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돌아오면
이범찬
봄이 무르익어 가고 만물이 활기를 찾는 4월을 누군들 즐기지 않으랴만, 나도 봄의 예찬론자다. 4월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3.15 부정선거로 시작된 4.19혁명을 겪으면서 학생과 시민의 항거에 자유당 정권이 맥없이 무너지는 사태를 보았다. 권력 무상을 절감했다.
온상 같은 학교 안에서만 살아온 젊은이에게는 4.19혁명이란 격변은 상상도 못했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사월이 돌아오면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특히 최근의 탄핵 정국이나 예측할 수 없는 국제적 정세 변화를 보면 더없이 불안해진다.
4.19혁명 후 나는 젊은 날의 화려한 정치 꿈을 일찌감치 접었고, 학계로의 길을 찾아 나섰다. 학계로 들어서니 '4월 1일'이 너무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가.
나는 어머니 배 속에서 4월이 오기를 기다리다 초하루에 태어났으니 매년 봄이 오면 생일잔치 상을 받는다. 4월은 나의 달이다. 초하루만 되면 꽃다발에 케이크 상자, 맛있는 음식까지 준비해서 온가족이 모여드니 즐겁고 행복하다.
아무튼 호적에 4월 1일로 1자가 등재된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4월 1일만 돌아오면 마음을 가다듬으며, 4월 1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새로운 계획을 짜기도 한다.
내 이력서를 들춰보니 1953년 4월 1일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1958년 4월 1일에 대학원에 진학, 1960년 4월 1일에 국민대학 강사. 그다음 해 동 대학의 전임강사로 취임해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자마자 운 좋게도 다음 해인 1999년 4월 1일에 일본의 나고야경제대학 전임교수로 취임하여 봉직하다가, 2007년 4월 1일부터 2년간을 객원교수(전임대우)로 정확히 10년을 채우고 명예교수로 임명되었으니, 나는 2모작 인생을 화려하게 보낸 셈이다.
나는 4월에 태어난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일본의 대학교수도 정년은 65세이지만, 정년 전에 지방대학으로 옮겼을 때는 70세까지 연장될 수 있다. 명예교수의 요건도 엄격하여 그 대학에서 20년을 근속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에 법학과를 창설할 때 문부성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창립멤버 (속칭으로 '마루고 교수')라 2년이 더 연장된다. 또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 4월 1일인데, 일본의 학년도는 4월 1일에 시작한다. 생일이 속하는 학년도의 말에 정년퇴임을 하기 때문에, 다음 해 3월 말일까지 1년이 더 연장됐다. 결국 8년 근속으로도 특별히 명예교수 증서를 받았고, 2년을 더 객원교수직으로 근무하여 76세까지 10년의 강단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 (졸저 『설죽의 꿈』 200쪽에서)
이력서에서 더 이상 4월 1일을 찾아볼 수 없는 망백의 언덕길에 들어섰으니, 앞으로의 마무리 과정에서나마 새로운 계획을 짜서, 내 영혼에게 드리는 조촐한 생일 잔칫상으로 삼고 싶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송암문학관』의 편찬이다. 성균관대학교에서 1989년에 정년을 맞으며, 그동안의 발자취를 정리해본 것이 『해암의 자화상』 이고, 그 후의 이모작인생을 그려본 것이 『송암의 자화상』이다. 이 두 권을 바탕으로 나의 한평생을 마무리하려 다시 엮어본 것이 『해암문학관(海巖文學館』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코로나 역병이 우리의 일상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수백권의 회고록을 배분도 못하고 묵혀버렸다. 그 답답하고 지루한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은 생겨 쌓여가고 있다. 다시 증축을 하는 뜻으로 『송암문학관』을 새로 지어보았다.
그러나 『송암문학관』도 너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에도 또 새로운 자료가 쌓였으니 마지막 회고록으로 『 간추린 발자취 』를 엮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발행일은 '0000년 4월 1일'로 하려고 한다.
두 번째 잔칫상 계획은 『해암시조전집』이다. 원고는 정리가 되었음으로 곧 착수하여 발행일을 '2025년 4월 1일'로 할 것이다.
세 번째 잔칫상 계획은 두 번째 문집인 『망백의 언덕길에』다. 이미 교정 작업까지 마쳤으나 발행일을 '2025년 4월 1일'로 하려고 기다리고있다.
네 번째 잔칫상 계획은 『다섯 번째 회답집 』이다. 책을 보내줄 때마다 격려하고 부추겨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의 사연을 한데 묶어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시작한 것인데, 『늦깎이 글집의 자국들 』 에 이어 『내 글집의 자국들』, 『사연을 못 잊어』, 『다시 사연을 모아」를 발행하였다. 『다섯번째 회답집』의 발행일도 '0000년 4월 1일'로 하여 문단 활동의
무리를 하려고 한다.
첫댓글 월간 수필문학
2025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