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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이복래 시집>
시이소의 중심
시문학사
* 이복래 (李福來)
경남 양산시 통도사입구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수료
인천경제단체 임원으로 정년퇴임
월간<시문학> 신인 우수작품상으로 등단
월간<모던포엠>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한국좋은시낭송문학회 감사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인천문인협회, 내항문학회 회원
시집 : <에필로그 독백> (산맥)
<시이소의 중심> (시문학사) 출간
E-mail / lbr4824@hanmail.net
손전화 / 010-3758-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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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시인의 말 ㅁ
시를 생각하다가
번번이 잠을 놓쳤다.
시의 맛은 쓰거나 달았다.
여름을 지나
훌쩍 가을이다.
이제
매미 울음을 베고
단잠에 젖을 수 있겠다.
2016“ 가을
이복래
* 이복래 시집 『시이소의 중심』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직각속의 카페
- 에어포칼립스
- 서울의 연가
- 꿈속의 유영
- 마블 캐릭터
- 시이소의 중심
- 고독(孤獨)
- 직각속의 카페
- 노숙자
- 그림자
- 소라의 집
- 솟대
- 봄을 부르는 방법
- 죽부인의 외출
제2부 옐로카드
- 4월
- 네 번째 결투
- 또 한 해를 구걸하다
- 옐로카드
- 4월의 풀밭
- 착각의 다리
- 오래된 트라우마
- 치유
- 자화상(自畵像)
- 5월의 산책
제3부 봄날은 간다
- 봄의 독백
- 어느 봄날
- 여름의 꼬리
- 만화(滿花)
- 춘설(春雪)
- 가을비
- 단풍이 태우다
- 눈 오는 날
- 밤눈(夜雪)
- 보름달
- 안개
- 그늘
-봄날은 간다
제4부 발목에 걸리는 바람
- 유빙 시대
- 도시의 미아들
- 발목에 걸리는 바람
- 서시(序詩)
- 인연
- 둥근 구름
- 우산의 공식
- 노인의 웃음
- 밤눈.........................<삭제> 3부에 있음
- 둥지를 떠났다
- 황혼의 엘레지
- 물
- 감정(感情)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제5부 천왕봉을 해독하다
- 소나무의 꿈
- 민들레의 기별
- 천왕봉을 해독하다
- 소울 메이트
- 연리지(連理枝)
- 애증의 덫
- 길상사에서
- 벌판의 힘
- 염전(鹽田)
- 하늘공원 가는 길
- 안압지의 밤
- 갯벌
- 승봉도
- 월미도
제6부 살구나무처럼
- 감나무
- 우산
- 풍경에 취하다
- 식탁의 풍경
- 살구나무처럼
- 귀여운 흔적
- 안개비
- 돌부처
- 외로운 옹달샘
- 아버지의 안경
- 해설
제1부 직각속의 카페
에어포캅리스 *
물이 썩어가는 달 항아리가
검은 공포로 둥둥 떠다닌다
공중 가득한 중금속
공장지대를 건너온 사막의 바람은
도시의 하늘에 두꺼운 커튼을 친다
대홍수와 빈번한 쓰나미와 지진들
지하수는 점차 고갈되어 목말라 가는데
아무도 지구촌의 미래를 점칠 수 없다
만삭이 된 어미 소는 알을 낳고
까치는 알이 아닌 새끼를 낳는다
계절을 잃은 봄꽃들은 가을과 겨울에도 피어나고
파도가 사라진 바다는 침묵한다
맹독을 품은 독사가
우리들의 목에 이빨을 박는데
대책을 잃어버린 미래는 캄캄한 밤중이다
검은 불안의 싹은 점점 커 가는데
아직은 꽃들이 화단에서 화들짝 웃고 있다
*공기(Air)와 종말(Apocalypse)의 합성어
서울의 연가
파란 하늘 아래 자라난 마천루
그곳에서 오손 도손 살아가는 나무들
봄이 오면 그들도 한없이 설레고 있다
유리 옷 입은 빌딩과 회색빌딩 사이로
외로운 바람하나 맴돌다가
무성한 파란 이파리 나무속으로 스며든다
나무와 바람은 흔들리며, 함께, 하지만
도심의 빌딩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번쩍이는 유리 안에서 많은 눈들 지켜보고 있어
너희들을,
나무는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는데
입 다문 채
냉정히 돌아서는 바람을 지켜보다가
소리치고 싶었다, 붙들고 싶었다
머물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은삭막한
서울의 빌딩 숲 사이로휘파람 소리 내며
쓸쓸히 돌아서 간다
마블 케릭터
우주는 시작과 끝이 미로 속에 빠져있다
꿈돌이는 기억의 상자에 갇혔고
호돌이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자는 여전히 종이 왕관을 쓴 채 밀림을 배회하고 있다
루시가 금성으로 반짝이는 하늘에서
배트맨의 승패를 저울질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펜을 잡은 손끝에서 좌우 된다
꿈을 선사하는 미키마우스는
어디서 잠자고 있는 걸까
골룸과 벨리알이 악의 축으로 살아있는 지구에서
이태석 캐릭터는 언제쯤 볼 수 있을는지
먹구름 망토를 드리운 세상은 하늘이 보이지 않고
허상의 물방울들만 아네모네처럼 둥둥 떠다닌다
유토피아 마블에서 날아온 나비가
여자의 손톱 위에서 춤을 춘다
꽃들이 마블 풍선을 타고 가는 신세계
플레어, 푸시케, 미라쥬, 크로이의 이름들을 불러본다
무쇠팔 무쇠 다리 기지개를 켜는
새로운 출현을 기다리며
오늘밤도 나는 마블캐릭터를 그린다
꿈속의 유영
무거운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의 하얀 물보라는
한 조각 의식이 사라진 바람의 중심일까
물고기가 물 위로 날아가고
이상한 꿈속에서 낚시 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타지 같은 거
낯익은 얼굴들이 거꾸로 서고
굳게 닫힌 철문에 부딪혀 피가 흐르고
짓눌린 영혼의 공허한 울림 같는 거
일렁이는 무의식의 푸른 바다를
맘껏 헤엄쳐 갈 수만 있다면
곰삭은 세월에 작은 깃털이 되어도
나는 상관이 없다
시이소의 중심
여기가 뛰어오르면 저기는 추락하고
중심축에서 반복되는 놀이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는 작은 깃털이다
오늘도 공중으로 가는 길 열려있지만
하늘에서 음악이 떨어지고 심장도 떨어지는데
목말라 허공에 걸려버린 먼지 한 톨
목적지는 하얀 지붕위에 걸린 낮별 하나
하늘에서 내려온 까지 한 마리가
낯익은 얼굴들과 거꾸로 선다
떨어지는 나무열매는 관심조차 없고
왔던 길 향해 구멍 난 신발을 움켜쥐고
발바닥이 땅을 치며 뛰어 오른다
종일 달렸지만 성과는 없이
출발지로 유턴하는 즐거운 놀이
작은 바늘이 6에 멈추면 돌아갈 일만 남았다
시간속의 주인공은 스프링이 되고
이상한 전쟁에서 두 눈을 뜨니
소화 못한 시소의 중심은 허공에 걸린다
고독(孤獨)
현재와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외부와 단절된 싸움에서
외로움에게 나는
늘 패자였다
무인도의 쪽빛 섬 하나 골라
자신을 가둔지 오래
우울과 불면증의 무게에
강을 건너간 낮달은
언제나 외톨박이다
반 고흐처럼
차라리 벙어리가 되고 싶어
세상을 향한 귀를 자른다
파도처럼 넘치는 쓸쓸함 마저
직각속의 카페
골목엔 양지와 엄지의 각들이 날을 세운다
보도 불럭위로 햇살이 넘치는 한낮에도
벽과 벽 사이 젖은 동그라미가 피어난다
네펜데스가 카운터에서 웃음을 흘린다
만남과 이별을 부르는 커피 향
에스프레스가 도시의 뼈와 살을 녹인다
찬물에 내려지는 터치 커피의 시간들이
어두워진다
먼 곳에서 가깝게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낯익은 얼굴들이 거꾸로 서고
지도에도 없는 도시위에 쇼팽의 야상곡이 흐른다
그늘에 젖어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하루
각설탕이 녹은 동그라미를 마신다
노숙자
봄볕으로 목욕한 가로수 아래
두 사람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 기울인다
오래토록 물 구경 못한 얼굴은
까맣게 덫 칠한 십구공탄이다
술에 찌던 두 사람은
아무런 고통은 없어 보이는데
바라보는 시선들이 왜 그리 어두울가
지난밤 야시장이 섰던 그 자리에는
들 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대고
주인 없는 길에는 생선비린내
젖은 살 냄새가 아침 햇살에 비틀 거린다
길이 집이고 방이고 부엌인 사람들
이제 곧 두꺼운 어둠이 벽과 지붕을 올릴 것이다
도시의 하루는 공평하게 저물어 가고
그림자
휴전이 되고
피난민들은 고향 찾아 하나둘 돌아가고 있을
어느 해 겨울
우린 강가에서 만났다
오늘이 끝이라는 그녀의 말,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고
얼어붙은 강 위를 뒤도 보지 않은 채
마냥 걸었다
