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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성도의 진 (민 2:1-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세월을 텐트를 쳤습니다. 원래는 열하루길이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인데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40년을 광야에서 헤메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텐트에 거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텐트에 거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신 텐트를 가리켜서 성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회막(會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거하는 텐트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장막(帳幕)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성막, 백성들이 거하는 곳은 장막이라고 부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도 텐트에 거하셨고 백성들도 텐트에 살았습니다. 그 텐트가 모여 있던 곳은 영어로는 캠프(Camp)라고 합니다. 캠프는 우리말로 ‘진’ 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장막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 ‘진’이 되는 것입니다.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압왕 발락에게 뇌물을 받은 거짓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장막이 내려다보이는 브올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장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주하려고 올라간 발람은 세 번씩이나 도리어 축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민수기 24장 5-6절을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의 장막을 이렇게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이스라엘 백성의 텐트는 거짓 선지자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광야의 장막은 혹은 성막은 우리 성도의 인생의 영적 교훈들은 구석구석에 담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들을 마치 그림처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광야의 장막에 대해서 생각
할 때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장막과 진의 영적 의미
그러면 장막의 의미는 무엇이고 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막집은 우리의 약한 육신입니다.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화려한 장소가 아닙니다. 텐트가 화려해 봤자 얼마나 화려하겠습니까? 텐트 세울 때 대리석 기둥 쓰는 것 보셨습니까? 텐트에 샹들리에 걸어놓은 것 보셨습니까? 화려한 색깔로 페인트칠한 텐트 보셨습니까? 장막은 잠시 머무는 곳이요, 장막은 약한 거주지요, 때가 되면 무너지는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바울은 우리 연약한 육신을 장막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이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흙입니다. 우리 육신을 흙에서 왔기 때문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유능한 의사도 우리의 흙의 생명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철학도, 어떤 예술도, 어떤 정치도 우리 육신의 생명을 무
한정 연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장막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장막은 때가되면 이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장막집은 10년, 길면 20년 혹은 30년 안에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막집은 결국 무너질 날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다니엘서 12장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궁히 부끄러운 사망의 부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인가?”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단 한 가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사람이 패하느냐 흥하느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국 사망의 부활을 하게 되고 영영한 고통을 받게 될 그런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생명의 부활을 해서 주님이 다시오실 그날에 주님과 영원토록 동행하며 살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예수 믿지 않으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에 어느 집으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생명의 부활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때에 영원한 집,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으로 이사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막이 우리 육신이라고 할 때 진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즉, 성도들이 모인 곳을 상징합니다. 진은 영어로 ‘Camp’입니다. 캠프는 장막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홀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홀로 독불장군이 되어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텐트를 칠 때 혼자 치는 사람 보셨습니까? 이쪽에서 지지대를 박으면 저쪽에서는 잡아주어야 합니다. 텐트를 치는 것도 협력을 해야 하고 거두는 것도 협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누구도 캠프를 떠나서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애쓸 때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다 보면 싸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야 서로 격려가 있고, 위로가 있고, 교제가 있고, 사랑도 있지 않겠습니까? 싸움도 있지만 더 많은 격려가 있고, 미움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랑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미운정이 있으면 고운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장막집이 무너질 날도 가까워올수록 더욱 잘 모이고 더욱 사랑과 선행을 하는 교회가 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헌금을 백억원 이백억원 내서 교회를 짓는다고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는 아닙니다. 여러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할 때 비로소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특정한 사람 혼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서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이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요, 진에는 교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휴식이 있고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2. 진의 질서
