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간화선, 외국 학자를 만나다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참가학자들 선원장 스님과 대담
봉암사 적명스님 축서사 무여스님 석종사 혜국스님과 잇따라 만나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는 7일간의 마곡사 선수행 실참을 마치고 7월2일 문경 봉암사에서 수좌적명스님과 대담을 시작으로 축서사에서 무여스님과, 이어 3일에 석종사에서 혜국스님과의 대담을 진행했다. 외국인 교수 및 참가자 33명을 포함해 63명의 마곡사 실참수행자가 공개 문답으로 조계종 원로 선원장들에게서 선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자리는 미국 햄프셔대학 교수 혜민스님이 통역했다.
봉암사 선열당에서 7월2일 국제학술대회 참가들이 수좌 적명스님과 대담하고 있다.
■ 대담-1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선열당에서 열린 수좌 적명스님과의 대담은 먼저 스님의 간화선 설명으로 시작됐다.
간화선은 1000여년도 되지 않아 중국대륙을 섭렵했고 한국 일본에서도 중추역할을 했다. 간화선의 주창자 대혜스님도 당시에도 관법수행이 있었다. 기존의 관법과는 다르지만 묵조선도 관법수행이며, 대혜스님도 묵조선을 수행했었다. 그럼에도 대혜스님은 간화선을 택하고 묵조선의 폐단을 극력 주장했다.
당시 큰 영향을 끼친 이유는 많은 수행자들이 묵조선 수행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조선에서 간화선으로 선택한 이유는 체험적으로 우월함이 입증됐기 때문이며, 구조상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관법은 일상적 의식을 의존하나 보는 대상이 있어 보는 대상이 있는 마음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이다. 그러나 화두 수행법은 그런 상대성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의심한다는 화두참구, 화두 문제를 의심해 들어간다는 것으로 의심 자체가 상대성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의심은 대상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거나 꽃을 본다 할 경우엔 의심이 없다. 그 대상이 꽃 돌 컵인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의심이 있게 된다.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 의심이다. 무엇일까 대상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으로, 대상이 결정되지 않아서 마음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의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생각 속의 의심이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다. 그러나 오래 참구하면 지속적으로 화두 의심을 지어나가면서 어떤 계기가 생겨서 그 문제에 집중하는 마음이 생기며 상황이 달라진다. 문득 그 의심이 마음이 사무쳐 들어감을 느끼고 그 의심에 마음이 자리잡음을 느낀다.
그럴 때는 앞서 있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부처도 없고 부처의 말도 없고 중생도 중생의 말도 조주가 없다고 말한 그 자체도 없다. 일체가 끊어진 한 덩어리 마음 ‘은연한 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이 상태를 체험하면 이런 예를 상상해 보면 된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간다고 치자. 그런데 숲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걸음을 멈춘다. 곧 육체적 동작을 멈춘다는 뜻이다. 소리에 집중할 뿐으로 마음을 일으키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큰 안테나를 열고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려는 것과 같이 오직 충분히 열려있는 의식이 있을 뿐으로, 그 내용과 대상을 알려고 파악하려고 하는 마음 뿐이다. 무엇일까 이럴 때 이런저런 생각이 끊어지고 한 덩어리 마음이 화두를 지어가는 마음이다.
이럴 때는 의식해야할 대상으로 무엇이 존재하지 않고, 인식이 나타나고 결정되기만 하면 인식해 버린다. ‘꽃이다’라고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해버리고, 거기에는 의심이 없어 진정 능소, 모든 생각이 다 떨어진 꽃이다. 상대성의 접근은 진리의 속성이라서 진리에 빨리 오를 수 있다. 이런 점이 간화선이 탁월한 이유이다.