남과 북,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그림자를 흔들고 있었다
소라의 집
조각공원의 작품들이
작가의 이름을 하나씩 걸고 있다
나의 눈길을 끄는 작품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임일택 조각가의 바닷가의 아이들
높이가 내 키와 비슷한데
소라의 입안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바다를 부르고 있다
커졌다 작아지는 바다의 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 같은 것
은은한 바다소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묻혀버린다
소라가 빠져나간 빈집에는
이제 아이들 세 명이 살고 있다
파도치는 바다는 멀지만
솟대
긴 장대의 정상에 앉아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멀리 바라보는 새 한 마리
마음가는대로
훨훨 날으고 싶은데
실컷 울어보지도 못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움직임을 망각한 채
지나가는 새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지
그 마을의 파수꾼처럼
그 마을의 수호신처럼
그 자리에 높이 앉은 새 한 마리
봄을 부르는 방법
혀가 짧은 말
그래서 놓쳐버리기 쉬운 말
벚꽃처럼 화사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던가
청춘은 봄이라는 말,
그래서 짧다는 말
바겐세일 같은 시간의 속도에
먼 길을 돌기도 했는데
청춘은
무릎을 드러낸 청바지 같은 말
그 무릎이 삐걱거리는 것은
무언가를 놓쳐버린 이유일까
실금이 가고
이가 빠진 찻잔처럼
거울 속에 굵은 주름살 노인이 웃고 있다
죽부인의 외출
골목길, 죽부인이 누워있다
지문도 체온도 모두 지우고
누구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무더운 밤을 껴안고 밤새 피를 식히더니
열대야 같은 마음 언제 싸늘해졌을까
귀뚜라미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밤새 울어대고
해바라기의 열정도 시들어 가는데,
목이 부러진 선풍기
찢어진 부채도 찬밥처럼 버려졌다
공원 느티나무 아래
울음이 말라붙은 매미 한 마리
여름의 품 밖으로 밀려나 미라가 되었다
민망한 골목길
알몸의 죽부인이 돌아눕는다
제2부 옐로카드
4월
풀밭에 누워
공중 가득 떠올렸다
풀밭을
내 몸에 흐르는 피
풀잎의 노을처럼 묻어나던 시간들
눕고 일어서는 반복의 나날을
어김없이 지켜가듯
마른 풀들이 일어섰다
다시 어둠의 계단을 지나
들판에서
풀이 자란다
피처럼
네 번째 결투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묻지 마라
계절에 연연하지 않고
그렇게 봄여름, 가을로 살아왔다
또다시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면
내놓을 아무런 알리바이가 없다
한 묶음 두 묶음 만든 조서들
다듬어 그럴듯한 명목을 만들고 싶은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세 번의 옐로카드를 넘어
이제 네 번의 고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눈만 감으면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가신 분 얼굴만 보이고
눈을 뜨면 몸이 불길한 신호를 보내온다
파우스트와 발렌틴의 네 번째 결투가
운명인 것처럼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피할 수도 없는 결투가 되겠지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겠다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지만
옐로카드
푸른 잔디 위로
하얀 공하나 바람을 가른다
봄의 가슴을 가르는 속도, 계절의 속살이 찢어진다
길을 잃었다
던져진 카드 한 장
어떤 이에게는 희망은 무기력이다
이 어둠의 겹, 무엇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가
홀을 향해 명중해야하는 생,
장애물이 곳곳이다
벼락같은 최후통첩
빨간 불이 몸속에 켜지고
일방적인 경고를 보낸다
이미 전세는 기울고,
창문 너머
천변에 봄물이 번지고 있다
혈관처럼 뻗어가는 눈부신 출산에
눈이 먼 계절
슬며시 커튼을 내린다
마지막이라는 말,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시작을 신고 걷는다
돌아보는 얼굴이 노랗다
또 한 해를 구걸하다
한 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시 눈을 감고
갈 길을 묻는 근심어린 얼굴
뼈가 단단한 볕이 철없이 따스하다
내 몸을 돌아가는 푸른 피
지옥의 문전 같은 검사의 시간
또 한 해 목숨을 구걸 받았다
해마다 4월이 오면
힘겨운 고개를 넘는다
어둠의 계단을 지나
추운 시간을 넘어온 녹색 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절을 넘어가고
따뜻한 사람의 입김 같은
꽃소식이 등 뒤에서 들려온다
목련이 안부를 물으려고
첫 봉오리를 펼친다
4월의 풀밭
녹색의 풀밭에 누워
먼지 같은 생을 공중 가득 떠올렸다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
풀잎의 비애가 노을처럼 묻어나던 시간들
멀쩡한 정신 흐려놓고
입으로, 대장으로 카메라와 칼, 고리 끈을 넣고
주인의 허가 없이 생긴 혹들 사정없이 도려냈다
바다로 흘러든 내 초록의 시간들이 잘려나간다
죽음의 바닥까지 나를 던졌다가
벽을 짚고 마른 풀들이 몸 비비며 일어섰다
다시 봄의 들판에서
어둠의 계단을 지나 풀이 자란다
저만치 4월이 앞서 간다
착각의 다리
처음 만난 그녀가 운명인줄 알았다
무슨 일이든 그녀가 옳았다
그녀의 생각에 박수를 보냈다
탈을 쓰고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질 않았다
콩깍지가 씌어
끝내 착각의 다리를 넘고 말았다
환상이 벗겨지고 두 눈이 보이자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두 번째 운명을 만났다
퇴근 후 다음날 출근시간은 너무 길었다
끝내는 직장을 바꾸며
두 번째의 다리를 건너갔다
이번만은
콩깍지가 영원히 벗겨 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래된 트라우마
끝도 없이 추락하던 악몽
사랑이라는 함정에 빠진 적 있었다
어둡고 긴 터널
차가운 빈방에 홀로 갇혀
불같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어느 봄날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겨울이 지나도록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멍은 크고 무거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려놓지 못하고 묶여있었다
새벽에 홀로 깨어
왼쪽 가슴을 만지작거리면
오래된 눈물이 촉촉히 묻어나온다
자화상(自畵像)
산도를 넘는 순간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슬하에서 만난 것들도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했다
자갈밭을 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도
언제나 동 트는 새벽은 가슴이 설레었다
겨울의 끝에서 봄이 수혈되듯이
꿈은 마르지 않고
푸른 핏줄로 한 여인을 만나 둥지를 지었지만
이순(耳順)이라는 암초가 대기 중이었다
어느 날 저승사자는
나에게 옐로카드를 제시한다
십여 년간 지루한 터널 속을 빠져나오니
태양은 서산으로 기우는데
내려가는 외길 하나만 남았다
뼈를 깎는 시간, 황혼이 나를 붙잡고
여생을 채근한다
흔적을 뒤돌아보니,
나는 찰나에 나를 통과해버렸다
5월의 산책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게 싫어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난
철저한 에고이스트
창문 너머로 개구리울음 요란스러워
여름을 마중하러 근린공원으로 나갔다
녹음이 짙은 숲에는 매미 소리가 없는
아직도 봄인지 아리송하다
정자에 앉아
머리를 텅 비웠다
비우고비우고 또 비워고
남는 건 오직 빈 점하나
물이 마른 호수에서 들려오는
기록이 불가한 소리들
못살겠다던 군중의 아우성도 같고
풀벌레 소리 같기도 하고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 관현악의 울림 같기도 하고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시끄러운 소음들......
