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
글쓰기 기법(3)-맥주 세 병 안주 하나
- 접대를 조심하라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북한에서는 ‘접대부’가 괜찮은 직함이다. 중국에 여행 가서 북경의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유명한 평양냉면집에 갔다. 식당에 들어간 동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써빙하는 여성들을 ‘아가씨’ 하며 남한식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저게 아니다 싶어, 살짝 불러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일하는 여러분들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냐‘고 물었드니, ’접대원 동무‘라고 불러달라는 것이 아닌가. 물론 중국에 가기 전에 대략 접대원이란 호칭이 북한에서는 적어도 비하하는 호칭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려지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남한은 북한과 다르다. 만약 써빙하는 여성을 접대원이라 하면 분명 그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며, 듣는 여성도 기분 나빠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접대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만 접대라는 게 거의 음성적인 데다가 밤 문화와 관련되어 있어서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편이다. 수필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정보 전달이나 설명을 하는 실용적인 글과 달리 문학적인 글에서는 접속사와 대명사를 조심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적재적소에 가려서 써야 한다는 말이다. 접속사는 논리적인 연결을 요하는 글에서는 필수적으로 써야 하지만, 문예문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대명사도 글의 서두에 올 때는 조심해야 한다.
어떤 원칙을 안다고 해서 실천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안정효는 가장 지키기 어려운 원칙으로 ‘접속사 제거하기’를 꼽았다. 그는 “대학생 시절, 루돌프 플레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를 읽다가 ‘자신이 쓴 글에서 접속사를 모두 없애라’는 놀라운 교훈을 발견했다”며 “플레시는 그렇게 하더라도 글의 흐름이 전혀 막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문장이 맑은 물소리를 내며 잘 흐를 것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그러므로’ 따위의 단어로 앞문장과 뒷문장을 연결 지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정 없애기가 어려우면 ‘그렇기 때문에’를 ‘그래서’로 바꾸는 등 글자 수를 하나라도 적은 것으로 바꾼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사람들의 초보적인 글쓰기는 이런 식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로 갔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그러다 보니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머지 우리들만 빵집으로 가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위 글에서 아돌프 플레시가 없애라고 한 단어에 밑줄을 치고 무작정 잘라내 보자. 그러면 이런 글이 남는다. “나는 학교로 갔다.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했다. 너무나 재미있어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를 떴다. 나머지 몇 사람만 빵집으로 가서 얘기를 계속했다.” 과연 앞뒤 문장이 토막 나서 연결이 안 되는가? 아니다. 모든 문장이 간결해지고 압축된 문장에서 외려 폭발력이 생겨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명언인 이유는 군더더기 접속사 빼면 힘차고 긴장감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로마 최고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며 문필가이기도 했던 카이사르(영어명 시저)가 소아시아 젤라에서 파르나케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원로원에 보낸 전문이다. 이 말은 영원한 명언으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대중 앞에서 복잡한 내용을 호소력 있는 한마디로 줄여 말하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시저가 만약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에 접속사를 넣어 “왔노라, 그리고 보았노라, 그래서 이겼노라”라고 말했다면 그래도 명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접속사 ‘그리고’ ‘그래서’가 군더더기로 작용해 문장을 늘어지게 함으로써 글의 맛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간결한 말이 더욱 긴장감을 주고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카이사르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을 부드럽게 이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군더더기로 문장을 늘어지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했다. 그러나 다행히 선생님께 혼나지는 않았다”는 접속사 ‘그래서’와 ‘그러나’를 사용해 문장을 적절하게 연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래서’와 ‘그러나’가 문장을 늘어지게 만듦으로써 글의 맛을 떨어뜨린다. 특히 일이 순서대로 진행될 때는 접속사가 긴장감을 감소시킨다. ‘그래서’와 ‘그러나’를 빼고 “아침에 늦잠을 잤다. 학교에 지각했다. 다행히 선생님께 혼나지는 않았다”고 해야 긴장감이 살아나고 글이 깔끔해진다. 불필요한 접속사는 글의 흐름을 방해함으로써 읽는 속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글의 생명은 간결함과 함축성이다. 시저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에는 이러한 이치가 숨어 있다.
