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2. 실크로드의 불교 전래
인도 간다라 불교 여과없이 그대로 전해져
인도-중국간 불교사상 및 문화전파에는 ‘실크로드(서역)’라는 지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인도 및 간다라 지역의 발전된 불교모습이 여타의 여과과정 없이 직접 전래된 곳이 바로 실크로드인 것이다.
<호탄국과 함께 동 투르키스탄 최대의 오아시스 국가였던 쿠차. 무자트 강변 동서 2㎞에 걸쳐 236개나 개착된 키질석굴은 중국 신강지역 최고의 석굴로 평가된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기원전 3세기 무렵, 서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면 총령이서의 각 서역의 국가들이 불교를 신봉한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대략 기원전 2~1세기 무렵에 전파된 불교는 지역적으로 전래 방식이 각기 다르다.
실크로드 상에는 세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운데 두고 남.북을 대표하는 불교국가는 쿠차와 호탄이라 할 수 있다. 천산남로에 위치한 쿠차의 경우 대월지(大月支), 안식(安息), 강거(康居), 소륵(疏勒) 등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도 한가운데 위치함으로써, 중간에서 모든 사상.문화.문물 등을 취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였으므로 쿠차의 불교 전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대월지의 한 고승이 중국으로 불교전파를 위해 길을 나서면 반드시 쿠차를 거쳐야 한다는 기록을 봐도 유추할 수 있다. 천산남북로에는 소승불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계빈(賓, 현 카쉬미르)과 소륵(현 카쉬가르)에는 이미 소승불교가 유행을 하고 있었고, 특히 소륵불교는 천산남로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소륵에서는 카니슈카왕의 2대손으로 알려져 있는 신반(臣槃)이 소륵국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그가 북인도 방면에서 공부했던 소승불교를 소륵국에 전파시켰다. 동시에 그곳에는 왕실후원 하에서 지속적으로 소승불교를 발전시킨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반차월사(般遮越師)라는 대회를 5년에 한 번씩 개최하면서 주변국의 스님들을 초청하는 동시에, 대회를 통해 보시한 물건을 다시 사들임으로 하여 사원 내 경제를 발전시키는 이중보시를 행하였다. 이런 소륵의 불교는 8세기까지 지속되면서 천산남북로로 전파되었다.
소륵의 불교를 가장 빠르게 흡수한 곳은 바로 쿠차다. 쿠차에는 대략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쿠차불교의 시작은 아직 그 논의가 끝난 것은 아니나 〈양서(梁書)〉 ‘류운린전(劉云傳)’을 보면 대략의 시기를 추정해볼 수가 있다. 양나라 때 류운린이 형주(荊州)에서 고대 문물을 수집해 그 중 일부를 동궁 태자에게 바쳤는데, 그 중에는 외국 ‘조관(灌)’ 한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조관 위에 “원봉 2년 구자왕이 바침”이라 새겨져 있다고 적혀있다. 원봉 2년은 바로 한 무제 때의 연호로 기원전 109년이다. 그리고 이 조관이란 스님이 사용한 기구로 109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발전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타클라마칸사막 남북의 쿠차와 호탄 대표적 불교국가
쿠차 소승불교 발전…종교역할 넘어 정치관여 흔적도
호탄은 대승불교 중심지…성대한 행상의식 중국 전파
쿠차불교는 구마라집스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구마라집스님은 계빈과 소륵 등지에서 아함 및 아비담을 수학하고 다시 쿠차로 돌아와 쿠차불교 발전에 힘썼다. 쿠차에는 소승불교 외에도 계율과 관련된 불교사상이 현존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석승돈(釋僧純)이 진(晋) 간문제(簡文帝, 371~372) 시기에 〈비구니대계(比丘尼大戒)〉1권을 쿠차국에서 호본을 구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비구니대계이백육십사(比丘大戒二百六十事)〉2권을 서역 쿠차국에서 그 호본을 구해왔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진 효문제(373~396) 때에 역출된 〈비구니계본소출본말서(比丘尼戒本所出本末序)〉에는 쿠차국에 절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더불어 승돈(僧純)이 이 계본(戒本)을 서역의 쿠차국에서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쿠차에도 대승불교사상이 유입되면서 소승과 대승이 함께 공존하는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행상(行狀)’의 모습을 보면 소륵과 비슷한 형태를 띤다. 대성 문 바깥쪽에 90척, 그러니까 27m 높이의 불상이 세워졌고, 이 불상 앞에서 5년에 한 번씩 무차대회(無遮大會)가 열리는데, 군왕부터 서민까지 설법을 듣는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때 국왕과 대신이 국사를 논한 후, 고승을 찾아 물은 다음에 이를 선포한다고 하니 불교는 종교의 역할을 넘어서 정치적 사안까지도 관여를 했다고 하니 쿠차에서의 불교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일반거리에서도 사원과 탑이 수천 개씩 보인다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에서 왕실뿐만 아닌 일반 서민들 역시 봉불행위가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시기 석굴사원의 눈부신 발전도 볼 수가 있는데, 주요 사원지의 위치는 주로 강이 형성되어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장소를 불교사원에 내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석굴사원 내에는 본생도를 중심으로 해, 달, 바람, 불과 관련된 여러 신의 모습이 천장화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주로 파란색 계통의 안료를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조류(鳥類)다. 