예고 없이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치유(healing)
깜박이는 순수한 망막 뒤에는
탁한 회리바람이 일렁인다
저 깊은 눈
지나온 시간들이 꿈틀거린다
부연 먼지들
가시보다 날카롭다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앉은 진실은
부식이 되어 흉터를 남기겠지만,
가슴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면
크고 작은 별들이 내려와
통증을 어루만진다
숲의 목소리를 흡입하는 시간
자연은 헝클어진 질서를
가지런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제3부 봄날은 간다
봄의 독백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하얀 목련이 앞뒤를 다투는데
눈 덮인 산야에는 복수초가 힘차게
하늘의 꼬리를 잡는다
이어서 기다리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화들짝 벚꽃들도 함께 피어
꽃잎이 하나 둘 기쁨을 채색하고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유유히 시간을 접으려는가
바라보는 자와
내 눈 앞 꽃의 운명
무엇이 닮은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어느 봄날
귀가 간지러워 창문을 여니
짝을 찾던 새들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고
초록 내 음 숲길에는
잠에서 깨어난 개구리 한 마리
기지개를 켠 다
봄내 음 살라 먹은 하늘은
푸르다가
눈물처럼 푸르다가
방금 부화한 어린 봄이
목련나뭇가지에 하얗게 피고 있다
따스한 창가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봄이 벌써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여름의 꼬리
여름이 서서히 꼬리를 내린다
뜨겁던 아스팔트도
싸늘하게 식어간다
귀뚜라미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밤새 울어대고
해바라기의 열정도 시들어 간다
스잔한 바람 불어오는
느티나무 아래서
미동도 없는 매미 한 마리
가을의 미이라를 본다
골목길에 내다버린
죽부인의 알몸을 가랑잎이 덮는다
만화(滿花)
토독토독 머리 위에 터지는 즐거운 비명
하얀 벚꽃 봉오리들이
나비와 벌을 부르고 있다
진달래와 유채꽃 그리고 목련도
따스한 입김으로 봄을 부른다
담벼락 아래에는
노랗게 물이 서서히 오르더니
오늘은 화들짝 핀 개나리 떼들
대문 앞 구석진 자리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어디서 날아와서 지었을까
무허가 노랑 집 한 채 눈이 부시다
춘설 (春雪)
기별도 없이 내리는 봄눈
먼 곳에서 날아든 엽서를 나무들이 먼저 읽고 있다
저 수북한 사연들
받는 이마다 모두 수취인이다
한 송이 한 송이 조립하니
ㅂ, ㅗ, ㅁ이다
늦겨울의 끝자락으로 파고든 자음과 모음이
문득, 혀끝에 아리다
발아래 아파트 마당에는
한 옥타브 높아진 아이들의 목소리
바람의 음표가 창을 두드리고
첫눈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도
아득히 살아나는 날,
이제 허무한 기도마저 벗어놓고
어느새 겨울로 기울었다
이제 어떤 약속으로 또 한 계절을 건너갈까
숫눈 위에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가을비
호젓한 산길은
소슬한 가을바람 등에 업고
겨울잠에 들 채비를 한다
공허한 계절의 길목
인적도 뜸하다
저 손짓 없는 메아리
촉촉한 침묵의 눈망울이다
아프도록 일렁이는
그리운 사람 기다리다
영각처럼 울었다
해미 속의 가을 화판은
내 맘보다 더 무겁다
입동을 살라 먹은 열기도
아스라한 추억까지도
단풍으로 다 태워버렸다
뜬금없는 가을비
이끼 낀 눈으로 빗장을 푼다
단풍이 태우다
-주산지에서
주왕산 영봉에 기대여
영롱한 호수위에
가을풍경을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오색 꿈을 입히니
한 폭의 명화가 탄생 하였네
명화 속에 넣을
아름다운 시 한수 생각하다
잠시 정신을 놓아버린 순간
초록빛에 숨어있던
늦가을 단풍이 모두
붉게 태워버렸네
그리움까지 모두 태워버렸네
눈 오는 날
기별도 없이 내리는 눈
얼었던 내 마음의 빗장을 푼다
발아래 아파트 마당에는
한 옥타브 높아진 아이들의 목소리
바람의 음표 되어 앞창 뒤창을 두들기고
꿈 많던 어린 시절
첫눈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도
세월과 함께 옛 추억에 묻혀버리고
이제 허무한 기도마저 벗어놓고
어느새 겨울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다
봄 여름 가을을 무모하게 보내고
이제야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얀 눈 위에 보낼 길 없는 편지를 쓴다
밤눈(夜雪)
달콤한 잠 깨울까봐
소리 없이 내리고
누가 누가 볼까 봐
밤중에 몰래 내리네
삶의 쓰레기 역겨워
하얗게 가려주는
네는 티 없는
천사의 아름다운 마음
보름달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는
한줌의 낙엽이고 싶었다
내 것 하나 없이
하늘을 떠돌다가
파란 구름을 만나면
가슴을 열어 보이고
홀연히 사라지는
둥근 사랑이고 싶었다
안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너는 나에게 무엇인지
하얀 벽
벽속에 갇혀
하얀 물에
하얀 김에
백골이 됐는지
벽이 무너지면
어디로 갔는지
백골은
별이 됐는지
그늘
산수유, 진달래도 다녀간 후
이팝나무 가지에 봄볕이 주렁주렁 매달려
봄의 꼬리를 잡고 있다
들 고양이와 새들의 배설물을 먹고 자란
배부른 나무가 바람을 붙잡고 춤을 춘다
저 희디흰 꽃숭어리들
마지막 꽃 밥이 떨어지면 신록은
매미 소리를 등에 업고 올 것이다
들뜬 마음
향기로 배가 부르다
접어둔 봄을 펼치니
마지막 인사가 적혀있다
이팝나무 그늘에 앉아
사라지는 봄을 배웅한다
봄날은 간다
애절한 생의 기도가
봄이라는 탈을 쓰고 돌아왔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오른 잎들이 연둣빛으로 피어나고
물기 없는 삭막한 가슴에도
촉촉한 삶의 기운이 돋는다
겨울을 넘어
봄은 그렇게 먼 길을 왔다가
녹음에게 바통을 건네주고
봄은 그렇게 떠나간다
제4부 발목에 걸리는 바람
유빙 시대
얼음구멍으로 잠시 보이는 바다표범
잽싸게 먹이를 잡아내는 솜씨는 일품이다
먹이를 남겨 하얀 여우에게 양보하고
흰 갈매기는 청소를 돕는다
개발이란 핑계로 밀림이 사라지고
산소는 줄어들었다
숲은 지구의 필터였다
해마다 지구의 체온이 오르고
빙하는 녹아 바다는 뭍으로 달려든다
북극곰은 터전을 잃어도
인간들은 무관심이다
멋대로 휘두른 칼날이
자연의 질서를 훼손한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후손에게 그 칼끝을 겨누고 있다
도시의 미아들
솜털로 날개를 단 형제들
민들레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바람이 잘 마른날
풀씨의 뼈도 가벼워지고
대궁만 남은 예정된 이별이 치러지고 있었다
누군가 유목이라고 불렀지만
무모한 이주였다
그 유혹에 덩달아 편승한 꽃씨들
바람에 업혀 날아갔다
활주로도 없는 곳, 불시착이다
메마른 도로 귀퉁이
역 앞 길가에 주저앉아 얼굴을 내민
미아들,
모두 무사하다
도시는 그들을 봄이라 부른다
발목에 걸리는 바람
서쪽 하늘이
붉게 젖어 있다
강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바람이 풀들을 훑고 지나간다
지금 내 곁엔 아무도 없다
비켜간 바람이 발목에 걸린다
지상에서 내가 마지막 하고 싶은 일은
울고 있는 누군가의 등을
다독여 주는 일
이제 긴 자갈밭을 걸어서 돌아가는 길
깊숙이 등을 굽힌 갈대들이
괜찮다고 속삭인다
노을이 아프게 지고 있다
서시(序詩)
밝은 날 어두운 날
바람 불고 눈 비 오는 날
모두를 신의 뜻으로
불평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그리움을 달래고
부지런한 채꾼으로
많은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가을 냄새 풍기는 길목에서
어떤 빛깔의 단풍이 될까
고민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서쪽으로 기우는 나의 생애가
불꽃 찬란한 석양의 무대는 없어도
내 삶의 그림자를 소중히 주워 모아
정갈한 접시에 고이 담아두고 싶다
인연
눈앞의 산봉우리가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에 안아보니
그것은 한 줌의 허공 이였네
그마저 바람에 날아가 버리니
눈앞의 산봉우리 간데없고
가슴에 빈 점 하나 남았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이러하며
생사의 인연도 한 점 공이로구나
둥근 구름
가벼운 바람이거나
구름이고 싶었지
마음 가는대로
한없이 떠돌다가
넓은 가슴 큰사랑 만나면
잠시 불꽃으로 살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둥근 구름이고 싶었지
우산의 공식
우산 밖에서 혼자 젖었던 기억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결기에 찬 입을 꽉 다물었다
내 이마에 꿈이 닿는 날을 기다리며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그늘이 되지 못하고
늘 젖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두 눈이 글썽한 채로
우산을 두고
그대로 하늘을 맞는다
우산 밖에서
비로소 인생의 값을 치르고 있다
노인의 웃음
가난했던 세월
낙오되지 않으려고
가정교사 하면서 공부 할 때
점심시간엔 도서관에서
냉수 마시며 허기진 배 달래기도 했었지
그래도,
미래의 꿈 놓지 않고
꽉 움켜잡고 살던 청춘이던 때가
팔팔하던 젊은 시절이
나에게도 분명 있었다
불화살처럼 뜨겁게 스쳐간
시간의 갈피 속에서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뒤돌아보지만
거울 속에는 굵은 주름살 가득한
하얀 노인이 지금 웃고 있다
둥지를 떠났다
노랑 색옷을 입고
봄을 즐기다가 솜털로 날개를 단
부모 형제들은 제각기 둥지를 떠났다
봄의 유혹에 덩달아 가출한 나도
바람의 리듬을 타고 하늘 높이 나랐다
봄바람은 어린 가슴을
한없이 부풀려놓고 나를 버렸다
미아가 되어 이곳저곳 굴러다니다가
영등포역 앞 길가에 새로운 둥지를 잡았다
메마른 도로 귀퉁이에도 봄볕이 찾아주고
지나는 자동차 소리와 훈훈한 사람들 말소리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나도 고향 둥지처럼 노랑꽃을 피워 가꾸고 싶었다
언젠가 솜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봄의 소식을 전해주는 그 날까지
일편단심 민들레꽃으로 살아남고 싶다
황혼의 엘레지
내 고향 남도의 영축산에는
천 년 고찰 법보사찰 통도사가 있다
꿈 많던 어린 시절 난 고향을 떠났고
그 후 오십여 년 세월은 찰나에 스쳐 갔고
세상은 너무도 변해버렸다
인생 황혼에 고향 그리워 찾아갔으나
감나무가 많은 시골집은 간곳없고
처음 보는 통나무집이 영각처럼 서 있었다
만나고 싶은 부모형제 이제는 없고
어릴 적 고향 친구와
금개구리가 살았다던 자장암으로 들었다
깊은 산 위풍과 암자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내가 알던 경봉 스님은 볼 수 없고
낯선 주지 스님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반긴다
해가 지고 사찰의 방 문짝에는
달그림자와 함께 옛 친구들 모습이 아른거리고
풀벌레 소리와 산새 울음이 밤공기를 흔든다
이곳을 언제 다시 찾아올는지
기약조차 없는 삶이 너무도 야박한데
급물살을 탄 세월이 저만치 달려간다
물
먼지 한 톨까지 다 비워버린 마음
한없이 낮은 자세로 밑바닥을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그래서 옛 성인은 물같이 살라했던가
가는 길 불편하면 얼음이 되고
싫증이 나면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안개로 변하는 요술쟁이가 따로 없다
언덕을 넘어 낙하 할 때는 폭포가 되고
때로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연출하지만
한번 다녀가면 돌아올 수 없는 운명
만남과 이별을 머리에 이고 흘러간다
감정(感情)
하늘이 기분이 모처럼 쾌청하다
커다란 돌부처의 무게도
가벼울 때가 있다
정오 무렵 느닷없이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금세 대낮이 컴컴해진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한
마음의 높낮이
바람과 습도에 엉키면
좀처럼 길이 없다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몸에 터를 잡고 눌러 앉는
여러 가지 빛깔들
우울한 기운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눈을 뜨면
동녘에서 눈부신
태양을 볼 수 있고
하루해가 저물면
서녘하늘의 찬란한
해넘이를 볼 수 있다
밤이면 별들을 헤이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에 취하고
꿈속에서는 천사를 만나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
내려갈 일만 남은
빈 깡통 같은 인생이라지만
나보다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던가?
