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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특징
21세기를 앞당긴 역사의 두 흐름
21세기를 몇 년 앞둔 오늘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서 있다. 반세기 이상 산업사회를 제약해온 냉전체제가 와해되는 한편으로 인간의 의식·행동·제도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정보통신 혁명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제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이 변화의 성격과 충격(결과)을 살펴보는 것은 앞날을 예견하기 위해 오늘을 살피는 사람의 기본과제일 것이다.
냉전체제의 붕괴
반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냉전체제는 1985년을 기점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한반도만이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을 뿐, 그외의 모든 지역에서는 그동안 냉전체제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탈냉전이 우리에게 주는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크다.
급격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전체주의 체제는 국가 부분의 지나친 지배력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붕괴될 수 있음을 실증해준다.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가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제약할 때 국가 부분의 결함은 곧바로 체제 전체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 다음으로 그것은, 이미 우리가 나치체제와 군사독재체제의 멸망에서 어느 정도 확인했듯이, 국가를 민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 부분이 미약하거나 아예 없는 체제는 체제 안팎으로부터의 도전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와 개인 또는 정부와 가족 사이를 이어주는 자율적 시민집단이 건재하지 못할 때 국민의 총체적 불만은 체제의 해체를 몰고 올 수 있다. 국가의 전체주의 체제가 일견 일사불란(一絲不亂)하고 강하게 보이지만, 자율적 중간집단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장해주는 열린 체제가 오히려 다사불란(多絲不亂)의 강인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 알게 된다.
한편 탈냉전은 우리의 사상과 지식체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외형적으로 잘 짜여진 논리나 결정론적 단순함과 박진력을 지닌 이데올로기 담론이 갖고 있던 적합성이 크게 감퇴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던 확실한 이념적 지배력이 상대화되면서 그 영향력 또한 약화되거나 상실되기에 이르렀으며, 일반적으로 근대사상이 지녔던 정돈된 담론 질서와 외형적 명쾌함도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듯 보인다. 어디서나 딱딱한 결정론적 사고는 힘을 잃고 있다.
냉전구조의 와해는 각 진영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질서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선 그간 냉전구조에 의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다양한 갈등들이 표면화되고 있다는 점이 있다. 특히 옛 사회주의권에서는 역사와 전통과 혈연으로 묶여진 다양한 민족들이 자기 정체성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민족이익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으며, 이것은 이전에 억압되었던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대한 요구와 맞물려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도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인종·성·환경 등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구조가 새로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문제들까지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시민사회를 재활성화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활성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탈냉전 이후의 사회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종래의 국가중심적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다시 검토되고 있으며 시민사회를 더욱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작은 국가, 더 깨끗하고 더 날씬한 정부(cleaner, leaner government)가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민개혁 역시 바로 이런 추세에 맞물리고 있으며 따라서 건강한 시민사회의 육성이야말로 개혁의 핵심과제인 것이다.
탈냉전은 또한 국가간의 관계, 즉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이미 시작되고 있던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보와 상품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던 이념적 장벽이 무너지면서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수립은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예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냉전의 와해가 한편으로 국가이익이 더욱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정책결정이나 외교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니 사회주의 혁명이니 하는 대의명분이 가졌던 의미가 사라지면서 더욱 직접적인 국가이익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실리 외교니 세일즈 외교니 하는 말이 더이상 낯설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냉전체제의 붕괴는 대체로 완결로 향하는 일회적 진행과정을 겪고 있다. 비록 한반도가 아직도 냉전의 기류에 휩싸여 있으나, 탈냉전이 불가피한 세계적 추세이기에 언젠가는 그 해체가 한반도에서도 완결될 터이다. 그런데 이 흐름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정보화이다. 정보화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기술과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이 변화의 흐름은 우리의 삶을 뿌리부터 완전히 변화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보화 흐름
정보화와 탈냉전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탈냉전이 이념과 체제의 경계선을 지워버림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단순화시킨다는 뜻에서 세계화를 촉진시킨다면, 정보화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도 반경 1.5m 앞에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리고 자본과 기술과 인력에 관한 정보를 국경을 초월해 넘나들게 함으로써 세계화 추세를 북돋운다.
냉전시대에는 정보화 사회로 지칭되는 미래사회에 대한 논의가 갖는 장미빛 낙관론이 일정한 회의와 비판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하기야 과거에는 미래 사회, 탈산업 사회, 정보화 사회의 그림이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개발독재의 어두운 현실을 내일의 장미빛 그림으로 왜곡하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냉전적 대결이 첨예했던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구조가 와해되면서 이전에 좌파적 비판이론의 시각에서 미래학적 낙관론을 비웃었던 지식인들도 열린 마음으로 21세기 사회의 모습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정보화 또는 정보통신혁명의 실상과 그 파급효과를 가능한 한 이념적 편향 없이 객관적으로 파악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보화가 이미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보화는 단순한 기술변화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며 그만큼 가족·교육·의료·기업·종교·정부 등 온갖 사회제도에 끼치는 파급효과도 클 것이다. 어떠한 변화가 실제로 일어날지를 지금 정확하게 예견하기란 쉽지 않다. 다가올 제도적 변화, 인간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추정해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정보통신혁명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보화의 사회적 의미
정보화의 문제를 여러 국가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의 정책적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지금 선진국수준에 이른 국가는 예외없이 국가의 주요사업으로 초고속정보통신도로를 개설하려고 하며, 이 신사회 간접자본인 정보고속도로를 달리게 할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일에 국가적 힘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5년까지 45조 원을 들여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하려고 한다. 정보화의 사회적 의미를 보다 쉽게 파악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 갖는 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것은 2가지 기능을 담당할 것이다. 첫째는 멀티미디어 시대를 연다는 것이고, 둘째는 쌍 방향 통신을 대규모로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2가지 효력과 기능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속에 사회적 변화의 뜻을 담고 있다.
