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에 북악스카이웨이를 거쳐 12사태때 총탄자국을 보며 등산하다가 삼청각으로 내려와
성북동길로 걸어 길상사까지 온 적이 있다.
조교수와 함께 오랫만에 다시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 가는 길에 주변 대사관길등을 운동삼아 구경했다.
대사관은 물론 잘사는 사람들의 집이기에 한 채 한 채가 모두 성 같았다.
건물 벽체 두께가 달랐고 담장도 중세시대 성처럼 견고 했고 목재도 니스칠이 어제 지은 것처럼 빛났다.
길상사는 '기생'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물론
기생에 대한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게 하는 훌륭한 사람 고 김영한 의 인생을 보면서
스스로를 뒤돌아 보게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며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고 같은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상사의 주지가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의 소박한 공덕비와 사당
성북동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은 대사관 촌을 거쳐 이 곳을 거쳐 다시 하수구로
과거 손님 받던 방갈로가 지금은 스님들의 수행장소나 거처로 바뀌었다.
모든 사물은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칼도 장수가 쓰거나 백정이 쓰거나 범인이 쓰거나~~ 그 가치는 천지차이다.
법정스님이 기거했던 곳
법정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2010년에 입적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와 진리의 길을 찾아 1956년 효봉학눌의 문하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기초를 다진 후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쌍계사,해인사,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 했다.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불교사전 편찬,불교경전 역경에 헌신하였으며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수행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홀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1994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를 창립하여 이끌어 주었고 무송류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성북동의 대원각을
무주상 보시하여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하였다.2010년 3월11일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길상사 행지실에서 입적하시었다.
저서및 역서로 '무소유''버리고 떠나가''물소리 바람소리''화엄경''숫타니파타'등이 있다.
이 곳에서 법정스님이 수행하며 기거했었다.길상사 멘 위쪽에자리했다.
법정 스님의 유골은 화엄사에 일부 이 곳에 일부 뿌려졌다
고관대작들의 질펀했던 요정이 정숙한 절로 바뀌었다는 자체가 놀랍다.
보호수인 느티나무. 수령 270년
길상7층보탑은 조선 중기(1600~165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네마리의 암수 사자가
기둥 역할을 하며 입을 연 두 마리는 교를 상징하고 입을 다문 두 마리는 선을 상징한다.
4사자 가운데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인은 정면에서 시계방향으로 선정인향마촉지인,
(통인-통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으로 이뤄짐)전법륜인을 하고 있다.
이 탑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님이 법정스님과 길상화 보살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종교화합의 의미를 전하고자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2012년 11월11일 기단부에 오장경,금강저,오불,108침향염주,다라니 등을 봉안하였다.
이후 시절인연으로 미얀마의 제1보궁 우뚜리와 완사 큰스님이 1,600년 전 고탑 해체과정에서 직접 출토한
부처님 오색정골사리,구강사리,응혈사리와 제자인 목건련존자,마하가섭존자,라흘라존자 등의 사리를
2013년 8월25일 탑신부에 봉안 하였다.불보살님의 사리가 모셔진 이 길상보탑에서 기도한 공덕으로 모든 공덕으로
모든 분들이 부처님의 무량한 기피 받으시고이고독락 하시길 발원합니다.
화장실 표시판-특이해서
성북동 저택들
모든 집이 좋게 말하면 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토치카,군대 진지 같다.
우리나라에는 재벌 대기업만 부자가 아니다.중소기업,사채업자, 등 돈 많은 사람들 많다.
군데군데 경비원 경찰 초소가 있다.cctv 적외선 감지기 등 방범시설도 확실하다.
삼청각에서 이쪽으로 길이 나 있어 차량 통행량이 은근히 많지만 인도가 확보되지 않았다.
성락원
성락원은 고종의 아들 의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이 독특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이곳은 원래 철종때 이조판서를지낸 심상웅의 별장이었는데 의왕 이강이 이곳을 별궁으로 사용하다가 그의 아들 이건이
이곳에 살았다고 전해진다.이곳은 전원,내원,후원의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영역마다 성격이 뚜렷하게 만들었다.
쌍류동천은 두 갈래의 개울물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으로 이곳에는 쌍류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암벽이 놓여있다.
용두가산은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동산으로 깊숙한 내원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했다.
내원에는 영벽지가 있고그 옆에 한옥이 있다.영벽지는 인공을 가미한 작은 연못으로서 연못 서쪽 암벽에는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집'이라는 뜻의 장빙가라고 쓴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다.
한편 후원에는 또 하나의큰 연못이 있고그 옆의 경사진 곳에는 정면 7칸,측면 2칸 규모의송석정이라는 누각 정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