 못 먹고 간다.’ 했다.” 하였음.
♣ 천룡일지선[天龍一指禪]전등록(傳燈錄) 금화구지전(金華俱胝傳)에 “어느 중이 천룡을 찾아가니 천룡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법을 보여주므로 중은 크게 깨쳤다. 그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천룡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어서 일생을 못다 먹고 간다.’ 하였다.” 하였음.
♣ 천룡회[天龍會]불교에서 제천(諸天)과 용, 귀신을 나누어 팔부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늘과 용이 맨 먼저 있으므로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 하였다. 《飜譯名義集》
♣ 천루간화[濺淚看花]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에 “시사(時事)에 느껴 꽃을 봐도 눈물을 흩뿌리고, 이별의 한에 새소리 역시 마음을 깜짝 놀래키네. 봉홧불은 삼월까지 잇따라 타오르는데, 집안 소식 얻어 보기 만금처럼 귀하구나.[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 천리[千里]천리는 화원(畫員) 김양기(金良驥)의 자인데 호는 긍원(肯園)으로, 단원(檀園) 홍도(弘道)의 아들임.
♣ 천리[天吏]하늘의 명을 받들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으로, 황제를 가리킨다.
♣ 천리구[千里駒]천리마, 준마. 연소(年少)한 재사(才士)를 비유한 말이다.
♣ 천리보불식[天理報不食]덕망이 있는 자가 많은 은덕을 베풀고 미처 그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반드시 그 자손이 보답을 받는다는 말.
♣ 천리안[千里眼]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직감적으로 알아맞히는 능력을 뜻하는 고사성어.
♣ 천리오주[千里吳洲]이백(李白)의 강동으로 가는 장 사인을 보내며[送張舍人之江東]란 시에 “오주(吳洲)에서 달을 보시거든 천리 밖의 나를 생각해 주시게.” 하였다.
♣ 천리족[千里足]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駿馬)를 말하는데 전(轉)하여 뛰어난 재질을 칭한다.
♣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行始於足下]작은 것을 쌓아 큰 것을 이룸의 비유.
♣ 천마[天魔]불가어(佛家語). 욕계(欲界) 제6천(天)의 파순(波旬)을 위주한 16 마군(魔軍)들.
♣ 천마[天馬]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의하면, 원정(元鼎) 4년 가을에 악와수(渥洼水)에서 나온 명마(名馬)를 천마(天馬)라고 했다 하기도 하고, 또는 서쪽 끝[西極]에 위치한 대완국(大宛國)에서 한혈(汗血)이라는 명마를 얻어 이를 천마라고 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 천마구[天馬駒]대완국(大宛國)에서 생산되는 명마(名馬)로 준걸을 의미한다. 옛날 대완국의 고산(高山)에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잡을 수가 없자, 다섯 가지 털 색깔의 어미 말을 가지고 유인하여 교미토록 하여 망아지를 얻었다 한다. 그런데 그 망아지가 피 같은 땀을 흘리는 명마라서 사람들이 천마의 새끼[天馬子]라고 불렀다 한다. 《史記 大宛傳》
♣ 천막[天幕]유령(劉伶)이 술에 취하여 방안에서 발가벗고 있으니, 친구가 보고 책하였다. 유령은 답하기를, “나는 하늘을 막(幕)으로 삼고, 가옥(家屋)으로 옷을 삼는다. 자네는 왜 남의 의복 속에 들어와서 잔소리를 하는가.” 하였다.
♣ 천망[天網]넓고 넓어 성긴 듯 보이면서도 결국은 선악ㆍ우열을 빈틈없이 가려내어 심판한다는 뜻의 하늘 그물이다. 《道德經 73章》
♣ 천망[天網]하늘의 그물로, 제왕(帝王)의 통치력을 뜻한다.
♣ 천망불루[天網不漏]노자(老子) 73장에 “하늘의 큰 그물이 넓고 넓어 성긴 듯하지만 하나도 빠져 나가게 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漏]”는 말이 나온다.
♣ 천망일목소[天網一目疏]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73장에 “하늘의 그물 망이 넓고 넓어 성긴 것 같이 보이지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는 말이 있다.
♣ 천망자속망[天亡自速亡]항우(項羽)가 한 고조(漢高祖)와 해하(垓下)에서 싸울 적에 군사들이 모두 고향 생각을 하여 초 나라 노래를 부르고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항우는 패하여 오강(烏江)에 이르러 “망한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는 아니다.” 하고는 자살하였다.
♣ 천망회[天網恢]“누가 그물이 넓다 일렀는가, 늘그막에 몸이 되려 누를 입었구나[孰云網恢 將老身反累].” 여기서는 이백이 귀양살이중에서도 취해 놀 수 있었다는 말이다.
♣ 천맥[阡陌]밭이랑
♣ 천명[天明]날이 밝다.
♣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하늘이 하늘의 본성(天道)을 명(命)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을 본성(本性)이라고 한다.
♣ 천목집[天目集]천목집은 천목 산인(天目山人) 서중행(徐中行)의 문집명이다. 명(明) 나라의 문인으로 후칠자(後七子)의 일원들이다.
♣ 천묘죽[千畝竹]위수(渭水)는 대나무가 잘 자라기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의 대나무밭 천 이랑을 소유한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같다고 한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 천무이일[天無二日]나라에는 오직 한 임금이 있을 뿐이다.
♣ 천문[天文]상제가 사는 자미궁문.
♣ 천문[天門]천상(天上)의 문. 즉 천제(天帝)의 거소인 자미궁문(紫微宮門)을 이름. 자미원(紫微垣).
♣ 천문[天門]천제(天帝)가 살고 있는 문으로 곧 제왕(帝王)의 문에 대한 존칭.
♣ 천문[天問]초사(楚辭)의 편명.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쫓겨난 뒤 근심 걱정 속에 산택(山澤)을 방황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며 우주(宇宙)의 모든 사실에 관해 의문(疑問)을 제기하여 하늘에 묻는 형식으로 지은 글이다. 《楚辭 卷三 天問》
♣ 천문만호[千門萬戶]한 무제(漢武帝) 때 백양대(柏梁臺)가 불에 타자 다시 대규모의 건장궁(建章宮)을 축조했는데, 그 설계 규모가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고 한다. 《漢書 郊祀志》
♣ 천문만호일시개[千門萬戶一時開]새벽이 되면 승지(承旨)가 열쇠를 받아 가지고 나와서 궁궐문을 연다.
♣ 천미[川媚]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돌이 옥(玉)을 감추므로 산(山)이 빛나고 물이 주(珠)를 품으므로 내[川]가 곱다.” 하였다.
♣ 천박[天璞]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옥덩이.
♣ 천방[天放]자유방임(自由放任), 즉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유자재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마제(馬蹄)에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쪽에 치우친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천방이라 한다.[一而不黨 命曰天放]”라고 하였다.
♣ 천방[千房]천방은 수많은 석류(石榴) 알을 가리킨 것으로,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석류를 두고 지은 한거부(閒居賦)에 “수많은 석류 알이 한 꼭지에 매달려 열 개가 모두 똑같구나.[千房同蔕 十子如一]"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천방지축[天方地軸]천방(天方)은 하늘의 한 구석을 가리키는 말이고 지축(地軸)은 지구가 자전하는 중심선을 가리키는 말. 하늘 한 구석으로 갔다 땅 속으로 갔다 하며 갈팡질팡하다는 뜻으로 당황해서 허둥지둥 날뛰는 모양을 가리킴. 못난 사람이 주책없이 덤벙거림.
♣ 천벽분등[穿壁分燈]한(漢) 나라 때 광형(匡衡)이 가난하여 촛불을 켤 수가 없었으므로, 벽을 뚫고 이웃집의 촛불빛을 끌어다가 글을 읽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천보[天保]시경(詩經)의 편이름인데, 신하가 임금을 축수(祝壽)하는 내용이다.
♣ 천보[天寶]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로 즉 잘 다스려지던 시대를 뜻한다.
♣ 천보시[天保詩]시경(詩經) 천보편(天保篇)이 있는데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 시다.
♣ 천보영관[天寶伶官]천보는 당 현종(唐玄宗) 연호이고, 영관(伶官)은 악관(樂官)인데, 현자로서 뜻을 펴지 못하여 미직(微職)에 종사하고 있었음.
♣ 천보영관[天寶伶官]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이고, 영관은 악관(樂官)을 이른 말로, 즉 당 현종 천보 연간의 극성한 풍류를 이른 말이다.
♣ 천보일[天寶日]천보(天寶)는 당 현종(唐玄宗) 후기의 연호로, 성대한 시대를 표현할 때 곧잘 쓰는 말이나, 여기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 등으로 혼란했던 때를 말한다.
♣ 천복뢰[薦福雷]천복비(薦福碑)는 중국 요주(饒州)에 있는 비로, 당(唐)의 이북(李北)이 글을 짓고 구양 순(歐陽詢)이 글씨를 썼다. 송(宋)의 범희문(范希文)이 요주의 태수로 있을 때 한 선비가 찾아와서 “평생에 한번도 배불러 본 적이 없었으니, 세상에 나처럼 춥고 배고픈 자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 당시 천복비문(薦福碑文) 묵본(墨本)의 값이 천금이었다. 희문이 생각하기를, 천복비문 천 장을 탁본하여 이 사람에게 주어 서울에 가서 팔아 가난을 면케 하리라 하고 종이와 먹을 다 준비해 놓았더니 그날 밤에 벼락이 천복비를 쳐부숴 버렸다. 이는 운명이 기박한 사람은 아무리 구제하려 해도 안 된다는 뜻이다.
♣ 천봉[千峯]고려 때의 고승으로, 법호가 천봉인 만우(卍雨)를 가리킨다.
♣ 천부[天府]산천(山川)이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要塞)가 된 곳을 말한다.
♣ 천부[天府]산천과 물산이 좋은 곳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익주(益州)는 험색하고 옥야천리(沃野千里)가 열렸으니 천부의 나라이다.” 한 말이 있다.
♣ 천부[天府]조정의 부장(府藏)을 이름. 주례(周禮) 주(注)에 “천(天)을 말한 것은 이곳의 소장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천물(天物)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였음.
♣ 천부[天府]주관(周官)의 명칭인데 춘관(春官) 소속으로 조묘(祖廟)의 수장(收藏)을 관장하였으며 모든 호적부(戶籍簿)와 방국(邦國)의 맹서(孟書)를 맡아 보관하였다.
♣ 천부농단경분리[賤夫壟斷競分釐]천한 사람이 높은 언덕에 올라가 저자[市]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시장의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이다. 《孟子 公孫丑下》
♣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아주 부당함.
♣ 천불란[天拂亂]천불란은 맹자(孟子) 고자편에, “하늘이 장차 큰 소임을 이 사람에게 내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 근골(筋骨)을 피로하게 하고 그 하는 바를 불란(拂亂)한다.” 하였음.
♣ 천불명[千佛名]불경(佛經)에 천불명경(千佛名經)이 있는데 천불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장탁(張倬)이 자주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등과기(登科記)를 머리 위에 이면서, “이것이 천불명경이다.” 하였다.
♣ 천붕지탁[天崩地拆]천자(天子)가 죽는 것을 말한다.
♣ 천비[天妃]해신(海神)의 이름이다. 수신(水神)은 음(陰)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通雅》
♣ 천사[千駟]네 필의 말이 끄는 천 대의 수레이다. 흔히 천사만종(千駟萬鍾)이라 병칭되며 극도의 부귀를 누리는 자에 대한 형용사로 쓰인다.
♣ 천사추[賤士醜]천한 선비는 추하다.
♣ 천산[天山]천산은 기련산(祁連山)으로, 감숙성(甘肅省) 청해(靑海)에 있는 산이다. 당 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이곳에서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오자 화살 3대를 쏘아서 3명을 죽이니,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모두 항복하였다. 《新唐書 卷111 薛仁貴列傳》
♣ 천산괘궁[天山掛弓]변방을 평정하고 큰 공을 세워 포부를 펼치는 때를 말한다. 당(唐) 나라 설인귀(薛仁貴)가 천산(天山)에서 돌궐(突厥)을 공격할 때, 세 발의 화살을 발사하여 세 사람을 잇따라 거꾸러뜨림으로써 무난히 평정을 하게 되었다는 ‘궁괘천산(弓掛天山)’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11 薛仁貴傳》
♣ 천상[天喪]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앤다는 뜻. 논어(論語) 자한(子罕)의 “하늘이 이 사문을 없애 버린다면[天之將喪斯文也]"에서 나온 말임.
♣ 천상린[天上麟]당(唐) 나라 때 두보(杜甫)가 서씨 집의 두 아들을 칭송한 노래[徐卿二子歌]에 “서경의 두 아들이 뛰어남을 그대는 못 보았나 …… 모두가 바로 천상의 기린아란다[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 竝是天上麒麟兒]”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十》
♣ 천상방허석[天上方虛席]여기서 천상은 명 나라 조정을 뜻하며, 자리를 비워 두었다는 것은 천자가 예(禮)를 갖추어 기다리고 있음을 뜻한다.
♣ 천상석린아[天上石麟兒]양(梁) 나라 때 서릉(徐陵)이 두어 살이 되었을 적에 어른을 따라서 보지상인(寶誌上人)을 가 뵙자, 보지상인이 서릉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천상(天上)의 석기린(石麒麟)이로다.” 한 데서 온 말로, 대단히 총명한 아이를 비유한 것이다.
♣ 천상여[天喪予]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는 뜻의 고사성어.
♣ 천상자기성[天上自騎星]훌륭한 사람은 죽어도 영혼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함. 장자(莊子) 大宗師 에 “부열(傅說)은 동유(東維)를 타고 기미(箕尾)에 올라 열성(列星)과 견준다.” 하였음.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천지 사이에 나보다 높은 것이 없음.
♣ 천생배필[天生配匹]하늘이 맺어 준 배필(부부)
♣ 천생연분[天生緣分]하늘이 맺어 준 깊은 연분이란 뜻. 천정연분(天定緣分)
♣ 천석고황[泉石膏肓]샘과 돌이 고황(膏肓)에 들었다. 자연을 즐기는 버릇이 불치의 병(病)처럼 되었다는 뜻으로, 그윽한 산수(山水)의 자연을 몹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 천섬[薦剡]추천서를 말한다. 중국 절강(浙江) 섬계(剡溪)의 물이 종이 만드는 데에 가장 좋기 때문에 섬(剡)이 종이의 대칭으로 흔히 쓰인다.
♣ 천성[泉城]신라 문무왕(文武王) 15년에 당(唐) 나라 설인귀(薛仁貴)가 천성(泉城)을 공격해 왔는데, 이 때 장군 문훈(文訓)이 맞아 싸워 적군 1천 4백 명의 수급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탈취했으며 인귀가 패배해 도망가자 전마(戰馬)도 1천 필이나 얻었다. 그리고 또 이근행(李謹行)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쳐부수고 전마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병장기(兵仗器)도 그만큼 얻었다.
♣ 천세학귀삼교월[千歲鶴歸三嶠月]신선이 되어 갔다는 말이다.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술(神仙術)을 익혀 학(鶴)이 되어서 천 년 후에 고향에 왔다 간 고사에서 인용된 말.
♣ 천소[天笑]이백(李白)의 시에, “옥녀(玉女)가 투호(投壺)하니 천제(天帝)가 웃는다.”는 말이 있다.
♣ 천손[天孫]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 고주몽(高朱蒙)이 자신을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생(外甥)이라 칭한 데서 온 말로, 동명왕을 가리킨다.
♣ 천손[天孫]베 짜는 일을 맡았다는 직녀성(織女星)의 별칭이다.
♣ 천수[天壽]북경(北京)에 있는 산 이름으로, 명(明) 나라 황제 13인의 능침(陵寢)이 여기에 있다.
♣ 천수[天數]주역으로 점칠 때 왼손에 쥔 서죽의 수
♣ 천수조방[天隨釣舫]천수는 당(唐) 나라 시인 육귀몽(陸龜蒙)의 별호인 천수자(天隨子)의 준말인데, 그는 배 안에 다기(茶器)와 필상(筆床)과 낚시 도구 등을 싣고서 항상 강호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 천시[天市]국가의 취시 교역(聚市交易) 등의 일을 관장한다고 하는 성좌(星座)의 이름.
♣ 천시[遷市]옛날에는 날이 가물면 시장(市場)을 이전(移轉)하여 비를 비는 풍습이 있었다.
♣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 천식[天式]하늘의 형상
♣ 천신[千薪]천신은 옛날 장작더미 위로 천 개의 새로운 장작이 쌓였다는 적천신(積千薪)의 준말이다.
♣ 천신[天紳]천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띠로, 폭포를 말한다. 한유의 ‘송혜사시(送慧師詩)’에, “이때 비 처음 개어 폭포가 하늘에서 띠를 드리웠네.[是時雨初霽 懸瀑垂天紳]”하였다.
♣ 천신만고[千辛萬苦]온갖 고생. 무진 애를 씀.
♣ 천신저[千薪底]승진도 하지 못한 채 미관말직으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급암(汲黯)이 자신의 후배들보다 관직이 자꾸만 뒤쳐지자, “마치 섶나무를 쌓듯 뒤에 온 자들이 계속 위로 올라간다.[如積薪耳 後來者居上]”고 무제(武帝)에게 불평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 천심선허두견지[天心先許杜鵑知]송 태조가 병이 위중할 때에 태종이 밤에 들어갔는데, 태조의 죽음에 관하여 의심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자 그 뒤에 태종이 태조의 아들을 죽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견새를 인용하였다. 전설(傳說)에, “옛적 촉(蜀) 나라 임금이 그의 신하 별령(鱉靈)에게 나라를 양도하여 주고 자기는 고국을 떠나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슬피 운다.” 하였다.
♣ 천아[天鵝]옛날 운남(雲南)의 토관(土官)인 면씨(緬氏)가 사신을 파견하여 당(唐) 나라 조정에 천아(天鵝)를 바치게 하였는데, 면양호(沔陽湖)를 건너는 도중에 천아가 날아가 버리자, 깃털 하나만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사람의 뜻이 가장 중하고 예는 그 다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천 리 길을 와서 터럭 하나를 바치게 되었다.[禮輕人意重 千里送鵝毛]”고 했다는 고사가 노사(路史)에 실려 있다.
♣ 천악[天樂]불교에서 말하는 천인(天人)들의 음악. 전하여 수승(殊勝)한 음악을 말한다.
♣ 천악[薦鶚]현인(賢人)을 추천함을 비유하는 말. 후한(後漢) 공융(孔融)이 명사 미형을 조정에 천거하는 표[薦禰衡表]에 형을 찬양하여, “어느 지조(鷙鳥)가 비록 백이라도 악(鶚)하나만 못하다.[鷙鳥累百不如一鶚]”하였다. 악새는 곧 현능(賢能)한 인재를 상징하는 말.
♣ 천안[千眼]6관음 중의 하나인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을 말하는데, 그는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작용이 크다 한다.
♣ 천안변초균[天眼辨楚菌]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줄 안다는 뜻.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나쁜 신초(申椒)와 좋은 균계(箘桂)가 뒤섞였다.” 하였다.
♣ 천안통[天眼通]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일체 세간(世間)의 갖가지 형상을 꿰뚫어 보는 신통력을 말한다.
♣ 천애부초리[天涯賦楚蘺]멀리 떨어진 유배지(流配地)에서 자신의 결백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는 말이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강리와 벽지 향초 몸에 두르고, 가을 난초 엮어서 허리띠를 매었노라.[扈江蘺與辟芷紉兮 紉秋蘭以爲佩]”라는 구절이 나온다.
♣ 천애지각[天涯地角]하늘의 끝과 땅의 한 귀퉁이라는 뜻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말.
♣ 천앵도[薦櫻桃]중하(仲夏)의 시절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하의 달에는 함도(含桃)를 먼저 침묘(寢廟)에 올린다.” 하였는데, 함도는 바로 앵도이다.
♣ 천양[穿楊]궁술(弓術)이 뛰어남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에 양유기(養由基) 가 활을 잘 쏘았는데, 그가 백보(百步) 거리에서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戰國策 西周策》
♣ 천양[穿楊]뛰어난 활솜씨를 이름. 버들을 꿴다는 것은 화살이 버들잎을 꿰뚫는 것으로, 춘추 시대 때 초(楚) 나라 사람인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잘 쏘아서 1백 보 밖에서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戰國 西周策》
♣ 천양지차[天壤之差]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
♣ 천양지판[天壤之判]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엄청난 차이.
♣ 천양현격[天壤懸隔]하늘(天)과 땅(壤)이 떨어져 있음과 같이 현격(懸隔)한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함.
♣ 천연[天淵]별자리 이름. 열 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별성(鼈星) 동남쪽에 위치하며, 천천(天泉)이라고도 불린다.
♣ 천열류파세열인[川閱流波世閱人]강물은 무수한 흐름을 떠내려보내면서 여전히 그대로 있고, 세상은 대대로 사람을 맞고 보내면서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말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표현한 말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나이 사십에 친구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허전함을 비탄조(悲嘆調)로 읊은 ‘탄서부(歎逝賦)’에 “슬프다. 강물은 온갖 물줄기를 모아 큰 흐름을 이루는데, 그 물줄기는 날마다 도도하게 흘러가고, 세상은 온갖 사람들을 겪으면서 한 세대씩을 이루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 둘씩 늙어서 사라지는도다.[悲夫 川閱水以成川 水滔滔而日度 世閱人而爲世 人冉冉而行暮]”라는 구절이 있다. 《文選 卷16》
♣ 천엽도[千葉桃]복숭아꽃의 일종으로 열매는 없다 함.
♣ 천엽연화[千葉蓮花]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 있는 공덕무량(功德無量)ㆍ광대장엄(廣大莊嚴)의 세계를 말하는데, 이 세계는 큰 연꽃으로 되었으며 그 연꽃은 1천 개의 잎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1천 개의 잎이 각각 한 세계이고 한 세계마다 1백억 나라가 있으며, 한 나라마다 한 석가가 보리수(菩提樹) 아래 앉았다고 하는데, 이는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 천엽화[千葉花]복숭아의 일종. 일명 벽도(碧桃)라고도 함. 꽃만 탐스럽고 열매는 맺지 않음.
♣ 천오[天吳]수신(水神)의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조양(朝陽)의 골짜기에 천오라는 신이 있는데, 바로 수백(水伯)이다. 그 생김새는 호랑이 몸에 사람의 낯으로 머리는 아홉이고 발과 꼬리는 여덟이다.” 하였음.
♣ 천오이수산작지[天吳移水山作地]천오는 해신(海神)의 이름으로, 즉 세상의 큰 변천을 비유한 말이다.
♣ 천옹[天翁]하늘을 의인(擬人)으로 불러 천공(天公)이니 천옹(天翁)이니 한다.
♣ 천왕불반[天王不返]천왕은 천자로 주 소왕(周昭王)을 가리킨다. 소왕이 남쪽 지방을 순수(巡守)하다가 한수(漢水)를 건너게 되었는데, 뱃사공이 미워하여 아교로 풀칠하여 만든 배에 태우니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그만 파선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소왕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 후 제 환공(齊桓公)이 제후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격하면서 이것을 추궁하자 초에서는 “하수에 물어보라.[問諸河濱]" 하여 책임을 회피하였다. 《史記 周本紀 注 正義, 左傳 僖公 四年》
♣ 천우교목[遷于喬木]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出自幽谷 遷于喬木"이 있음.
♣ 천우신조[天佑神助]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다
♣ 천원[天苑]천자(天子)의 원유(苑囿)임.
♣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 천월[喘月]강회(江淮) 지방에서 생장한 물소는 더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달을 보고도 해로 착각하고는 미리 놀래어 헐떡인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진(晉)의 만분(滿奮)이 바람을 두려워하여 유리병(琉璃甁)을 빈틈으로 착각하고는 난색을 짓자, 무제(武帝)는 이를 보고 웃으니, 만분은 “저는 오(吳) 나라 소가 달을 보고도 헐떡이는 것과 같습니다.[臣猶吳牛 見月而喘]"하였다. 오 나라는 바로 강회 지방에 해당한다.
♣ 천월노[喘月勞]더위에 시달리는 것을 말한다. 오(吳) 땅에 사는 소들은 더위를 겁내어서 달을 보고도 해인가 의심하여 숨을 헐떡인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
♣ 천월도[穿月棹]“돛대는 물 속의 달을 뚫는다[棹穿波中月].” 하였는데, 이것은 옛사람의 시(詩)의 한 구절이다.
♣ 천위[天威]천위는 황제의 위엄이 하늘과 같다 하여 붙여진 말이다.
♣ 천유[天遊]장자(莊子) 외물(外物)에 “胞有重閬 心有天遊"라 하였고, 그 주에 “有 繫也"라 했음.
♣ 천유[天遊]장자(莊子) 외물(外物)의 “마음 속에 천유가 없으면 육착이 서로 싸운다[心無天遊 則六鑿相攘].” 에서 나온 것으로, 정신이 세속을 초탈하여 자연 속에 노니는 것을 뜻한다. 육착은 사람의 감각기관으로 귀ㆍ눈ㆍ입ㆍ코ㆍ마음ㆍ지각 등 여섯 가지이다.
♣ 천유[穿窬]천벽유장(穿壁踰墻)의 준말. 즉 절도를 이름.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에도 “色厲而內荏譬諸小人其猶穿窬之盜也”라고 보임.
♣ 천을[天乙]은(殷) 나라 탕(湯)의 존칭.
♣ 천응증아달[天應憎我達]두보의 시에 “문인의 영달을 하늘은 미워하고, 사람이 잘못되면 도깨비들이 좋아하네.[文章憎命達 魑魅喜人過]”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7 天末懷李白》
♣ 천의[茜衣]꼭두서니의 뿌리에서 채취한 자황색 물감을 들여서 만든 옷.
♣ 천의[天衣]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말함.
♣ 천의난멱봉흔처[天衣難覓縫痕處]천의무봉(天衣無縫)을 말함. 영괴록(靈怪錄)에 “郭翰暑月臥庭中 迎視空中有人冉冉而下曰 吾織女也 徐視其衣 竝無縫 翰問之 謂曰 天衣本無針線爲也"라 하였음. 그래서 지금 모든 일이 적상(迹象)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들어 말함.
♣ 천의무봉[天衣無縫]하늘의 선녀 옷처럼 꿰맨 자국이 없음. 시문(詩文)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자국이 없음. 곧 기교의 흔적이 없이 자연스럽게 정리된 시문이나 서화(書畵)를 일컫는 말. 문장이 훌륭하여 손댈 곳이 없을 만큼 잘 되었음
♣ 천인[天人]대단히 뛰어난 인물을 이르는 말이다. 보통 제왕의 후손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 천인[天人]천리(天理)와 인성(人性)으로 곧 성리학을 말함.
♣ 천인공노[天人共怒]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함. 누구나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몹시 증오스러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음.
♣ 천인단애[千仞斷崖]천 길이나 되는 깍아지른 듯한 벼랑.
♣ 천인석[千人石]오현(吳縣)의 호구산(虎邱山) 중턱에 큰 돌이 있어 수십 묘(畝)에 널리 깔렸는데 신승(神僧) 축도생(竺道生)이 그곳에서 설법함으로 인하여 천인(千人)이 돌 위에 앉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이 된 것임. 《淥水亭 雜記》
♣ 천인합일[天人合一]천도와 인도가 합쳐져서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 천일[天一]음양서(陰陽書)에, “천일(天一)이 수(水)를 생(生)한다.”는 말이 있다.
♣ 천일악[薦一鶚]후한서(後漢書) 여원전(文苑傳)에 “아무리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있어도 독수리 한 마리만 못하니, 예형(禰衡)을 조정에 내세우고 보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천일양[千日釀]천일주는 한번 마시면 천일 동안 취한다는 좋은 술이다.
♣ 천일주[千日酒]빚어 넣은 지 천 일을 지나야 마시고, 또 한번 취하면 천 일을 지나야 깬다는 술. 옛날 중국 중산(中山) 고을에 천일주라는 술이 있었는데 이 술을 마시면 천 일 동안 취한다고 하였다. 이 고을에 유현석(劉玄石)이라는 자가 술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술집에 가서 이 술을 한 잔 사 먹고 집에 돌아온 후 그대로 크게 취해 버렸다. 현석의 집안 사람들은 죽은 줄만 알고 장사를 치르고 이어 삼년상(三年喪)까지 다 치렀다. 한편 술집 주인은 현석이 술 마시고 간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가, 천 일이 되어 현석의 집에 가 보니, 과연 삼년상까지 다 지내버린 후였다. 그가 현석의 집 사람들과 함께 현석의 무덤을 파고 관(棺)을 열어보니 현석이 과연 죽지 않고 막 술에서 깨어났다 한다. 《博物志 雜說下》
♣ 천일취[千日醉]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옛날에 유현석(劉玄石)이 중산(中山)의 술집에서 적희(狄希)가 담근 술을 사서 마셨는데, 술집에서 천일주(千日酒)를 주었다. 술에 취해 돌아와서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자 그의 집에서는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장사를 지냈다. 술집에서 천 일이 되자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무덤을 파헤치자, 그때서야 술에서 깨어났다.” 하였다.
♣ 천일해정[千日解酲]유현석(劉玄石)이 술을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일주(千日酒)를 먹였는데, 집에 돌아와서 깨어나지 않으니 죽었다고 하여 장사지냈다. 술 먹인 사람이 그 집에 가서 무덤을 파헤치고 보게 하니 그제서야 술이 깨어 살아났다는 말이 있다. 《事文類聚 燕飮部》
♣ 천자뇌[千字誄]묘소 근처의 큰길가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를 말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귀진정(歸眞亭)’에 “會看千字誄 木杪見龜趺”의 구절이 있다.
♣ 천자만홍[千紫萬紅]가지가지 빛깔로 만발한 꽃을 비유하는 말.
♣ 천자호반[天字號飯]군에서 지급해 주선 최상급의 밥상. 고깃국 한 그릇, 두부ㆍ소채(小菜)ㆍ염어(鹽魚) 각각 한 그릇, 밥 한 그릇, 술 석잔임.
♣ 천작[天爵]하늘에서 내려 준 작위, 즉 덕이 충만하여 저절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인작(人爵)에 대한 용어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은 하늘의 벼슬[天爵]이요, 공경(公卿)ㆍ대부(大夫)는 사람의 벼슬[人爵]이다.” 하였다. 또, “인의 충신(仁義忠信)과 조금도 태만함이 없이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작이다.” 하였다.
♣ 천장[天章]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아들 이명한(李明漢)의 자(字)이다.
♣ 천장[天章]임금이 지은 글을 높여 부른 말이다.
♣ 천장[天漿]천상(天上)의 음료(飮料)라는 뜻으로, 사색(思索)의 심원함을 비유한 말이다.
♣ 천장[天漿]천장은 천연적인 감즙(甘汁)으로 천상(天上)에서 마시는 음식물을 뜻한 것이다.
♣ 천장[天章]하늘의 무늬란 말이다.
♣ 천장[天章]하늘의 문장으로, 제왕(帝王)의 시문을 말한다.
♣ 천장각[天章閣]송진종(宋眞宗)의 장서각(藏書閣) 이름. 궁중(宮中)의 서실(書室)을 비유한다.
♣ 천장급제[天場及第]궐희(闕戱) 때 사학 유생에게 해학(諧謔)을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여 그 등급을 매기는 일. 고려 충렬왕이 유학을 좋아하여 당시의 문한(文翰)하는 선비들을 직접 시험하였으므로 생긴 이름인데, 뒤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것을 흉내내어 매년 여름과 겨울에 종이에다가 궐(闕)자를 써서 대궐을 삼고 공자를 왕(皇帝)으로 받들어 조정의 의식을 모의(摸擬)하였으며, 사학(四學)에서 제사를 도우려고 온 유생들에게 익살스런 글제를 내어 제술(製述)하게 하고는 등급을 매겨 급제를 뽑았는데 이것을 천장급제라 한다.
♣ 천장하구관[天章下九關]임금의 조서(詔書)가 내릴까 염려된다는 뜻이다. 천장은 신한(宸翰)과 같은 뜻으로, 임금의 한묵(翰墨)이라는 뜻이고, 구관(九關)은 임금이 거처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인 즉 대궐을 의미한다.
♣ 천장회파두표작[天漿會把斗杓酌]시경(詩經) 대동(大東)의 “북쪽에 북두(北斗)가 있어도 주장(酒漿)을 잔질할 수 없다.” 원망한 말을 빗대어 인용하였다.
♣ 천재일우[千載一遇]천 년에나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 곧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를 말한다.
♣ 천재지변[天災地變]하늘이나 땅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변사.
♣ 천재하청[千載河淸]고어에 황하수가 천년 만에 한번씩 맑아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곧 성군(聖君)이 나서 세상이 태평해질 상서라 한다.
♣ 천전[天田]임금이 상제(上帝)와 종묘(宗廟)의 제수를 목적으로 친히 경작(耕作)하는 전지(田地)로서, 즉 적전(籍田)과 같은 뜻이다.
♣ 천전운막[天田雲幕]제왕의 적전(籍田)에 구름같이 펼쳐진 임금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 천정[天庭]태미원(太微垣) 별. 전(轉)하여 ‘제왕(帝王)의 뜰’을 말한다.
♣ 천정부지[天井不知]물가가 자꾸 오름을 이르는 말.
♣ 천조[薦俎]신(神)에게 제수(祭羞)를 바치는 일.
♣ 천조[天造]하늘의 만물(萬物) 창조(創造)를 이름. 유신(庾信)의 소원부(小園賦)에, “諒天造兮昧昧 嗟生民兮渾渾”이라고 보임.
♣ 천조자조[天助自助]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즉 하늘은 스스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
♣ 천종[千鍾]종(鍾)은 옛날 양기(量器)의 이름인데, 곡(斛) 4두(斗)에 해당한다. 천종(千鍾)의 녹(祿)은 가장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받는 녹을 말한다.
♣ 천종백고[千鍾百觚]요(堯)는 술 천종(千鍾)을 마셨고, 공자는 백고(百觚)를 마셨다 한다.
♣ 천주[天廚]별 이름임.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紫宮東北維外六星曰天廚 主盛饌"이라 하였음.
♣ 천주[天柱]하늘을 괴는 기둥. 전(轉)하여 세상을 지보(支保)한다는 뜻으로, 곧 임금.
♣ 천주백립[천柱白立]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소나무 껍질을 마구 벗겨 먹음으로써 소나무들이 하얗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천주사[天柱寺]경주(慶州) 월성(月城) 서북쪽에 있던 절 이름이다.
♣ 천주액부자[穿珠厄夫子]공자(孔子)가 진채(陳蔡)에서 재액(災厄)을 당할 적에 구곡주(九曲珠)에다 실을 꿰게 되었는데, 꿰는 방법을 몰라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어떤 여자가 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자 공자가 그제야 깨닫고, 곧 개미허리에 실을 묶은 다음 실에다 꿀밀[蜜]을 발라서 꿰었다 한다. 《祖庭事苑》
♣ 천주용의[穿珠用蟻]전설(傳說)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일찍이 진(陳)에서 재액을 당했을 때 구곡주(九曲珠)에 실을 꿰게 되었는데, 방법을 몰라서 망설이던 차에 어떤 여인이 비결을 가르쳐 주므로 공자가 곧 깨닫고는 개미 허리에다 실을 묶은 다음 그 구멍에 꿀을 묻혀서 개미를 통과하게 하여 실을 꿰었다고 한다.
♣ 천주축융[天柱祝融]모두 중국 남방에 있는 형산(衡山)의 높은 봉우리[峰]의 명칭이다.
♣ 천중[天中]천중가절(天中佳節) 즉 단오절을 가리킨다.
♣ 천중가절[天中佳節]오월 단오.
♣ 천중일[天中日]음력 5월 5일로, 단오(端午)를 말한다.
♣ 천중절[天中節]단오(端午)절를 말한다. 5월 5일이 천수(天數)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 천지가삼[天地可三]도덕이 높은 사람은 천지와 짝을 지어 가히 셋이 된다는 말이다.
♣ 천지교자[天之驕子]천지교자는 한(漢) 나라 때 흉노(匈奴)가 자신들을 일컬었던 칭호인데, 그 뒤에 강성한 북방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匈奴傳上》
♣ 천지동일지[天地同一指]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한 데서 온 말로, 즉 시비(是非)와 진위(眞僞)는 참으로 알기가 어려움을 의미한다.
♣ 천지두릉요[天地杜陵謠]두보의 시 ‘기유섬주백화사(寄劉陝州伯華使)’에, “강호에는 흰 물새가 많기도 하고, 천지에는 푸른 파리 어디나 있네.[江湖多白鳥 天地有靑蠅]”하였다.
♣ 천지만기[天地萬期]주덕송에, “以天地爲一朝 以萬期爲須臾”라 한 것을 가리킨 말인데,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주덕송 주에 의하면. “천지개벽 이래로 하루아침을 삼고 만년의 기간으로 잠깐을 삼음이다.” 했음.
♣ 천지신지아지자지[天知神知我知子知]온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뜻의 고사성어.
♣ 천지일지[天地一指]공손용자(公孫龍子)에 있는 말인데, 흰말[白馬]과 말[馬]이 다르니 같으니 하던 끝에 붙은 말이다. 지(指)는 해석자에 따라 혹은 손가락이라 하고 혹은 가리키는 뜻이라 한다.
♣ 천지장호[天地臧壺]후한(後漢) 때 시중(市中)의 한 노옹(老翁)이 약(藥)을 팔면서, 병 하나를 전방 곁에 걸어두고서 시장이 파하면 곧장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오직 시연(市掾)으로 있던 비장방(費長房)이 그것을 보고는 찾아가 배알을 하고 그 노옹을 따라 함께 병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안에는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맛있는 술과 안주가 푸짐하여, 노옹과 함께 술을 마시고 나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천진[天津]다리 이름. 수(隋)의 양제(煬帝) 때 세운 것으로 하남부(河南府) 성 밖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수(洛水)를 가로지른 다리임. 그 다리 남과 북에는 각기 높이가 1 백 여 길씩이나 되는 누대가 네 군데나 있으며 소강절(邵康節)이 두견새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河南洞志》
♣ 천진[天眞]양심.
♣ 천진난만[天眞爛漫]꾸밈없는 그대로의[天] 참됨[眞]이 빛을 발하며[爛] 넘쳐남[漫]. 꾸밈이나 거짓없이 타고난 성질 그대로가 말이나 행동에 나타남. 매우 참되고 착하다
♣ 천진독랑[天眞獨朗]생사(生死)의 차별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본체(本體)가 항상 홀로 빛나는 것을 말한다.
♣ 천진두견제[天津杜鵑啼]일찍이 낙양(洛陽)의 천진교에서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리자, 소옹(邵雍)이 몹시 안좋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2년이 못 가서 남쪽 선비가 재상이 되겠으니, 천하가 이때부터 다사해질 것이다.” 하니, 혹자가 그 연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가 다스려지려면 지기(地氣)가 북에서 남으로 가는 것이고, 천하가 혼란해지려면 지기가 남에서 북으로 가는 것인데, 지금 남방에 지기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과연 뒤에 남쪽 사람인 여혜경(呂惠卿)이 재상이 됨으로부터 천하가 크게 혼란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 卷九》
♣ 천짐[淺斟]유유자적하게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겨울철에 따뜻한 방 안에 들어앉아, 나지막한 가기(歌妓)의 음악 소리를 듣고 이름난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신다는 ‘저창천짐(低唱淺斟)’의 고사가 있다. 《綠窓新話 卷2 湘江近事》
♣ 천짐저창[淺斟低唱]송기(宋祁)가 눈 오는 밤에 기생에게 종이를 들게 하고 당서(唐書)의 초고(草稿)를 썼는데, 그 기생은 전일에 당태위(唐太衛)에게 있던 기생이었다. 송기가 돌아보고 묻기를, “네가 당태위의 집에 있을 때에도 눈이 오는 날에 이런 풍정이 있었느냐.” 하니, 기생이 답하기를, “당태위는 무인(武人)이므로 이런 고아(高雅)한 풍정은 모르지마는, 눈 오는 날 소금장(銷金帳) 속에서 고아주(羔兒酒)를 데워 놓고 조용히 마시며 낮게 노래 부르는[淺斟低唱] 취미는 있었습니다.” 하였다.
♣ 천차만별[千差萬別]천가지 만가지가 서로 다르고(차이가 나고) 틀림. 차이와 구별이 아주 많음
♣ 천착[穿鑿]깊이 파고 들어가는 학문. 구멍을 뚫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함.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감.
♣ 천참[天塹]하늘이 파 놓은 구덩이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 천책부[天策府]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천책상장(天策上將)으로 봉해진 뒤에 설치한 관청이다.
♣ 천천[淺淺]물이 빠르게 흐르는 모양, 조금씩
♣ 천천[幝幝]수레가 부서져 있는 모양
♣ 천천[千千]썩 많은 수
♣ 천천[倩倩]예쁘고 얌전한 모양
♣ 천천[川川]큰 수레 따위가 장엄하고 느린 모양
♣ 천천[仟仟]풀이 무성한 모양
♣ 천천[喘喘]헐떡이는 모양
♣ 천천[憚憚]변하지 아니하는 모양, 파괴되고 오래된 모양
♣ 천추[天樞]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말한다.
♣ 천추[千秋]천년.
♣ 천추소자유[千秋蘇子遊]송(宋)의 소식(蘇軾)이 황주(黃州)로 귀양 갔을 때 적벽강(赤壁江)에서 유람하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거기에서 퉁소를 불면서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 천추절[千秋節]당 현종이 8월 5일에 탄생했다 해서 개원(開元) 17년에 이 날을 천추절(千秋節)로 정하여 천하에 포고했음. 뒤에 천장절(天長節)로 고쳤음. 당 현종의 탄신날을 천추절이라 하고, 거국적으로 축하 행사가 있었는데 여러 백관들은 황제에게 물건을 드려서 축하의 뜻을 표하는데, 장구령(張九齡)이라는 정상은 역사상의 정치 잘하고 못한 것을 발췌하여 황제의 참고가 되게 하는 책을 만들어서 그 이름을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라 하고 그것을 헌상하였다.
♣ 천춘[千春]춘나무[椿]는 장수(長壽)하는 나무로 8천 년을 한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한 가을로 한다고 한다.
♣ 천측령[天測靈]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 양자법언(揚子法言) 권6 5백편에 “성인은 총명하고 깊고 아름다워서 하늘을 이어 만령을 헤아린다[聖人聰明淵懿 繡天測靈].”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의하면, 성인의 출몰(出沒)이 천도의 비태(否泰)를 이어서 만령(萬靈)을 헤아려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천침[穿針]바늘 귀에 실을 꿰는 것을 말하는데, 칠석이면 부녀자들이 달을 바라보고 바늘을 꿰면서 견우ㆍ직녀 두 별에게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고 한다.
♣ 천침일[穿針日]칠석날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날 때 부녀자들이 뜰에 과과(瓜果)를 진설해 놓고 바느질 등의 솜씨가 좋게 해 달라고 비는[乞巧]데 이때 채색실을 바늘에 꿰어 빌므로 칠석(七夕)을 천침일이라 한다.
♣ 천탈칩기[天脫馽羈]유자후(柳子厚)가 죽은 뒤에 한퇴지가 제문을 지었는데, “하늘이 굴레를 벗겼다[天脫馽霸].”는 말이 있다.
♣ 천탑[穿榻]후한(後漢) 때 고사(高士) 관영(管寧)이 속세(俗世)를 피하여 요동(遼東)에 우거하였는데, 50여 년 동안 하나의 목탑(木榻)에서 지냈으므로 무릎 닿은 부분이 깊숙이 팼다고 한다.
♣ 천태[天台]산 이름. 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 북에 있다. 한(漢) 때 유신(劉晨)ㆍ완조(阮肇)가 그 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가 선녀(仙女)를 만났다는 고사가 있음.
♣ 천태[天台]천태는 수(隋) 나라 때 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에서 지자대사(智者大師)가 창립한 천태종의 준말이다.
♣ 천태만상[千態萬象]천 가지 형태와 만 가지 형상.
♣ 천태산[天台山]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 산 이름. 기세가 높아 옛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졌다.
♣ 천태석교[天台石橋]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의 돌다리로, 용형귀배(龍形龜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끼가 끼어 미끄럽기 때문에 예로부터 건너갈 수 없는 곳으로 전해져 왔다. 《法苑珠琳》 이백(李白)의 시에 “돌다리 만약에 건너갈 수 있거든, 손잡고 구름과 안개 맘껏 희롱해 보시라.[石橋如可度 携手弄雲煙]”라는 표현이 있다. 《李太白集 卷15 送楊山人歸天台》
♣ 천태악[天台嶽]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었는데, 그 속에 천태산의 멋진 경치가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 천태재세의선사[天台再世顗禪師]천태종은 중국 불교의 13종파(宗派)의 하나로 혜문선사(慧文禪師)가 혜사(慧思)에게 전하고 두 번째는 지자대사(智者大師)에게 전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지의(智顗)이므로 의선사라 하였다. 《唐高僧傳 卷十七》
♣ 천태적성[天台赤城]천태산(天台山)과 적성산(赤城山). 모두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으로, 선경(仙境)을 말한다. 적성산은 천태산의 남쪽에 있으며, 토석의 색깔이 붉고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다. 문선(文選)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하였다.
♣ 천토[天討]하늘의 뜻을 받들어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을 말한다.
♣ 천파[天葩]천연의 아름다운 꽃이란 뜻으로, 전하여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의미한다.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시(醉贈張祕書詩)에 “동야는 세속을 경동시키니 천파가 뛰어난 향기를 발한 때문일세[東野動驚俗 天葩吐奇芬]”하였다.
♣ 천편일률[千篇一律]천 편이나 되는 글이 오로지 한 가지 운율로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시문들이 모두 비슷한 글귀나 형식으로만 되어 있어 참신한 맛이 없음을 가리킴. 사물이 모두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새롭거나 독특한 개성이 없고 재미가 없음을 말함.
♣ 천표[天瓢]전설 속에 나오는 표주박으로, 천신(天神)이 비를 내릴 때 쓰는 표주박이다.
♣ 천표[天表]제왕(帝王)될 상을 천일지표(天日之表)라 한다.
♣ 천표개역적[天瓢豈易滴]모진 가뭄 끝에 대지를 흥건히 적셔 주는 비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이정(李靖)이 천녀(天女)의 부탁을 받고 말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병에 담긴 물을 한 방울만 떨어뜨려야 하는데 20방울을 흘려보내 홍수가 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續玄怪錄 卷4》
♣ 천하구가윤속계[天下謳歌允屬啓]천하 인심이 우(禹)의 아들 계(啓)에게로 쏠림.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우가 익(益)을 하늘에 추천하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우가 죽자 익은 우의 3년상을 마치고 기산(箕山)의 북으로 가 숨어 있었는데, 조근(朝覲)하는 자 송옥(訟獄)하는 자들이 익을 찾아가지 않고 계에게로 가면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 아니던가’ 했고, 은덕을 구가하는 자들도 익을 구가하지 않고 계를 구가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 아니던가’ 하였다.” 했음.
