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웃사이더, 조니 뎁 A to Z
Arizona Dream [아리조나 드림]
'집시의 제왕' 에밀 쿠스트리차와 '영원한 보헤미안' 조니 뎁이 만난 건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쿠스트리차가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파트너는 조니 뎁뿐이었지도 모른다. 물고기의 영혼과 꿈을 보고 그들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엑셀(조니 뎁). 쿠스트리차가 만들어낸 '공중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그는 자유로운 삶을 희망한다. 그리고 그 또한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다.
이후 조니 뎁은 [
맨 후 크라이드](2000)와 [
초콜릿](2000)에서 집시 역을 맡는데, 그는 집시라는 존재를 미국의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과 유사하게 생각한다(조니 뎁은 체로키족의 혈통이 섞여 있다). [초콜릿] 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중반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을 서부로 쫓아냈다. 하지만 서부가 비옥한 토지라는 걸 안 후에 그곳에서도 그들을 쫓아냈다. 결국 집시들의 고된 싸움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유럽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루마니아의 집시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새롭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조니 뎁은 자신이 연출한 [
브레이브](1997)에서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라파엘을 연기했고, 짐 자무시 감독의 [
데드 맨](1995)에선 인디언 '노바디'의 도움으로 개척기의 서부를 경험한다.
Box-office star 흥행 배우
엔터테인먼트 매거진 [베니티 페어]는 조니 뎁을 이렇게 평가한다. "스타가 된 뒤에도 여전히 골목길에 오줌을 내갈길 수 있는 사람. 진흙탕을 뒹굴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스스로를 '미스터 악취'(Mr. Stench)라고 부르는 조니 뎁은 "역할을 선택할 때 의도적으로 폭력적인 인물을 피하는 듯하다"는 질문에 "옛날부터 아웃사이더랄까, 상처받은 인물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 말이다. 폭력적인 캐릭터에 대해서는 솔직히 좀 진부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영화제작 시스템의 도구가 되어버린 듯하다. 흥행 성공을 위해서 말이다. 난 시스템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
캐리비안의 해적-블랙펄의 저주](2003) 이전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조니 뎁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고 가장 흥행력이 강한 배우다. 흥미로운 건 흥행 배우의 이미지와 함께, 여전히 인디펜던트 배우의 느낌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팀 버튼, 테리 길리엄 등 강한 개성의 감독들과 여전히 함께 한다. 아래는 조니 뎁의 흥행작 순위. 박스오피스모조(www.boxofficemojo.com)를 참조했으며, 목소리 출연과 카메오 및 단역은 제외했다.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둔 6편의 영화 중 3편이 [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3편이 팀 버튼의 영화인 것이 이채롭다.
순위 |
제목 |
연도 |
흥행 수익(북미) |
1 |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 |
2006 |
$423,315,812 |
2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2010 |
$334,191,110 |
3 |
[캐리비안의 해적-세상의 끝에서] |
2007 |
$309,420,425 |
4 |
[캐리비안의 해적-블랙펄의 저주] |
2003 |
$305,413,918 |
5 |
[찰리와 초콜릿 공장] |
2005 |
$206,459,076 |
6 |
[슬리피 할로우] |
2000 |
$101,071,502 |
7 |
[퍼블릭 에너미] |
2009 |
$97,104,620 |
8 |
[초콜릿] |
2000 |
$71,509,363 |
9 |
[투어리스트] |
2010 |
$67,631,157 |
10 |
[가위손] |
1990 |
$56,362,352 |
Chocolat [초콜릿]
[초콜릿](좌)과 [찰리와 초콜릿 공장](우).
조니 뎁의 대표작 중 재미있는 건 '초콜릿'과 관련 있는 작품이 두 개나 있다는 것.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
초콜릿](2000)에선 매력적인 집시 로우로 등장해 비안느(줄리엣 비노쉬)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묘약'인 '봉봉 오 쇼콜라'와 함께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 "이 작은 조각엔 뭐가 들어 있는 거지?" "특별한 건 없어. 땅콩과 위스키 정도?"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당신 심장은 원래부터 뛰고 있었어." 조니 뎁은 영화 내내 아일랜드 억양을 고집했는데, 이것은 그가 추앙하는 뮤지션 중 한 명인 쉐인 맥고완을 모델로 한 것이다.
팀 버튼과 함께 한 [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에서 맡은 역은 초콜릿 공장의 주인인 윌리 웡카. 로얄드 달의 동화를 원작으로 이미 1971년에 진 와일더를 주인공으로 영화화되었던 작품이다. 리메이크가 결정되었을 때 스티브 마틴, 로빈 윌리엄스, 크르스토퍼 워큰, 마이클 키튼 등이 윌리 웡카 역의 물망에 올랐으나, 팀 버튼이 감독으로 정해지면서 당연히(!) 조니 뎁으로 정해졌고, 조니 뎁은 [
네버랜드를 찾아서](2004)에서 눈여겨 봐두었던 프레디 하이모어를 추천해 찰리 역에 앉혔다.