제5부 천왕봉을 해독하다
소나무의 꿈
겨울 숲에 앉아 허공을 본 다
나무마다 흔들리는 하늘바닥을 가지고 있다
6년의 목마른 얼굴을 열던 매미 소리도
산새와 풀벌레 소리도 간 곳 없다
홀로, 막막했을 무수한 밤과 낮의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은
고요한 바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듯
입춘을 지난 푸른 바람이 분 다
발치쯤
잔설이 묻은 갈색 이파리 아래에는
새로운 기운이 꿈틀 거린다
춥고 아팠을 시간을 위로하듯
봄이 오면
푸름으로 소란스러워질 여기는 솔숲
높고 외로웠을 허공에서
눈부신 봄빛이 쏟아지겠다
민들레의 기별
대문 앞 구석진 자리에 민들레가 피었다
어디서 날아 왔을까
무허가 노랑 집 한 채 눈이 부시다
민들레 꽃말은 행복이라는데
새처럼 그리운 기별처럼
꽃이 다정하게 문 앞에 와 있다
막다른 골목을 수없이 지나
쓸쓸한 시간을 건너 괴로움을 키우는 동안
당신은 긴 허공을 날아왔구나
아직도 살아볼만 한 세상이라고
작은 몸을 밀어 올려 꽃피운 민들레
무릎을 꺾어 오래 오래 들여 다 본다
천왕봉을 해독하다
지리산 천왕봉
신이 정좌한 곳이다
하여 수시로
사라졌다 나타난다
산봉우리가
구름 한 덩이 입에 물고
하늘을 괴고
가슴을 치는
법계사의 목탁소리에
산은 귀를 씻고
손을 씻고
내민 손 잡지 않고
안개 속에서 침묵으로
걸어 나오는 천왕봉
평생 쌓아온
봉우리 높이는 얼마나 될까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소울 메이트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 중
나는 한 사람을 선택했다
쇼핑할 때도
둘의 생각은 한 방향을 바라본다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보낸다
세력다툼도 없는
공평한 관계
언제나 나를 대들보로 추켜세우는 곁이 있다
남은 여생 을 설계하다가
나는 문학을 택하고
그는 미술을 택했다
시와 그림을
서로 공감하는 우린 소울 메이트
어느 날
한사람이 먼저 간다면
남은 하나는
땅과 하늘을 오르내리며
두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연리지(連理枝)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크고 작은 바람이 수없이 다녀가고
어쩌다 한 인연의 꼬리를 만났던가
세찬 돌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내 맘속에는 네가 자라고
네 맘속에는 내가 자라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누가 뭐래도 너와 나는 서로 뒤엉켜
두 줄기 운명이 하나가 되었고
외로움을 넘어
긴 세월을 넘어
그런대로 우리의 삶은 보람이었다고
저녁노을이 붉게 타는 오후
보랏빛 세월의 흔적들
정갈한 그릇에 고이 담아두고 싶다
애증의 덫
안산의 어느 조각공원에 서 있는
이행균의 조각 작품
‘애증의 덫’
여인의 얼굴 뒤편에 근육질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끓고 있다
반쯤 가린 얼굴,
왜 여인은 사내와 등을 돌렸을까
온통 얼굴뿐인 이 조각 속에
차마 발설하지 못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이다
오늘같이 눈이 내려
애증의 덫을 하얗게 덮어버리면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까
미묘한 애와 증,
알고 보니
사랑 뒤편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변심을 했는지
남녀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루를 다 보낸다
길상사에서
극락전 마당에는 하얀 바람 일고
고풍스런 전각마다 빛바랜 모습
염불소리 목탁소리 가을과 함께 젖어간다
백석을 그리워하다
눈 감지 못한 채 가을 그림이 된 여인
바람처럼 떠난 길상화의 흔적 궁금해
나는 오늘 또 이곳을 찾아왔다
아픈 세월 길손처럼 살다간 두 사람
백석과 자야가 낮의 반대편에서
세월을 넘어와 밤 그늘에서 만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본 것 없이
조용히 길상사를 나오면서
가슴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벌판의 힘
봄이 찾아온 벌판은
초록 피가 지천이다
겨울을 잘라낸 충혈 된 눈빛들
멀리 국경의 문턱을 넘나든
황사바람에 들판의 이마가 자욱하다
땅의 힘으로
삭막한 벌판 끝으로 추위를 밀어내고
들판은 안개속의 등불처럼 일어선다
무거운 힘으로 계절을 밀고 오는
끝없는 혈투
바람의 울부짖음이 다녀간 땅에
또 한 번 대결이 벌어진다
끝까지 버티고 일어난 봄은
죽음을 넘어서서
모래바람 부는
삭막한 벌판을 푸르게 점령한다
염전(鹽田)
쌓이는 것은 시간뿐이다
바다도 햐얗게 뼈를 드러낸다
나의 가슴은 염전
이곳에 오면
염부의 등을 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얗게 변한 편지를 쓰고
소금처럼 사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들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놓고 살았을가
염전에는
외로운 바람이 모여 산다
하늘공원 가는 길
하늘을 향하는 292개 계단
한 칸 한 칸 노을을 밟으며 계단을 오른다
계단이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하늘공원으로 가면서 알게 된다
바람의 손을 잡고
정상을 향하여 내딛는 계단 옆으로
몸을 낮춘 풀들이 무성하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바람에 흔들리며
피고 지던 앵초꽃과 민들레와 나무들
벼랑에서 벼랑으로 숨 가쁘게 달리던 날들이
쇠약해진 무릎에 와 닿는다
정상은 하늘에 이르는 곳일까
욕망이 빠져나간 몸을 이끌고
하늘공원 가는 길
하늘공원에서는 하늘이 가깝다
안압지의 밤
천 년의 역사 만나러
예까지
설렘을 안고 찾아왔네
동궁과 월지 위에
이저러진 달하나 떴네
호면에 또 하나의 달이 떴네
안압지에
몸을 섞은 나무들
밤은 들떠 있네
기러기 떼 끼룩 끼룩
이 밤 다 가도록
시를 읊고 있네
갯벌
잿빛 갯벌을 파도가 쓸고 간 뒤
바지락, 칠게, 갯우렁, 소라게들
일광욕에 정신 나갔다
이곳에 터 잡아 살아가는
어민들은 오늘도 허리 굽혀
부지런지 갯벌에서 금을 캔다
하늘이 맞닿은 하얀 수평선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어부들 노랫가락이 갯벌을 지워간다
승봉도
아침 태양이
나지막한 소나무 숲 뒤에서 얼굴을 내 민다
백사장에는 파도가 밀려와
모래를 밀어 올렸다가 힘없이 내려놓는다
해미가 아름다운 수평선을 가리고
뱃길에 뼈아픈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동란에서 맥아더가 해군을 이끌고
이곳을 지나 인천으로 상륙하면서
많은 함포사격으로 불바다가 되었던 곳
피로 물들인 인천 앞바다의 길목 승봉도 는 이제
역사를 묻은 평화스런 바다로 출렁이다
월미도
긴 세월 빗장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섬
노 젓던 옛 토박이의 흔적은 간 곳 없고
화약 냄새도 역사 속으로 묻힌 지 오래다
오랜 세월 육지를 그리워 하다가
그 품속에 안겨버린,
지금은 잿빛 바다를 안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단장 되었네
봄이면 하얀 벚꽃들이 무더기로 손짓하고
푸른 낙엽에 불길이 이는 가을 숲속의 전망대
월미산 사계는 온갖 철새들이 어우러지는 곳
서쪽 수평선으로 해넘이가 다녀가면
오색불빛이 거리에 진을 치고
밤마다 섬은 라스베가스를 꿈꾼다
제6부 살구나무처럼
감나무
막걸리 두 사발쯤
마시고 나면 어느 듯
마음이 도착하는 내 고향
노을을 등에 지고 서있는
감나무 가지마다
동네 사람들의 소망이
감꽃으로 줄줄이 피었지
풋감을 솎아내던 그 감나무
발등으로 설익은 감이 떨어지면
내 설익은 사내의 딱지도 떨어졌는데
한동안 감나무를 잊고 살았다
어느 골목길을 지나는데
풋감 하나가 머리위로 떨어지며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아는 체 했다
우산
비 오는 날
비를 맞는 사람을 보면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고 싶다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걷는 사람은
삶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그이에게 젖은 하늘을 가려주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우산아래 모녀가 걸어간다