간단히 남방관법을 소개하면, 처음 수행 삼매의 과정에서도 까시나 대상을 상대로 수행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구체적 대상을 상대로 관상, 떠오르는 영상(까시나), 관상을 시작한다. 이 까시나가 상념의 상태에 있는 동안은 뚜렷하지도 않고 힘을 발휘하지도 않으나, 그 관이 깊어져 선정에 이르면 달라진다. 남방불교 사상적 근거인 청정도에서는 구름에서 달이 벗어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변화는 모든 수행단계에서 다 있는 일이다. 남방관법에서 있는 것처럼 북방의 일몰관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의식 상태가 통일되고 순수해지면 희열감 청정성을 느끼는 것이다.
남방수행에서는 까시나가 앞에 나왔을 때 그에 의지해서 초선에 4선까지 이른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단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열반상태에서도 계속된다. 삼매수행 상태에서 빛나는 까시나 대상이 존재하고 관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열반에서도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청정도에서는 열반을 관하는 마음을 증과의 마음이라 표현하고 이는 40가지나 된다고 말한다. 아라한이 되고서도 무여열반에 들기 이전까지는 완전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상태만이 완전한 열반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아라한이 되고서 열반을 관하면서도 온전한 열반이라 못하는 것은 의지하는 마음이 있고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남방불교 교리에서는 4가지, 색법 심법 심소법 열반이 각각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열반과 마음은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마음과 마음이 관하는 동안은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끝까지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리 체계이다.
대승불교는 불이사상이다. 마음과 마음을 관하는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젊은 스님들에게 남방수행도 가능하나 사상을 알고, 처음과 끝이 어딘지 알고 시작하라 권한다. 남방수행을 통한 열반의 의미는 대승의 열반의 의미와 사뭇 다르다는 의미다.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얘기하고 실제적 수행을 말한다.
질문(로버트 버스웰, 국제학술원 명예원장) = 위빠사나를 하더라도 수행하면서 그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뭔가 열리면 그 순간 간화선이 되는가.
답변 = 그럴 수 있다. 비슷한 것으로 참구염불이란 것이 있다. 송나라 이후 한국에도 전해오고 있다.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극락세계에 때어나길 바라는 수행법이다. 이걸 정토종이라 한다. 정토종도 성했을 때 조계종도 성행했다. 염불을 하면서 염불을 하는 이 자가 누구인가. 이럴 경우 자기 주인공을 찾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고 잘못되더라도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이라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방불교 수행법을 행하면서 여기에서 관하는 자가 누구인가 두 가지 이익이 있다. 남방은 평이하고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 두 가지 겹치는 수행법은 처음 듣는 질문이고 처음 생각해보나, 쉽기 때문에 정신통일 마음안정에 쉽다. 그러면서도 대승적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버에타 그란트, 워싱턴대) = 스님이 화두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일상 생활중에도 가능한가. 일반인들에게서 선지식이 없을 경우 화두 참구 방법은 어떤가.
답변 = 당연히 일상 속에 참구할 수 있고, 조사선에서 간화선으로 변모가 바로 조사선이 일반인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선지식 없이도 일반인이 얼마든지 일상에서 할 수 있다.
질문(이지 수하라, 피츠버그대) = 염불이나 위빠사나는 궁극적으로 다 화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간화선의 화두가 지니는 특별한 기능은 무엇인가
답변 = 앞의 말은 잘못 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어떤 수행이 나중에 화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선명성 청정감을 속이 확 트이는 행복감을 느끼는 과정이 선정락이다. 기본적으로 희(熹)와 락(樂)이다. 화두 관법 염불을 통하든 누구나 선정에 들어서도 느낄 수 있는 선정을 얘기한 것이다.
질문(자퀴린 징징, 웨스트대학) = 간화선 수행이 목숨이 끊어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고 다음 생에 태어날 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답변 = 죽음의 도움이라면 간화선은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에 임박해 도움을 받으려면 간화선적 수행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 화두가 일념에 이르면, 까시나 화두 의정 등이 일념을 이루면 그 자체가 빛이 난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단한 충만감 희열 시원함 청정감을 갖게 된다. 대혜스님은 말하길 ‘화두 일념을 이루면, 설사 금생에서 이루지 못하면 내세에는 천만가지 깨닫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 했다.