한편 조니 뎁이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은 '가장 싼 초콜릿'이라고. 특히 축구공처럼 생긴 아주 작은 초콜릿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데, 고급 초콜릿을 싫어하는 건 맛이 너무 진한 이유다. 재미있는 건, 조니 뎁은 어린 시절 초콜릿 알러지가 있었다는 사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다운로드
Director 영화감독 조니 뎁
1992년에 [스터프 Stuff]라는 단편을 만든 적은 있었지만, 조니 뎁의 본격적인 감독 데뷔작은 1997년에 내놓은 [
브레이브]다. 형인 D.P. 뎁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영화로, 조니 뎁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라파엘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는데, 조니 뎁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거장이 객석에 앉아 자신의 영화를 보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만 미국 언론은 이 영화에 냉담했고, 그는 자신의 영화를 미국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아마 이 영화는 나쁜 영화일 수도, 혹은 좋은 영화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겐 단지 영화일 뿐이다. 나에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그런 영화."
Edward Character 에드워드 캐릭터
[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잭 스패로우 선장과 함께, 조니 뎁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는 역할들은 두 명의 에드워드인 [
가위손](1990)의 에드워드 가위손과 [
에드 우드](1994)의 에드워드 우드 주니어다.
[
가위손]은 조니 뎁과 팀 버튼이 처음 만난 작품. 아이돌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슬아슬하던 당시의 조니 뎁을 '구원'해준 영화다. 이 영화로 그는 비로소 진정한 '조니 뎁스러운' 매력을 발산하는데, 그가 지닌 아름다움과 처연함, 인공미와 순수, 소년과 어른, 조화와 부조화의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완성되었으며, 조니 뎁은 몽환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떠돌게 된다. "나는 가위손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좋아했다. 이 캐릭터엔 냉소적이거나 싫증이 나거나 불순한 요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면서 결국 나는 에드워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하는 건, 너무나 허탈한 일이었다."
최악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에드 우드의 삶을 그린 [
에드 우드]는 그의 괴짜 이미지를 더욱 굳힌 작품. NG 투성이인 현장에서 "완벽해!"를 외치고 여장을 즐기는 에드 우드는 영화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꼽히는데, 조니 뎁에 의해 낭만적이면서도 완벽하게 부활했다.
두 에드워드 캐릭터의 특징이라면 이색적인 분장을 한 아웃사이더라는 점. 이런 특징은 이후 [
돈 쥬앙](1994), [
데드 맨](1995),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1998), [
비포 나잇 폴스](2000) 그리고 [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2003~2011)와 [
스위니 토드](2007)로도 이어진다.
From Hell [프롬 헬]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이 영화화되기로 결정되었을 때, 주인공 프레드릭 에벌린 역에 여러 배우가 언급되었다. 연출을 맡은 휴즈 형제가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 하지만 그가 거절하자 숀 코너리, 주드 로, 브래드 피트에게 순서가 갔고, 결국 기회를 잡은 사람은 조니 뎁이었다.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는 어쩌면 조니 뎁에게 운명적인 작품이었는데, 그는 [
프롬 헬] 이전부터 '잭 더 리퍼'라는 존재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
슬리피 할로우](2000)에 이어 연속으로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캐릭터를 맡게 되었다.
Getting into stardom 스타덤에 오르다
스물한 살 때 [나이트메어](1984)로 데뷔했고, 이후 [
해변의 사생활](1985) 같은 한심한 코미디에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
플래툰](1986) 같은 좋은 작품을 만나기도 했던, 그러면서 가끔씩 TV 시리즈에 조연으로 얼굴을 내비치고 아직도 록 뮤지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좌충우돌의 청춘기를 보내던 조니 뎁. 이때 폭스TV에서 새로운 TV 시리즈를 기획하며 조니 뎁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바로 [21 점프 스트리트](1987~1990). 범죄 수사를 위해 학교에 잠입한 경찰 톰 핸슨 역할이었다.
청춘 드라마의 가벼운 이미지가 싫어 거절했지만, 프로듀서는 조니 뎁이 적임자라며 계속 설득했고, 에이전트는 한 시즌이면 종영할 시리즈라며 꼬드겼다. 결국 그는 출연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21 점프 스트리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급속한 속도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한 달에 무려 1만 통의 팬 레터를 받는 스타가 되었고, 한 에피소드에 4만5천 달러의 개런티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조니 뎁은 자신이 덫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를 살려준 두 사람이 바로 존 워터스와 팀 버튼. 존 워터스의 [
사랑의 눈물](1990)에서 크라이 베이비가 된 그는 청춘 스타 이미지를 교묘히 파괴했고, 팀 버튼의 [
가위손]으로 독보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 바로 이 지점이 조니 뎁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 달콤한 스타덤과 고액의 개런티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지만 그는 거부했고, 대신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의외의 선택을 해나갔다.
Hunter Thompson 헌터 톰슨
헌터 톰슨과 조니 뎁(좌).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한 장면(우).
