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울산길 건행 후기)
해파랑길에서 점차 내가 보여요
해파랑 부산길 74km를 3일 만에 생각보다 거뜬하게 잘 마쳤다. 아직 향기 있는 열정과 괜찮은 체력이 실로 고맙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생각의 나이테는 생기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무작정 떠나와 견디지 못할 일 생길까 조바심치던 막연한 걱정이 한결 사라졌다. 정년퇴임 후 불투명한 내 모습에서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잠재력 덩어리의 근사한 내가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아직 충분히 부풀어있어 동동 떠다니는 나의 풍선이 신비롭다. 애써 웃으려 하지 말고, 아프지 않은 척 강한 척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가슴 쓸어본다.
4일째 되는 4월 27일은 해파랑 두 번째인 울산길의 시작이다. 전날 진하해변 모텔에서 꿈꾸듯 잘 자고 난 목요일 아침이다. 폭풍우로 울부짖던 파도는 비가 잦아들자 점차로 잔잔해졌다. 아들과 딸로 사랑하던 두 남녀가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맺지 못하고 죽자, 댕기와 두건이 두 마리의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의 명선도 섬이 봄비에 젖는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방파제엔 이루지 못한 애절한 그리움이 파도에 실려 왔다가는 끝내 부서지고 하얀 물거품 흔적만 남는다. 해변을 빠져 나오니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한다. 찻길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충남에만 있는 줄 알았던 온양읍 표지판이 이곳 울산에도 보인다. 충남 온양으로 피난 와서 날 낳으셨다고, 따뜻할 ‘온(溫)’ 자를 따서 ‘온화(溫花)’ 라 이름 지으셨다는 부모님 말씀이 생각나 슬며시 웃었다.
이 맘 때면 연한 연두빛 신록이 그 어떤 화려한 꽃들보다 한층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싱그러움에 눈이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가벼운 발걸음에 모를 내거나 밭갈이를 한 들판이 곳곳에 정겹다. 대보교를 지나 외고산 옹기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보이지 않기에 남창중학교 근처에서 남학생들에게 물으니, 거긴 걸어서 못 간다며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도보여행 중이라 걸어서 간다니까 하나같이 혀를 내두른다. 어리니까 장거리 걸으며 나를 찾아가는 오묘 신비의 맛을 아직은 모르리라. 옹기마을은 한창 축제 준비로 땅을 파고, 토기, 옹기, 장독들이 정리가 안 된 채 어지럽다. ‘장인의 손’ 대형 조형물과 우리나라 가장 크다는 대형 장독, 옹기박물관을 별로 감동 없이 둘러보고 나왔다. 4월 오후는 햇살이 벌써 따갑다. 5코스의 종착지 덕화역은 한참이나 오래된 건물 같이 너무도 조용하다. 소나무가 잘 가꾸어진 솔마루길로 접어드니 송화가루 향기가 바람 타고 코 끝에 풍겨온다. 가슴 가득 향기를 담고 삼일여고를 지나 6코스 시작점 선암호수공원에 들어섰다.
물레방아가 돌고 연꽃송이가 떠다니는 연못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쌍둥언니는 전화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사십년 넘게 보지 못하던 대학시절 기타 합창단의 오랜 친구가 지금 내가 도보여행 중에 있는 울산 태화강 가에 살고 있으며, 당장에 보고 싶다며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여행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이 있어 설레고 들뜨나 보다.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고 선암호수공원을 나와 솔나무 어울길을 걸어 울산대공원으로 넘어왔다. 진분홍 철쭉, 연산홍 꽃들이 화사한 가운데 위엄 있는 ‘울산대종’, 소녀시절 아픈 ‘평화의 소녀상’이 이채롭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소녀상 옆 빈 의자에 나도 나란히 앉아 영화 ‘귀향’의 절통한 아픔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다. 울산 사는 친구와 40년 만에 만나 얼싸안고 도니,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었다. 마침 태화강 신삼호교 아래 광장에서는 친구가 다니는 성당 신자들의 선교 관련 행사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은혜로운 야외 미사에 신심을 다해 함께 성가를 부르니,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흐른다. 행사가 끝난 후 친구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날 밤은 친구가 펴주는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달콤하게 감사로 마무리했다.
다음 날 해파랑길 5일 째인 토요일 아침, 친구가 해준 고구마, 야채, 계란, 과일이 있는 맛있는 영양식 식사를 하고, 청정 울산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태화강변을 함께 걸었다. 널찍하니 시원한 태화루에 올라 강변에 펼쳐지는 울산시민의 휴식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 같은 십리대숲엘 손잡고 나란히 들어갔다. 구 삼호교에서 용금소까지 4km 십리가 넘는 죽림욕장인 대나무 숲길에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친구처럼 반가웠다. 맘껏 이야기를 펼치다 염포 삼거리 가는 길을 놓치고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예정 없이 나타난 ‘순교자 성지’는 또한 그 분의 뜻이었나 보다.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성지 안의 카페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염포 삼거리에서 친구와 헤어져 8코스 방어진항을 향해 다시 또 혼자 도로를 걸었다. 커다란 공장 건물들 현대중공업, 고려화학 공장에서 나오는 화약, 유황 같은 냄새를 마스크 속에서도 심하게 맡으면서 길이 좋지 않아 많이 피로감을 느꼈다. 방어진 활어센타에서 본 예쁜 공무늬처럼 생긴 문어가 걷는 내내 잔영이 되었다.
어둑어둑해질 때쯤 찾은 대왕암공원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대왕의 해중릉을 비롯한 바닷 속 대왕바위 집성지로, 시퍼런 동해와 새하얀 파도가 만나 태고신비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리라는 ‘호국대룡’의 장관들을 보고 있노라니, 울산 8경 중의 하나인 대왕암 송림 숲 사이로 석양이 붉다. 바다에 내려 고요히 퍼지는 일몰을 보며 서둘러 8코스의 종착지 일산해변에 도착했다. ‘비즈’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나와 불꽃놀이 등 광란이 펼쳐지는 해변의 밤 풍경을 보면서, ‘하림각’ 중국집에서 얼큰한 짬뽕을 맥주와 함께 시원하게 먹었다.
울산의 마지막 9코스 해파랑길 6일 째는 일산해변 일출 장관에서부터 시작한다. 야자수와 119구조 의자를 배경으로 여명이 시작되더니 이내 파도와 물결에 붉은 주단을 풀어놓는다. 내 앞으로의 삶도 아직 저렇듯 찬란히 펼쳐질 것을 믿어본다. 6일 동안 쉬지 않고 많이 걸었나보다. 양쪽 발의 네 번째 발가락들이 아파온다. 물집은 잡히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워, 알려준 정보대로 천 테이프 반창고로 발가락마다 정성스럽게 감아주었다. 현대예술공원 가는 길에 작은 주전성당에 들러 하얀 옷의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길가에 핀 하얀 마가레트 꽃과 쌀알처럼 생긴 이팝나무 꽃들을 보며 콧노래 싱글거렸다.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나오다 만난 부산교구 바오로성당은 규모가 매우 컸다. 토요일 미사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매번 은총선물처럼 성당을 보게 하고 미사참례를 하게 하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을 누리게 한다. 미사 후 무거운 배낭을 예사롭지 않게 보신 신부님께서 물으신다. 부산에서부터 지금 엿새 째 걸어 이곳에 왔다니 놀라신다. 몇몇의 신자들도 대단하다며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고 성당 본명을 묻기도 했다. 루시아, 박루시아라고......
울산 사는 교원대학교 대학원 동기 친구를 또 만난다. 정자 해변으로 나와 준다기에 시간이 부족해 주전 봉수대는 가보질 못했다. 파도 치는 검은 몽돌 주전해변을 지나 버스로 5정거장을 타고 가 정자해수욕장에서 내렸다. 대학원 친구는 진심으로 반갑고 기뻐하며, 점심으로 그 비싼 대게를 사주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말로는 다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해변가 카페에서 따끈한 녹차라떼로 울산길 마무리를 하고, 친구의 승용차 편으로 울산역에 왔다. 울산길 83km, 부산길 74km, 총 157Km 9코스를 6일 간 사고 없이 잘 마쳤다. 집으로 향하는 상경행 KTX에 몸을 실었다. 나를 찾으면서 걷는 길, 점차 보이는 나의 길, 앞으로도 걸을 해파랑길에 축복이 가득 내리시리라!
*진하해변 명선도 그리움의 파도가 몰아친다




