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에 마음을 놓다
- 이주은의 ‘그림에, 마음을 놓다’를 읽고-
때로, 혹은 자주, 나는 내 글에 권태를 느낀다. 등단한지 수십 년 세월에 작품집을 달랑 하나밖에 내놓지 못한 것엔 이런 심리가 적잖이 작용했다. 다른 수필가들의 글을 읽는 것은 기분전환이 되기도 했으나 제도권의 대부분 수필에서는 익숙한 맛에서 오는 모종의 식상함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작품의 격이나 질이 문제된 건 아니었다. 그건 집 밥의 장점을 알면서도 이따금 남의 집이나 밖에서 먹는 색다른 음식에 구미가 당기는 것과도 유사한 거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허기를 메우려 곧잘 서점을 서성거렸다. 남들이 좋다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먼저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진열대에 놓인 책과 벽을 향해 도열해 있는 책들을 무심히 일별할 뿐이다. 내용이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꽂히는 제목에 마음이 닿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 내 눈길을 잡아 끈 책이 이주은의 <그림에, 마음을 놓다>였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가 아니라 그림에, 마음을 놓다.
이 책은 표지에서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적 치유에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림만 봐도 좋을 텐데 에세이, 그것도 심리치유 에세이란다. 뭘 더 망설일 것인가. 급히 책장을 들췄다. 목차는 ‘사랑을 두드리다’ ‘타인에게 말 걸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로 되어 있고 각 파트마다 세부적인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 반가웠다. 이건 아무 페이지나 들어가 읽어도 된다는 거니까. 요즘 나는 이렇게 아무 데나 열고 들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특히 좋으니까.
손길 닿는 대로 그림을 훑다가 자유로이 책장을 넘기며 글줄을 읽어 내렸다. 미술을 다룬 서적은 대체로 작품 해설과 더불어 작가나 작품에 얽힌 곁가지 내용들이 실리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처음부터 저자의 개인적 에세이로 출발하는 게 이채로웠다. 단순한 미술 해설이 아닌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필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점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내용들은 쏙쏙 머릿속으로 안착되었고 그 맛에 이끌려 나는 절로 그림에 가만히 내 마음을 내려놓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던 작품들은 알고 있기에, 모르던 작품들은 몰랐기에 내 호기심을 부추겼다.
책값을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우선 피카소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의 대작 <게르니카>는 꽤 많이 접한 작품임에도 그간은 독일 나치의 공습에 의해 무자비하게 폭격 당했던 참혹한 스페인 내전을 형상화한 거라는 정도의 단편적 지식에 머물러 있었다. 피카소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다양한 뮤즈를 필요로 했다는데 저자는 ‘나는 사회적 주제를 다룬 그림일지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면서 그것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그림이지만 사적으로는 피카소가 일으킨 피카소의 여인들 도라와 마리 사이의 전쟁이라고 해석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우리 삶이 그러하듯 예술 작품도 감상자에 따라 이렇게 다른 각도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전에 내 졸고들을 꾸려 작품집을 냈을 때도 독자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좋게 읽은 글을 알려주기도 했는데, 십인십색이라고 각기 다른 작품들을 지목하였다.
다시 책장을 넘기다 낯선 그림에 눈길을 멈추었다. 도로시아 태닝의 <생일>이라는 그림이다. 같은 제명의 그림으론 마르크 샤갈의 작품이 뇌리에 남아 있는데, 도로시아 태닝의 생일은 그림을 보는 순간 뭔가 불온한 기분이 엄습했다. 한 미모의 여인이 어느 공간에 서 있고 척 봐도 네댓 개가 넘어 보이는 문들은 하나같이 밖이 아닌 안쪽으로 열려 있다. 뭘 의미하는 걸까. 그림 속의 여자가 자꾸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아 해당 부분 소제목을 찾아본다. ‘중독, 탈출과 감금 사이’라고 되어 있다. 내처 저자의 서술을 읽어 나갔다.
‘중독성이 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탈출에서 시작하여 감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중독은 이렇듯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잊고 싶은 건 현실이었는데, 정작 잃은 건 나 자신인 것이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질투>도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남자가 방 안에서 정면을 향하고 있다. 표정이 멘탈 붕괴로 보인다. 남자의 저만치 뒤에선 남녀 한 쌍이 엉겨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중이다. 이 작품은 뭉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그린 거라고 한다. 번번이 느끼는 거지만 그림이나 음악의 효과는 문자로 풀어가는 문학에 비해 훨씬 즉각적이다. 특히 회화는 한 장면으로 보는 이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한다.
언어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저자는 총 62개나 되는 그림의 행간마다 철학적 심리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나를 빨려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허물이나 아픔, 대인기피증 같은 민낯도 여과 없이 드러내어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원고를 쓰다 말고 무심코 이 책의 아무데를 펼쳐들었다. 한 여인이 해변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쥔 채 울고 있다. 그 옆의 노부老婦는 오른 손으로 여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윌터 랭글리의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구나>이다. 그림만으로도 그냥 통증이 왔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불렀던 단장의 파두 가락이 들려오는 듯 했다.
‘…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의 지친 두 팔로 나에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어요.
바닷가 노파들은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미친 여자들이야! 미친 여자들이야!…….’
(2018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