2005년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헌터 톰슨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최근에 번역된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처음으로 번역된 그의 작품이다)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반문화적 인물이다. 이른바 '곤조(Gonzo) 저널리즘'의 대부인 그는 닉슨부터 부시까지 평생을 공화당의 적으로 살아온 반골이었다. 그리고 조니 뎁의 절친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 라울 듀크와 닥터 곤조는 자동차에 가득 마약을 싣고, 취재는 뒷전으로 미룬 채 이곳 저곳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내용으로, 테리 길리엄 감독에 의해 1998년에 영화화되었고, 조니 뎁은 베니치오 델 토로와 함께 듀크와 곤조 역을 나눴다. 흥행엔 실패했지만, 원작자인 헌터 톰슨은 꽤 만족했다는 후문.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
럼 다이어리](2011)도 조니 뎁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그의 사망 후, 밥 딜런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유해를 대포에 실어 발사하는 추도식이 있었는데 존 케리 상원의원, 잭 니콜슨, 빌 머레이 등 280명 가량의 추도객이 참석했고, 그 모든 비용은 조니 뎁이 부담했다. 이후 조니 뎁은 바하마에 있는 자신의 섬의 해안 한쪽을 '헌터 톰슨 해안'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평생 쌍둥이 괴짜처럼 세상을 어슬렁거렸다. 톰슨은 나의 형제, 친구, 영웅이자 아버지, 아들, 스승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의 언어, 통찰력과 유머, 그리고 그의 진실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다." 톰슨을 추모하는 조니 뎁의 말이다.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The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좌). [로스트 인 라만차]에 담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현장의 테리 길리엄 감독과 조니 뎁(우).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에서 시작된 테리 길리엄 감독과 조니 뎁의 인연은 꽤나 모질다. [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은 히스 레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곤경에 처했던 작품. 상당 부분 촬영이 진행된 상황이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찍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머지 부분은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되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결론은 길리엄 특유의 판타지를 활용하는 것. 그 결과 토니라는 캐릭터를 히스 레저와 함께 조니 뎁과 주드 로와 콜린 패럴이 분담하게 되었고, 세 배우의 참여로 몇 개월 동안 제작이 중단되었던 영화는 완성될 수 있었다(세 배우는 자신의 개런티를 모두 히스 레저의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길리엄과 조니 뎁의 모진 인연을 이야기할 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바로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다. [
프롬 헬] 촬영이 끝나고 조니 뎁은 이 영화의 스페인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대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중세 시대로 돌아가 돈키호테를 만난다는 이야기로, 조니 뎁이 주인공을 맡았고, 돈키호테 역으로 프랑스의 원로배우 장 로슈포르가 낙점됐다. 바네사 파라디도 출연 예정이었다. 하지만 촬영 첫 주 엄청난 홍수로 기자재가 망가졌고 로슈포르는 병에 걸려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게 됐다. 테리 길리엄은 "난 이 영화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간 할 거다. 왜냐고? 난 어젯밤 이 영화를 찍는 꿈을 꾸었으니까!"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완성되긴 힘들 듯. 이후 키스 풀튼과 루이스 페페가 만든 다큐멘터리[
로스트 인 라만차](2002)는 이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Jack Sparrow 잭 스패로우
에드워드 가위손, 에드 우드와 함께 조니 뎁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로 꼽는 [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 선장.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나리오와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면 블록버스터에도 출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나보지 못했다. 좀 더 규모가 큰 작품에 출연하면 틀림없이 통장 잔고도 불어날 것이고, 내 매니저도 아주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새로운 발상을 가진 영화만 출연하고 싶다"던 그가 블랙펄에 승선을 결정한 건,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가 이 시리즈에 출연하게 된 또 하나의 강한 동기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 그는 이 캐릭터로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에 실패해 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상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길에서 만난 열 살 짜리 꼬마가 '캡틴 잭 스패로우, 짱이에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다. 뭐랄까... 그 순간은 나에겐 진정 마술과도 같다."
잭 스패로우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사람은 롤링스톤즈의 기타리스트인 키스 리처드. "그가 사는 방식, 라이브 무대에서 보여주는 우아함과 재치 그리고 현명함을 닮고 싶었다. 그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그 모습이 내겐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조니 뎁은, 의도적으로 모방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키스 리처드에 대한 추억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루니 툰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인 페페 르 퓨(Pepe Le Pew)도 영감을 주었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는, 어떻게 보면 파티에서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끝까지 마티니 잔을 기울이며 비틀거리는 이미지"가 페페 리 퓨에게서 얻은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다.
1편의 성공 후 3편까지 함께 했던 올랜도 블룸과 키이라 나이틀리가 하선한 지금, 4편에선 페넬로페 크루즈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상황. 1편에서 1,000만 달러였던 개런티는 현재 3,500만 달러로 올라갔다. 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인 해적 캐릭터의 자리에 올라선 조니 뎁. 4편의 흥행 성적이 어떨지 귀추가 주목된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다운로드
Kids, The 더 키즈
[초콜릿]에서 직접 연주하는 장면(좌). 2008년, 과거 '더 키즈'의 멤버들이 모여 공연하는 모습(우). 가운데가 조니 뎁이다.
종종 록 스타로부터 캐릭터의 영감을 받는 조니 뎁은, 배우 이전에 뮤지션이 꿈이었다. 그의 마음을 처음으로 움직였던 음악은 삼촌이 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들었던 가스펠. 그곳에서 사촌들이 연주하는 전기기타를 보고 사로잡혔다. 켄터키에서 플로리다로 이사 갔을 때, 어머니는 25달러짜리 데카(Decca) 전기기타와 작은 앰프를 선물했다. 이때 조니 뎁의 나이 12세. 동네 악기점에서 코드 북 한 권을 훔친 소년은 방에 처박혀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당시 그의 교과서는, 전기기타에 심취한 수많은 소년들이 그렇듯,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었다.
