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굴암 용굴암은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전하는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부터 시행된 배불정책으로 많은 절들이 산중으로 피해 소규모로 명맥을 겨우 유지해 왔는데 용굴암도 이러한 암자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추정만 할 따름이다. 사찰에서는 용굴암의 시작을 1878년(고종 15)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불교의 상황에 비추어 박해받던 몇몇 수행자들이 모여 동굴 속에 불상을 봉안하고 참선수행을 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용굴암이라는 절 이름은 언제부터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한전인 자연동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의 연혁도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사찰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경복궁에 난입한 성난 군인들을 피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여주 지방으로 피신하던 도중 이 절에 들러 하루 밤을 묵으면서 자신의 무사를 기원했다고 한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명성황후가 환궁하여 다시 세력을 잡자 이 절에 하사금을 내려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법당을 짓게 하여 비로소 용굴암은 절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용굴암은 다시 폐사가 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혜암스님이 중건을 하였다. 스님은 법당을 중수하고 1977년에는 범종각을 짓고, 범종을 봉안하였다. 1983년에는 재정(在正)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안에 아미타후불탱·신중탱·칠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나한전을 중수하고 안에 석조석가모니불좌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1991년에는 석조미륵불입상을 봉안하는 등 여러 불사를 통해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고 오늘의 용굴암이 되게 하였다.
용굴암 안내석
용굴암 오르는 길
수락산 탱크 바위밑에 자리한 용굴암
법당 가는 길
용굴암 석등
용굴암 요사채
용굴암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벽은 시멘트로 이루어졌고 지붕은 목조동기와를 올렸다. 외부의 벽면에는 문수동자가 타고 다닌다는 푸른 사자가 홀로있는 장면과 소나무 아래에서 참선에 잠긴 나한, 산수도 등이 그려져 있다. 안에는 선정인을 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아미타후불탱·신중탱·칠성탱, 그리고 산신탱과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상을 봉안하였다. 이 가운데 불화는 모두 1983년에 화공 엄기우가 그리고 당시 주지였던 재정(在正)스님이 봉안한 것이다
용굴암 범종각
용굴암 대웅전
용굴암 대웅전내 산신탱
용굴암 대웅전내 칠성탱과 신중단
용굴암 나한전 자연동굴을 개조하여 법당으로 만든 것으로 용굴(龍窟)이라고도 한다. 입구는 화강암을 아치형으로 쌓았으며, 아크릴로 된 문을 달았다. 안에는 1983년 당시 주지였던 재정(在正) 스님이 동굴을 중수하고 봉안한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석조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16나한상은 동굴의 벽면에 작은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봉안하였는데, 들쑥날쑥한 것이 더 친근감이 든다.
용굴암 나한전 자연동굴을 개조하여 법당으로 만든 것으로 용굴(龍窟)이라고도 한다. 입구는 화강암을 아치형으로 쌓았으며, 아크릴로 된 문을 달았다. 안에는 1983년 당시 주지였던 재정(在正) 스님이 동굴을 중수하고 봉안한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석조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16나한상은 동굴의 벽면에 작은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봉안하였는데, 들쑥날쑥한 것이 더 친근감이 든다.
용굴암 미륵불
용굴암 찾아가는 길 4호선 종점 당고개역에서 한우리 타운으로 올라 여기서 우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방범초소가 있고, 그 뒤로 학림사로 이어진 산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곧장 가면 학림사에 닿는다. 그러면 학림사 주변에 주차를 하고 다시 학림사 해탈문 오른쪽 계곡을 끼고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1.3km 올라가면 용굴암에 닿는다. * 당고개역에서 시장 길을 통과하여 가야하기 때문에 운행에 조심해야한다. 당고개역에서 용굴암까지는 2.7km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