♣ 천하로[天下老]백이(伯夷)가 일찍이 주(紂)를 피하여 북해(北海) 가에서 살다가 문왕(文王)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어찌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리오. 내가 들으니 서백(西伯)은 늙은이를 잘 봉양한다고 하더라.” 하였고, 태공(太公) 또한 주를 피하여 동해(東海) 가에서 살다가 문왕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어찌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리오. 내가 들으니 서백은 늙은이를 잘 봉양한다고 하더라.”고 했는데, 맹자(孟子)가 이 두 사람을 일러 천하(天下)의 대로(大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
♣ 천하소[天下小]공자가 노(魯)나라 동쪽에 있는 동산(東山) 꼭대기에 올라가 노 나라가 작은 것을 느꼈고 태산(太山)의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또 천하가 작다고 느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 천하영재[天下英才]하늘 아래의 뛰어난 재주군. 곧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
♣ 천하유산[天下有山]둔(遁)은 돈(遯)과 통하는데 주역(周易)의 돈괘(遯卦)는 천상(天象)인 건괘(乾卦)가 위에 있고 산상(山象)인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으니, 이는 소인의 상징인 음효(陰爻) 두 효가 밑에서 자라고 있어 세상이 어지러울 징조이므로 군자는 이 괘를 만나면 은둔하여야 한다 하였다.
♣ 천하하상출호지[天下何嘗出戶知]노자(老子) 제 47장에 “不出戶 知天下"라 하였음.
♣ 천한[天閑]천자가 타는 말을 기르는 마굿간을 말한다. 주례(周禮) 하관(夏官) 교인(校人)에, “천자(天子)는 열 두 곳의 한(閑)이 있다.” 하였음. 제주도에서도 목장에 말을 길러 그 중 뛰어난 말을 중국에 조공했었다.
♣ 천한백옥[天寒白屋]추운 날에 불을 못 때는 가난한 집을 말함.
♣ 천향[天香]보통 계(桂)ㆍ매(梅)ㆍ모란 등 꽃의 향기를 천향(天香)이라 하는데, 특히 모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천향 국색(天香國色)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 왔다.
♣ 천향[天香]신년이나 명절 때 하늘에 피워 올리는 향이다.
♣ 천향[天香]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향을 말함. 함향(函香)과 같다.
♣ 천형[薦衡]남을 천거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형(衡)은 곧 후한(後漢) 때의 예형(禰衡)을 가리키는데, 공융(孔融)이 예형의 재주에 감탄하여 조조(曹操)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後漢書 卷八十下 禰衡傳》
♣ 천형[踐形]사람의 모습에 걸맞는 보람된 삶을 완전히 구현(具現)한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누구나 하늘로부터 형색(形色)을 품부받고 태어나는데, 오직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분만이 천형(踐形)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 천호[天弧]남방 칠수(七宿)가운데 정수(井宿)에 소속된 별자리. 아홉 개의 별이 활 모양을 이루고 있다.
♣ 천호등[千戶等]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연(燕)ㆍ진(秦)에서 밤나무 1천 그루를 가지면 이익이 천호후(千戶侯)와 맞먹는다.” 하였다.
♣ 천호후봉등[千戶侯封等]연(燕)ㆍ진(秦) 지방 천 그루의 밤나무[栗], 제(齊)ㆍ노(魯) 지방 천묘(千畝)의 상마(桑麻), 위천(渭川)의 천묘의 대나무[竹]등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가 천호후에 봉해진 사람과 맞먹는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九》
♣ 천혼[天閽]제왕의 궁문. 곧 중국의 황제를 뜻함.
♣ 천혼[天閽]천제(天帝)의 궁궐문으로, 도성(都城) 하늘을 가리킨다.
♣ 천화[天花]석가모니가 경(經)을 설(說)할 때에 하늘에서 꽃이 비오듯 하였다.
♣ 천화[天和]하늘의 화기(和氣). 즉 조화(調和)를 얻은 자연의 도(道)를 말한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만일 너의 형체를 바르게 하면 하늘의 화기가 곧 이르리라.” 하였다.
♣ 천황[天荒]멀고 구석진 곳. 중국 당(唐)나라 때 형주(荊州)에서는 매년 과거 응시자는 있었으나 급제하는 사람이 없어 당시 사람들이 형주를 천황의 땅이라 불렀는데, 유세(劉蛻)란 사람이 처음으로 급제하자 사람들은 “천황을 깬 자가 나왔다”며 유세의 업적을 가리켜 (破天荒)이라고 일컬었다
♣ 천황[天潢]은하수를 말한다.
♣ 천황일만팔천자[天皇一萬八千字]십팔사략(十八史略) 첫째 권을 말함.
♣ 천황팔만년[天皇八萬年]태고(太古) 적에 천황씨(天皇氏)는 만 팔천세(萬八千歲)를 살았다는 신화(神話)가 있다.
♣ 천회[儃佪]머뭇거리고 잘 나아가지 않는 모양
♣ 천회[儃回]머뭇거리다. 배회하다.
♣ 천후점기이해[天后占其利害]주문왕(周文王)이 사냥 갈 때 점을 쳐 태공망(太公望)을 얻은 일. 은대(殷代) 제왕들의 사냥점 기사(記事)는 복사(卜辭)에 역력히 많다
♣ 철간[鐵簡]철제(鐵製)로 된 무기의 한 가지이다.
♣ 철견[鐵犬]쇠로 만든 개의 상(像)을 말한다.
♣ 철경[輟耕]농사짓는 일을 그만두다.
♣ 철경록[輟耕錄]명 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원대(元代)의 법제 및 훈고(訓詁)ㆍ서화(書畫) 등에 관해 편찬한 고증 자료. 《四庫提要子ㆍ小說家類》
♣ 철경록[輟耕錄]명(明) 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술한 서명(書名). 총 30권으로 되었음. 내용은 대개 원대(元代)의 법령제도(法令制度) 및 원 나라 지정(至正) 말엽에 있었던 병란(兵亂) 사실, 항간에서 일어난 저속한 일, 희학잡담(戱謔雜談), 보고 들은 잡설 등을 수록하였음. 구성(九成)은 도종의의 자(字).
♣ 철고비[掇皐比]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과감히 양보하는 것을 말한다. 고비(皐比)는 즉 호피(虎皮)이다. 송(宋) 나라 장재(張載)가 일찍이 호피를 깔고 앉아서 주역(周易)을 강의할 때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후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주역(周易)에 밝음을 알고 나서는 호피의 좌석을 걷고 강의를 폐하였다. 《張子全書 卷十五》
♣ 철관[鐵關]철관은 궁궐의 성문을 말한다.
♣ 철관[鐵冠]철관은 어사(御史)가 착용하는 철주(鐵柱)를 넣어서 만든 관(冠)을 말한다.
♣ 철관[鐵關]철관은 중국 서역(西域)의 지명이다.
♣ 철관[鐵關]철관은 철령(鐵嶺)을 말한 것이다.
♣ 철관[鐵關]함경도 덕원(德源)의 속역(屬驛)이다.
♣ 철관위[鐵冠危]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었다는 뜻이다.
♣ 철관정[鐵關亭]철관정은 함경도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고산역(高山驛)에 딸린 13개 속역(屬驛) 가운데 하나이다. 정(亭)은 역참(驛站)과 같다.
♣ 철권[鐵券]옛날 공신(功臣)에게 내려주던 훈공을 기록한 책. 일종의 증표로, 붉은 글씨[丹書]로 적었으며, 반쪽을 주고 반쪽을 나라에 보존해 두었다. 일반적으로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 한다. 사기(史記) 고제기(高帝紀)에 “공신과 더불어 부절(符節)을 가르고 맹세를 기록한 철권과 단서(丹書)를 금궤(金匱)에 넣어 종묘(宗廟)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 철기뢰등락수방[鐵騎雷騰洛水傍]당 나라에서는 안녹산을 평정하려고 서방 위구르족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5천의 기병이 와서 도와주었는데, 그들은 중국 백성들에게 피해도 컸었다.
♣ 철두철미[徹頭徹尾]머리에서 꼬리까지 투철함, 즉 처음부터 끝까지 투철함.
♣ 철련전[鐵連錢]돈 모양의 검은 반점(斑點)이 있는 말을 말함. 《盧照鄰 長安古意詩》
♣ 철령[鐵嶺]강원도 회양군(淮陽郡)과 함경남도 고산군(高山郡)의 경계에 있는 큰 재.
♣ 철롱[鐵籠]수레 축이 서로 닿아 부러지지 않도록 끝 부분을 잘라내고 쇠로 감싼 것이다. 전단이 안평(安平)에 있다가 연 나라가 쳐들어와 도망칠 적에 다른 사람들은 다 수레 축이 부러져서 포로가 되었으나, 전단의 종인(宗人)들만은 철롱을 씌운 덕에 도망칠 수 있었다.
♣ 철룡조[鐵龍爪]쇠로 만든 흙을 파는 도구이다.
♣ 철류[綴旒]잡아맨 기(旗)의 술을 말하는데, 전하여 임금이 신하에게 제재되어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 철륵[鐵勒]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의 후예로 중국 북방 민족의 하나이다. 시대에 따라 칙륵(敕勒)ㆍ회흘(回紇)ㆍ회골(回鶻)ㆍ외올아(畏兀兒)등 그 칭호가 다른데, 오늘날에는 유오이(維吾爾)라 불린다.
♣ 철마[鐵馬]철마는 갑옷을 입힌 전마(戰馬)로 정예의 기병을 가리킨다.
♣ 철면[鐵面]철면은 추위를 잘 이긴다 하여 매화를 이른 말이다.
♣ 철면어사[鐵面御使]강직하고 사심이 없는 어사를 말한다. 송(宋) 나라 때 조변(趙抃)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가 되어 권신(權臣)들을 거리낌 없이 탄핵하자 경사(京師) 사람들이 철면어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 철면피[鐵面皮]쇠로 된 낯가죽. 즉,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수치(羞恥)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
♣ 철목씨[鐵木氏]철목씨(鐵木氏)는 원(元) 나라이다.
♣ 철묵[啜墨]책벌레의 이칭임. 왕조(汪藻)의 시에 “書魚多啜墨 筆免每噴煙"이라 하였음.
♣ 철문한[鐵門限]남조(南朝) 진(陳) 나라 때 지영선사(智永禪師)가 오흥(吳興) 영흔사(永欣寺)에 갔었는데, 글씨를 청해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들어서 그의 문지방이 모두 닳아져 없어지므로, 쇠[鐵]로 문지방을 포장하였다는 고사가 있음. 소식의 증상주보은장로시(贈常州報恩長老詩)에도, “憑師爲作鐵門限 準備人間請話人”이란 구절이 있음.
♣ 철법[徹法]철법은 주(周)의 세법으로 1백 묘를 농민이 경작하여 그 중 10묘의 소출을 따로 떼내 조세로 바친다는 뜻으로, 10분의 1을 조세로 바치는 제도임. 《孟子 滕文公上》
♣ 철봉우림[鐵鳳羽林]철봉은 철봉궐(鐵鳳闕)의 준말로, 문 꼭대기에 철제(鐵製) 봉황을 달아 놓은 도성 궁궐 문을 말하고, 우림(羽林)은 임금의 근위 금군(禁軍)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철봉궐 그늘진 곳, 훈련하는 우림 군사.[陰沈鐵鳳闕 敎練羽林兒]”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贈崔十三評事公輔》
♣ 철부지급[轍鮒之急]수레바퀴 자구 속에 있는 붕어의 위급함이라는 뜻으로, 곤궁한 처지나 다급한 위기, 곤궁한 처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철삭은구[鐵索銀鉤]매끄럽고 꼿꼿한 필치를 형용한 것이다.
♣ 철상[鐵象]남송(南宋) 때 사람 곡단(曲端)에게 평소 매일 4백 리씩을 달리는 철상(鐵象)이란 말이 있었다 함.
♣ 철색은구[鐵索銀鉤]아주 힘차게 잘 쓴 글씨를 형용한 말이다.
♣ 철석간장[鐵石肝腸]쇠나 돌같이 굳은 마음. 굳센 의지나 굳은 지조.
♣ 철석장[鐵石膓]천성이 견강함을 이름. 피일휴(皮日休)의 부서(賦序)에, “나는 일찍이 송광평(宋廣平)의 정승됨을 아름답게 여기며 철석(鐵石)의 심장이라 여겼다.” 하였음.
♣ 철쇄침강[鐵鎖沈江]유우석(劉禹錫)의 금릉회고시에 “천 길의 쇠사슬을 강물 속에 가로쳤건만 한 조각 항복의 깃발이 석두성에서 나왔네[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旛出石頭]”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내용은 바로 오(吳) 나라에서 일찍이 진(晉) 나라 군대를 막기 위하여 석두(石頭)에 성(城)을 쌓고, 강(江)에는 수많은 쇠사슬을 가로질러 치고 수많은 철퇴까지 세워 놓았었으나, 진(晉) 나라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이 그 내막을 탐지하고는 사전에 그 쇠사슬과 철퇴를 모두 제거한 다음 만곡선(萬斛船)을 건조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오 나라 석두성을 격파해서 손호(孫皓)의 항복을 받았던 고사를 읊은 것이다. 《晉書 卷四十二》
♣ 철숙[啜菽]빈한한 집에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이 가난해서 어버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만 해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효도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 철숙수[啜菽水]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에 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下》
♣ 철숙음수[啜菽飮水]콩죽을 쑤어 먹고 물을 마시는 청고(淸苦)한 생활을 말한다. 《禮記 檀弓下》
♣ 철심석장[鐵心石腸]당 나라 피일휴(皮日休)가 말하기를, “송광평(宋廣平; 宋璟)은 강직하기가 쇠마음 돌창자[鐵心石腸]인 줄 알았더니 그의 지은 매화부(梅花賦)를 본즉 맑고 고와서 그의 사람됨과는 다르다.” 하였다.
♣ 철심인[鐵心人]당 나라 시인 피일휴(皮日休)가 매화부(梅花賦)를 서(序)하면서 “나는 일찍이 송광평(宋廣平)의 정자 경질(貞姿勁質)과 강태 의상(剛態毅狀)을 사모하여 그가 철장(鐵腸)과 석심(石心)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하였음.
♣ 철안[鐵案]증거가 확실하여 번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사안이란 뜻.
♣ 철액[鐵額]치우(蚩尤)를 가리킨다. 운급칠첨(雲笈七籤) 헌원기(軒轅紀)에 “치우씨 형제 80인 모두가 짐승같은 몸에 사람 말을 하였으며 구리 얼굴에 쇠이마[銅頭鐵額]를 가졌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 듯하다.
♣ 철여의[鐵如意]쇠로 만든 여의(如意). 쇠로 만든 효자손 모양의 군대 지휘봉인데, 진(晉) 나라 왕도(王導)의 조카인 왕융(王戎)이 철여의를 쥐고 춤추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任誕》
♣ 철연[鐵硯]철연(鐵硯)은 쇠로 주조한 벼루인데, 오대(五代) 시대 진(晋) 나라 상유한(桑維翰)이 처음 과거를 보려다가 주사(主司)에게 내침을 받자, 어떤 이가 그에게 과거를 보지말고 달리 벼슬을 구하도록 권하니, 그가 철연을 주조하여 남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철연이 뚫리면 타업(他業)으로 바꾸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끝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던 데서 온 말이다. 《五代史 卷二十九》
♣ 철영동리[掇英東籬]도연명의 음주시(飮酒詩)에 “동쪽 울타리 국화꽃 꺾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도다.[採菊東離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이 있다.
♣ 철옥여배속[綴玉與排粟]옥 벌레나 금 낟알은 모두 등잔 불꽃의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한유(韓愈)의 영등화시(詠燈花詩)에, “황금빛 속에 금 낟알을 배치한 듯하고 비녀 머리에 옥 벌레를 이어 붙여 꾸민 듯하네.[黃裏排金粟 釵頭綴玉蟲]”하였다.
♣ 철우[鐵牛]쇠로 주조하여 만든 소인데, 옛날 우(禹) 임금이 수환(水患)을 막기 위하여 이 소를 만들어 황하(黃河)에 넣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철우[鐵牛]철우는 쇠로 만든 소로 하후씨(夏后氏) 때 범람하는 황하의 수재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 세웠다 한다.
♣ 철위성[鐵圍城]불경(佛經)에 있는 말로 남섬부주(南贍部洲) 등 사대부주(四大部洲) 밖에 있는 성의 이름인데, 아주 멀다는 말이다.
♣ 철작간[鐵作肝]의지가 철석(鐵石)처럼 견고하여 외물(外 物)에 의해 동요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철심석장(鐵心石腸).
♣ 철장광평[鐵腸廣平]당 나라 송경(宋璟)의 자. 사람들은 그의 곧은 지조와 굳센 기질에다 철석 같은 심장(心腸)으로 보아 고운 문사(文辭)가 나올 것 같지 않다고 여겼는데, 그가 지은 매화부(梅花賦)는 너무도 청신하고 미려(美麗)하였다.
♣ 철적[鐵笛]쇠로 만든 젓대를 말함. 주희(朱憙)의 철적정시서(鐵笛亭詩序)에 “무이산(武夷山)은 은자(隱者) 유군 겸도(劉君兼道)가 철적을 잘 불어 천운열석(穿雲裂石)의 소리가 났다.” 하였음.
♣ 철적[鐵笛]철적은 철로 만든 피리로, 은자(隱者)의 피리를 뜻한다. 당대(唐代) 피리의 명인인 이막(李漠)이 밤에 경호(鏡湖)에 배를 띄우고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는, 어떤 노인이 배를 저어 와서 자신의 철적을 꺼내어 피리를 불자, 용 두 마리가 뱃전에 기대어 그 곡조를 들었는데, 이막이 그 피리를 불어 보려 해도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樂府雜錄》
♣ 철적성[鐵笛聲]은자(隱者)나 고사(高士)가 흔히 쇠피리를 분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맑고 비범하다 한다.
♣ 철점은구[鐵點銀鉤]아주 잘 쓴 글씨를 표현한 말이다.
♣ 철주[철주]남의 팔꿈치를 맘대로 쓰지 못하게 하여 일에 훼방을 놓는 일을 말한다. 즉, 웃사람이 너무 간섭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철중쟁쟁[鐵中錚錚]같은 쇠붙이 가운데서도 유난히 맑게 쟁그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같은 또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이름.
♣ 철천[鐵穿]진(晋) 나라 때 상유한(桑維翰)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했는데, 시험관이 그의 성인 ‘상(桑)’ 자가 ‘상(喪)’ 자와 같은 발음임을 싫어하므로, 사람들이 시험을 포기할 것을 권하자, 상유한은 쇠벼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이 벼루가 다 닳아도 합격을 못 하면 다른 방도를 찾겠다.” 했는데, 결국 합격했다 한다. 《舊五代史 卷八十九 桑維翰傳》
♣ 철천지한[徹天之恨]쌓인 감정이 하늘을 뚫을 만큼 사무친 크나큰 한.
♣ 철철[惙惙]근심하는 모양, 근심하여 마음이 산란한 모양
♣ 철철[掣掣]바람이 부는 대로 쏠리는 모양
♣ 철탑[鐵塔]남송(南宋) 고종(高宗)의 황자(皇子) 부(▣)가 겨우 네 살이었지만,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에게 추대되자, 장준(張浚)이 제거하기를 건의한 결과, 철탑의 죽음이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 철협[鐵峽]철령(鐵嶺)을 말한다.
♣ 철환공맹[轍環孔孟]공자는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천하를 주류(周流)하였으나 당시 임금들이 공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마침내 노(魯) 나라로 돌아와 시ㆍ서ㆍ예ㆍ악(詩書禮樂)을 정리하였고 맹자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고자 제(齊)ㆍ양(梁) 등지로 돌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 철환천지[轍環天地]공자는 도를 펴려고 여러 제후 나라에 돌아다녔으며, 이 때문에 갖은 고생을 했다는 말이다.
♣ 철환천하[轍環天下]뒷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님.
♣ 철후[徹侯]진(秦)ㆍ한(漢) 시대 12등급의 작호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고관 대작을 가리킨다.
♣ 첨개[沾丐]후세에 끼쳐 준 은덕. 당서(唐書) 두보전(杜甫傳) 찬(贊)에, “다른 사람은 부족하나 보(甫)는 남아서 그 잔고(殘膏)와 잉복(剩馥)이 뒷사람에게 점개(沾丐)한 것이 많았다.” 하였음.
♣ 첨노[尖奴]붓을 말한다. 북위(北魏)의 고필(古弼)이 총명하여서 태종(太宗)에게 사랑을 받아 필(筆)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곧으면서 유용하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고필은 머리 끝이 뾰족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항상 필두(筆頭)라고 불렀다. 어느날 조서를 내려서 살진 말을 기인(騎人)에게 주라고 하였는데, 고필이 약한 말을 주었다. 그러자 세조가 대노하여 ‘첨두노(尖頭奴)가 감히 나의 뜻을 멋대로 재량하다니, 짐이 돌아가면 먼저 이놈을 참수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는 붓을 첨노라고 하게 되었다. 《魏書 卷28 古弼傳》
♣ 첨두[尖頭]붓을 말한다. 북위(北魏)의 고필(古弼)이 총명하여서 태종(太宗)에게 사랑을 받아 필(筆)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곧으면서 유용하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고필은 머리 끝이 뾰족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항상 필두(筆頭)라고 불렀다. 어느 날 조서를 내려서 살진 말을 기인(騎人)에게 주라고 하였는데, 고필이 약한 말을 주자 세조가 대노하여 ‘첨두노(尖頭奴)가 감히 나의 뜻을 멋대로 재량하다니, 짐이 돌아가면 먼저 이놈을 참수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는 붓을 첨두노라고 하게 되었다. 《魏書 卷28 古弼列傳》
♣ 첨복[簷蔔]인도에서 나는 꽃 이름.
♣ 첨복[簷葍]첨복은 황화수(黃花樹) 또는 금색화수(金色花樹)라는 나무로, 이 나무는 높고 크며 꽃향기는 바람 따라 멀리 퍼진다고 한다.
♣ 첨봉검망[尖峰劒鋩]뾰족한 봉우리는 칼끝과 같다.
♣ 첨사[詹事]첨사는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의 별칭이다.
♣ 첨서[簽書]벼슬 이름. 중추원 즉 추밀원의 종2품 벼슬로,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의 약칭.
♣ 첨선자문[添線刺紋]옛날 궁중에서 여자들의 바느질 선으로 한 해의 장단(長短)을 계산했는데, 동지가 지나 해그림자가 차차 길어지면 매일같이 한 오리씩 침선(針線)을 더하였다 한다.
♣ 첨수백련직[簷垂白練直]처마 밑에 떨어지는 낙숫물이 얀 명주 같다. 한유(韓愈)와 맹교(孟郊)의 시 ‘추우 연구(秋雨連句)’에 “처마 밑엔 하얀 명주 직각으로 드리우고, 도랑물은 상수(湘水)처럼 콸콸 넘쳐흐르네.[簷垂白練直 渠漲淸湘大]”라는 표현이 있다. 《韓昌黎集 卷8》
♣ 첨연무가인[簷燕舞佳人]한 성제(漢成帝)의 후(后)인 조비연(趙飛燕)이 몸이 가벼워서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
♣ 첨유[幨帷]첨유는 수레의 휘장.
♣ 첨윤[詹尹]옛날에 점서(占筮)를 맡았던 자의 이름. 정첨윤(鄭簷尹). 초사(楚辭) 복거(卜居)에 “마음이 어수선하여 종잡을 수 없기에 태복 정첨윤을 찾아갔다.[心煩慮煩 不知所從 乃往見太卜鄭詹尹]"라는 말이 있다.
♣ 첨의[瞻依]어버이를 뜻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반(小弁)의 “눈에 뜨이나니 모두 아버님이요, 마음에 그리나니 모두 어머님일세.[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첨전홀후[瞻前忽後]상대방의 경지가 너무도 높고 묘해서, 내 자신의 얕은 경지에서는 촌탁하기가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안연(顔淵)이 위연(喟然)히 탄식하기를 ‘우러러 볼수록 높고 파 들어갈수록 견고하도다. 바라볼 때는 앞에 있더니 문득 다시 뒤에 섰구나.’ 하였다.”는 대목에서 인용된 말이다.
♣ 첨정[添丁]아들을 낳는 것을 낮추어 부르는 말. 당(唐) 나라 제도에 남자가 스무살이 되면 정(丁)이라 하여 부역(賦役)에 나가야 하므로 생긴 말이다. 당서(唐書) 노동전(盧仝傳)에, “仝生子 名曰添丁 欲爲國持役也”라고 보임.
♣ 첨조계충[簷鳥階蟲]처마의 새와 뜨락의 벌레라는 뜻으로, 하찮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첨첨[尖尖]뾰족하고 날카로운 모양.
♣ 첨첨[湉湉]수면이 평평한 모양
♣ 첨해옥[添海屋]해옥첨주(海屋添籌). 옛날 세 노인이 함께 만난 자리에 어떤 자가 나이를 묻자, 모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를 놓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하나씩 놓은 산가지가 열칸 집에 이미 가득찼다.” 하였다 한다. 《東坡志林 卷二》
♣ 첩개[貼个]화살을 넣는 활통의 방언(方言)이다.
♣ 첩경[捷徑]지름길. 어떠한 일에 이르기 쉬운 방법.
♣ 첩고[疊鼓]조선시대 입직(入職)한 군사를 모으기 위한 신호로, 북을 잦은 간격으로 계속 치는 것.
♣ 첩괄[帖括]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에 “명경(明經)하는 자는 다만 첩괄만 기억한다.” 하였으므로 구속(舊俗)에 과거의 응시문을 첩괄이라 이름.
♣ 첩벽연쌍주[疊璧聯雙珠]문장이 구슬을 중첩으로 꿰어 놓은 듯하다는 말이다.
♣ 첩여[婕妤]한대(漢代)에 궁중(宮中)의 여관(女官)을 일컫는 말. 전하여 궁녀(宮女)를 가리킨다.
♣ 첩역[鰈域]첩역은 우리나라 사신을 말함.
♣ 첩운시[疊韻詩]모음(母音)이 같고 또 운(韻)이 같은 글자들끼리 모아 시구를 만들어서 짓는 시를 말한다.
♣ 첩접[踥蹀]걸어서 나가다.
♣ 첩첩[捷捷]거동이 민첩한 모양, 말을 많이 지껄이는 소리
♣ 첩첩[喋喋]거침없이 잘 지껄이는 모양
♣ 첩첩[怗怗]고요한 모양
♣ 첩첩[帖帖]유연히 침착한 모양,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모양, 드리워진 모양, 심복하는 모양
♣ 첩첩[呫呫]작은 모양, 소곤거리는 모양, 말이 많은 모양
♣ 첩해[鰈海]우리나라 바다에 첩어(鰈魚)가 난다 하여, 우리 나라를 첩해(鰈海)니 첩역(鰈域)이니 한다.
♣ 첩환마[妾換馬]이백(李白)의 시(詩) 소년행(少年行)에 “천금짜리 준마로 젊은 첩을 바꾸어.[千金駿馬換少妾]”라는 구절이 있다.
♣ 청[鯖]정은 한(漢) 나라 때 오후(五侯)가 즐겼다는 요리로서, 생선과 육류(肉類) 등을 한데 섞어 끓인 것인데, 맛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 청[聽]허락하다. 말대로 하다.
♣ 청간[靑簡]청간은 서책(書冊)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역사(歷史)를 집필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 청간문장[靑簡文章]죽간(竹簡)에 저술한 평생의 글을 말한다.
♣ 청간위수편[靑簡爲誰編]두보(杜甫)의 시에 “운대에선 하루 종일 공신(功臣) 그림 그리는데, 청사는 누굴 위해 엮어질는지.[雲臺終日畫 靑簡爲誰編]”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9 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
♣ 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의 호이다. 이석기는 바로 그의 손자이다.
♣ 청강[淸江]큰 강물을 맑게 하다.
♣ 청강공[淸江公]신흠의 처부(妻父)로서 호가 청강인 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을 말한다.
♣ 청강해중룡[聽講海中龍]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로, 용왕(龍王)의 딸이 나이 겨우 8세에 지혜가 숙성하여 문수보살의 교화로 제법(諸法)의 진리를 깨닫고, 석가(釋迦)에게 와서 보살행을 수행하여 끝내 성불(成佛)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청거[淸渠]용담현(龍潭縣)의 고호이다.
♣ 청검[請劍]강직한 충신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으로 영신(佞臣)인 장우(張禹)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청한 고사에서 유래한다. 《漢書 朱雲傳》
♣ 청경우독[晴耕雨讀]날이 맑으면 밭갈고, 비오면 책을 읽음
♣ 청계[淸溪]영유(永柔)의 옛 이름이다.
♣ 청계간소영[淸溪看疎影]송 나라 임포(林逋)의 매화시(梅花詩)에, “성긴 그림자 비꼈으매 물이 맑고 얕다[疏影橫斜水淸淺].”란 귀절이 유명하다.
♣ 청계무[聽鷄舞]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때아닌 닭울음이 들리자 유곤을 발로 차 깨우면서 말하기를 “이는 상서롭지 못한 소리가 아니다.” 하고는, 일어나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천하가 들끓어 호걸들이 다투어 일어나게 되면 나와 그대는 마땅히 중원(中原)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조적은 석륵(石勒)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자강을 건너다가 강 한가운데서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강을 건널 때는 이 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다 한다.
♣ 청계향[靑桂香]침향(沈香)을 만드는 향나무에서 추출되는 향 이름.
♣ 청고[請告]휴가나 퇴직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 청고옹[靑皐翁]청고는 화가인 윤용(尹▣)의 호인데, 조부인 윤두서(尹斗緖)와 아버지인 윤덕희(尹德熙)도 모두 그림으로 유명하였다.
♣ 청광[淸狂]병이 들어 미친 사람은 맥(脉)이 탁한데 청광(淸狂)이란 것은 병 없이 미친 것이란 뜻이다.
♣ 청광승별소[淸光勝別宵]음력 8월 보름달이 다른 보름달보다 밝음을 이름. 한유(韓愈)의 팔월십오야시(八月十五夜詩)에 “일년 중 밝은 달이 오늘 밤에 가장 밝다오[一年明月今宵多]”하였다.
♣ 청구[靑丘]동국(東國)을 가리킴.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이다.
♣ 청구[靑邱]동방에 있는 수택(水澤) 이름.
♣ 청구[靑駒]청구(靑駒)는 한단몽에서 나오는 노생의 말[馬] 이름이다.
♣ 청구학[靑丘雘]선경(仙境)의 좋은 약이나 물건을 말함. 해내 십주기(海內 十州記)에 “청구주(靑丘州)가 남해 진사방(辰巳方)에 있는데, 선초(仙草)ㆍ영약(靈藥)ㆍ감액(甘液)ㆍ옥영(玉英)ㆍ구해(韭薤)ㆍ단학(丹雘) 등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 청군[靑裙]푸른 옷은 옛날 중국의 평민 복장이다.
♣ 청궁[靑宮]청궁은 태자궁(太子宮) 곧 동궁(東宮)을 가리킨다. 동쪽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 청규[靑規]궁정(宮庭)의 금지(禁地) 또는 어전(御前)에 까는 부들 자리[蒲席]를 이르는데, 주로 간언(諫言)을 드리거나 시사(時事)를 주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 청규[靑虯]푸른 규룡.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보검이 땅에 묻혀 하늘의 두우(斗牛) 간에 자기(紫氣)를 내뿜다가 발굴되었는데, 한동안 세상에 머물다가 홀연히 물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용으로 변하더니 물결을 가르며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晉書 張華傳》
♣ 청금[淸禁]엄숙하고 청정한 궁중을 말한다.
♣ 청금[靑衿]청금은 깃이 푸른 옷으로, 옛날 학생들이 입던 옷이다.
♣ 청금무[淸琴撫]공자(孔子)의 제자 자천(子賤)이 선보(單父)의 원으로 가서 거문고를 타며 백성을 잘 다스렸다.
♣ 청기[靑旗]술 파는 집. 술을 파는 집에 푸른 기를 달기 때문이다. 청패(靑旆) 또는 청렴(靑帘)이라고도 한다.
♣ 청낭[靑囊]진(晉) 나라 때 곽공(郭公)이 저술했다고 하는, 오행(五行)ㆍ천문(天文)ㆍ복서(卜筮)에 관한 일을 기록한 책임.
♣ 청낭결[靑囊訣]오행ㆍ천문ㆍ복서(卜筮)의 비결. 곧 그에 관한 서적을 뜻한다.
♣ 청녀[靑女]서리와 눈을 주관하는 전설 속의 여신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가을 3월에 이르면 청녀가 나와서 서리와 눈을 내린다.” 하였다.
♣ 청노[靑奴]죽부인(竹夫人)과 같은 것으로, 여름 밤에 끼고 자면서 서늘한 기운을 취하는 데 쓰는 대오리로 만든 제구이다. 《事物異名錄 竹奴》
♣ 청니[靑泥]화륜은 해를 가리키며 청니(靑泥)는 푸른 진흙이란 뜻으로 깊은 진흙 속을 가리킨 것이다.
♣ 청담[淸談]명리(名利)‧명문(名聞)을 떠난 청아(淸雅)한 이야기. 고상한 이야기. 위진 시대에 유행한 노장(老莊)을 조술(祖述)하고 속세를 떠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론(空理空論).
♣ 청담[淸談]청담은 고상한 담론, 또는 노장(老莊)을 숭상하여 세무(世務)를 벗어난 청정(淸淨)한 공리공담(空理空談)을 가리키는데, 특히 동진(東晉) 때 사문(沙門)인 지둔(支遁)을 비롯하여 왕연(王衍) 등이 청담으로 유명하였다.
♣ 청담아융[淸談阿戎]청담은 속되지 않은 청아한 이야기를 말하고, 아융은 종제(從弟)의 별칭임. 남제(南齊) 때 뜻이 청아하고 행검이 고결하기로 이름난 왕사원(王思遠)이 무제(武帝)가 죽어 명제(明帝)를 들여세우는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왕안(王晏)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후회가 없도록 하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그말을 듣지 않았다가 나중에 말하기를 “지난날 아융이 나에게 자제할 것을 권했는데 만일 그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과 같은 영광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왕안은 결국 명제로부터 반역을 꿈꾼다는 의심을 받아 화를 당하고 말았다. 《南史 卷二十四 王思遠傳》
♣ 청도[淸都]전설 속에 나오는 천제(天帝)가 사는 궁궐을 가리킨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다는 곳인데 이는 제도(帝都)를 가리킨다.
♣ 청도오운[淸都五雲]청도(淸都)는 전설상의 천제(天帝)가 사는 궁궐로 항상 오색 구름으로 덮여 있다 한다.
♣ 청독[靑犢]후한 광무제 때 여러 반적(反賊) 중의 하나.
♣ 청동[靑童]선인(仙人)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즉 선동(仙童)과 같은 뜻이다.
♣ 청라[靑螺]부처의 머리
♣ 청란미[靑鸞尾]대빗자루[竹箒]를 말함.
♣ 청랑간[靑琅玕]낭간은 대(竹)의 이칭. 봉황(鳳凰)이 주리면 대나무 열매를 먹고 목마르면 천지(天池)의 물을 마신다고 한다.
♣ 청랑간[靑琅玕]푸른 산호주(珊瑚珠)를 말한다.
♣ 청려배[靑驢背]당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눈 속에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으며 시를 애써 지었다.
♣ 청려장[靑藜杖]청려장은 푸른 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를 말함.
♣ 청련[靑蓮]청련은 당(唐) 나라 때 시인 이백(李白)이 태어난 고향의 현명(縣名). 그래서 이백은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호하였다.
♣ 청련거사적선옹[靑蓮居士謫仙翁]이백(李白)은 촉(蜀)나라의 청련산(靑蓮山) 아래 살았으며, 장안(長安)에 왔을 때 하지장(賀知章)이 그를 만나, “자네는 천상(天上)에서 잠깐 인간(人間)에 귀양살이로 온 신선이다.” 하였다.
♣ 청련궁[靑蓮宮]불사(佛寺)의 이칭(異稱)이다.
♣ 청련시금속[靑蓮是金粟]청련(靑蓮)은 이태백(李太白)의 호이고, 금속(金粟)은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준말로 유마힐(維摩詰)을 뜻하는데, 이태백의 시 가운데 “금속여래는 바로 나의 후신일세[金粟如來是後身]”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18 答湖州迦葉司馬問白是何人》
♣ 청련우[靑蓮宇]사찰 건물을 말한다. 불교에서 연꽃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꽃이라 하여 불화(佛花)로 삼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사물에는 보통 연꽃을 등장시켜 표현하곤 한다. 절을 연궁(蓮宮)이라 한다.
♣ 청렴결백[淸廉潔白]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하고 희다. 개인적인 이익이나 욕심에 마음이 끌리지 않고 곧고 깨끗함
♣ 청루[靑樓]기생집을 말한다.
♣ 청루몽[靑鏤夢]남조 때 문장이었던 기소유(紀少瑜)가 꿈에 문장 육수(陸倕)가 청루 붓 한 묶음을 주며 “자네는 이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쓰라.” 하였는데 그 뒤로 문장이 크게 진보되었다. 《南史 卷七十二 紀少瑜傳》
♣ 청류[淸流]청류는 청렴결백한 사람을 뜻함.
♣ 청류몰어이당[淸流沒於李唐]청류는 청렴 결백한 선비들을 뜻하는데, 당(唐) 나라 말기에 주전충(朱全忠)이 청류들을 질시하여 조신(朝臣) 30여 인을 백마역(白馬驛)에서 한꺼번에 죽이어 하수(河水)에 던져버린 고사에서 온 말이다. 《通鑑節要 唐紀》
♣ 청륙[靑陸]청륙은 달이 운행하는 길이다. 《文選 顔延之三月三日曲水詩序》 주에 “입춘(立春)ㆍ춘분(春分) 때에 달이 동청도(東靑道)로 행하는데, 청륙은 바로 동도이다.” 하였다.
♣ 청릉[靑綾]꽃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 비단의 직조물(織造物)로, 한(漢) 나라 때 상서랑(尙書郞)이 건례문(建禮門)에서 숙직할 때 지급했다는 고급 잠옷이다. 청선(靑璿)이란 말과 같다.
♣ 청릉[靑綾]푸른 깁으로 만든 이불로, 궁중에서 숙직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때 상서랑(尙書郞)이 번을 서면 푸른 깁으로 만든 이불[靑綾被]과 흰 깁으로 만든 이불[白綾被], 또는 비단 이불[錦被]을 주었던 데서 유래한다.
♣ 청릉지[靑綾地]관각(館閣)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상서랑(尙書郞)이 건례문(建禮門)에서 숙직할 때 푸른 비단 잠옷[靑綾被]을 지급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 청릉피[靑綾被]청릉으로 만든 이불을 말함. 한관의(漢官儀)에 의하면, 상서랑(尙書郞)이 입직(入直)하면 청릉피(靑綾被)를 제공한다고 하였다.
♣ 청리첩[靑李帖]진(晉) 나라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청리내금(靑李來禽)’이라 써서 서첩(書帖)을 만들었다. 청리는 오얏, 내금은 능금이다.
♣ 청림[靑林]천자(天子)의 어원(御苑)을 말한다. 《文選 張衡 思玄賦》
♣ 청명[靑冥]높은 하늘 위의 선경과 같은 제왕의 궁정(宮廷)을 말한다.
♣ 청명[靑冥]옛날 보검(寶劍)의 이름이다.
♣ 청명[靑冥]청천(靑天).
♣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명(明) 나라 십주(十洲) 구영(仇英)이 그린 그림 이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청명상하도 발문을 보면 “도읍의 부성(富盛)은 송(宋)의 변경(汴京)만한 데가 없고, 계절의 번화함은 청명(淸明)만한 때가 없고, 그림을 섬묘하게 그리기는 구영(仇英) 같은 이가 없다.” 하였으니, 이 그림은 구영이 청명 때 변경의 번화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 청몽승저[淸夢乘軧]마음이 고상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위개(衛玠)가 악광(樂廣)에게 꿈이 무엇인가 묻자, 악광이 “생각에서 온 것이다.” 하니, 위개가 “형신(形神)이 아무 사물을 접하지 않고 꾸는 꿈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므로 악광이 “이것은 원인[因]에서 온 것이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쥐구멍에 들어가서 철저(鐵杵)를 씹는 꿈을 꾸어 보지 못했다.” 하였는데, 이는 곧 아무 생각도 없고 원인도 없기 때문이라는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文學》
♣ 청묘[淸廟]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으로,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의 사당에 제사할 때 드린 시(詩)이기도 하다.
♣ 청묘[淸廟]청묘는 종묘(宗廟) 혹은 그곳에서 연주하는 악장(樂章)을 가리킨다. 황종은 12율(律) 가운데 양률(陽律)에 속하는 여섯 종류의 율 중 첫 번째 율이고, 대려는 여섯 음률(陰律) 중 네 번째 율로서, 음악이나 시문이 장엄하고 정대한 것을 비유할 때 곧잘 병칭해서 쓴다.
♣ 청묘[淸廟]청정(淸淨)한 사당이란 뜻으로 태묘(太廟) 즉 종묘(宗廟)를 말한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아, 심원한 청묘, 엄숙하고 화평하며 밝은 공경과 제후이다.[於穆淸廟 肅雝顯相]" 하였는데, 이는 주공(周公)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왕에게 제사드린 시이다.
♣ 청묘슬[淸廟瑟]시경(詩經) 주송(周頌)의 청묘(淸廟) 시에 가락을 맞춘 비파인데, 줄은 굵고 줄구멍이 넓어서 여운(餘韻)이 길다. 《禮記 樂記》
♣ 청묘슬[淸廟瑟]청묘는 주 문왕(周文王)의 종묘(宗廟)이므로 즉 문왕의 덕을 찬미한 아악(雅樂)을 뜻한다.
♣ 청묘현[淸廟絃]시경(詩經) 주송(周頌) 청묘시(淸廟詩)에 가락을 맞춘 비파로 줄이 굵고 구멍이 넓어서 여운이 길다. 《禮記 樂記》
♣ 청문[靑門]백악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 권10 권주14수(勸酒十四首)의 “어디서도 술 잊긴 어려운건데 청문에서 송별이 많기도 하네[何處難忘酒 靑門送別多].”에서 나온 것으로, 한(漢) 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문의 이름인데 서울의 성문을 뜻한다.
♣ 청문[靑門]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으로, 도성의 동쪽 문을 말한다.
♣ 청문과[靑門瓜]한(漢) 나라 때 은자(隱者) 소평(邵平)이 청문(靑門) 밖에 심었던 오이를 말하는데, 이를 동릉과(東陵瓜)라고도 한다.
♣ 청문과지[靑門瓜地]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를 지내다가 진 나라가 망하자 평민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청문 밖에 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함.
♣ 청문노방류[靑門路傍柳]옛날 장안(長安) 동남쪽의 문 색깔이 파랗기 때문에 청문(靑門) 혹은 청성문(靑城門)이라고 불렀는데, 송별하는 사람들이 청문 밖 패교(覇橋)까지 와서 그곳의 버들가지를 꺾어 작별의 정표로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三輔黃圖 橋》
♣ 청문무금적[靑門撫金狄]동한(東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계자훈(薊子訓)이라는 선인(仙人)이 장안(長安) 동문 밖에서 진시황(秦始皇) 때 만들어진 적인 동상(狄人銅像)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당시에 이 동상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벌써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 청문연류[靑門煙柳]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시 ‘낙유원(樂遊原)’의 “청문 밖엔 연류가 하늘거리고 자각에는 운송이 춤을 추누나[靑門弄煙柳 紫閣舞雲松]"에서 나온 것으로, 청문은 한(漢)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문인데 우리나라의 도성문을 가리키고, 연류는 수양버들을 먼 곳에서 바라볼 때 안개처럼 보인다 하여 생긴 말이다.
♣ 청문종과[靑門種瓜]청문은 한(漢) 나라 장안성(張安城) 동남쪽에 있던 문 이름인데, 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이 진 나라가 망한 뒤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여기에서 오이를 심어 가꾸며 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청문학고후[靑門學故侯]청문은 한 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말하고, 고후(故侯)는 옛 진(秦) 나라 때의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을 이르는데, 동릉후 소평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포의(布衣)가 되어 장안성의 청문 밖에 오이를 재배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청문과(靑門瓜) 또는 동릉과(東陵瓜)라고도 한다.
♣ 청방[靑駹]중국에서 볼 때, 조선은 동방이요 동방은 청색(靑色)에 해당하므로, 전하여 조선의 말을 이른다.
♣ 청백리[淸白吏]청렴 결백한 관리.
♣ 청백분섬섬[靑白分覢覢]위진(魏晋)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 그는 좋아하는 자가 찾아가면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싫은 자가 찾아가면 백안시(白眼視)했다 한다.
♣ 청백안[靑白眼]청안은 반가이 맞이하는 눈길이며 백안은 그의 반대로 싫어하는 눈초리.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상중(喪中)에 있을 적에 혜강(嵇康)의 형 혜희(嵇喜)가 조문을 오자 백안으로 대했고 혜강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오자 청안으로 대한 데서 온 것이다. 《晉書 阮籍傳》
♣ 청백안[靑白眼]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끊어 버리는 태도를 말한다.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반가운 이를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어설픈 사람을 만나면 백안시(白眼視)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 청백전가[淸白傳家]한(漢) 나라 양진(楊震)이 말하기를, “내가 자손에게 재물을 주지 않는 대신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이란 명예를 전하여 주리라.” 하였다. 대대로 청백한 것을 청백전가(淸白傳家)라 한다.
♣ 청변[靑邊]토란의 일종으로 크기가 병(甁)만하다 한다. 《廣志》
♣ 청부[靑蚨]구멍 뚫린 동전(銅錢), 즉 돈을 말한다. 청부충(靑蚨蟲) 모자(母子)의 피를 동전에 발라 놓으면, 어디에 있든 서로 날아와 같은 장소로 모여든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搜神記 卷13》
♣ 청부현[靑鳧縣]청부는 청송(靑松)의 고호(古號)이다.
♣ 청비[淸碑]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가리킨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이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지금의 송파(松坡)에 세운 것으로, 표면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 뒤쪽에는 한문으로 씌어 있다.
♣ 청빈[淸貧]마음이 깨끗하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물들지 않고 자연히 다른사람보다 생활은 가난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자신의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걷는 말입니다.
♣ 청빈[靑蘋]청빈은 부평초와 같은 수초(水草)인데, 송옥(宋玉)이 “夫風生於地 起於靑蘋之末”이라고 읊은 이래로 바람과 관련된 시어(詩語)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風賦》
♣ 청사[靑詞]청사는 초제(醮祭)에 올리는 축문(祝文)이다.
♣ 청사[靑蛇]칼 이름.
♣ 청사간편[靑絲簡編]푸른 실로 죽간(竹簡)을 엮어 만든 책, 곧 고대의 사책(史冊)을 뜻한다.
♣ 청사기사허[靑蛇氣射虛]청사는 명검의 이름이다. 허성은 가을철의 시기를 바로잡는다는 별 이름으로,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온다. 옛날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명검이 땅에 묻혀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를 내쏘았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36 張華傳》
♣ 청사백옥반[靑絲白玉盤]청사는 푸른 실처럼 생긴 부추나물[韭菜]을 가리키는데, 두보(杜甫)의 입춘시(立春詩)에 “쟁반은 고문에서 나와 백옥이 운행되고 나물은 섬섬옥수 거쳐서 청사가 보내지도다[盤出高門行白玉 菜傳纖手送靑絲]”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十八》
♣ 청산유수[靑山流水]푸른 산에 흐르는 물. 청산에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말을 잘함. 막힘 없이 말을 썩 잘함
♣ 청산일발[靑山一髮]주권(周權)의 시에 “靑山一髮認邳州蕭條暮上魚豚市"가 있음
♣ 청살[靑殺]청살은 사책(史冊)을 뜻하는 것이다.