꽤 괜찮은 거라지 로커(garage rocker)가 된 뎁은 동네 친구들 모아 플레임(Flame)이라는 밴드를 조직했고, 마을 파티에서 비틀즈나 척 베리를 연주했다. 16세 땐 배드 보이즈(Bad Boys)라는 밴드를 조직한 그는 플로리다의 나이트클럽에서 하루에 25달러를 받으며 무대에 섰다(미성년이어서 클럽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다). 뮤지션으로서 어떤 비전을 가지게 된 뎁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당시 이혼 상태였던 부모는 음악으로 자립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며, 대신 경제적 도움은 줄 수 없다고 했다. 곤란해진 뎁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 교장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마저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음악에 정진하라며 재입학을 수락하지 않았다.
더 클래쉬, 엘비스 코스텔로, U2에 영향을 받은 배드 보이즈는 더 키즈(The Kids)로 이름을 바꾸고 프로 무대에 뛰어는다. 이후 실력을 쌓아 토킹 헤즈, 레이먼즈, 더 프리텐더스, 이기 팝, 듀란 듀란 등의 오프닝 무대에 섰고, 성공을 위해 LA로 갔다. 하지만 수많은 밴드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기회는 오지 않았고, 가난 속에서 멤버들은 텔레마케팅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가 결국 밴드 해체를 맞이했다. 이후 배우가 된 조니 뎁은 여전히 미련이 남아 '록 시티 에인절스'(Rock City Angels) 같은 하드 록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롤링스톤즈의 키스 리처드와 음악 잡지 [롤링 스톤즈]의 표지를 장식한 조니 뎁(좌). 현장의 트레일러에서 연주를 즐기는 조니 뎁의 모습(우).
배우로 성공한 후에도 그의 곁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 1992년에 짐 자무시 감독과 함께 베오그라드 영화제에 참여했을 땐,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과 세르비안 록 밴드 '파티브레이커스'와 함께 콘서트를 열었다. 1993년엔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살 젠코, 벗 홀 서퍼스의 기비 헤인즈와 함께 그룹 'P'를 결성했다.
1995년엔 자선 앨범인 [워 차일드: 헬프 War Child: Help]에 참여했고, 1997년엔 오아시스의 앨범에 참여해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리드 기타인 노엘 갤러거가 숙취로 녹음이 불가능하게 되자, 친구인 뎁이 대신한 것.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2003)에선 자신의 메인 테마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건 없다. 나에게 존재한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은, 음악을 통해 발산된다"는 조니 뎁. [
초콜릿]에서도 멋진 기타 연주를 보여준다.
Lovers 조니 뎁의 연인들
조니 뎁과 위노나 라이더(좌).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우).
록 스타의 꿈을 안고 LA로 온 조니 뎁은, 1983년 스무 살의 나이에 결혼한다. 상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로리 앨리슨. 자신을 할리우드로 이끈 은인이었지만, 뎁은 앨리슨과 헤어진다. 너무 이른 결혼이었던 것. "후회하진 않는다. 즐거운 시간이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게, 첫 결혼에 대한 조니 뎁의 짧은 소감이다.
이후 그는 셔릴린 펜과 연인이 된다. 1985년에 단편영화에 출연했을 때 만난 그들은 결혼을 약속한다. 한때 펜에게 완전히 빠진 조니 뎁은 그녀가 [
라이더의 처형 The Wraith](1986)이라는 영화를 찍을 땐 스태프들의 숙소에 방을 구해 함께 지내기도. [
플래툰]에 출연할 땐 철모에 '셔릴린 펜'이라고 이름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하지만 3년 만에 헤어졌고, [
더티 댄싱](1987)의 '베이비'인 제니퍼 그레이와 잠깐 연인이 된다.
[
가위손](1990)에서 만난 위노나 라이더는 팔에 '위노나 포에버'(Winona forever)라는 문신을 새길 정도로 깊은 관계였지만 불꽃 같은 연애는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문신 아티스트를 만난 뎁은 'Winona'를 'Wino'(술주정뱅이)로 바꾸었다. 이후 엘렌 바킨과 잠깐 사귀었던 조니 뎁은 모델인 케이트 모스와 4년 동안 연인 관계였으나 1998년에 헤어진다. [
슬리피 할로우]에서 만난 크리스티나 리치와의 염문설이 있었지만 조니 뎁을 사로잡은 여성은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인 바네사 파라디. 1998년 만난 그들은 현재 두 아이의 부모로 다정하게 살고 있다.
Marlon Brando 말론 브란도
[브레이브] 현장의 브란도와 뎁(좌). [돈 쥬앙]의 브란도와 뎁(우).
조니 뎁에게 영향을 끼친 '옛 배우'들이 몇 명 있다. 먼저 제임스 딘. 1980년대 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을 때, 주변의 누군가가 제임스 딘에 대한 전기를 그에게 선물했고, 그 책을 잃은 뎁은 [
이유 없는 반항](1955)를 구해서 본 후 생각했다. "와우! 이 배우에겐 정말 뭔가 있군." 당시까지만 해도 배우가 된다는 데 별 생각이 없었지만, 제임스 딘은 그에게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배우가 된 조니 뎁은 공연했던 세 명의 전설적인 배우들, 즉 [
도니 브래스코](1997)의 알 파치노와, [
네버랜드를 찾아서](2004)의 더스틴 호프먼 그리고 [
돈 쥬앙](1995)의 말론 브란도를 종종 언급하곤 했는데 특히 브란도는 뎁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두 사람은 절친이기도 했다.
