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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이 밝은 지 한 달이 지나고 둘째 달 둘째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력달력을 사용하는 나라들은 오늘 설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양력 설만 인정하고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양력설을 한 해의 시작으로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강압속에서도 몰래 음력설을 지키며 음력 설을 유지해왔습니다.
해방후에도 양력 설이 공식적인 휴일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음력설을 지키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양력설, 음력설 모두 하루씩 쉬도록 되었습니다. 1989년 2월 1일에는 정부가 음력 1월 1일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설날’로 지키게 하면서 양력설보다 음력설이 더 중요한 명절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음력설은 아시아국가중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장 큰 명절중 하나입니다. 음력이든 양력이든 우리는 설을 맞이하면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설’명절의 큰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새로운 시작입니다. 작년은 보내어버리고 이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화된 한 해, 이제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한 발짝 도약하는 의지를 가지는 시간의 시작으로 설 명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올해 2013년 설을 맞이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 2012년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 설명절을 지나게 되면 양력으로 새해를 맞이하였을 뿐 아니라 음력으로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전은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한 해를 정식으로 시작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인생에 들어오시면 이 인생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과거를 완전히 묻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뭔가 다른 한 해를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몇 주간 살펴보았듯이 사마리아지역의 수가성 여인은 과거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서 떳떳하게 물도 길으러 나오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에게 있어 사마리아라는 지역자체도 차별받고 소외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 살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사마리아여인, 이 여인을 통해 오늘 예수님께서는 변화를 선포하시고 새로운 인생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게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인생... 변화된 삶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새로운 인생과 변화된 삶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이 이 변화를 통한 큰 축복을 경험하며 앞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전과 달라지는 변화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람이 변화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혼혈이 되어 유대인의 정통성을 잃어버린 사마리아인을 짐승처럼 취급하였습니다. 비슷한 지역에 이웃하며 살았고 선대로 거슬러가보면 한 핏줄이었음에도 역사적 과도기에 침략의 상처속에서 생겨난 아픈 과거를 지닌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종하는 것을 죄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따돌림의 상처를 받고 있고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다가가셨습니다.
이런 상처속에서 소외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며 유대인들로부터 박대를 받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들도 따돌림을 받으며 소외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따돌림을 시키고 있는 한 여인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이 여인은 정오에 물을 길으러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시간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전에 제가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지역에 가보면 정오때쯤부터 오후 3시경까지는 왕래가 거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지역에 지금도 가보면 관공서도 문을 닫고 오침시간과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낮 한시, 두시 때에 돌아다니는 것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쓴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늘에 들어가면 너무나 시원하지만 땡볕에서는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렇게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며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꼭 필요한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16절부터 1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여러 명의 남편과 함께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공식적인 결혼은 한 번밖에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과거 우리나라... 즉 조선시대쯤만 되어도 이혼하여 새로 결혼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한 남자, 한 여자가 결혼을 했을 때 배우자가 사별을 했을 경우에라도 다시 결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여인이 과거와 현재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윤리적인 죄악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놀림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필요한 물을 길으러 나온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르실 때 어떤 사람들을 부르시는 지를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 2장 16절과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한 두번의 죄로 인해 그 당시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공동체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더러운 자로 낙인찍히고 치유불가능한 병자로 낙인찍히면 공동체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공동체에서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라고 말씀하면서 그들을 품어주시고 하나님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홍석천씨가 나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낼 때에 그럼에도 ‘신은 나를 품어주시겠지’라는 생각에 종교를 가지고 신앙가운데 서있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속에서도 위로를 느끼지 못하면서 사람들이 계속 이상한 눈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도, 내가 믿는 신에게도 버림 받는 사람인가 싶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유명한 힐링캠프의 MC 탤런트 한혜진은 “신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 우선이다”라며 “신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진행된 말들속에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이런저런 논란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후배 전도사가 자신의 facebook 글에 한혜진의 말은 신학적인 오류요, 거짓위로라고 하면서 홍석천은 절대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안 된다는 논지의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참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홍석천씨의 내면과 한혜진씨의 말의 의도를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봐야겠지만, 저는 일단 한혜진씨의 말에 공감을 표합니다.