진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진에는 꼭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질서가 없으면 그것은 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브올산 꼭대기에 선 발람이 이스라엘 장막에 찬사를 보낸 이유는 그 장막이 아름다운 질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40절에도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은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질서가 있었고 행진할 때도 질서가 있었습니다. 진을 친 진영배치도를 보
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진의 가운데에는 반드시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면으로 세 개의 지파씩 나누어서 진을 쳤습니다. 동쪽에는 유다지파가 깃발을 휘날립니다. 유다지파의 깃발이 동쪽에 있는 세 지파의 대표깃발입니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블론 지파가 진을 폈습니다. 남쪽은 르우벤 지파의 깃발이 대표깃발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갓의 세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의 세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북쪽에는 단 지파가 대표이고 납달리, 아셀지파가 함께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열두 개 지파가 네 개의 방향으로 진을 칠 때에는 반드시 성막을 중심으로 하되 성막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회막 주위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지파가 진을 칩니다. 회막의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칩니다. 아론의 아들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네 명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론의 자식인 엘르아살, 이다말의 자손이 그곳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의 아들이 세 명이 있었습니다. 고핫, 게르손, 므라리입니다. 고핫은 남쪽에 진을 치고 게르손은 서쪽에 진을 치고 므라리는 북쪽에 진을 치게 됩니다. 그러면 고핫, 게르손, 므라리는 무슨 일을 할까요? 성막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고핫 자손은 주로 성물을 돌보았습니다. 게르손과 므라리는 성막의 휘장과 말뚝을 관리했습니다. 이렇게 성막 주위에 레위 지파들이 진을 치게 되고 좀 떨어져서 열두지파가 네 개의 방향으로 진을 치게 됩니다.
(첨부 '진행의 순서와 방법' 그림 참조)
이들은 행군할 때에도 고도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맨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지고 행군을 합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유다, 잇사갈, 스블론이 1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동남서북의 순서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 게르손과 므라리가 성막 지붕이나 기둥, 말뚝, 휘장을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여섯 개의 수레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에 진을 치던 르우벤 시므온 갓이 2진으로 가고, 제일 가운데 고핫 자손들이 떡상, 분향단을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그 다음에 서쪽에 있던 지파가 3진, 그리고 북쪽에 있는 지파가 4진으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을 칠 때에도 질서가 있었고 행진할 때에도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우리 성도의 마음에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화장품을 ‘Cosmetics’라고 합니다. 화장품은 영어의 ‘cosmos’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코스모스’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질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도 무질서하고 머리도 무질서하기 때문에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화장품입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에도 화장을 좀 해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이 복잡하고 자기 생각조차도 서로 모순이 되고 이런 동기, 저런 동기가 얽혀서 복잡하게 되면 결국 인격의 어려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질서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지 아니하시는 마음은 무질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할 때 무슨 질서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게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진영을 갖추고 행진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정욕, 의심, 탐심, 교만을 다 지워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의 마음은 두 가지로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또 “이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우리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생각이든, 무슨 언행심사이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정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 정리된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생각이 단정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에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직분 맡은 사람은 자기 직분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높은 직급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교회의 직분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회의 직분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지만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영구히 존중하는 직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각각 맡은 바 자리에서 자기 직분을 수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핫 자손이라면 성물을 어깨에 메고 가는 직분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게르손 자손, 혹은 므라리 자손이다’ 하면‘ 성막의 기구들을 어떻게 하면 수레에 잘 실어서 잘 운반할 것인가, 내가 처할 위치는 어디인가를 생각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자기 위치가 있고 할 일이 다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각각의 사명을 다 할 때에 교회는 질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질서는 혼돈이요 혼돈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질서는 하나님이요 질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혼돈이 물러가고 질서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질서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들대로, 권사님들은 권사님들대로 집사님들은 집사님들대로 각각 맡은 바 직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역사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모세가 사명을 다 마치면 여호수아가 옵니다. 여호수아가 사명을 다 마치면 사사시대가 오고, 사사시대가 지나가면 왕들이 오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은 순서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있어야 아버지가 있는 것이고, 아버지가 있으면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나온 뒤에는 손자가 나오고 그 뒤에는 증손자, 고손자가 나옵니다.