딸 쪽으로 우산이 기울었다
어머니의 한쪽 어깨가 젖고 있다
젖은 어깨가 아름답다
풍경에 취하다
전철 안의 사람들
폰을 잡고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소리 없이 정보의 바다로 가라앉는다
앞자리 미니스커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연신 폰을 두드리며
미소를 머금다가 미간을 찌푸린다
저 소리 없는 대화
손은 입이다
옆에서 킬킬대는 빵모자 사내는
큰 소리로 바깥을 끌어오고 어딘가로 날아가 잡담중이다
차창에는 지친 빌딩 숲이 스쳐 가고
노을에 잦은 강물이 흘러가고
고속열차의 굉음도 지나가고
복잡한 어느 거리도 통째로 사라지는데
모두 바깥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눈동자만 분주한 전철 안 풍경
잠시 이상한 파도에 휩쓸려
내릴 곳을 지나 처 버렸다
식탁의 풍경
아이가 식탁의자에 갇혔다
고정벨트가 아이의 자유를 묶어놓은
식당안의 풍경
식탁이 올가미란 걸
두 살배기 아기는 알지 못한 채
케익을 먹고 있다
올가미에 대한 사랑
황홀한 한 끼 식사를 위해
멀리서 가까이서 수많은 시간들이
이 저녁에 도착해 있다
삶의 끝없는 줄다리기는 식탁에서 시작된 역사
외줄을 타듯
밥으로 써내려간 고통의 문장들
우리는 모두 의자에서 자라다가
고요하게 무너진다
살구나무처럼
살구꽃이 필 무렵
아버지는 봄을 기다리며
나의 이름을 지었다
그때 그 이름은
내가 이곳저곳 이사 할 때마다
주소와 함께 평생 나와 같이 자랐다
우리나라 인구 오천만 명 중에
하나뿐인 내 이름은 정부도 관리 한다
밤마다 통증을 앓던 세월들
추운 나무에도 꽃이 필 무렵
내가 흘린 수많은 땀방울들이
주렁주렁 살구로 열린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살구 향
살구가 익어가는 6월
아버지의 무덤가에
살구 몇 개 올려놓았다
귀여운 흔적
거실 옆 오래된 고가구 위에는
자동차 다섯 대가 나란히 놓여있다
파란 승용차와 하얀 봉고차
빨간 소방차와 경찰차
손주가 가장 좋아하는
회색 리무진 버스까지,
이틀째 연락 없는 귀염둥이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 자동차들이
조용히 임자를 기다린다
내일쯤이면 아비의 손을 잡고
손주들이 현관을 들어서면
정돈된 거실의 분위기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지고
여기저기 자동차들이 줄지어 오가겠지.....
무슨 짓해도 화가 나기는커녕
그저 행복한 우리 부부
오늘은 외로움에 찌던 채로.
현관 쪽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뛰어오는
귀여운 손주들의 재롱 눈앞에 아른 거린다
안개비
오래 머물 것 같은
봄의 여신은 꽁무니를 보이고
거리는 여름의 초입에서 서성거린다
달리던 길은
짙은 안개비에 속도를 늦추고
부옇게 흐려지는 차창
내 영혼도 안개에 싸여 세상의 길을 놓친다
슬픔이 골이 깊은
생의 안개지역
먼 길을 돌아와 다시 길을 찾는다
생의 절반은 늘 안개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돌부처
땀 흘리며 올라간
북한산 백운봉정상
때맞추어 눈이 펑펑 내려
갈 길을 지워 버렸네
쪽 하늘에서
어둠까지 내려와
앞길을 막으니
차라리 이대로
돌부처가 되고 싶다
외로운 옹달샘
깊은 산 속
외로운 옹달샘 하나
물이 맑아
빨간 단풍나무들 비치고
너무 맑아
가제가 노닐고
하도 맑아
햇살이 반사 됩니다
아버지의 안경
케케묵은 골동품 정리하다가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안경을 발견하고
한번 써 보았다
눈앞이 빙빙 돌고
너무 어지러웠다
옛날 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실 때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워서
원, 쯪쯪쯪
혀를 차셨던 이유
지금에야 알 것 같다
<이복래 시집 해설>
생명의식과 문명비판의 포에지
신규호(시인, 문학박사)
1.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날마다 ICT 기술에 의한 놀라운 기기들이 등장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지식이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근자에 대표적 바둑기사와의 대결에서 거의 완승을 한 ‘알파고(Alpha Go)’는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AI)’의 발달을 입증해 주고 있어서, 이미 현실적으로 AI가 인간을 능가함으로써, 미구에 닥칠 인류생활의 급변을 예고해 주고 있다. 20세기의 산업화로 인한 공해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이 때,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지능까지 AI에게 정복당한다면, 그 후에 닥쳐올 세계상은 지금으로서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는 위태롭고 괴이한 모습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 놀라운 현실에 처한 오늘의 시인들은 여전히 습관적 언어만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을 뿐, 변화에 대처할 아무런 방책을 내놓지 못한 채 당황해 하고 있다. AI가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일이 곧 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시인들에게 미래의 세계가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최근에 새로 출판되어 나오는 시집들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이야말로 AI가 능가하지 못할 인간지능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되는 바, 시인이 다루는 시어의 현란한 스펙트럼(spectrum)의 세계야말로 아무리 발달한 AI의 능력이라 해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 맞추어 이복래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 『시이소의 중심』을 통독하면서, 이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새롭고 다양한 시어의 스펙트럼을 짚어보고자 하는 이유도 이와 다름이 아니다. 시집『시이소의 중심』에서 일차적으로 느낀 것은, 작품 가운데 최신의 만화영화나 판타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함께 시사적 용어와 외래어뿐만 아니고, 한국의 전통적 소재나 전자 용어 등, 다양한 시어가 등장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21세기 현대시의 아노미 현상을 강하게 떠올려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 제목인 ‘에어포카립스(Air-Pocaliypse)’와 ‘마블캐릭터(Marble-Character)’를 비롯, 최신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꿈돌이, 호돌이, 루시, 베트맨, 미키마우스, 골룸, 벨리알, 플레어, 푸시케, 미라쥬, 크로이, 네펜데스)까지 작품 중에 인용하고 있는가 하면, 솟대, 죽부인, 연리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의 전통적 용어도 보이고, 시이소(seesaw), 엘로 카드, 트라우마와 같은 외래어와 함께, 봄날은 간다, 황혼의 엘레지 등, 지나간 유행가의 용어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사례이다. 시집 『시이소의 중심』이 지닌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현재 한국 시단의 다양한 민얼굴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더욱이 작품 대부분이 위기에 처한 ‘생명의식’이라는 현대문명적 현상을 매우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2.
먼저, 첫 작품부터 인용해서 살펴본다.