아무리 잘못된 삶을 살았어도 자신을 품어주시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앞에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이사야 55장 6절~7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가난한 자도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회개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죄를 몰랐던 사람이지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만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전도하다보면 교회다니면 술마시면 안된다고 하던데 자신이 술을 안 끊었기 때문에 교회갈 수 없다고 하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죄를 많이 지어서... 예전에 몹쓸 짓을 많이 해서... 등등 자신이 했던 행동과 하고 있는 행동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못하겠다는 분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런 것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면 나중에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몹쓸 사람을 찾아서 될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중의 한 사람 사도 바울... 그는 위대한 전도자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이고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마스쿠스... 성경용어로는 다메섹으로 가려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위대한 복음전도자 목사님중의 한 분인 김익두목사님을 보십시오. 그는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날마다 술마시고 사람들과 패싸움을 벌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사람들을 위협하며 죽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가난한 사람과 고아들을 돌보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시오. 불쌍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죄가운데 허우적되며 어떻게 헤쳐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이 사랑을 경험하며 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전과 달라지는 변화, 둘째는 땅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구약의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예루살렘에 모여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성전의 지성소만이 하나님이 임하는 거룩한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정해진 절기에 그 곳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도 이런 정통이 유지되었고 아직도 정통 유대인들에게 이런 전통은 남아있습니다. 전 세계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어도 그 곳에 모여야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그런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고가 여전히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땅이 거룩한 땅이고 예루살렘성전이 그 중에서도 더 거룩한 땅이고 예루살렘성전속의 지성소가 가장 거룩한 땅이라는 의식속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뿐 아니라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한다면 누구든지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이후로 세상 여러 곳에서 제사를 받으셨고 많은 이방인들을 통하여서도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유대인 선민사상과 예루살렘의 거룩성이 강조되고 우월의식속에서 특별한 계층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특별한 지역만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통해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 지역의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한 지역에 국한되고 한 건물에 국한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이 땅의 모든 땅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땅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 이 시대에 우리가 볼 때 거룩해 보이는 땅과 거룩해 보이지 않는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항상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역과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곳만 거룩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외에 다른 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역대상 16장 29~31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든지 모든 곳에 계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편재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신학영어로‘OmniPresence’라고 표현합니다. 이 신학용어와 동일한 의미의 전기통신용어로 유비쿼터스(Ubiquitous)라는 단아거 있습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ubique'를 어원으로 만들어진 단어인데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정보통신망에 접속하여 다양한 정보통신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합니다. 여러 기기나 사물에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을 통합하여 언제, 어디서나 사용자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환경을 우리는 ‘유비쿼터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편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비쿼터스를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는 인터넷선 하나로 동일한 내용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계 어디에서나 어느 장소에도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세계 어디에나 계시기에 하나님계신 그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와 모든 땅이 하나님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종말의 날을 미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숫자의 사람과 모든 국가가 하나님앞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택함 받은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 모든 땅이라고 말할 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구원받으면 종말이 온다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모든 인류와 모든 땅이 하나님앞에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소한 복음을 막고 있는 그런 나라와 민족, 땅이 이제 복음을 열고 교회가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199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복음을 거부하고 성경번역이 되어있지 않는 민족이 12000여개 종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차츰 사라져서 이제 성경이 번역되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미전도종족은 이제 6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선교학자들은 이 미전도종족에 성경이 번역되고 교회가 세워지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전도종족도 그렇지만 지금 현존하는 가장 복음을 막고 있는 나라..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이 세 나라에 복음의 문이 열리면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이 세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세계의 화약고입니다.