♣ 청삼[靑衫]당(唐) 나라 때 품계(品階)가 낮은 하급 문관이 입던 관복으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된 백거이(白居易)의 고사에 연유하여, 실의에 빠진 관리를 표현할 때 보통 ‘청삼사마(靑衫司馬)’라고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비파인(琵琶引)’에 나오는 “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이라는 시구는 특히 유명하다.
♣ 청삼[靑衫]청삼은 보통 서생(書生)을 뜻하는데, 청색 옷을 입었던 문관 8품과 9품의 관직을 가리키기도 한다.
♣ 청상[淸賞]경치 좋은 산수(山水)를 유람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 청상[靑裳]망우초(忘憂草) 즉 원추리의 별칭이다.
♣ 청상[靑箱]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이름. 유송(劉宋) 때 왕준지(王准之)의 집은 대대로 강좌(江左)의 옛 일을 잘 알아서 이를 기록하여 푸른 상자[靑箱]에 넣어 두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일러 ‘왕씨(王氏)의 청상학(靑葙學)’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六十》
♣ 청상[淸商]청상곡.
♣ 청상곡[淸商曲]가을에 속하는 상성(商聲)의 맑고도 슬픈 노래를 말한다.
♣ 청상악[淸商樂]고대 한족(漢族)의 민간 음악이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畫角三聲刁斗曉 淸商一部管絃秋 他時麟閣圖勳業 更合何人居上頭”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7, 河陽石尙書 破迴鶻 迎貴主 過上黨 射鷺▣ 繪畫爲圖 猥蒙見示 稱歎不足 以詩美之》
♣ 청상전가[靑箱傳家]송서(宋書) 왕준지전(王准之傳)에, 증조 표지(彪之) 때부터 박학한 지식과 사실(史實) 등을 푸른 궤[靑箱]에 넣어 대대로 전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왕씨 청상학(王氏靑箱學)’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청상조[淸商調]청상은 청량(淸涼)한 가을 바람을 뜻함.
♣ 청색심전구[淸塞心傳句]정곡(鄭谷)의 시에 “靈一心傳淸塞心 可公吟後楚公吟"이라 하였음.
♣ 청서[靑鼠]간지(干支)를 오색(五色)과 물상(物像)에 맞춘 것으로, 갑자(甲子)를 말함.
♣ 청석[靑石]충렬(忠烈)을 격려해 지은 시의 제목. 백장경집 풍유(諷諭)에 보임.
♣ 청석령[靑石嶺]요동의 봉황성(鳳凰城)에서 서북쪽으로 195리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 푸른 돌이 많아 청석령이라 칭한다고 한다.
♣ 청성[淸聖]순결한 성인으로, 백이 숙제를 가리킨다.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 가운데 순결한 자이다.” 하였다.
♣ 청성노[靑城老]권호문(權好文)을 가리킨다.
♣ 청소로기회[淸嘯虜騎廻]진(晉) 나라 유곤(劉琨)이 병주 자사(幷州刺使)가 되어 진위장군(振威將軍)의 직함을 띠고 있을 때 오랑캐가 노략질을 자행하는 진양(晉陽)으로 가서 전투를 벌이던 중 오랑캐 기병에게 성이 겹겹으로 포위되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유곤은 달빛 아래 누각에 올라가 청아하게 휘파람을 불자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한 생각에 장탄식을 하였고, 다시 한밤중에 피리를 불자 눈물을 흘리며 고향땅을 간절히 그리워하였고, 새벽녘에 피리를 또 불자 적들은 모두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고 한다. 《晉書 卷六十二 劉琨傳》
♣ 청송[聽松]조선 명종(明宗) 때 학자 청송당(聽松堂) 성수침(成守琛)을 말한다. 그의 집이 북악산 기슭에 있었다.
♣ 청송서원[靑松誓援]신의(信義)의 우정을 맺음을 말한다. 문선(文選) 유준광 절교서(劉峻廣絶交書)에 “청송을 더위잡아 마음을 맹세하고 백수(白水)를 가리켜 신의를 표한다.” 하였다.
♣ 청송자[靑松子]권호문(權好文)을 가리킨다.
♣ 청송후조[靑松後彫]“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뒤에 시들어짐을 아나니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논어(論語) 절개가 굳음을 비유한 공자의 말이다.
♣ 청쇄[靑瑣]청쇄는 청색 꽃무늬로 장식한 황궁(皇宮)의 문을 말한다. 한 나라 때 궁궐문에 쇠사슬 같은 모양을 새기고 푸른 칠을 한 데서 유래된 말.
♣ 청쇄[靑ꝯ]한(漢) 나라 때의 궁궐문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조정(朝廷)을 지칭한다.
♣ 청쇄달[靑瑣闥]청쇄문(靑瑣門). 한대(漢代)의 문 이름.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이 날이 저물면 청쇄문에 와 입대(入對)하였음. 《韻會》
♣ 청쇄문[靑鎖門]청쇄문은 한대(漢代)의 궁문(宮門) 이름. 한 나라 때에 궁문에다 쇠사슬 같은 모양을 새기고 푸른 칠을 했으므로 이름인데 급사ㆍ황문(黃門) 등이 아침과 저녁으로 대기해 있다가 진알(進謁)하던 곳이다. 《漢舊儀 上》
♣ 청승[靑蠅]쉬파리. 아첨을 떨며 참소를 잘하는 소인배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쉬파리 윙윙대며 울타리에 앉았나니, 점잖으신 군자여 참언 믿지 말지어다.[營營靑蠅 止于樊 豈弟君子 無信讒言]”라고 하였다.
♣ 청승[靑繩]푸른색의 노끈. 전하여 임금이 있는 곳을 뜻함. 왕건(王建)의 온천궁행(溫泉宮行)에 “시월 초하룻날 천자가 오셨는데, 푸른 끈 친 어로에는 먼지 한 점 없었네.[十月一日天子來 靑繩御路無塵埃]" 하였음.
♣ 청승부기[靑蠅付驥]남의 도움을 힘입어 공명(功名)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외효전(隈囂傳)에 “파리는 수보(數步) 이상을 날지 못하나, 곧 준마의 꼬리에 의탁하면 무리에서 뛰어날 수 있다.” 하였다.
♣ 청시[淸時]평화스러운 때. 즉 태평 세대의 뜻이다.
♣ 청신[靑薪]아직 마르지 않은 생나무 땔감.
♣ 청신[靑神]청신은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남쪽에 있는 지명(地名)이다.
♣ 청신등롱[淸晨登隴]조식(曹植)의 시에 “淸晨登隴首"라는 유명한 글귀가 있음.
♣ 청신소두[淸晨搔頭]새벽에 머리를 빗는다.
♣ 청심괴람[靑深愧藍]푸른빛이 진하여 쪽빛이 무색하다. 푸른빛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도 더 푸르다는 것으로 즉 후진이 선생을 앞지른다는 뜻이다.
♣ 청심루[淸心樓]신륵사(神勒寺) 대안(對岸) 여주(驪州)에 있다. 제가(諸家)의 명제영(名題詠)이 많다.
♣ 청심칠자[淸心七字]요선(堯仙)이 지은 시를 말함.
♣ 청아[菁莪]무성한 쑥. 인재(人材)의 교육을 뜻함.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의 편명을 줄인 말이다. 청청자아 서(序)에 “청청자아는 인재 기르는 것을 찬미한 노래다.”라고 하였다.
♣ 청아[靑娥]아리따운 소녀, 즉 관기(官妓)를 가리킨다.
♣ 청아낙수[靑蛾落水]청아는 눈썹먹으로 그린 푸른 눈썹으로 미인을 뜻한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때 백제의 많은 궁녀들이 부소산(扶蘇山) 서쪽 끝의 절벽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은 일을 말한다.
♣ 청아시[菁莪詩]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청청자아편(菁菁者莪篇)이 있는데, 그 서(序)에 “인재를 육성함을 즐겁게 여기는 시다.” 하였다.
♣ 청안[靑眼]반갑게 맞는다는 뜻.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 “완적(阮籍)이 상주가 되었을 때 혜희(嵇喜)가 예절을 갖추어 조문하니 완적이 흘기는 눈[白眼]으로 대하고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갖고 찾아오니 완적이 기뻐하여 반가운 눈[靑眼]으로 맞이했다.” 하였다.
♣ 청안[靑眼]청ㆍ백안(靑白眼)을 이름인데, 무릇 안청(眼靑)이란 빛이 푸르고 그 곁의 빛은 희므로 기쁠 때에 바로 푸른빛이 나타나고, 성이 날 때에 흘겨보게 되면 흰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완적은 예교(禮敎)에 구속되지 않고 청ㆍ백안을 잘하여, 예속(禮俗)의 선비를 보면 백안으로 대하고, 혜강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오면 기뻐하여 청안으로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사람을 중시하는 것은 청안이라 이르고 사람을 경시하는 것을 백안이라 이름.
♣ 청야[淸野]전쟁 때에 적에게 편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들판에 있는 풀과 나무 및 곡식이나 인가까지도 모두 제거해서 들판이 텅 비게 하는 것이다.
♣ 청약[靑蒻]푸른 약초를 엮어 만든 삿갓. 청약립(靑蒻笠).
♣ 청양[靑陽]봄의 별칭.
♣ 청양곡[靑陽曲]한(漢) 나라 때 교사가(郊祀歌)의 편명(篇名)이다.
♣ 청양관[靑陽館]청양관은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는 객사(客舍)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가 평양을 점령하자 김응서(金應瑞)는, 소서비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밀계(密計)하고 밤중에 소서비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장중(帳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적장(敵將)은 목이 없이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기둥을 쳐서 칼자국이 났다. 김응서는 소서비의 머리를 꿰어차고서, 계월향과는 같이 적진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城)을 넘어 자기 진영으로 온 것을 말한다. 《平壤志ㆍ丙子錄》
♣ 청양좌개[靑陽左介]천자가 정월에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정월에는 청양좌개에 거처한다.” 했는데, 그 주에 “명당(明堂) 동쪽에 있는 것이 청양태묘(靑陽太廟)이고, 태묘의 남쪽에 있는 것이 청양우개(靑陽右介)이고, 태묘의 북쪽에 있는 것이 청양좌개다.” 하였다.
♣ 청연각[淸燕閣]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궁중에서 도서를 비치하고 학사(學士)들과 조석으로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곳.
♣ 청연화중생[靑蓮火中生]파르스름한 불꽃들이 위로 치솟아 올라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파란 연꽃에 비유한 것을 말한 것이다.
♣ 청열석[淸裂石]피리 소리가 청아하다는 뜻. 국사보(國史補)에 “이주(李周)가 연죽(煙竹)을 가지고 피리를 만들었는데, 철석(鐵石)같이 견고하였다. 달밤에 배를 띄우고 불면 그 소리가 청아하면서 웅장하여 산석(山石)도 깨어질 정도였다.” 하였다.
♣ 청영[請纓]결박 지울 밧줄을 청한다는 말로, 스스로 전쟁터에 나가 적을 격파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권64 종군전(終軍傳)에 한(漢)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왕에게 “긴 끈[長纓]을 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남월왕(南越王)을 묶어다가 대궐 아래까지 데려오겠습니다.”고 자청(自請)한 데서 온 말이다. 후인(後人)들은 이로 인해, 군(軍)에 투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을 청영(請纓)이라고 쓴다.
♣ 청영계남월[請纓繫南越]한(漢) 나라의 종군(終軍)이 남월왕을 결박해 대궐에 바치겠으니 긴 밧줄을 달라고 청한 고사인데, 뒤에는 군대에 투신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음. 《漢書 終軍傳》
♣ 청영지[請纓志]군대에 투입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 종군(終軍)이, 긴 끈을 주면 반드시 남월왕(南越王)을 결박하여 궐하(闕下)에 바치겠다고 지원한 데서 온 말. 《漢書 終軍傳》
♣ 청오[靑烏]까마귀로, 태양을 가리킨다. 태양 안에는 발이 셋 달린 까마귀가 산다고 한다.
♣ 청오[靑烏]풍수가(風水家)의 술(術)을 이름. 진(晉) 나라 곽박(郭璞)의 장서(葬書)에서 한(漢) 나라 청오선생(靑烏先生)의 장경(葬經)의 설(說)을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청오사[靑烏士]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를 말한다.
♣ 청오술[靑烏術]옛날 팽조(彭祖)의 제자 청오가 지리(地理)를 잘 알았다는 데서, 즉 감여가(堪輿家)의 술수(術數)를 이른 말이다.
♣ 청오술[靑烏術]진(晉) 나라 곽박(郭璞)의 장서(葬書)로서,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에 관한 술서(術書)인 청오경(靑烏經)이 있다.
♣ 청옥안[靑玉案]고시(古詩)의 시어(詩語)이다. (漢) 나라 장형(張衡)의 ‘사수시(四愁詩)’에 나오는 “何以報之靑玉案”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인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도 “試吟靑玉案 莫羨紫羅囊”이라는 구절이 있다.’案’은 옛 ‘椀’자임.
♣ 청옥주담[聽玉麈談]진대(晉代)의 고승(高僧) 축도생(竺道生)이 호구산(虎丘山)에서 돌멩이들을 모아 놓고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며 ‘실유불성(悉有佛性)’의 법문을 펼치자, 돌멩이들이 부처의 본의(本意)에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道生法師》
♣ 청완적안[靑阮籍眼]진(晉)의 완적이 사람을 대할 때 지기(知己)는 푸른 눈으로 보고 속인(俗人)은 흰 눈으로 본 데서 나온 말이다.
♣ 청우[靑牛]노자(老子)가 지은 도덕경(道德經)을 말한다.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을 짓고 서쪽으로 갈 때 청우를 타고 갔으므로, 이를 인해 노자의 대칭(代稱)으로 쓴다.
♣ 청우[靑牛]청우는 청우도사(靑牛道士)의 약칭으로 한(漢) 나라 때 방사(方士) 봉군달(封君達)이 항상 푸른 소를 타고 다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곧 도사를 가리킨다.
♣ 청우도유사[靑牛渡流沙]노자는 주(周)의 주하사(柱下史)로 있다가 세상 어지러움을 꺼려 그 벼슬을 내놓고 청우차(靑牛車)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유사(流沙)를 건너 대진(大秦)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 청우와노령[靑牛臥老苓]청우(靑牛)는 검은 털의 소, 혹은 신선들이 타고 다닌다는 소. 이백(李白)의 시에 “꽃이 피니 청우가 누웠고, 소나무가 높으니 백학이 잠들었다.[花暖靑牛臥 松高白鶴眠]" 하였다. 복령은 오래된 소나무 뿌리에서 기생한 한방재(漢方材)이다.
♣ 청우화노석[靑牛化老石]청우는 푸른 소인데 노자(老子)는 청우를 타고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을 지났다. 이때 청우를 매었던 곳에는 청우수(靑牛樹)가 있는데, 청우가 돌로 화했다 한다.
♣ 청운[靑雲]높은 벼슬에 오른 것을 비유한 말임. 청운지사(靑雲之士)의 준말로, 학덕(學德)이 당세에 가장 높거나 고위 고관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 청운군[靑雲君]심명세(沈明世)의 봉호(封號)로, 심광세의 아우이다.
♣ 청운만리[靑雲萬里]푸른 구름 일만 리. 곧 원대한 포부나 높은 이상을 이르는 말
♣ 청운지사[靑雲之士]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 숙제가 비록 훌륭했다 하더라도 공자가 칭찬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고 하는 평민들의 경우, 청운지사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여기서 청운지사는 은근히 사마천 자신을 가리킨 것임.
♣ 청운지지[靑雲之志]뜻이 고결함. 출세하고자 하는 뜻.
♣ 청원[淸源]바람이 모아져 있는 창고.
♣ 청원루[淸遠樓]청원루는 평양부 서쪽 9리 양명포(揚命浦) 위에 있는데, 대안(對岸)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다락을 지었는데, 그 밑으로 통할 만하다.
♣ 청위종남[淸渭終南]청위는 중국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곁을 흐르는 위하(渭河)로 물이 맑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종남(終南)은 역시 서안시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서안시는 한(漢)ㆍ당(唐)을 비롯한 역대 많은 왕조의 도읍지 장안(長安)인데, 흔히 우리 나라 한양과 비유된다.
♣ 청유[靑油]청유막(靑油幕)의 준말로, 장수의 막부(幕府)를 말한다. 막부(幕府)를 청유막 혹은 줄여서 청유(靑油)나 유막(油幕)이라고도 한다.
♣ 청유막[靑油幕]장군의 막부(幕府)를 말한 것이다. 즉 종사관(從事官)들과 작전을 상의하는 장군의 장막(帳幕)을 말한다. 장군의 막료 즉 종사관을 흔히 청유사(靑油士)라고 일컫는다.
♣ 청음[淸陰]학자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한 김상헌(金尙憲)의 호이다. 그는 인조(仁祖) 때 좌의정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청(淸)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반대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뒤에 심양(瀋陽)으로 잡혀가서 3년 간의 억류 생활을 하였다.
♣ 청음경노학지시[淸音警露鶴知時]8월이 되어 이슬이 내리면 학이 소리를 내어 울면서 살기 좋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서로 경계한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90》
♣ 청의동자[靑衣童子]옛날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사면령(赦免令)을 쓰고 있었는데, 쉬파리[靑蠅]가 한 마리 날아들어와 쫓으면 다시 오곤 하였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사면령 내릴 것을 전부 알고 있으므로, 사실을 알아보니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길거리에 사면령이 내렸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했다. 그제서야 부견은 전의 쉬파리가 바로 청의동자로 화했음을 알았다 한다. 《白孔六帖》
♣ 청의유욕[靑衣幽辱]청의는 낮은 관리나 평민이 입는 옷이다. 진(晉) 나라 6대 황제인 회제(懷帝)가 유총(劉聰)에게 포로로 잡혀서 푸른 옷을 입고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했다. 《晉書 卷5 孝懷帝紀》
♣ 청의이환어황포[靑衣已換於黃袍]하인의 의복인데 진(晉) 나라 회제(懷帝)가 유총(兪聰)에게 포로가 되어 청의를 입고 연회에서 술을 따랐다. 여기서는 휘종과 그 아들 흠종(欽宗)이 모두 금 나라에 잡혀 간 것을 말한다.
♣ 청의주[靑衣主]망국(亡國)의 임금을 가리킨다. 동진(東晉)의 효회제(孝懷帝)가 평양(平陽)에 몽진(蒙塵)했을 때 유총(劉聰)이 큰 잔치를 열고는 회제에게 청의(靑衣)를 입혀 술을 따르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孝懷帝紀》
♣ 청이[靑姨]서리 귀신인 청녀(靑女)를 전용하여 쓴 것이다.
♣ 청이불탁[淸而不濁]깨끗하기만 하고 탁하지 않아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만 굴원(屈原)을 가리킨 말이다. ☞ 회석(懷石)
♣ 청자[靑紫]한 나라 제도에,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쓰고 구경(九卿)은 푸른 인끈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공경(公卿)의 지위를 일컫는 말이다.
♣ 청작[靑雀]신선의 사자(使者)를 뜻함. 한 무제(漢武帝) 때 갑자기 궁전 앞에 청작이 날아들자, 동방삭(東方朔)이 말하기를 “서왕모(西王母)가 오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조금 뒤에 서왕모가 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청잠[靑岑]선산(仙山)의 이름이다.
♣ 청재[淸齋]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정성스러운 뜻을 표하는 것을 말한다.
♣ 청재[淸齋]진시(辰時)에 물 한 잔을 마시고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음을 일러 청재(淸齋)라 한다고 함. 《釋氏要覽》
♣ 청전[靑錢]당(唐) 나라 장천(張薦)의 조부 장작(張鷟)은 재주가 뛰어나 여러 차례 과거에 모두 갑과(甲科)로 뽑히니 원외랑(員外郞) 원반천(員半千)은 자주 공경(公卿)들에게 “장작의 문장은 마치 청동전(靑銅錢)과 같아 만번 시험보면 만번 합격한다.” 하니, 사람들은 그를 청전 학사(靑錢學士)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新唐書 張薦傳》
♣ 청전[靑田]산 이름인데 밭에서 청지(靑芝)가 나고 학의 서식처(棲息處)라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영가군기(永嘉郡記)에 “목계(沐溪)의 들 청전(靑田)에 백학(白鶴) 한 쌍이 살았는데 매년 새끼를 쳐서 키워 떠나 보내고 어미 한 쌍만 그대로 남아서 살았다. 정갈하고 흰 빛이 사랑스러웠다.” 하였음.
♣ 청전[靑氈]청전 구물(靑氈舊物)의 준말로, 벼슬살이하던 집안의 구업(舊業)이나 유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의 집에 도둑 떼가 들어 몽땅 털어가려 하자, 왕헌지가 침상에 그대로 누워 있다가 “푸른 담요는 우리 집안의 옛 물건이니 남겨 두지 않겠는가.[靑氈是我家舊物 可特置否]”라고 하자, 도둑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청빈한 선비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변변찮은 재물을 가리킨다. 《晉書 王獻之傳》
♣ 청전[靑錢]청전은 곧 청동전(靑銅錢)을 가리키는 말이다.
♣ 청전[靑氈]청전은 푸른색의 담요인데, 벼슬하는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란 말로, 대대로 벼슬자리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70권에, “왕자경(王子敬)이 재실(齋室) 안에 누워 있을 적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쳤는데, 온 방 안의 물건을 다 훔치도록 자경은 누운 채로 가만히 있다가 도둑이 탑(榻) 위로 올라가서 훔칠 물건을 찾으려고 하자 왕자경이 소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석염(石染)과 청전(靑氈)은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물건이니 특별히 놔둘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도둑이 물건을 놓아둔 채 도망쳤다.” 하였다.
♣ 청전[靑田]학이 나는 고장의 이름이다. 초학기(初學記) 제30권에, “수목계(洙沐溪)가 있는데, 청전(靑田)에서의 거리가 9리이다. 이 가운데 백학(白鶴) 한 쌍이 살면서 해마다 새끼를 낳는데, 새끼들은 다 자라면 모두 떠나가고 오직 어미백학 한 쌍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색깔이 아주 희어서 사랑스러운바, 이는 신선이 기르는 학이라고 한다.” 하였다.
♣ 청전선[靑錢選]푸른 동전(銅錢)을 여러 개 모아도 모양이 똑같다는 말이다. 서언고사(書言故事) 문장류(文章類)에 “여러 번 과거를 보아 번번이 합격하는 글을 청전만선(靑錢萬選)이라 한다.” 하였다.
♣ 청전업수왕[靑氈業守王]옛날 왕자경(王子敬)이 방에 누워 있었는데, 도둑이 들어 왕자경의 침상을 뒤지려 하므로, 꼼짝 않고 누워만 있던 왕자경이 큰 소리로, “이 청전(靑氈)은 우리 집 세전의 구물(舊物)인데, 특별히 남겨둘 수 없겠소?”하자, 도둑들이 놀라서 그냥 두고 달아났다 한다. 청전은 푸른 빛깔의 털 담(毯)을 말하는데, 사환가(仕宦家)의 세전지물(世傳之物)이나 선대의 가업을 청전고물(靑氈故物)이라 한다.
♣ 청전작[靑錢鷟]당(唐) 나라 장작(張鷟)이 글을 잘 지으니 원반천(員半千)이 그의 글을 “청동전(靑銅錢) 같아서 가려내고 추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칭찬하니, 그때 사람들이 장작을 청전학사라고 불렀다.
♣ 청전질[靑田質]중국 영가군(永嘉郡)의 청전(靑田) 땅에서 생산된다는 유명한 학(鶴)을 말한다.
♣ 청전학사[靑錢學士]문장이 훌륭한 선비를 말한다. 당서(唐書) 장천전(張薦傳)에 “장천(張薦)의 조부 족(鷟)은 자가 문성(文成)인데 여덟 차례나 제거(制擧)에서 갑제(甲制)가 되었고, 네 차례의 판책(判策)에서 참선(參選)하니 사람들이 ‘족의 문장이 청동전(靑銅錢) 같아서 만선 만중(萬選萬中)한다.’ 하여 청전학사라고 했다.” 하였다.
♣ 청점[靑黏]약초 이름으로 황지(黃芝)를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번아(樊阿)가 화타(華佗)에게서 이 약초에 대한 비방을 얻어 장수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方術傳下 華佗》
♣ 청정[靑精]도가(道家)에서 청정석(靑精石)으로 지은 밥[飯]을 이르는데, 이것을 오래 복용하면 안색이 좋아지고 장수를 한다고 한다.
♣ 청정[靑精]식물 이름. 일명 남촉(南燭)으로 그 줄기와 잎을 찧어 즙을 짜서 그 즙에다 쌀을 담갔다가 쪄서 말리기를 아홉 번을 한 다음 그 쌀로 밥을 짓는데, 신선(神仙)이 먹는다고 함. 《神仙傳》
♣ 청정공작[淸淨公綽]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맹공작(孟公綽)은 조(趙) 나라나 위(魏) 나라 대부의 가신(家臣)은 될 수 있지만 등(滕) 나라나 설(薛) 나라의 대부는 될 수 없다.” 한 말이 있는데, 그 주에 “공작은 노 나라 대부인데, 염정(廉靜)하고 욕심은 없으나 재주가 적은 사람이다.” 하였다.
♣ 청정반[靑精飯]청정반은 도가(道家)에서 청정석(靑精石)으로 지은 밥을 이르는데, 이것을 오래 복용하면 장수한다고 한다.
♣ 청정채[淸淨債]도(道)에 통하여 청정(淸淨)에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소식시(蘇軾詩)에 “산중에 청정의 빚을 질까 걱정이다.[恐負山中淸淨債]" 하였다.
♣ 청제[靑帝]천제(天帝)의 이름으로 동방을 맡은 신인데, 동방은 봄에 해당된다 하여 봄의 신이라고도 한다.
♣ 청제[靑齊]청주와 제주. 중국의 발해와 산동성 지역을 범칭(泛稱)한 것임.
♣ 청제당익로[靑齊當鷁路]옛날 제(齊) 나라 땅인 청주(靑州) 즉 산동반도 일대가 청(淸) 나라에 넘어간 것을 말한다. 익로(鷁路)는 “물새 여섯 마리가 하늘에서 거센 바람을 만나 뒤로 밀려 날아갔다.[六鷁退飛]”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재앙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春秋左傳 僖公 16年》
♣ 청제수방혼탁하[淸濟須防混濁河]충정(忠正)한 마음을 견지하며 혼탁한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말라는 말이다. 제(齊) 나라의 제수는 맑고 하수는 흐렸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戰國策 燕策》
♣ 청조[靑鳥]삼족조(三足鳥)라고도 한다. 한 무제(漢武帝) 고사(故事)에 의하면 7월 7일에 홀연히 청조(靑鳥)가 날아와 궁전(宮殿) 앞에 모여들거늘 동방삭(東方朔)이 말하기를 “이는 서왕모(西王母)가 찾아오려는 것이옵니다.” 하더니, 조금 후세 서왕모가 오는데 청조 세 마리가 서왕모의 곁에 모시고 왔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사자(使者)를 가리켜 청조라고 칭호하였다. 《史記 卷一百十七 司馬相如傳》
♣ 청조[靑鳥]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를 이른 말로, 전하여 미인(美人)을 뜻한다.
♣ 청조[靑鳥]세상에서 전하기를, 낙산사(洛山寺) 굴 앞에 가서 지성으로 절하고 조아리면 푸른 새가 나타난다 한다.
♣ 청조루[聽潮樓]강진현(康津縣) 객관(客館) 남쪽에 위치한 누대.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이 건립한 것이라고 함. 《東國輿地勝覽》
♣ 청조사[靑鳥使]여신선 서왕모(西王母)의 사자이다.
♣ 청주국[靑州麴]술을 가리킴. 좋은 술을 청주종사(靑州從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청주종사[靑州從事]미주(美酒)의 별칭이다. 좋지 못한 술은 평원독우(平原督郵)라 부르고 좋은 술을 청주종사(靑州從事)라 부르는데 그것은 평원에 격현(鬲縣)이 있고 청주에 제현(齊縣)이 있는데, 좋지 못한 술은 가슴[膈]에서 오르내리고 좋은 술은 배꼽[臍]까지 내려간다는 뜻으로 그렇게 술에다 은어(隱語)를 붙인 것이다.
♣ 청죽[靑竹]청사(靑史)로, 사적(史籍)을 말한다. 고대에는 죽간(竹簡)에 역사를 기록하였다.
♣ 청죽게[靑竹偈]세상과는 동떨어진 별천지의 신비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에게서 푸른 대나무 지팡이를 받아 공중을 비행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傳》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작별의 지팡이 청죽을 남겨 두고, 노래를 부르며 자연의 땅을 밟노매라.[別杖留靑竹 行歌躡紫煙]”라는 표현이 있다. 《李太白集 卷16 奉餞高尊師如貴道士傳道籙畢歸北海》
♣ 청준[靑樽]가득 따른 술잔을 말한다. 술의 별명이 녹의(綠蟻)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청진[淸塵]청고(淸高)한 유풍(遺風)이나 고상한 기질을 뜻하는 말로, 상대방에 대한 경칭(敬稱)이다.
♣ 청질[淸質]맑고 깨끗한 달빛을 뜻하는 시어이다. 남조 송(宋) 사장(謝莊)의 ‘월부(月賦)’에 “서서히 떠오르는 저 맑은 바탕이여, 우윳빛 달빛을 내려보내 감싸주네.[升淸質之悠悠 降澄輝之藹藹]”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다.
♣ 청징[淸澄]맑고 깨끗함.
♣ 청천[晴川]비가 온 뒤 맑게 갠 날의 시냇물로, 당(唐) 나라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에 “비 갠 강엔 선명한 한양의 나무, 방초 금새 무성해진 앵무주로다.[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청천고[菁川藁]청천고는 곧 강희맹(姜希孟)의 유고(遺藁)를 가리키는데, 강희맹은 당대에 문장이 으뜸으로 일컬어졌으므로, 그가 죽자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 청천백일[靑天白日]맑게 댄 대낮, 뒤가 썩 깨끗한 일, 원죄가 판명되어 무죄가 됨.
♣ 청천벽력[靑天霹靂]맑개 갠 하늘에서 치는 벼락, 곧 뜻밖에 생긴 변(變)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 청철자삼[靑鐵紫蔘]모두 지방의 특산물을 뜻하는데, 황정견(黃庭堅)의 송고자돈부하남시(送顧子敦赴河南詩)에 “자삼은 캘 만하니 진공하는데 옳거니와 청철은 많지 않으니 돈을 주조하지 말게나[紫蔘可掘宣包貢 靑鐵無多莫鑄錢]”한 데서 온 말이다.
♣ 청초장시[靑草瘴時]청초호는 중국 호남(湖南) 상음현(湘陰縣) 북쪽 백리 지점에 있는 호수 이름으로 남쪽은 상수(湘水), 북쪽은 동정호(洞庭湖)와 통하는데 호수에 푸른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왕우승집(王右丞集) 권10 송양소부폄빈주(送楊少府貶彬州)의 “청초호 장기 낄 제 하구를 지나가고 흰물결 거센 속에 분성을 나가리라[靑草瘴時過夏口 白頭浪裏出湓城].”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 광주 지방에서는 여름은 청초장, 가을은 황모장(黃茅瘴)이라 부른다 하여 청초장을 여름의 대명사로 쓴다.
♣ 청총[靑塚]청총은 한 원제(漢元帝)의 궁녀(宮女)인 왕소군(王昭君)의 묘(墓)를 가리킨다. 그녀가 흉노(匈奴)에게 시집가서 살다가 죽었는데, 호중(胡中)에는 백초(白草)가 많은데도 유독 그녀의 무덤에는 청초가 나므로 일컬은 말이다.
♣ 청총월명선패성[靑塚月明仙佩聲]왕소군(王昭君)의 패옥(佩玉) 소리를 말한다. 왕소군이 한 원제(漢元帝)의 후궁(後宮)에 들어왔다가 선우(單于)에게 시집가서 그곳에서 죽었는데 백초(白草)만 생장하는 그곳에 유독 왕소군의 무덤에는 청초(靑草)가 자랐으므로 청총이라 한 것인데, 그 무덤에서 달밤에 패옥 소리가 난다고 전한다. 《西京雜記 卷二》
♣ 청추[淸秋]음력 9월을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보통 만추(晩秋)를 가리킨다.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청추절(淸秋節)이라고도 한다.
♣ 청추사락[靑鞦射落]청추(靑鞦)는 꿩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가국(賈國)의 대부로 용모가 몹시 추악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반대로 아주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건네는 일이 없고 또 웃는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를 데리고 강기슭 언덕 위로 가서는 꿩을 쏘아 맞혀 떨어뜨리니, 그 무술에 감탄한 나머지 그제서야 아내가 웃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左傳 昭公 二十八年》
♣ 청추송옥비[淸秋宋玉悲]송옥(宋玉)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굴원이 쫓겨난 것을 불쌍하게 여겨 지은 구변(九辯)에, “슬프구나 가을의 기운됨이여, 소슬해라 초목이 떨어져서 쇠하누나.” 하였다.
♣ 청춘치오마[靑春馳五馬]한(漢) 나라 때 태수(太守)는 다섯 말이 끄는 수레를 탔는데, 우리나라 역시 현(縣)이 아닌 군(郡)의 장관인 경우에는 이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푸른 봄날은 동시에 연소한 나이의 인물임을 은유(隱喩)하고 있다.
♣ 청출어람[靑出於藍]푸른빛은 쪽풀에서 나왔으나, 그 빛깔은 쪽풀의 빛깔보다 더 푸름. 즉, 원래의 것보다 거기서 파생되거나 응용된 것이 더 뛰어날 때 비유적으로 쓰이는데, 특히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흔히 쓰임. 《荀子 勸學篇》
♣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
♣ 청탁병탄[淸濁倂呑]바다가 깨끗한 강물이나 오염된 강물이나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듯 이 선인이나 악인을 차별하지 않고 오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어서 어떤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것을 비유하여 사용되는 말.
♣ 청탄[靑灘]일찍이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던 여동근(呂東根)의 호이다.
♣ 청태부[靑苔賦]양(梁) 나라 강엄(江淹)이 지은 글. 청태부에 “내가 산을 깎아 실(室) 하나를 만들었는데, 푸른 이끼가 끼었기에 내 뜻대로 이 부를 짓는다. 아, 푸른 이끼의 무성함이여, 그 무엇도 빛깔이 저와 같을 수 없으리.[嗟靑苔之依依兮 無色類而可方]" 하였다.
♣ 청편[靑編]사적(史籍)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 청평[靑萍]옛날의 보검 이름이다.
♣ 청평[淸平]춘천(春川) 북쪽에 있는 청평산. 경운산(慶雲山)이다.
♣ 청평거사[淸平居士]고려 때의 은사(隱士) 이자현(李資玄)을 가리킴. 이자현은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뒤에 춘천(春川)의 청평산에 들어가 청평거사라 자호하고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 청평검[靑萍劍]옛날의 보검(寶劍) 이름이다.
♣ 청평사[淸平詞]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작약꽃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에서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놀이하면서, 술에 만취되어 주사(酒肆)에 누워 있던 이백(李白)을 불러다가 악부(樂府)를 짓게 하자 그 자리에서 곧 이를 지어 바쳤는데 이것이 곧 유명한 청평조사(淸平調詞) 3장(章)이다.
♣ 청평사[淸平詞]양귀비(楊貴妃)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詩)로서, 삼수(三首)로 되어 있다. 기일(其一)은 “구름 보매 의상 생각나고 꽃 보면 얼굴 연상되는데, 봄바람 난간에 스치고 이슬은 꽃에 짙게 내렸구나. 만약 군옥산 위에서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요대의 달 아래에서 만나겠지.[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檻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臺月下逢]" 하였고, 기이(其二)는 “꽃 한 송이 요염하고 향기에 이슬 어렸는데, 무산의 구름과 비는 부질없이 창자만 끊는구나. 여보게나 한(漢) 나라 궁중에 누구와 비슷하려나, 귀엽게도 조비연의 새 단장 말쑥하구려.[一枝濃艶露凝香 雲雨巫山枉斷腸 借問漢宮誰得似 可憐飛燕倚新妝]" 했으며, 기삼(其三)은 “이름난 꽃과 경국 미인 서로 기뻐하니, 임금님도 항상 웃음띠고 감상하누나. 봄바람에 그지없는 한 풀려고 침향정 북쪽 난간 의지하였네.[名花傾國兩相歡 常得君王帶笑看 解釋春風無限恨 沈香亭北倚欄干]" 하였다.
♣ 청평악[淸平樂]가사의 이름. 청아하고 평탄한 악곡이라는 뜻이다.
♣ 청평조[淸平調]악부(樂府)의 곡명(曲名)으로, 당명황(唐明皇)이 달밤에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후원에서 놀며, 이태백을 시켜 청평조 3장을 짓게 하였는데, 그 곡조 중에 모란과 양귀비를 비유하여 읊었다.
♣ 청포[靑蒲]부들로 방석을 엮어 바닥을 덮은 천자(天子)의 내정(內庭)을 말한다. 임금의 침실에 까는 푸른 털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임금의 침실에 그어 놓은 푸른색의 한계선이라는 설이 더 우세한데, 황후(皇后)가 아니면 그 선을 넘지 못한다고 하니, 곧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을 말함. 한(漢) 나라 사단(史丹)이 원제(元帝)가 병이 들어 태자를 폐하고 정도왕(定陶王)을 세우려고 하자 곧장 임금의 침실로 들어가 청포 위에 엎드려 간하여 원제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음. 《漢書 卷八十二 史丹傳》
♣ 청포[靑蒲]임금의 자리 앞에 깔린 청포석(靑蒲席)인데, 신하가 임금의 허물을 지극히 간(諫)할 때에는 이 자리에 엎드린다.
♣ 청풍명월[淸風明月]맑은 바람과 밝은 달. 곧 자연
♣ 청풍백로[靑楓白露]이 시구는, 당(唐) 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중별 이평사 시(重別李評事詩)인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莫道秋江離別難 舟船明日是長安 吳姬緩舞留君醉 隨意靑楓白露寒”
♣ 청풍서래 수파불흥[淸風徐來 水波不興]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 초두에 나오는 말로,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어와 물결도 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 청풍오월북창면[淸風五月北窓眠]한가로운 여름날 북창 가에 높이 눕자 맑은 바람이 삽상하게 불어 오더라[夏月虛閑 高臥北窓之下 淸風颯至]는 도연명(陶淵明)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陶潛傳》
♣ 청풍일탑[淸風一榻]남사(南史) 사혜전(謝譓傳)에 “나의 방안에 들어오는 이는 맑은 바람뿐이고 나와 대작(對酌)하는 이는 밝은 달뿐이다.” 하였다.
♣ 청필[淸蹕]청필은 황제가 행차할 때 도로를 정리하고 행인을 벽제한다는 말이다. 청(淸)은 도로를 깨끗이 소제한다는 뜻이요, 필(蹕)은 행인을 벽제(辟除)하는 것으로, 옛날 천자가 출행할 때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곧 임금의 행차를 뜻한다. 북사(北史) 유림전(儒林傳)에 “제(帝)는 곤면(袞冕)을 입고 예용을 갖추고 청필하여 태학에 거둥했다.” 하였다.
♣ 청필삼성[淸蹕三聲]청필은 임금이 거둥할 때 도로를 깨끗이 쓸고 통행인을 물러서게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물러서라’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한다.
♣ 청하[淸河]청하 최씨(崔氏)를 가리킨 것인데, 중국에서 청하 최씨가 명문(名門)이었다.
♣ 청하[靑霞]푸른 놀. 또는 뜻이 매우 고상함을 말한다. 강엄(江淹)의 한부(恨賦)에 “鬱靑霞之奇意"가 있는데, 선주(善注)에 “청하기의(靑霞奇意)는 뜻이 높음을 말한다.” 하였음.
♣ 청학동[靑鶴洞]지리산(智異山)의 가장 깊숙한 동학(洞壑)에는 청학(靑鶴)이 깃들여 있고 신선들이 산다 하며 역대 시인들의 제영(題詠)이 많다.
♣ 청한자[淸寒子]김시습(金時習)의 호.
♣ 청해[靑海]중국 중부의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황하의 발원이 되는 호수인 청해(靑海)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하였으며, 서쪽 변경의 오랑캐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 청해[靑海]청해는 북청(北靑)의 옛 이름이다.
♣ 청해[靑海]청해는 중국 서북방에 있는 중국에서 가장 큰 함수호(鹹水湖)의 이름인데, 상고 때부터 한(漢) 나라 때까지는 서강(西羌), 동진(東晉) 이후로는 토곡혼(吐谷渾), 당 나라 초기에는 토번(吐番), 명 나라 때는 몽고의 영역이 되었다.
♣ 청해진[靑海鎭]청해성(靑海省) 동북부의 대호(大湖)에 위치한 군영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가서한(歌舒翰)이 신위군(神威軍)을 배치하여 토번(吐蕃)을 막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 청허부[淸虛府]천상의 신선들이 사는 곳임.
♣ 청헌[淸獻]청헌은 송(宋) 조변(趙抃)의 시호. 조변이 두 번에 걸쳐 촉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행검을 청렴하게 하여 모범을 보이자 풍속이 바뀌어졌다고 함. 《宋史 卷三百一十六 趙抃傳》
♣ 청현[晴懸]소리가 청량(淸亮)한, 달아 놓고 치는 악기인 쇠북[鍾], 경쇠[磬]와 같은 것을 말한다.
♣ 청형[聽瑩]귀로 듣고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齊物論》
♣ 청혜포말[靑鞋布襪]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아, 약야계여, 그리고 운문사여. 나만 홀로 어찌하여 진흙 속에 빠져 있나, 짚신에 버선 신고 이제 숨어 살리라.[若耶溪 雲門寺 吾獨胡爲在泥滓 靑鞋布襪從此始]”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奉先劉少府新畫山水障歌》
♣ 청화[淸和]날씨가 맑고 화창함.
♣ 청화절[淸和節]음력 4월의 이칭이다.
♣ 청황[靑黃]굴의 열매가 처음에는 푸르다가 익으면 누렇게 된다. 이는 잎의 푸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청황경시재[靑黃竟是災]꾸밈이 본성을 상실함을 이름.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백년 묵은 나무를 잘라 제사에 쓰는 술통[犠尊]을 만들어 푸른 빛과 누른 빛으로 꾸미고, 그 잘라버린 끄트머리는 도랑에다 버리는데, 뒤에 그 술통을 도랑에 버렸던 그 끄트머리와 비교해보면, 미악(美惡)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나무의 본성을 잃음은 한가지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청황시목재[靑黃是木災]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백 년 된 나무를 깎아 제기(祭器)를 만들면서 갖가지 색칠을 하여 꾸미고 나머지 토막들은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제기와 나머지 토막들 사이에 미추(美醜)의 차별은 있을지 몰라도 본성을 잃은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百年之木 破爲犧尊 靑黃而文之 其斷在溝中 比犧尊於溝中之斷 則美惡有間矣 其於失性一也]”라 하였다.
♣ 체대[遞代]관직이 교체되는 것.
♣ 체동[螮蝀]무지개인바, 음양의 기운이 어울리지 않아야 할 데서 어울려 생기는 것으로, 천지의 음기(淫氣)를 표상한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체동(蝃蝀)에, “무지개가 동쪽에 있으니, 감히 이를 가리킬 수 없네.[蝃蝀在東 莫之敢指]”하였다.
♣ 체두[杕杜]시경(詩經) 소아의 편명으로, 체두편(杕杜篇)은 병역(兵役)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을 위로하는 시이다.
♣ 체두시[杕杜詩]시경(詩經)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골육간의 정의(情誼)를 읊은 시이다.
♣ 체래[遞來]바꾸어서 오다
♣ 체려강[替戾岡]나간다[出]는 뜻의 갈족(羯族)의 말로,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된 것을 가리킨다. 《晉書 藝術傳 佛圖澄》
♣ 체물[體物]진(晉) 나라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시는 정을 인연하여 화려해지고, 부는 사물을 체하여 청량해진다.[詩緣情而綺靡 賦體物而瀏亮]”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注)에 의하면 “부(賦)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체물(體物)이라고 한다.” 하였다.
♣ 체상[體相]본질을 체, 본질에 의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을 상이라고 한다.
♣ 체악영[棣萼榮]체악은 원래 형제를 일컫는 표현인데, 원(元) 나라 주백기(周伯琦)가 ‘기사(紀事)’라는 시를 지으면서 자주(自注)하기를 “또 세 집안의 형제가 잇따라 급제하였으므로 체악방이라 불렀다.[又有三家兄弟聯中 號棣萼榜]”라고 하였다.
♣ 체용리[體用離]체는 도의 본체이고 용은 사물의 응용을 말함. 체용이 분리된다는 것은 청심과욕(淸心寡欲)해서 마음의 본체를 밝히니 도와 같은 데가 있지만 실상은 사물을 외면하므로 분리를 면치 못한다는 것임.
♣ 체원[體元]원(元)은 선(善)의 뜻인데 선덕(善德)을 몸에 둠을 이름. 춘추(春秋) 춘왕정월(春王正月) 주(注)에 “凡人君卽位 欲其體元以居正"이라 하였음.
♣ 체원[體元]임금은 원(元)을 체(體)하고, 신하는 원(元)을 조화(調和)한다는 말이 옛 글에 있다. 원은 천지의 덕의 근본을 말한 것이다.
♣ 체원삼화육[體元參化育]원(元)은 춘하추동 가운데 봄을 맡고 있으면서 그 나머지 여름, 가을, 겨울도 통괄한다. 주역(周易)의 단사(彖辭)에 “건(乾)의 원(元)은 정말로 위대하다. 만물이 이로 인해 태동하니 하늘을 통괄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봄이 원의 뜻을 따라 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 체읍[涕泣]눈물. 눈물을 흘리며 욺.
♣ 체체[棣棣]“체체”는 잘못된 독음, 바른 독음과 뜻은 “태태; 위의가 있는 모양, 예의에 밝은 모양”이다.
♣ 체체[掣掣]“체체”는 틀린 발음이며 올바른 음과 뜻은 “철철;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리는 모양”이다.
♣ 체화[棣華]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편(常棣篇)은 형제들의 우애(友愛)를 노래한 시인데, 상체꽃은 다닥다닥 붙어 피는 것이 형제의 우애와 유사하다. 자형화(紫荊花)도 역시 같은 꽃이다.
♣ 체화승악[棣華承萼]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함을 이른다. 아가위나무의 꽃과 꽃받침이 서로 의지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을, 형제가 돕고 붙잡아서 번영하는 것에 비유한 것.
♣ 초[麨]볶은 보릿가루.
♣ 초[軺]본디 말이 끄는 작은 수레인데, 특히 사신의 수레를 성초(星軺)라 하였다.
♣ 초[初]사람의 처음에 타고난 착한 본성이란 뜻이다. 공자가 그의 제자 칠조개(漆雕開)에게, “너는 왜 벼슬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였다.
♣ 초[譙]초는 성문 위에 있는 望樓.
♣ 초가난[樵柯爛]옛날에 왕질(王質)이 산에 나무하러 가서 신선들이 바둑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신선이 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배고픈 줄을 모르고 신선들이 바둑을 다 둔 뒤에 돌아보니 그 동안에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옆에 놓아두었던 도끼 자루가 벌써 썩어 있었다 한다.
