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49:1-4 할렐루야 새 노래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앞의 시들과 다음에 나오는 제 오 권의 마지막인 150편과 이 시편을 비교해 본다면, 지금까지는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과 연관하여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보호에 관한 내용을 읊었던 것에 반해 이 시편에서는 오직 교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서만 노래하고 있다는 유일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150편에서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1. 본문 1절은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서두에 나오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붙여진 권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특정적으로 부여되는 특별한 자비로움으로 보다 풍부한 찬미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 작시연대(作詩年代) 에 관해서 가장 타당성 있는 유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역사 중 어느 시점에서 기쁜 소식으로 즐거워하고 있을 때였거나 아니면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고국으로 귀환한 이후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당한 상태로부터 다시 일으켜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이 부여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가진 의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만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소망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우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완전한 구원에 대한 전조(前兆)가 갑작스러운 시기에 뜻하지 않은 모습으로 귀환에 관한 허락 속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도 어느 시점에서 단번에 완전한 회복을 얻었던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련 속에서 점차 회복되었으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토록 절실히 요구되던 활력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지위에 이르렀던 것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장차 일어날 여러 악에 대한 해결책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도 교회가 소생하여 호흡을 시작할 수 있게 되자마자 다시금 갖가지 악으로 괴로움을 당했으며 안티오쿠스의 잔혹한 폭정으로 핍박을 받고 마침내 무서운 이산(離散)의 운명을 당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49 편
따라서 선지자인 시편 기자는 메시아께서 일어나셔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그의 앞에 모으시는 날까지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호를 마음 속 깊이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완전히 성취될 것을 소망하도록 권면하는 바탕에는 그만큼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자는 이것을 “새 노래” 라고 부르는 바 다른 곳에서 살핀 것처럼 성도들에게서 찬양이란 영속적인 본분이기에 이런 “새 노래” 곧 새로운 찬양을 성도들이 통상적이고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시편 기자는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은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획기적이고 특정적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 시의 작자가 누구였든지 우리는 그 시편 기자가 이사야서의 한 구절인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사42:10) 를 은근히 끌어와서 장차 있을 교회의 회복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 1절 하반절에서는 장차 되어질 어떤 약속에 대한 말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을 권면합니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엄숙한 회중(會衆)에서 준수될 수 있기 위해서는 장차 교회가 한 몸으로 다시금 뭉쳐질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 중에 산산이 흩어져 있었기에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137:4) 하고 불평 어린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 향한 거룩한 찬미의 노래들이 그치게 되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백성들을 향하여 이 슬픈 이산(異散)이 그친 후에 다시 한번 거룩한 성도들의 회중이 모여 뭉치게 될 것을 예비하도록 타이르는 것입니다.
2. 본문 2-3절은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 (子民)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1) 본문 2절 상반은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헛되이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늘 마음 속에 생각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택하신 백성에게 내리신 자비하심을 헛되게 하거나 소멸되어서 “무”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49 편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굳게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쉴 것을 그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똑같은 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실 때 서약이었던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앗긴 바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편 기자는 ‘그들을 지으신 자이시며 시온의 자민(子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열방 위에 뛰어난 백성으로 택함을 입도록 하셨을 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95편 6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바(칼빈 :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 한글)’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지으시고 새로운 영광을 내리사 다른 모든 인류로부터 분간하시고 구별되게 하셨던 까닭입니다.
2) 본문 2절 하반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호칭은 한결 폭 넓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 백성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지으심을 입었기에 이 사실은 곧 항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춤추는 것이나 악기들은 갓 태어난 교회 초기 시대에는 매우 기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들도 옛 하나님의 백성만을 위하여 정해진 제도로 쉽사리 단정해 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미 언급했던 바 그들의 종교적 집결체가 비록 한동안 중단되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회복될 것이며 다시금 하나님께 향한 합당한 예배 절차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3. 본문 4절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입니다.
이 구절에 나온 동사 רצה(라차)에 관해서는 다른 대목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서 이 동사가 뜻하는 것은 “값없는 은총”이라는 의미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스스로 택하신 것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거로부터 이 구절 하반절에서 덧붙여진 내용, 즉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는 말씀이 드러납니다.
