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도착한 미래의 초상화
조대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중 <컨택트>라는 작품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비행 물체가 세계 각지에 등장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이 시도되는데, 그 대면의 방식은 대화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무력시위를 주장하는 강경파의 방식으로 양분된다. 이는 할리우드 서사에서 외계인이라는 낯선 타자를 맞이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대립 구도인 듯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외계인과의 접촉 과정에서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닌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우주인들의 언어는 미래와 과거를 한순간에 표현한다. 언어가 사용자의 인식에 깊이 관여한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가령 주인공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미래에 벌어질 딸의 죽음과 그 이전의 과거들을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선형적 시간관의 언어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감각이다. 해당 영화를 수입한 배급사는 외계인과의 접촉에 초점을 맞추고, 동시에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동명의 SF 명작 영화를 의식하며 <컨택트>라는 제목을 붙인 듯싶다. 하지만 원래의 제목 'Arrival'의 의미가 소거되어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이 영화는 지구에 도착한 외계 생명체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미 도착한 미래 혹은 시간을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달한 미래라는 모순된 시간의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어의 ‘전미래(Le Futur Antérieur)’라는 시제의 개념을 잠시 빌려보자.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미래보다 이전에 발생할 미래 또는 미래보다 먼저 완료될 미래이다. 예컨대 ‘내게 연인이 생긴다면, 그와 세계 여행을 떠날 거야!’라는 문장을 상상해보자. 문장 속 ‘나’에게 두 가지 사건은 모두 미래의 일이지만, ‘연인이 생기는 일’이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미리 발생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이처럼 먼저 도착한 미래는 결과에 따라 이후의 미래를 결정한다. 또한 그것은 이전에 완료되어버린 과거를 바꾸기도 한다. 연인의 탄생이라는 미래의 사건은 과거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나 접촉을 모두 사랑의 기호와 조짐으로 재배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미래의 사건이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영화 속 루이스의 경우처럼 이미 도착한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도착한 미래가 딸의 죽음이라면, 우리는 이미 완료된 미래의 비극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사건을 향해 연기하듯 삶을 배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감각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는 쉽지 않은 질문일 것 같다. 여기 그 희귀하게 엉킨 시간의 실타래를 직조하는 한 시인이 있다.
당신이 말한다
여행자의 손은 모래 바람
꿈 없이 걷는 연인들
달 빛 아래에서만 존재하는 바다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있다고
나는 당신의 젖은 티셔츠
쇼파에서 편안한 키스
우린 너무 쉬운 악기가 된다
쟝은 하룻밤 사이 천천히 늙어서
할머니가 된 나디아가 차려준 밥을
이도 없이 먹는다
나를 당신이 너무 생각해서
나는 700년 동안 밤이 된다
- 이성진, 「미래의 연인 8 - 백패킹Backpacking」 부분
이성진 시인은 첫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지금까지 ‘미래의 연인’이라는 제목의 시편을 더러 발표해왔다. 그 작품들 속에는 독특한 시간성을 지닌 미적 세계가 형상화되어 있는 듯하다. 이번 작품에는 특별히 ‘백패킹’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일반적으로 백패킹이란 짐을 짊어지고 떠나는 도보 여행 또는 도심을 떠나 자연에서 즐기는 배낭여행 등을 뜻한다. 실제 위 시편 속에는 “여행자”의 이미지들이 여럿 등장한다. 다만 백패킹이라는 시어를 짐을 싸는 의미와 더불어, 과거를 다시 포장하거나 추스르는 의미로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미래의 시간 감각을 빌려와 ‘미래의 연인’을 살펴보자. 작품 속 “쟝”은 “하룻밤 사이 천천히 늙어”버린 “나디아”의 모습과, 할머니가 된 연인이 “차려준 밥을/ 이도 없이 먹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막연하게 그려보았던 미래가 명료한 모습으로 눈앞에 도착하고 난 이후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선 영화에서 딸의 예정된 죽음을 감각한 주인공의 삶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이미 당도한 미래를 목격한 ‘쟝’의 삶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뒤바뀔 것이다. 쟝과 나디아의 과거는 도착한 미래를 향해 재배열된다.
따라서 작품 속 ‘미래의 연인’이 “꿈 없이 걷는 연인들”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설핏 이해가 된다. 이 연인들은 꿈과 희망을 품고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이 다가오는 미래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 예정된 미래의 불가피성과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추락의 이미지이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나’는 약속처럼 미래의 지면과 맞닿을 것이다. 불변하는 미래는 그대로 있고, 그곳을 향해 나의 “자의식만 떨어진다”(「미래의 연인 8 - 백패킹Backpacking」).