추가 질문(징징) = 화두를 드는 구체적 방안은 어떤가. 하루하루 생활하며 그 화두를 들 수 있는가. 티베트에서는 꿈을 꾸면서 하는 방안도 있다.
답변 = 화두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골목길을 오가며 만나보는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여겨 볼 필요도 인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의식에 남는 것 없이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세월이 지나면 늘 마주치는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해 얼굴이 충분히 익숙해지면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버스를 타면 길을 묻기 시작하고, 어디에 사는가 무슨일을 하는가 등을 묻기 시작하면서 친구가 된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먼저 상대를 충분히 알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몰랐을 때 관심이 없다가 알게 되면 상대에 관심을 같게 된다. 관심을 같게 되면 자연히 알려고 한다.
화두도 꼭 같다. 화두는 구조상 경험한 그 길이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끊어진 그 길에 서기에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 진정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으로, 상당한 익숙함이 있고 가능한 일이다.
화두를 처음 들 때 그 내용이 생소하기에 그냥 지나친다. 지나치고 계속 지나치다 보면 언젠가 익숙함이 생기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 화두란 것은 문제인 셈이다, 문제에 친숙해지면 저절로 알려고 하는 힘이 생긴다. 그게 엷고 가볍게 의심이 일어나지만 문득 짙게 의심이 일어난다.
의정은 의심이 일어난 진의가 일어난다는 말로서 본격적인 공부의 시작이다. 진의가 일어나면, 왜 중대한 이제까지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그 이유를 묻게 된다.
의정에서 정은 감정이란 뜻이다. 의심이 감정이란 뜻이다. 화두가 생각으로하면 지속성이 없으나 감정으로 옮겨오면 지속성이 생긴다. 화두가 처음 할 때 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보아야 의심이 생긴다. 익숙해지면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없다 했을까?’, 또는 ‘없다고?’ 이렇게 해도 화두가 된다. 더 나아가 화두를 들지 않아도 마음속에 의정이 저절로 차오른다. 그 때 차오르는 의심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분명 감정이다. 잃어버렸던, 그 속에서 증오심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다. 알수 없다는 의심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감정은 한 번 형성이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의정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심을 일으키는 방법은 특별하지도 않고 계속 반복해서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이 의심이 사무쳐 올라오면 마치 집에 있다가 옛 친구가 사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렇게도 잡히지 않던 의심이 그렇게 애쓰다 보면 스스로 얼굴을 내민다.
질문(운성스님) = 의심이 차올랐다가 어느 순간에 식어지고 한다. 또한 청량해지면 그 이후의 수행은 어떤가.
답변 = 발심해서 의심을 지속성해 수행하면, 특별한 체험 이후는 처올랐던 흔적도 없어진다. 화두를 드는데 중간에 물잡이 시간이라는 어려운 고비가 있다. 진의가 일어나기 이전 단계이다. 그 때의 얘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진의가 일어났다가도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두 가지 방법, 곧 당근과 채찍이 있다.
당근은 수행의 계속 이유를 생각하는 것으로, 화두의 가능성에 믿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만으로도 부처님 해탈세계의 자재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경우 그 맛을 보고 마는 셈이지만, 겉을 맛본 것에 지나지 않아서 속도 있다. 깨달음의 열반세계 특징은 상락아정으로, 깨달음은 항상인 것이며 영원하고 지극한 행복 그 자체이다.
열반의 의미는 불이성의 성취에 있다. 불이성은 내와 남이 둘이 아님이며, 일체중생이 바로 자신이라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깨달음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그렇기에 깨달음은 충만한 사랑이 있다.
그 세계는 영원한 사랑이고 완전한 무한한 행복이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서광을 봤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제 무한한 행복과 절대적인 자유가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것이 자기자신에게 던지는 당근이다.
채찍은 어려움을 체감하고 느끼며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다. 현실생활 자체가 생로병사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는 안심할 수도 없고 유지할 수도 없다. 이렇게 자신에게 설명하면서 집착과 의지로부터 자신을 내미는 것이 자신을 위한 채찍이 된다.