물이 썩어가는 달항아리가
검은 공포로 둥둥 떠다닌다
공중 가득한 중금속
공장지대를 건너온 사막의 바람은
도시의 하늘에 두꺼운 커튼을 친다.
대홍수와 빈번한 쓰나미와 지진들
지하수는 점차 고갈되어 목말라 가는데
아무도 지구촌의 미래를 점칠 수 없다
만삭이 된 어미 소는 알을 낳고
까치는 알이 아닌 새끼를 낳는다
계절을 잃은 봄꽃들은 가을과 겨울에도 피어나고
파도가 사라진 바다는 침묵한다
(이하 생략)
-시 「에어포칼립스」 일부
‘에어포카립스(Air-Pocalypse)’는 ‘공기(air)’라는 단어와 기독교의 묵시록적 종말론인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합성어로, 공기의 종말, 곧 오염된 공기인 '미세먼지'를 뜻하면서 이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란 의미를 함께 지니는 은유적 용어이다. 최근에 와서 갑자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미세먼지 때문에, 20세기 산업화의 결과로 인한 인류 문명세계의 종말론이 대두되면서 이 용어가 화두로 등장하였다. 코앞에 닥친 인공지능 이전에 ‘에어포카립스’가 문제되는 암담한 현실을 시인은 작품에서 제재로 삼아 삶의 위기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으로는 하늘과 바다와 대지가 연이어 등장한다. 그러므로, ‘에어포카립스’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미세먼지’와 밀접한 공중(하늘)뿐만 아니고, 바다의 쓰나미와 육지의 오염 등, 20세기적 산업화가 초래한 인류의 위기상황을 총체적으로 대변해 주는 용어로 보아야 한다.
먼저, 제1연과 2연에서 시인은 ‘하늘에 뜬 달조차 썩어가는 물을 담고 검은 공포로 둥둥 떠다니는 달항아리’라고 표현한다. 현대인에게 달은 이미 낭만적 대상이 아니며, 공해로 ‘물이 썩어가는 달항아리’로 보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는 하늘에서 하강하여 도시로 내려와 공해를 일으켜서, ‘공중에는 중금속을 지닌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공장지대를 건너온 사막의 미세먼지의 바람은 도시의 하늘을 뒤덮어 장막을 친다.’ 이처럼 세계 도처에서 현재 미세먼지로 인해 겪고 있는 지독한 공포를 여실하게 표현함으로써, 산업화가 초래한 생명의 위기를 실감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편, 제3연과 4연에서 시인은 시선을 돌려 바다의 ‘쓰나미’와 지진의 공포에 관하여 절실하게 표현한다. 최근에 와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해저의 지진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일본을 비롯해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서 도시와 공장지대를 휩쓸어 가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매연과 미세먼지가 일으키는 기후의 변화 등, 하늘의 공해로 인한 결과이기에 ‘지구촌의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이 비극적 상황’을 시인은 ‘에어포카립스’라는 하나의 제재에 담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물리적 현상뿐만 아니라, 생명체들도 이상 증상을 보이고 있으니, ‘어미 소가 알을 낳고, 까치가 새끼를 낳는’ 기현상도 일어난다. 물론 공해의 결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역설적 과장법을 사용한 것이지만, 일부 생명체에서 이미 이런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어, 단순한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실제로, 꽃들은 계절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야채와 과실도 아무 때나 열매를 맺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시인은 현대문명의 역기능을 강조하면서 ‘대책을 잃어버린 미래가 캄캄한 밤중이라’고 한탄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공해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에어포카립스’라는 제재로 현대문명이 초래한 종말론적 현실을 증언함으로써, 생명체의 위기와 문명비판의식을 깨닫게 한다.
우주는 시작과 끝이 미로 속에 빠져있다
꿈돌이는 기억의 상자에 갇혔고
호돌이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자는 여전히 종이 왕관을 쓴 채 밀림을 배회하고 있다
루시가 금성으로 반짝이는 하늘에서
배트맨의 승패를 저울질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펜을 잡은 손끝에서 좌우된다
꿈을 선사하는 미키마우스는
어디서 잠자고 있는 걸까
골룸과 벨리알이 악의 축으로 살아있는 지구에서
이태석 캐릭터는 언제쯤 볼 수 있는지
먹구름 망토를 드리운 세상은 하늘이 버이지 않고
허상의 물방울들만 아네모네처럼 둥둥 떠다닌다
유토피아 마블에서 날아온 나비가
여자의 손톱 위에서 춤을 춘다
꽃들이 마블 풍선을 타고 가는 신세계
플레어, 푸시케, 미라쥬, 크로이의 이름들을 불러본다
무쇠팔, 무쇠다리 기지개를 켜는
새로운 출현을 기다리며
오늘밤도 나는 마블캐릭터를 그린다
-시 「마블캐릭터」 전문
이 작품은, 현재 오락물 중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만화영화나 SF 및 판타지물에 관해 시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청소년들과 일부 성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만화영화와 SF 및 판타지물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 청소년들이 즐기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하고 단순한 오락물로만 치부하는 기성세대들의 생각을 원점에서 바꿀 필요를 이 작품이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현대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화와 판타지 영화 등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의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미래 시대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들의 사고와 가치관에 당장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현상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만화 원작 영화나 판타지, SF는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시인들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임을 이 작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이복래 시인이 이들 만화영화에 관심을 갖고 ‘마블캐릭터’를 시 창작의 제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요한다고 하겠다.
이 시의 제목인 ‘마블캐릭터(Marble-Character)'는 미국 할리우드의 만화 판타지 영화인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무수한 캐릭터들을 의미한다. 특수효과에 의한 그래픽 기술이 높아지면서 ’마블‘ 판타지 영화가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많은 판타지 영화중에서도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유명한 바, 그 대표적인 것이 <마블>시리즈와 <DC코믹스>다. 이 시리즈들은 서로 다른 영화끼리 내용과 세계관, 캐릭터들을 공유하는 것이 특징이며, 여기서 ‘마블 세계관’과 ‘마블 우주관’이란 개념이 파생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블 우주관’에는 ‘멀티버스’, ‘메가버스’, ‘옴니버스’를 포함한 모든 우주관들과, 현실 및 ‘마블 코믹스’뿐만 아닌 ‘DC코믹스’ 등을 포함한다. ‘마블 세계관’은 더욱 복잡하여 ‘지구0’인 빅뱅 이전의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지구 199999’인 ‘어벤젼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계관이 존재한다. 이들 시리즈들에 등장하는 다수의 ‘슈퍼 히어로(super hero)'들의 이름은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지경인 바,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그 예를 보인 것이다.
제1연에서 제시된 마블 우주의 시작과 끝의 갇힘과 사라짐은 연이어 제2연에서는 영화 속에 환상적으로 등장하는 사자와 루시, 배트맨으로 어지럽게 전개되면서 미래 세계의 비극적 변화상을 보여주지만, 이들은 결국 펜을 잡은 작가의 손끝에서 결과가 좌우됨을 시인은 강조한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역시 환상적 스토리를 좌우하는 영화 원작자의 존재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시적 상상력과 플롯 구성의 환상적 능력이 변화무쌍한 만화영화나 판타지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어서, 작가 시인들의 창의력을 절대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연 이하는 그 연속선상의 이야기이다. 다만,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캐릭터들의 이름을 부르며 ‘무쇠팔, 무쇠 다리가 기지개를 켜는 새로운 캐릭터의 출현을 기다리며 마블캐릭터를 그리는’ 판타지적 희망을 지닌다고 고백한다. 오늘날 생명 있는 것들이 처한 어떠한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의 출현을 만화세계에서나마 기대해 보는 시인의 꿈이 오히려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시인은 만화가 아무리 반생명적이고 파괴적 내용이라 해도 그것 역시 시적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는 작가의 손에서 이루어질 뿐임을 강조함으로써, 판타지적 ‘마블’ 시리즈와 같은 미래세계가 닥쳐올지라도, 인류는 최후의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이상에서 이복래 시인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위기상황을 증언한 작품과, ‘마블’ 시리즈를 중심으로 하는 만화영화의 영웅적 캐릭터들에 의하여 불가능이 없는 무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위기 탈출의 꿈을 노래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시인의 관심이 이러한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다양한 제재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의 시적 상상력의 넓은 폭을 입증해 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생명의식과 자연의 섭리 앞에 희망을 지니고 있는 겸허한 시인의 자세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여기가 뛰어오르면 저기는 추락하고
중심축에서 반복되는 놀이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는 작은 깃털이다
오늘도 공중으로 가는 길 열려있지만
하늘에서 음악이 떨어지고 심장도 떨어지는데
목말라 허공에 걸려버린 먼지 한 톨
목적지는 하얀 지붕위에 걸린 낯별 하나
하늘에서 내려온 까치 한 마리가
낯익은 얼굴들과 거꾸로 선다
떨어지는 나무열매는 관심조차 없고
왔던 길 향해 구멍난 신발을 움켜쥐고
발바닥이 땅을 치며 뛰어 오른다
종일 달렸지만 성과는 없이
출발지로 유턴하는 즐거운 놀이
작은 바늘이 6에 멈추면 돌아갈 일만 남았다
시간 속의 주인공은 스프링이 되고
이상한 전쟁에서 두 눈을 뜨니
소화 못한 시소의 중심은 허공에 걸린다
-시 「시이소의 중심」 전문
주지하듯이, ‘시이소(seesaw)'는 놀이기구의 일종으로, 긴 널빤지의 중심을 고정시켜 놓고 두 끝을 타고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노는 틀을 가리킨다. 이 틀의 핵심은 널빤지의 중심을 괴고 있는 받침에 있다. 이 고정된 중심이 존재함으로써 놀이의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 기구인 ‘널뛰기’와 다른 것은 판의 중심이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널뛰기’는 판의 중심 위치가 체중에 따라 변한다는 특징이 있다. 널판의 양 끝에 올라탄 사람이 각기 상대방의 탄력을 받아 위로 솟구쳐 오르는데, 서구의 기구인 ‘시이소’는 자세가 고정된 채 양 끝에 앉아서 오르내리며 노는 점이 다르다.