비슷한 추락의 이미지가 다른 시편에서도 반복된다. 가령 해가 떨어지는 빌딩 위에서 춤을 추던 ‘나’는 “잠시 땅없이 춤만 추기로” 마음을 먹는다.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춤을 추게 된 나는 당연하게도 빌딩 아래의 지면을 향해 “점점 내려가고”, 내가 지표로 추락하는 만큼 “해는 갑자기 떠오”(「해가 떨어지는 빌딩에서 나는 여럿이서 춤을 추었지」)른다. 지면과 부딪히는 일이 이미 도착해 있는 불가피한 미래라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낙하와 도달의 과정 동안 충실하게 춤을 추는 일이 아닐까.
물론 이 같은 미래의 시간 감각만으로 시인의 작품이 온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위 시편의 아름다움은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은유들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나는 “우크라이나 버려진 수영장”, “커다란 눈동자”, “여권을 만지는 손”, “남아도는 시간”, “라즈베리 향이 나는 여자”, “당신의 젖은 티셔츠”(「미래의 연인 8 - 백패킹Backpacking」)로 정의된다. 빙하, 사막, 창공 등의 공간과 과거의 여러 시간들이 교차되는 이 다채로운 메타포들을 손쉬운 설명으로 환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는 점이다. 내가 훔쳐본 미래의 연인인 당신 때문에 혹은 “나를 당신이 너무 생각”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나의 과거는 거듭 다시 쓰인다. 나는 “700년 동안 밤이 된다”.
나는 여전히 알파벳을 거꾸로 새고
행운이 많은 너를 만난다
물결을 가지고 있는 네가 좋다
손에는 항상 무언가 쥐고 있다
가령 잼이 발린 식빵이라든지, 부루마블 주사위 두 개라든지, 같이 쓰던 사물함 복사키라든지
그런 것들을 들게 하고
너는 항상 나를 그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핸드폰을 공중전화 박스에 놓고 오면
부스 안에서 매번 첫 눈이 내린다
내 얼굴을 만지는 딸이 보인다
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딸은 아무 말이 없다
너는 숲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내 발자국을 줍고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순서대로 서있다
너는 다시 나를 그리고 있다
새가 뒤로 날아가는 날이다
- 「밑그림」 부분
700년의 밤을 헤아리던 시인은 위 시편에서도 “여전히 알파벳을 거꾸로 새고” 있다. 수효를 셈하는 ‘세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와 유사한 ‘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아마도 “뒤로 날아가는” “새”의 형상과 나의 모습을 겹쳐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꾸로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나’는 어제를 헤아리며 밤을 지새운다. 그런 내 앞에 항상 ‘너’가 있다. 네가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다. 너는 앞선 시편처럼 언뜻 만나본 미래의 연인일 수도 있고, 훗날 태어날 나의 ‘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너와 내가 늘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네가 내 손에 쥐어주는 사물들은 “잼이 발린 식빵”, “부루마블 주사위 두 개”, “같이 쓰던 사물함 복사키”처럼 항상 붙어 있거나 함께 쓰는 성질의 것들이다. 함께하던 추억의 사물들을 일종의 오브제로서 내 손에 건네주고, “너는 항상 나를 그린다”.
‘미래의 연인’에서 나의 과거를 재배열하던 당신과 같이, 내 존재의 초상화를 스케치하는 것은 결국 너인 것 같다. 미래로부터 도착한 너는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듯 “내 발자국을 줍고” 과거의 나를 재탄생시킬 것이다. 네가 나를 그릴 때마다 “나는 다시 순서대로” 조립된다. “나는 건물”처럼 “계속 부서지고” 너는 거듭 나를 축조한다. 일반적인 언어 감각 속에서 ‘미래(未來)’는 늘 오지 않은 미달태이다. 그것은 지금 볼 수 없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까닭에 미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도착한 것으로, 볼 수 없는 미래를 이미 보이는 것으로 감각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안보이는 것을 계속 보려고”하고, “아무것도 없이 계속 보려고”(「달 위에 기린이」) 한다. 그가 언뜻 느낀 것이 ‘기린의 웃음’이었는지, 하룻밤 새 늙어버린 미래의 연인의 얼굴이었는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손길이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만들어 놓은 아름답고 이상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거꾸로 날아가던 새의 시간과 이미 도착한 미래의 밑그림을 잠시 훔쳐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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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8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