그 새들 가운데 가루다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인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또한 파란색 안료는 당시에도 구하기 힘든 값비싼 보석을 갈아 만든 것으로 하늘을 상징하기 위해 당시 많은 귀족들과 상인들이 이에 투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천장화와 더불어 정토경전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가 나타나고 있어 사막 지역에서의 척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뇌를 벽화를 통해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타클라마칸 사막 건너편에 자리 잡은 호탄 역시 그 불교전래 설화 내지는 주변상황에 비추어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가 전래되었다 할 수 있다. 호탄의 교역로 역할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구법승들이 주로 다니던 가교역할을 한 곳으로 불교전래 이전에는 교역로로써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이런 호탄에 불교가 전래된 방식은 바로 ‘민족이동’을 통해서였다고 보여진다. 서북인도 즉 지금의 탁실라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이 호탄지역으로 대이동을 하면서 불교가 함께 전래된 것으로, 이는 호탄의 건국설화 및 불교전래 설화를 통해서나 혹은 서북인도에서 주로 사용했던 카로슈티문자가 호탄에서 발견되는 점, 탁실라와 호탄간 민족학적인 연구를 통해보면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본다. 때문에 사막남도로의 불교 전래는 사상뿐만 아니라 사상가와 문화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승전(高僧傳)〉 〈고금역경도기(古今譯經圖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등의 문헌을 통해 보면, 호탄은 그야말로 대승불교의 중심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호탄에서 구할 수 있었던 호본으로는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열반경(涅槃經)〉 외에도 대부분 많은 대승경전들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저거경성(沮渠京聲)은 범본을 가지고 북량(北)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북위(北魏)가 북량을 멸망시킨 후에는 송나라에 도착해 양주 죽원사(楊都 竹園寺)와 종산 정림상사(種山 定林上寺)에서 경율을 한역하게 되고 이 대부분의 경전은 호탄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가운데에는 대승경율의 방등부, 열반부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법헌(法獻)은 송 원미(宋 元微) 3년(473) 본래 총령을 넘을 계획이었으나 도로가 단절되어 호탄으로 돌아와 〈묘법화경제바달다품(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과 〈관세음참회제죄경주경(觀世音懺悔除罪經)〉1권의 호본 각 1권씩을 얻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어 방등, 열반, 화엄, 법화 등 대승교학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호탄 역시 소륵, 쿠차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행상을 열었는데, 〈법현전(法顯傳)〉에서는 그 모습을 “불상을 그 수레 안에 세워 두 보살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고 여러 천신들을 만들어 모시게 했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조각해 공중에 매달았다. 불상의 수레가 성문 100보 전에 이르자 왕은 왕관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서 손에 꽃과 향을 들고 맨발로 성문으로부터 걸어 나와 불상을 맞이하여 이마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절하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살랐다. 불상이 성으로 들어올 때 문루 위에 있던 왕비와 채녀들이 꽃을 뿌리자 그 꽃들은 나부끼며 밑으로 떨어졌다.
이같이 장엄하게 꾸며진 수레들은 수레마다 각기 달랐는데, 한 승가람이 하루씩 행상을 했으므로 백월 1일에 시작해 14일에 행상을 마쳤고, 행상을 마치면 왕과 왕비는 궁으로 돌아갔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대한 행상의식은 이후 대승경전과 함께 중국으로 전해져 중원에서도 역시 행상을 치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크로드 상의 각 국가들에는 불교가 이른 시기에 전파되어 발전되는데 그 과정이나 전파루트에 따라 각기 다른 불교사상이 전파되기도 한다. 그리고 실크로드 불교는 중국.한국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더욱 많은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실크로드 각국의 불교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이를 동전(東轉)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지속되다가 8세기 이후부터는 이슬람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불교의 맥은 거의 끊어지게 된다.
인도, 중국, 한국과는 달리 실크로드에서의 불교는 척박함과 빈곤함 속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가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 그리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동쪽으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 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순간, 지난 쿠차여행이 떠오른다. 시장거리에서 만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사람들. 그들은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집스님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그 옛날 쿠차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님이라고 얼굴에 빛을 내며 말하고 있었다.
한지연/ 한국불교연구원 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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