간결하고 쉬운 표현에는 접속사도 필요 없다. ‘그런데’ ‘그러나’ ‘또한’ ‘한편’ 따위의 말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함부로 쓰는 일이 흔하다. 이런 말들은 자칫 헛기침이나 군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문장의 리듬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런 예를 들어 본다.
“오늘은 소풍 날입니다. 아침 8시에 학교에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주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유원지에 도착했습니다.”와 같은 문장은,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따위의 말로 문장을 이어갔다. 이런 것은 일종의 접속사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접속사를 쓰지 않고도 글을 이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는 글을 써 나가는 흐름을 잃기 쉬우니까. 고쳐 쓰면, “오늘은 소풍 날입니다. 학교에 모인 것은 아침 8시였습니다. 선생님이 주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버스를 탔습니다. 드디어 유원지에 다다랐습니다.” 로 된다.
접속사가 남용되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에서뿐만이 아니다. 단락과 단락을 연결할 때도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 ‘한편’ 등 불필요하게 접속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의 글을 유심히 보면 단락의 맨 앞에는 여지없이 접속사가 나온다. 글쓰기를 지도하는 사람 중에는 접속사를 사용해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을 이어 주라고 무턱대고 가르치는 이가 있기도 하다. 만약 단락의 맨 앞에 접속사가 오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또 접속사가 나온다면 그 글은 온통 접속사로 넘친다. 우스갯소리로 하면 ‘물 반 접속사 반’이다. 가능하면 접속사 없이 글을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접속사 없이 각 단락과 문장을 부드럽게 연결하도록 노력해야 글쓰기가 발전한다. 접속사 없이도 앞 단락과 뒤 단락,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굴러간다면 이미 수준급의 문장력에 도달한 것이다. 접속사가 많다는 것은 내용의 연결성과 긴밀성이 부족하거나 전체적으로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도 된다. 글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접속사가 많은 문장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대명사의 사용에도 유의해야 한다. 특히 서두에서는 문제가 된다.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작가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한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이는 작품의 동기나 결론부터 시작할 수 도 있고 대상을 순서적이나 중심 부분에서 부터 시작할 수 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이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이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 첫 구절 시작이 지시대명사 ‘그’ ‘어느’ 등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좋지 않다. 둘째 1인칭 대명사‘나’ 로 시작하는 경우도 좋지 않다. 이는 이미 수필은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나’로 시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수필에는 육하원칙이 요구된다. 작가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기량이 있는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못 하나 박지 않고 집 한 채를 짓는다. 억지로 못질을 하여 나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귀 를 맞추어 균형과 조화로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의 못으로 글을 이어간다. 그런 글 을 읽다보면 못을 박는 망치 소리처럼 귀에 거슬리게 된다. 잘 다듬어진 글의 이미지와 리듬은 인위적으로 접속사를 붙이지 않아도 자석처럼 서로 끌 어당기고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의 앞머리만이 아니다. 글을 맺는 종지형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것이다」로 끝맺는 일이 많다 . 한글에 「것이다」를 몇번 썼는가.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얼마나 많이 썼는가 기계적인 통계만으로도 악문과 명문을 구별해 낼 수가 있다.
접속사는 문장의 가시덤불과 같다고 했다. 2개 이상의 ‘뜻’을 일부러 1개 센텐스 속에 담으려는 데서 혼란은 시작된다. 2개 이상의 뜻을 하나로 묶는 데 쓰이는 것이 ‘접속사’다. 이 접속사를 함부로 쓰면 글이 엉망이 된다. 너무 많이 써도 엉망진창이 된다. 접속사를 가급적 버려야 한다. 접속사가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글이 된다. 그렇다고 접속사를 무조건 쓰지 말라는 게 아니다. 줄이라는 얘기다. 필요 없는 것만 버리라는 소리다. 한 센텐스 속에 여러 개의 뜻을 담는 것은 장애물경주에서 말뚝을 세우고 가시덤불을 쌓아 놓는 것과 같다. 말뚝이나 가시덤불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주는 어려워진다. 한 센텐스 속에 여러 개의 복잡한 뜻을 담지 말아야 한다. 되도록 한 개의 ‘의미’를 간단하게 담는 게 좋다. 그러려면 접속사를 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