시편 149 편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자들에게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새로운 영광을 내리실 것이라는 의미가 도출됩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ענוים (아나빔)은 원래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훗날에는 ‘불쌍한, 또는 겸손한 자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갖가지 질고(疾苦)는 다분히 오만한 마음을 억누르고 그 반면 풍요는 잔인한 성품을 공포함으로써 현재 처한 갖가지 사악함으로 야기된 슬픔을 누그러뜨립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에 성도들에 임하는 합당한 위안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은 갖가지 고통으로 비록 핍박가운데 있으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장차 다가올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구절이 의도하는 요지는 그의 사랑을 택하신 백성 위에 온통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께서 현재 이 백성이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비참한 상황으로 그들을 내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기뻐하신 의지로 택하여 부르신 자들을 한때 겸비하도록 다루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 효과 없이 지나치시는 일이 아니고 그들을 건실하고 아름답게 하실 하나님의 일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자들이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일생동안 계속해서 감사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편 149 편
시149:5-9 성도들은 영광 중에
(1) 이 시인은 성도들이 그 구원으로 인하여 찬송해야 될 것을 고조합니다.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성립시키셨습니다(2절 상반).
또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성도들의 구원을 왕으로서 이루셨습니다(2절 하반).
그리고 그 성도들 측에서는 겸손함으로서 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4절).
겸손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떤 공의의 의(義)를 자력(自力)으로 세워서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극도로 낮아질 뿐 하나님 홀로 이루어 주신 것을 받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시인은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종말관적(終末觀的) 지위를 예언합니다. 그들의 종말관적 지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거룩한 판단대로 불신세계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세관은 신약 성경 말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 본문 5-6절은 “(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 지어다
(6)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즐거움과 기쁨과 하나님의 존영(尊榮)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이 구절들이 엮어 낼 놀라운 효과, 곧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보편 은총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백성에 대한 구원이 만일 두드러진 어떤 종류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이 큰 기쁨, 심지어 승리의 개가를 부를 여지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표현으로 시편 기자는 이 백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자마자 즉시로 다시 이산(離散)의 쓰라린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종류의 복을 누리는 가운데 번영되도록 돌아올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중에 시편 기자가 “침상(소파 - 칼빈)”이라는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날마다 쉼을 얻게 될 사실을 소망하도록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시편 149 편
또 시편 기자는 여기서 백성들이 무기와 권능으로 무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원수들을 내쫓기 위해서 뿐 아니고 원수들을 어느 구석까지든지 뒤쫓아서 마침내는 전날 그들을 억압하고 다스리던 모든 왕들과 열방들을 굴복시키고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두 날 가진 칼”이라는 표현은 당시로서는 한 날 가진 칼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양면에 날을 세운 칼을 의미합니다.
2. 본문 7-8절은 “(7)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입니다.
포로 생활에 처해 있었을 때에나 그 생활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온 훗날에도 이 구절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 전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마카베오의 무리와 그 후손이 이웃나라들을 쳐서 굴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차 올 엄청난 사실에 대한 희미한 전조(前兆)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전조로 나타난 이런 사실까지도 주의 백성들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가 제2의 성전이 제1의 성전보다 훨씬 큰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지금까지 어떤 시대에도 없었던 보다 큰 영화가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하고 있습니다(학2:9).
비록 지금은 유대백성들이 숫자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있는 모든 것의 위치도 비천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편 기자는 모든 열방, 곧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압제를 가한 모든 나라를 향해서 이스라엘의 권세가 그들 위에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공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속국의 위치에 있고 또 묵허(黙許) 아래에서만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기 에 냉정한 마음으로 판단할 때 곧 눈앞에 그려볼 수 있는 어떤 약속의 말씀에 그 믿음을 뿌리박는 한편 모든 세상적인 장애물을 물리치고 최후 승리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에 관하여 그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수는 결코 개인적인 분노의 불길 아래에서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적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하게 되는 순수한 수종적 혹은 순종적 활동으로서 복수입니다.