이 시에서의 ‘시이소’는 ‘널뛰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들 기구의 원리에서 삶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있다. ‘시이소’든 ‘널뛰기’든 중심을 가운데 두고 오르고 내리는 행위가 반복되는 현상은 같다. 그런 의미에서, ‘널뛰기’ 틀로부터 뛰어오르거나 ‘시이소’처럼 자리에 앉은 채 오르내리거나 반복되는 행위는 동일한 바, 인생살이의 모습도 이와 유사하여 삶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불변의 중심축을 두고 무의미한 반복을 계속하다가 우주공간으로 허무하게 날아가고 마는 가볍고 작은 깃털일 뿐임을 시인은 자각한다.
여기서, 중심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꼼짝달싹 못하는 인간조건이며,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공간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탄생 순간부터 주어진 시공간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뛰어올라 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같은 위치 같은 조건으로 떨어져 내리고 마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오르내리다가 끝내 ‘공중으로 가는 길은 열려있어서 (꿈처럼) 하늘에서 음악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오늘 이 순간에도 목숨은 팽팽한 긴장으로 ‘시이소(널뛰기)’를 타면서, ‘목마른 채 허공에 걸려버린 먼지 한 톨처럼 한없이 가벼움을 깨달을 수 있을 뿐’, 종말적 위기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지붕위에 걸린 낮별 하나’가 목적지로 보이지만, 시이소 위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거꾸로 서며, 왔던 길 향해 다시 구멍 난 삶의 신발을 움켜쥐고 땅을 치며 뛰어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삶의 피나는 반복 행위는 결국 첫 출발지인 탄생의 원점, 곧 ‘무(無)’로 유턴하는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시니컬하게 ‘즐거운 놀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 마지막 연에서 삶에 대한 시인의 허무의식이 느껴지는 바, ‘이상한 전쟁’인 현장에서 채 ‘소화 못한 시이소(삶)의 중심’이 결국 ‘허공에 걸림’을 인식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생명의 이런 위기의식은 다른 작품에서도 역시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묻지 마라
계절에 연연하지 않고
그렇게 봄, 여름, 가을로 살아왔다
또다시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면
내놓을 아무런 알리바이가 없다
한 묶음 두 묶음 만든 조서들
다듬어 그럴듯한 명목을 만들고 싶은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세 번의 엘로카드를 넘어
이제 네 번의 고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눈만 감으면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가신 분 얼굴만 보이고
눈을 뜨면 몸이 불길한 신호를 보내온다
파우스트와 발렌틴의 네 번째 결투가
운명인 것처럼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피할 수도 없는 결투가 되겠지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겠다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시 「네 번째 결투」 전문
인생살이에서 누구에게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는 몇 번쯤 피할 수 없게 다가온다. 그것이 직업상의 문제이든, 아니면 건강상의 문제이든,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당해 맞서 ‘결투’하지(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복래 시인은 그것을 네 번째 겪고 있다고 술회한다. 세 번의 ‘엘로카드’를 넘어 이제 종말적 위기감까지 느낀다. 그러기에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내놓을 알리바이가 더는 없으며, 그럴듯한 명목을 만들 시간조차 없다고 고백한다. 이제 현실로 닥친 ‘네 번째 위기’와 결투를 하면서 시인은 불길한 신호를 보내는 몸을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인 개인을 포함하여 지구 위에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인이 모두 겪고 있는 위기의식을 동시에 대변해 준다는 데에 심각한 의미가 있다.
이런 위기의 순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 누구나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 시가 일반적 보편성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읽는 이로 하여금 위기의식에 대해 강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시인은 마치 ‘파우스트와 발렌틴의 네 번째 결투가 운명인 것처럼 이를 피하지 않는다’ 고 다짐하면서 위기극복의 결의를 굳힌다. 승부는 정해져 있지만 ‘운명이여, 가라’ 하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듯 삶에 대한 시인의 다부진 불굴의 투지야말로 위기에 처한 현대인이 공히 지녀야 할 마지막 보루인 동시에 희망인 것을 증언해 주는 작품이다.
다음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처럼 코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푸르른 생명을 구가하고자 하는 강하고 끈질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 시인의 자세는,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요구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녹색의 풀밭에 누워
먼지 같은 생을 공중 가득 떠올렸다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
풀잎의 비애가 노을처럼 묻어나던 시간들
멀쩡한 정신 흐려놓고
입으로, 대장으로카메라와 칼, 고리 끈을 넣고
주인의 허가 없이 생긴 혹들 사정없이 도려냈다
바다로 흘러든 내 초록의 시간들이 잘려나간다
죽음의 바닥까지 나를 던졌다가
벽을 짚고 마른 풀들이 몸 비비며 일어섰다
다시 봄의 들판에서
어둠의 계단을 지나 풀이 자란다
저만치 4월이 앞서 간다
-시 「4월의 풀밭」 전문
모든 생명체는 출생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말년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불안은 생명체가 지니는 숙명적 조건이다. 그 불안은 궁극적으로 ‘죽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죽음이 없다면 불안도 없을 것이기에 생명체의 하나인 인간에게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이란 그림자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로 인해 평생을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시인은 비록 ‘먼지 같은 생’일지라도 생명력이 넘치는 ‘녹색의 풀밭에 누워’ 보려 한다. 그것이 공해이든 계절 때문이든 시들어 버리는 ‘풀잎의 비애가 노을처럼 묻어나던 시간들’과 같이 위기에 처해 있을망정,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여전히 살아 뛰고 있음을 확신한다. 비록 집도의의 도구가 ‘입으로, 대장으로, 사정없이 도려내며’, ‘바다로 흘러든 초록의 시간들이 잘려나감’을 의시할 수밖에 없지만, ‘죽음의 바닥까지 던져졌어도’ ‘벽을 짚고 마른 풀들이 몸 비비며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봄의 들판에서 어둠의 계단을 지나 풀이 자라나는’ 부활의지를 다짐한다. 위기에 처한 개인의 생명이나, 현대문명의 공해로 인해 위험에 처한 오늘의 인류나, 모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다시 소생하여야 한다는 시인의 처절한 웅변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인용한 작품 「엘로카드」는 개인의 경우를 넘어 현대인 모두에게 닥쳐올 위험을 미리 경고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른 잔디 위로
하얀 공 하나 바람을 가른다
봄의 가슴을 가르는 속도,
계절의 속살이 찢어진다
길을 잃었다
던져진 카드 한 장
어떤 이에게는 희망은 무기력이다
이 어둠의 겹, 무엇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가
홀을 향해 명중해야 하는 생,
장애물이 곳곳이다
(중략)
창문 너머
천변에 봄물이 번지고 있다
혈관처럼 뻗어가는 눈부신 출산에
눈이 먼 계절
슬며시 커튼을 내린다
마지막이라는 말,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시작을 신고 걷는다
돌아오는 얼굴이 노랗다
-시 「엘로카드」 일부
제1연에서 시인은 생명력이 넘치는 봄의 한 복판에 ‘하얀 공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봄의 가슴을 가른다’고 삶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푸른 잔디를 가르며 날아가는 하얀 (골프)공으로 대변되는 생명력의 표현이 약여하다. 그로 인해 시인은 순간적으로 ‘계절의 속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푸른 생명들이 봄을 구가하려는데, 난데없이 날아들며 초록의 풀밭을 가르며 지나가는 하얀 골프공 하나가 시각적 위기감으로 생이 데포르메 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제2연에서 이 긴장은 ‘던져진 카드 한 장’으로 대변되면서 한 층 고조된다. 길을 잃었으므로 희망조차 무기력하며, ‘무엇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지,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하얀 골프공과 같이 팽팽한 긴장 속의 생’은 ‘홀을 향해 명중하여야 하는데, 장애물(위기)이 곳곳에 널려 있다’. 목표인 홀을 향해 푸른 잔디 위로 날아가는 하얀 골프공으로 비유된 생명의 긴장된 모습은, 다음 순간 곳곳에 널려있는 각종 장애물이란 복병을 만나 더욱 위기가 고조된다. 목표인 홀에 명중될 지(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알 수조차 없다.
