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聖居山)과 천마산(天摩山) 고사 # 번역문..... 7년 여름에 병으로 누워 인사(人事)가 없었으므로 두 산의 고사를 지었다. 오관(五冠)ㆍ송악(松嶽)ㆍ제석(帝釋) 등의 산들은 사실 두 산 주변의 다른 산이며 성거산이 그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한다.
옛 구역(九域)의 땅은 신라가 불교를 숭상했던 때로부터 고려를 거쳐 1500년 동안 인적이 통하지 않은 심산절경(深山絶境)에 불교의 고적이 또한 많은데, 예를 들면 개경(開京) 북쪽 50리에 있는 성거산과 천마산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산중에 부처를 섬기는 사찰이 무수히 건립되었는데 본조(本朝)에서는 유학을 숭상하고 고려가 망한 지도 300년이나 되어 고려 때의 사찰이 지금은 모두 황폐해졌다. 다만 7, 8백 년이나 오래된 사찰의 비석과 탑이 종종 훼손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석두산(石頭山) 수릉(壽陵)에서 성거산 수릉에 이르면 정상에 큰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성거산은 고구려의 구룡산(九龍山)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낙랑(樂浪 평양(平壤)의 옛 이름)의 평나산(平那山)인데, 산에 국조사(國祖祠)가 있어 성거산으로 불렀다.”라고 한다. 산은 남ㆍ북 두 개의 성거암(聖居庵)과 북ㆍ서ㆍ남 세 개의 상령암(桑靈庵)이 있는데 모두 난야(蘭若 사원)의 이름이며 산세는 여기에 이르러 가장 깊다. 북성거암 위에는 법달굴(法達窟)이 있는데, 법달은 옛 조사(祖師)의 이름이다. 그 위에는 철로 된 갈고리가 있어 이것을 잡고 정상에 오른다.
남성거암 아래는 원통사(圓通寺)로, 원통은 옛날 심적사(尋跡寺)의 승려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옛사람이 관음불(觀音佛)의 자취를 얻어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이 원통사를 지었는데 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지금은 부도석옹(浮圖石瓮)이 있는데 오래되어 연대를 알 수 없다.
정상의 서쪽 기슭에는 통성굴(通聖窟)이 있는데 옛날에 그 굴을 막았다. 굴 앞에는 샘이 있어 물새가 날아 모여든다.
정상 북쪽에는 국조사가 있으며, 동쪽 계곡은 복흥사(福興寺)로 지금은 쌍석탑(雙石塔)이 있다. 그 위는 일숙암(日宿庵)이다.
정상 서남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에 원효대(元曉臺)와 의상대(義相臺)가 있다. 의상대는 원효대 남쪽에 있으며 다시 그 남쪽은 인달암(仁達庵)과 금신암(金身庵)이 있다. 그 아래는 사미천(沙彌川)의 발원지이며 금신암 아래에는 금신사(金身寺)가 있다. 다시 그 아래는 금신굴(金身窟)이 있으며 인달암 서쪽에 인달석탑이 있다.
정상 서북쪽 기슭에 길성(吉聖)이 있다.
금신암 동쪽이 오도령(悟道嶺)이며, 다시 그 동쪽이 영취산(靈鷲山)이고, 영취산 남쪽에 현화사(玄化寺)가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顯宗) 12년(1021) 3월에 현화사 북산이 무너져 옥이 나왔다. 8월에 왕이 현화사에 거둥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저(周佇)에게 명하여 현화비문을 짓게 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채충순(蔡忠順)에게 비문의 글씨를 쓰게 하였으며 왕이 친히 전서(篆書)로 ‘영취산대자은현화비(靈鷲山大慈恩玄化碑)’를 썼다. 또 부도석탑이 있다.
의종(毅宗) 20년(1166) 3월에 왕이 금신사에서 부처에게 재(齋)를 올렸다. 다음 해 3월에 영통사(靈通寺)에 거둥하였다가 미행(微行)으로 금신굴에 이르러 재를 올리고 현화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현화사에는 청녕재(淸寧齋)와 중미정(衆美亭)이 있으며 남쪽 못에는 갈대와 물오리ㆍ기러기의 경관이 있다. 또 귀법사(歸法寺)에 갔다.