♣ 초가삼간[草家三間]세 칸으로 된 규모가 작은 초가.
♣ 초가총상수[焦家塚上樹]후한(後漢) 때 초중경(焦仲卿)의 처(妻) 유씨(劉氏)가 시어미의 학대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뒤 재가(再嫁)를 하지 않고 물에 빠져 죽자 중경 역시 이 말을 듣고 정원의 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던 고사가 “爲焦仲卿妻作”이라는 고시(古詩)로 전해 온다.
♣ 초강[焦阬]유령(庾嶺) 밑에서 생산된다는 차[茶]의 이름. 이 차는 처음에는 쓴맛이 나다가 한참 있으면 단맛이 돌아온다고 한다.
♣ 초강독성[楚江獨醒]절조를 굽히지 않다가 조정에서 쫓겨나 있는 처지를 비유한 말이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가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 나왔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라는 말이 있다.
♣ 초강만염상비누[楚江漫染湘妃淚]반죽(斑竹)이라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죽자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초 나라의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반죽이 되었다 한다. 《初學記 卷28 注》
♣ 초객[楚客]비방을 당해 초(楚) 지방으로 유배되어 객지를 떠돌았던 굴원(屈原)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고향을 떠난 나그네를 가리킨다.
♣ 초객대상강[楚客對湘江]잘못되어 가는 나라의 형세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탄식하고 있으리라는 말이다. 초객(楚客)은 상강(湘江) 즉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초 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 초객부웅풍[楚客賦雄風]초객은 전국 시대 초 나라의 문장가인 송옥(宋玉)을 가리키는데, 그가 지은 풍부(風賦)에 의하면 “맑고 시원하여 이목(耳目)을 틔워 주는 것은 대왕(大王)의 웅풍(雄風)이다.”고 하였다.
♣ 초객연패[楚客捐佩]초객은 소인들의 참소를 받아 조정에서 쫓겨난 초 나라의 굴원(屈原)을 말하는데, 굴원의 초사(楚辭)에 “내 결옥을 강물속에 던져버리고 내 패옥을 예수가에 놓아 두었네[捐余玦於江中 遺余珮於澧浦].”라고 하여 벼슬을 그만둔 것을 노래하였다.
♣ 초객적래손국고[楚客謫來飡菊苦]초 나라 사람이란 곧 조정에서 쫓겨나 택반(澤畔)에서 노닐었던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충신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그가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아침엔 목란에 떨어진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떨어진 가을 국화를 먹는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 하였다.
♣ 초객청[楚客淸]굴원은 전국 시대 초 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이다. 그가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어도 나만은 깨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탁하여도 나만은 맑으리라.” 한 말이 있다.
♣ 초객풍림제원자[楚客楓林題怨字]초객은 초 나라의 시인인 송옥(宋玉)이다. 송옥이 지은 구변(九辯)에 가을이 되어 만물이 시드는 것을 원망한 내용이 있다.
♣ 초거[軺車]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로, 사신의 명을 받든 자나 급한 명을 전달하는 자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 초경[楚經]초 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
♣ 초경[焦卿]후한(後漢)의 초중경(焦仲卿)을 가리킨다. 처 유씨(劉氏)와 금슬이 매우 좋게 지내다가, 시어미의 학대에 못 이겨 처가 집을 나가 물에 빠져 죽자, 그 역시 뜰 앞의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이에 대한 장편의 고시(古詩)가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위초중경처작(爲焦仲卿妻作)’이라는 제목으로 전해 온다.
♣ 초계문신[抄啓文臣]조선조(朝鮮朝) 정조(正祖) 때에 당하 문관(堂下文官)으로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선출하여 매월 강독 제술(講讀製述)의 시험을 보게 했던 제도이다.
♣ 초계탕천[焦溪湯泉]초계(焦溪)는 일명 초천(焦泉)으로, 탕천(湯泉)과 함께 온천물을 가리킨다. 참고로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초계도 말라붙고, 탕곡도 얼어붙네.[焦溪涸湯谷凝]”라는 표현이 있다.
♣ 초곡[焦穀]탄 곡식[焦穀]은 싹이 날 수 없다. 《妙法蓮華經》
♣ 초공[梢工]뱃사공.
♣ 초관[貂冠]초관은 옛날 시중(侍中)이나 상시(常侍)가 쓰던 관
♣ 초관[楚冠]초관은 초 나라 사람의 관. 초 나라의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변방에서 귀양살이했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변방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뜻한다.
♣ 초관우철선[貂冠又綴蟬]초관(貂冠) 고관(高官)들만이 쓸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 또 매미 날개같이 고운 갓끈은 또 좀 높아야 쓸 수 있는 것이다.
♣ 초광[楚狂]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인 접여(接輿)를 가리킨 말로, 전하여 은거하는 사람을 뜻한다. 《論語 微子》
♣ 초광성[招廣成]공동산(崆峒山)에 광성자(廣成子)라는 선인(仙人)이 있는데 황제(黃帝)가 가서 도(道)를 물었다.
♣ 초교서[焦校書]초교서는 당(唐) 나라 두보(杜甫)와 동시의 사람으로 교서랑(校書郞)이었던 초씨(焦氏)를 이르는데,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두보의 희증우시(戲贈友詩)에 “보응(寶應) 원년 월건 사월에 초 교서랑이란 이가 있어 스스로 자랑하길 완력이 넘쳐서 길 안든 망아지도 탈 수 있다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말에게 밟히어 입술 찢기고 앞니가 다 빠졌는데 그래도 장심은 수그러들지 않아서 동쪽으로 되놈을 잡으려 한다오[元年建巳月 郞有焦校書 自誇足膂力 能騎生馬駒 一朝被馬踏 脣裂板齒無 壯心不肯已 欲得東擒胡]”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十一》
♣ 초구[貂裘]담비털로 만든 갖옷이다.
♣ 초구현장[楚丘縣長]정읍(井邑)의 고호가 초산(楚山)이므로 정읍 현감을 이른 말인데, 후한(後漢) 때 두 아들과 함께 당세에 학덕(學德)으로 명성이 높았던 진식(陳寔)이 태구 현장(太丘縣長)을 지냈으므로, 여기서는 남의 부형을 높이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 초국대부[楚國大夫]초 나라의 대부는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이 초택(楚澤)으로 유배당하여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었다.
♣ 초국석위손[楚菊夕爲飱]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아침에는 목란(木蘭)에 떨어진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으로 밥짓는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 하였다.
♣ 초국선언[楚國善言]대학(大學)에 “우리 초(楚) 나라는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단지 훌륭한 사람을 보배로 삼는다.”는 초어(楚語)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 초국소[楚國騷]굴원(屈原)은 전국 시대 초(楚)의 충신으로 이소경(離騷經)을 지었는데,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내용이다. 그의 깨끗한 충절과 훌륭한 문장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史記 卷八十四 屈原傳》
♣ 초국풍[楚國風]조사(詔使)의 시풍(詩風)을 말한다.
♣ 초균[楚均]초 나라 영균(靈均)으로 굴원(屈原)을 말함. 영균은 그의 자임.
♣ 초근목피[草根木皮]풀뿌리와 나무껍질. 영양이 없는 악식(惡食).
♣ 초금[貂金]고관(高官)의 관(冠)에 꾸민 화려한 장식으로, 보통 시종신(侍從臣)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 초금[楚金]초 나라에서 생산되는 질이 좋은 쇠를 가리키는데, 특히 칼을 만들기에 좋다고 한다.
♣ 초녀[楚女]무산(巫山)의 신녀(神女).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 유람할 적에 꿈에 한 부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첩은 무산의 신녀인데 그대가 고당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침석에 모시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의 소원대로 시침(侍寢)하도록 하였더니,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첩은 무산의 남쪽 고구(高丘)의 정상(頂上)에 있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아침 저녁마다 양대(陽臺)의 아래에 내리겠습니다.” 하였다. 《宋玉 高唐賦》
♣ 초능지녕[草能指侫]요(堯) 임금 때에 조정의 뜰에 난 풀이 아첨하는 자가 조정에 들어오면 휘어져서 그를 가리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초단[醮壇]도가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단장(壇場).
♣ 초당남수[草堂柟樹]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초당 앞에 서 있는 남수(枏樹)가 풍우(風雨)로 인해 뽑힌 것을 말한다. 두보의 남목위풍우소발탄(枏木爲風雨所拔歎)에 “강에 기대어라 초당 앞의 남수……너를 보려고 여기 와서 살았는데……회오리바람 거세게 불어라, 파도 일고 돌이 구르며 구름은 뭉게뭉게. 줄기는 뇌우를 버티려 안간힘을 쓰지만, 뿌리엔 천원이 말라라 어찌 하늘 뜻이랴.[倚江枏樹草堂前……誅茅卜居總爲此……東南飄風動地至 江翻石走流雲氣 榦排雷雨猶力爭 根斷泉源豈天意]" 하였다.
♣ 초당사걸[初唐四傑]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임.
♣ 초당수문단장인[草堂誰問斷腸人]당(唐) 나라 고적(高適)이 두보(杜甫)에게 보낸 ‘인일기두이습유(人日寄杜二拾遺)’라는 시 첫머리에 “인일에 시를 지어 초당에 부치다니, 벗이 고향 생각함을 멀리서 애달피 여김이라.[人日題詩寄草堂 遙憐故人思故鄕]”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追酬政故蜀州人日見寄 附錄》
♣ 초당시[草堂詩]초당(草堂)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별칭이다.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에 “미풍 따라 가만히 밤중에 내리니, 소리 없이 대지를 촉촉히 적시누나.[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라고 하였다.
♣ 초당시성[草堂詩聖]이백(李白)은 시의 성(聖)이라는 말.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이백의 시집을 초당집(草堂集)이라 하였고, 주자(朱子)는, “白詩…聖於詩者也”라고 하였음.
♣ 초당편[草堂篇]고적(高適)이 두보(杜甫)에게 보낸 ‘인일기두이습유(人日寄杜二拾遺)’의 시를 가리키는데, 그 첫 구절이 “人日題詩寄草堂”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초당편이라고 한 것이다. 이 시는 고상시집(高常侍集) 권5와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23 부록(附錄)에 실려 있으며,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권5에도 소개되어 있다.
♣ 초대춘몽[楚臺春夢]초대는 초 나라 무산(巫山)의 양대(陽臺)를 말한다. 초 회왕(楚懷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저는 무산의 여자로 고당의 나그네가 되었는데, 임금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원컨대 침석(枕席)을 같이 하소서.” 하므로, 회왕이 하룻밤을 같이 잤는바, 다음날 아침에 여인이 떠나면서, “저는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는데, 아침마다 양대(陽臺) 아래에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초도[初度]새로 임관(任官)된 자에게 계속 10일∼30일을 직숙(直宿)시키는 것을 초도(初度)라 한다.
♣ 초도[椒塗]초도는 산초(山椒)를 벽에 바른 궁전으로 후비(后妃)를 뜻한다.
♣ 초동[焦桐]한(漢) 나라 채옹(蔡邕)이 오동나무가 아궁에서 불타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좋은 오동나무로서 거문고를 만들기에 적당한 줄을 알고 곧 꺼내어 타다 남은 것으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 초동급부[樵童汲婦]나무베는 소년과 물긷는 아낙네. 곧 보통 서민을 이르는 말.
♣ 초두[焦頭]초두는 불을 끄다가 머리를 태운 것을 말한다.
♣ 초두란액[焦頭瀾額]남의 불을 끄다가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면서도 자기 몸은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 초란[楚蘭]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중에 많이 나오는 고결한 난초라는 뜻이다.
♣ 초란전[椒蘭殿]후비(后妃)의 궁전을 말한다.
♣ 초란향[楚蘭香]초란은 곧 초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택반(澤畔)을 방황하면서 난초를 캐어 허리에 찼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초량주[招涼珠]서늘함을 부르는 구슬이란 뜻으로, 연(燕) 나라 소왕(昭王)이 항산(恒山)에서 나온 구슬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더울 때 이 구슬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몸이 저절로 시원해졌다고 한다. 《拾遺記 燕昭王》
♣ 초록[草綠]의복에 쪽물들이는 것.
♣ 초록[蕉鹿]인간의 득실(得失)이 꿈과 같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정(鄭) 나라의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고는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 염려되어 구덩이 속에 감춘 다음 풀로 덮어두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감추어 둔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여겼다. 그 사람이 길을 내려오면서 그 일을 떠들어대자 곁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찾아가서 사슴을 가져갔다. 《列子 周穆王》
♣ 초록동색[草綠同色]풀빛과 녹색은 같은 색깔임. 같은 부류끼리는 어울림을 말함.
♣ 초록몽[蕉鹿夢]초록(蕉鹿)의 꿈은 세상이 혼란스러워 진위(眞僞)를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사슴[鹿]을 잡은 나무꾼이 늪지대 속에 나무[蕉]로 덮어 감춰 두었다가 나중에 그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꿈을 꾸었던 것인가 하고 여기고 말았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사슴을 찾아내자, 나중에 그 사람과 소송을 벌이며 꿈 얘기를 주제로 다투었다는 설화가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상세히 나온다.
♣ 초록반혹황중객[蕉鹿反惑隍中客]인간 세상의 득실(得失)이 꿈같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정(鄭) 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러 가서 사슴을 잡아가지고 남이 볼까 염려하여 황중(隍中)에 넣어 파초 잎으로 덮어두었다가 이내 그 사슴 넣어둔 자리를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그것을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길을 따라 가면서 그 꿈속에 있었던 일을 혼자 중얼거리자,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찾아서 사슴을 훔쳐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 초롱[楚弄]초롱은 초 나라 곡조라는 말로, 초 나라 굴원(屈原)의 ‘원유(遠游)’중에 순(舜) 임금의 비(妃)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혼령이 애절하게 비파를 탄다는 ‘상령고슬(湘靈鼓瑟)’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 초료[鷦鷯]뱁새 종류의 작은 새 이름이다. 장자(莊子) 소요유(消遙遊)에 “초료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틀어도 그저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는 말이 있다.
♣ 초료[椒聊]시경(詩經) 당풍(唐風)의 편명이다. 이 시에 “산초 열매 주렁주렁, 한 됫박을 채우고 남네.[椒聊之實 蕃衍盈升]”라고 하였으므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시구로 쓰게 되었다.
♣ 초료[草料]초료는 초료장(草料狀)을 말하며 수령, 진장(鎭將) 등 관원이나 그 가족들이 공무로 지방을 여행할 때에, 필요한 숙식이나 마필 등의 공급을 그 곳의 역참 등에 명령하던 문서이다.
♣ 초료기일지[鷦鷯寄一枝]자신의 분수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에 산다 한들 나뭇가지 한 가지면 족하다.” 하였다.
♣ 초료원조영승번[椒聊遠條盈升蕃]자손이 번성한다는 말. 초료는 후추로 료(聊)는 조사(助詞), 시경(詩經)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는데, 후추는 열매가 많이 달리므로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 초료점일지[鷦鷯占一枝]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들어가 둥우리를 틀 때 나뭇가지 하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 초료택지[鷦鷯擇枝]초료는 뱁새를 말하는데, 장자(莊子) 소요유에 “뱁새가 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가지 하나에 불과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초룡[草龍]초룡은 바로 포도(葡萄)를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때 사문(沙門) 담소(曇霄)가 포도곡(蒲萄谷)에서 노닐다가 포도를 먹고는 포도의 마른 덩굴 하나를 가져와 자기의 절에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살아나서 덩굴이 대단히 높고 넓게 뻗어 마치 유개(帷蓋)처럼 되고, 그 열매 또한 구슬처럼 주렁주렁 열리었으므로, 시인(時人)들이 그 포도를 초룡주장(草龍珠帳)이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 초룡장[草龍帳]유양잡조(酉陽雜俎)에 “구구(具丘)의 남쪽에 포도곡(葡萄谷)이 있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사문(沙門) 담소(曇霄)가 여기에 왔다가 마른 넝쿨을 얻어서 본사(本寺)로 돌아가 심었더니, 높이가 두어 길이나 자라서 그늘진 땅이 둘레가 10여 장(丈)이나 되었다. 그래서 쳐다보면 마치 유개(帷蓋)와 같았고 그 주렁주렁한 열매들은 마치 자줏빛 구슬처럼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초룡주장(草龍珠帳)이라 호칭했다.”고 하였다.
♣ 초룡주장[草龍珠帳]포도(葡萄)를 이름.
♣ 초루[楚膢]루(膢)는 초(楚)에서 매년 12월에 지내는 제사 이름.
♣ 초루[譙樓]성문 위의 망루(望樓). 일반적으로 고루(鼓樓)라 부른다.
♣ 초루[楚纍]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반이소(反離騷)에 “삼가 초(楚) 나라의 상루(湘纍)에게 조의를 표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강(湘江)에 빠져 죽은 굴원(屈原)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 초명[蟭螟]지극히 작은 전설상의 곤충 이름이다. 무리를 지어 모기 눈썹 사이에 집을 짓고 사는데, 들락날락해도 너무나 작아서 모기가 눈치를 채지 못한다고 한다. 《列子 湯問》
♣ 초명살적문소상[蟭螟殺敵蚊巢上]아주 미세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초명(蟭螟)이란 벌레는 하도 작아서 모기의 속눈썹에 집을 짓고 사는데도 모기는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 《列子 湯問》
♣ 초목고[草木枯]송(宋) 나라 때 미산(眉山)에서 소순(蘇洵) 및 그의 두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까지 삼부자(三父子)의 대문장가들이 나오자, 당시 미산 사람들의 말에 “미산이 삼소를 탄생시키니, 초목이 모두 말라 버렸다.[眉山生三蘇 草木盡皆枯]”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초목고[草木枯]훌륭한 인물이 탄생하면 그 지역의 초목이 마른다는 뜻에서, 동도사략(東都事略)에 “미산(眉山)에서 삼소(三蘇)가 나니, 초목들이 모두 다 말라졌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초목변쇠상초객[草木變衰傷楚客]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 송옥(宋玉)을 가리킨다. 송옥의 구변(九辯) 첫머리에 “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 초목요락[草木搖落]초사(楚辭) 구변(九辯) 첫머리에 “슬프다, 가을 기운이여. 싸늘한 바람 불어옴에, 초목 우수수 떨어지고 모습 쇠하게 바뀌었네.[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 초목지명[草木知名]당(唐) 나라 장만복(張萬福)이 강회(江淮) 지역을 잘 다스려 초목까지 위명(威名)을 알고 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七十 張萬福傳》
♣ 초목충어학[草木虫魚學]시경(詩經)은 초목ㆍ조수(鳥獸)ㆍ충어 등 많은 물명(物名)이 나오므로 한 말이다. 이 때문에 오(吳)의 육 기(陸璣)는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鳥獸蟲魚疏)를 지었으니 이는 논어(論語) 양화(陽貨)의 “시를 배우면 초목 금수의 물명을 많이 알게 된다.” 한 공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초미금[焦尾琴]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오동나무가 불타는 소리를 듣고, 좋은 나무인 것을 알고, 불을 때고 있는 자에게 청하여 나무를 꺼내어서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탄 자국이 남아 있었으므로 이름을 초미금이라 했다 한다. 《後漢書 卷六十下 蔡邕傳》
♣ 초미지급[焦眉之急]눈썹에 불이 불음과 같이 매우 다급한 지경. 소미지급(燒眉之急)
♣ 초박[楚璞]초 나라 화씨의 옥덩이란 말이다. 화씨는 변화(卞和)인데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이다. 변화가 옥덩이 하나를 발견하여 전후로 초 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모두 기만의 죄로 몰려 양쪽의 발꿈치가 잘렸다.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변화가 또 옥덩이를 안고 형산(荊山) 밑에서 통곡하자 문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옥덩이를 쪼개어 가공한 결과 보옥(寶玉)을 얻었는데 이를 화씨벽(和氏檗)이라고 일컬었다. 《韓非子 和氏》
♣ 초반송화[椒盤頌花]상고 때 정월 초하루에 손님을 접대할 때는 소반에다 산초(山椒)를 담아 내와 술에다 산초를 넣어 마셨는데, 진(晉) 나라 유진(劉蓁)의 아내가 설날에 초화송(椒花頌)을 지었다고 함.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2 두위댁수세(杜位宅守歲)에 “아융의 집에 와서 새해를 맞으니 산초 담은 소반에 하마꽃을 노래하네[守歲阿戎家 椒盤巳頌花]" 하였음.
♣ 초반포국[椒盤蒱局]한 해를 보내며 술을 먹고 윷놀이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초반은 산초 열매를 담은 소반이라는 뜻으로, 술에다 이 열매를 타서 새해의 술로 썼던 풍속이 있다.
♣ 초방[椒房]초방은 초방전(椒房殿)의 준말로, 후비가 거처하는 궁전 이름이다. 옛날 한 나라 때에 황후 있는 궁중의 내전(內殿)을 호초(胡椒)로 방 바람벽을 발랐으므로 황후 있는 내전을 초방이라 한다.
♣ 초방[椒房]후비(后妃)를 말한다. 후비의 궁전(宮殿)에는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열매가 많이 달리는 산초 열매를 섞어 벽을 바르므로, 이렇게 부른다.
♣ 초백거흔흔[髫白擧欣欣]치자(治者)가 피치자(被治者)와 고락(苦樂)을 함께 하면 백성들이 모두 나와서 치자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서로 이야기를 할 것[擧欣欣然有喜色而相告]이라는 말이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 초백주[椒柏酒]음력 정월 초하루에 마시는 축하 술이다. 설날에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고 가장(家長)에게 올려 축수(祝壽)하는 술.
♣ 초벽도[楚璧盜]전국 시대 장의(張儀)가 초(楚) 나라에 유세하며 정승과 술을 마셨는데, 정승의 옥돌이 없어지자 장의를 의심하여 붙잡아두고 수백 대나 매질을 하다가 풀어 준 고사가 있다. 《史記 卷70》
♣ 초복[初服]벼슬하기 이전의 복장으로, 즉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오는 것을 뜻한다.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의 “나아가도 들어가지 못한 채 허물만 입게 되었으니,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進不入以離尤兮 退將復修吾初服]”에서 나온 것으로, 관직을 버리고 벼슬길에 들어가기 전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를 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 초복[楚服]성복(盛服)을 가리킨다. 엄숙하게 차린 의복.
♣ 초복[初服]초복은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의 “물러나 장차 다시 나의 초복을 손보리라[退將復修吾初服].”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에 입던 의복인데, 일반적으로 벼슬을 그만두어 관복을 벗고 당초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는 것을 말한다. 곧 초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 초복록[蕉覆鹿]인생사의 무상함을 표현한 말. 옛날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사슴을 잡아 남 몰래 파초 잎새로 덮어 놓았었다. 나무를 다하고 사슴을 찾았으나 장소를 잊어버렸다. 그는 사슴을 잡았던 것이 꿈이려니 생각하고서 그 사실을 되뇌며 돌아왔다. 마침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산으로 들어가 사슴을 찾아 가져와 자기 아내에게 나무꾼의 꿈을 자기가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한다. 《列子 周穆王》
♣ 초부족[貂不足]진(晉) 나라 때 조왕윤(趙王倫)의 당(黨)이 모두 경상(卿相)이 되어 그 노졸(奴卒)들까지 작위를 받음으로써, 시중(侍中)ㆍ중상시(中常侍) 등의 관(冠) 장식으로 쓰는 담비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대신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초사[楚詞]굴원과 송옥(宋玉)은 초 나라 사람이므로, 그들의 작품인 사부(詞賦)를 초사(楚詞)라 한다.
♣ 초사[楚些]넋을 부른다는 의미를 지닌 노래인 초사(楚辭)의 초혼(招魂)은 초(楚) 나라 민간의 초혼가(招魂歌) 형식을 본떠서 지은 것이어서 구절 끝에 사(些) 자가 있는데, 이로 인해 초사(楚些)라 명명한 것이다. 혼은 본디 죽은 자의 혼을 말하지만, 초사의 초혼은 송옥(宋玉)이 죄 없이 쫓겨난 굴원(屈原)이 정신이 산란한 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상제(上帝)의 명과 무당의 말을 가탁하여 그 정신을 부른 것이라고 함.
♣ 초사[醮詞]승원(僧院)에서 단(壇)을 모으고 기도할 때 쓰는 말.
♣ 초사청풍[楚些靑楓]초사(楚詞) 초혼(招魂)에 “강물은 넘실넘실 강 언덕엔 신나무 있는데, 저 멀리 바라보니 봄마저 가슴 아파[湛湛江水兮上有楓 目極千里兮傷春心]"를 인용한 말이다. 사(些)는 조사(助詞)이다.
♣ 초산[焦山]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부옥산(浮玉山)이라고도 하는데, 삼국(三國) 때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이 산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초산이라 했으며 초선은 천하가 생긴 이래 1인자라 하여 일초(一焦)라 불렀다.
♣ 초산[楚山]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실의에 잠겼던 초(楚) 나라의 산야라는 뜻이다.
♣ 초산[楚山]정읍(井邑)의 옛 이름이다.
♣ 초산집[椒山集]명 나라 양계성(楊繼盛)의 문집.
♣ 초삽[苕霅]두 시내 이름. 당서(唐書) 장지화전(張志和傳)에, “물 위에 둥실 뜬 집을 지어 초계 삽계 사이 오가는 게 원이라네.[願爲浮家泛宅 往來苕霅間]" 하였음.
♣ 초삽범택[苕霅泛宅]안진경(顔眞卿)이 호주 자사(湖州刺史)가 되었을 때 장지화가 찾아가 알현하자 안진경이 그의 부서진 배를 고치기를 청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가택(家宅)을 물에 띄우고 초계(苕溪)ㆍ삽계(霅溪) 사이를 왕래하고 싶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초삽종래[苕霅從來]당(唐) 나라 때 은사(隱士)인 장지화(張志和)가 친상(親喪)을 당한 뒤로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江湖)에 살면서 연파조도(煙波釣徒)라 자호하였는데, 안진경(顔眞卿)이 호주 자사(湖州刺史)로 있을 때 그가 안진경을 찾아가 뵙자, 안진경이 그의 배가 망가졌음을 보고 새것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장지화가 말하기를, “나는 집을 물에 띄우고서 초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소원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초상[椒觴]설날에 임금과 어버이께 세배 드릴 때 분지술[椒酒]을 나눈다. 분지는 옥형성(玉衡星)의 정(精)이므로 몸을 가볍게 하고 늙음을 안 탄다고 한다.
♣ 초상[椒觴]옛날 풍속에 산초의 꽃이나 열매로 술을 담궜다가 정월 초하루에 자손이 장수를 축원하는 뜻으로 자기 집안의 어른에게 올렸다고 한다. 《初學記 卷四 四民月令》
♣ 초상[蕉裳]파초 잎이 치마처럼 넓다는 뜻이다.
♣ 초생[楚甥]초생은 사위를 뜻한다.
♣ 초생당[草生塘]진(晉)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그의 종제 혜련(惠連)을 꿈속에 보고 나서 지은 시에 ‘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났다네[池塘生春草]’라는 명구를 지었다는 데서 흔히 멀리 헤어진 아우를 그리는 고사로 쓰인다.
♣ 초생옥소[焦生屋燒]삼국 시대 위(魏) 나라 초선(焦先)의 고사. 고사전(高士傳)에 “그는 들불[野火]에 집을 태운 뒤에 밖에서 자는데, 마침 큰 눈이 퍼부었으나 옷을 벗어 멘 채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여겨 다가가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다.
♣ 초서[草書]해서를 실용적인 데에서 더욱 빨리 쓰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글자의 발달 순서는 행서 → 초서 순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초서는 한대에 유행하였는데 빠르게 쓸 수는 있었으나 남이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초서와 느린 해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해서보다는 조금 획을 흘려서 쓰며, 초서보다는 덜 간략한 글자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행서는 생활서로서뿐만 아니라 획의 변화무쌍함 때문에 예술서로서도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 초선[超禪]중 무학(無學)을 이름.
♣ 초선[貂蟬]초선은 담비 꼬리와 매미 날개. 모두 고관(高官)의 관(冠)의 장식으로 썼기 때문에 전하여 조관(朝官)을 뜻한다.
♣ 초선관[貂蟬冠]옛날 시중(侍中)의 관을 초피(貂皮)와 매미깃[蟬翼]으로 꾸몄는데 이를 초선관이라 한다.
♣ 초선두무출[貂蟬兜鍪出]초선(貂蟬)은 임금에게 근시(近侍)하는 관직인 중상시(中常侍)의 관(冠)에 꽂는 것인데,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주반룡(周盤龍)이 변방에 대장(大將)으로 있다가 불려와서 중상시가 되었다. 임금이 묻기를, “초선이 투구보다 어떤가.” 한즉, 대답하기를, “초선이 투구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 초성[楚聲]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시에 엿보이는 애상조(哀傷調)의 노래를 말한다.
♣ 초성[草聖]당(唐)나라 사람 장욱(張旭)이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의 칭호를 얻었는데, 기실은 공손 대랑(公孫大娘)의 칼춤 추는 것을 보고서 예술이 일취월장되었다 한다.
♣ 초성[草聖]초서(草書)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초성(草聖)으로 불렸던 후한(後漢)의 장지(張芝)를 가리킨다.
♣ 초소[楚騷]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으로, 굴원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으나 임금이 간사한 자의 참소를 듣고 멀리하므로 이를 지었다고 한다.
♣ 초소성지언[楚昭誠知言]초(楚) 나라 소왕(昭王)이 군중(軍中)에서 병이 들었는데 그때 새처럼 생긴 붉은 구름이 태양을 끼고 나는 시늉을 하여 왕이 태사(太史)를 불러 물었더니 태사 말이, 이는 초 나라 왕에게 불리한 징조인데 그 불길을 장상(將相)에게로 떠넘길 수는 있다고 하자 소왕은 말하기를, “장수와 재상이라면 바로 나의 팔다리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일인가.” 하고 듣지 않았고, 또 점을 쳤을 때 황하(黃河)가 병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와 대부(大夫)가 빌 것을 청하자 소왕은 또 말하기를, “우리는 선왕(先王) 때부터 강수(江水)ㆍ한수(漢水)만이 우리 국경 안에 있어 망제(望祭)를 지내왔을 뿐이므로 국경 밖에 있는 황하가 병의 빌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고 역시 듣지 않자 공자(孔子)가 그 말을 전해듣고는, 초 소왕은 대도(大道)를 통한 사람이라고 격찬을 하였다. 《史記 楚世家》
♣ 초소유매[楚騷遺梅]어떤 사물에 대해 시로 읊지 않은 것을 말한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많은 꽃들을 언급하면서도 매화에 대해서만은 언급하지 않았다.
♣ 초수[苕水]소내. 정약용의 출생지인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소천(苕川).
♣ 초수[楚囚]초 나라의 죄수란 뜻으로, 춘추 시대에 초(楚) 나라 사람인 종의(鍾儀)가 진(晋) 나라에 갇혀 있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죄수의 몸으로 타향에 있는 슬픔을 비유한 것이다.
♣ 초수광가[楚叟狂歌]초(楚)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거짓 미쳐 노래를 하며 공자(孔子) 곁을 지나갔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쩌면 덕(德)이 그리도 시들했느뇨. 지난 일이야 탓한들 무엇하랴만 미래야 제 길을 갈 수도 있느니 제발 그만두려무나. 지금 정치에 뜻을 둔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니라”하였다함. 《論語 微子》
♣ 초수비[楚囚悲]서진(西晉) 말년에 중원(中原)을 잃고 강남으로 피난을 온 신하들이 단양(丹陽) 신정(新亭)에서 모임을 갖고는 서로들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자, 승상 왕도(王導)가 “서로들 왕실에 힘을 바쳐 중원을 회복할 생각을 해야 할 때에, 어쩌자고 초 나라 죄수처럼 서로들 울기만 하는가.[當共戮力王室 克復神州 何至作楚囚相對]”라고 꾸짖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 초수음고유사월[楚囚吟苦猶思越]진(晋) 나라 종의(鍾儀)가 초(楚) 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더니 진후(晋侯)가 음악을 하여 보라고 시켰다. 종의는 자기의 고국 소리를 연주하였다. 또 월(越) 나라 장석(莊舃)이 초(楚) 나라에 벼슬하여 현달(顯達)하였는데 한 번은 병이 나서 누워 있었다. 초왕(楚王)이 사람을 시켜 장석을 가 보게 하며, “장석이 자기의 고국을 생각하는지 알아 보라.” 하였다. 가본 즉 장석은 월 나라 소리로 앓고 있었다.
♣ 초수응의채[草樹凝衣彩]아버지를 모시고 오면서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재롱을 부릴 것이라는 말이다.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 앞에서 어린애처럼 재롱을 떨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高士傳 上 老萊子》
♣ 초신[楚臣]본디 초 나라 신하 굴원으로, 귀양살이하는 신하를 말함.
♣ 초신비[楚臣悲]고향을 떠난 나그네의 슬픔을 말한다. 초신은 비방을 당해 초(楚) 지방으로 유배되어 객지를 떠돌았던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 초신음택반[楚臣吟澤畔]전국(戰國) 시대 초(楚) 나라 충신(忠臣) 굴원(屈原)이 회왕(懷王)으로부터 방척(放斥)을 받은 후 못가[澤畔]에 행음(行吟)하던 일을 말한다.
♣ 초신초췌[楚臣憔悴]초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쫓겨나 강가에 노닐어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림에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에 생기가 없었다.” 하였다.
♣ 초신패[楚臣佩]굴원(屈源)이 지은 이소(離騷)에, “가을 난초를 길러서 패(佩)를 한다.”는 구절이 있다.
♣ 초실[椒室]궁중(宮中)의 내실(內室)을 말한다. 초(椒)는 열매가 많이 열고 향기가 성하므로 자손의 번성을 축원하여 그 열매를 섞어 궁중 내실의 벽을 발랐다.
♣ 초심일촌보춘휘[草心一寸報春暉]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말한 것. 초심(草心)은 촌초심(寸草心)의 준말로 조그마한 마음을 뜻하는데, 효자가 부모를 사모하는 정을 말하며, 춘휘(春暉)는 봄의 햇빛으로 부모의 은덕을 말한다. 맹교(孟郊)의 遊子吟(유자음)에 “어떻게 촌초(寸草)의 마음을 가져다가 삼춘의 따뜻한 햇빛을 보답할거나.[那將寸草心 報得三春暉]" 하였다.
♣ 초야우둔[草野遇遯]소인이 조정에서 권세를 잡아 국사가 어지러우므로 초야의 충의로운 선비들이 분개한다는 것이다. 송 나라 주희(朱熹)가 66세 때인 영종(寧宗) 1년 5월에 환장각 대제(煥章閣待制)의 직명을 띠고 고향에 있으면서, 한탁주(韓侘冑)의 모함으로 영주(永州)로 귀양간 재상 조여우(趙汝愚)의 억울함을 변론하는 내용과 한탁주가 임금을 속여 도학을 위학(僞學)이라 규정하여 금지하고 충직한 신하를 몰아내는 등 간교한 짓을 자행하는 작태에 대해 장문의 소장을 지어 올리려 하였다. 그러자 문인 채원정(蔡元定)이 그것을 섣불리 올리지 말고 시초(蓍草)를 뽑아 점을 쳐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라고 청하여 점을 쳐보니, 소인이 뜻을 얻은 상황에서 군자는 집안에 들어앉아 집안의 일만 돌본다는 의미의 둔(遯)의 가인괘(家人卦)가 나와 그 소장의 초고를 불태워버리고 호를 둔옹(遯翁)이라 고침과 동시에 사직소만 계속 올렸다. 《朱子大全 附錄 卷六 年譜》
♣ 초양[初陽]초양은 양(陽) 한 획이 처음 생긴다는 11월을 가리킨다.
♣ 초어[樵漁]벼슬을 버리고 나와서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는 데 취미를 붙이겠다는 말이다.
♣ 초여담자[初如噉蔗]진(晋)나라 고장강(顧長康)이 감자(甘蔗)를 꼬리에서부터 먹이 들어가며, “점입가경(漸入佳境)한다.” 하였다.
♣ 초연망설례[楚筵忘設醴]신하를 대우하는 정성이 해이해짐을 뜻한다. 초 원왕(楚元王)은 노(魯)의 목생(穆生)ㆍ백생(白生)ㆍ신공(申公)을 매우 후히 대우하여, 그들을 위해 주연(酒宴)을 베풀 때마다, 특히 술을 즐기지 않는 목생을 위해서 항상 단술을 준비했는데, 그 다음 임금이 즉위하여서도 항상 그렇게 하다가 뒤에는 단술 놓는 것을 잊었으므로, 목생이 마침내 임금의 정성이 해이해짐을 탄식하고 떠나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楚元王傳》
♣ 초연질질[初筵秩秩]초연은 손님들이 막 와서 자리에 앉는 것을 이른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손들이 막 자리에 나아감에 좌우로 질서가 있도다[賓之初筵 左右秩秩]” 한 데서 온 말이다.
♣ 초염[楚豔]초(楚) 나라 지방의 미녀(美女)를 특별히 일컫는 관용어이다.
♣ 초엽록[蕉葉鹿]인간 세상의 득실(得失)이 모두 꿈과 같이 덧없다는 뜻.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정(鄭) 나라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놀란 사슴을 만나 때려잡은 뒤에 남들이 볼까봐 도랑 속에 넣고 파초잎으로 덮어놓고는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그만 숨겨 놓은 장소를 잃어버렸으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꿈으로 여기고 말았다. 그가 도중에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왔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가서 감추어 놓은 사슴을 찾아 가져갔다.”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 초옥[楚玉]초 나라의 보옥인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 초옥[楚獄]초옥은 초 나라의 옥사(獄事)이다. 초 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소인들의 무함으로 심리를 받았다는 데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것을 뜻한다.
♣ 초옥[楚獄]초옥은 후한(後漢) 초왕 영(楚王英)의 옥사(獄事)로 수천 명이 애매하게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은 대표적인 원옥(寃獄)이다.
♣ 초왕대[楚王臺]전국시대 초 회왕(楚懷王)이 꿈속에서 무산의 여신과 만나 정을 나눴던 고당(高唐)의 궁관(宮觀)이다.
♣ 초왕실궁초인득지[楚王失弓楚人得之]초나라 임금이 잃은 활을 초나라 사람이 얻는다는 말이다. 도량이 좁은 것을 비유하는 뜻의 고사성어.
♣ 초왕운몽[楚王雲夢]사마상여가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는데, 초왕(楚王)이 운몽(雲夢)에서 사냥하는 광경을 썼다.
♣ 초요[招搖]북두성(北斗星) 자루의 맨 끝인 제 칠성(七星)의 이름으로, 이 별은 왼쪽으로 계속 회전하여 정월에는 동방을 가리키고 가을에는 서방을 가리킨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의 ‘의명월교야광(擬明月皎夜光)’이라는 시에 “초요의 별빛이 서북방을 가리키자, 하늘의 은하수 동남쪽으로 기우누나.[招搖西北指 天漢東南傾]”라는 표현이 나온다.
♣ 초요[楚腰]초(楚) 나라 궁녀(宮女)의 허리, 초왕(楚王)이 가는 허리의 여자를 사랑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전하여 미인(美人)의 가는 허리를 가리킨다.
♣ 초요강[招搖杠]초요의 깃대는 곧 군기(軍旗)를 말하는데,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의 “招搖靈旗 九夷賓將”의 주에 “초요성을 기(旗)에 그려서 정벌을 하기 때문에 영기(靈旗)라 한다.” 하였다.
♣ 초우미표삼협모[楚雨未飄三峽暮]무협의 신녀(神女)가 초양왕(楚襄王)의 꿈에 나타나 교접하고는 그녀가 가면서 하는 말이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리라.” 했다. 남녀의 합환(合歡)을 ‘운우(雲雨)’라 한다. 여기서는 모란꽃 피지 않은 것이 신녀(神女)의 비[雨]가 나부끼지 않음과 같다는 뜻이다. 삼협(三峽)은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의 경계인 양자강(揚子江) 상류에 있는 세 협곡으로 무협(巫峽), 구당협(瞿唐峽), 서릉협(西陵峽)이다.
♣ 초운상수[楚雲湘水]초 나라 구름과 상강(湘江)의 물로 남녀의 그윽한 정을 상징하며, 주로 초운상우(楚雲湘雨)라고 한다. 여기서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참고로 명(明) 나라 고계(高啓)의 제기상(題妓像)이란 시에 “추낭(秋娘)을 보지 못한 지 이제 몇 해나 되었는고. 초운(楚雲)과 상우(湘雨)에 생각이 하염없네.” 하였다.
♣ 초운행공자고서[楚雲行共鷓鴣栖]두 사람 모두 남쪽 지방으로 유배될 운명에 처했다는 말이다. 초(楚) 나라는 굴원(屈原)처럼 조정에서 쫓겨나는 처지를 표상하고, 항상 따뜻한 지방에 사는 자고새를 통해 남쪽 지방으로 떠나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我似鷓鴣鳥 南遷嬾北飛”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22 醉題王漢陽廳》
♣ 초원란[楚畹蘭]초 회왕(楚懷王) 때 굴원이 소인들의 참소를 당하여 쫓겨난 뒤, 임금을 생각하여 근심스런 심정을 읊은 이소경(離騷經)에 “가을 난초를 엮어 차노라[紉秋蘭以爲佩]" 한 데서 온 말이다. 《楚辭 離騷經》
♣ 초월[楚越]서로 간에 관계가 먼 것을 가리킨다. 초(楚) 나라와 월(越) 나라는 서로 상관없는 나라이다.
♣ 초월유[楚越逾]초 나라와 월 나라.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서로 다른 것을 따지면 다같이 뱃속에 있는 간(肝)과 담(膽)도 초월처럼 멀다 할 것이다.” 하였다.
♣ 초윤이우[礎潤而雨]소순(蘇洵)의 글에, “주춧돌에 물기가 있어 축축하면 비가 올 징조[礎潤而雨].”라 하였다.
♣ 초은[招隱]숨어 사는 선비를 나와서 벼슬하도록 부르는 일을 말한다.
♣ 초은[招隱]진(晉) 나라의 좌사(左思)라는 사람에게 초은시(招隱詩)가 있었으니, 초은이란 말은 돌아와 산림속에서 살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 초은계수편[招隱桂樹篇]초사(楚辭) 가운데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이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가 무더기로 남이여, 깊은 산이로다.[桂樹叢生兮山之幽]" 한 것을 말한다.
♣ 초은사[招隱詞]은사(隱士)를 부르는 노래.
♣ 초은시[招隱詩]은자(隱者)를 구하여 찾는 뜻을 서술한 시편의 이름으로, 특히 진(晉) 나라 때 장화(張華)ㆍ좌사(左思)ㆍ육기(陸機) 등에게서 지어졌다.
♣ 초은시[招隱詩]진(晉) 나라 사람 좌사(左思)가 지은 시(詩)의 이름. 은거하여 사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 초은조[招隱操]은자(隱者)를 위한 노래 곡조.
♣ 초음[噍音]급한 소리임.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其哀心感者 其聲唯以殺"라 하였음.
♣ 초의[草衣]속성은 장(張)씨, 이름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인데 무안(務安) 사람임. 벽봉(碧峯)을 따라 출가하여 적공(積功)한 끝에 교리(敎理)에 정통하고 선경(禪境)을 회척(恢拓)하였음. 뒤에 사방을 운유(雲遊)하여 동서(東西) 산해(山海)의 승(僧)을 다 참알하고 돌아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위시하여 홍 석주(洪奭周)ㆍ신위(申緯) 등과 종유하였으며, 특히 추사와는 방외(方外)의 교(交)를 맺어 왕복 서한이 권축(卷)을 이루었음.
♣ 초의옹[草衣翁]은자(隱者)를 말함. 은자가 입는 옷을 초의(草衣)라고 함.
♣ 초인비가[楚人悲歌]초(楚) 나라 시인 송옥(宋玉)이 가을의 서글픈 정경을 읊은 노래로,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실려 있다.
♣ 초인소[楚人騷]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으로, 굴원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으나 임금이 간사한 자의 참소를 듣고 멀리하므로 이를 지었다고 한다.
♣ 초인이득초인궁[楚人已得楚人弓]초공왕이 나가 놀다가 활을 잃었다. 좌우가 찾아보기를 청하니, 왕이 “그만두라. 초인(楚人)이 잃은 활을 초인이 얻었으리니 또 찾아 무엇하리오.” 하였다.
♣ 초인이소[楚人離騷]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으로, 굴원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으나 임금이 간사한 자의 참소를 듣고 멀리하므로 이를 지었다고 한다.
♣ 초인일거[楚人一炬]남김없이 불에 타 폐허로 변한 것을 말한다.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을 점령한 뒤, 진(秦) 나라 궁실을 모두 태워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 초인혼[楚人魂]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뜻함. 초 나라 굴원(屈原)이 소인들의 참소에 의해 쫓겨났지만 임금에 대한 충성이 끝내 지극했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 초인휴[楚人咻]맹자(孟子)가 대불승(戴不勝)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왕(王)을 착하게 하고자 하는가? 내 분명히 자네에게 고해 주리라. 초(楚) 나라 대부(大夫)가 자기 자식에게 제(齊) 나라의 말을 가르칠 경우, 제 나라 사람 하나가 스승 노릇을 하고, 초 나라 사람 여럿이 곁에서 떠들어댄다면 아무리 날로 매를 때리면서 제 나라 말을 가르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장악(莊嶽; 제 나라 거리의 이름) 사이에 수년 동안을 둔다면 역시 날마다 매를 때리면서 초 나라 말을 하게 하더라도 또한 되지 않을 것이다. …… 설거주(薛居州) 한 사람의 힘으로 송왕(宋王)을 어떻게 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下》
♣ 초자[楚茨]더부룩한 납가새.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한 편명인데, 주 유왕(周幽王)의 학정을 비난한 시이다.
♣ 초자불성무협몽[楚子不成巫峽夢]전국 시대에 초(楚) 나라 양왕(襄王)이 무산(巫山) 아래에 와서 자는데, 꿈에 선녀가 와서, “저는 무산의 선녀인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어 하늘에 떠 있고, 밤이면 비가 되어 무산에 내립니다.” 하고, 양왕과 즐거운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 초장[椒漿]향초로 만든 즙,
♣ 초장록[蕉藏鹿]꿈 속에서 있었던 허무한 일을 말한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들판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정(鄭) 땅 사람이 사슴을 잡은 다음 이를 죽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가져갈까 염려되었다. 이에 사슴을 끌어다가 구덩이 속에 감추고는 풀로 덮은 다음 몹시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감추어 둔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드디어 꿈 속에서 있었던 일로 여겼다. 그 사람이 길을 내려오면서 그 일을 떠들어 대자 곁에 있던 사람이 듣고는 그 말에 따라 찾아가서 사슴을 얻었다.” 하였다.
♣ 초재[蕉齋]심염조(沈念祖)의 호.
♣ 초저[草苴]살아 있는 풀을 草, 죽은 것을 苴라고 한다.
♣ 초전[椒殿]후비의 궁전을 말한다.
♣ 초정[楚亭]초정은 박제가(朴齊家)의 호, 자는 재선(在先)이다.
♣ 초정자[楚亭子]초정은 박제가(朴齊家)의 호이며 자(子)는 높여서 붙인 말이다. 박제가는 문장에 뛰어났으며 당시 아정 등과 함께 4검서(檢書)의 한 사람이었다.
