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세관(來世觀)이 종교를 창출했다.
종교의 각각 교주는 어떠한 과정을 통하던 따질 필요 없이 이미 다음에 올세상을 미리 가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 온 임사자(臨死者)들의 말을 종합하면 다음 세상은 매우 아름다웠다는 것을 한결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 던 방식을 고쳐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미 다음에 오는 세상을 알게 된 이상 현제 사는 세상은 좀더 보람있게 살고자하는 의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의 교주도 각각 다음에 올 세상을 이미 꽤뚫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말 했던가? "죽기로 싸우면 산다"고 하였으니,
단 한번의 죽음을 보배롭게 잘 이용하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깨달음이란 불교에서 강조하는 교훈이다
불교가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때 가장 먼저 구명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이 궁극적 경지를 뜻하는 용어가 한가지만이 아니다. 부처님 시대부터 사용한 말은 열반, 해탈등이 있다.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면 보다 다양한 용어가 등장한다.
화엄경의 경우 진리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마경은 진속불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강경은 공을 이해하는 반야지혜를 터득하라고 말한다.열반경은 불성이라고 말하고, 여래장경은 여래장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정토교에서는 왕생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세속적 가치가 과연 그럴만한 것인지를 되물음으로서 현실적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실천 목적이 있다.
즉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목적이었다.
다시 살아 나는 즉 부활(復活)에 대하여 살펴 본다
기독교에서는 인간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죽음의 현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활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파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피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죽음의 실재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도피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에 기초한 부활 신앙 가운데 죽음의 실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저항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우선하여 참여한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고대 근동의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이 로마 제국의 세력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제자의 배신으로 희생되었다. 제자들은 그의 체포와 죽음의 사건 가운데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새 역사를 향한 새로운 행진은 시작되었고, 오늘도 그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열린 무덤의 틈새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끝없는 흐름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바로 그것이 부활절이며, 바로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
태어나는 것은 내맘 대로 못할 지라도 죽는 다는것 만은 내 마음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번 태어난 내 목숨을 태어나게 해준 분들의 공덕을 생각해서라도 보배롭게 해야 할것이다.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활용하여 훌륭하게 죽어야 그 한번의 죽음만은 가치가 높다.
성인(聖人)이라하고 성자(聖者)라 하며 성웅(聖雄)이라 하는 분들에게 보내는 지극한 찬사는 모두 그분들의 성스러운 죽음의 가치를 아낌없이 받들어 드리는 분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2015. 8. 15 이관희
첫댓글 장문의 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