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본 문: 베드로전서 1:3-7
설교일: 2024. 4. 14(주일 낮 예배)
강철왕으로 불리는 카네기는 평생 자기 사무실에
커다란 나룻배와 노 하나가 썰물에 밀려서 모래 사장에 뒹굴고 있는 그림을 걸어 놓고,
그 그림 밑에 이렇게 써놓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은 썰물이라,
(배도, 그 배를 움직이게 하는 노도), 제 구실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이제 곧 밀물이 되면,
저 배가 물 위에 뜰 것이고, 저 노로 망망한 바다를 가르고 힘차게 나갈 수 있다 !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대 소망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자
그런 그림을 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사업을 해서 미국이 필요한 강철 60%를 공급하는 회사를 세우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의 별명은 “소망의 서신”입니다.
당시 로마의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베드로전서입니다.
그 소망을 오늘 말씀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여기서 말씀하는 산 소망이란 살아있는 소망, 즉 생명이 있는 소망입니다.
이 생명있는 소망은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영생”입니다.
우리도 카네기처럼 모래 사장에 뒹글고 있는 배를 그려놓고 그 밑에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고 하면서 소망을 가지면
썰물 때처럼 힘들 때, 긍정적인 사고와 동기를 유발하고, 카네기처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망으로 이루는 것은 이 땅에서 유익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 소망으로 이룬 것이 아무리 많고 위대하다고 해도 죽음 이후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다 끝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이지요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곧 하나님처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아담이 살아갈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아담이 어떻게 합니까?
피조물, 지음받은 사람이 – 창조주, 지으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두려워서 숨고, 부끄러워 가리고, 결국 하나님 없이 사는 죄를 범합니다.
결국 그는 그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후부터는 세상에서 수고하며 땀흘리며
고통을 당하고,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근심하며 살다가 죽게 됩니다.
여러분 !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수고하고 땀흘리며 고통을 당할 때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
이것이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우리 인생의 모습이요, 우리 인생이 가지는 소망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하나님과 얼굴을 맛대고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 중,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 소망을 죽음으로 끝나는 죽은 소망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산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 3절은 이렇게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아멘
영생은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만이 이 영생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오늘 말씀 3절을 보십시오
(3절 중간입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3절 끝입니다)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아멘)
1) 첫째, 산 소망은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대로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시합니다 / 거부합니다 / 믿지 않습니다. / 순종하지 않습니다 / 죄를 짓습니다.
경시합니다 / 외면합니다 / 배반합니다 / 반역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경한 태도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야 합니다. 긍휼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아야 합니다.
자비 긍휼이란 말은 불쌍히 여김, 동정, 애정 같은 감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정말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정말 긍휼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으신 분입니다.
죄로 멸망당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도 보내시고,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고
우리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어떻게 계산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2) 둘째,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주셨습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 끝에)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도 부활이라는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부활의 증거요, 보증이요, 영원히 사는 소망입니다.
♬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심 성령 증거 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아멘 ♬
부활의 첫 열매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영광 주로 오시면
그 다음 부활의 열매는, 믿고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부활의 열매는, 그 때까지 살아있는 성도들입니다.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의 저자 마샬 부인은
남편 목사님과 마지막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목사님의 임종 시간이 가까워 오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드렸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 하루 밤 자고 아침을 맞이 하듯이,
예수님이 다시 영광 주로 오실 때, 서로 부활해서 만나자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산 소망입니다.
3) 셋째, 산 소망은 거듭나게 하시고 주셨습니다.
사람은 영원히 살기 전에 거듭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아멘
이제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멘
유업이란 상속자가 받는 유산입니다.
본래 유업의 구약적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하늘나라’ 또는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유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재벌가에서 상속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을 보면서
세상의 상속이 얼마나 썩고, 더럽고, 쇠하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아멘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근심할 일들이 일어납니다.
찬송가 486장 가사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일 쌓였구나 ♬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근심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오히려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난 고통 즉 여러 가지시험이 용광로의 불과 같습니다.
이 불같은 시험을 통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다 걸러집니다.
믿음의 순도가 점점 높아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하여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산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입니다.
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받을 하늘의 유업은 그렇게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시련과 소망, 고통과 기쁨은 따로따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소망을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통이 끝나면 기쁘게 살자 ! 하지도 마십시오
시련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서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 산 소망으로 오히려 크게 기뻐하면서
이번 부활절기를 보내고 어린이도 기뻐하고, 어버이도 기뻐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복된 5월을 맞이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