24년(1170) 봄에 낭성(狼星)이 남극 하늘에 나타났는데,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하여 서해도(西海道 황해도)에서 역마를 띄워 보고하였다. 당시 왕은 현화사에서 유람하고 있었는데, 여러 단에서 노인성을 크게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군신의 하례를 받았다. 그해에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곤원사(坤元寺)에서 왕이 시해되었다.
금신암 서쪽은 오관산(五冠山)이며 그 아래는 영통사이다. 지지(地誌)에는 마가갑(摩訶岬)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 북쪽에 사단(祀壇)이 있는데,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소사(小祀)를 지내는 것이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오행지(五行誌)〉에 이르기를 “인종(仁宗) 6년(1128) 겨울에 영통사의 동고(銅鼓)가 울었다. 12년 봄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이 영통사에 거둥하여 비를 기원하였다. 의종 1년(1147) 5월에 왕이 영통사에서 후사를 기원하고 화엄경(華嚴經)을 50일간 강하였다. 2년 여름에 산중에 큰비가 내렸는데, 하룻밤 사이에 영통천의 물이 넘치고 흙산이 무너져 백성들이 매몰되어 죽은 자가 많았다. 24년 정월에 왕이 영통사에 거둥하여 화엄회(華嚴會)를 열었다.”라고 하였다.
영통사에 이끼 낀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다.
고려 때 효자 문충(文忠)이 오관산 아래에서 살면서 〈오관곡(五冠曲)〉을 지었는데 악부(樂府)에 전한다.
영통(靈通) 계곡 입구는 화담(花潭)이다. 연못가에 옛날에는 은자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거처가 있었는데 지금은 화담 은자의 사당이 있다. 그 위에는 서(徐) 선생 무덤이 있다.
오관산 동쪽은 봉악(鳳嶽 보봉산(寶鳳山))이며 그 아래는 화장사(華藏寺)이다. 화장사에는 공민왕(恭愍王)의 도상(圖像)이 있다. 고려의 유민(遺民)이 비용을 모아 진전(眞殿)에 제사한 것이 수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유민의 풍속이 오히려 대국의 유풍(遺風)이 있다. 승려가 전하여 지켜오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패엽경(貝葉經)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쓴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또 지공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그 동남쪽은 불일사(佛日寺)로, 광종(光宗) 어머니 순성(順成) 유 태후(劉太后)의 원당(願堂)이다. 지금은 반쯤 훼손된 석탑이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광종 2년(951)에 불일사와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지었다. 대봉은사는 태조의 원당으로 개경(開京) 남쪽에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천수(天授) 4년(921)에 대흥사(大興寺)를 오관산에 짓고 이언대사(利言大師)를 영접하였다. 광종 6년(955)에 대흥사를 중수하고 왕이 낙성도량(落成道場)에 거둥하였다.