*외고산 옹기마을 축제 현수막이 가로수마다 나부낀다.

*옹기마을 '장인의 손' 대형 조각상이 참으로 위대하다

*가장 크다고 하는 옹기마을의 대형 옹기 장독이 축제를 기다리고 있다


*울산 5코스 종착역 조용한 덕하역에서 쉬었다

*덕하역에서 선암호수공원 가는 길에 반가운 해파랑길 표지

*선암호수공원의 부처님맞이 풍경이 은은하다

*선암호수공원에는 청보리가 자라고 있다

*물레방아 도는 호수엔 연꽃이 참 예쁘다



*울산대공원엔 철쭉꽃 연산홍이 한창이다. 울산대종도 장엄하다.

*평화의 소녀상 아픈 소녀 옆에 나도 발 벗고 나란히 앉았다.

*다시 태어난 울산의 자랑 태화강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태화강 십리대숲은 보기만 해도 싱그럽고 병이 나을 듯 싶다

*40년 만에 만난 쌍투스 기타코러스 친구가 울산에 살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길이 꿈만 같다.

*4km가 넘는 십리대숲 죽림욕장은 한없이 상쾌했다. 그 푸르름에 반했다.



*태화강변에 세워진 한국 4대 큰 누각 중의 하나인 태화루에서 쉬며 태화강을 바라본다

*태화강이 또 아름다운 이유는 오월 신록의 푸르름, 노랑꽃, 붉은 양귀비가 있어서다

*염포 가는 길을 헤매다 발견한 순교성지 성당에서 친구와 기도하고 차를 마시며

*방어진항에 도착하니 어스름이 시작되고, 문어, 병어, 홍어 등이 .....


*문무왕의 대왕암공원은 울산 비경 절경 중의 하나이다





*대왕암 공원을 내려오는 길에 저무는 석양이 곱다


*울산 마지막날 아침 일산 해수욕장 어제의 석양은 오늘의 일출로 이어진다
*일산 해수욕장을 지키는 119구조대 의자에 희망의 해가 둥실 떠오른다

*찬란한 아침 해가 또 하루를 반짝이는 선물로 축복 해준다

*엿새째날 아침 출발 전에 아픈 발가락들 하나하나를 감싸주었다.

*주전마을 작은 성당 주전성당의 하얀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전마을 길가엔 마가레트 하얀 꽃과 하얀 이팝꽃이 웃음인양 화사하다

*주전 검은 몽돌해변이 넓게 몽글몽글 몽돌과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또 한 번 길을 잃어 헤매었을 때 나를 인도해주신 부산교구 성바오로 성당, 미사 참례 후 신부님의 칭찬을 받으며 감사했다

*울산의 끝지점 정자 해수욕장으로 나와 비싼 대게도 사주고 울산역까지 태워다 준 한국교원대 대학원 국어과 동기 친구가 한없이 고마웠다.

첫댓글 살다보면 아픈 일이 지나야
비로소 평정을 얻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아주 원초적
사실을 몸으로 실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