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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깨어 대망하는 신앙(2)/눅 17:26~30
♧세상의 법칙과 하나님의 법칙
*정류장의 법칙 -그냥 지나칠 때는 자주 오던 버스도 타려고만 하면 오래 기다려도 안 온다. 지금 이때가 천국 버스를 탈 때이다. 지나가면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오지 않는다.
*세차의 법칙 - 큰맘 먹고 세차하면 꼭 비가 온다. 큰맘 먹고 회개하면 주님은 더 큰 사랑의 단비를 부어 주신다.
*애프터서비스의 법칙 -고장 난 제품은 서비스 멘이 당도하면 정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찾아와 상한 우리의 마음은 고침을 받는다.
*시험의 법칙-공부를 안 하면 몰라서 틀리고, 어느 정도 하면 헷갈려서 틀린다. 차든지 덥든지 확실해야지 미지근한 믿음은 주님이 내 뱉으신다.
*택시의 법칙 - 급해서 택시를 기다리면 빈 택시는 반대편에만 나타난다. 기다리다 못해 건너가면 먼저 있던 쪽에 자주 온다.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른다. 늘 깨어 있으라. 더디 오신다 하여 반대편에 서서야 되겠는가?
*주유소의 법칙 - 운전하다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를 찾으면 꼭 반대쪽에서 나타난다. 주님을 향한 좁은 길은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의 반대쪽이다. 가는 길을 바꿔라.
*세일의 법칙 - 바겐세일에 가보면 꼭 사려는 물건은 세일 제외 품목이다. 주님은 세일하지 않으신다. 값으로 살수 없기에 값없이 거저 주신다. 이것이 은혜라는 선물이다.
*사고의 법칙 - 보험에 들면 사고가 안 난다. 사고 난 사람은 꼭 생명보험에 안 든 사람이다. 보험 들었어도 죽은 자는 생명보험 만져보지도 못하지만, 보험에 안 들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한도와 만기가 없고 혜택도 빵빵한 영원한 생명의 보험에 자동으로 가입 된다.
*화장실의 법칙 - 공중화장실에서 제일 짧은 줄에 서면 안에 있는 사람이 큰일을 보는지 꼭 오래 걸린다. 긴 줄이든 짧은 줄이든 기다리면 되지만 믿음의 줄의 선택은 영생과 영벌의 차이가 있다.
*인생살이의 법칙 - 사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사태를 간단하게 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사태가 복잡하든 안하든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간단하다
주님의 성탄을 앞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깨어 대망하는 신앙 (2)”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는 노아의 때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1)노아의 때는 죄가 관영했습니다. 노아는 인류에게 일어난 첫 번째 종말적인 사건, 즉 최초의 심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그 심판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하여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6, 7장의 기록을 보면, 정말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으며(7:5),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7:11,12)”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암이 온 몸에 퍼져 더 이상 손 쓸 수 없이 된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들과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성적인 타락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사회적 무질서가 극에 달했습니다. 마치 세상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외롭게 신앙을 지킨 사람은 겨우 노아와 그의 가족뿐 이었습니다.
2)육의 일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노아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지적하시면서 이상에서 말한 내용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 사람들이 단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본다면, 그들이 심판 받아 멸망당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신앙, 도덕, 윤리 등 모든 면에서의 타락을 노아 시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이유로 꼽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오히려 성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으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이상하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 때문에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삶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그 결과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3)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뿌리가 됩니다. 무엇보다 불신앙의 죄가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불신앙에서 모든 죄가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질 때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노아처럼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은혜 받을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3:31)”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실 뿐이었기에 그 화를 당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먹을 때마다, 그것으로 그 뜻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에도 이와 같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룩한 씨를 통해 영적인 세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자녀들을 통하여 자기 시대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생각과 목적 없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늙어가는 것,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말씀을 통해 경고하심을 받고 심판을 피하는 길, 사는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노아의 때에도 심판에 대해 숨기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물을 사용하시리라는 것, 살기 위해 방주를 짓고 피난하는 길이 있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단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백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노아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귀담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저 육의 일에만 치심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은 영혼을 돌보는 일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육체를 돌보는 일 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한 일이지만 그들은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오직 육의 일에만 몰두하게 된 것입니다.
2.롯의 때를 기억하고 거울삼아야 합니다.