여기서 이 점을 명백히 해두는 것은 그들 유대 백성들이 결코 개인적인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보복하는 행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49 편
다음 절에서는 “왕들”과 “귀인들”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 절에서 읊은 내용을 보다 확대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기자가 단순히 민족들과 나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더라면 그 의미가 평민과 비천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국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한결 폭 넓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왕들과 다른 귀족 계급의 사람들도 사슬에 묶인 채 형벌을 받으려 끌려 나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까지는 이 놀라운 진상(眞相)의 오직 작은 부분만이 실현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앞에 언급했던 내용과 더불어 반드시 기억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카베오의 휘하에서 누렸던 아주 사소한 번영은 단 한가지의 사실 곧 이러한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끌고 유지하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한 예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49:10) 라는 말씀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카베오는 다른 족속으로부터 일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당시 정상적인 질서가 무너졌고 백성의 영화로운 지위를 그들이 거둔 여러 차례의 전승(戰勝)에다 그 바탕을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 공중누각과도 같은 허망한 시도라는 사실을 유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이 주의 백성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 계획에 따라 유대족속으로부터 통치권을 의도적으로 물리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유대백성들은 이 획기적인 승리로 인한 자만에 젖은 채 참되고 본질적인 구원에 그 마음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 백성이 누리게 될 영화의 완전한 성취에 관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곧 메시아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아에 관한 기다림과 소망이 그들이 영화로울 때나 역경에 처했을 때나 항상 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본문 9절은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는 말은 앞선 8절까지에서 그가 서술했던 내용을 개괄적으로 묶어 언급한 것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백성에게 호전적인 잔인함을 지닌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무장할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149 편
일견 이러한 말은 대단히 어색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들로 부름받은 그들이 학살을 감행하고 사람의 피를 쏟기 위해 칼을 빼들고 나서게 한다면 과연 자비에 관한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자신께서 이러한 복수의 장본이신 때에는 그것은 결코 잔혹한 행위가 아니라 공의로운 판단이신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기록한 판단”에 관한 언급을 하는 것은 시편 기자가 유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유로운 해방, 곧 이방인들과 폭정의 군주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겼던 자유를 되찾게 된다는 것과 유대 백성이 기록된 판단대로 시행한다고 해서 결코 책망들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주의 뜻을 따르는 기자의 의도로 상기하지 않는 어떤 해석도 오류입니다.
시편 기자는 유대백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관해 개인적인 분노의 영향을 받아 시행해서는 안되며 감정에 고삐를 달고 통제를 가할 것을 생각하도록 충고하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말하면서 시인이 밝히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행하도록 명령을 받을 때 외에는 결코 복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온화하고 겸손한 자세가 무너지고 결국은 자신의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충동에 불복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거나 음성을 높이시지도 않았으며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마12:20)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성품을 지닐 것을 가르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해답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철의 홀로 무장하시고 이에 의해 강퍅하고 항거하는 자들을 꺾으시며 또 다른 구절에서는 그가 도처에서 원수들을 짓밟으심으로 해서 피로 물들 것이며 그러면서도 조금도 지치시지 않으신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사67:2).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인간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이처럼 엄청난 모독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언젠가는 무서운 가혹함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구절에 기록된 교의(敎義)는 이처럼 우리의 실천으로 옮겨질 때 정당하게 신론적으로 해석되고 신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내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두 날을 가진 칼에 관한 이야기도 특히 유대 민족들에 대해 적용되는 말이고 이러한 종류의 권한을 허락 받지 못한 우리 이방인들에게 부여된 말씀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편 149 편
이 세상의 모든 통치자나 관리들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모든 형태의 폭력을 징벌할 수 있는 칼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복수는 그네들의 직분에는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전체 교회의 회중(會衆)에 관한 이제 우리 손에 쥐어진 칼은 이와는 다른 종류입니다.
이 검은 말씀과 성령의 검으로서 이를 가지고 우리는 전날 우리 원수였던 자들을 취해 하나님께로 드리는 희생제물을 삼기 위해 죽임을 행할 수 있고, 그리해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시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입니다(엡6:17).
이사야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한 말씀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11:4) 라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몸된 모든 종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치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이 평온한 마음으로 이런 한계 안에 그들의 직분을 한정시킨다면 언젠가 원수들에 대한 복수의 약속이 결코 헛되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앞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기록된 판단을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시도할 수 없도록 우리 영혼과 우리 행위 양자 모두에 제한을 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끝 부분에서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은 경건함을 지키도록 하려는 권면의 뜻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행여 잘못 생각하는 일,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 늑대와 같은 위험한 야수성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하다는 생각 아래 노여움과 격함에 그들의 몸을 맡겨 버리는 데 대해 우리는 자비로움과 인내 속에서 늘 거함으로써 패배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고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뒷받침을 해 주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거인의 힘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손가락 하나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고요한 영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영광스럽고 뛰어난 사면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시150:1-6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이 시편 말씀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149편과 동일합니다.
이 시편에서 할렐루야 시편 말씀과 전체 시편 말씀의 절정에 이릅니다.
이 시편이 “할렐루야” 시편의 마감이면, 앞(146-149편)의 저자가 지은 듯합니다.
(1) 이 시편에는 먼저 누가 어디에서 어떤 분에게 찬송하게 되는가? 가 밝혀집니다.