자기에게 진정한 선지식은 자신뿐이다. 게을러지면 자기 선지식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경책하고 신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질문(보장스님) = 의심을 들어가다가 혼침과 망상(도고)이 계속 일어나는 상황에서 의단 해결 방안은 무엇인가.
답변 = 혼침과 망상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성불 못할 사람이 없다. 공부를 하면 중간에 안되는 경우에 대해 조사선에서 지적되고 있는 내용들이 있다. 이때 장애는 흔침과 망상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덜 장애가 되나 어느 정도 공부가 될 것 같으면 장애가 오기 시작한다.
이런 경우 터진 튜브에 바람 넣는 것처럼 채워도 끝이 없다. 맥이 빠지고 포기할 마음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몰잡이 시기라 해서 조사들이 많이 언급했다.
몽산스님 법어에 ‘공부가 잘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 상황에 도달해서, 백가지 재미가 없을 때가 잘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얘기했다. 공부가 안돼서 재미가 없다는 의미는 얘기에서 반전된다. 정호진보, 바로 지금 이때가 잘 나아간다. 점입정절, 점차 정절에 들어서가는 것이니까 결코 포기해서 안된다 등의 세 가지 등극시절이 있다.
이 얘기는 공부가 안되고 있을 때가 공부의 진행 상황이라는 의미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화두로 우리 일상을 제압하는 것과 같다. 공부 할 때 의지 때문에 우리 생각이 제약을 받는 것이다.
잠의 지배를 받으면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의식을 억압당해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잠들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화두를 의식이 억압되어서 특멸자라 하면 진열자가 일어나는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의식이 억압당하면 재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의식 자체가 있을 때 삶에서 재미와 가치를 느낀다. 의식이 억압 받아 몽롱해지고 재미없게 되면 혼침과 망상이 온다. 의식이 잠들려 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억압 당하기 시작하면 잠재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잠재 의식은 의식으로 하는 일이 질서없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뚜렷한 주체의식이 없는 통제불능이라서 재미없음을 느낀다.
조사는 정말 잘되고 있는 것이라 했다. 이 과정을 거쳐서 순수의식이 현존하는 상태로 바뀌기 때문이다. 바로 재미없을 때가 절정에 들어가기 전이라서 잘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거기서 포기하면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 방법으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포기하면 안된다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화두를 들면 뒤따라 의정이 솟아나야 한다. 대처방법은 화두 없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왜 무라 했는가,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그 곳을 지켜보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 할 때 쥐가 구멍으로 들어가면 고양이는 쥐 구멍을 지켜본다. 쥐가 보이지 않지만 빈 구멍 만을 주시하는 것은 구멍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쥐를 기다리는 것이다. 화두가 의심이 없는 빈 것, 맹한 그 빈 자리를 지켜보는 것이다. 결코 포기해서 안된다는 지시처이다.
축서사 대웅전에서 7월2일 국제학술대회 참가들이 무여스님과 대담하고 있다.
■ 대담-2
축서사 무여스님과의 대담은 대웅전에서 진행됐다. 무여스님은 대담자들에게 모두 발언을 먼저 말했다.
세계적 학자들이 간화선을 연구하고 수행까지 겸하니 금상첨화이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인생난득, 사람 몸 만나기도 어렵고 부처님 만나기도 어려운데, 참선문중에서 활구 참선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외국 학자들은 화두 참선의 연구도 어려울 텐데 간화선을 직접 체함하고 연구해서 반갑다. 간화선을 깊게 연구하고 간화선을 실참실구하고 화두참선을 해서 인생에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화두에서 느껴보길 바란다.
화두선은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간화선을 실참실구하는 간화선은 최상승 법이다 이 이상의 참선법이 없다는 점을 반드시 느껴서 간화선을 위해 올인해 달라. 자신을 위해서도 보람있는 것이다. 여러분이야 말로 인류 정신문화 창달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거기에 간화선이 있다.