박연(朴淵)은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 있는데, 큰 폭포이다. 하연(下淵)이 하나 있는데, 물이 마르면 희생과 폐백을 쓴다. 오행지에 이르기를 “충렬왕(忠烈王) 19년(1293) 겨울에 박연이 고갈되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용사(龍祠) 아래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다. 박연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제석산(帝釋山) 밑을 지나 오조천(五祖川)이 된다. 박연 위는 옛 제명사(題明寺)로, 제명(題明)은 고려의 승려이다. 위에는 밤나무 천 그루가 있으며 또 해송(海松) 천 그루가 있는데 모두 제명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8월에 그 열매를 공물로 바친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천수 7년(924)에 외제석원(外帝釋院)을 만들었다. 문종(文宗)이 성평절(成平節)마다 기복영상도량(祈福迎祥道場)을 7일간 베풀었는데, 성평절은 문종의 수절(壽節)이다. 또 인종(仁宗) 18년(1140)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제석원에서 기도를 드렸다. 의종(毅宗) 7년(1153)에는 왕이 외원(外院)에 거둥하여 나한재(羅漢齋)를 올리고 복을 기원하였다. 서쪽은 상령사(桑靈寺)이며 아래는 운거사(雲居寺)이다. 박연을 지나 관음굴(觀音窟)에 오르면 돌로 된 관음불이 있는데, 천마산 동쪽 기슭, 정광봉(頂光峯) 아래에 있다. 정광봉 서쪽은 미륵봉(彌勒峯)이며 다시 서쪽은 문수봉(文殊峯)이다. 미륵봉 남쪽은 보현봉(普賢峯)이며 천마봉은 문수봉 남쪽에 있다. 그 서쪽은 나월봉(蘿月峯)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목왕(忠穆王) 4년(1348) 겨울에 왕의 병이 위중하자 찬성사(贊成事) 이군해(李君侅)를 보내어 천마산에서 수륙회(水陸會)를 열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천마산 남쪽은 송악산(松嶽山)이다. 고려의 풍속이 귀신을 좋아하여 산 위에 음사(淫祠)가 있다.
안화사(安和寺)는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있다. 옛 우물이 있으며 그 계곡을 자하동(紫霞洞)이라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는 도읍을 정한 뒤에 법왕(法王)ㆍ왕륜(王倫) 등 10개의 사찰을 왕도(王都)에 세웠다. 그 유계(遺誡)에 이르기를 “도선(道詵)은 산수의 역순(逆順)을 점쳐 사찰을 세웠다. 후세에 사찰을 함부로 증설하는 것은 선(詵)이 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지(祀誌)에 이르기를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면 송악(松嶽)의 천수(川水)에서 백신(百神)에게 제사 지내는데, ‘천상사(川上祀)’라 한다.”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덕종(德宗) 3년(1034) 5월에 운석이 송악에 떨어졌다.
예종(睿宗) 13년(1118)에 안화사(安和寺)를 중건하였다. 송(宋)나라 도군황제(道君皇帝 휘종(徽宗)의 별칭)가 태자태사(太子太師) 채경(蔡京)에게 명하여 문의 현판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란 다섯 자를 대자(大字)로 쓰게 하여 내려 주고, 또 16나한 소상(塑像)을 하사하였다. 의종 12년(1158)에 안화사에 거둥하여 석정(石井) 시를 읊었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1342) 8월에 송악이 울었다.
우왕(禑王) 원년(1375) 8월에 송악사(松岳祠)에서 사람이 곡을 하는 것처럼 귀신이 곡하였다. [주-D001] 7년 : 《기언》의 체제로 볼 때 7년은 숭정(崇禎) 7년(1634, 인조12)으로 보인다. 선생은 인조 10년 12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이 당시 거상(居喪) 중이었다. [주-D002] 국조사(國祖祠) : 국조(國祖)는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 보육(寶育)을 말한다. 보육의 딸 진의(辰義)는 당 숙종(唐肅宗)에게서 작제건(作帝建)을 낳고 작제건은 융(隆)을 낳고, 융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낳았다. 이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한데, 자세한 내용이 《송경지(松京誌)》 권7 〈고적(古蹟)〉에 보인다. [주-D003] 산은 …… 이름이며 :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 8 〈송경광고(松京廣攷) 산천(山川)〉에 남효온(南孝溫)이 성거산에서 사식(思湜)이란 승려를 만난 이야기가 있다. 