♣ 초제[招提]범어(梵語) caturdeśa의 음역(音譯)으로, 사방을 말하는데, 곧 사방의 중들이 모이는 곳으로 절을 뜻한다. 열반경(涅槃經)에 “초제는 승방(僧坊)이라"하였고, 당회요(唐會要)에는 “관(官)에서 사액(賜額)하는 것은 사(寺)가 되고 사조(私造)하는 것은 초제난야(招提蘭若)라 한다.” 하였음.
♣ 초제[醮祭]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 초조[招潮]게의 별칭이다.
♣ 초조곡[楚調曲]초조곡은 악부(樂府) 중 상화가(相和歌)의 1부(部)이다. 대산(大山), 소산(小山)은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문인들의 저술을 정리할 때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와 소아(小雅)처럼 비슷한 종류끼리 묶어서 구별한 분류 방식이다.
♣ 초조탄파애추란[楚操彈罷哀秋蘭]초 나라 곡조란 곧 초사(楚辭)의 이소(離騷)를 말하고, 추란(秋蘭)은 즉 난초의 이명(異名)으로 이소의 “秋蘭兮蘼蕪” 에서 온 말이다.
♣ 초종계자기[初終計自奇]장량(張良)은 부귀(富貴)를 버리고 신선이 되겠다고 벽곡(辟穀)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신이나 소하처럼 화(禍)와 욕을 당하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지모(智謀)가 훌륭하였다고 칭찬한 것이다.
♣ 초주[楚奏]초 나라 지방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타향에서 곤경에 처해 고향을 그리는 것을 뜻한다. 전국시대에 진(晉) 나라 왕이 초 나라 죄수 종의(鍾儀)에게 거문고를 타보라고 명하자, 종의가 고향을 그리며 자기 나라 토속의 곡조를 연주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左傳 成公 九年條》
♣ 초주[椒酒]초백주(椒柏酒). 산초(山椒) 열매를 담아 빚은 술. 정월 초하룻날 이 술을 선조에게 올려 강신(降神)한 후에 집안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자손 되는 이들이 각자 가장(家長)에게 또 이 술을 올린다 한다.
♣ 초주[椒酒]초주는 초실(椒實)로 빚은 술인데, 옛날 풍속에 정월 초하루 자손들이 가장(家長)에게 초주를 따라 올렸다.
♣ 초지[草池]‘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를 요약한 말로, 멋진 시구(詩句)를 뜻한다. 남조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종일토록 시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하다가, 꿈속에서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보고는 곧바로 ‘지당생춘초’라는 명구(名句)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19 謝惠連傳》
♣ 초지[初地]불교의 용어임. 십지(十地)의 제일지(第一地)로서 환희지(歡喜地)를 가리킨다.
♣ 초지불변[初志不變]처음의 뜻이 변치 않음
♣ 초지일관[初志一貫]처음의 뜻 하나로 끝까지 꿰뚫음. 처음 품은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아감.
♣ 초지족[鷦枝足]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뱁새는 깊은 숲에 둥지를 치는데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에서 나온 것으로, 자기의 분수에 만족하는 것을 뜻한다.
♣ 초차신의[草次新儀]조선 인조가 친히 땅바닥에 내려가 청 태종에게 절하고 항복한 일을 가리킨 말이다.
♣ 초창[怊悵]믿지 못하여 슬퍼함
♣ 초창[草創]초창은 초고(草稿)를 쓰는 것.
♣ 초초[慅慅]지친 모양, 근심스러운 모양
♣ 초초[杪杪]가늘고 작은 모양
♣ 초초[梢梢]나무 끝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조금, 꼬리가 처진 모양, 나무의 잎이나 곁가지가 없이 쭉 뻗어난 모양, 나무들의 우듬지
♣ 초초[僬僬]달음박질하여 체통을 갖추지 못하는 모양, 밝게 살피는 모양
♣ 초초[哨哨]말이 많은 모양, 작은 소리의 형용
♣ 초초[迢迢]멀고 아득한 모양.
♣ 초초[楚楚]산뜻한 모양, 가시덤불이 우거진 모양, 고통하는 모양
♣ 초초[噍噍]새의 지저귀는 소리
♣ 초초[招招]손을 들고 부르는 모양
♣ 초초[悄悄]풀이 죽어 근심하는 모양, 고요한 모양
♣ 초추[杪秋]말추(末秋), 늦가을
♣ 초추취량시[初秋驟凉詩]송(宋) 나라 때 시인 육유(陸游)의 초추취량시(初秋驟凉詩)에 “我比嚴光勝一籌 不敎俗眼識羊裘 滄波萬頃江湖晩 漁唱一聲天地秋 飮酒何嘗能作病 登樓是處可消憂 名山海內知何限 準擬從今更爛遊"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劍南詩藁 卷七十七》
♣ 초충상근일상안[草虫相近一床安]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에 “귀뚜라미 요놈 보소. 칠월엔 들판이요, 팔월달엔 처마 밑. 구월에 문 앞에 서 있더니, 시월엔 나의 침상 밑으로 기어드네.[七月在野 八月在宇 九月在戶 十月蟋蟀入我牀下]”라는 구절이 있다.
♣ 초충시[草蟲詩]초충은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으로, 집에 홀로 남아 있는 아낙네가 계절의 변화에 감회를 느낀 나머지 멀리 밖에 나가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 초택[楚澤]유배지(流配地)를 말한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상수(湘水) 가에서 행음택반(行吟澤畔)했던 고사에서 기인한 것이다.
♣ 초택고[楚澤枯]초택고는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키는 말이다.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택반(澤畔)에서 행음(行吟)할 적에 안색은 초췌하고 형용은 고고(枯槁)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屈原列傳》
♣ 초택성[楚澤醒]조정에서 쫓겨난 초(楚) 나라 굴원(屈原)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조정에서 쫓겨난 뒤 못가에서 시를 읊조렸다.[行吟澤畔]”는 구절과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서만 깨어 있다.[衆人皆醉我獨醒]”는 구절이 나온다.
♣ 초택신[楚澤臣]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택반(澤畔)에서 행음(行吟)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84 屈原列傳》
♣ 초택영란인[楚澤詠蘭人]초(楚) 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을 말한다. 굴원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상강(湘江)의 못 가[澤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이소(離騷)를 지었는데, 그 글 안에 난초를 비롯하여 기타 많은 향초를 읊은 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史記 卷八十四 屈原傳》
♣ 초택지[楚澤枝]초택은 초 지방에 있는 호수를 말한다. 굴원(屈原)이 이곳으로 귀양 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난초와 국화가 많았다.
♣ 초토[草土]상중에 있는 것을 뜻함. 부모의 상중에는 거적자리를 깔고 앉고 흙덩이를 베고 잠을 잔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 초토화[草土禍]부모의 상(喪)을 뜻함.
♣ 초평목장[初平牧場]옛날 황초평(黃初平)이 양을 쳤는데 도사(道士)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에 들어가 40여 년 동안 도술을 닦으면서 집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형 초기(初起)가 여러 해 동생을 찾다가 하루는 시장에서 도사를 만났는데 초평이 금화산에서 양을 치고 있다 하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고는 초평에게 네가 기르고 있는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초평은 가까이 산동(山東)에 있다고 하였다. 초기가 가보았으나 양은 보이지 않고 다만 흰 돌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돌아와 양이 없다고 하니, 초평은 ‘있는데 형께서 못보았을 뿐입니다.’ 하고는 같이 가 돌에게 ‘양은 일어나라’ 하자 흰 돌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 한다. 《神仙傳》
♣ 초풍[樵風]중국 절강성(浙江省) 약야계(若耶溪)에 초풍경(樵風涇)이 있는데, 아침에는 남풍이 불고 저녁에는 북풍이 불어 배로 나뭇짐을 실어 나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孔靈符會稽記》
♣ 초풍전[椒風殿]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궁전.
♣ 초피모[貂皮帽]초피모는 청(淸) 나라 제도에서 문관(文官)으로 4품 이상에게 쓰도록 했던 모자이다.
♣ 초현[草玄]태현경(太玄經)을 초함. 한(漢)의 양웅(揚雄)이 역(易)을 본떠서 태현경을 지었음.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양웅(揚雄)이 바야흐로 태현경을 초하면서 스스로 몸 갖기를 깨끗이 하였다.” 한 말이 있다.
♣ 초현객[草玄客]’초현(草玄)하는 사람’은 곧 한(漢) 나라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양웅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했다는 말로, 조용히 앉아 문필(文筆)에나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 비유한 말이다.
♣ 초현자[草玄子]한(漢)나라의 양웅(揚雄)이 큰 학문과 문장이면서 적막하게 들어앉아서 태현(太玄)이라는 글을 저술하였다.
♣ 초현축대[招賢築臺]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에게 패한 뒤 소왕(昭王)이 즉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후한 폐백을 갖추어 어진 자를 초빙하고자 하였다. 이에 먼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곽외(郭隗)를 위해 누대를 개축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자 악의(樂毅)가 위(魏) 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 나라에서 오고, 극신(劇辛)이 조(趙) 나라에서 오는 등 선비들이 다투어 왔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 초혜[楚惠]친한 벗 둘이 서로 만난 자리를 뜻함. 초(楚)는 곧 초 나라 사람인 장자(莊子)를 가리키고, 혜(惠)는 바로 장자의 친구인 혜자(惠子)를 가리킨 것이다.
♣ 초혼[招魂]초혼은 송옥(宋玉)이 지은 것이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시켜서 지붕 위로 올라가서 북쪽을 향해 서서 “皐 某復”이라고 외치고 죽은 사람의 옷으로 세 번 외치고 내려와서 그 옷을 시체에 덮는다. 이 예(禮)를 복(復)이라 하고 해설하는 사람들은 초혼(招魂)ㆍ복혼(復魂)이라 하며 사랑의 도(道)를 다하고 도사(禱祠)의 일을 다했다고 여기는데, 아마도 그 다시 살기를 바라는 것인 것 같다. 이같이 했는데도 살지 않는다면 다시 소생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장례를 치룬다.
♣ 초혼부[招魂賦]초혼은 산 사람의 넋을 부르는 것을 이름. 전국 시대에 송옥(宋玉)이 초(楚) 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정상을 가련하게 여겨, 근심걱정에 의해 곧 없어져 가는 굴원의 넋을 회복시켜서 그를 오래 살도록 하고자 초혼부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 초혼초미귀[楚魂招未歸]이미 죽어서 어찌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 초혼은 곧 초 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넋을 말하는데, 송옥(宋玉)이 굴원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그의 넋을 부르는 의미로 초혼(招魂)의 글을 지은 데서 온 말이다. 《楚辭 招魂》
♣ 초홀[秒忽]극히 가는 것을 이름. 한서(漢書) 서전(敍傳)에 “産氣黃鐘 造計秒忽"이라 하였음.
♣ 초화[椒花]산초나무 꽃으로 신년(新年)을 축하할 때 자주 쓰인다.
♣ 초화랍주[椒花臘酒]옛날 풍속에 산초의 꽃이나 열매로 술을 담궜다가 정월 초하루에 자손이 장수를 축원하는 뜻으로 자기 집안의 어른에게 올렸다고 한다. 《初學記 卷四 四民月令》
♣ 초화송[椒花頌]신년 축사(新年祝詞). 새해를 축하하여 올리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유진(劉臻)의 처 진씨(陳氏)가 조정에 바친 신년 축하 시를 말하는데, “하늘이 한 바퀴 돌아, 이제 정월 초하루. 봄날의 광휘(光輝) 흩뿌려지며, 맑은 경물(景物) 새로워라. 빼어나게 아름다운 신령스런 꽃, 따다가 조정에 바치옵니다. 성상의 기용(氣容) 이 꽃에 조응(照應)하여, 길이 만년토록 사시옵소서.[旋穹周廻 三朝肇建 靑陽散輝 澄景載煥 標美靈葩 爰採爰獻 聖容映之 永壽於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晉書 列女傳 劉臻妻陳氏》
♣ 초화주[椒花酒]산초(山椒)와 여러 가지 약재(藥材)를 넣어 빚은 것으로, 정월 초하루에 제사를 마치고 여러 자손들이 그 가장(家長)에게 올리며 새해를 축하하는 술.
♣ 초황록몽[蕉隍鹿夢]인생의 득실(得失)이 무상하여 꿈과 같음. 정(鄭) 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다가 놀란 사슴을 발견하고 그를 잡아 남이 볼까 싶은 마음에서 죽은 사슴을 해자 속에다 넣고 나뭇잎으로 덮어두었다. 나중에 그 둔 곳을 기억 못하고는 그것이 꿈이라 생각하고 돌아오면서 그 사실을 혼자 뇌까렸는데,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자가 있어 그가 말한 대로 찾아가보니 과연 사슴이 있어 그가 가져갔다. 《列子 周穆王》
♣ 초휴[楚咻]거센 이론(異論)을 말함.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제 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고 많은 초 나라 사람이 떠들어대면 매일 매를 때리면서 제 나라 말을 습득하게 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다.[一齊人傳之 衆楚人咻之 雖日撻而求其齊也 不可得矣]" 하였음.
♣ 촉[囑]당부하다. 부탁의 말을 하다.
♣ 촉각[燭刻]과시를 급하게 서둘러 보이던 일. 과거는 통상적으로 사방에 알려서 많은 선비들을 모이게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오직 표전(表箋) 두어 가지만을 가지고 시일(時日)을 한정, 실시하는 것을 촉각이라 한다. 이 제도는 특히 조선조 연산군, 중종 때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 촉견폐일[蜀犬吠日]촉(蜀)나라의 개는 해를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해만 보면 짖는다. 식견이 좁은 사람이 선하고 어진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고 의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촉군민가고[蜀郡民歌袴]지방 수령(守令)이 선정(善政)을 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염숙도(廉叔度)여, 왜 이제야 왔소. 전에는 저고리 하나도 없다가 이제는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된다오.” 하고 그의 선정을 노래하였다. 《後漢書 卷三十一 廉范傳》
♣ 촉규화시[蜀葵花詩]접시꽃을 두고 읊은 시. 당(唐) 나라 시인 잠참(岑參)의 촉규화가(蜀葵花歌)가 있다. 그 전시를 적는다. “昨日一花開 今日一花開 今日花正好 昨日花已老 人生不得恒少年 莫惜牀頭沽酒錢 請君有錢向酒家 君不見蜀葵花”
♣ 촉금[蜀錦]촉 나라의 비단이란 뜻으로, 촉 나라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인데 옛날부터 그곳에 좋은 비단이 많이 나므로 이 말이 있게 되었다. 《蜀錦譜》
♣ 촉노[燭奴]유사(遺事)에 “신왕(申王)도 사치를 힘썼으니 그때의 유행이 그러하였다. 매일 밤 궁중에서 제왕(諸王)ㆍ귀척(貴戚)들과 모여 잔치할 적에는 용단목(龍檀木)으로 동자(童子)를 조각하여 녹의(綠衣)를 입히고 띠까지 띠게 한 다음 화촉(畫燭)을 들려서 좌우에 벌여 세워 놓고 이름을 촉노라 했으므로 제궁(諸宮)ㆍ귀척들의 집에서도 다 이를 본받았다.” 하였다.
♣ 촉당귀[蜀當歸]난리가 났다는 급보를 듣고 양국충은 먼저 현종에게 권고하여 촉(蜀)으로 피난하자고 하였다.
♣ 촉도[蜀道]파촉(巴蜀)의 잔도(棧道).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촉(蜀) 땅으로 통하는 고갯길인데, 길이 몹시 험하여서 험한 길의 대명사로 쓰인다. 이백(李白)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를 지어 “촉도의 어려움 하늘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 하였다.
♣ 촉도난[蜀道難]여러 시인들이 읊은 촉도난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당 나라 이백(李白)이 지은 촉도난이 가장 유명하다. 촉도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촉(蜀) 땅으로 통하는 고갯길인데, 길이 몹시 험하여서 험한 길의 대명사로 쓰인다.
♣ 촉도매복[蜀都賣卜]어떤 사람이 하(河 황하)의 근원을 찾아 부인이 빨래함을 보고 물으니, “여기가 천하(天河)다.” 했다. 한 돌은 주기에 가지고 돌아와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으니, 그가 가로되, “이것은 직녀(織女)의 베틀 바치는 돌이다.” 했다. 엄군평이 촉(蜀) 나라의 도읍 성도(成都)에서 점장이 노릇을 하면서 충효와 신의(信義)로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날마다 백전(百錢)을 얻으면 곧 가게를 닫고 노자(老子)를 읽었다. 전설(傳說)이 많음.
♣ 촉도읍옥인[蜀道泣玉人]옥인(玉人)은 미인이란 뜻으로 양 귀비(楊貴妃)를 가리키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파촉으로 피난갈 적에 양 귀비를 처형했으므로 한 말이다.
♣ 촉도청천취안대[蜀道靑天醉眼擡]이태백이 촉도난(蜀道難)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끝에 “촉(蜀) 나라 길이 험하여,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도 어렵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 촉도행[蜀道行]한(漢) 나라 왕손이 촉(蜀)에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부임하다가 가장 험한 공극(邛棘)을 어렵게 알지 않고 말을 채찍질하였다.
♣ 촉도행장[蜀道行裝]가진 재물이 없이 청빈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송(宋) 나라 조변(趙抃)이 필마로 촉 땅으로 들어갈 때 거문고 한 벌과 학 한 마리만 데리고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宋史 趙抃傳》
♣ 촉룡[燭龍]신명(神名).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밤이 된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 “촉룡이 안문(雁門)의 북쪽에 있어 위우(委羽)의 산에 가려 해를 보지 못한다.” 하였다.
♣ 촉룡[燭龍]촉룡은 촉음(燭陰)이라고도 하는데 종산(鍾山)의 신(神)이다. 신장(身長)이 천 리인데 입에 촛불을 머금고 천문(天門)에 비추며, 이 신이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밤이 되며 불[吹]면 겨울이 되고 숨을 내쉬면[呼] 여름이 된다 한다. 《山海經 海外北經》
♣ 촉루전락[髑髏全樂]장자(莊子)가 초(楚) 나라를 가다가 바짝 마른 해골을 만나서 말채찍으로 때리며 묻기를, “나라를 망치고 처형을 당해 이 모양이 되었는가, 굶어 죽어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하고는 그 해골을 베고 잤더니, 꿈에 해골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산 사람의 누(累)이고 죽은 사람은 그런 걱정이 없네. 죽음의 세계에는 위로 임금도 없고 아래로 신하도 없으며, 또 네 계절의 변화도 없네. 그리고 조용히 천지와 수명을 같이할 뿐이므로, 비록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도 이 즐거움을 능가할 수가 없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至樂》
♣ 촉루타남면[髑髏詫南面]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장자와 해골의 대화 가운데 “위로 임금도 없고 아래로 신하도 없으며, 사시(四時)도 없는 가운데 천지(天地)를 춘추(春秋)로 삼고 있으니,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남면하는 임금과 같은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수고로운 인간 세상에 되돌아갈까 보냐.”라고 한 해골의 대답이 실려 있다.
♣ 촉마[蜀麻]촉마는 촉군(蜀郡)에서 생산되는 마포를 말한다.
♣ 촉마오염[蜀麻吳鹽]오의 소금[吳鹽]과 촉의 삼[蜀麻]은 다 명품들로서 당(唐)의 제오기(第五琦)가 숙종(肅宗)에게 청하여, 강회(江淮)에다 조용사(租庸使)를 두고 이것들에 대한 조세를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王海 食貨 貢賦 唐賦役法》
♣ 촉매허재미[蜀買虛齎米]실속도 없이 남 좋은 일만 한다는 말이다. 오(吳) 나라 전종(全琮)의 부친인 유(柔)가 계양(桂陽)의 수사(守使)로 있을 적에, 전종에게 수천 곡의 쌀을 배에 싣고 오 나라에 가서 교역을 하도록 하였는데[齎米數千斛 至吳交易], 전종이 그곳의 사대부들에게 모두 외상으로 주고 빈 배로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60 吳志 全琮傳》
♣ 촉발[燭跋]초가 다 타서 밤이 깊어감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의 “초가 다 타서 아직 밑둥치를 나타내지 않았다.[燭不見跋]" 하였다.
♣ 촉백[蜀魄]두견(杜鵑)이의 별칭이다. 옛날 촉(蜀)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로서 망제(望帝)라고 불리운 임금이 있었는데, 제 신하에게 전위(傳位)하고 물러나 죽어서 두견이가 된 뒤 봄철에 밤낮으로 슬피 운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촉혼(蜀魂)ㆍ촉조(蜀鳥)ㆍ귀촉도(歸蜀道)ㆍ두백(杜魄)ㆍ두우(杜宇)ㆍ망제혼(望帝魂)이라고도 한다.
♣ 촉백[蜀柏]촉백은 촉상(蜀相) 제갈량(諸葛亮)의 측백나무로 서촉(西蜀) 성도(成都)의 제갈량 사당에 거대한 측백나무가 서 있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杜詩批解 卷十六 古柏行》
♣ 촉백성[蜀魄聲]전설에 의하면, 촉(蜀) 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혼백이 화하여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로 몹시 처절하게 운다고 한다.
♣ 촉번[觸藩]저양촉번(羝羊觸藩)의 준말. 주역(周易) 대장괘(大壯卦) 상육(上六)에, “수양이 울타리를 대질러서 물러가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한다[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하였는데, 저양의 뿔이 울타리에 걸리어 진퇴유곡이 되었다는 뜻으로, 만용을 부려 저돌하다가 도리어 실패함을 비유한 말이다.
♣ 촉번저[觸藩羝]나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이 궁지에 빠진 것을 말한다. 역(易) 대장 상륙(大壯 上六)에 “숫염소가 울타리를 받다가 걸리면 물러나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촉병정주도불미[燭秉程朱道不迷]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주희(朱熹)가 인멸된 성학(聖學)을 다시 밝혀 후학(後學)들을 계도한 공이 마치 어두운 길거리에 촛불을 잡아준 것과 같다는 말이다.
♣ 촉사통도[蜀士通道]석우도(石牛道)를 말한다. 진(秦) 나라 혜왕(惠王)이 촉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이에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고는 그 뒤에다가 금(金)을 놓아 둔 다음 “소가 금똥을 누었다.”고 소문을 내니, 촉 나라 사람들이 그 소를 달라고 하였다. 혜왕이 주겠다고 하자, 촉에서 역사(力士) 다섯 명을 보내어 길을 뚫고 끌어오게 하였다. 그 뒤 신왕(愼王) 때에 이르러서 그때 뚫은 길을 통하여 가서 촉 나라를 정벌하였다. 《華陽國志》
♣ 촉삭노노과시비[蜀朔呶呶果是非]송(宋) 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소식(蘇軾)의 촉당(蜀黨)과 유안세(劉安世)의 삭당(朔黨)과 정이(程頤)의 낙당(洛黨)이 서로들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던 일이 있다. 《宋史 卷340, 卷427》
♣ 촉시[蜀枲]촉에서 나는 모시로 질이 좋기로 천하에 유명하였다.
♣ 촉여만[觸與蠻]달팽이[蝸牛]의 왼쪽 뿔의 만씨와 오른쪽 뿔의 촉씨가 서로 땅을 뺏으려고 전쟁을 해서 수만 명의 군사가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세인(世人)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則陽》
♣ 촉잠삼면[蜀蠶三眠]몸이 늙었음에 비유한 말이다. 촉잠은 촉왕(蜀王)의 선조가 맨 처음 백성들에게 잠업(蠶業)을 가르쳤던 데서 누에를 가리키는 말이고, 삼면(三眠)은 누에가 세 번 잠자는 것을 이르는데, 누에가 세 번을 자면 섶에 올라 고치를 짓는 것이므로 늘그막을 뜻한다.
♣ 촉쟁만[觸爭蠻]장자(莊子)에, “달팽이 왼편 뿔에 나라가 있으니 촉(觸)씨요, 달팽이 오른편 뿔에 나라가 있으니 만(蠻)씨이다. 이따금 서로 땅을 다투어 싸워 시체가 몇 만이요, 쫓기고 쫓아 열닷새 만에 돌아왔다.[有國于蝸之左角者曰觸氏 有國于蝸之右角者曰蠻氏 時相與爭地而戰伏尸數萬 逐此旬有五日而後反]”하였다.
♣ 촉전[蜀牋]당 나라 시대에 설도(薛濤)라는 기생이 좋은 종이를 새로 고안하였으므로, 그것을 설도전(薛濤牋)이라 하고, 또 그가 살았던 곳의 이름을 따라 촉전이라고도 한다
♣ 촉정[蜀丁]산을 들어 옮길 만한 힘을 지녀, 검각(劍閣)의 길을 뚫었다는 촉(蜀) 땅의 전설적인 오정 역사(五丁力士)를 말한다.
♣ 촉제화[蜀帝花]두견화(杜鵑花)를 가리킨다. 촉(蜀) 나라 망제(望帝)의 죽은 넋이 화하여 두견새가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촉좌[蜀髽]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상중(喪中)에는 부인이 실내에서 복머리를 한다.” 하였고, 촉지(蜀志)에는 “건흥(建興) 12년 8월에 제갈공명이 54세로 전쟁터에서 죽자, 촉 나라 부인들이 애도하는 뜻으로 상중에 하던 복머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 촉주편[蜀州篇]촉주의 글은 고적(高適)이 촉주 자사로 있을 때 두보에게 지어 보내 준 시 ‘인일기두이습유(人日寄杜二拾遺)’를 말한다.
♣ 촉직[促織]귀뚜라미를 말하는데, 우는 소리가 마치 베 짜는 소리와 같으므로 가을이 되었으니 사람에게 빨리 베 짜라고 재촉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 한다.
♣ 촉천루[蜀天漏]서촉(西蜀) 지방은 본디 비가 많이 오므로, 두보(杜甫)의 시에도 “강 구름은 어느 밤에나 다하며 촉천의 비는 어느 때나 개일런고[江雲何夜盡 蜀雨幾時乾]”라고 하였다.
♣ 촉촉[矗矗]우뚝 솟은 모양.
♣ 촉촉[促促]짧은 모양, 마음에 여우가 없는 모양, 열심히 일하는 모양
♣ 촌관생화재독보[寸管生花才獨步]걸출한 문재(文才)를 뜻하는 표현이다. 이태백(李太白)이 어렸을 때 붓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開元天寶遺事 夢筆頭生花》
♣ 촌교구탁류[寸膠救濁流]촌교는 아주 소량의 갖풀을 말하는데, 갖풀은 본디 흐린 물을 맑게 하는 것이기는 하나, 아주 소량의 갖풀로는 황하의 탁류를 맑게 할 수 없다는 데서 온 말로, 즉 작은 힘을 가지고 큰 일을 이루기 어려움에 비유한 말이다. 《抱朴子 嘉遯》
♣ 촌교징하[寸膠澄河]자신의 힘만으로는 대세를 돌릴 수 없음을 말한다. 포박자(抱朴子) 가둔(嘉遯)에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지고서 부화뇌동하는 자들을 바로잡고 자신이 옳은 것만 믿고서 다수의 잘못됨을 성토하려 한다마는, 조그마한 갖풀로는 탁한 황하를 맑게 할 수 없고, 물 한 동이로는 소구(蕭邱)의 불길을 잡을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촌사[村社]옛날 사일(社日)에 토지신에게 지내던 제사인데, 이날 동네 사람들이 함께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
♣ 촌설소진[寸舌蘇秦]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을 달래어 연합(聯合)해서 진(秦)에 대항하게 하고 육국의 정승의 상인(相印)을 찼다.
♣ 촌숙도도[村塾都都]촌 서당의 무식한 선생을 비유한 말. 도도평장(都都平丈).
♣ 촌심[寸心]맹교(孟郊)가 어머니 생각하는 시에, “한 치 풀[寸草]의 마음을 가지고 삼춘(三春)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하였다.
♣ 촌연당[寸筵撞]한 치[寸]쯤 되는 풀로 큰 종(鐘)을 쳐보아야 그 소리가 크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 촌전척택[寸田尺宅]도가(道家)의 황정경(黃庭經)에 “寸田尺宅可治生"이란 글귀가 있는데 이 뜻은 삼단전(三丹田)의 택(宅)이 각각 한 치[寸]이므로 촌전이라 이름.
♣ 촌조동[㸑竈桐]훌륭한 인재였음을 뜻함.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오(吳)에 망명해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오동나무로 밥을 지었는데, 채옹이 오동나무가 화력이 세차게 타는 소리를 듣고는 훌륭한 재목임을 알고 그 사람에게 청하여 그 타다 남은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六十》
♣ 촌철[寸鐵]한 치의 쇠붙이. 아주 작은 소형의 병기. 짧으면서도 정곡을 찌름을 표현함.
♣ 촌철살인[寸鐵殺人]조그만 쇠붙이로 사람을 죽인다. 짤막한 경구(警句)ㆍ격언(格言) 등 간단한 말로 간단한 말로 사물이 가장 요긴한 데를 찔러 듣는 사람을 감동시킴.
♣ 촌초[寸草]짧은 풀, 또는 어린 풀. 따스한 봄볕을 부모에 비유한 데 대해, 촌초를 자식에 비유한 것이다.
♣ 촌초보춘휘[寸草報春輝]자식이 부모님의 길러 주신 은혜에 보답하려 하지만 다 갚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 촌초심[寸草心]촌초는 조금이란 뜻으로 부모의 은혜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다는 뜻. 당(唐) 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어머님 손수 꿰매신 옷 유자가 입고 있네. 떠날 적에 이리도 총총 꿰매신 뜻은 행여 늦게 돌아올까 해서라오. 어이 촌초의 마음 간직하여 三春(봄날)처럼 따뜻한 이 은혜 보답하리.[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那將寸草心 報得三春暉]" 하였는데, 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 촌촌[寸寸]마디마디, 갈가리, 조금씩
♣ 촌하득재[㸑下得材]한나라 채옹(蔡邕)이 아궁이의 오동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이것은 좋은 거문고 재목이다.” 하고 꺼내어 거문고를 만들었더니 한 끝이 탔으므로 초미금(焦尾琴)이라 한다.
♣ 총감의[摠堪疑]온통 의심스럽다.
♣ 총계[叢桂]총계는 떨기로 난 계수나무를 말한다. 회남(淮南)의 소산(小山)에는 은사(隱士)가 많이 살았으며, 여기에는 또한 계수나무가 많았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가 떨기로 났네 산의 깊은 곳에, 휘어지고 얽히었네 가지가 서로서로[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蜷兮枝相繚]" 하였다.
♣ 총계소산사[叢桂小山詞]한(漢)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에게 초빙된 인사들 가운데 소산(小山)이라고 일컫던 이들이 굴원(屈原)의 고사에 감동된 나머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부(詩賦)를 지었는데, 그 첫 행에 “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蜷兮枝相繆”라는 표현이 나온다. 《楚辭 卷8 招隱士》
♣ 총관[藂菅]섶풀이다.
♣ 총관[叢灌]키가 3미터 내외의 나무로서 주간(主幹)이 분명하지 아니하고 밑둥에서 가지가 나는 나무. 진달래ㆍ사철나무ㆍ앵두나무 등.
♣ 총기[塚起]장군의 무덤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죽은 뒤에, 천자가 이를 애도하며 그가 주둔했던 기련산(祁連山)의 형상을 조성하여 묘소를 만들게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55 霍去病傳》
♣ 총령[蔥嶺]돈황(敦煌) 서쪽 8천 리, 신강성(新彊省) 서남 경(境)에 있는 신령, 산이 높고 크며 위에 파가 나므로 총령이라 한다. 곤륜(崑崙)ㆍ천산(天山)의 산맥이 시작되는 아시아의 산등. 달마(達磨)대사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면벽(面壁) 9년 동안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한 뒤 양(梁) 나라 대동(大同) 원년에 시기하는 자가 드리는 세 번째 독약에 알면서도 일부러 중독하여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매장되었으나, 뒤의 전설에, 위(魏) 나라의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葱嶺)에서 대사가 맨발로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무덤을 파 보니 신 한짝이 있을 뿐이었다 한다. 《高僧傳》
♣ 총령진전[葱嶺眞詮]선가에서 표방하는 최고의 진리를 말한다. 달마(達摩)가 열반한 뒤에 신발 한 짝을 들고 총령을 넘어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진전은 속제(俗諦)에 대한 진제(眞諦) 즉 불교 최상의 경지를 가리킨다.
♣ 총림[叢林]승도(僧徒)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 즉 승원(僧苑)ㆍ승당(僧堂)ㆍ선림(禪林)ㆍ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많은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의 총칭.
♣ 총마[驄馬]청백색의 말을 총마라 한다.
♣ 총마[驄馬]총마는 총이말인데, 후한(後漢) 때 시어사(侍御史) 환전(桓典)이 항상 이 총마를 타고 다녔던 데서 법관이 탄 말을 비유하기도 한다. 후한 환전이 시어사가 된 뒤 늘 총마를 타고 다니며 엄하게 법을 집행했으므로 “총마어사(驄馬御史)가 온다. 꼭꼭 숨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後漢書 桓典傳》
♣ 총마계축[驄馬契軸]사헌부(司憲府)의 계축(契軸)을 뜻함.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로 있으면서 항상 총마(驄馬)를 타고 다녔던 데서 온 말인데, 환전이 매우 엄정(嚴正)하였으므로, 당시 간소배들이 항상 총마어사를 기피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三十七》
♣ 총마어사[驄馬御史]백관(百官)을 규찰(糾察)하는 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의 관원을 가리킨다. 동한(東漢)의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에 임명된 뒤 권귀(權貴)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차없이 법대로 처리하였으므로, 그가 총마(驄馬)를 타고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총마 어사님 나오신다 길을 비켜라.[避驄馬御史]”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7 桓榮傳 附 桓典傳》
♣ 총마어사[驄馬御使]총마어사는 후한 때의 환전(桓典)을 가리킴. 환전은 어사가 되어 항상 총마를 타고 다녔는데, 그는 성품이 엄정하여 용사(用事)하는 간인(奸人)들을 마구 탄핵하였으므로, 간인들이 항상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면서 ‘총마어사’라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총매[叢梅]군락을 이룬 매화 덤불.
♣ 총박조[叢薄照]엷은 볕이 모이다.
♣ 총부[冢婦]적장자(嫡長子)의 아내를 말함.
♣ 총사[叢社]사찰(寺刹)의 별칭.
♣ 총사[叢祠]숲속에 있는 신사(神社)를 말한다. 잡신(雜神)을 제사하는 사당집. 서낭당.
♣ 총성해[葱成薤]귀빈(貴賓)을 맞을 차비를 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소의(少儀)에 “군자(君子)를 위하여 파ㆍ마늘을 다듬을 때는 양쪽 끝을 가지런하게 자른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총수[蔥秀]평산부(平山府)에 있는데, 숲이 우거지고 수석(水石)이 아름다우며 석벽(石壁)에서 ‘감류(甘溜)’라는 샘물이 나오고 그 위에는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상(像)이 있다.
♣ 총수산[蔥秀山]황해도 평산(平山) 북쪽 30리 지점에 있는 산 이름이다.
♣ 총아[蔥芽]파의 새싹.
♣ 총융사[摠戎使]가도(椵島)의 명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원숭환(袁崇煥)에게 복주(伏誅)된 뒤에 유격(遊擊) 진계성(陳繼成)이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유흥치(劉興治)가 다시 투항한 달족(㺚族)을 인솔하고 난을 일으켜 진계성 이하의 장수를 모두 죽였으므로, 조선에서 총융사 이서(李曙)와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臣) 등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진보(振甫)는 한흥일(韓興一)의 자(字)이다.
♣ 총작봉전[叢雀逢鸇]孟子 離婁上의 “나무 숲을 위해 참새를 몰아주는 것은 새매이다.” 에서 나온 말이다.
♣ 총잠[葱岑]신강성의 산맥 총령(蔥嶺)을 가리킨다.
♣ 총재[冢宰]이조 판서의 별칭이다.
♣ 총저격장가[寵姐隔障歌]유사(遺事)에 “영왕궁(寧王宮)에 총저라는 계집이 있어 얼굴이 곱고 노래를 잘 했는데, 외객(外客)들을 모아 잔치할 적마다 다른 기녀(妓女)는 다 연석에 나와 있지만 총저만은 아무도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루는 사객(詞客) 이백(李白)이 술이 얼근해진 김에 ‘일찍이 들으니 왕에게 총저가 있어 노래를 잘한다고 하오. 오늘 술과 안주를 배불리 먹었고 제공(諸公)들도 권태를 느끼는 모양인데 왕은 어찌 그녀를 이처럼 아끼시오.’ 하고 농담했다. 영왕이 웃고는 좌우를 시켜 칠보(七寶)로 된 꽃휘장을 치고 총저를 불러 휘장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자 이백이 일어나 사례하며, 그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그 목소리를 들었으니 영광입니다.’ 했다.” 하였다.
♣ 총전잠교헌[冢巓岑嶠巘]총(冢)과 전(巓)은 산마루를 말하며, 잠(岑)은 산이 작으면서도 높은 것이고 교(嶠)는 산이 뾰쪽하고 높은 것이며, 헌(巘)은 위는 크고 아래는 작은 산을 말한다.
♣ 총총[從從]총총이(從從爾)
♣ 총총[總總]많은 모양
♣ 총총[叢叢]많은 물건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양, 떼지어 모이는 모양
♣ 총총[悤悤]바쁜 모양, 슬기로운 모양
♣ 최가사훈[崔家司勳]당(唐) 나라 때의 시인(詩人)으로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던 최호(崔顥)를 가리킨다.
♣ 최갈고[催羯鼓]당명황(唐明皇)이 갈고(羯鼓) 치기를 좋아하였는데 봄에 궁중에서 갈고를 두드리니 봉오리만 맺혔던 꽃이 활짝 피었다.
♣ 최고운[崔孤雲]신라(新羅) 말엽의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을 말한다. 고운은 그의 호이다.
♣ 최관국수[崔瓘之麵]광해조에 이충이란 자는 잡채로써, 최관이란 자는 국수로써 광해군에게 때마다 진상하여 아부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얻게되자 당시 사람들이 기롱하여 부른 말.
♣ 최귀[催歸]자규(子規)의 일명(一名). 울음소리가 마치 불여귀(不如歸)라는 말처럼 들린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최귀를 글자로 풀이하면 돌아가기를 재촉한다는 뜻이 되므로 이렇게 인용한 것이다.
♣ 최기[崔琦]후한(後漢) 사람으로 자는 자위(子瑋). 문장이 뛰어나 외척잠(外戚箴)ㆍ백곡부(白鵠賦) 등을 지었다. 《後漢書 崔琦傳》
♣ 최기옥루[催記玉樓]당(唐) 나라 이하(李賀)에게 낮에 어떤 붉은 옷 입은 사람이 와서, “옥황상제가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당장 그대를 불러 기문을 지으려 한다.” 하더니, 이하가 곧 죽었다.
♣ 최노[崔盧]최씨(崔氏)와 노씨(盧氏). 두 성씨가 다 육조(六朝) 시대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의 망족(望族)이었음. 《舊唐書 竇威傳》
♣ 최대립[崔大立]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애(蒼厓) 또는 균담(筠潭). 역관이다. 시집 한 권이 전한다.
♣ 최대용[崔大容]대용은 최유해(崔有海)의 자(字)이다.
♣ 최동고[崔東皐]동고는 최립(崔岦)의 호이다.
♣ 최로화벌[崔盧華閥]육조(六朝) 시대와 당(唐) 나라 때에 최씨ㆍ노씨 두 성씨가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진 데서 온 말이다.
♣ 최리[崔李]최리는 당 나라 때의 시인인 최융(崔融)과 이교(李嶠)를 가리킨다.
♣ 최보순[崔甫淳]고려때 사람.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 최북[崔北]영조(英祖) 때의 화가(畫家).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 본관은 무주(茂朱)인데, 그의 이름자인 북(北)자를 파자(破字)하여 최칠칠(崔七七)로 불렸다 한다.
♣ 최성지[崔聖止]성지는 최유연(崔有淵)의 자(字)이다.
♣ 최시우[催詩雨]두보(杜甫)의 시에 “조각 구름이 머리 위에 모여드니[片雲頭上黑] 알겠노라 비로 시를 재촉하려는 줄을[知是雨催詩]" 하였다.
♣ 최식[崔寔]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자진(子眞). 환제(桓帝) 때 낭(郞)이 되어 당시 시행하여야 될 수십 조를 적은 정론(政論)을 바쳤음.
♣ 최언명[崔彦明]언명은 최황(崔滉)의 자이다.
♣ 최융[崔融]최융은 당 나라 문장가로 자는 안성(安城)이었는데, 문장이 뛰어나 봉각 사인(鳳閣舍人)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중요한 문자를 모두 다루었다. 《新唐書 李賀傳ㆍ崔融傳》
♣ 최자겸[崔子謙]자겸(子謙)은 최명길(崔鳴吉)의 자(字)이다.
♣ 최자적[崔子迪]자적(子迪)은 최명길(崔鳴吉)의 동생 혜길(惠吉)의 자(字)이다.
♣ 최장[催粧]최장은 장가드는 것을 이름. 몽화록(夢華錄)에 “무릇 장가들 때에는 혼인 하루 앞서 신부에게 단장을 재촉하는 뜻으로 관피(冠帔)와 화분(花盆)을 보낸다.” 하였음. 그리고 당 나라 사람이 성혼하는 저녁에는 최장시가 있으므로 육창(陸敞)이 운안공주(雲安公主)를 위하여 최장시를 지었음.
♣ 최전[崔澱]조선조 명종~선조 연간의 문인(文人). 율곡(栗谷)의 문인으로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저서로 양포유고(楊浦遺稿)가 있음.
♣ 최제수인[榱題數仞]고대 광실(高臺廣室)의 뜻으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최제는 집 서까래머리라는 뜻으로 맹자(孟子) 진심 하에 “당(堂)의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서까래머리가 두어 자나 나오는 것을, 나는 뜻을 얻더라도 하지 않겠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최졸옹[崔拙翁]졸옹은 최해(崔瀣)의 호.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도 한다.
♣ 최중령[崔中令]최충(崔冲). 그는 현종(顯宗) 때로부터 문종(文宗) 때까지 문(文)ㆍ무(武)의 큰 공으로 중서문하성령(中書門下省令)이 되고, 아들 유선(惟善)이 중서령(中書令), 유길(惟吉)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왕이 베푸는 국로연(國老宴)에 두 아들이 아버지를 부액(扶掖)하고 참예하니, 희한한 성사(聖事)라 일렀다. 《高麗史 崔冲傳》
♣ 최최[崔崔]산이 우뚝하게 높은 모양, 높고 큰 모양
♣ 최해[崔瀣]경주인(慶州人)인데 자는 언명(彦明)이고 호는 졸옹(拙翁)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8년에 원(元)의 제과(諸科)에 합격하여 개주 판관(蓋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병을 칭탁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이 되었음. 이지현의 폐흥(廢興)의 전말을 기록한 비문을 지었음.
♣ 최해주[崔海州]광해군 8년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이른바 ‘해주옥(海州獄)’을 다스렸던 최기(崔沂)를 말한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여 이이첨의 미움을 받은 나머지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했으며, 뒤에 다시 대역죄(大逆罪)로 몰려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면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國朝人物考》
♣ 최호[崔顥]최호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시인인데 일찍이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지은 시가 이백(李白)의 극찬을 받은 일을 비롯하여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됨으로써 등루시(登樓詩)의 명작으로 꼽힌다.
♣ 최호음청천[崔灝吟晴川]당나라 시인(詩人) 최호(崔顥)가 황학루(黃鶴樓)에 올라서 지은 시에, “비 갠 강에 한양의 나무 역력하다[晴川歷歷漢陽樹].”라는 구가 있다.
♣ 최화과갈고[催花過羯鼓]서방의 갈(羯)이라는 부족(部族)이 치는 북이다. 그것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유행되는데, 그 중에도 현종이 제일 잘 쳤다. 어느 날 이원(梨園)에서 새로 작곡한 관현악을 연주한다 하여 화악루(花萼樓) 아래에서 연주하였는데, 그 작곡이 매우 잘못되어서 현종이 그것을 중지하도록 명령하고 다시, “갈고(羯鼓)를 가져오라. 이 더러운 소리를 들은 것을 씻겠다.” 하고, 갈고를 가져다가 한 곡조 쳤더니 그 때에 아직 봄이 일러 꽃봉오리가 피지 않았는데도, 그 곡조가 끝나면서 그 근처의 꽃들이 일시에 피었다 한다. 그래서 현종은 누가 나더러 하느님만 못하다고 하겠는가, 하고 좋아하였다 한다.
♣ 추[墜]땅. 공공이 전욱과 임금자리를 다투다가 노하여 부주산에 부딪히니, 하늘기둥이 꺼꺼이고 땅이 끊어져서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고 땅이 동남에 차지 않으매 물길이 동남으로 기울어졌다는 전설.
♣ 추[篘]용수. 술을 거르는 도구를 가리킨다.
♣ 추[諏]자문(咨問). 바로 왕명을 받은 사신(使臣)이 미진함이 없도록 자신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자문을 하여 직무 수행에 힘씀을 이른 말이다.
♣ 추[鄒]추는 맹자의 나라로서 맹자를 가리킴. 맹자(孟子) 盡心上에 “바다를 구경한 사람과는 강물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어렵다.[觀於海者 難爲水]" 하였음.
♣ 추강일필련[秋江一匹練]이백(李白)의 시에 “누가 이 강물 넓다고 말하는가, 비좁기가 마치도 한 필 비단 같은걸.[誰道此水廣 狹如一匹練]”이라는 표현이 있다. 《李太白詩集 卷13 江夏 寄漢陽輔參事》
♣ 추계[魋髻]추계는 만이(蠻夷)의 수식(首飾)인 북상투이다.
♣ 추고[推敲]퇴고(推敲)는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연마하여 고치는 공부를 말함. 당(唐) 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가 하루는 나귀의 등에서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란 시구를 얻어 퇴(推; 밀퇴) 자를 쓸까, 고(敲; 두드릴고) 자를 쓸까 하고 수없이 고심을 하면서 손을 가지고 직접 퇴고하는 형세를 짓곤 하다가, 때마침 지나가던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행차를 만나서 그 사실을 갖추 말하여 한유로부터 고(敲) 자로 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추고마비[秋高馬肥]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한 고사성어.
♣ 추고연백전[推敲捐白戰]퇴고는 당(唐) 나라의 가도(賈島)가 “새는 못가 나무에 깃들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란 시를 지었을 때, 고(敲) 자는 본시 퇴(推) 자로 하려다가 마침 한유(韓愈)의 말에 따라 고 자로 결정한 것을 말한다. 백전은 맨손으로 서로 싸운다는 것으로, 눈(雪)을 시제(詩題)로 정하였을 때 이(梨)ㆍ매(梅)ㆍ아(鵝)ㆍ학(鶴)ㆍ연(練)ㆍ서(絮) 등 눈을 표현하는 체물어(體物語)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추곡[推轂]장수에 대한 임금의 극진한 예우를 뜻한다. 옛날 출정(出征)하는 장수를 전송할 때 임금이 수레바퀴를 손수 밀어주면서[推轂] “곤내(閫內)는 과인이 처리할 테니 곤외(閫外)는 장군이 알아서 하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張釋之馮唐列傳》
♣ 추곡례[推轂禮]임금이 장수를 전쟁터로 내보낼 때 “도성문(都城門) 안의 일은 과인이 처리할 테니 도성문 밖의 일은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 하면서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어주며 전송하는 예를 말한다.