인류는 요즘 어렵고 괴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인류의 고민과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야 할 방법으로 간화선이 출중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일주일 수행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제 체험 출발을 제대로 한 것이니 더 애쓰고 애써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는 것이 화두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화두선을 해보지 못하면 일언반구도 할 수 없다. 진정한 체험만이 화두선을 얘기할 수 있고 행복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주사위는 여러분에게 던져져 있다. 성공 여부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다. 간화선과의 좋은 인연을 진지하게 살아보면 좋은 인생이 열린다.
옛날 스님이 깨치고 4일을 춤 췄다. 얼마나 좋으면 4일간 춤을 추겠는가. 하는 사람에 따라 4일간도 30일간도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화두선이다.
질문(제니퍼 에이흐먼, 모레이비앤대) = 다른 스님들의 의심에서 의정, 의단으로 가는 과정과 비유를 들었다. 그 전개 과정에 대해 소상하게 알려 달라.
답변 = 간화선의 요체다.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의 의정을 일으켜 간절하게 성심성의로 일으켜 아는 것이다. 간절한 생각을 하며 지극하게 정성껏 하면 의정이 돈발한다.
화두에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을 갖으면 의정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고, 화두에 절실함이 없으며 미적지근한 참선을 하면, 의정도 끊어질듯 말듯 미적지근한 의정이 일어난다. 의정은 아주 간절하게 일으켜야 하고, 간절함은 아주 절실하게 안에서는 불가능하게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절실함이란 어른들이 말하길, 몇일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늘 엄마 품에 놀던 아이가 집나간 엄마를 생각하듯이, 그렇게 절실하게 절실함 마음으로 애쓰면 진의가 돈발한다.
진의가 돈발하면 용맹정진하는 것이 좋다. 용맹정진이란 화두가 한 순간도 놓치니 않고 애쓰고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진의가 돈발해서 용맹정진하면 화구는 점점 순숙이 돼서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여여하게 들리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래도 멈추지 말고 더 용맹정진을 해서 더 애쓰면 진정한 의심 덩어리가 된다. 그 의심 덩어리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 ‘타성일편'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멈추지 말고 지극하게 애쓰다 보면 시절인연이 돼서 타파하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두는 간절히 성심성의로 내려놓지 말고 참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의정이 일어날 때 놓치지 말고 고집스럽게 애쓰다 보면 참으로 큰 의심이 된다. 화두참구는 한결같은 마음과 지극한 마음으로 할 때 잘될 수 있다. 핵심적 질문이라서 고맙게 생각한다
축서사 대웅전에서 7월2일 국제학술대회 참가들이 무여스님과 대담하고 있다.
질문(페이잉 린, 옥스포드대) = 마곡사에서 7일간 정진하고 나서, 자꾸 더 하려고 하는 것이 병이기에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경험자들이 있다. 그들은 경험에도 집착하지 말라고하고 쉬라고하는데 쉬어지지 않는다.
답변 = 현대인들의 고민이다. 책과 지식에 익숙해져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식 알음알이로 살아오다가 이를 버리고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먹기 따라서 얼마든지 비울 수 있고 버릴 수 있다.
잡스러운 생각이 나자마자 그 나는 곳을 향해 얼른 화두를 챙겨라. 그러면 번뇌만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해져서 이제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화두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안되는 어려운 것도 화두를 진정으로 갖게 되면 잘 할 수 있다. 질문자는 만족하느냐.
질문(오렌 해너, 텔아비브대) = 간화선과 복(福)을 일으키는 것과 연관이 있느냐
답변 = 간화선에 복도 구조화돼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복혜를 너무 따지지 말라. 오직 화두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관건이다. 화두 중 부처님 지혜와 부처님 복이 다 있음을 믿고 오직 화두만 챙겨라.
그러나 화두 한다면서 제대로 안하고 복에 대해 관심을 갖으려면, 그럴수록 더 화두에 더 애쓰고 애쓰라는 말하고 싶다.