계속해서 시인은 ‘창문 너머 천변에 봄물이 번지고, 여전히 새 생명들의 눈부신 출산이 이어지고 있지만,’ 계절은 역시 눈이 멀고, 최후라는 마지막 말, 곧 종말적 상황 중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시작이란 신을 신고 걷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생의 최후를 강하게 예감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반면에 타자들의 세상에는 ‘봄물이 번지고, 새 생명들이 태어나고, 여전히 분주한 생활로 바쁘게 다니며, 생명력이 넘치고 있는 광경에시인은 생의 지독한 역설을 깨닫는다.
4.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의 생명이나 종말론적 현대문명이 처한 인류의 위기나, 그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면, 그 이전에 평화롭게 살아 온 과거의 삶을 시인은 본능적으로 회고하고자 욕구하게 된다. 지난날 평온한 가운데 누려온 삶을 영위하였던 순간을 되새겨 보고 싶은 마음이라 하겠다. 태어나서 열정적으로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는 심정과, 평화롭게 삶을 구가하던 날들의 파노라마가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찰나를 붙잡아 보는 가운데, 덧없이 흘러간 삶을 다시 되새겨 보고 싶은 것이다.
산도를 넘는 순간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슬하에서 만난 것들도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했다
자갈밭을 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도
언제나 동트는 새벽은 가슴이 설레었다
겨울의 끝에서 봄이 수혈되듯이
꿈은 마르지 않고
푸른 핏줄로 한 여인을 만나 둥지를 지었으며
이순(이순)이라는 암초가 대기 중이었다
어느 날 저승사자는
나에게 엘로카드를 제시한다
십여 년간 지루한 터널 속을 빠져나오니
태양은 서산으로 기우는데
내려가는 외길 하나만 남았다
뼈를 깎는 시간, 황혼이 나를 붙잡고
여생을 채근한다
흔적을 뒤돌아보니,
나는 찰나에 나를 통과해 버렸다
-시 「자화상」 전문
제1연에서는 모태로부터 출생한 순간에 험난한 생애가 운명적으로 정해졌음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산도를 넘는 순간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술회하며, 전 생애를 한순간에 압축하여 진술한다. 뒤이어 제2연에서 험난했던 지난날의 삶을 ‘자갈밭을 넘어’ 왔으며, 생사가 위기에 처했던 전쟁터(시인은 월남파병에 참여했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품은 채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았음을 회고한다.
하지만, 이순의 나이에 뜻하지 않은 암초(위기)를 만나 목숨을 위협하는 ‘엘로카드’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위험한 긴 터널을 지나면서 노년의 내리막 외길을 만나게 되었다고 술회한 다. 뼈를 깎듯 고통스러운 시간이 생의 종말을 예감하게 하면서, 여생을 채근하는 비정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라진 날의 흔적을 회고하면서 시인은, 영욕으로 점철된 생애가 한 순간에 지나감을 절감하게 되고, 그 심정을 ‘나는 찰나에 나를 통과해 버렸다’고 술회하기에 이름으로써, 이 시구에 담긴 시인의 압축된 자전적 진술이 독자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시인의 과거에는 아름다운 서정에 물들었던 평화로운 순간들도 있었으며, 평온한 가운데 낭만적 시정에 사로잡혀 전통적 작품을 창작했던 때도 있었으니, 시집 후반부에 실린 이런 일군의 작품들이 그 예라고 하겠다. 이들 작품 가운데에서 지난날의 보람찼던 삶과 아름다웠던 생의 순간들을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니, 위기를 만나기 이전에 이 시인이 삶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음이 확인된다. 이 아름다운 삶의 순간들을 영원히 붙들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어서, 전반부와 대조되는 분위기임을 알 수 있다. 몇 작품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본다.
봄내음 살라먹은 하늘은
푸르다가
눈물처럼 푸르다가
방금 부화한 어린 봄이
목련 나뭇가지에 하얗게 피고 있다
-시 「어느 봄날」 일부
기별도 없이 내리는 봄눈
먼 곳에서 날아든 엽서를 나무들이 먼저 읽고 있다
저 수북한 사연들
받는 이마다 모두 수취인이다
한 송이 한 송이 조립하니
ㅂ, ㅗ, ㅁ이다
늦겨울의 끝자락으로 파고든 자음과 모음이
문득, 혀끝에 아리다
-시 「춘설(春雪)」 일부
애절한 생의 기도가
봄이라는 탈을 쓰고 돌아왔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오른 잎들이 연둣빛으로 피어나고
물기 없는 삭막한 가슴에도
촉촉한 삶의 기운이 돋는다
-시 봄날은 간다 일부
위에 인용해 본 몇 구절의 특징을 살펴보면, 봄이라는 계절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확인된다. 봄이라는 계절이야말로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인 것이며, 사람에게도 추위에 웅크렸던 가슴을 펴고, 새로 핀 아름다운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부활의 계절이다. 이 시구에서 시인은 초봄이라는 계절을 ‘방금 부화한 어린 봄이 나뭇가지에 하얗게 피고 있다’와 같이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춘설」에서는 갑자기 내린 봄눈을 ‘먼 곳에서 날아든 엽서’에 비유하면서, 그 엽서를 ‘나무들이 먼저 읽고’ 나무마다 쌓인 눈을 ‘저 수북한 사연들’로, 그것을 ‘받는 이마다 수취인’이라고 한 부분에서 사물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함께 아름다운 서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다가오는 봄을 눈송이들이 ‘ㅂ, ㅗ, ㅁ’으로 조각한다’는 부분에서 시인의 독창적 발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 봄이 다가옴을 ‘늦겨울 끝자락으로 파고든 자음과 모음이 문득, 혀 끝에 아리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표현의 절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봄을 ‘애절한 생의 기도’라 한 대목에서도 푸르게 살아있는 것들, 곧 생명을 절실하게 사랑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담겨있다. 이어서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오른 잎들이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생명이 소생하는 기적을 찬탄하고 있는 바, ‘물기 없는 삭막한 가슴에도 촉촉한 삶의 기운이 돋는다’고 다시 강조함으로써, 생명력의 신비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 시구로 미루어 보건대, 이복래 시인은 본디 풍부한 감성을 지닌 전통적 서정시인임을 알 수 있다.
5.
시집 후반부에 속하는 몇 작품의 시구를 마지막으로 인용하여 본 바와 같이, 이복래 시인은 본디 풍부한 서정과 섬세한 심성을 지닌 시인으로, 아름다운 정서와 낭만적 시상을 즐겨 다루어 온 전통적 서정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작품 가운데 동심 어린 시구를 즐겨 사용하는 등, 어느 모로 보나 전통의 맥을 계승해 온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면서 창작 생활에 노력하고 있던 중, 노년에 이르러 갑자기 닥친 생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종말의식이라는 심각한 주제의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음을 시집 앞부분의 여러 작품을 통하여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절망하지 않고, 이 위기를 계기로 삼아 개인적인 생의 진정한 의미와 현대문명의 종말론적 위기감을 작품 속에 함께 형상화함으로써, 최근에 보기 드문 무거운 주제인 ‘절실한 생명의식과 문명비판의 시 정신’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문명의 혼란상과 절망적 위기감을 아프게 증언하면서, 아울러 동시대적으로 시인이 겪고 있는 개인적 생의 위기감을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개인적 사건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류가 닥친 사태로까지 보편화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시집 『시이소의 중심』은 위기에 처한 현대인에게 절실한 생명의식과 문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끝으로 이복래 시인의 앞날에 건강과 함께 풍성한 문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뒤의 속표지 하단에 필히 넣을 글>
*이 시집은 인천문화재단 인천광역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일부 받아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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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의 겉표지에 인용할 글 두 편 *
<시집 해설 중 일부분 인용>
뒷표지에 올린 글
*신규호시인 글 생략하고......
심상운 시인의 글
이복래의 시편에서는 낯익은 일상의 일을 낯설게 보고 거기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유추하는 사유의 방식이 눈길을 끈다. 식탁의자에서 안전을 위해 고정 벨트에 묶어놓은 아이를 보고 자유를 잃고 먹고사는 일에 묶여 있는 인생의 모습을 유추하여 그것을 시적 이미지로 압축해 놓은「식탁풍경」, 대문 앞 구석진 자리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고 “무허가 노랑 집 한 채 눈이 부시다”라고 행복의 그림을 보여주는「긴 허공을 날아온 꽃」은 거듭 읽히고 긍정적으로 수용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상성에서 벗어나서 시적 보편성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살구나무 작명소」에서도 그런 면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이 시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살구꽃이 필 무렵 지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살구 향”이라는 구절을 이끌어내는 시적 상상력이 싱그러운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그런 젊은 감성이 이복래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대하게 한다.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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