♣ 추구[蒭狗]짚으로 만든 개를 이르는데, 중국에서 옛날 제사(祭祀)에 쓰던 것인바, 제사가 끝나면 곧 내버리므로, 전하여 소용이 있을 때는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물건에 비유한다.
♣ 추구[蒭狗]풀로써 개의 모양을 만들어 제사에 쓰는 것이라 한다. 전일 융성하던 제왕의 능에도 세상이 변천하면 그런 것 하나 없다는 뜻이다.
♣ 추국[推鞠]비위(非違)를 따져 묻는 것을 말한다. 신문(訊問)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 추극[樞極]추(樞)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첫째 별이고 극(極)은 북극성(北極星)을 말한다.
♣ 추기[樞機]언행(言行)을 이름.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言行 君子之樞機”라 하였음.
♣ 추기급인[推己及人]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형편을 헤아린다는 뜻의 고사성어.
♣ 추녀추[醜女醜]월(越) 나라 때 미인인 서시(西施)가 불쾌한 일이 있어서 얼굴을 찡그리자 어떤 추녀가 그것을 보고 흉내내었다는 뜻인 효빈(效顰)의 고사(故事)에서 온 말로, 무턱대고 남을 따라 하는 것을 말한다.
♣ 추담현산비[鄒湛峴山悲]진(晋) 나라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의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에 산수 풍경을 좋아하여 매양 현산(峴山)에 올라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한 번은 양호가 종사(從事) 추담(鄒湛)을 대하여 탄식하기를, “우주가 있자 이 산이 있었거늘 현인(賢人) 달사(達士)들이 이 산에 올라 놀기를 나와 자네와 같이 하는 자가 많았겠지마는 지금에는 다 매몰되어 이름도 없는 것을 생각하니 나도 슬픈 마음이 생긴다.” 하니, 추담이 대답하기를, “공(公)은 덕이 높고 공이 크니 어진 명망이 반드시 이 산과 함께 전하겠지마는, 담(湛)과 같은 자는 참으로 공의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 추대왕[皺大王]추대왕은 얼굴이 주름진 임금이란 뜻으로, 곧 혜종을 가리킨다.
♣ 추란[秋蘭]주자집주(朱子集註)에, “蘭亦香草 至秋乃芳”이라고 보임.
♣ 추량[鶖梁]객지에 나가 있음을 뜻함.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화(白華)에 “무수리는 징검다리에 있고 학은 숲에 있도다[有鶖在梁 有鶴在林]”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어느 여인이 집을 떠나 객지에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다.
♣ 추령[芻靈]추령은 풀을 묶어 만든 허수아비이다.
♣ 추로[鄒魯]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가리킨다. 즉 유가(儒家)의 학문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공자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이었고, 맹자는 전국 시대 추(鄒) 땅 사람이었다.
♣ 추로향[鄒魯鄕]유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추(鄒)는 맹자가 난 곳이고, 노(魯)는 공자가 난 곳이다.
♣ 추루사인[秋▣舍人]추루는 반정균(潘庭筠)의 호이며 사인은 벼슬 이름이다.
♣ 추림[秋霖]가을 장마.
♣ 추만[秋巒]정지운(鄭之雲)의 호이며 자는 정이(靜而)이니, 사재(思齋) 김정국(金定國)의 문인이다.
♣ 추매[椎埋]사람을 죽이고 파묻어서 그 죄적(罪跡)을 완전히 감춤. 또는 도굴꾼이 무덤을 파헤치고 물건을 꺼내가 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함. 전하여 전에 있었던 것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을 비유한 말임.
♣ 추매[鄒枚]서한(西漢) 양 효왕(梁孝王)의 상객(上客)이었던 추양(鄒陽)과 매승(枚乘)의 병칭으로, 보통 시종 문신(文臣)의 뜻으로 쓰인다. 이들은 당시에 재변가(才辯家)로 저명했던 사람들이다. 《漢書 卷五十一 賈鄒枚路傳》
♣ 추매자[椎埋者]방망이로 사람을 쳐죽여 매장한 잔인무도한 자. 여기서는 한(漢)의 고조(高祖)를 말한 것임. 추매도구(椎埋屠狗). 《蘇洵 高祖論》
♣ 추부[萑苻]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강도(强盜)가 출몰했던 늪지대 이름.
♣ 추비전패[追飛電牌]패면(牌面)에 추비전(追飛電) 3자를 새긴 납으로 만든 패. 연산군 때에 궁중에서 쓰는 물건은 정원(政院)을 경유하지 않고 액정서(掖庭署)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어 각사(各司)에 가서 입으로 ‘무슨 물건을 들이라.’ 했는데 그 가는 사람이 차는 패로서, 급하기가 비전(飛電)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추비춘경비[秋悲春更悲]소동파(蘇東坡)의 법혜사횡취각(法惠寺橫翠閣)에 “봄이 오매 고향에 돌아갈 기약 없으니, 사람들은 말하길 가을이 슬프나 봄은 더욱 슬프다네.” 하였다.
♣ 추사[秋社]입추(立秋)가 지난 뒤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에 토지신(土地神)에게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 추사[樞司]정치의 중추(中樞)가 되는 기관이라는 뜻으로, 비변사(備邊司)를 가리킨다.
♣ 추사[秋史]조선 말기에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 등에 크게 뛰어났던 김정희(金正喜)의 호이다.
♣ 추사재리동[秋事在籬東]은거하면서 국화나 완상함을 비유한 말.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타리 밑에 국화를 따면서 유연히 남산을 보노라.[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한 데서 온 말이다.
♣ 추산자[秋山子]박홍중(朴弘中)의 호이다.
♣ 추생[鄒生]추생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변설가(辯舌家) 추연(鄒衍)을 말한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유자들이 말하는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 가운데 팔십일 분의 일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儒者所謂中國者 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라고 말한 추연의 주장이 실려 있다.
♣ 추생담해[鄒生談海]추생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추연(鄒衍)을 이름. 광대한 담론이란 바로 추연이 천상(天象)을 말하는 데 있어 그 변론이 굉원박대(宏遠博大)하였음을 이른 말이다.
♣ 추생영해사[鄒生嶺海死]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추연(鄒衍)을 가리킨다. 연(燕) 나라 혜왕(惠王)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추연을 옥에 가두었는데, 여름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오곡(五穀)이 익지 않았다고 한다.
♣ 추생율[鄒生律]추생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 추연(鄒衍)을 가리킨다. 추연은 본디 율(律)에 능하여, 기후가 차가워서 오곡(五穀)이 성장하지 못하는 북방(北方)의 어느 땅에 그가 율을 불어 그곳에 따스한 봄이 오게 해서 벼ㆍ기장 등의 곡식이 잘 자랐다 한다. 《列子 湯問》
♣ 추생취율[鄒生吹律]추생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추연(鄒衍)을 이르는데, 그가 연 혜왕(燕惠王)을 섬길 적에 혜왕이 다른 신하의 참소하는 말을 믿고 그를 하옥시키자 때아닌 5월에 서리가 내렸고, 또 북방은 기후가 차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했는데, 그가 율(律)을 불어 기후를 다습게 하자 벼와 기장이 자랐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 추서[墜緖]쇠퇴해진 사업(事業)이란 뜻으로, 선왕 선성(先王先聖)이 전해 온 사도(斯道)를 의미한다.
♣ 추서[鄒書]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올리는 글을 말한다. 한(漢) 나라 추양(鄒陽)이 양 효왕(梁孝王)의 문객으로 있을 때 참소를 받고 하옥되었다가 상서를 하여 석방된 고사가 있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 추서[追胥]추서는 도적을 추격하여 체포하는 역인(役人)을 가리킨다.
♣ 추서여왕찬[推書與王粲]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채옹(蔡邕)이 나이 어린 왕찬을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아가 맞이하였는가 하면 자기 집안의 서적을 모조리 왕찬에게 주겠다고 한 고사가 전해 온다. 《三國志 卷21》
♣ 추석[酋腊]잘 익은 독주(毒酒).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잘 익은 독주라야 사람을 더 빨리 죽일 수 있다.” 하여 주 유왕(周幽王)의 총희(寵姬)인 포사(褒姒)를 독주에다 비하였음.
♣ 추성[秋城]전라남도 담양(潭陽)의 옛 이름.
♣ 추수겸가백로징[秋水蒹葭白露澄]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됨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으로, 시경(詩經)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긴 갈대 푸르른데,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네. 저기 바로 저 사람이 물 저편에 있도다. 물길 거슬러 올라가나, 험한 길이 멀기도 하네. ……[蒹葭蒼蒼 白露爲霜 所謂伊人 在水一方 遡洄從之 道阻且長……]" 한 데서 온 말이다.
♣ 추수판[抽手板]벼슬을 그만둔다는 것임. 수판은 홀(笏)의 별칭으로 벼슬아치가 조회 때에 지니는 물건임.
♣ 추신책[抽身策]벼슬자리에서 몸을 빼서 물러날 계책을 말한다.
♣ 추아[驄牙]한 무제(漢武帝) 때에 건장궁(建章宮) 후합(後閤) 대들보 속에서 동물이 나왔는데, 그 모양이 고라니 비슷했다. 동방삭(東方朔)이 말하기를, “그것은 이른바 추아라는 것이니, 먼 곳에서 마땅히 와서 귀순(歸順)하리라.” 하더니, 그 1년 후에 흉노(匈奴) 혼야왕(混邪王)이 과연 10만 명을 데리고 와 항복하였다.”사기(史記)
♣ 추아[抽芽]싹을 내밀다.
♣ 추야장[秋夜長]악부의 잡곡(雜曲) 가사의 이름. 왕융(王融)ㆍ왕발(王勃) 등 많은 사람의 소작이 있음.
♣ 추양[鄒陽]한(漢) 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문변(文辨)에 뛰어났으며, 경제(景帝) 때의 유세객(遊說客). 한 나라 추양이 양효왕(梁孝王)의 빈객으로 있다가 양승(羊勝) 등의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힌 뒤 옥중에서 글을 써서 원통함을 호소한 결과 석방이 되어 상객(上客)의 대접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鄒陽列傳》
♣ 추어[雛語]어린 아이의 말소리를 이른 말이다.
♣ 추역[酋醳]추는 익은 술, 역은 독한 술.
♣ 추연[鄒衍]전국 시대(戰國時代) 사람으로 연(燕) 나라 소왕(昭王)의 신임이 두터워 스승으로 모셔졌으나, 뒤에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한 다음 중상(中傷)을 당하여 하옥(下獄)되었다. 이에 여름철이었는데도 서리가 내리니, 사람들은 그의 억울함 때문에 서리가 내린 것이라 하였다. 《列子 湯問》
♣ 추열[趨熱]부염추열(附炎趨熱). 막강한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는 것을 말한다.
♣ 추엽신성[墜葉晨星]떨어진 잎새란 이미 죽은 친구를 비유한 말이고, 새벽별이란 마치 새벽별처럼 살아 있는 친구가 드묾을 비유한 말이다.
♣ 추예[醜穢]추하고 더러움.
♣ 추오[楸梧]산소 앞의 나무
♣ 추옹[秋翁]추포(秋浦) 황신(黃愼).
♣ 추요[芻蕘]추요는 꼴 베는 사람과 나무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판(板)에 “옛 어진이가 이르기를 추요에게 물으라 하였네[先民有言 詢于芻蕘]”하였다.
♣ 추우[騶虞]생물(生物)을 먹지 않는다는 의로운 짐승. 백호(白虎)의 모습에 검은 무늬를 띠었는데, 생물(生物)을 잡아먹지 않으며 생초(生草)를 밟지 않는 인후한 덕을 지녔다는 전설 속의 짐승이다. 지극히 믿음직한 덕이 있으면 나타난다고 한다. 《詩經 召南 騶虞》
♣ 추우강남[追友江南]친구 따라 강남간다. 주견 없는 행동을 뜻함.
♣ 추원보본[追遠報本]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
♣ 추월자[秋月子]심계 이광석을 가리키니 그의 서재(書齋)가 추월헌(秋月軒)이므로 한 말이다.
♣ 추유[樞楡]추유장은 시경 당풍(唐風) 산유추(山有樞)편을 말한다. 산유추 편에 “산에는 스무나무 진펄엔 느릅나무……그대 만약 죽고 나면 딴 사람만 즐거우리[山有樞 隰有楡……宛其死矣 他人是愉]"라고 하여 너무 고생만 하지말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라는 뜻을 노래하였다. 곧 백성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고 고생만 한다는 것이다.
♣ 추읍만보[郰邑輓父]공자(孔子)가 어렸을 적에 자기 아버지의 묘를 몰랐었는데, 자기 어머니가 죽었을 때 추읍(郰邑)에 사는 만보(輓父)란 사람의 어머니가 그 묘의 소재를 가르쳐 주자, 자기 어머니를 그곳에 합장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孔子世家》
♣ 추이[推迻]속세를 따라 움직이다. 즉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절개를 꺽고 충직함을 저버리고 세태의 심각성을 외면하면서 시류에 편승함을 의미한다.
♣ 추자[鶖子]석가(釋迦)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리불(舍利弗)의 음역(音譯)으로, 전하여 승려(僧侶)를 의미한다.
♣ 추자서[鄒子書]참소 당한 억울함을 임금에게 호소를 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추자(鄒子)는 한(漢) 나라 추양(鄒陽)으로, 양 효왕(梁孝王)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양승(羊勝) 등의 모함을 받고 하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상서를 하여 마침내 상객(上客)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史記 卷83》
♣ 추자예거[鄒子曳裾]추자는 한 나라 때 유세객(遊說客)인 추양(鄒陽)을 가리키며, 예거(曳裾)는 긴 옷자락을 늘어뜨린다[曳長裾]의 준말로, 즉 왕후의 문에 출입한다는 뜻이다. 추양이 오(吳)에 벼슬할 적에 오왕(吳王)이 음모(陰謀)를 꾸미자 글을 올려 간하기를 “지금 신(臣)이 만일 간교한 마음을 다한다면 어느 왕후의 문엔들 긴 옷자락 늘어뜨리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漢書 卷五十一 鄒陽傳》
♣ 추자예거[鄒子曳裾]추자는 한 나라 추양(鄒陽). 그는 오(吳)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상객(上客)이 되어 말하되, “어느 왕의 문에서 긴 옷자락을 끌지 못하랴.” 했다. 왕후(王侯)의 문객(門客)을 말한 것이다.
♣ 추자율[鄒子律]추자는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추연(鄒衍)을 가리키는데, 북방(北方)의 땅이 차가워서 오곡이 자라지 못하므로, 추연이 피리를 불어 기후를 따뜻하게 하자, 벼와 기장이 무럭무럭 자랐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 추자취율[鄒子吹律]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추연(鄒衍)이 연(燕) 나라의 곡구(谷口)에 있을 때, 땅이 비옥하면서도 기후가 썰렁하여 농사가 안 되는 것을 보고, 양률(陽律)을 불어넣어 곡식을 자라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太平御覽 卷54 注》
♣ 추재[秋齋]추재는 조수삼(趙秀三)의 호인데 시를 잘하였음.
♣ 추쟁옹[箒爭擁]옛날에 빈객을 맞이해 올 때 항상 앞에서 비를 들고 옹위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 추정[秋丁]가을의 첫 정일(丁日)을 말한 것으로, 바로 이날에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한다.
♣ 추정[趨庭]아들이 어버이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집에 혼자 서 있을 때, 아들 백어(伯魚)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鯉趨而過庭], 시(詩)와 예(禮)를 배우도록 가르쳤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季氏》
♣ 추정례[秋丁禮]가을철 정일(丁日)에 향교(鄕校)에서 올린 석전제(釋奠祭)를 말한다.
♣ 추정몽[趨庭夢]고향 집에 대한 꿈을 말한다. 공자의 아들이 종종걸음으로 집안의 뜨락을 지나갈 때[趨庭], 공자가 그를 불러 세우고서 시(詩)와 예(禮)를 공부하라고 가르쳐 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季氏》
♣ 추정문례趨庭聞禮]추정(趨庭)은 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공자(孔子)의 아들 백어(伯魚)가 뜰 앞으로 나아가 공자에게 시(詩)와 예(禮)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 추정문시례[趨庭聞詩禮]공자의 아들 백어(伯魚)는 집에 돌아가 있을 적에 뜰 앞으로 나아가자, 공자는 홀로 서 있다가 “너는 시(詩)를 배웠느냐?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였으며, 또 한 번은 “예(禮)를 배웠느냐?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에 설 수 없다.” 하였다. 《論語 季氏》
♣ 추조[鰌潮]산해경(山海經)에, “바다 미꾸리의 출입하는 것이 조수(潮水)가 된다”는 말이 있다.
♣ 추조부[趨藻鳧]이 말은 후한서(後漢書) 유도전(劉陶傳)에 “군사들이 싸움을 괴롭게 여기지 않고 기뻐하는 모습이 마치 오리가 마름을 만난 듯하다.” 한 글에서 부조(鳧藻) 두 글자를 인용한 것이다.
♣ 추지선[秋之扇]사랑을 잃게 된 처지란 뜻의 고사성어.
♣ 추창[惆愴]실망하여 탄식하는 모양.
♣ 추창[趨蹌]젊은이가 어른 앞에서 예도(禮度)에 맞도록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 추천[鞦韆]그네.
♣ 추천[秋千]추천(鞦韆)과 같은 뜻으로 그네를 말한다.
♣ 추초만고소[秋草滿姑蘇]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오자서(伍子胥)의 충성스런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죽이니, 오자서가 죽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사슴들이 고소대(姑蘇臺)에서 놀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오나라가 망하여 고소대에 풀이 우거졌다는 말이다.
♣ 추추[湫湫]근심하며 슬퍼하는 모양
♣ 추추[啾啾]벌레 우는 소리, 새의 우는 소리, 말의 우는 소리, 원숭이의 소리, 피리 소리, 망령이 우는 소리
♣ 추축[追逐]뒤쫓아 다님.
♣ 추충만저치이복[秋虫滿貯鴟夷腹]뱃속에 시상이나 해학이 무진장 들어 있음을 말한 것으로, 가을 벌레는 특히 울기를 잘하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 추충성[啾蟲聲]벌레 우는 소리란 시를 읽는 소리를 말한 것으로 시문은 작은 재주라 하여 조충 소기(雕蟲小技)라 하므로 한 말이다.
♣ 추포[秋浦]황신(黃愼)의 호.
♣ 추포공[秋浦公]추포는 황신(黃愼)의 호이다.
♣ 추풍[追風]진시황(秦始皇)의 일곱 명마(名馬) 가운데의 하나로, 천리마와 같은 뜻이다.
♣ 추풍낙엽[秋風落葉]시들어 떨어지거나 헤어져 흩어짐의 비유.
♣ 추풍두로파모옥[秋風杜老破茅屋]두보(杜甫). 그의 시에, “초가집이 가을 바람에 부서짐을 탄식한다.[茅屋爲秋風的破嘆]”가 있다.
♣ 추풍병욕소[秋風病欲蘇]두보(杜甫)의 시 ‘강한(江漢)’에 나오는 구절로, “지는 해에 마음 되레 비장해지고, 갈바람에 병은 나으려 하네.[落日心猶壯 秋風病欲蘇]”하였다.
♣ 추풍사[秋風辭]한 무제가 분수(汾水) 남쪽[汾陰]에서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드린 뒤에 배를 타고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지은 노래로, 지난날을 추억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는 등 애조(哀調)를 띠고 있다.
♣ 추풍선[秋風扇]가을 부채. 곧 쓸모 없는 물건.
♣ 추형[秋螢]두보(杜甫)가 장안(長安)을 떠나 봉선현(奉先縣)의 역소(投所)에 우거(寓居)할 때 지은 ‘교릉시 삼십운(橋陵詩三十韻)’을 말한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에 “늙은 말 같은 내 신세를 현령께서 동정하여, 반딧불 잡아 글 읽는 독서인에게 역소의 한 건물을 빌려 주셨네.[主人念老馬 廨署容秋螢]”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 추형모설[秋螢暮雪]진(晉) 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을 모아 그 빛으로 책을 읽고, 역시 진 나라의 손강(孫康)이 눈[雪] 빛으로 등잔불을 대신해 책을 읽었다는 ‘형창설안(螢窓雪案)’의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車胤傳ㆍ蒙求 中 孫康映雪》
♣ 추혜서[追惠署]연산군 때 궁인들의 상장관곽(喪葬棺槨) 및 예장(禮葬)에 대한 사무를 맡은 곳을 말한다.
♣ 추호[秋毫]가을철의 가늘어진 짐승의 털. 썩 적음.
♣ 추호부[秋胡婦]추호는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인데, 그의 아내가 시집온 지 5일 만에 그는 진(陳)에 부임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에야 돌아오다가 길가에서 뽕 따는 부인을 보고 좋아하여 금(金)을 주자, 그 부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는데, 추호가 자기 집에 와서 보니 아까 그 부인이 바로 자기 아내였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남편의 불효(不孝)와 불의(不義)를 꾸짖고 강물에 투신 자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추화[推火]밀양(密陽)의 고호임.
♣ 추환[芻豢]풀을 먹는 우양(牛羊)과 곡식을 먹는 견시(犬豕)를 가리키는 말로, 감미로운 음식을 뜻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의리(義理)가 나의 마음에 좋기가 추환(芻豢)이 나의 입에 좋은 것과 같다.” 하였다.
♣ 추획사[錐劃沙]붓을 들어 글씨를 쓸 때 송곳으로 모래를 긋는 것과 같이 한다는 것으로 필법의 정묘함을 뜻함.
♣ 축[祝]남자무당을 가리킨다.
♣ 축[筑]축은 거문고 비슷한 현악기의 이름이다.
♣ 축가탄[祝家彈]이는 축씨(祝氏)가 만든 거문고의 곡조를 연주하는 법인데, 그의 이름과 시대는 자세하지 않다. 《樂府詩集 琴曲歌辭 胡笳十八拍》
♣ 축객령[逐客令]진 시황 때에 내린 명으로, 다른 나라에서 진나라로 들어와서 관직에 있거나 유세(遊說)하는 자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게 한 명령인데, 이사(李斯)가 상소를 올려서 반대하자 명령을 철폐하였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 축객혼[逐客魂]초(楚) 나라 때 비방을 당해 유배되어 떠돌다가 상수(湘水) 가에서 죽은 굴원(屈原)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고향을 떠난 나그네를 가리킨다.
♣ 축건[竺乾]천축(天竺)으로 곧 석가를 말함.
♣ 축건경[竺乾經]불경. 석가(釋迦)가 축건국(竺乾國)의 태자였으므로 붙여진 것이다.
♣ 축건선생[竺乾先生]축건 선생은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말한다.
♣ 축건책[竺乾策]불서(佛書)임.
♣ 축계옹[祝鷄翁]진(晉) 나라 때의 선인(仙人). 축계옹이 세상을 피해 홀로 자득하며 시향(尸鄕) 북쪽 산 아래 토굴에 살면서 백여 년 동안 1천 마리의 닭을 길렀는데, 닭마다 모두 이름을 붙여 준 뒤 그 닭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고 앞으로 나왔다 한다. 《列仙傳 祝雞翁》
♣ 축공무[祝公舞]간신들이 날뛰는 바람에 올바른 도리가 없어졌다는 말.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에 “축흠명(祝欽明)이 팔풍무(八風舞)를 추었는데, 온갖 추태가 고루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이 ‘축공의 춤에 오경(五經)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축과[軸薖]시경(詩經) 고반(考槃) 편의, “은거하는 집이 언덕에 있으니 대인의 마음 넉넉하다. …… 은거하는 집이 육지에 있으니 대인이 유유자적 노닌다.[考槃宰阿 碩人之薖 …… 考槃在陸 碩人之軸]”를 인용한 것으로 은사의 여유로운 생활을 뜻한다.
♣ 축국백리[蹙國百里]국방이 튼튼하지 못하여 나라가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소민(召旻)에, “지금은 나라가 백 리씩 쭈그러들도다.[今也日蹙國百里]”하였다.
♣ 축록[逐鹿]사슴을 쫓음. 제위帝位나 정권을 다툼을 비유하거나 또는 널리 ‘경쟁하다’의 의미
♣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 축록자불고토[逐鹿者不顧兎]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란 뜻으로, 큰 일에 뜻이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축리접위구[逐利接爲構]소인은 마음이 한가하지 못하고 이욕에 급급하여 자나깨나 항상 외부와 접촉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莊子 齊物論》
♣ 축빈부[逐貧賦]한(漢)의 양웅(揚雄)이 지은 문장 이름이다. 연감유함(淵鑑類函) 빈 조(貧條)에도 보임.
♣ 축삼년애[畜三年艾]미리 걱정해서 대비함을 말함.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지금 왕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7년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함과 같으니 비축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얻지 못하리라.” 하였음.
♣ 축성사[築城司]비변사(備邊司)의 전신임. 조선조 중종 12년(1517) 4월에 평안도, 함경도 등지의 변경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그해 7월에 비변사로 명칭을 고치고 삼의정(三議政)을 도제조(都提調)에 임명하는 조치가 취해짐.
♣ 축신[逐臣]임금에게서 추방당한 신하를 이름. 이백의 시에 “黃花哭逐臣"이 있음.
♣ 축신소객고사군[逐臣騷客苦思君]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동정호(洞庭湖)에 비가 부슬부슬 오는 컴컴한 저문 날에 범이 휘파람 불고 원숭이가 울 제, 귀양온 불우(不遇)한 신하가 임금을 생각하는 슬픈 회포가 생긴다.” 하였다.
♣ 축실[築室]자공(子貢)을 가리킨다. 공자가 죽은 뒤 3년이 지나자 문인들이 모두 떠나갔는데, 자공은 공자의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3년 동안 살다가 떠나갔다. 《孟子 滕文公上》
♣ 축암[築巖]축암은 은(殷) 나라 부열(傅說)이 부암(傅巖)의 공사판에서 막노동했던 것을 말한다. 《書經 說命下》
♣ 축요[祝堯]당요(唐堯) 때에 화(華)의 봉인(封人)이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 일을 요(堯) 임금에게 빈 고사로, 전하여 임금을 배알하고 축수하는 일을 비유한 것이다.
♣ 축요심[祝堯心]요 임금이 화(華) 땅을 시찰할 적에 그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로써 축수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축원령[逐原鴒]형제간에 위급함을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물가에 있어야 할 할미새가 언덕에서 쏘다니며 자기의 짝을 찾듯, 그렇게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어려움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간다[鶺鴒在原 兄弟急難]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 축융[祝融]화신(火神)을 말한다. 불은 방위로는 남쪽이고 사시(四時)로는 여름이며 색깔은 적색이다. 예기(禮記) 월령에 “맹하(孟夏)의 신(神)은 축융이다.” 하였다.
♣ 축융봉[祝融峯]경북 봉화(奉化)에 있는 청량산(淸涼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 축융봉[祝融峰]중국의 남악(南嶽)인 형산(荊山)의 최고봉으로 남방으로 내려갔던 한유, 두보, 소동파 등 많은 시인들이 이 봉우리를 노래하였다. 여기서는 필자가 백의(白衣)로 평양에 갔다가 다시 영해로 귀양올 때 본 금강산을 뜻한다.
♣ 축융자개[祝融紫蓋]자개와 축융(祝融)은 모두 산봉우리 이름으로, 형산(衡山)의 72봉(峯) 가운데 축융봉이 가장 높고, 자개봉이 그 다음이라고 한 것을 이른 말인데, 일설에는 자개봉이 가장 높다고 하기도 한다.
♣ 축일상제[逐日霜蹄]통명기(洞冥記)에 “수미국(修彌國)에 말이 있는데 용과 같아서 공중에 날기도 하고 해도 쫓는다.” 했다.
♣ 축자부추의[畜牸富推猗]사기(史記) 화식전(貨殖傳)에 “의돈(猗頓)은 노(魯) 나라 사람인데, 도주공(陶朱公)에게서 치부(致富)하는 방법을 배워 암소 다섯 마리를 길러서 부자가 되었다.” 하였다.
♣ 축지산[祝枝山]지산은 명 나라 축윤명(祝允明)의 호.
♣ 축치이자[逐鴟夷子]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회계(會稽)에서 크게 패하였을 적에 그의 모신(謀臣) 범려(范蠡)가 서시를 취하여 오왕에게 바치고 위기를 면하였는데, 오왕은 서시를 위해 고소대(姑蘇臺)를 짓고 그의 미색에 빠져 날마다 유연(遊宴)이나 일삼고 정사는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월 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서시는 죽지 않고 다시 범려를 따라갔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축항어[縮項魚]목이 짧은 고기로 축경편(縮頸鯿)이라 하는데, 곧 병어를 가리킨다.
♣ 축항편[縮項鯿]축항편은 머리가 편평(扁平)하고 목이 오그라든 형상의 물고기로 방어(魴魚) 종류이다.
♣ 축회[丑會]회는 30운(運)으로 곧 1만 8백 년을 가리키는데, 옛날에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축회에서 열리고 사람과 물건은 인회(寅會)에서 태어났다.[天開於子 地闢於丑 人生於寅]”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춘[椿]춘(椿)나무는 매우 오래 사는 나무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上古)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천 세를 봄으로 삼고 8천 세를 가을로 삼는 영목(靈木)이다.” 하였다. 장수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춘각[春脚]봄의 다리[春脚]는 ‘다리 달린 봄날[有脚陽春]’의 준말로서 어진 정치를 하는 지방수령을 말함.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송경(宋璟)이 태수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다리 달린 봄날이라 했다.” 하였다.
♣ 춘경[春鏡]봄단장하는 거울, 즉 춘장경(春妝鏡)의 준말이다. 맹호연(孟浩然)의 춘정(春情) 시에 “청루의 주렴에 아침 햇살 비치니, 분 연지 봄단장에 거울을 재촉하네.[靑樓曉日珠簾映 紅粉春妝寶鏡催]" 하였다.
♣ 춘경[春卿]춘경은 이규보(李奎報)의 자(字)이다.
♣ 춘경백수[春卿百首]춘경은 고려(高麗) 시대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자인데, 이규보가 특히 부안현(扶安縣)의 모든 경치를 두고 읊은 시가 많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춘관[春官]예부(禮部)의 별칭.
♣ 춘균등연촉[椿菌等延促]현상적 차별성은 절대적 지평(地平) 위에서 볼 때 모두 녹아 없어진다는 말이다. 대춘(大椿)은 1만 6000년을 산다는 나무 이름이고, 조균(朝菌)은 아침에 생겨나 곧바로 시들어버리는 버섯 이름이다. 《莊子 逍遙遊》
♣ 춘년[椿年]춘수(椿壽)와 같은 뜻으로 곧 오래 삶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 때 대춘(大椿)이 있었는데, 8천 년으로 한 봄을 삼고 8천 년으로 한 가을을 삼는다.” 하였다.
♣ 춘년어혜고[椿年語蟪蛄]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쓰르라미는 여름 한철에만 생겨났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봄과 가을을 모르는데 저 8천 년이나 오래 묵은 춘나무를 어찌 알겠느냐.” 했는데, 얕은 식견으로는 깊은 도량을 모른다는 비유이다.
♣ 춘니홍착개[春泥鴻着介]기러기가 앉았던 진흙에 남은 발자국은 곧 없어진다는 뜻이다.
♣ 춘당[椿堂]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춘당[春塘]창경궁(昌慶宮) 안에 있는 대(臺)를 이름.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이 이곳에 나아가 임시로 문무과(文武科)의 시험을 보이던 곳이다. 춘당대시(春塘臺試).
♣ 춘당초[春塘草]남조(南朝)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이 평소에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마주 대하면 좋은 시가 지어졌는데, 언젠가 영가현(永嘉縣)의 못가에서 시를 지으려고 해도 하루종일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다가 갑자기 꿈속에서 혜련을 보고 ‘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나누나[池塘生春草].’라는 시귀를 지었다고 한다. 《宋書 卷五十三 謝惠連傳》
♣ 춘대[春臺]날씨가 좋은 봄날에 올라가서 좋은 경치를 바라다보는 곳으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 춘란추국[春蘭秋菊]봄의 난초나 가을의 국화. 각기 특색이 있어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 없음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는 뜻의 고사성어.
♣ 춘령[春欞]춘(春)자는 춘(椿)자와 같이 쓰인 것인데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는 신령한 나무이다. 흔히 남의 장수를 축복할 때 인용된다. 《莊子 逍遙遊》
♣ 춘로추상출척[春露秋霜怵惕]군자(君子)는 봄에 이슬이 내리거나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그것을 밟아 보고는 반드시 돌아간 어버이를 위하여 슬픈 마음이 생긴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祭義》
♣ 춘명문[春明門]춘명문은 당(唐) 나라 서울 장안성(長安城)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의 하나임. 백낙천(白樂天)의 송장산인귀숭양시(送張山人歸嵩陽詩)의 “춘명문 밖 높다란 성 그곳을 곧바로 내려가면 그게 바로 숭산길일세.[春明門外城高處 直下便是嵩山路]"를 인용하였음.
♣ 춘모계[春暮稧]춘모계는 동진(東晉) 때 왕희지(王羲之)가 영화(永和) 9년인 계축년 3월 상사(上巳)일에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군현(羣賢) 소장(少長)과 함께 계(稧)를 닦은 고사에서 온 것임.
♣ 춘몽파[春夢婆]후청록(侯鯖錄)에 “동파 노인(東坡老人)이 창화(昌化)에 있으면서 등에 큰 바가지를 지고 전야(田野)에 행음(行吟)하고 다닐 때, 70세나 되는 한 노파(老婆)가 동파에게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었던 옛날의 부귀는 일장춘몽이라오.’하자, 동파가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이때부터 그 마을 사람들이 이 노파를 춘몽파라고 불렀다.” 하였다.
♣ 춘반[春盤]입춘일(立春日)에 춘병(春餠)과 생채(生菜)를 만들어 먹는 것을 말한다.
♣ 춘방[春坊]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동궁(東宮) 즉 세자궁(世子宮)을 가리킨다.
♣ 춘방[春坊]태자(太子)의 궁전인 춘궁(春宮)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
♣ 춘번[春幡]봄이 왔음을 뜻하는 깃발. 입춘일에 문앞에 세워 봄이 돌아온 상징으로 삼았음.
♣ 춘번[春幡]춘번이란 금(金)ㆍ은(銀)ㆍ나(羅)ㆍ채(綵) 등으로 만든 꾸미개, 즉 번승(旛勝)을 이름. 옛날 입춘일(立春日)이면 이것을 백관(百官)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이를 복두(幞頭) 위에 달고 입조(入朝)하여 하례를 올리게 하였는데, 하례를 마치고 나서는 각각 이를 복두 위에 단 채로 귀가(歸家)했다고 한다.
♣ 춘복성[春服成]“봄 3월에 봄 옷이 이미 되었거든 관자 5, 6명과 동자 6, 7명과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이다.” 증점(曾點)이 공자 앞에서 뜻을 말한 말이다. 《論語》
♣ 춘복초성려경지[春服初成麗景遲]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말하라 하였더니 다른 제자들은 모두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며 시를 읊고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는 외물(外物)에 구하지 않는 그의 높은 뜻을 허여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을 두고 지은 시를 말한다.
♣ 춘부장[椿[春]府丈]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춘빙루화[春氷鏤花]얼음에 꽃을 아로새기면 이내 녹아 없어져버리듯이 가치를 남기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참고로 송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송왕랑(送王郞)이란 시에 “모래를 쪄서 미음을 지음에 끝내 배부르지 않고, 얼음에 문자를 아로새기면 헛되이 공교로울 뿐이라네.[炊沙作糜終不飽 鏤氷文字費工巧]”하였다.
♣ 춘사[春社]입춘(立春)이 지난 뒤 5일째 되는 무일(戊日)에 풍년을 기원하여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 춘성[春城]덕원(德源)의 옛 이름이다.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어향(御鄕)으로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 춘수하채무[椿樹下彩舞]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참죽나무는 아버지를 가리킨다.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나이 70세에 부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항상 꼬까옷을 입고 어린아이 시늉을 해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北堂書鈔 卷129》
♣ 춘수훤화[椿樹萱花]춘나무와 원추리꽃. 춘나무는 부친을 비유하고 원추리는 모친을 비유한 것이다.
♣ 춘앵[春鶯]당(唐)의 악곡사명(樂曲詞名) 중에 춘앵전(春鶯囀)이 있음.
♣ 춘유각[春有脚]당(唐) 송경(宋璟)이 백성을 사랑하므로 그때 사람들이 모두 송경을 “다리 있는 따스한 봄”이라 일렀다.
♣ 춘인추사[春蚓秋蛇]글씨가 가늘고 꼬부라져서 필세(筆勢)가 약함을 비유한 말이다.
♣ 춘일사천유[春日斜川游]도연명이 나이 37세 되던 해 정월 5일에 율리(栗里)와 가까운 사천(斜川)에 나가 노닐면서 지은 ‘遊斜川’이라는 유명한 시가 전해온다. 《陶淵明集 卷2》
♣ 춘장[春場]봄날 교외(郊外)의 빈터. 구양수(歐陽脩)의 공자시(公子詩)에, “下馬春場鷄鬪距 鳴弦初日鷄驚媒”라고 보임.
♣ 춘장[椿丈]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춘조[春曹]춘조는 예조(禮曹)의 별칭이다. 이준(李埈)이 인조(仁祖) 10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휴가를 얻어 고향인 상주(尙州)로 내려간 뒤, 인조 13년에 사은(謝恩)하러 서울로 올라오다가 충주(忠州)에 이르러 병 때문에 글을 올리고 다시 시골로 돌아가 6월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춘주[春酒]겨울에 빚은 술. 봄에 빚어서 겨울에 익은 술이라고도 한다. 시경(詩經) 七月에 “춘주를 만들어 오래 살기를 빈다" 하였다.
♣ 춘첩자[春帖子]옛날 궁중(宮中)에서 입춘(立春)이 되면 황제ㆍ황후ㆍ태자의 궁에다 모두 축하하는 시를 써서 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春帖子)라 한다.
♣ 춘첩자[春帖子]입춘(立春)에 대궐 안 기둥에 써붙이는 주련(柱聯)을 말한다. 이는 본디 제술관(製述官)에게 명하여 하례(賀禮)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한 다음 종이에 써서 붙인 것이다.
♣ 춘초구[春草句]진(晉) 나라 사령운(謝靈運)이 지은, “못에 푸른 풀이 났다.”[池塘生靑草]는 유명한 시는, 그의 죽은 아우 사혜련(謝惠連)을 꿈에 보고서 영감이 생겨서 지었다 한다.
♣ 춘초애왕손[春草哀王孫]고향땅을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초사(楚辭)인 초은사(招隱士)의 “왕손의 노닒이여 돌아가지 않고, 봄풀이 자람이여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에서 온 말이다.
♣ 춘총[春蔥]봄의 여린 파잎처럼 가냘픈 미인의 손을 비유한 말이다.
♣ 춘추[春秋]춘추는 공자가 노(魯) 나라 사(史)에 의거(依據)하여 지은 경(經). 필법(筆法)이 엄정(嚴正)하여 공자 자신도, “후세에 나를 알아줄 것도 그 춘추(春秋)며, 나를 죄 줄 것도 그 춘추(春秋)이다.”고 술회(述懷)했다 한다. 춘추(春秋)는 노 은공(魯隱公)에서 시작하여 애공(哀公)에서 끝났는데 그 기간이 2백 42년임.
♣ 춘추곤월엄[春秋袞鉞嚴]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포폄(褒貶)이 매우 엄격하여, 한 글자의 포양이 곤룡포(袞龍袍)보다 영광스럽고 한 글자의 폄척이 부월(斧鉞)보다 엄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故事成語考 文事》
♣ 춘추오패[春秋五覇]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뜻하는 고사성어.
♣ 춘추필법[春秋筆法]오경(五經)의 하나인 춘추(春秋)와 같이 비판의 태도가 썩 엄정함을 이르는 말. 대의명분을 밝히어 세우는 사실의 논법을 일컫기도 한다.
♣ 춘치자명[春雉自鳴]봄철의 꿩이 스스로 운다. 시키거나 요구하지 아니하여도 제풀에 하는 것을 말한다.
♣ 춘팔천[椿八千]춘나무란 상고 시대에 8천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는 최장수의 나무이다. 《莊子 逍遙遊》
♣ 춘풍제상[春風齊相]춘추 때 제(齊)나라의 현상(賢相) 안영(晏嬰). 어진 이로 유명했다.
♣ 춘풍추우[春風秋雨]봄철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비. 곧 지나가는 세월을 가리키는 말.
♣ 춘훤[椿萱]남의 부모를 함께 높여 부름. 춘(椿)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대춘(大椿)으로 아버지를 뜻하고, 훤(萱)은 시경(詩經)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나오는 훤초(諼草)로 어머니를 뜻한다.
♣ 춘휘보하방[春暉報何方]맹동야(孟東野)가 어머니를 생각한 시에, “한 치 풀의 마음[寸草心]으로 봄날 빛 은혜를 갚기 어렵네.” 하였다.
♣ 출가[出家]속가(俗家)를 떠나 중이 되는 일.
♣ 출견인도녀 내차분대괄[出見闉闍女 柰此粉黛聒]조강지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말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출기동문(出其東門)에 “성밖을 나가 보니 고운 여인이 띠꽃같이 귀엽네 아무리 귀여우면 무엇하나 내 마음엔 생각이 없는 걸 흰옷 입은 남자와 물들인 옷 입은 여자여 함께 즐길 만하도다[出其闉闍 有女如荼 雖則如荼 匪我思且 縞衣茹蘆 聊可與娛]”하였다.
♣ 출경입필[出警入蹕]천자(天子)가 나갈 때에는 경(警)이라 외치고, 들어올 때에는 필(蹕)이라고 외쳐서 길을 맑히고 행인(行人)을 금(禁)한다.
♣ 출계군[出鷄群]뭇 닭 중에 한마리 학(鶴)이 뛰어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높이 출세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 출곡[出谷]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는도다.[出自幽谷 遷于喬木]”하였다.
♣ 출곡천교[出谷遷喬]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들 쩡쩡 찍는데, 새가 앵앵 울더니, 깊은 골짝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옮겨 가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데서 온 말로, 흔히 관위(官位)의 승진에 비유한다.
♣ 출과면취[出胯俛就]한신(韓信)이 젊었을 때 시정(市井)의 젊은 백정들이 위협하며, “죽든지 내 바지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든지 하라.” 하니, 분을 꾹 참고 머리를 숙이고 가랑이 밑으로 나갔다. 사기(史記)
♣ 출과회음[出跨淮陰]출과는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 나간다는 뜻으로, 한신(韓信)이 미천하였을 때 회음 소년들이 한신을 모욕하여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 나가게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九十二 淮陰侯列傳》
♣ 출기여찬해[出奇如粲邂]주희(朱熹)의 시에, “미인을 만나니 환히 웃는구나.[美人邂逅一笑粲]”에서 인용하였다.
♣ 출면사[出麪桫]사라나무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나는 나무로 이 나무에서는 밀가루가 나오는데, 뿌리를 옮겨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세속 사람들이 완상할 수가 없다고 한다.
♣ 출몰무쌍[出沒無雙]들고나는 것이 비할 데 없이 잦음.
♣ 출사편[出師篇]출사편은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말한 것인데, 제갈량이 위(魏)나라로 출병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글로써 충의(忠義)가 가득한 글이다.
♣ 출사표[出師表]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위(魏) 나라를 치려고 출병(出兵)할 때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표문(表文), 전후 2편으로 되어 있다.
♣ 출새가[出塞歌]옛날에 종군(從軍)하여 국경으로 나갈 적에는 출새곡(出塞曲)을 불렀다.
♣ 출새가[出塞歌]한 문제(漢武帝) 때 이연년(李延年)이 호곡(胡曲)을 기초로 하여 만든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인데, 군중의 음악으로 말 위에서 연주하는 것이라 한다.
♣ 출새곡[出塞曲]국경으로 출병할 때에는 군악(軍樂)으로 출새곡(出塞曲)을 울린다.
♣ 출새삼신[出塞三臣]삼신(三臣)은 청(淸) 나라를 극력 배척했던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삼학사(三學士)를 가리킨 것으로, 조선과 청 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된 후 청 나라의 요청에 의해 이들이 청 나라에 잡혀 갈 적에 인조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친히 접견하여 위로해 주었던 일을 말한다. 이들은 청 나라에서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
♣ 출연[怵然]두렵고 걱정하는 모양.
♣ 출이반이[出爾反爾]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오고,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출이입천태[朮餌入天台]한(漢) 나라 때 유신(劉晨)ㆍ완조(阮肇) 두 사람이 천태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가 10여 일이 경과하여 배는 고프나 집은 멀어서 갈 수가 없으므로, 그곳에 있는 익은 복숭아 몇 개씩을 따먹고 요기를 하였다. 그때 시냇가에 아리따운 두 여자가 있어 반갑게 맞이하므로, 그녀들을 따라가서 반 년 동안을 즐겁게 지내고 그곳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보니, 이미 십세(十世)가 지났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출입사촌간[出入四寸間]깊이가 없는 소인의 학문, 즉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말함.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것이니, 입과 귀의 사이는 곧 사촌일 뿐이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한 데서 온 말이다.
♣ 출장입상[出將入相]전시(戰時)에는 싸움터에 나가서 장군(將軍)이 되고 평시(平時)에는 재상(宰相)이 되어 정치를 함. 장상(將相)의 벼슬을 지내는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뛰어난 인재.
♣ 출중[出衆]뭇 사람들 중에서 뛰어남ꃚ 출중한 외모
♣ 출처행장[出處行藏]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써 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이 있다.
♣ 출척[怵惕]놀라고 두려운 것.
♣ 출체[黜遞]벼슬아치가 장계(狀啓)에 의해 파출(罷黜)되는 일.
♣ 출출[泏泏]물이 솟아 흘러내리는 모양
♣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나갈 때는 부모님께 반드시 출처를 알리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뵈어 안전함을 알려 드림. 효의 시초. 출곡반면(出告反面)
♣ 충거[衝車]충거는 병거(兵車)의 이름.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의 주에, “충거는 큰 철판(鐵板)으로 원(轅)의 끝을 입혀서 무기를 나열하고, 말도 갑옷을 입혀서 적의 진을 마구 충돌하는 것을 이름이다.” 하였다.
♣ 충곡[蟲鵠]자신은 벌레로, 사신은 고니로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 충국논병[充國論兵]한(漢)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70이 넘은 나이로 병사(兵事)를 직접 처리하면서 뛰어난 계책을 올렸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漢書 卷69》
♣ 충국둔종[充國屯種]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충국이 70세의 늙은 나이로 나가 싸워서 이를 평정한 다음 그곳에 머물면서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 충굴[充倔]옷이 남루함
♣ 충동한우[充棟汗牛]쌓으면 들보에까지 차고,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린다는 뜻으로, 많은 장서를 가리키는 말. 한우충동(汗牛充棟).
♣ 충려가경[充閭佳慶]진(晉)나라 가규(賈逵)가 아들을 낳고, 이 아이는 장차 귀하게 되어 거마(車馬)가 문 앞에 충만한 경사가 있을 것이라 하여 이름을 충(充)이라 짓고, 자(字)를 공려(公閭)라 지었다.