"브란도는 지난 두 세기를 통틀어 최고의 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의 연기력보다 더 중요하다. 세상을 대할 때 그는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않고 접근한다. 그는 음... 스티븐 호킹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다!" 브란도는 조니 뎁에게 1년 정도 쉬면서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길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Next projects 차기작들
[브레이브] 현장의 브란도와 뎁(좌). [돈 쥬앙]의 브란도와 뎁(우).
[
캐리비안의 해적 - 낯선 조류]가 개봉된 지금, 그의 앞엔 여러 편의 프로젝트가 개봉 대기 중이고 후반작업 중이며 촬영 중이고 기획 중이다. 이미 완성되어 관객과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영화는 헌터 톰슨 원작의 [
럼 다이어리]. 영국영화의 위대한 컬트 [
위드네일과 나](1987)의 브루스 로빈슨 감독이 [
제니퍼 연쇄 살인사건](1992) 이후 19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조니 뎁은 톰슨의 분신과도 같은 저널리스트 폴 켐프 역을 맡았으며, 아론 에크하트, 엠버 허드, 지오바니 리비시 등이 공연한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중인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2011)다. 연속 그림과 글의 교차 속에 단서를 찾아내는, 브라이언 셀즈닉의 영화 같은 소설을 각색한 3D 영화로, 조니 뎁을 비롯 주드 로, 에밀리 모티머, 크리스토퍼 리, 사샤 바론 코헨, 벤 킹슬리 등이 공연한다.
촬영에 돌입한 두 작품도 있다. 조니 뎁을 스타덤에 올려 놓았던 TV 시리즈 [21 점프 스트리트]가 영화화된다. 채닝 테이텀, 조나 힐 등이 조니 뎁과 함께 출연하며 내년 개봉 예정이다. 역시 내년 개봉 예정인 [다크 섀도우스]는 팀 버튼과의 8번째 작업이다. [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에서도 공연하는 클로에 모레츠를 비롯, 헬레나 본햄 카터, 에바 그린, 미셸 파이퍼 등 쟁쟁칸 캐스팅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으로, 1960년대에 방영되었던 TV 시리즈를 토대로 했다. 흡혈귀, 마녀, 늑대인간, 좀비 등이 등장하는 호러 미스터리다.
마지막으로 그가 출연한다는 소문이 도는 작품은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
트리플 프론티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접경 지역에서 펼쳐지는 액션 영화로 톰 행크스와 조니 뎁의 만남이 점 쳐지고 있다.
Owner 소유주
늦은 시간 '더 바이퍼 룸' 앞의 모습(좌). 레스토랑 '만 레이'의 내부(우).
1억 달러가 넘는 재산가인 조니 뎁은 몇몇 인상적인 장소의 소유주이다. LA 선셋 대로에 있는 클럽인 '더 바이퍼 룸'(The Viper Room)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도 눈독을 들였다는 소문이 도는 곳. 과거 전설적인 갱 벅시 시겔이 소유했던 건물에 있는 '더 바이퍼 룸'은 리버 피닉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기도 한데, 피닉스가 죽은 후 추모의 의미로 2주 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뎁은 그곳 무대에서 종종 기타 연주를 하기도. 그의 소유권은 2004년에 끝났다.
바네사 파라디와 함께 하면서 그의 생활 무대가 된 프랑스 파리에, 조니 뎁은 숀 펜, 존 말코비치 등과 함께 '만 레이'(Man Ray)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파리 외곽에 빌라가 있으며, 그 근처엔 파라디와 함께 소유한, 와인 제조 설비가 갖춰진 포도밭이 있다. [
에드 우드]에 출연한 후 알게 된 LA의 벨라 루고시의 집도 그의 소유. 한편 바하마엔 그가 소유한 섬이 있는데, 해변가에 바네사 파라디와 아이들의 이름, 그리고 헌터 톰슨, 말론 브란도 등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Paparazzi 파파라치
파파라치들에게 조니 뎁이 손가락 욕을 날리는 유명한 사진(좌). 조니 뎁과 안젤리나 졸리가 만난 [투어리스트] 현장 근처엔 항상 수십 명의 파파라치들이 우글거렸다.
요즘은 잠잠한 편이지만 과거엔 종종 구설수에 올랐던 조니 뎁. 특히 1999년 파파라치와의 폭력 사태는 결국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당시 그는 런던에서 [
슬리피 할로우]를 촬영 중이었는데, 바네사 파라디와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카메라맨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플래시를 터트렸고, 분노한 조니 뎁은 마침 주변에 있던 막대기를 들고 마구 휘둘러 결국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1994년엔 묵었던 호텔 방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변상해야 했는데, 옷장에 이상한 동물이 있는 걸 발견한 후 순간 이성을 잃어 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후엔 바네사 파라디와 함께 주로 파리에 머무는 조니 뎁은, "내 딸을 결코 미국에서 키우지 않겠다. 학교에서 총기 난사가 난무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미국은 이기심과 무관심이 만연한 곳이고 그런 곳에서는 머물 수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Quotes 조니 뎁 어록
"프랑스와 유럽 지역은 위대한 문화와 놀라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잊었다. 나는 미국 문화가 재난에 가깝다는 것이 두렵다."