멀티미디어의 기능
아직까지 우리는 소리와 영상과 문자가 각기 다른 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산업화 후기시대에 살고 있다. 소리는 전화와 라디오로, 영상은 텔레비전으로, 문자는 컴퓨터로 각각 전달된다. 그런데 초고속정보통신망이 구축되면 음성·영상·문자 등과 관련된 대량의 정보를 단일한 표준으로 통합해 광케이블을 통해 초고속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정보전달의 속도가 놀랍도록 빠르고, 전달되는 정보량이 엄청나게 방대하며, 음성·영상·데이터가 통합되어 전달됨으로써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강력한 통신이 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광통신기술의 발달로 1초당 1테라비트(1조 비트)의 정보를 전송할 수 있게 될 것인데, 이것은 광통신 케이블 한 가닥으로 어린이와 노약자를 뺀 한국 인구 전체인 2,000만 명이 쌍방향 통신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쌍방향 멀티미디어 통신이 가능해진다면 삶의 내용과 양식은 크게 변화될 것이다. 특히 인간의 오감을 모두 전달하게 된다면, 이를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을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곧 텔레퓨터(Teleputer)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화와 텔레비전의 'tele'와 컴퓨터의 'puter'를 합쳤다는 뜻이다. 물론 과연 무엇이 이러한 통합매체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 주도권을 잡든, 정보사회에서 시청자가 음성과 영상과 문자를 함께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음성과 영상과 문자는 각기 개별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의식에 영향을 끼쳐왔는데 이 3가지가 통합된다면 그것이 끼칠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증폭될지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직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시대가 오지 않았으므로 그 위력을 몸으로 느끼기에는 이르지만 그 영향력을 개별매체의 영향력과 비슷할 것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단견일 것이다.
쌍방향 통신의 사회적·정치적 의미
정보통신혁명으로 첨단매체를 통해 국민들이 쌍방향 통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쌍방향 통신이 가져다 줄 사회적·정치적 효력을 지적하기에 앞서, 그것이 일하고 즐기는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특정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까지 가야 한다. 몸이 아프면 병원까지 가야 하고 교육을 받으려면 학교까지 가야 하며 직장인들은 직장까지 매일 출근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정보통신혁명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고 있다. 원격진료·원격은행거래·홈쇼핑·원격교육·원격재판 등의 생활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준다 하더라도 쌍방향 의사소통이 안되면 일의 처리가 어렵다는 점이다.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일을 둘러싸고 관계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곧 한쪽 방향으로만 통신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원격적 일처리가 효율 면에서나 정당성 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의 가장 큰 중요성은 이렇게 꼭 필요한 쌍방향 통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정보통신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상과 문자정보의 통신이 대체로 일방적이었다. 공중파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의한 일방향 통신의 대량전달(mass communication)이 일상화되면서 대중사회(mass society) 경향이 가속화되었다. 개인은 원자화되어 고독해지고, 사회구조는 중간집단의 약화로 양극화되어갔다. 공중파 방송시대에는 시청자가 바보상자 앞에서 바보 노릇하는 객체로 묘사되기도 하며, 일방향적 매체를 독점한 지배세력은 전체주의적 큰형(Big Brother)의 전횡을 일삼기도 한다. 대체로 암울한 유토피아를 염려했던 대중사회 이론가나 작가들의 문제의식도 바로 이러한 대중사회의 일방향 통신의 위험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한다면, 일방향적 방송 체제하에 대중은 파블로프의 개나 스키너의 비둘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중은 객체요 대상이지, 주체요 주격이 아니다. 반응자(reactor)이지 주체적 행위자(actor)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쌍방향 통신이 전국화되는 상황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대중사회가 투영하는 암울한 부정적 유토피아의 그늘을 벗겨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쌍방향 통신이 일상화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밝고, 정의로우며, 자유로운 사회가 오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중사회를 암울하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인 일방향 대량 방송의 권위주의적인 기능을 쌍방향 통신이 적어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정보화시대 시청자는 대중사회의 시청자와 달라진다는 뜻과 함께 가족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자발적 시민조직체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뜻을 함께 담고 있다. 정보화시대의 시청자는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consumer)일 뿐만이 아니라,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람(producer)이기도 하다. 시민이 정보 'prosumer'(producer+consumer)가 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대응하는 시민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쌍방향 통신의 일상화는 대중사회의 취약점이었던 중간집단의 부재나 약화를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쌍방향 통신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소통하면서 자율적인 시민조직을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국가 영역 밖에서 국가를 견제하면서 도울 수 있는 시민운동의 공간이 넓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이를테면 일본의 시민운동조직체인 전자정내회(電子町內會)는 일본 전역에 걸쳐 개인용 컴퓨터(PC) 통신을 사용해 밤에도 3,000명이 정책토론에 참가하게 하고, 또 정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원격시민운동이 활성화됨으로써 이른바 원격민주주의(tele-democracy)가 어느 정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낙관은 금물이지만, 지난날 냉전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의 시각에서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어떻게 쌍방향 통신을 잘 관리해 거리와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시민 주권이 더욱 강화되는 원격민주주의체제를 구현해나갈 것인가를 합리적이고 공동체적으로 논의해 나가야 할 때이다.
