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한문학 「차송별거제(次送別巨濟)」 거제현령을 전송하는 송별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현령으로 부임하는 이호성(李好誠)을 전송하며 지은 송별시(送別詩) 「차송별거제 진무토평사 이호성(次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은 조선초기 문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작품이다. 여기서 진무토평사(鎭武討評事)는 정3품 무관 첨추(僉樞)를 일컫는 말이다.
이호성 송별시(送別詩) 「차송별거제(次送別巨濟)」에서, 이호성 거제현령이 하도민 장정 2만여 명을 동원해 폐허를 일으키고 고을에 읍성과 건물을 쌓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며, 훌륭한 정치와 어진 공덕으로 임금의 덕을 펼치니 현령이 고을 거리로 순시를 하면, 거제현민들이 손을 이마에 올리고 환영했다고 적고 있다. 이후 거제도는 최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이래 약 50년간 태평세월의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다.
○ [이호성(李好誠) 장군 파견 사유] 보통 거제현령의 직급은 종5품이었으나. 당시 정3품 무관 첨추(僉樞) 이호성(李好誠 1397~1467) 장군이 거제현령으로 부임한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거제도는, 거제현 관청이 150년간 거창군 가조현에서 더부살이하다가 본섬으로 환도(還島)한 지, 20여년 정도 밖에 안 된 시점이라, 거제섬의 군사⋅경제⋅치안 등이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최전방 거제도에 가장 유능한 무관을 진무 토평사(鎭武 討評事)로 삼아, 경상도 지역의 장정 2만여 명을 동원해 거제도에 성곽을 새로이 쌓고 각종 기반 시설을 조성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다. 이때 각 지역 2만명의 하도민을 통솔해야 하는 바, 그 책임이 막중하여, 그 적임자로 발탁된 이가 바로 김천 출신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 장군이었다.
○ [이호성 거제현령 고현성을 축조] 現 거제시 중심지인 고현동은 1432년부터 1664년 여름까지 거제현의 읍치였다. 거제시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사등성에서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1451~1453)가 끝난 후부터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명칭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관찰사 하연(河演, 1376~1453년)에 의하면, 대마도 정벌이 끝난, 1419년(세종1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고현성 축조를 위해 현령 "이호성(李好誠)" 장군을 1449년에 먼저 보내고, 하연(河演)을 관찰사로 임명하여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축조했다. 또한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는 정이오의 아들, 우찬성 진양 좌상 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에 옮기도록 했다. 하도민 2만여 장정들, 영천 군사 정차공, 진양 판관 양연, 곤양 군사 최성로, 청도 군사 이의, 사천 현감 장우, 진해 현감 김한진 등이 그 역을 위해 분감을 관리했다. 또한 현령 이호성(李好誠)이 관사와 창고 곳간 향교 객관 등을 주관하였고 여기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모여 성을 쌓는 일에 성심을 다했다. 조선초기 모든 읍성(縣, 府,)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건물이 관청 객관 동헌 향교 등이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에는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그는 거제도를 새로이 일으킨 위인 중에 한 분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이호성 장군은 거제현령 이후 곧바로 1453년~1455년까지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부임하여 남해안 특히 거제도 연안의 해상방어를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되었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가 다시 돌아가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 [이호성(李好誠) 송별시] 1449년 이호성 장군이 왕명을 받잡고 한양을 떠나 천 리 먼 거제도로 떠나갈 때 당시 조정의 수많은 인사가 ‘같은 압운자(押韻字)를 사용한 오언율시(五言律詩) 송별시(送別詩)’를 지어 그를 격려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송별시 중에는 작가 미상도 더러 있어 최소 15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이호성 송별시를 적은 11분의 명단인데 당시 조정의 실세들이다. 이미 <김천출신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을 전송하며 지은 송별시(送別詩)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게재했다. 참고할 것!!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1464),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 1411~1469),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 태허재(太虛齋) 최항(崔恒 1409~1474), 존양재(存養齋) 이계전(李季甸 1404~1459),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 송국재(松菊齋) 이파(李坡 1434~1486), 소한당(所閑堂) 권람(權覽 1416~1465), 양원(楊源) 이숙함(李淑緘 세조 성종때 문신),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 등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호성(李好誠)을 이렇게 칭송했다. ‘장군은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청렴하고 결백하며 말타기와 화살을 쏘는 재주가 비범했고 문무를 겸비해 책략이 귀신 같았다. 백성을 교화하고 고을을 다스림에는 의관을 달리하니 백성들이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며 하례를 드린다.’