"어떤 역할을 맡든 그 안엔 자기 자신의 일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한다면, 그건 거짓말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구식 인간이다. 나는 나이가 들면 맥주 배가 적당히 나온, 호수를 바라보며 현관 앞에 앉아 있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내 생각엔 '심각한 배우'(serious actor)는 모순된 표현이다. 그건 '공화당'(Republican party)이나 '기내식'(airplane food) 같은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왜 영화 속에서 과한 메이크업으로 진짜 얼굴을 감추느냐는 질문에) "난 배우가 매순간 변화하는 건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객을 위해서 그렇다. 매일 미트 로프로 끼니를 때운다고 생각해보라. 질릴 거다. (연기할 때) 나도 마찬가지다."
"난 경력 초기에 쓰레기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틴에이저들은 내게 자신들의 고민을 담거나 자살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런 편지는 공포스럽다. 나는 단지 배우일 뿐이지 심리 치료사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아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프라이버시다."
Real-life character 실제 인물
조니 뎁은 10편의 영화와 TV 작품 속에서 실제 인물을 연기했다. 그 시작은 1950년대 할리우드 B급 감독이었던 에드 우드의 이야기인 [
에드 우드](1994). 이후 [
비포 나잇 폴스](2000)에서 극단을 오가는 1인 2역을 통해 빅토르와 봉봉 역할을 해냈다.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1998)에선 원작자인 헌터 톰슨이나 다름 없는 헌터 톰슨이 되었고, [
프롬 헬](2001)에선 '잭 더 리퍼'를 뒤쫓는 수사관인 프레드릭 에벌린이 되었다.
알 파치노와 공연했던 [
도니 브래스코](1997), 마약 밀매자로 나온 [
블로우](2001) 등도 실제 인물을 옮긴 영화. [
네버랜드를 찾아서](2004)에선 [피터 팬]의 작가인 J.M. 배리의 삶을 대신 살았고, [
리버틴](2005)에선 17세기 영국의 기인이자 천재 시인이었던 로체스터가 되었다. TV 재연 다큐멘터리인 [더 소스 The Source](1999)에선 비트 세대의 대표적 작가인 잭 케루악이 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맡은 실제 인물 캐릭터는 [
퍼블릭 에너미](2009)의 갱스터인 존 딜린저다.
Small screen 텔레비전 출연작
TV 시리즈 [레이디 블루](좌)와 TV 영화 [슬로 번](우)의 조니 뎁.
영화로 데뷔하긴 했지만 조니 뎁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던 건 TV 시리즈 [21 점프 스트리트] 덕분. 이외에도 몇 편의 TV 작품에 출연했다. [21 점프 스트리트] 이전 작품으로는 TV 시리즈인 [레이디 블루 Lady Blue](1985)와, 에릭 로버츠와 공연했던 TV 영화 [슬로 번 Slow Burn](1986) 그리고 TV 시리즈 [호텔](1987) 등이 있지만 대부분 조연 혹은 단역이었다.
스타덤에 오른 후 한 동안 TV 출연을 하지 않았던 조니 뎁은 1992년에 TV 단편 [스터프]를 직접 연출하기도. 이후 다큐멘터리 [더 소스](1999)에서 잭 케루악 역을 맡았는데, 데니스 호퍼는 윌리엄 S. 버로우즈로 존 터투로는 앨런 긴스버그로 등장한다. 아빠가 된 후엔 [킹 오브 더 힐 King of the Hill](2004)이나 [보글보글 스폰지밥](2009) 같은 TV 애니메이션에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한편 그의 TV 취향은 확실한 '영국산'인데, [더 패스트 쇼 The Fast Show](1994)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카메오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미드서머 머더 Midsomer Murders](1997)와 [닥터 후]도 그가 좋아하는 영국 TV 프로그램이다.
Tim Burton 팀 버튼
조니 뎁과 팀 버튼(좌). [가위손] 촬영장에서 조니 뎁, 빈센트 프라이스 그리고 팀 버튼(우).
1995년에 [버튼 온 버튼 Burton on Burton]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조니 뎁은 서문을 썼다. 이 글엔 그가 팀 버튼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TV 시리즈 [21 점프 스트리트]로 의도하지 않았던 스타덤에 오른 조니 뎁은, 그러한 상태가 너무나 불안했고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때 그를 구원한 사람이 바로 팀 버튼이었다. "그는 내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다음 영화에서 팀 버튼이 땅돼지와 섹스하라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조니 뎁. "루저에 아웃사이더, 할리우드의 썩어 없어질 고깃덩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구해준 것"에 감사의 글을 일부 발췌한다.
(전략)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허접스러운 TV 시리즈에 출연하며 광고와 광고 사이의 시간들을 채워나가는 신세였다. 나는 작가들이 써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사들을 두서 없이 종알거렸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길을 잃고 헤매면서 미국이라는 협곡을 힘겹게 헤쳐 나가야 하는 젊은 공화당원 같은 신세였고, 틴에이저들에게나 동경의 대상인 'TV에 나오는 10대 꽃미남'이었으며, 술을 퍼 마시면서 가식적인 태도를 보여줘야만 하는 처지였다! 나는 탈출구 없는 망할 놈의 무자비한 악몽에서 허우적댔다.
[에드 우드] 현장의 팀 버튼과 조니 뎁(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조니 뎁과 팀 버튼(우).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내린 천사 같은 새 에이전트가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교외의 마을에서 쫓겨난, 손에 가위가 달린 순진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를 단번에 읽어 치운 나는 갓난아기처럼 울먹였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서 시나리오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는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두 번째 읽었다. 너무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지들이 해일처럼 넘실댔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완전히 중독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TV에 나오는 풋내기였다. 제 정신을 가진 감독 치고 가위손 캐릭터에 나를 캐스팅 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에겐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며 내놓을만한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바로 에드워드라고, 내가 에드워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감독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건 불가능했다.