1)롯의 때 역시 죄가 관영한 시대였습니다. 롯은 또 다른 종말, 심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시대는 어떤 때였을까요? 창세기 18, 19장은 소돔, 고모라 성의 사람들이 정말 ‘패괴하며 추악하고 음란했다’고 증거 합니다. 성과 폭력이 결합하여 온 성과 그 성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착증 환자들 같습니다. 성적 타락의 극치는 동성연애입니다. 창세기 19장 5절에 보면 천사가 사람으로 가장하여 소돔과 고모라 롯의 가정에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성적으로 범하게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롯은 차라리 자기 딸들을 내어줄지언정 내 집에 든 손님들을 내어줄 수 없다고 하자 그들은 롯의 말을 듣지 않고 집 문을 부수고 집으로 쳐들어 올 기세였습니다. 낮선 자들을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동성연애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동성연애라는 말은 영어로 소도미(Sodomy)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4,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성안에서 그들의 가족이나 또는 그 성 사람들 간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던 그들이 그 성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들자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면 짐작이 갑니다. 이러한 타락의 모습은 그 문화에서 성장한 롯의 딸들의 도덕과 윤리 의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소돔 성이 멸망한 후, 롯의 딸들이 아버지로 더불어 동침하려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 문제 앞에서 그들은 별로 주저하거나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동생과 의논해서 ‘언니 먼저 동생 다음’해서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역사상 음란하고 죄악 된 도시는 다 멸망당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런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물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롯이 탐욕의 눈으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선택하였던 소돔과 고모라는 넘치는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유황불로 멸망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노아 때와 같이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상 가장 죄악이 많았던 때가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노아의 때이고 다른 하나는 롯의 때입니다. 노아 때에는 홍수로 멸망당하였고, 롯의 때는 유황불로 멸망당하였습니다.
주 후 70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음란한 도시 폼페이가 화산재로 6m 가 덮여 모든 사람이 다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필리핀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된 도시가 필리핀에서는 가장 음란하고 죄악 된 도시였습니다.
2)그들의 관심 역시 육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롯의 시대, 소돔 성 사람들이 멸망당한 이유를 말씀하실 때 다만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서 보았듯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권장하고 적극 추진해야할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고팔고 심는 생산 행위, 집을 짓고 성을 건축하는 건설 행위들은 정말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속하는 것입니다.
롯의 시대와 당시 사람들이 노아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롯의 시대 소돔성 사람들은 집을 짓는 것, 즉 주거문화가 생겨서 한 곳에 정착해서 촌락을 이루고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농사를 하여 심고 거두었으며, 그렇게 생산된 것을 사고파는 상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였고, 전체적으로 부유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문화, 상류사회, 부유한 사회였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은 죄인들의 사회였고,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의인 10명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어쩌면 10명의 의인은 적은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소돔성에, 아니 롯 주변에 10명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롯이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한 ‘10명’에게 조차도 하나님과 말씀과 법도를 가르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롯은 가족들과 자녀들의 배우자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능한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롯 자신은 비록 구원받았을지언정, 그 역시도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이유와 목적을 외면했고,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그 법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일상적인 생활, 즉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거두고 집을 짓는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과 시간과 물질 등을 드려야 합니다. 롯 시대 사람들은 이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멸망당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헌신이 없다면, 그 삶이 바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패괴하고 흉악하여, 불순종하는 죄악보다 더 큰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극단적인 무신론과 불신앙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롯의 날들에는 진정한 구원의 신앙을 접하기가 어렵던 시절입니다. 성경도 없었고, 사역자는 물론이고 교회나 소책자들, 그리고 선교사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몇몇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한정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암과 무지, 미신, 그리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귀한 섭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노아를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로 그 시대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롯의 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의인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그들과 영적인 관계를 주선해 주셨으며 신령한 대제사장 멜기세덱까지 그들 곁에 두셨던 것입니다. 또한 롯을 소돔에 거하게 하신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선교적인 섭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믿을 만한 증거(행17:31)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행17:27)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롬1:19-20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한 말씀처럼 우리 안에 그리고 자연 만물을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창18:32) 그들은 롯이 전해 준 하나님의 메시지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직 육신의 향락을 추구하는데 온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3.끝으로 깨어 대망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1)성도는 깨어 롯의 처 같은 신앙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두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지만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성경에서 이보다 더 엄중한 경고는 아마 몇 안 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그 남편과 함께 아브라함으로부터 신앙의 감화를 받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의인"이었습니다(벧후 2:8). 