♣ 충막[沖漠]충막은 그윽하고 조용해서 흔적이 없음을 말함. 정자(程子)가 태극(太極)을 풀이하기를 “충막하여 징조가 없으되 만상은 삼연하게 갖추어졌다.[冲漠無朕 萬象森然巳具]" 하였음. 《程子遺書》
♣ 충막선천미획도[沖漠先天未劃圖]아직 피지 않은 매화를 천지의 개벽되지 않은 상태에 비유한 것.
♣ 충명일[种明逸]송의 충방(种放). 명일(明逸)은 그의 자(字)임. 그는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종남산(終南山)에 숨어살며 손수 밭 갈아 자급자족하고 후진 양성에 힘써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많았다. 그 후 진종(眞宗)의 부름을 받고 나가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다가 곧 자기 어머니 명으로 산으로 돌아와서는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도의(道衣)를 입고 제생(諸生)들을 모이게 한 후 죽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는 자기가 일생 동안 지었던 장소(章疏) 등을 모아 모두 불태워버리고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후 죽었다. 《宋史》
♣ 충민촉[忠愍燭]충민은 송(宋) 나라 구준(寇準)의 시호이다. 구준은 어려서부터 유등(油燈)은 켜지 않고 촛불만 사용하였는데, 측간에서도 촛불만 사용하여 촛농이 쌓여 무더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歸田錄》
♣ 충비[蟲臂]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위대한 조물주께서 그대를 변화시켜 벌레 팔뚝으로 만들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偉哉 造化 以汝爲蟲臂乎]”하였다.
♣ 충비서간[蟲臂鼠肝]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위대하다 조물주여 …… 이제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가, 벌레 팔뚝으로 만들려는가.[偉哉 造化 …… 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만물의 태어난 형태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 충사[虫絲]거미줄과 같은 벌레들의 토물(吐物)임.
♣ 충사[蟲沙]전쟁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말한다. 포박자(抱朴子)에 “전장에서 죽은 장교들은 원학(猿鶴)이 되고, 군사들은 충사(蟲沙)가 되었다.” 하였다.
♣ 충사평제외후현[忠詐評題畏後賢]송(宋) 나라 때 간원(諫院)에 역대 간관(諫官)의 이름을 돌에 새겼는데,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이 간원제명기(諫院題名記)에 “뒷사람들이 하나하나 이름을 지적하면서 ‘아무는 충성스러웠고 아무는 간사했으며, 아무는 정직했고 아무는 정직하지 못했다.’ 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 충신[忠信]공자(孔子)가 여량(呂梁)의 폭포를 구경할 때에, 폭포가 3천 길이나 되고 물거품이 40리나 되는데, 한 남자가 무사히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왔다. 공자가, “그대는 무슨 도술이 있는가?”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충신(忠信)으로 들어갔다가 충신으로 나온다.” 하였다. 《列子》
♣ 충신행만맥[忠信行蠻貊]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가서 처신할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衛靈公》
♣ 충신행만맥[忠信行蠻貊]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말이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행동이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같은 나라에 가더라도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충어검학[蟲魚撿學]충어는 벌레와 물고기. 곧 경전에 나오는 각종 벌레와 물고기를 분석하고 따져 풀이한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으로, 시경을 풀이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 충어고[蟲魚詁]이아(爾雅)에서 충어에 대하여 주석을 낸 것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고증가(考證家)의 일을 의미한다.
♣ 충어주[蟲魚註]잗단 고증가(考證家)의 일을 말함. 한유(韓愈)의 시에 “이아에는 충어를 주석했으니 정히 뜻 큰 사람이 아니로다[爾雅註蟲魚 定非磊落人]”하였다.
♣ 충어첨주[蟲魚添注]고서(古書)를 고증(考證)하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시에 “이아에 충어를 주석 내는 것은, 정히 큰 뜻 지닌 사람의 일이 아니다[爾雅注蟲魚定非磊落人]" 하였다.
♣ 충언역이[忠言逆耳]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림. 바른 말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함. 충고의 말은 그 당시에는 듣기 싫으나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이롭다
♣ 충여사[蟲與沙]전란으로 인해 죽어간다는 뜻이다. 포박자(抱朴子)에, “주(周) 나라 목왕(穆王)이 남정(南征)을 하니 전 군사가 다 죽어서 군자는 원숭이나 학으로 변하였고 소인들은 벌레나 모래가 되었다.” 하였다.
♣ 충여흔[虫餘痕]충(虫)은 즉 충서(虫書)를 말하는데, 진(晉) 나라 팔체서(八體書)의 하나이며 충조(虫鳥)의 형상으로 되었다.
♣ 충우자기[衝牛紫氣]칼 기운이 뻗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오(吳) 땅에 붉은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그곳을 파서 보검(寶劍)인 용천검(龍泉劍)을 얻었다고 한다.
♣ 충원[忠原]충주(忠州)를 말한다. 인조 6년에 안집중(安執中)의 반역으로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 충인[充蚓]전국 시대 제(齊) 나라 진중자(陳仲子)가 자기 형이 준 녹(祿)과 가옥(家屋) 모두 불의(不義)한 것이라 하여 받지 않은 데에 대하여,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중자가 어찌 청렴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중자의 지조를 채우려면 지렁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下》
♣ 충정[衷情]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마음)
♣ 충조[蟲雕]큰 경륜은 없고, 사장(詞章)이나 짓는 말예(末藝)란 말.
♣ 충종[充宗]충종은 한 원제(漢元帝) 때의 환관 석현(石顯)의 당우(黨友)였던 오록충종(五鹿充宗)을 가리킴. 오록충종은 석현이 한창 발호할 적에 그와 당우를 맺고 왕의 은총을 대단히 입어 겸관(兼官)을 많이 하였으므로, 당시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인은 어이 그리 겹겹으로 차며 인끈은 어이 그리 긴고[印何纍纍 綬若若耶].” 하였다. 《漢書 卷九十三》
♣ 충천[衝天]하늘 위로 솟아오르다.
♣ 충충[充充]근심있는 모양
♣ 충충[沖沖]늘어진 모양, 마음에 걱정이 있는 모양, 얼음을 깨는 소리
♣ 충충[忡忡]몹시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양
♣ 충풍[衝風]폭풍.
♣ 충하[充虛]공허한 마음을 채우다. 즉 외로움 또는 상실감을 채우다.
♣ 충허경[沖虛經]중국의 전국 시대 열어구(列禦寇)가 지은 열자(列子)의 이칭(異稱).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원년(742)에 열자를 높이어 충허진인(沖虛眞人)이라 부르고, 그의 책을 충허진경(沖虛眞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열자는 노자(老子)ㆍ장자(莊子)와 함께 도가(道家)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 충헌[忠獻]송(宋) 나라 때의 명상(名相)인 한기(韓琦)의 시호이다.
♣ 충헌[忠憲]충헌은 윤선도(尹善道)의 시호임.
♣ 충헌가한서적담[忠獻可寒西賊膽]충헌은 송(宋) 나라 명신(名臣) 한기(韓琦)의 시호. 일찍이 서하(西夏)가 배반하자, 한기가 섬서경략안무초토사(陝西經略按撫招討使)가 되어 평정하였다. 서적(西賊)은 곧 서하를 뜻한다.
♣ 충화기[冲和氣]담박하고 평화로운 기운, 즉 진원(眞元)의 기(氣)를 말한다.
♣ 췌췌[惴惴]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
♣ 취가오물[醉歌傲物]두보(杜甫)의 시 중에는 취시가(醉時歌)ㆍ취가행(醉歌行) 등 취가시(醉歌詩)가 많은데, 이 시들은 특히 세상을 오시(傲視)하는 맛이 풍긴다 하여 이른 말이다.
♣ 취가옥관회[吹葭玉管灰]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절후(節候)를 살피는 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태워 재로 만든 뒤 그것을 각각 율려(律呂)에 해당되는 여섯 개의 옥관(玉琯) 내단(內端)에다 넣어 두면 그 절후에 맞춰 재가 날아가는 바, 동지에는 황종(黃鍾) 율관(律管)의 재가 난다고 한다.
♣ 취가행[醉歌行]술에 취해 노래한 시를 말하는데, 행(行)은 시체(詩體)의 하나이다.
♣ 취각[吹角]뿔피리를 불다.
♣ 취개홍장[翠蓋紅粧]푸른 연잎과 붉은 연꽃.
♣ 취거[觜距]취거는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각각 역량을 뽑내며 선두를 다투는 것을 말한다.
♣ 취검[炊劒]진(晋) 나라 명사(名士)들이 모여서 가장 위태로운 것을 두고 글을 한 귀씩 부르는데 한 사람이 부르기를, “창 머리에 쌀을 씻고 칼머리에 밥짓는다.[予頭淅米劍頭炊]”하였다.
♣ 취검혈[吹劍吷]장자(莊子) 즉양(則陽)에 “혜자(惠子)가 말하기를 ‘피리를 불면 높게 울리는 소리가 나지만, 칼자루의 구멍을 불면 피-하고 가느다란 소리가 날 뿐이다. 요순(堯舜)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바이지만, 요순을 대진인(戴眞人) 앞에서 말하는 것은 마치 피-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했다.” 하였다.
♣ 취격타호[醉擊唾壺]“진(晋) 왕돈(王敦)이 매양 취중에 장(壯)한 마음이 쉬지 않누나.”라는 구절을, 위 무제(魏武帝)의 악부(樂府)에 있는 지사(志士)가 늙은 나이에 노래를 읊으면서, 타호(唾壺)를 쳐 장단을 맞추는데 타호의 가장자리가 다 이지러졌다.
♣ 취계[취鷄]닭으로 점치는 것은 뼈나 계란으로 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다.
♣ 취교[翠翹]여자의 머리에 꽂아 꾸미는 수식(首飾)인데, 비취(翡翠)의 날개처럼 생겼으므로 취교(翠翹)라 한다.
♣ 취교화승[翠翹花勝]취교는 물총새의 깃으로 만든 부인(婦人)의 수식(首飾)이고, 화승 역시 부인의 머리에 꽂는 채색 조화(造花)를 말한다.
♣ 취굴주[聚窟洲]신선이 사는 십주(十洲)의 하나이며, 거기서 반혼향(返魂香)이 나는데 그 향내가 풍기는 곳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 취락궁[聚樂宮]일본의 관백(關白)이 거처하는 궁전이다.
♣ 취량몽[炊粱夢]이른바 황량일취몽(黃粱一炊夢) 혹은 한단지몽(邯鄲之夢)의 고사에 나오는 것처럼 일장춘몽과 같은 덧없는 인생을 끝마쳤다는 말이다.
♣ 취령[鷲嶺]석가(釋迦)가 설법하였다고 하는 인도(印度)의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 취령산[鷲嶺山]부처가 설법을 했다는 인도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의 이칭.
♣ 취막[毳幕]유목 민족이 거주하는 천막을 말한다.
♣ 취만부동[吹萬不同]각자 타고난 운명에 따라 자초(自招)한 결과인 만큼 다른 외부의 원인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대저 하늘의 피리 소리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불어올 때 만 가지로 서로 다르게 반응하며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기의 틀이 원인이 되어서 자초하는 것들이니, 그렇게 부르짖도록 하는 어떤 존재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夫天籟者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라는 유명한 표현이 있다.
♣ 취모[醉帽]왕궁에서 주연(酒宴)이 베풀어진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맹가(孟嘉)가 환온(桓溫)의 야유회에 참석했을 때, 술에 취한 나머지 바람에 날려 모자가 떨어진 것도 몰랐다는 고사가 있다.
♣ 취모[吹毛]칼날 위에 털을 불면 그 털이 끊어지는 날카로운 검. 또 남의 허물을 애써 드러내려고 털을 후후 불어 흠집을 찾아내는[吹毛覓疵] 행동.
♣ 취모[吹帽]환온(桓溫)이 9월 9일에 여러 막료와 함께 용산(龍山)에 올라 잔치할 때 맹가(孟嘉)의 모자가 바람에 날렸으나 흥에 취한 본인은 알지 못하므로 환온이 좌우에 눈짓하여 알리지 말라고 이르고 손성(孫盛)을 시켜 글을 지어 웃겼던 고사이다. 《晉書 孟嘉傳》
♣ 취모광[吹帽狂]풍류가 있음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풍류로 이름이 높던 맹가(孟嘉)가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중양절인 9월 9일에 환온이 여러 요좌(寮佐)들을 거느리고 용산(龍山)에서 연회를 하였는데, 이때 바람이 불어 맹가가 쓰고 있던 모자가 날려서 땅에 떨어졌는데도 맹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풍류를 즐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八》
♣ 취모구자[吹毛求疵]남의 조그만 잘못을 샅샅이 찾아낸다는 뜻의 고사성어.
♣ 취모멱자[吹毛覓疵]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음. 남의 결점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 취미[翠微]당 나라 시인 두목지가 9월 9일에 취미(翠微)에 올라서 ‘여객휴호상취미(與客携壺上翠微)’라는 시를 지었는데, 취미는 산 기슭이다.
♣ 취미상[翠微上]당 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가 9월 9일에 적은 시에, “손과 더불어 술병을 들고 취미에 올랐다[與客携壺上翠微].”는 구절이 있다.
♣ 취발구자[吹髮求疵]상처를 찾으려고 털을 불어 헤친다는 말. 즉 억지로 남의 조그마한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말한다.
♣ 취방[臭芳]취는 악명(惡名)을 뜻하고 방은 훌륭한 명성을 뜻한 것으로, 고사성어고(故事成語考)에 의하면, 선(善)을 하면 좋은 명성[芳]을 백세에 남기고, 악(惡)을 하면 만세에 악명[臭]을 남긴다고 하였다.
♣ 취백[醉白]취한 이태백(李太白)이라는 말이다. 송(宋) 나라 한기(韓琦)의 당호(堂號)가 취백당(醉白堂)이었는데, 그 기문(記文)을 쓴 소동파(蘇東坡)의 ‘한위공취백당기(韓魏公醉白堂記)’가 전한다.
♣ 취백[翠柏]푸른 잣[翠柏]. 즉 도가(道家)에서 복식(服食)하는 장생불사의 약. 두보(杜甫)의 시에, “푸른 잣은 떫어도 먹는다지만, 밝은 놀로 밥을 어찌 짓겠는가?[翠柏苦猶食 明霞詎堪餐]" 하였다. 《杜少陵集 卷二 冬日洛城北謁玄元皇帝廟》
♣ 취법어상근득중[取法於上僅得中]위로 높은 것을 본받아도 중(中)밖에 안 되는데, 그 아래로 본을 뜨면 무엇이 되겠는가 한 옛말이 있다.
♣ 취봉노자[鷲峯老子]석가모니(釋迦牟尼)를 말한다. 영취산(靈鷲山)은 인도 마가타국(摩揭陀國) 왕사성(王舍城)에 있는 산 이름으로, 여기에서 석가가 법화경(法華經) 등을 설했다고 한다.
♣ 취부신기[臭腐神奇]시비(是非)와 미추(美醜)도 사람의 호오(好惡)에 따라 뒤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좋게 여기는 것을 신기(神奇)하다고 하고, 나쁘게 여기는 것을 취부(臭腐)하다고 하는데, 취부가 변화하면 곧잘 신기가 되고, 신기는 또다시 취부로 바뀌곤 한다. 그러므로 온 천하가 일기(一氣)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취부는 냄새가 나게 썩은 것을 말함.
♣ 취부역신기[臭腐亦神奇]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의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신기함이고 싫어하는 것은 악취와 썩은 것인데, 악취와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변하고 신기한 것이 다시 악취와 썩은 것으로 변한다.”에서 나온 것으로, 자연의 이치로 볼 때 죽은 것이나 사는 것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취부용[翠芙蓉]취부용은 산빛을 뜻한다.
♣ 취부즉신기[臭腐卽神奇]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의 “자기가 아름답게 보는 것은 신기하게 여기고 자기가 증오하는 것은 썩은 것으로 여기는데, 썩은 것이 다시 변해 신기한 것이 되고 신기한 것이 다시 변해 썩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은 하나의 기(氣)인 것이다.”에서 나온 것으로, 인생의 부귀 빈천은 큰 안목으로 볼 때 똑같다는 것이다.
♣ 취부타갱[翠釜駝羹]맛 좋은 식품 이름. 낙타 등 위의 봉우리 살로 만든 요리. 취부타봉(翠釜駝峯). 《琵琶記 春宴杏園》
♣ 취사선택[取捨選擇]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림. 여러 가지 중에서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골라 잡음
♣ 취산[聚散]모였다 흩어지는 것으로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짐을 말한다.
♣ 취생몽사[醉生夢死]술에 취한 듯이 살다가 꿈을 꾸듯이 죽음. 아무 뜻도 없고, 이룬 일도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텅하게 살아감.
♣ 취석[翠石]양홍정(楊弘貞)이 백락천(白樂天)에게 푸른 돌 셋을 선사하였다.
♣ 취석[醉石]여산(廬山) 앞을 흐르는 강물 가운데 반석이 있는데, 도연명이 취하여 이 바위에 누워 잤다 하여 연명취석(淵明醉石)이라 한다. 《朱子語類 卷一百三十八》
♣ 취선[翠扇]취선은 청색으로 도장(塗裝)한 궁문(宮門)을 가리킨다.
♣ 취성[聚星]2개 이상의 별이 서로 모인 것, 또는 견우(牽牛)ㆍ직녀(織女)를 말한다.
♣ 취성[鷲城]영산(靈山)의 고호이다.
♣ 취성[醉醒]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은 흐린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으므로[衆人皆醉 我獨醒], 이 때문에 추방을 당하였다.”는 말이 있다.
♣ 취성당[聚星堂]당명(堂名).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여음태수(汝陰太守)로 있을 당시 소설(小雪)에 취성당에 손님을 모아 놓고 금체(禁體)의 시를 지은 일이 있다고 한다.
♣ 취소반[吹簫伴]춘추 때 진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이 피리를 잘 부는 소사(簫史)를 좋아하여 그에게 시집가 날마다 피리불기를 배워 봉(鳳)을 오게 하여 부부가 봉을 타고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었다 한다.
♣ 취송구[醉松句]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서 사군(徐使君)과 함께 금당하(金堂河)에 배를 띄우고 노닐면서 장난삼아 지은 시에 “취하여 소나무 밑 바위에 누웠다가 서로 붙들고 강가의 나루로 돌아가네.[醉臥松下石 扶歸江上津]"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四十四》
♣ 취수봉패위[醉愁逢覇尉]평양(平壤)의 고호이다.
♣ 취아[翠娥]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 취염이[炊扊扅]옛날 백리해(百里奚)가 미천했을 때 집이 몹시 가난하여 그 아내가 문빗장을 뜯어서 밥을 지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취옥[炊玉]타관살이의 고생스러움을 이름.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초(楚) 나라에서의 생활을 말하건대, 밥은 옥(玉) 보다 비싸고, 땔나무[炊]는 계수나무보다 비싸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취옹[醉翁]송(宋) 나라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의 별호(別號). 여릉(廬陵) 사람으로 자(字)는 영숙(永叔)임. 말년에는 육일거사(六一居士)라 했으며, 시문(詩文)은 한유(韓愈)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의 장점을 합쳤다는 칭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ㆍ추성부(秋聲賦) 등이 특히 애송(愛誦)되었다.
♣ 취옹정[醉翁亭]송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제주지(滁州知)로 있을 적에 지은 정자 이름인데, 구양수가 스스로 기문(記文)을 지었다.
♣ 취우[驟雨]소나기.
♣ 취우[吹竽]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 때에 수백 인의 악공(樂工)을 모집하였는데, 남곽처사(南郭處士)가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끼어 들어 대접을 잘 받다가,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한 뒤 한 사람씩 나와서 악기를 연주하게 하자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韓非子 內儲說上》
♣ 취우[翠羽]취우는 비취의 깃으로 뛰어난 보배이다.
♣ 취우[聚麀]취우는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을 말하는바,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오직 금수만은 예의가 없으므로 부자간에 취우한다.” 하였는데, 그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에, “취(聚)는 같이한다는 뜻이며, 사슴의 암컷을 우(麀)라고 한다.” 하였다.
♣ 취우만구영[吹竽謾求榮]제왕(齊王)이 피리[竽]를 듣기를 좋아하여 피리 잘 부는 사람 삼백 명을 길러 매일 함께 불게 하였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실제로 피리 불 줄을 모르면서 피리를 입에 물고 부는 형용만 하고 녹을 받아먹었다. 한 번은 한 사람씩 각각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사람은 도망하였다.
♣ 취우비성랑[吹竽備省郞]제왕(齊王)이 피리[竽]를 좋아하여 피리 부는 자 3백 명에게 녹을 먹이며 함께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중에 한 사람은 사실은 피리를 불 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 속에 섞여서 피리를 부는 척하고 녹을 먹고 있다가, 하루는 3백 명에게 각각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사람은 도망하였다.
♣ 취우혼처총허명[吹竽混處摠虛名]제(齊) 나라 임금이 피리[竽]소리 듣기를 좋아하여 매일 피리를 불고 녹을 먹는 사람이 3백 명이나 되었다. 어느 한 사람은 실지로 피리를 불 줄은 모르면서 매일 3백 명 속에 끼어서 피리를 부는 척하고 녹을 먹다가 하루는 한 사람씩 불게 하니 곧 도망하고 말았다.
♣ 취웅장[取熊掌]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했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에 “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지만 모두 먹을 수 없다면 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며, 생명도 보전하고 싶고 의리도 하고 싶지만 두 가지 다 어려울 경우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 취위나식고장군[醉尉那識故將軍]취위는 ‘술취한 패릉위(覇陵尉)’를 말하고, 옛 장군이란 곧 한(漢) 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을 말한다. 이광이 패전의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서인(庶人)이 되어 집에 있을 때 하루는 밤에 단기(單騎)를 타고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패릉정(覇陵亭)에 이르자, 패릉위가 술에 취하여 이광을 꾸짖으며 못 가게 하므로, 이광이 말을 타면서 “내가 옛 이 장군(李將軍)이다.”고 말하니, 패릉위가 말하기를 “현재의 장군도 밤에 다닐 수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밤에 다닌단 말입니까.” 하고는, 억지로 이광을 패릉정 아래서 자고 가게 하여 봉변을 주었던 고사이다. 《史記 卷一百九》
♣ 취유[翠유]물총새의 깃으로 꾸민 진귀한 갓끈.
♣ 취유[取楡]유화(楡火)는 느릅나무에서 취한 불을 말하는데, 옛날에 봄철에는 느릅나무ㆍ버드나무의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ㆍ살구나무의 불을 취하는 등 계절마다 나무를 바꾸어 불을 취했던 데서 온 말이다. 《周禮 夏官 司爟》
♣ 취유[臭蕕]취유는 악취나는 풀. 훈초(薰草)의 대칭으로서 소인에 비유됨.
♣ 취음[醉吟]백락천이 스스로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호(號)를 지었다.
♣ 취일[就日]요(堯)의 덕이 지극하매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기를 해[日]에 나아가듯 하고 바라기를 구름 같이 한다.” 하였다.
♣ 취일[就日]태양[日]은 임금의 상(象)이므로 임금을 우러러 가까이하는 것을 말한다.
♣ 취자생[娶訾生]돼지 띠라는 말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의 “孟春之月 日在營室”의 주(注)에 “취자는 해차(亥次)의 호(號)이다.”라고 하였다. 취자(娶訾)는 ‘娵訾’ 혹은 ‘諏訾’와 통용한다.
♣ 취장[翠丈]취장은 취미(翠微) 신재식(申在植)을 이름.
♣ 취전[聚羶]장자(莊子)는, 양고기는 개미떼를 그리워하지 않지만 개미떼들은 누린내 나는 양고기에 모여드는 것을 말하여, 순(舜)을 양고기에, 순을 따르던 백성들을 개미떼에 비유하였다. 《莊子 徐无鬼》
♣ 취증[翠曾]갑자기 나는 모양.
♣ 취진[驟進]급히 나아가다.
♣ 취처생자[娶妻生子]양(陽)인 율(律)이 음(陰)인 여(呂)와 교합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뜻으로, 즉 삼분손익(三分損益)의 법칙에 따라, 양률이 음률을 낳을 때는 하생(下生)이라 하여 3분의 1을 덜어 주고, 을률이 양률을 낳을 때는 상생(上生)이라 하여 3분의 1을 더해 주는데, 예를 들면 황종(黃鐘)의 길이가 9촌인 경우, 황종이 임종(林鐘)을 낳는 것은 하생이 되어 임종의 길이가 6촌이 되고, 임종이 태주(太簇)를 낳는 것은 상생이 되어 태주의 길이가 8촌이 되는 유로써 서로 생(生)하는 것을 말한다.
♣ 취탈화[醉脫靴]이백(李白)이 어전에 취해 있을 때 환관 고 역사(高力士)가 당 명황(唐明皇)의 명으로 그의 신을 벗겨 준 일이 있었는데 역사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다가 양귀비(楊貴妃)에게 “그가 지은 청평악사(淸平樂詞) 가운데 가련 비연의신장(可憐飛燕倚新粧)이란 구절은 한(漢) 나라의 여우 같은 조비연(趙飛燕)을 귀비에 비유하여 모욕한 것이다.”고 참소하여 그의 출세를 저지시켰다는 고사이다.
♣ 취포[吹布]불법(佛法)을 깨우쳐 주는 것을 말한다. 전등록(傳燈錄)에 “도림선사(道林禪師) 밑에 있던 시자(侍者) 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려 하였다. 선사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하고 묻자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불법을 배우려 한다.’ 대답하였다. 그러자 선사가 ‘그러한 불법은 여기에도 있다.’ 하고는 조금 있다가 자신의 몸에서 포모(布毛)를 따내어 그것을 입으로 불어 계시하여 주었는데, 그는 마침내 불법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가리켜 포모시자(布毛侍者)라 하였다.” 했다.
♣ 취향[醉鄕]음주도취(飮酒陶醉)의 생활을 즐기는 은자의 거소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은자인 왕적(王績)이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訟)’을 본떠 지은 취향기(醉鄕記)가 유명하다. 왕적(王績) 취향기(醉鄕記)에 “그 고장은 중국에서 몇 천 리나 되는데, 그 땅이 넓어 가이없고, 그 기운이 화평하며 회(晦)ㆍ삭(朔)ㆍ현(弦)ㆍ망(望)도 없다.” 하였다.
♣ 취향[醉鄕]취중의 경지를 이상향(理想鄕)에 비겨서 한 말. 왕적(王績) 취향기(醉鄕記)에 “취향은 중국과의 거리가 몇 천리인지 모른다. 토지는 광대하지만 구릉(丘陵)이 없으며 그곳의 기후는 화평하여 회삭 한서(晦朔寒暑)가 없고, 풍속이 대동(大同)하여 읍락(邑落)이 없음은 물론 사람들도 매우 청렴하다.” 하였다.
♣ 취향기[醉鄕記]당(唐) 나라 왕적(王績)이 지은 문장. 당서(唐書) 왕적전(王績傳)에, “績著醉鄕記 以次劉伶酒德頌”이라고 보임.
♣ 취향후[醉鄕侯]술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당(唐) 나라 때 왕적(王績)이 취향기(醉鄕記)를 지어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頌)을 이었는데, 당인(唐人)의 시에 “만일 유령을 술의 황제로 삼는다면 또한 의당 나를 취향후로 봉해야 하리[若使劉伶爲酒帝 亦須封我醉鄕侯]”하였다.
♣ 취허[吹噓]취우(吹竽)와 같은 말로, 자격도 없이 벼슬자리를 채우고 있으면서 국록(國祿)을 축내고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곽처사(南郭處士)가 피리 부는 실력도 없으면서 삼백 인이 합주할 때에는 시늉만 하며 그 자리에 끼어 있다가, 한 사람씩 독주하게 하자 그만 줄행랑을 놓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 취허력[吹噓力]사람을 천거하는 것을 비유한 말. 수서(隋書) 유림전(儒林傳)에 “침뱉으면 마른 물고기도 살릴 수 있고, 한번 불면 깃 떨어진 새도 날게 할 수 있다.” 하였다.
♣ 취헌[翠軒]박은(朴誾)의 호가 읍취헌(揖翠軒)으로 박은의 서재를 말한 것이다.
♣ 취혼초부득[醉魂招不得]성로(成輅)는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시명(詩名)을 떨쳤는데, 서인(西人)인 정철이 실각당한 뒤로는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술로만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면서 늘 말하기를 “병들어 앓지 않고 취해 누운 상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는데, 그 소원대로 어느 날 술 취해 누워서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國朝人物考 下》
♣ 취홍원[聚紅院]연산군 때에 흥청악(興淸樂)이 모여 있던 곳을 말한다.
♣ 취화[翠華]비취(翡翠)의 깃으로 장식한 천자(天子)의 기(旗). 또는 천자(天子)의 일산(日傘).
♣ 취화[翠華]푸른 깃털 장식의 깃발 혹은 수레로, 대가(大駕)나 제왕의 대칭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 취화춘[翠華春]취화는 비취로 꽃 모양을 만들어서 장식한 깃발로, 천자의 깃발을 가리킨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을 당시에 천자가 낙양으로 천도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천자의 깃발이 와서 봄기운이 살아나듯 화기가 돌기를 기대하였다.
♣ 측금[側金]풀 이름인 추규(秋葵)의 별칭이다.
♣ 측리[側理]중국에 나는 종이의 일종인데, 결이 종횡으로 비스듬하게 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측리[側理]중국에서 나는 종이의 일종인데, 결이 비스듬하게 나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측은지심[惻隱之心]측은지심은 남을 가엾게 여겨 동정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로, 이것이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사단(四端) 가운데 인(仁)의 단서가 된다.
♣ 측은지심인지단야[惻隱之心仁之端也]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근본이다.
♣ 측조[側調]일명 변성(邊聲)이라고도 하는 금조(琴調)의 소리로, 청성(淸聲)의 상대가 된다.
♣ 측천[則天]측천은 측천무후(則天武后)로 이름은 조(曌). 처음에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으로 있다가 뒤에 고종(高宗)의 후(后)가 되었으며, 고종이 죽자 아들인 중종(中宗)을 세웠다가 폐위시키고는 다시 예종(睿宗)을 세웠으나 곧 폐위시키고 자기가 직접 황제의 위에 오른 다음 국호(國號)를 주(周)라 하고 연호를 광택(光宅)이라 고쳤으며, 무씨(武氏)의 칠묘(七廟)를 세웠다. 충신 적인걸(狄仁傑)ㆍ장간지(張柬之) 등의 말을 따라 재위 21년 만에 다시 중종을 복위시키고 물러났다. 뒤에 건주(乾州)의 서북쪽에 있는 고종의 능인 건릉(乾陵)에 합장하였다. 《新唐書 則天順聖武皇后本紀》
♣ 측측[惻惻]딱하고 가볍게 여기는 모양, 비통한 몽양, 간절하고 정중함
♣ 측측[側側]슬퍼하는 모양, 깊이 감명하는 모양
♣ 측측[測測]칼이 날카로운 모양
♣ 측측[則則]탄식하는 소리
♣ 층성[層城]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곤륜산(崑崙山)의 가장 높은 곳.
♣ 층층[層層]여러 겹으로 쌓여 있는 모양, 낱낱의 층
♣ 층층련약구[層層連若姤]산의 모습이 구괘(姤卦)처럼 아래만이 끊겨 있고 위가 모두 연하여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 치각관[豸角冠]해치(獬豸)라는 동물이 부정(不正)한 사람을 보면 뿔로 떠받는다고 하므로 어사(御史)가 치각관(豸角冠)을 쓴다.
♣ 치각다재[癡却多才]일찍이 호두 장군(虎頭將軍)을 역임한 진(晉) 나라의 고개지(顧愷之)를 세상에서 재(才), 서(書), 치(癡)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晉書 卷92》
♣ 치경[雉經]목을 매어 죽다. 액사(縊死)함. 치(雉)는 노, 경(經)은 숨쉬는 길. 곧 숨길을 노로 졸라맨다는 뜻.
♣ 치경조벽잡[幟驚趙壁匝]통감(通鑑)에 “한신(韓信)이 조(趙)와 싸울 적에 한신의 기병(騎兵) 2천 명이 조의 벽(壁; 진영)으로 달려가 조의 기를 뽑고 한(漢)의 적치(赤幟)를 세워놓으니 조군이 돌아오다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어지러워져 패하였다.” 하였음.
♣ 치과반랑우직년[齒過潘郞寓直年]32세의 나이를 말한다.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 寓直於散騎之省”이라 하였다.
♣ 치관[豸冠]옛날 어사(御史)가 쓰던 해치관(獬豸冠)으로, 전설적인 동물 해치(獬豸)가 곡직(曲直)을 잘 분별하여 사악(邪惡)한 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으므로 법관(法官)이 해치관(獬豸冠)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는 고사가 전한다. 《淮南子 主術訓》
♣ 치구[雉雊]치구는 꿩이 솥에 날아와 운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고종융일(高宗肜日)에 “고종(高宗)이 융제(肜祭)하는 날에 꿩이 솥에 날아와 울자, 조기(祖己)는 말하기를 ‘먼저 왕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고 그 일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의하면, 융제에 꿩이 솥에 날아와 우는 것은 하나의 재이(災異)였지만, 고종은 이를 계기로 그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고 중흥을 이룬 것이라고 하였다.
♣ 치구예함[鴟龜曳銜]鴟는 올빼미. 曳는 끌다. 銜은 재갈의 뜻으로 직역하면 ‘올빼미와 거북이 재갈을 끌다’이지만, 崑이 올빼미가 나는 것을 보고 거리를 재고, 거북이가 꼬리를 끄는 것을 가지고 땅을 분별했다는 전설을 말함.
♣ 치구용범[馳驅用範]맹자(孟子) 등문공 하에 “내가 그를 위해 말 어거를 법대로 하였다.[吾爲之範我馳驅]" 한 데서 온 말이다.
♣ 치국여선[治國如鮮]노자(老子) 거위(居位)에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마치 작은 생선을 삶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治大國 若烹小鮮]" 한 데서 온 말이다.
♣ 치군[致君]옆에서 보좌하여 성스럽고 밝은 임금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치당[致堂]고려 때 문신 김회조(金懷祖)의 호. 벼슬은 판도 판서(判圖判書)에 이르렀는데, 조부는 중찬(中贊)을 지낸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이며, 아버지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둔재(鈍齋) 김광철(金光轍)로서 가문이 매우 훌륭하였다.
♣ 치당[致堂]송(宋) 나라 호인(胡寅)의 호. 위의 두 구(句)가 그의 논평을 요약한 말이다.
♣ 치대전[雉帶箭]한퇴지가 사냥을 구경하면서 지은 시의 제목임.
♣ 치도[馳道]천자(天子)가 다니는 길을 말한다.
♣ 치동우[徵動羽]오성(五聲) 중에 치는 화(火)로서 맹하(孟夏), 우(羽)는 수(水)로서 맹동(孟冬)에 속한다. 즉 이것은 화(火)가 수(水)를 충동한다는 뜻.
♣ 치득부서혁원추[鴟得腐鼠嚇鵷鶵]썩은 쥐 얻은 올빼미가 원추새를 보고 겁먹었다는 이야기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 치랍[梔蠟]실지는 없고 겉만을 꾸민 채찍. 유종원(柳宗元)의 고편문(賈鞭文)에 “옛날 어떤 부자가 노랗고 윤이 나는 채찍을 사랑하여 많은 돈을 주고 샀었는데, 뒤에 끓는 물에 닿게 되자 형편 없는 본색이 드러났다. 그제야 보니 노랗던 것은 치자(梔子) 물을 들여서였고, 윤이 난 것은 밀[蠟]을 칠한 때문으로 가짜임을 알았다.” 하였다.
♣ 치래창위덕[雉來彰魏德]위 문제(魏文帝)가 임금자리에 오르려 할 때 군국(郡國)에서 흰 꿩이 열아홉 마리나 나타났다는 상주(上奏)가 있었다 한다. 《魏略》
♣ 치랭[齒冷]웃어서 입을 벌리고 있으므로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 치롱작옹[癡聾作翁]사람이 때로는 어리석은 체, 귀먹은 체하여 자녀(子女)들의 과오를 하나하나 책망하지 않음으로써 가정을 화목하게 한다는 뜻으로, 당 대종(唐代宗)이 일찍이 곽자의(郭子儀)에게 이르기를,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家長)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치롱주[治聾酒]춘사일(春社日) 또는 추사일(秋社日)에 마시는 술을 말함. 이 술을 마시면 어두운 귀가 밝아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치룡[癡龍]큰 염소의 별칭. 북몽쇄언(北夢瑣言)에 의하면, 낙중(洛中) 어떤 동굴 속에 빠졌던 사람이 큰 염소 수염에 달린 구슬을 따먹고 굴 밖에 나오게 되었는데 장화(張華)가 그 염소는 치룡이라는 짐승이라 하였다.
♣ 치린[緇磷]근본 바탕이 외면적인 영향을 받아 물이 들거나 갈리어 나간다는 뜻임.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진정으로 단단한 것이란 말을 못 들었느냐. 그것은 아무리 갈아도 갈리지 않고, 진정으로 흰 것이란 말을 못 들었느냐. 그것은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하였음.
♣ 치모팽아[癡姥烹鵝]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희지가 거위를 좋아하였다. 회계(會稽)에 사는 어떤 노파가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잘 울므로 사려하였으나 사지 못하였다. 그래서 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이 거위를 구경하러 갔었는데, 노파가 왕희지가 온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거위를 잡아 요리를 하여 대접하였으므로 희지가 여러 날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하였는데, 여기서 인용한 말이다.
♣ 치무[馳騖]어지럽게 내달림. 말을 내어 달리다.
♣ 치민[淄澠]서로 취미가 같음을 비유함. 치(淄)와 민(澠)은 두 강물의 이름.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백공(白公)이 묻기를 ‘물에다 물을 타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치수(淄水)와 민수(澠水)를 섞어놓으면 역아(易牙)는 그것을 구별한다.’고 하였다.” 하였음. 《新論九流》
♣ 치병[齒餠]신라 2대 남해왕(南解王)이 죽은 뒤 태자 유리(儒理)가, 탈해(脫解)가 덕망이 있다 하여 서로 왕위를 사양하니, 탈해는, “신기대보(神器大寶)는 범인이 감당 못 한다. 성지인(聖智人)은 이[齒]가 많다 하니 떡을 깨물어 보라.” 하여, 치리(齒理)가 많은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 《三國史》
♣ 치보[治譜]치현보(治縣譜)의 약칭.
♣ 치복동귀[恥復東歸]항우(項羽)가 한나라 군사에게 마지막으로 패하여 강동(江東)으로 가려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서는, “내가 강동(江東)의 자제(子弟) 8천명을 거느리고 중원(中原)으로 왔다가, 지금 한 사람도 살아가지 못하고 나 혼자서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랴.” 하고 목을 찔러 자살 하였다.
♣ 치빙노씨계[馳騁老氏戒]치빙은 치빙전렵(馳騁畋獵)의 준말로, 말을 치달리며 사냥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老子) 12장(章)에 “치빙전렵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한다.[馳騁畋獵 令人心發狂]”하였다.
♣ 치사[致仕]늙어 사직함.
♣ 치사분지[治絲棼之]실을 급히 풀려고 하면 오히려 엉킨다. 가지런히 하려고 하나 차근차근 하지 못하고 급히 해서 오히려 엉키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치사회수[致仕回收]높은 벼슬하는 이가 늙어서 퇴직하는 것을 치사(致仕)한다 하는데, 조정에서 그 사람을 다시 쓰려면 치사를 회수한 뒤에 다시 관직에 임명한다.
♣ 치산치수[治山治水]산과 물을 잘 다스려서 그 피해를 막음.
♣ 치생입막[郗生入幕]치생은 곧 치초(郗超)를 가리키는데, 치초는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으면서 환온의 역모(逆謀)에 적극 참여하였던바, 사안(謝安)이 일찍이 환온에게 가서 일을 논할 적에 치초가 그 장중(帳中)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환온과 친밀하다는 뜻에서 그를 입막지빈(入幕之賓)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六十七》
♣ 치선[雉扇]꿩의 꼬리로 큰 부채를 만들어 임금의 자리의 좌우에 호위한다.
♣ 치성광[熾盛光]대위덕 금륜불정 치성광여래 소제일체재란 다라니경(大威德 金輪佛頂 熾盛光如來 消除一切災難 陀羅尼經)이란 불경이 있는데, 그것은 재액(災厄)을 소멸시키는 주문(呪文)을 기록한 경이다.
♣ 치소[徵招]제 경공(齊景公)이 안자(晏子)의 말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군신(君臣)이 서로 기뻐하는 음악인 ‘치소(徵招)’와 ‘각소(角招)’를 짓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孟子 梁惠王下》
♣ 치소[嗤笑]빈정거리며 웃는 웃음
♣ 치소[緇素]치(緇)는 흑의(黑衣), 소(素)는 백의(白衣)로 중[僧]과 속인(俗人)을 가리킨 말이다.
♣ 치수[錙銖]옛날 저울 이름인데, 6수(銖)를 치(錙)라 하므로 경미(輕微)한 것에 비유함. 예기(禮記)에, “분국(分國)이 치수(錙銖)와 같다.”는 것이 보임.
♣ 치수[淄水]치수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강인데, 그 강기슭의 흙이 검어서 물 빛깔도 검다고 한다. 《括地志》
♣ 치수화[錙銖火]차를 잘 끓이는 데는 불을 알맞추어 때는 법이 있는데, 한 치 한 푼의 눈을 다투는 저울처럼 세밀하게 주의하는 것이다.
♣ 치숙[癡叔]치숙은 진(晉) 나라 왕담(王湛)의 별칭인데, 그의 형 혼(渾)의 아들 제(濟)가 평소에 말이 없는 그를 존경하지 않다가 주역(周易)의 이치를 깊이 분석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집안에 명사가 있는데도 30년 동안이나 몰랐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한다. 《晉書 卷七十五 王湛傳》
♣ 치순[雉馴]지방관의 선정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노공(魯恭)이 중모령(中牟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자, 뽕나무 밑에 길들은 꿩이 있는 상서가 있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二十五》
♣ 치술령[鵄述嶺]박제상이 고구려로부터 돌아와서는 처자(妻子)도 만나보지 않고 바로 왜국을 향해 가므로, 그의 아내가 뒤따라 율포(栗浦)에 이르러 보니, 자기 남편이 이미 배 위에 있으므로 남편을 부르며 대성 통곡을 하였으나, 박제상은 손만 흔들어 보이고 가버렸다. 마침내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은 뒤에 그의 아내는 남편 사모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세 낭자(娘子)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
♣ 치승[癡蠅]벽에 얼어붙어 꼼짝 않는 겨울의 파리를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멍청하긴 흡사 추위 만난 파리꼴[癡如遇寒蠅]”이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送侯參謀赴河中幕》
♣ 치씨[薙氏]치씨는 주관(周官)의 이름으로 풀을 베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 치아요사[癡兒了事]어리석은 사람이라야 일을 제대로 잘 마친다.
♣ 치악우두은둔촌[雉岳牛頭隱遁村]고려 말의 충신 원천석(元天錫)이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살았고, 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이 우두산(牛頭山)이 있는 춘천(春川)의 청평(淸平)에서 운둔하며 수도(修道)한 고사가 있다.
♣ 치안책[治安策]한(漢)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신진소년(新進少年)으로 치안책(治安策)을 올렸다. 대신들이 그를 서생(書生)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의논만 하는 사람이라고 헐뜯었다.
♣ 치애[癡獃]치애는 곧 어리석고 바보스러움을 말함. 매치애(賣癡獃)
♣ 치여[菑畬]치여(菑畬)는 묵은 밭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것인데, 한유(韓愈)가 그 아들에게 글 읽기를 권하는 시(詩)에, “경훈(經訓)을 치여로 삼아라.” 하였다.
♣ 치연[癡掾]어리석은 아전이란 말로 자신을 겸사로 지칭한 것이다.
♣ 치연[癡掾]치연은 왕탄지의 부친인 왕술(王述)을 가리키는데, 왕술이 일찍이 명성이 별로 없어 어떤 이가 그를 치(癡)라고 하였으므로, 뒤에 그가 왕도(王導)의 연(掾)이 되었을 적에 왕도가 그에게 다른 말은 묻지 않고 오직 강동(江東)의 쌀값을 물으니, 왕술이 눈만 부릅뜨고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왕도가 말하기를 “왕연(王掾)은 치(癡)가 아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치라 했는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七十五》
♣ 치예[雉鷖]꿩의 덫을 이름. 삼국(三國) 시대 오(吳)의 손권(孫權)이 꿩사냥을 좋아하므로, 반준(潘濬)이 그에게 꿩사냥을 하지 말라고 간하였는데, 그 후에도 꿩의 덫이 그대로 있자, 반준이 이에 손수 그 덫을 모두 치워버렸더니, 손권이 그 후로는 다시 꿩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三國志 卷十一 潘濬傳注》
♣ 치우[蚩尤]별 이름인 치우기(蚩尤旗)의 준말.
♣ 치우[置郵]치우는 문서와 소식을 전달하는 역참(驛站)이다.
♣ 치우[雉羽]치우는 치우전(雉羽箭)이다.
♣ 치우[蚩尤]황제(皇帝) 시대의 제후로서 병란을 일으키기 좋아하여 천하를 어지럽혔으므로, 황제가 정벌하여 탁록(涿鹿)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치우가 안개를 자욱하게 일으키자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격파하였다 한다. 《書經 呂刑 注ㆍ陔餘叢考 卷19ㆍ史記 五帝紀》
♣ 치우기[蚩尤旗]혜성(彗星)과 비슷하면서 꼬리 뒷부분이 구부러져 깃발처럼 보이는데, 이 별이 보이는 지방 아래에서 병란이 크게 일어난다고 믿어 왔다. 《晉書 天文志中》
♣ 치원공니[致遠恐泥]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전문인들의 자그마한 기예들이라 할지라도 볼 만한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나, 원대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致遠恐泥], 군자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치원대[致遠臺]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 혹은 마산(馬山) 월영대(月影臺). 둘 다 최치원(崔致遠)이 놀았다는 유명한 대(臺)이다.
♣ 치응료관사[癡應了官事]면하기 어려운 관청의 사역(使投)을 용케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진서(晉書) 권49 부함전(傅咸傳)에 “낳은 자식이 치매(癡呆)여야만 관가의 차역(差投)을 면할 수가 있으니, 관청의 일은 아무나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生子癡了官事 官事未易了也]”라는 말이 나온다.
♣ 치의[緇衣]검은 옷. 경대부(卿大夫)가 사조(私朝)에 거할 때에 입던 조복(朝服)으로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緇衣)에 “치의가 정말 걸맞나니, 옷이 해지면 내 또다시 주리로다.[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鄭) 나라 환공(桓公)과 무공(武公)이 서로 잇따라 주(周) 나라 사도(司徒)가 되어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하자 이를 찬미하여 읊은 것이다.
♣ 치의[緇衣]치의는 예기(禮記)의 편명. 치의는 본디 정(鄭) 나라 시(詩)로서 어진 이 좋아하는 것을 노래한 것인데, 치의편의 소(疏)에서 공영달(孔穎達)은 “치의는 어진 이 좋아하기를 후히 함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 치이[鴟夷]가죽 주머니로 만든 술 담는 그릇이다.