● 다음 ‘眞’ 운목(韻目)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차송별거제 진무토평사 이호성(次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좌의정⋅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작품이다. 그의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 권8(卷第八)』과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의 『경재문집(敬齋文集) 권5(卷之五) 부록(附錄)』에 수록되어 있다. 또 이 송별시는 2,4,6,8,구(句)의 각운(脚韻)에 압운(押韻)자 ‘神’‘隣’‘新’‘民’을 사용한 측기식이다.
거제도로 떠나는 진무 토평사 이호성(李好誠) 장군을 송별하는 자리에서 여러 대신들과 함께 ‘眞’ 운(韻)의 압운(押韻)자 ‘神’‘隣’‘新’‘民’을 사용한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지은 시(詩) 중에 한편이다. 내용을 보자면, 거제현의 관청과 현민이 거창군 가조현에서 더부살이한 지 150년 만에 바닷가 본섬 거제도로 환도(還島)하여 신(神)과 더불어 편안케 되었다. 고을을 다시 세우기 위해 뛰어난 책략을 지닌 이호성 장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호성 거제현령이 고을에 읍성을 쌓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며, 훌륭한 정치와 어진 공덕을 세워 임금의 덕을 펼쳤다. 현령이 고을 거리로 순시를 하면 거제현민들이 손을 이마에 올리며 환영한다고 적고 있다.
<‘거제로 떠나는 진무 토평사 이호성’ 「차송별거제 진무토평사 이호성(次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 신숙주(申叔舟 1417~1475)
水國初還邑 바닷가 거제로 다시 고을이 돌아와서
人安遂及神 사람들이 마침내 신(神)과 더불어 편안케 되었다.
循良廷有議 어진 고을 현령을 조정에서 논의하였는데
武略古無隣 무인의 책략이 언제나 백성과 함께 했다네.
發政仁威著 훌륭한 정치와 어진 공덕을 세우니
宣麻聖眷新 임금이 내린 글에 신임이 새롭도다.
行春應露冕 봄에는 응당 예복을 갖춰 순시를 하면
手額走邊民 변방 거제현민이 손을 흔들며 환영한다지.
[주1] 순양(循良) : 치민(治民)을 잘함.
[주2] 선휴(宣庥) : 휴양(休養)을 명(命)함.
[주3] 성권(聖眷) : 임금의 보살핌.
[주4] 행춘(行春) : 덕(德)을 폄.
[주5] 노면(露冕) : 왕은(王恩)을 입는 것. 수혜(受惠)하는 것.
[주6] 수액(手額) : 손을 이마에 올린다는 뜻으로 공경함, 환영함.
● 참고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의 오언율시 <이호성 칭송시>를 덧붙인다.
“읍(邑)을 옮기고 성(城)을 쌓는 천책(天策, 타고난 묘안(妙案))이 깊었으며 그 경영(經營)이 성신(聖神, 성(聖)스러운 신(神))이 나타난 듯 했다. 장군은 인자(仁子)와 같이 은혜(恩惠)로와 광속(獷俗, 추잡한 풍속)은 예신(禮臣)의 이웃 같았네. 행현(行縣, 고을을 다스림)에는 의관(衣冠)을 달리했고 첨추(僉樞)에는 우로(雨露)가 새로웠네. 여러 해 전에는 중한 어명을 받들더니 금일에는 백성을 편안케 하여 하례(賀禮)를 받네.[徙建深天策 經營出聖神 將軍仁子惠 獷俗禮臣隣 行縣衣冠異 僉樞雨露新 昔年承重命 今日賀安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