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고손자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지라도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넘어가서 여호수아가 일할 때 옆에서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수렴청정하게 되면 여호수아가 어떻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에는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서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요 무질서는 혼돈입니다. 질서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불평과 불만과 반역과 후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에도 질서를 잡고, 교회에도 질서를 잡고, 역사에도 질서를 잡아서 무슨 일에든지 무질서를 배척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진의 위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진은 반드시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쳐야 합니다. 회막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을 회막쪽으로 향하게 해서 장막을 쳤습니다. 문을 나올 때마다 성막이 보이고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성막의 구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태양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돌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진영은 회막을 중심으로 배치되도록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영안이 열려서 여러분들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아마 똑같은 얼굴이 하나씩 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중심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자아가 중심에 있는 사람은 모든 판단의 중심이 ‘나’입니다. “이것을 하면 내가 높아지는 것이냐?”, “이것이 나의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중심은 ‘나’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가정일이든 사업이든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을 하나님을 향해서 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일을 할 때에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성경 좀 읽어서 삶의 처세를 배우는 곳입니까? 기독교가 지식을 전달해주는 곳입니까? 기독교의 핵심은 살아계신 성령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순간순간 하나님과 체험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마음 중심에 자아를 버리시고 하나님을 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진의 기호
각 진에는 기호가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기호는 영어로 ‘standard’, ‘ensign’, ‘banner’ 라고도 합니다. 2절 말씀은 각 종족의 깃발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진을 하라는 것입니다. 동쪽에는 유다지파의 깃발이 휘날리고,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의 깃발이 휘날리고,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깃발이 휘날리고 북쪽에는 단 지파의 깃발이 휘날리는 형태의 진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지파의 깃발은 사자모양이요, 르우벤 지파의 깃발은 사람머리요, 에브라임 지파의 깃발은 사람의 머리요, 단지파의 깃발은 독수리 모양이었습니다. 사자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는 인자로서 오실 예수님의 상징이요, 누가복음이 인자로서 오신 예수님(Son of man)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황소는 종으로 오실 예수님의 상징이요 마가복음이 그것을 묘사합니다. 독수리는 신성(Divinity)을 말하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막을 중심으로 한 네 개의 깃발은 예수님의 다양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깃발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나의 깃발로 해서 살아야 합니다.
깃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깃발의 밑에는 안전함이 있습니다. 깃발 밑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승리가 있게 됩니다. ‘safety’, ‘protection’, ‘victory’ 이 세 가지가 깃발의 상징인 것입니다. 아가서 2장 4절 말씀에 보니까 “그 사랑이 내 위의 기로다.” 내 위에 있는 깃발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들어 주어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5절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고 했습니다. “The Lord is my banner”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승리한 후에 ‘여호와 닛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깃발을 휘날리며 미혹하는 인간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인간들은 지금도 온갖 거짓 깃발을 휘날리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따를 깃발은 여호와 닛시의 깃발입니다. 하나님의 깃발, 예수님의 깃발, 성령님의 깃발을 따라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지해도 그 깃발을 따라서 하시고 행군을 해도 그 깃발을 따라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깃발을 잠시 떠난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는 깃발을 잠시 떠났을 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는 악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때 얼마나 가슴을 치고 한숨을 쉬었겠습니까? ‘아 내가 그때 왜 예수님의 깃발을 떠났던고’ 그는 평생에 그 회한을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깃발을 떠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우리는 언제나 교회의 진영 안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안전과 보호와 승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싫다고 세상으로 나가보십시오. 하나님이 싫다고 마귀에게 가보십시오. 좋은 것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조금의 선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비록 싸우지만 선이 있습니다. 싸우면서도 또 남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압니다. 싸우면서 복음을 위해서 힘을 합칠 줄 아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병이 있고, 마귀가 있고, 타락이 있고, 부패가 있고,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진영 안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바울의 탄식이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세상으로 갔고” 데마는 성도의 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성경에 데마의 이름이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따릅시다. 사랑하는 성도의 진영에 머물러서 언제나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삽시다. 질서를 따르고 무질서를 배척하며 살아 봅시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