이 승려의 얘기 중에 “옛날 다섯 성인이 이 산 정상에 올라 오두막을 짓고 정진하여 여기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 이름은 알 수 없고 다만 오성(五聖)으로 그 암자를 불렀다. 지금의 남쌍련(南雙蓮)ㆍ서성거(西聖居)ㆍ북쌍련(北雙蓮)ㆍ남성거(南聖居)ㆍ북성거(北聖居) 등의 암자가 이것이다. 이 산의 이름을 성거라 한 것은 어쩌면 또 이 때문인 것 같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잠곡유고(潛谷遺稿)》 권14 〈천성일록(天聖日錄)〉에도 “옛날에 다섯 분의 성승(聖僧)이 있어 이 산에 와서 놀면서 북성거암, 남성거암, 서성거암, 남상령암, 북상령암 다섯 암자에 나누어 거처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면 성거산에는 두 개의 남ㆍ북 상령암과 북ㆍ서ㆍ남 세 개의 성거암이 있다. 또 성거산에는 쌍련사(雙蓮寺)와 성거사(聖居寺)가 있다. [주-D004] 길성(吉聖) : 《읍지》에 길성은 보이지 않고 길상사(吉祥寺)가 보이는데, 성거산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길상사인 듯하다. 《京畿道邑誌9 松京廣攷 佛宇》 [주-D005] 낭성(狼星)이 …… 하여 : 낭성은 침략을 주관하는 별이다. 노인성이 나타났다고 오인한 것은 노인성이 남극 부근 하늘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인성은 남극 또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라고도 하며 사람의 수명을 주관한다. [주-D006] 당시 …… 받았다 : 노인성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이른 것은 2월이다. 당시 왕은 배 안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다가 밤중에 현화사로 가는 도중 큰비를 만나 말을 달려 돌아왔다고 하는데, 장소는 연복정(延福亭)이 있는 서강(西江)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월에 왕은 서울이나 지방 할 것 없이 노인당(老人堂)이 있는 곳은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4월에는 직접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다. 《高麗史 卷19 毅宗世家》 [주-D007] 사단(祀壇) : 오관산사(五冠山祠)를 말한다. 매년 1월과 봄ㆍ가을에 향축과 폐백을 내려 소사(小祀)로 제사 지낸다고 한다. 《京畿道邑誌9 松京廣攷 祠廟》 [주-D008] 오행지(五行誌) : 《고려사》의 편명이다. 이하도 같다. [주-D009] 인종(仁宗) …… 열었다 : 영통사의 동고가 운 것은 인종 9년 11월이다. 또 의종 1년에 《화엄경》을 강하고 24년에 화엄회를 연 내용은 세가(世家)에 보인다. 《高麗史 卷53 五行志 水, 卷17 毅宗世家, 卷19 毅宗世家》 [주-D010] 고려 …… 전한다 : 〈오관곡〉은 〈오관산곡(五冠山曲)〉으로 〈목계가(木鷄歌)〉라고도 한다. 효자인 문충(文忠)은 오관산 밑에 살았는데, 집에서 30리나 되는 서울〔開城〕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변함없이 극진하였다. 어머니가 날로 노쇠하여 감을 보고 슬퍼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목과 그 유래만 《고려사》에 전하며,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뭇조각으로 조그마한 당닭 만들어 집게로 집어 벽의 홰에 앉혔네. 이 닭 꼬끼오 때를 알릴 때 어머님 얼굴 그제야 늙으시려나.〔木頭雕作小唐鷄 筯子拈來壁上棲 此鳥膠膠報時節 慈顔始似日平西〕” 조선조 때 1품 이하 대부(大夫)ㆍ사(士)의 공사연향(公私宴享) 음악과 서인(庶人)이 부모형제에게 연향할 때의 음악에 사용되었다. 《高麗史 卷56 地理志》 《太宗實錄 2年 6月 5日》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2 長湍都護府》 《益齋亂稿 卷4 詩 小樂府》 [주-D011] 화담 은자의 사당 : 사당은 화곡서원(花谷書院)을 말한다. 만력(萬曆) 기유년(1609, 광해군1)에 홍이상(洪履祥)이 이 고을에 유수로 왔을 때 사원(祠院)을 창건하여 선생을 제사 지내고 선생의 고제(高弟)를 배향하였으며 을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松京誌2 學校》 《화담집(花潭集)》 권3 〈연보(年譜)〉에 의하면, 기유년에 창건하고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사액하였다고 한다. [주-D012] 도상(圖像) :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를 말한다. [주-D013] 진전(眞殿) :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주-D014] 승려가 …… 한다 : 패엽경은 고려의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서역의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가서 사사(師事)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경이다. 