(2) 또 찬송할 장소가 총동원되어 “성소”와 “궁창”에 찬송으로 채우게 합니다(1절). (3) 이 시편 말씀은 찬송 받으실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또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 을 인하여 찬양하라고 권합니다(2절).
(4) 이 시편 말씀에는 찬송할 수 있는 악기들도 총동원 되어 있습니다(3-5절).
(5) 이 시는 찬송할 자들도 총동원되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송하라고 합니다(6절).
1. 본문 1-2절은 “(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 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쫓아 찬양할지어다”입니다.
1) 이 시편에서는 전체가 찬양 드림으로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를 찬미합니다.
여기서 “성소” 라는 말은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사실상 “하늘 성소”를 의미합니다.
1절 후반부는 동일한 의도를 되풀이한 말씀으로서 전반부를 해석한 내용입니다.
여기 “성소” 라는 뜻으로 쓰인 רקיע (레키아) 는 원래 ‘하늘의 확대’ 라는 의미입니다.
“권능의” 라는 형용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에 대한 증거를 볼 수 있기에 인간들이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항상 하나님의 권능을 찬탄하도록 의도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곧 그 해석은 ‘하늘에 거하는 천사들과 궁창 아래 거하는 인간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해석인데, 이것은 억지이고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의 의도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일에 나태해져 가는 인간들의 심령을 깨우기 위하여 하늘 성소를 바라볼 것을 간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건한 마음으로써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하늘 보좌 위에서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2) 2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이 명백히 드러나 보이는 거울과 같은 하늘에서 우리를 깨우쳐 찬양하도록 권면했던 사실을 찬양하면서 같은 진실을 보다 확대시킵니다.
시편 150 편
우리가 이러한 종교적인 봉사, 곧 우리의 공적 예배와 일상의 섬김에서 우리 심령을 다하도록 마음에 정열을 지니고자 한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깊이 고찰해야 합니다.
다음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무감각을 쉽게 쫓아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극히 광대하신 주의 위대하심을 합당히 받아들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조금 맛보는 정도로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드리는 찬양을 거부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2. 본문 3-5절은 “(3)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악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들에 관해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악기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옛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율법 중에 의식법에 속한 규례적(規例的)인 성격을 띠고 열거된 것으로서 옛 시대 곧 유아적 교회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옛 시대의 규례적 규범은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 기울인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법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다 강력하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그들이 지닌 모든 능력을 힘써 바치며 그 마음을 전심으로 드릴 것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악기로 찬양의 노래를 바칠 것을 명하시는 것은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그들이 너무도 깊이 빠져있는 중독, 곧 헛되고 부패한 쾌락들로부터 벗어나서 거룩하고 유익한 기쁨으로 그 마음을 주께로 돌리도록 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엄청난 방종에 취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있어서도 부당하고 어리석은 많은 방법들을 만들어 내고 심히 몰두하면서도 그 가장 즐기는 만족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생각들을 억누르는 가운데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비뚤어진 성향은 오직 하나님께서 약하고 무지한 백성을 많은 속박과 끊임없는 연단 아래 두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서만 교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일에서 자기들의 모든 기쁨을 쏟아 내도록 신자들을 권면하는 가운데 당시에 사용되던 모든 악기들을 차례차례 열거하는 것입니다.
시편 150 편
이 모든 악기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거룩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또 이 모든 악기들은 우리의 전인격과 모든 것을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바로 그 분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3. 본문 6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입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נשמה (네샤마)는 “호흡” 또는 “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히브리어 “네샤마” 는 살아 있거나 호흡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앞 시편들에서 하나님 찬양에 대한 선포가 지력(知力)이 없는 무생물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모든 종류의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게 향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肉)’ 이라는 이름이 흔하게 쓰일 때 사람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이 구절 말씀이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하급한 짐승들과 같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호흡을 지니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말할 때는 살아 있는 피조물로 다른 생물과 구별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의미에서 ‘호흡’ 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유추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는 시편 기자가 율법 아래에서 갖가지 의식(儀式)과 결합된 사람들에 대한 권면 속에서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설파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어떤 때, 곧 그 당시로서는 오직 유대 땅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찬양의 노래들이 이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다시금 크게 울려 퍼질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시사하면서 보편 인류 전체에게로 그 말머리를 돌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 예언 속에서 우리 모두는 유대 백성과 함께 같은 교향곡(交響曲)에 참여해 장차 우리가 하늘 왕국에서 한 자리에 모이고 선택받은 천사들과 함께 영원한 할렐루야를 노래할 때까지 끊임없는 찬양의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찬송들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