팀 버튼을 만날 약속이 잡혔다. 커피숍에는 줄담배를 피워대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천재(그 전에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가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서 정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창백하고 연약한 외모에 눈이 푸른 사내의 헤어스타일은 간밤에 베개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만 같았다. 사내의 머리는 동쪽으로는 덤불을, 서쪽으로는 소용돌이치는 샘물을 그리고 나머지 봉두난발은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잠 좀 자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기억난다. 물론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2톤짜리 해머가 내 이마를 강타하는 것만 같았다. 제멋대로 살아 움직이듯 허공을 휘저어대는 그의 손은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려댔고, 말투에는 허풍이 가득했으며(팀 버튼과 내가 공유하는 특징이다), 사방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보이는 것 모두를 집어삼킬 듯했다. 내 앞에 앉은 감수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미치광이야말로 가위손 에드워드였다.
우리의 만남은 악수를 하면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걸로 끝이 났다. 나는 미친 들개처럼 커피 스푼을 정신 없이 씹어대다가, 결국은 카페인에 잔뜩 찌든 채로 커피숍을 떠났다. 만남을 통해 상대방과 정직한 교감을 나눈 후부터 내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벨벳에 그려진 엘비스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묘하고도 원초적인 힘에 대해 우리 두 사람 모두 이해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랬다. 우리가 어울리면 일을 끝내주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위손에 대한 그의 예술적 비전을 내가 성취해낼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보다 더 유명한 배우들은 그 역할을 고려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드잡이를 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주고받으면서 역할을 맡겨달라고 큰소리로 사정했다. 긍정적인 얘기는 하나도 듣지 못한 채 몇 주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에드워드 배역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 배역은 내가 단순히 원하기만 하는 배역이 아니었다. 내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배역이었다.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내 마음 한복판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는 머릿속에서 떠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걸 단념하고 TV에 나오는 청년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었다. "조니... 당신이 가위손 에드워드예요."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뭐라고요?"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당신이 가위손 에드워드예요." 전화를 끊은 나는 그 얘기를 되뇌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웅얼거렸다. 정말로,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내게 역할을 맡겼다. 그는 흥행 성공을 위해 대형 스타를 데려와야 한다는 스튜디오와 머라 터지게 싸워가면서까지 나를 선택했다. 내게 있어 이 역할은 영화배우로서의 앞길을 열어주는 역할이 아니었다. 이 역할은 자유 그 자체였다. 내 안에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고 실험하고 배우고 내쫓을 수 있는 자유였다. 나는 사람 잡는 TV의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부터 구제됐다. 넬슨 만델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팀 버튼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 헬레나 본햄 카터와 함께(좌). 베니스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은 팀 버튼과 함께 한 조니 뎁(우).
이후 나는 팀과 다시 [
에드 우드]를 작업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포모사 카페에 앉아있을 때 그가 내게 들려준 아이디어다. 얘기가 끝난 지 10분도 안되었을 때, 나는 이 영화를 하기로 했다. 나는 팀이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어떤 영화가 됐든, 나는 그가 원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의 비전을, 그의 취향을, 그의 유머 감각을, 그의 진심을, 그의 두뇌를 믿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마술이 아니다. 마술이라는 말은 일종의 속임수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터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은 우리가 흔하게는 볼 수 없는 아주 유별난 재능이다. 그를 영화감독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천재'라는 드문 명칭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것도 영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림과 사진과 창의력과 통찰력과 아이디어 등에 모두 해당된다.
끈끈한 우정의 바탕 위에서 존경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배우와 감독 사이의 직업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렵다. 팀이 몇 마디 말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별난 방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가 그 장면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연기해내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아티스트, 천재, 괴짜, 미치광이다. 똑똑하고 용감하며, 신경질적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충성스럽고, 비순응적이면서도 솔직한 친구다. 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나는 내가 종이에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경심을 그에게 품고 있다. 그는 팀 버튼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Unrealized roles 실현되지 못한 역할들
[플래툰]에서 단역을 맡은 조니 뎁(좌)과 주연을 맡은 찰리 신(우).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니 뎁을 주연으로 기용하려 했다.
2003년 [
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 펄의 저주]를 만나기 전까지, 조니 뎁은 의도적으로 '블록버스터 보이'가 되기를 거부하며 크기보다는 깊이와 독특함을 기준으로 영화를 골랐다. 그 결과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키아누 리브스. 뎁이 [
스피드](1994)와 [
매트릭스](1999)를 거절하는 바람에, 리브스는 흥행 배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선 브래드 피트도 고마워해야 할 듯. [
가을의 전설](1994)와 [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는 모두 조니 뎁에게 먼저 제안이 갔던 영화들이다.
'조니 뎁에게 은혜 입은 배우' 명단을 계속 이어가면 러셀 크로우도 있다. 조니 뎁은 [
아메리칸 갱스터](2007)와 [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를 모두 거절했고 그 역할들은 모두 러셀 크로우에게 갔다. [
잠수종과 나비](2007)은 스케줄 문제로 포기했던 영화. 마티유 아말릭이 가져갔다. 톰 크루즈가 가져간 [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에릭 바나가 가져간 [
헐크](2003), 팀 로스가 가져간 [
펄프 픽션](1994)도 모두 조니 뎁에게 먼저 고려되었던 영화들이다.