발심이 안 된 상태에서 복에 대해 운운하면 복도 갖추기 어렵고 화두도 몰입하기 어렵다. 화두선을 복혜가 충분히 구족된 것이 화두라고 생각하고 몰입해야 한다.
질문(로버트 버스웰, 불교학술원 명예원장) = 한 화두를 잡고 열심히 수행해 화두에 대해 깨쳐서 화두 의심이 해결된 상황이 되면, 화두에 대해 억지로 더 의심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화두를 잡고 더 수행을 해야 하는지.
답변 = 화두에서 의정이 안 생기는 경우, 화두를 타파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경우 자기자신을 점검하기 어렵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선지식에게 자기 병통을 점검 받아서 공부를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는 선지식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질문(제니퍼 에이흐먼, 모레이비앤대) = 선가에서 의심을 잡게 하는 것을 보면, 작은 의심은 작은 깨달음을, 큰 의심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대혜종고는 18번의 깨달음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깨달음이 순차적 점차적인가 아니면 한꺼번인가.
답변 = 확철대오는 오직 하나 뿐이다. 뒷산의 정상은 오직 하나 뿐, 여러 번 깨쳤다는 것은 8부 능선이나 9부 능선에서 깨친 것이고, 능선마다 올라가며 깨쳤다는 것은 깨지치 못한 것을 깨쳤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깨쳤다는 용어가 적당하지 않고 좀 맑아졌다는 용어가 적당하다. 깨침의 상봉은 하나뿐이다.
질문(마크 슈마허, 프리랜서) = 확철대오하고 나면 그 이후에도 좌선해야 하는가. 한다면 왜 하는가.
답변 = 학자들이 체험해야 할 대목이다. 경전에 부처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선정에 들었다. 깨쳐도 늘 선정에 들어 즐기고 닦아야 한다. 그것이 보람이고 행복이다. 선정은 깨친 이후에도 늘 즐기고 닦으면 좋은 것 그것이 선정이다.
질문(혜민스님, 햄프셔대) = 화두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나누면, 화두를 생각이 바로 일어나기 전 마음자리라는 경우와 화두를 방편으로 삼아 깨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다.
답변 = 둘 다 맞다. 화두는 옛 스님들 어른들의 말씀이다. 보통 말이 아니다. 화두는 아주 심오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나 분별심으로도 다룰 수 없다 오직 깨쳐서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참구해야 하고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질문(동섭스님) = 처음 화두를 들어봤다. 드는 방법에서 몸으로 느끼라는 것은 화두를 바라보는 것인가. 화두를 들었을 때 가슴이 뛰고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다른 수행자들은 답답함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정상이냐. 마음 속에 의심이 잘 안들은 것이냐.
답변 = 그것은 화두를 참구한 것이 아니라 의심을 하지 않고 화두에 정신을 집중시킨 것이다. 틀린 화두이다. 오직 의정을 일으켜라. 시작에 앞서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적 학자들이 화두 참구를 잘해서 화두를 위해 일생에 성공이 이뤄지고 당당하게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문경·봉화=김종찬 기자
축서사 대웅전 앞에서 대담을 끝내고 국제학술대회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한국 간화선, 외국 학자를 만나다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석종사 혜국스님 대담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스님과의 대담은 7월3일 석종사 천척루에서 진행됐다. 불학연구소장 인환스님은 “혜국스님은 선승으로 젊은 수행시절 목숨걸고 수행한 이력이 있다”며 “은사 일타스님의 선풍을 이어받아 목숨 걸고 선 수행하고 지식이나 입만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원력에 의지해서 성과를 이루고 나가서 간화선을 현실에 피고 있다”고 소개했다.
질문(벽공스님, 동국대) = 위빠사나하고 나서 간화선하면 어떨까. 젊은 출가승에게서 출가전 위빠사나 수행 이력이 있는 경우가 많다.