패엽은 패다라엽(貝多羅葉)의 약칭으로, 패다라는 산스크리트어 pāttra의 음역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인도에서는 패다라라는 이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 [주-D015] 이언대사(利言大師) : 당(唐)의 승려로 서역인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번역에 참여하였다. [주-D016] 하연(下淵)이 …… 쓴다 : 하연은 폭포 아래의 고모담(姑母潭)을 말한다. 박연은 폭포 위쪽에 있는데, 박씨 성을 가진 진사가 여기에서 피리를 불자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데려가 남편으로 삼았다 하여 ‘박연’이라 하였으며, 박씨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떨어져 죽었다 하여 폭포 아래의 못을 ‘고모담’이라 하였다. 박연 위에 신사(神祠)가 있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 《京畿道邑誌8 松京廣攷 山川》 [주-D017] 의종(毅宗) …… 기원하였다 : 의종이 외제석원에서 재를 올린 것은 의종 6년 2월이며, 의종 7년에는 보제사(普濟寺)에 거둥하여 오백나한재를 올렸다. 이 내용은 오류로 보인다. 《高麗史 卷17 毅宗世家》 [주-D018] 관음굴(觀音窟)에 …… 있는데 : 관음사(觀音寺) 뒤에 지붕 모양의 바위구멍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 개의 돌로 된 관음불이 있다고 하여 관음사라 한다. 《京畿道邑誌9 松京廣攷 佛宇》 [주-D019] 충목왕(忠穆王) …… 하였다 : 충목왕 4년 11월 1일에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왕이 아픈 것 때문에 전(前) 찬성사 이군해를 천마산에 보내어 수륙회를 열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高麗史 卷37 忠穆王世家》 [주-D020] 음사(淫祠) : 송악산사(松嶽山祠)를 말하며 《사전(祀典)》에는 중사조(中祀條)에 실려 있다. 매년 1월 향축(香祝)과 폐백을 내려 원상제(元狀祭)를 드리고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절제(節祭)를 지낸다. 고려가 망할 때 사당에서 소리가 났다고 한다. 《京畿道邑誌9 松京廣攷 祠廟》 [주-D021] 태조는 …… 세웠다 : 《고려사》 권1 〈태조세가(太祖世家)〉에 “태조 2년 3월에 도성 안에 법왕(法王)ㆍ왕륜(王輪) 등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22] 그 유계(遺誡)에 …… 하였다 : 태조는 26년 4월에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직접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렸다. 그 두 번째에 이르기를 “각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역순을 점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말하기를 ‘내가 점쳐 정한 것 외에 함부로 더 창설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짐은 후세의 국왕과 공후(公侯), 후비(后妃)와 조신(朝臣)이 저마다 원당(願堂)이라 하며 혹여 증설하여 창건할 것이 매우 걱정된다. 신라 말에 사찰을 다투어 지어 지덕을 손상하여 멸망에까지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高麗史 卷2 太祖世家》 [주-D023] 사지(祀誌)에 …… 하였다 : 《고려사》 권63 〈예지(禮志) 5 길례소사(吉禮小祀) 잡사(雜祀)〉에 “홍수나 가뭄이 들 때마다 송악의 시내에서 백신에게 제사 지내고 ‘천상제’라 불렀다.〔每水旱 祭百神於松岳溪上 號曰川上祭〕”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24] 송(宋)나라 …… 하사하였다 : 《고려사》 권14 〈예종세가(睿宗世家)〉에 “처음에, 감독관이었던 근신(近臣)은 지극히 사치스럽게 하기를 힘써 들어간 인력과 물자가 적지 않았다. 또 사신을 송에 보내 좋은 글씨로 쓴 편액을 구하자, 황제가 듣고 어필로 ‘능인지전(能仁之殿)’이라는 불전의 편액을 쓰고 태사 채경에게 명하여 문액(門額)으로 ‘정국안화지사’란 글자를 쓰게 하여 내려 주었다. 또 16나한 소상을 하사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아 (역)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