소돔이 파괴되던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그 도시를 떠났는데, 남편의 뒤를 따라가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뒤돌아 도시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녀는 그만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여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지목하여 교회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이 말씀을 할 당시의 예수님의 의중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엄숙한 경고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혹은 사라나 한나, 또는 룻을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잃어버린바 된 한 영혼을 지목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르짖고 계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롯의 아내는 어떠한 신자의 모습입니까?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 같았으나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았으나 불순종하였습니다. 믿는 것 같았으나 불신하였습니다. 앞을 보는 것 같았으나 뒤를 보았습니다. 소알 사람 같았으나 소돔 사람이었습니다. 구원받는 것같이 보였으나 구원받지 못 하였습니다. 알쏭달쏭 한 신앙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에스겔 47;11에 보면 진펄과 갯벌이란 말이 나옵니다. 진펄과 갯벌은 땅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다도 아닙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고 물이 나가면 땅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의 말을 빌리면 유두고입니다. 창가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회에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 들어 온 것도 아닙니다. 알쏭달쏭한 롯의 아내와 같은 교인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는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부자 청년 한 명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주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재산이 많아 슬픈 빛을 띠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왔다가 구원받지 못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 지옥에서 통탄을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2)육적인 일에 빠져 무감각한 어리석은 신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나 롯의 때를 보면 육적인 일에 빠져 영적으로 너무 무지하고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극에는 반응이 있습니다. 자극이 없는 데 반응이 있으면 잘못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은 자극은 없는 데 반응이 있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데 웃습니다. 화나게 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화를 냅니다. 반대로 자극이 있는 데 반응이 없습니다. 무딘 사람입니다. 둔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함 같다”(마 11:17)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때와 롯의 때를 이렇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 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17;28-29) 그들은 육의 일만 쫒다가 망했습니다.
육의 일만 쫒는 자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오래 전에 강원도에 아들 삼 형제를 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너무 쪼들리던 중에 마침 사업차 와서 일하던 일본인이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양자로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마침 잘 되었다며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일본인은 그 아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알고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재산을 정리하여 돈만 큰 여행 가방에 하나 가득 넣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방으로 수배하여 드디어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찾아가 “하룻밤만 자고 가도 좋을 가요?”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트렁크를 아버지에게 맡기고 잠에 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하여 내일 아침 자초지종을 다 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노부부는 청년의 가방을 몰래 열어보고 기절할 뻔 하였습니다. 평생 만져 볼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순간 노인은 청년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씌워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밤새 돈만 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웃에 사는 영감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아들을 오래간 만에 만난 심정이 어떤가? 아들이라니? 무슨 말인가? 내가 어제 밤에 당신 아들을 당신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이웃 영감이 돌아가고 죽은 청년에게로 달려가 팔뚝을 보았습니다. 자기 아들은 점이 세 개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은 아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나 롯의 때에 살던 사람들은 육신의 일에 치심하다 망했습니다.
3)깨어 있는 노아와 아브라함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살아가는 이유, 이 세상에 목숨을 이어가고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나, 작게, 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마실 때에도 주님을 위해서 하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결혼과 가정생활도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고 육의 일에만 빠져 살았을 때 모든 사람들의 가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은혜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시대의 파수꾼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을 보류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없었습니다. 45명만 있으면? 40명만?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모두 여섯 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브라함의 기도덕분으로 롯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29) 누군가가 뒤에서 기도하여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귀중한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남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알고 기도하는 성도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18;27)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남을 위해 기도한 결과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티끌 같은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누가복음 17:26-30의 말씀을 중심으로 “깨어 대망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본문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와 롯의 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무신론과 불신앙의 시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 죄가 관영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같이 치우쳐 육에 일에만 몰두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탄식의 대상이 되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들의 역사를 거울삼아 *롯의 처 같은 회색 신앙으로 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들과 같이 육적인 일에 빠져 영적 무지와 무감각한 어리석은 신자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노아 같은 신앙으로, 아브라함 같은 신앙으로 나와 남을 살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임방환목사. 성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