정보화 흐름에 대한 대응
탈냉전이 완결되는 21세기에는 정보화 흐름의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고, 그 흐름의 규모는 더욱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며, 그 흐름의 불가피성은 더욱 피부에 와 닿게 될 것이다. 이 변화의 물결을 외면하는 국가와 사회는 21세기의 후진국으로 떨어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사회에 많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이러한 개혁의 주체를 형성하여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 세계적 탈냉전의 추세 속에서 아직도 냉전의 섬에 갇혀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탈냉전이 세계적으로 민족이익과 국가이익을 분출하게 만들고 있는 이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민족사회를 재건해 세계적 흐름을 활용할 수 있도록 냉전구조를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정보화 흐름에 맞추어 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요구된다. 정보산업을 위시한 모든 산업분야의 활동에 대해 탈규제 조치를 내려야 하고, 우리 시장을 보호하면서도 시장개방을 과감히 해내야 하며, 비효율적인 국영사업체를 민영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정부의 권한을 스스로 크게 위임하거나 제약해야 하는 이 일을 개혁의 차원에서 단행해야 한다. 정부가 스스로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동시에 시민사회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다.
정보화 사회의 시민들은 선택하는 공중(public)이지 일방적으로 조종당하는 대중(mass)이라 하기 어렵다. 시민사회 부분은 정보화 흐름을 타고 더욱 강화될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자율적인 중간집단들이 활성화될 것이며, 시민운동도 그만큼 강화될 수 있다. PC 통신을 통해 많은 시민들은 정책토론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고 영상회의식으로 서로 대화하면서 시민운동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문(聲紋)을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되면, 전화투표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원격민주주의운동도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민운동은 권위주의 정부의 정보통제 정책을 견제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보화 사회에서 바람직한 시민운동은 무엇이며, 그것의 효과적 추진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차분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정보화와 냉전해체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상기하고, 또 이 두 사건이 모두 시민사회 활성화와 연관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정보화 사회에서는 냉전해체가 더욱 가속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냉전해체 작업은 정보통신혁명의 효력을 십분활용해 정보선택과 정보공급자로서의 시민들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에 한국사회학이 냉전체제의 해체를 위한 시민운동에 적합한 이론적 틀과 실천적 모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상을 제거해야 한다. 국경 없는 정보공간에서 전달되는 정보 속에는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위협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유통될 수 있다. 최근 여러 나라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들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 화교의 추방문제는 말레이시아에서, 동(東)티모르의 독립문제는 인도네시아에서, 왕실의 추문은 타이에서 각각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물론 새로운 정보매체를 통해 무분별하게 확산·유통되는 저질정보, 이를테면 외설음란물의 유포는 적절하게 관리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권위주의 정부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운 정보교환이 제약받게 된다면 정보화 사회 역시 국민기본권 제약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정부의 부당한 정보통제강화 문제이기는 하나, 동시에 세계적으로 정보상품이 불평등하게 분배됨으로써 정보의 유산국(有産國)과 무산국(無産國) 간의 격차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보화 사회는 일방적 지시와 확실한 교리가 먹혀들지 않는 사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해주는 관용의 문화가 사회구조의 생존을 위해서도 건재해야 한다. 관용의 문화는 이것들을 담아 안정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이룩하게 하고, 변화를 추진하면서 안정의 틀을 엮어가게 하는 역할을 해낼 것이다. 국제연합(UN)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1995년을 관용과 민주주의의 해로 정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관용문화가 시대흐름에 맞는 시대정신(Zeitgeist)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용의 문화는 또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열린 사회와 체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문화이다. 정보화 사회와 관용문화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사회가 추진해야 할 또 하나의 실천적 과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한국방송대학교 총장. 1970년대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해온 대표적인 지식인. 미국 테네시주립공과대학교·이스트캐롤라이나대학교의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1976년 유신체제하에서 1차 해임을, 1980년 복직 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2차 해임을 겪었다. 1984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복직했으며,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3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을 지냈다. 주요저서로 〈현대사회와 청년문화〉(1973)·〈지식인과 허위의식〉(1977)·〈민중과 지식인〉(1980)·〈한국현실과 한국사회학〉(1992) 등이 있다.
자료출처
http://www.see21go.or.kr/technote/read.cgi?board=nonsool
첫댓글 자료 잘쓸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