만약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중동의 이스라엘근처지역이나 극동의 한반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고 제 3차 핵실험을 예고하며 군사적인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지역은 이미 예전부터 극심한 내전으로 언제 큰 전쟁으로 번질 지 모르는 소소한 전투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오시기 직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큰 전쟁이 중동에서 일어나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될 지... 한반도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될 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며 주님오시는 그 날에 온 땅이 하나님앞에서 구원을 얻게 되기를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전과 달라지는 변화, 마지막 셋째는 예배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 말씀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참된 예배자를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땅에 많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는 했지만 이슬람교도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세계인구중 거의 2/3이상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그들이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믿는다면 전쟁이 있을 수 없고 분열과 다툼, 차별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진실된 믿음을 가지지 않고 거짓된 예배와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아는 것을 예배합니다. 거짓 예배는 모르는 것을 예배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전통적, 본능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 누구를 예배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순서에 따라 춤추고, 송아지를 잡아 피 흘리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내용이 없습니다. 형식이 가득할수록 내용은 형편없는 법입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형식을 답습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란 그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종교가 나름대로 정한 절대자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절대자 즉,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떻게 인간은 절대자인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여자에게 짧지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참된 구원자는 이방인에게서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을 때 좀 당황스러운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입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에게서 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때, 이방인을 통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즉 유대인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났지만, 유대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함축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변화될 것은 예배의 모습이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예배의 모습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4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의 핵심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가 보던 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표현되었었는데 새롭게 성경을 번역하며 ‘영과 진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명해주는 번역이 되었습니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이 강조되어 육체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성령으로 찬양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말씀읽고 성령으로 설교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이렇게 영에 매여 예배를 드리면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이 열립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을 보십시오. 조용기목사님, 정필도목사님.. 기타 유명한 목사님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유명하신 목사님들은 오랫동안 목회를 하셨기에 기도좀 안하고 이전에 했던 설교원고를 가지고 설교를 하면 잘 될 것 같습니다. 전에 성공적으로 했던 설교를 다시 들고 설교하면 또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전에 성공했고 감동을 주었던 설교도 내가 성령에 매여있지 않고 성도들이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더라... 왜 그럴까요.. 예배는 성령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조용기목사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학벌로 따지면 보잘것없은 학벌을 가졌습니다. 그가 신학교들어가기 전에 나왔던 학교는 부산에 있는 어느 공업고등학교입니다. 그것도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학교출신인데 그가 세계 최대의 교회의 목사로 은퇴하셨습니다. 성도수만 70만이 넘는 단일교회로서는 세계 최대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오대양육대주 설교하러 다니셨는데 영어로 설교가 나오고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데 현지인보다 더 확실한 영어어휘구사능력을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또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에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인간의 윤리도덕을 말하며 좋은 강연 하나 들었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속에서 깨어지고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하나님을 알아가게 만드는 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이런 예배가 회복될 때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영과 진리가 없는 예배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잘못된 예배의 모습을 지적해본다면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진리가 없는 영으로만 드리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신비주의적인 것을 강조하는 은사주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예배는 영이 없는 진리의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낭독하지만 진실된 기도와 감동의 찬양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에배였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반쪽짜리 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약의 전통적인 예배, 유대인의 말씀 중심의 예배, 사마리아인의 열정적인 예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배가 완성되어지고 예배가 회복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인간의 변화, 땅의 변화, 예배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참된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인격이 변화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지역의 분위기가 변화될 수 없고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생동감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실 분이 누구실까요? 그 분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25절과 2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우리가 참된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필요하십니다. 우리중에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온전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뭔가 거룩하지 못하고 부패한 것이 많고 비리가 난무하며 음란과 살인과 폭력으로 인해 타락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땅의 변화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교회는 나오는데 여전히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예배를 드리며 기도와 설교와 찬양과 구제와 봉사와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런 우리의 예배가 변화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는 이제 진실된 질문을 하며 예수님앞에 나아가야합니다. “정말 나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다.”
그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거룩한 천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다. 내가 그 분을 만났다. 그 분은 나의 구원자. 세상의 구세주, 메시야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우리 모두 천국하는 새로운 삶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