♣ 치이[鴟夷]치이자피(鴟夷子皮)의 준말로, 춘추시대 월(越)나라 범려(范蠡)의 별호인데, 구천(句踐)을 도와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구천과는 안락을 함께 누릴 수 없음을 알고 오호라는 물길을 따라 제(齊) 나라로 가서 성명을 고치고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불렀다 한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 치이자[鴟夷子]월 상국(越相國) 범려(范蠡)가 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 나라를 멸한 뒤에 벼슬을 사양하고 오호(五湖)에 노닐며 성명을 고쳐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했다. 치이(鴟夷)는 가죽주머니라는 뜻으로 세태를 따라 가죽주머니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뜻.
♣ 치이자[鴟夷子]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오원(伍員). 그의 아버지 사(奢)와 형 상(尙)이 초평왕(楚平王)에게 피살되자, 오(吳) 나라로 망명하여 초 나라에 원수를 갚았음. 그 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간신(姦臣)인 태재 비(太宰嚭)의 말만 믿고 오원에게 촉루검(屬鏤劍)을 주어 자살하게 한 다음, 그의 시체를 치이(鴟夷)에 넣어 강물에 띄웠으므로 그를 치이자(鴟夷子)라 함. 장유시에, “吾觀鴟夷子 才格出尋常”이라고 보임.
♣ 치이자피[鴟夷子皮]춘추(春秋) 때 월(越) 나라의 모신(謀臣)인 범여(范蠡)가 제(齊) 나라에 가서 바꾼 이름. 그는 오(吳) 나라가 멸망한 뒤에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오호(五湖)에서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吳越春秋》
♣ 치인설몽[痴人說夢]바보를 상대로 하여 어떤 말을 할지라도 처음부터 소용이 없음을 뜻한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 종작없이 지껄이는 짓.
♣ 치자[穉子]어린 아들
♣ 치자림[梔子林]사찰(寺刹)을 말함. 불서(佛書)에서 치자를 담복(薝蔔)이라 하는데, 인도(印度)에 특히 많이 있는 것으로, 꽃이 희고 향기가 매우 좋다고 한다.
♣ 치자환주[癡子還珠]옛날 하수(河水) 가에 가난한 자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이 물 속에 들어가 천금의 구슬을 얻어 오자, 아버지는 말하기를, “어서 갖다 버려라. 이는 필시 이룡(驪龍)의 턱 밑에 있던 것인데, 마침 그 이룡이 졸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네가 어찌 살아 남았겠느냐?”하였다 한다.
♣ 치장[植杖]지팡이를 땅에다 꽂고서 김을 매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하조장인(荷蓧丈人)을 만나 공자의 행방을 묻자, 공자를 조롱하는 말을 하고는 지팡이를 꽂고서 계속 김을 맸다[植其杖而芸]는 이야기가 전한다. 《論語 微子》
♣ 치재[致齋]치재는 제사나 불공(佛供)을 드리기 위하여 전날에 주육(酒肉)을 끊고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재계(齋戒)하는 것이다.
♣ 치절[痴絶]지극히 어리석다는 말로, 진서(晋書) 권92에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개지(顧愷之)는 세 가지 뛰어난 것이 있으니, 재주가 뛰어나고[才絶],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畫絶], 어리석음이 뛰어났다[痴絶]고 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더없이 기쁘다는 뜻이다.
♣ 치절[癡絶]치절은 아주 시시하다는 말로, 진서(晋書) 고개지전(顧愷之傳)에 “고개지(顧愷之)가 삼절(三絶)이 있는데, 재절(才絶)ㆍ화절(畫絶)ㆍ치절(癡絶)이라 하였다.
♣ 치조비조[雉朝飛操]제 선왕(齊宣王) 때의 처사(處士)인 독목자(犢牧子)는 나이 50세가 되도록 아내가 없었으므로, 한번은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암꿩과 수꿩이 서로 따르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대성(大聖)이 위에 계시어 은택이 초목 금수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나만 유독 은택을 입지 못했다.” 하고, 인하여 거문고를 타서 치조비조(雉朝飛操)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樂府詩集 琴曲歌辭》
♣ 치지도외[置之度外]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않음.
♣ 치진피소포[緇塵避素袍]성정이 고결한 인사들은 도성에서 벼슬살이하는 일을 그만두고 은거하는 생활을 즐겼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서울엔 어찌 그리 풍진도 많은지, 흰 옷이 온통 새카맣게 변하였네.[京洛多風塵 素衣化爲緇]”라고 읊은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4 爲顧彦先贈歸》
♣ 치창시[熾昌詩]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너에게 부귀 영화가 불일 듯하고, 너에게 오래 살고 덕이 있게 하기 바라노라[俾爾熾而昌 俾爾壽而臧]”하였다.
♣ 치천[穉川]박상홍(朴相洪)의 자이다. 이덕무의 외사촌동생이다.
♣ 치천[稚川]진(晉) 나라 때 도가(道家)로 이름난 갈홍(葛洪)의 자이다.
♣ 치첩[雉堞]치첩은 성(城) 위에 쌓은 성가퀴로 여장(女墻)이라고도 하는데, 지금도 동대문에 남아 있는데, 활쏘는 구멍을 뚫어 놓은 그것이다.
♣ 치청산인[豸靑山人]이개(李鍇). 자는 철군(鐵君)으로 봉천(奉天) 사람이다.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반산(盤山)에 은거하여 치청봉(豸靑峯) 밑에서 농사를 지었다. 저서로는 함중집(含中集)이 있다.
♣ 치초[鵗超]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특히 담론(談論)을 잘하였으므로, 일찍이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이 되어 극진한 예우를 받았었다.
♣ 치치[侈侈]성한 모양
♣ 치치남기취차성[哆侈南箕取次成]아첨과 참소가 난무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약간씩 떨어져 제자리 잡고, 남기성 별자리 이루었구나. 참소하는 저 자들, 누구와 모의하려 저리 바쁜고.[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譖人者 誰適與謀]”라고 하였다.
♣ 치치무포맹[蚩蚩貿布氓]시경(詩經) 위풍(衛風) 맹(氓)에 “어수룩한 저 남자, 베 안고 실 사러 찾아왔는데, 실 사러 온 것이 목적이 아닌지라, 나에게 곧장 와서 수작을 붙이누나.[氓之蚩蚩 抱布貿絲 匪來貿絲 來卽我謀]”라는 말이 있다.
♣ 치현보[治縣譜]남제(南齊) 때 부염(傅琰)의 부자가 모두 지방관으로 뛰어난 업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씨(傅氏) 집안에는 고을을 잘 다스리는 비결을 적은 보첩(譜牒)이 있는데, 자손들에게만 전하고 남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였다 한다.
♣ 치홀[致笏]치사(致仕)와 같은 뜻으로 쓰는 말.
♣ 치황[緇黃]치의(緇衣)와 황관(黃冠). 승려는 치의를 입고 도사(道士)는 황관을 쓰므로 승려와 도사를 일컫는 말이다.
♣ 치효[鴟梟]올빼미
♣ 치효괴아실[鴟鴞壞我室]시경(詩經)에, “부엉아, 부엉아, 제발 내 집을 망가치지 말려무나.” 하는 시가 있는데, 관숙(管叔)ㆍ채숙(蔡叔) 등 종실(宗室)이 주실(周室)을 뒤엎을까 걱정하여 주공(周公)이 그들을 치기 전에 먼저 성왕(成王)에게 풍유(諷諭)한 노래라 한다.
♣ 치힐[癡黠]치할은 어리석음과 교활함을 말하는데, 옛날 송(宋) 나라 저공(狙公)이 여러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성을 내므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눈앞에 당장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똑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간사한 꾀로 남을 농락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列子 黃帝》
♣ 치힐교당선[癡黠較螳蟬]목전(目前)의 이익만 탐하여 후환(後患)을 돌보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매미가 나무 위에서 울고 있을 때, 버마재비는 그 뒤에서 매미 잡을 것만 생각하고 황작(黃雀)이 곁에서 저를 쪼려고 하는 것은 모르며, 황작은 또 버마재비만 쪼려 하고 아래에서 탄환(彈丸)으로 저를 쪼려고 하는 것은 모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正諫》
♣ 칙칙[恜恜]조심하는 모양
♣ 친근사구정불비[親近沙鷗靜不飛]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어떤 노인이 매일같이 갈매기와 어울려 놀았는데, 하루는 그의 어린 딸이 한 마리 잡아오라고 해서, 그 다음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갈매기들이 다시는 다가오지 않았다 한다. 아무 욕심이 없는 은둔 생활을 뜻한다.
♣ 친년희가구[親年喜可懼]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음.
♣ 친라올군[親羅兀軍]국경 지대의 농사꾼을 보호하던 군인. 조선 초기부터, 야인(野人)과 접경을 하고 있는 함경도ㆍ평안도 양도의 변경에는 여름철에 농사꾼이 농사를 짓다가 적에게 포로되어 가는 사고가 매우 빈번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군사를 먼저 변경에 내보내 적변(賊變)이 있나 없나를 살피도록 한 뒤에 농사꾼을 들여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순찰하는 군인을 친라올군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 친변[親邊]부모님 곁.
♣ 친붕곤곤제명시[親朋袞袞際明時]두보(杜甫)의 취시가(醉時歌)에 “제공들 줄지어 대성에 오르는데, 광문 선생 관직만은 홀로 썰렁하구나.[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 친왕[親王]황제(皇帝)의 형제나 황제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 친위세안중첨선[親闈歲晏重添線]어머니가 자식의 옷을 짓는 것을 말한 것으로,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자모가 손수 바느질한 것은 유자가 입을 옷이로다[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한 데서 온 말이다.
♣ 친자[親炙]친히 교화를 받았다는 뜻. 맹자(孟子)에, “而况親炙之者乎”라는 말이 보임.
♣ 친향선니[親享宣尼]문묘(文廟)에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 선니(宣尼)는 한 평제(漢平帝)가 공자(孔子)에게 올린 시호이다. 《漢書 卷十二 平帝本紀》
♣ 칠가[漆痂]옻이 오른 것.
♣ 칠거[七擧]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丹楹縹壁 紫柱虹梁 桶榱朱綠 藻稅玄黃……”
♣ 칠거지악[七去之惡]아내를 내쫓을 7가지 조건.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父母].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질투하는 것[嫉妬], 간음하는 것[不貞], 몹쓸 병에 걸리는 것[惡疾], 수다(多言), 도둑질하는 것[竊盜].
♣ 칠격[七激]현종(顯宗)이 현사(顯士)를 예우하지 않는 과실을 풍간(諷諫)한 것.
♣ 칠견[七蠲]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寒門丘子 有疾玄野 子謂之曰 藍沼淸池 素波朱瀾 金鉤芳餌 纖繳梁緡 沈魚浮薦……”
♣ 칠계[七啓]조식의 칠계서(七啓序)에, “매승(枚乘)ㆍ부의(傅毅) 등이 지은 칠발(七發)ㆍ칠격(七激)이 모두 명문(名文)이므로 그를 본받아 칠계를 짓는다.” 하였음.
♣ 칠관[七款]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奇宮閑舘 廻庭洞門 井幹廣望 重閣相因…”
♣ 칠관혼돈증개규[七官混沌曾開竅]남해와 북해의 제왕들이 중앙의 제왕인 혼돈(混沌)의 덕에 보답할 목적으로, 사람처럼 일곱 개의 감각 기관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일주일이 되던 날 혼돈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끝에 나와 있다.
♣ 칠교[七校]한 나라 때 일곱 종류의 무관(武官) 교위. 곧 중루(中壘)ㆍ둔기(屯騎)ㆍ보병(步兵)ㆍ월기(越騎)ㆍ장수(長水)ㆍ석성(射聲)ㆍ호분(虎賁)등이다.
♣ 칠교[七校]한 무제(漢武帝)가 백월(白粤)을 평정하고 나서 증설한 7교위(校尉)를 말한다. 《漢書 刑法志》
♣ 칠귀[七鬼]포박자(抱朴子) 지진(地眞)의 “신명(神明)을 통하려 한다면 마땅히 금(金)ㆍ수(水)의 형체가 나눠져야 한다. 형체가 나눠지면 자기 몸의 삼혼 칠백(三魂七魄)을 절로 볼 것이다.”에서 나온 것이다.
♣ 칠귀[七貴]한(漢) 나라 때 외척(外戚) 및 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칠성(七姓). 곧 여씨(呂氏)ㆍ곽씨(霍氏)ㆍ상관씨(上官氏)ㆍ왕씨(王氏)ㆍ조씨(趙氏)ㆍ정씨(丁氏)ㆍ부씨(傅氏)들을 말한다. 《小學紺珠 氏族 七貴》
♣ 칠규혼돈착[七竅混沌鑿]혼돈은 중앙의 신(神)이었는데, 남해의 신인 숙(儵)과 북해의 신인 홀(忽)이 그를 위하여 보고 듣게 하려고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7개의 구멍을 뚫었다. 《莊子 應帝王》
♣ 칠금[七擒]제갈량이 위(魏)를 치고자 출사하기 전에 뒷 염려를 없애기 위하여 먼저 남만(南蠻)을 쳐 그 왕 맹확(孟穫)을 사로잡았다가 그가 열복(悅服)할 때까지 도로 놓아주기를 무릇 일곱 번 했으니, 이른바 칠종칠금(七縱七擒)이다.
♣ 칠난감[七難堪]삼국 시대 위(魏) 나라 혜강(嵇康)이 당시 집권자인 사마소(司馬昭) 등을 싫어했는데, 그 일당인 산도(山濤)가 그를 벼슬에 추천하자, 일곱 가지의 감당할 수 없는 사유를 들어 거절하면서 산도와 절교하였다. 흔히 시문에서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능력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 칠덕[七德]칠덕은 당 태종(唐太宗)이 지은 칠덕무(七德舞)로, 당 태종이 무왕(武王)의 일곱 가지 덕, 즉 금포(禁暴), 집병(戢兵),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豐財)에 기반하여 지은 악곡(樂曲)을 말한다.
♣ 칠덕가[七德歌]당 나라 태종(太宗) 때 지은 노래로, 태종이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일곱 가지 덕, 즉 금포(禁暴), 집병(戢兵),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豐財)에 기반하여 지은 악곡(樂曲)을 말한다.
♣ 칠덕무[七德舞]당 태종(唐太宗)이 무(武)의 칠덕(七德)에 기초하여 만든 무곡(舞曲) 이름인데, 칠덕은 바로 금포(禁暴)ㆍ즙병(즙兵)ㆍ보대(保大)ㆍ정공(定功)ㆍ안민(安民)ㆍ화중(和衆)ㆍ풍재(豐財)이다.
♣ 칠도신[漆塗身]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몸에 옻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 “예양(豫讓)이 조양자(趙襄子)를 죽여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몸에 옻칠을 해서 문둥이로 변장했다.” 하였다.
♣ 칠등[漆燈]귀인의 무덤은 칠등(漆燈)으로 장치한다.
♣ 칠략[七略]한(漢) 나라 유향(劉向)이 아들 유흠(劉歆)과 함께 작성한 서적분류목록(書籍分類目錄)으로서 즉 집략(輯略)ㆍ육예략(六藝略)ㆍ제자략(諸子略)ㆍ시부략(詩賦略)ㆍ병서략(兵書略)ㆍ술수략(術數略)ㆍ방기략(方技略)을 합칭한 말인데, 전하여 옛 서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 칠령팔락[七零八落]나무나 풀이 산산이 어울어 떨어짐과 같이 세력이 떨어지고 연락이 끊기어 형편없이 됨을 말한다.
♣ 칠륜선[七輪扇]일곱 개의 바퀴를 움직여서 부치는 부채로, 장안(長安)에 사는 어떤 공인(工人)이 이 부채를 만들었는데, 이 부채를 부치면 온 집안이 다 시원하였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1》
♣ 칠리뢰[七里瀨]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여울로, 두 산의 골짜기 사이로 동양강(東陽江)이 흐르는데, 빠른 물살이 7리나 되게 흐르므로 칠리뢰라고 이름하였으며, 엄릉뢰(嚴陵瀨)라고도 한다. 북쪽 강안(江岸)에 있는 산이 부춘산(富春山)인데, 동한(東漢)의 엄광(嚴光)이 이곳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낚시질을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八十三 逸民列傳》
♣ 칠리탄두객[七里灘頭客]한 광무(漢光武)의 간곡한 만류도 다 뿌리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살면서 칠리탄(七里灘) 머리에 낚시를 담그고 일생을 마친 엄광(嚴光)을 이른다.
♣ 칠리탄두방객성[七里灘頭訪客星]광무제의 옛 친구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 칠리탄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 칠매손[七枚飡]서왕모(西王母)가 복숭아 일곱 개를 가지고 내려와 두 개는 자기가 먹고 다섯 개는 한 무제(漢武帝)를 주었는데, 한 무제가 그 씨를 심으려 하자 서왕모는 “이 복숭아는 3천 년 만에 한 번씩 여는 것이라, 인간에서는 심지 못한다.” 했다는 말이 한무고사(漢武故事)에 전해진다.
♣ 칠명[七命]제후의 옷.
♣ 칠명[七命]진서(晉書) 장협전(張協傳)에, “屛居草澤 守道不競 以屬詠自娛 作七命辭……”라 하였음.
♣ 칠묘[七廟]천자(天子)의 나라의 사당. 제후(諸侯) 나라는 오묘(五廟). 7묘(廟)는 원래 중국 천자의 종묘 제도이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5묘의 제도를 채택했으나,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일곱 대의 묘를 통해 그 나라의 덕을 볼 수가 있고, 만인의 어른 되는 사람을 통하여 그 나라의 정치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七世之廟 可以觀德 萬夫之長 可以觀政]”라고 말했다.
♣ 칠민[七閩]중국 복건성(福建省) 지방을 가리킨다. 옛날 숙웅(叔熊)의 자손이 칠종(七種)으로 나뉘어 살았기 때문에 일컬어진 말이다.
♣ 칠발[七發]매승이 칠사(七事)를 들어 초 태자(楚太子)를 계발(啓發)하고 양 효왕(梁孝王)을 풍간(諷諫)하던 것으로, 총 8수의 문(文)이 전해짐.
♣ 칠발[七發]일곱 가지 사항으로 왕자를 깨우침. 한(漢)의 매승(枚乘)이 문장 솜씨가 능했는데, 양 효왕(梁孝王)을 섬기면서 우의(寓意)가 담긴 7개 항의 글을 써서 모반(謀反)을 말도록 풍간(諷諫)을 하였음. 《漢書 卷五十一》
♣ 칠변[七辯]시(詩)ㆍ부(賦)ㆍ영헌(靈憲)ㆍ현도(縣圖) 등 30편의 저서 중의 하나. 《後漢書 張衡傳》
♣ 칠보산[七寶山]유사(遺事)에 “명황이 근정루(勤政樓)에 칠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좌(山座)를 만들어 놓고 여러 학사들을 불러 경의(經義)와 시무(時務)를 강론케 하여, 우승한 이만이 그 산좌에 올라앉도록 했는데, 장구령(張九齡)의 의론이 마치 바람이 일듯 잇달아 나왔으므로 산좌에 오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은 어림도 없었다.” 하였다.
♣ 칠보시[七步詩]삼국 시대 위(魏)의 조식(曹植)이 지은 칠보시(七步詩)를 말한다. 조식은 뛰어난 문재(文才)가 있었는데, 이것을 시기한 형인 문제(文帝; 曹丕)는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짓게 하고 만일 못 지으면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과연 칠보 동안에 “콩대로 불을 지펴 콩을 볶으니 콩알이 솥 안에서 서글피 우네. 본디 한 뿌리에서 생겨났거늘 어찌하여 무참히 볶아대는지[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大急]"라고 연두시(燃豆詩)를 지었다. 문사(文思)가 민첩한 것을 뜻한다. 《世說新語 文學》
♣ 칠보지재[七步之才]일곱 걸음을 옮기는 동안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 아주 뛰어난 글재주.
♣ 칠부[七扶]일부(一扶)는 네 손가락을 펴서 이은 길이로서, 칠부는 대략 일척 오촌(一尺五寸) 되는 높이를 말한다.
♣ 칠불감[七不堪]진(晉) 나라 때 혜강이 자기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유한 산도(山濤)에게 보낸 절교서(絶交書)에서, 자신이 관직 생활을 감당할 수 없는 일곱가지 조건[七不堪]을 내세운 것을 이르는데, 그 일곱 가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열거한 데에 의하면 “누우면 늦게 일어나기를 좋아하는데, 문지기가 끝없이 불러대는 것이 첫째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요 ……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嵇中散集 卷二》
♣ 칠불사[七佛寺]북성(北城) 밖에 있는 절 이름으로, 일곱 명의 승려가 수(隋) 나라 군대를 강물 속으로 유인하여 몰살시켰다는 전설이 전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2 安州牧》
♣ 칠사관잠[七事官箴]훌륭한 수령이 갖춰야 할 일곱 가지 조목, 즉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을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考課》
♣ 칠상[七相]칠상은 7인의 재상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차천추(車千秋)ㆍ황패(黃霸)ㆍ왕상(王商)ㆍ왕가(王嘉)ㆍ위현(韋賢)ㆍ평당(平當)ㆍ위상(魏相)이다.
♣ 칠상고분유벽초[七相古墳惟碧草]인생의 허무함을 뜻하는 말이다. 칠상은 일곱 재상, 즉 한(漢) 나라 때의 차천추(車千秋)ㆍ황패(黃霸)ㆍ왕상(王商)ㆍ왕가(王嘉)ㆍ위현(韋賢)ㆍ평부(平富)ㆍ위상(魏相)을 가리킨다.
♣ 칠석[七釋]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潛虛丈人 違世遁俗 恬淡淸玄 渾沌淳樸 薄禮愚學 無爲無欲 均同死生 混齊榮辱……”
♣ 칠설[七說]환린(桓驎)의 아들 환빈(桓彬)의 저작으로 전해지기도 함.
♣ 칠성[七姓]후량(後梁)ㆍ요(遼)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주(後周)ㆍ송(宋) 등 7국을 말함.
♣ 칠성미[七聖迷]길 잃은 것을 뜻함.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七聖]이 양성(襄城)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다.” 하였음.
♣ 칠성미양야[七聖迷襄野]황제(黃帝) 등 일곱 성인이 대도(大道)를 찾으러 떠났다가 양성 들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목마 동자(牧馬童子)를 만나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얻어듣고는 천사(天師)라고 절을 하고서 물러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徐无鬼》
♣ 칠시[七始]한(漢) 나라 때의 음악 이름. 음률(音律)을 천(天)ㆍ지(地)ㆍ인(人)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 일곱 가지의 시작에 비긴 것이다.
♣ 칠신탄탄[漆身呑炭]몸에 옻칠을 하고 불붙은 숯을 삼킨다는 뜻으로, 복수를 위하여 몸을 괴롭힌다는 뜻의 고사성어.
♣ 칠실[漆室]신분에 지나친 근심을 함을 이름.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읍(漆室邑)에 사는 한 여인이 나라일을 걱정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칠실우[漆室憂]춘추 시대 노 나라 칠실이란 마을에 미가녀가 있었는데, 기둥을 안고 울었다. 이에 누가 묻기를 “시집을 못 갔기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나라를 걱정하기 때문이다.”고 했다는 고사. 《烈女傳 仁智 魯漆室女傳》
♣ 칠십이구[七十二鷗]추사의 당호(堂號)임.
♣ 칠십이봉[七十二封]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태산(泰山)과 양보(梁父)에 봉선(封禪)한 자가 칠십이가(七十二家)였다.” 하였다.
♣ 칠십이신[七十二神]72는 천지의 음양 오행(陰陽五行)의 성수(成數)라 하여 수많은 것을 칭한다.
♣ 칠십장계삼동리[七十長溪三洞裏]나부산이 유심(幽深)하고, 괴기(塊奇)하여 그 안에 긴 시내가 70군데이고, 동천(洞天)이 세 군데가 있다.
♣ 칠십진구추[七十眞九雛]공자의 72제자가 모두 도를 통하여 봉황새처럼 훌륭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는 3천 명이었는데 직접 육예(六藝)에 통한 자가 72명이었다. 《史記 卷四十七 孔子世家》
♣ 칠십칠자[七十七字]우비(禹碑) 비문의 글자 수. 그 비문이 일흔일곱 자로 되어 있음. 《琅琊代醉編 禹碑》
♣ 칠애[七哀]칠애는 위진(魏晉) 시대 악부(樂府)의 시제(詩題)로, 후한(後漢) 말의 왕찬(王粲)과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과 진(晉) 나라 장재(張載)의 ‘칠애시(七哀詩)’가 전하는데, 일곱 가지의 슬픈 감정을 담아 내었다는 해제(解題)가 붙어 있다.
♣ 칠애시[七哀詩]칠애시는 위진(魏晉) 시대 악부(樂府)의 일종인 시 제목이다. 위(魏) 나라 왕찬(王粲), 조식(曹植)과 진(晉) 나라 장대(張戴) 등이 칠애시를 지었는데 사회의 동란을 반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오언시(五言詩)이다. 당(唐) 나라 여향(呂向)은 조자건의 칠애시 주에서 “칠애는, 아파서 슬프고 의리상 슬프고 느꺼워 슬프고 원망스러워 슬프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슬프고 입으로 탄식하여 슬프고 코가 시어서 슬픈 것이다.”라고 하였다. 《文選》
♣ 칠양[七襄]직녀가 하루 낮 동안에 일곱 번 베틀을 옮겨서 베를 짠다고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삼각으로 있는 저 직녀성은 종일토록 일곱 번 자리 바꾸네.[跂彼織女 終日七襄]”하였다.
♣ 칠언래화백량대[七言來和柏梁臺]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柏梁臺)를 낙성(落成)할 때에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모두 운(韻)을 붙여 칠언 연구(七言聯句)를 짓게 했던바, 여기에는 집금오(執金吾)인 중위표(中尉豹)도 끼어 있었다.
♣ 칠언삼첩[七言三疊]황정경(黃庭經)에 “閒居蕊州作七言 琴心三疊舞胎仙"이란 글귀가 있음.
♣ 칠역[七繹]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北岳生剗 迹埋名身 聞事盡道畜山扁 東國進士謬與薦焉……”
♣ 칠엽초[七葉貂]칠엽은 칠대(七代)와 같고, 초는 담비꼬리인데 한(漢) 나라 때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가 쓰는 무변(武弁)에 담비꼬리를 꽂았다 하여 고관이 쓰는 관을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 나라에 귀화했던 김일제(金日磾)가 무제의 사랑을 받아 시중(侍中)을 지냈는데, 자기 자손이 7대까지 계속 시중을 지내 부귀를 누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八 金日磾傳》
♣ 칠엽초선[七葉貂蟬]칠대의 고관. 한(漢) 나라 때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의 두 집안이 7대 동안 천자(天子)의 좌우에서 천자를 보좌하면서 큰 총영(寵榮)을 누렸던 데서 온 말이다.
♣ 칠옹[漆翁]장자(莊子)의 별칭으로 일찍이 칠원리(漆園吏)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장자는 기심(機心)을 잊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칠요[七要]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松旣烟而接漢 竹緣嶺而負筠 哀過鴻於月曉 悲夜猿於霜旻 乃鶴駕之非遠 信羽車之可憐……”
♣ 칠요[七曜]일(日)ㆍ월(月)과 수성(水星)ㆍ화성(火星)ㆍ목성(木星)ㆍ금성(金星)ㆍ토성(土星)을 말한다. 낮과 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그 운행이 수시로 바뀐다.
♣ 칠원[漆園]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장주(莊周)가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 리(漆園吏)로 있었으므로, 장주 또는 그의 저술인 장자(莊子)를 보통 칠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 칠원리[漆園吏]장자(莊子)를 말한다. 장자가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漆園 옻나무를 심는 밭)의 벼슬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史記 老莊傳》
♣ 칠원선리회조궤[漆園仙吏恢弔詭]칠원의 선리(仙吏)는 곧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의 벼슬아치를 지낸 장주(莊周)를 높여 이른 말인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공자도 그대와 함께 모두 꿈을 꾸고 있다. 또 그대에게 꿈을 꾼다고 말하는 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말을 일러 ‘지극히 의문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칠월편[七月篇]시경(詩經) 빈풍(豳風)의 편명이다. 주(周) 나라 시조(始祖)인 농관(農官) 후직(后稷)의 증손자가 되는 공류(公劉)가 처음 빈(豳) 땅에 나라를 세우고 자기 조상인 후직을 본받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니, 백성들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류의 13대손인 무왕(武王)이 돌아가고 그이 아들 성왕(成王)이 즉위하여서는 나이가 어린 탓으로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지 못함으로써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시는 그 당시 성왕의 숙부(叔父)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옛날 농사를 장려하여 나라의 부강(富强)을 일삼던 선조 후직과 공류의 풍화(風化)를 진술하여 성왕으로 하여금 잊지 말도록 노래한 것이다.
♣ 칠유[七誘]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幽遁公子 不遊義路 不入禮門 人主焉得 爲臣公侯 難以爲客 有暴勢大夫 驅美澤之車 策千里之馬 乃至公子之所居……”
♣ 칠유[七喩]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有逸俗先生者 耦耕乎岩石之下 栖遲乎窮谷之峀 萬物不干其志 王公不易其好 寂然不動 莫之能懼……”
♣ 칠의[七依]시(詩)ㆍ부(賦)ㆍ명(銘)ㆍ송(頌)ㆍ달지(達旨)ㆍ주경(酒警) 등 21편의 문체 중 하나. 《後漢書 崔駰傳》
♣ 칠인[七人]효경(孝經)에, “천자(天子)에게는 다투어 간하는 신하가 일곱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여기서는 간원(諫院)을 말한 것이다.
♣ 칠인작자미상명[七人作者未嘗名]작(作)은 기(起)의 뜻으로, 일어나 은거하러 간 사람을 이르는데, 공자(孔子)가 “작자가 일곱 사람이다.[作者七人矣]"라고만 말하고 그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 것이다. 《論語 憲問》
♣ 칠일복[七日復]주역(周易) 복괘(復卦)에 있는 말. 그 주에 “양(陽)의 소(消)가 칠일(七日)에 이르러서 복(復)한다.” 하였다. 즉 구괘(姤卦)는 양(陽)의 시소(始消)인데 일곱번 변하여 복괘가 된다. 붕은 유(類)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양(陽)이 차츰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였다.
♣ 칠일요중래[七日要重來]역(易)의 복괘(復卦) 단사(彖辭)에 “이레면 되돌아온다.[七日來復]”하였음.
♣ 칠일지복[七日之復]주역(周易) 복괘(復卦)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만에 와서 회복되니 가는 것이 유리하다.” 하였는데, 여기서의 7일은 곧 7개월로서 5월에 양(陽)이 처음으로 감소되어 구괘(姤卦)가 되었다가, 11월에 양이 처음으로 생겨 복괘(復卦)가 될 때까지 모두 7개월이 된다는 뜻이다.
♣ 칠자[七子]명(明) 나라 때에 문학(文學)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 전칠자(前七子)와 후칠자(後七子)가 있는데, 전칠자는 이몽양(李夢陽)ㆍ하경명(何景明)ㆍ서정경(徐禎卿)ㆍ변공(邊貢)ㆍ강해(康海)ㆍ왕구사(王九思)ㆍ왕정상(王廷相)이고, 후칠자는 이반룡(李樊龍)ㆍ사진(謝榛)ㆍ양유예(梁有譽)ㆍ종신(宗臣)ㆍ왕세정(王世貞)ㆍ서중행(徐中行)ㆍ오국륜(吳國倫)임.
♣ 칠자[七子]후한(後漢) 말기의 이른바 건안 칠자(建安七子)로, 유정을 비롯해서 공융(公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서간(徐幹), 완우(阮瑀), 응창(應瑒) 등이다.
♣ 칠저[漆沮]칠저는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로 이 두 물이 빈(豳) 땅에서 합쳐지므로 빈을 가리킨다.
♣ 칠저삼[漆沮槮]칠저는 중국에 칠수와 저수를 이른 말이고, 어리란 곧 물고기가 들어가게 하기 위해 섶나무를 물 속에 쌓아 두는 것을 가리킨다.
♣ 칠전팔기[七顚八起]일곱 번 넘어졌다가 여덟 번째 일어남. 여러 번 실패해도 굽히지 않고 분투함을 일컫는 말.
♣ 칠전팔도[七顚八倒]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째 또 넘어짐.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음.
♣ 칠절[七絶]감[柹]의 일곱 가지 좋은 점. 첫째 수명이 긴 것, 둘째 잎이 풍성하여 그늘이 짙은 것, 셋째 새의 둥우리가 없는 것, 넷째 좀이나 벌레가 없는 것, 다섯째 단풍 들었을 때의 아름다운 잎, 여섯째 먹음직스러운 고운 열매, 일곱째 낙엽(落葉)이 매우 비대(肥大)하여 글씨를 쓸 수 있는 점이다. 《本草 卷三十 果部 柿》
♣ 칠절[七絶]이아익(爾雅翼)에 “감나무가 일곱 가지 절이 있다. 곧 첫째 오래 살고, 둘째 그늘이 많고, 셋째 새들이 집을 짓지 않고, 넷째 벌레가 없고, 다섯째 서리 맞은 잎을 구경할 만하고, 여섯째 열매가 아름다워 먹을 만하고, 일곱째 잎이 비대(肥大)하여 글자를 쓸 수 있다.” 하였다.
♣ 칠절당[七絶堂]칠절은 곧 감[枾]을 말하는데, 감은 첫째 수명이 길고, 둘째 그늘이 많으며, 셋째 새의 둥지가 없고, 넷째 벌레가 없으며, 다섯째 단풍 든 잎이 아주 보기 좋고, 여섯째 열매가 아름다우며, 일곱째 낙엽이 비대(肥大)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酉陽雜俎 木篇》
♣ 칠정[七政]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북두칠성은 이른바 선기옥형으로서 칠정을 주관한다.[北斗七星 所謂旋璣玉衡 以齊七政]”고 하였다.
♣ 칠정[七情]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의 감정으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을 말한다.
♣ 칠정[七政]일월(日月)ㆍ오성(五星)을 말함.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在璿璣玉衡以齊七政”이라고 보이는데, 그 전(傳)에는, ‘七政 日月五星各異政 舜察天文 齊七政 以審己當天心與否’라고 보임.
♣ 칠정선기[七政璿璣]서경(書經) 순전(舜典)의 “선기옥형을 관측하여 칠정을 조정한다.”에서 나온 말로, 칠정은 일ㆍ월과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 별인데, 춘ㆍ하ㆍ추ㆍ동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인도(人道)라는 설도 있다. 선기옥형은 옥으로 장식한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 칠조[七祖]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로부터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까지를 육조(六祖)라 하는데, 7조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으나 보통은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를 꼽고 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몸을 쌍봉사에 허락받고서, 문에 들어가 칠조선을 구하네.[身許雙峰寺 門求七祖禪]”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9 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
♣ 칠조대의[漆雕大義]정자(程子)는, “칠조개(漆雕開)는 이미 대의(大義)를 보았다.” 하였다.
♣ 칠종[七縱]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의 괴수 맹획(孟獲)과 싸워서 일곱 번 놓아 주었다가 다시 일곱 번 잡았다.
♣ 칠종칠금[七縱七擒]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줌.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이르는 말. 제갈공명의 전술로 일곱 번 놓아 주고 일곱 번 잡는다는 말로 자유자재로운 전술.
♣ 칠중교[漆中膠]아교와 칠. 이 두 가지는 모두 물건을 붙이는 것이므로, 교제(交際)가 아주 친밀함을 비유한다.
♣ 칠지군서[七紙軍書]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선비(鮮卑)를 칠 때, 종사관 원호(袁虎)에게 격문을 짓게 하자, 원호가 그 자리에서 일곱 장의 격문을 순식간에 지어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文學》
♣ 칠징[七徵]칠미(七微)라 부르기도 함.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玄虛子耽性沖素雍容 玄泊棄時俗而弗徇 甘釣魚于一壑 乃有通微 大夫怨皇后之失寶 傷鴻誓之後聞榮 玄黃于榛險 憑穴岩而放言……”
♣ 칠착[七鑿]칠착은 인간의 감각 기관인 귀ㆍ눈ㆍ입ㆍ코의 일곱 개 구멍을 뚫어준다는 뜻이다.
♣ 칠첩[漆帖]옻칠을 한 책갑(冊匣) 등을 이름.
♣ 칠칠[七七]일곱 이레, 칠월 칠석을 달리 이르는 말, 七七齋(사십구일제)
♣ 칠향거[七香車]각종의 향나무를 가지고 만든 수레를 말함.
♣ 칠현[七賢]진(晉)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완적(阮籍)ㆍ혜강(嵇康)ㆍ산도(山濤)ㆍ유령(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ㆍ상수(向秀)를 말한다. 이들은 죽림에 모여 소요자적하며 도교적인 생활을 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稽康傳》
♣ 칠협[七莢]명협(蓂莢)은 요(堯) 임금 때 조정의 뜰에 난 서초(瑞草)의 이름인데, 매월 초하룻날부터 15일까지는 날마다 한 잎씩 나서 자라고, 16일부터 그믐까지는 다시 매일 한 잎씩 져서 다하였으므로, 이것을 근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즉 정월 초이레가 되었음을 이른 말이다.
♣ 칠화[七華]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玄休先生 棄世遁命 藏身于虛廓 絶影于無形……”
♣ 칠환[七歡]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有巖棲先生者 學道養生 離親絶俗……”
♣ 칠흥[七興]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子康子有疾 王先生▣焉曰 駿駔之馬 慉不征路 其荷衡也 曜以驚禽 其卽行也 翬若游鷹 飆駭風逝 電發波騰 影不及形 塵不暇興……”
♣ 침가비[沈家脾]심씨(沈氏)는 곧 당(唐) 나라 심전사(沈傳師)를 가리키는데, 그는 밥을 잘 먹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침개[針芥]자석(磁石)에 붙는 바늘과 호박(琥珀)에 붙는 개자. 자석은 능히 바늘을 끌어오고 호박(琥珀)은 능히 개자(芥子)를 줍는다는 옛말이 있으므로 사람의 정과 성(性)이 계합(契合)하는 것에 인용함.
♣ 침계평안불사시[寢戒平安不似屍]시체처럼 눕지는 말라는 뜻.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누울 적에 시체처럼 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집주(集註)에 “이것은 시체와 같은 것을 미워해서 뿐만 아니라 게으른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 침고[沈橭]주(周)시대에 수충(水蟲)제거를 맡았던 호탁씨(壺涿氏)가 수신(水神)을 죽이기 위하여 느릅나무 줄기에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다 상아(象牙)를 꿰어 십자(十字)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물 속에다 가라앉히면 그곳 수신은 죽고 그 못은 변하여 구릉이 된다는 것이다. 《周禮 秋官 壺涿氏》
♣ 침과[枕戈]부모의 원수를 갚으려 할 적에는 거적자리에 잠자고 창을 베고 자며,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지 않는다 하였다. 《禮記》
♣ 침과[枕戈]창을 베고 잔다는 뜻인데, 군국(軍國)의 일로 인하여 편하게 잠자지 않음을 비유한 것으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경우 즉시 대비하기 위하여 항상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晉書 劉琨傳》
♣ 침괴[枕塊]부모 상중(喪中)에 비통한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상주(喪主)가 누울 때 흙덩어리를 베개로 삼는 것을 말한다.
♣ 침괴명발와[枕塊明發窩]명발와는 김종직(金宗直)의 서재 이름이고, 흙덩이를 벤다는 것은 곧 부모의 상중에 있음을 뜻함. 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거적을 깔고 흙덩이를 벤다.[寢苫枕塊]”하였다.
♣ 침류수석[枕流漱石]진(晋) 나라 손초(孫楚)가 산수간에 숨어살겠다는 뜻을 말하면서, “나는 장 돌을 베개로 삼고 흐르는 물에 입을 씻겠다.” 하려는 것이 말이 잘못 나와서, “흐르는 물을 베고 돌로 입을 씻겟노라.” 하였다. 옆에 사람이 조롱하기를, “흐르는 물을 어찌 베개로 삼으며 돌로 어찌 입을 씻으랴.” 하니, 그는 답하기를, “흐르는 물을 베개로 함은 귀를 씻으려는 것이요, 돌로 입을 씻음은 이[齒]를 잘 닦으려 함이다.” 하였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 침명도[沈冥圖]자신의 자취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묻혀지게 하려는 의도를 뜻한다.
♣ 침묘[寢廟]옛날 종묘(宗廟)의 제도에, 앞에 있는 것을 묘(廟), 뒤에 있는 것을 침(寢)이라 하였다.
♣ 침문[寢門]내실(內室)의 문.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장경집(長慶集) 권11 곡제고인인기원8(哭諸故人因寄元八)에 “어제도 침문에서 통곡을 하고 오늘도 침문에서 통곡하였네[昨日哭寢門 今日哭寢門].” 하였음.
♣ 침문[寢門]친구의 죽음에 곡(哭)하는 것을 뜻함.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스승에게는 내가 정침(正寢)에서 곡하고, 친구에게는 내가 침문(寢門) 밖에서 곡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침문은 곧 정침의 문을 가리킨다. 《禮記 檀弓上》
♣ 침문[寢門]태자가 새벽마다 황제의 침실(寢室) 문 앞에 문안하였다.
♣ 침비두예[沈碑杜預]진(晉)나라 두예(杜預)가 형주(荊州)를 지키는 대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 탄식하기를, “이 산은 항상 있건마는 이 산에 놀던 사람은 천추 뒤에 누가 알겠는가.” 하고, 비석(碑石) 돌을 만들어 자기의 사적을 새겨서, 하나는 산 위에 세워 두고, 하나는 후일에 산천이 변하여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육지가 될 때를 예상하여 연못 속에 던져두었다.
♣ 침상공명[枕上功名]노생(盧生)이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의 고사를 말한다.
♣ 침상한[沈湘恨]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인데, 순(舜)의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강 가에서 통곡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에서 인용한 말이다.
♣ 침상현비[沈上峴碑]진(晋) 나라 두예(杜預)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하여 비석(碑石) 둘을 만들어서 공적(功績)을 새겨,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우고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 못물 속에 넣으면서, “후에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산이 될는지 모르므로, 비석을 이렇게 돌을 준비한 것이다.” 하였다.
♣ 침석수류[枕石潄流]산림(山林)에 은거하는 생활을 비유할 때 보통 “바윗돌을 베개 삼고 시냇물에 이를 닦는다.[枕石潄流]”는 표현을 많이 써 왔다.
♣ 침선[針線]금침수선(金針繡線)의 약칭임.
♣ 침소봉대[針小棒大]바늘같이 작은 일을 곤봉 같이 크게 말한다는 뜻으로 작은 사건을 크게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함.
♣ 침신[侵晨]새벽이 되다.
♣ 침어[浸魚]서시(西施)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자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한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范蠡)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 침어[沈魚]우주에는 절대적인 미추나 선악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라 해도 고기에게는 그저 사람일 뿐으로 두려워 숨는다는 말이다. 《莊子》
♣ 침어낙안[沈魚落雁]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물고기는 잠기고 기러기는 떨어진다는, 아름다운 미인을 뜻하는 고사성어.
♣ 침옥고의홀거삼[寢屋皐衣忽擧三]사람이 죽은 뒤에 초혼(招魂)하는 의식을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과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사람이 죽으면 지붕 위에 올라가 옷을 가지고 혼을 부르며 말하기를 ‘아아, 아무개여 돌아오라.[皐某復]’ 하고 세 차례를 반복한다.” 하였다.
♣ 침운흑[沈雲黑]검은 구름이 잠기다.
♣ 침원[寢園]임금의 산소. 능침(陵寢)과 같다.
♣ 침원[浸遠]점점 멀리 가다.
♣ 침위[枕幃]향낭(香囊)처럼 만든 베개를 말한다.
♣ 침자[針磁]자석(磁石)이 철침(鐵針)을 끌어당기듯 서로의 사이가 친근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 침접[枕蝶]장자(莊子) 제물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병석에서 가물거리는 정신을 뜻한다.
♣ 침주[沈舟]사기(史記) 장의전(張儀傳)에, “누적된 것이 배를 침몰시킨다[積羽沈舟].” 하였음.
♣ 침중서[枕中書]한(漢) 나라 때 회남왕 안(淮南王安)이 베개 속에 비장(祕藏)했다는 비서(祕書)로서, 도술(道術)의 서적을 이른 말이다.
♣ 침중지보[枕中之寶]한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개 속에 넣어 둔 홍보원비서(鴻寶苑秘書)를 얻었는데 신선 도술을 말한 글이었다.
♣ 침중홍보[枕中鴻寶]한(漢) 나라 때 회남왕 안(淮南王安)이 베개 속에 비장(祕藏)했었던 도술서(道術書)를 이름.
♣ 침침[伈伈]두려워하는 모양
♣ 침탁[踸踔]걸음이 일정하지 못하고 더딘 모양으로 문재(文才)가 둔함을 말한 것이다.
♣ 침폄[鍼砭]침폄은 질병을 치료하는 쇠침과 돌침이니, 즉 질병을 치료하는 침폄으로는 영고 성쇠를 전환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 말이다.
♣ 침향[沈香]생목(生木) 또는 고목(枯木)을 땅 속에 묻어 수지(樹脂)가 적은 부분을 썩히고 많은 부분을 쓰는데, 줄기의 상처나 단면에서 흐르는 수지를 침향이라 하여 예부터 귀중한 향료로 쓰였다.
♣ 침향정[沈香亭]당 나라 때 금중(禁中)에 있던 정자 이름.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가 작약과 모란을 관상하면서 이백(李白)을 불러 시를 짓게 하며 놀았다고 한다. 《樂史 李翰林別集序》
♣ 침향정[沈香亭]당 명황이 대궐의 모란꽃을 흥경지(興慶池)에 옮겨 심어 놓고 꽃을 오나성하며 양귀비(楊貴妃)와 즐기던 정자. 이백의 청평사(淸平詞)에,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었다[沈香亭北倚欄干].’는 구절이 있다.
♣ 침향정[沈香亭]침향정은 당대(唐代) 대궐 안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어느 날 달밤에 명황(明皇)이 양귀비와 함께 나와서 정자 앞 목작약(木芍藥)을 구경하다가, 이름난 꽃을 구경하는데 어찌 묵은 악사(樂詞)를 쓰겠느냐면서 대뜸 한림학사 이백(李白)을 불러 새로운 청평악사(淸平樂詞) 세 편을 짓도록 하였다. 《楊太眞 外傳》
♣ 침회작[沈淮爵]작은 작(雀)과 같은 뜻으로 참새를 말하는데,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늦가을에 작(雀)이 바다에 들어가 조개가 된다.” 하였고, 국어(國語) 진어(晉語)에는 “작은 바다에 들어가 조개가 되고 꿩은 회수에 들어가 대합조개가 된다.” 하였다.
♣ 칩배[蟄坏]벌레들이 칩거(蟄居)하기 좋게 흙을 가지고 구멍을 막는다는 ‘칩충배호(蟄蟲坏戶)’의 준말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숨어 지내는 것을 말한다. 《禮記 月令》
♣ 칩연[蟄燕]겨울에 꼼짝 않고 암혈(岩穴) 속에 숨어 지내는 제비를 말한다.
♣ 칩충배호[蟄蟲坏戶]벌레들이 칩거(蟄居)하기 좋게 흙을 가지고 구멍을 막는다는 뜻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숨어 지내는 것을 말한다. 《禮記 月令》
♣ 칭[稱]무게를 다는 저울.
♣ 칭[稱]일의(一衣)를 가리키는 말.
♣ 칭성인명[稱聖人名]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쓰거나 부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