한편 조니 뎁이 '밀린' 경우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
플래툰](1986)의 주인공으로 조니 뎁을 생각했으나 스튜디오는 23세의 조니 뎁이 너무 어리다며 반대했고, 대신 21세(!)의 찰리 신을 주인공으로 확정했다. 마이크 뉴웰 감독은 [
콜레라 시대의 사랑](2007)의 물망에 오른 조니 뎁이 지나치게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대신 하비에르 바르뎀을 캐스팅했다.
Vanessa Paradis 바네사 파라디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함께한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
스무 살 때 시작한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났고, 이후 조니 뎁은 위노나 라이더, 셔릴린 펜, 제니퍼 그레이, 엘렌 바킨, 케이트 모스 등 수많은 여성들과 인연을 맺었던 조니 뎁이 자신의 삶을 맡긴 여성은 바로 바네사 파라디. 1998년부터 연인 관계가 된 그들은 1999년에 첫 딸을 낳았고, 2002년에 아들을 얻었다.
조니 뎁은 '첫 눈에 반한 여인' 바네사에 의해, 그리고 특히 아이들에 의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바뀐 듯. 블록버스터를 기피하던 그가 [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출연한 건, 캐릭터의 매력도 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도 컸다. "딸이 태어난 1999년 5월27일 전까지 내 삶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단순한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는 내게 '진짜 삶'을 선물했다." "내 딸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숨을 쉬는 유일한 이유다." "나는 아침마다 놀랍고, 아름답고, 순수한 천사가 깨어나는 걸 본다." 음... 아마도 조니 뎁은 할리우드 최고의 '딸 바보'가 아닐까?
Wes Craven 웨스 크레이븐
데뷔작 [나이트메어]의 조니 뎁(좌). [나이트메어 6]에 카메오 출연을 한 조니 뎁(우).
밴드 '더 키즈' 멤버들과 함께 LA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조니 뎁의 꿈은, 밴드 해체와 함께 무너졌다. 이때 만나 결혼까지 한 로리 앤더슨은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는데, 당시 니콜러스 케이지와 친분이 있었다. 조니 뎁을 본 케이지는 자신의 에이전트를 소개시켜주었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니 뎁은 오디션을 보게 된다.
이때 만난 영화가 바로 호러의 전설이 될 [
나이트메어](1985). 웨스 크레이븐 감독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조니 뎁을 별 망설임 없이 캐스팅했는데, 여기엔 크레이븐 감독의 딸의 조언("그에겐 꿈꾸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이 크게 작용했다. 8주 동안 촬영에 임하며 그가 받았던 주급은 1,200달러. 궁핍하던 시기에 단비와도 같은 돈이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희생자 중 한 명. 이후 조니 뎁은 [
나이트메어 6](1991)의 'TV 속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한다.
X-disease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2007년, 조니 뎁의 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았고(나중에 콜리균에 의한 신장 질환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치료되어 건강을 되찾았다. 조니 뎁은 감사의 표시로 딸을 돌보았던 런던의 그레이트 오스몬드 스트리트 병원에 200만 달러를 기부했다.
Youth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의 조니 뎁(좌). 아카데미 시상식에 어머니(맨 왼쪽)와 함께 했다(우).
켄터키주의 오웬스보로라는 한적한 마을에서 태어난 조니 뎁(출생명 존 크리스토퍼 뎁 주니어)의 아버지는 도시공학자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수 웰스는 웨이트리스였다. 4남매의 막내인 뎁은 어머니와 가까운 편이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뎁이 7세 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은 어린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편 네다섯 살 때 조니 뎁의 꿈은 이소룡이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직장을 따라 플로리다로 이사를 간 뎁 일가는 모텔을 비롯해 끊임없이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했고(30~40군데를 이사했다),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 속에서 조니 뎁의 학교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12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13세 때 첫 경험을 했으며 14세 때 약에 손을 댔던 조니 뎁.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며 폭력적이고 반항적인 아이였던 그는 줄곧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15세 때 부모는 이혼했고 그의 방황은 점점 깊어졌다. 이때 그를 구원한 건 음악이었고, 어머니가 선물로 준 전기기타를 끌어안고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주 연습을 했다. 이후 뮤지션의 꿈은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찾은 도시 LA에서 그는 배우가 되었다.
zealous collector 열정적인 수집가
[나인스 게이트](좌)와 [퍼블릭 에너미](우)의 조니 뎁.
콜렉션에 대한 조니 뎁의 욕심은 대단한데, [
나인스 게이트]에서 맡은 고서 감정인 캐릭터가 잘 어울려 보였다면 그건 조니 뎁이 실제로 희귀본 장서를 소유한 수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
가위손]에 캐스팅되었을 때 (에드가 앨런 포 소설 원작의 영화로 유명한) 빈센트 프라이스(과학자 역을 맡은 배우)에게 자신이 소유한 포 전집 초판본을 건넸는데 프라이스는 소설 중 한 구절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읽었고, 그 놀라운 순간의 경험을 그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아버지의 취미를 이어받아 총기류를 모으고 있으며, 곤충 표본을 모으는 취미도 있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수집품들인데, 아직 공개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