답변 = 긍정이나 부정이나 흑백으로 보면 안되다. 생각이전 본래 주인이 누구냐, 이에 맛들이면 간화선이 바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간화선하는 사람으로 위빠사나 사마타 등이 부처님 법에 어긋나지 않는 법이라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 다만 생각 이전의 나를 깨달아 가는 길이라면, 생각 이전의 부처님 법에서 봐야 한다.
질문(제니퍼 에이흐먼, 모레이비앤대) = 연비하신 것과 간화선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나.
답변 = 아무 관계없다. 낳아주신 아버님이 스님의 길을 반대해 포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직 나는 누구인가, 생각이전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의 유혹을 불 태운 것이다.
질문(아렉산더카트너, 불교학연구소 미국) = 수행자들이 수행하다보면 삼매체험과 화두가 타파돼 깨달음의 경험과의 차이는?
답변 = 삼매는 간화선과 말나오기 이전 바로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깨달음으로 같으나, 삼매는 고요하게 돼서 본인이 고요하다고 생각이 남아 있으면 간화선과 차이가 있다. 삼매만 남아있으면 간화선과 같다.
내 예를 들면 잠이 거칠게 되면 잠드는 걸 아나 고요함에 오는 잠은 본인이 모른다. 성철스님이 머리 위에 수건 물동이를 올리고 졸면 물이 쏟아지게 해서 수행을 했다.
이같이 잠을 이기기 위해 유서를 써놓고 태백산 도솔암 공부할 때에 초저녁에 잠깐 졸았는데 아침이었다. 저녁에 일어나는데 물이 쏟아졌다. 남이 삼매라 하나 이는 삼매가 아니다. 부처님의 참삼매는 내가 없어지고 나라고 하는 번뇌만상이 없어진 것이다. 일반인들의 독서삼매 염불삼매 등은 내가 남아 있으면서 삼매라서 삼매 연습이다.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스님.
질문(이지 수하라, 피츠버그대) = 스님같이 목숨 걸고 절박한 마음으로 간화선을 수행하는 것과 나같이 어떨 때는 절박감을 같다가 다시 등한히 하는 경우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답변 = 허공이 같으나 진면모는 다르다. 익힌 습관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익힌 습관의 차이는 근기와 인연지은 것에서 차이가 난다. 다만 지금 이 자리 방을 두고 방이라 할 것인가 허공이라 할 것인가. 이 허공은 문을 닫았던 열었던 우주의 허공 중에 일부이다.
우리 몸 안의 내 마음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 중의 일부분이다. 내 몸 안의 습관이지 우주에 있는 그 본질은 차이가 없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벽이 생기기 이전 자리’이다.
질문(김치온, 위덕대) = 화두선을 참구하는 과정을 보면 화두를 받고 의심을 일으키고 의정의 감정이 커져 의심덩어리가 계기를 만나서 타파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 화두 의정으로 들어가다가 폭발적인 의심이 생겨나는 것은 무엇인가.
답변 = 화두에 대한 이해가 문제된다. 화두 이뭣꼬는 내가 누구인가와 차이가 많다. 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있는 것으로 알고 나를 찾는 것이고, 간화선 이뭣꼬는 제법무아에서, 내가 없는 것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화두 속으로 이끌지 말고 들어가 보면 생각이전의 화두로서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간화선은 추상적이지 않다. 한 손바닥에 나는 소리와 답이 다 같다. 참삼매를 지나서 깨달으면 답이 같다. 진정성으로 누가 나를 끌고 다니고 있은가를 깨달으면 그게 간화선이다.
질문(무견스님) = 결제하지 않고 화두를 놓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
답변 = 그런 것 있으면 알려 달라. ‘물은 바도 없고 대답도 없고 벽도 없다’는 말을 세계화하는데, 통역을 잘못하면 간화선이 잘못 이해된다. ‘맑은 기운이 나온다’를 ‘가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화선은 간곡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간절한 질문이 없으면 공부가 적은 것이다.
[출처: 불교신문 | 2012-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