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에 대한 믿음
5)일불승
(1)일불승의 의미
일불승(一佛乘, eka-buddha-yāna)은 성문승‧연각승의 이승(二乘)에 대해 대승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이며, 부처가 되는 유일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①일불승(一佛乘) = 일승(一乘) = 불승(佛乘, buddha-yāna)
②불승(佛乘) = 보살승(菩薩乘) = 대승(大乘) = 여래승(如來乘)
일승과 일불승, 그리고 불승 등의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①일불승은 일승이라고도 하며, 불승(佛乘)과도 같은 말이다. ②불승은 부처님이 되는 도리를 설한 가르침으로 보살승․대승․여래승이라고도 한다. 약간의 차이는 불승과 여래승은 가르침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로 붙여진 이름이다. 보살승은 이 도를 닦는 주체에 의해 붙혀진 이름이며, 대승은 자리이타의 이념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①은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라는 말이다. 『법화경』은 일승과 일불승이 혼용된다. 삼승과 같이 논할 때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라는 의미의 '일승'이다. 일불승은 중생이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 궁극에는 일불승을 얻는 것은 일체종지를 얻는다는 의미이다. 일승은 초기경전에 있었던 용어지만 대승의 일승과 차이가 있다.
①은 초기경전에 성문승, 벽지불승, 불승과 성문, 연각, 불승 등의 용례가 보인다. ②는 불승을 얻고자 하면 5계와 십선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사향사득[과(果)]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성문승, 벽지불승, 불승이라고 설한다. ④일불승은 사념처로 근심이나 괴로움을 여의고 진여법을 얻게 한다고 설한다. 사념처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관된 수행법인 만큼 현실 고뇌의 극복과 연관된다. 초기경전의 일승은 도달해야 하는 지향점으로 수행의 계위, 사념처의 수행법과 같이 설한 것을 볼 수 있다.
대승경전에서 보면 ⑤『반야경』과 ⑥『보적경(寶積經)』의 용례는 교법으로서의 일승이다. ⑤는 일승으로 바라밀다를 받아들인다고 한다. ⑥은 법의 근행, 신행에 안주, 깊은 법에 불퇴전, 난법을 모두 통달해 결국 일승도를 얻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일승도는 유일한 '실천법'의 의미이다. ⑦『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의 이역본은 잘 알려진 구마라집 역의 『유마경』, 『유마힐경』, 『유마힐소설경』이다. 모두 산스크리트 원전 『비말라키르티 니르데샤 수트라 (Vimalakirti-nirdesa-sutra)』를 번역한 것이다. 『설무구칭경』에서 성문은 지혜가 미천해 대승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설한다. ⑧『화엄경』은 본래 불타의 자내증(自內證) 경지를 그대로 드러낸 경전이다. 절대적인 평등한 마음으로 차별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자내증의 법을 설한 화엄의 일승에도 여래의 자비는 필요하다. 세상에 여러 가지 근기 다른 사람들에게 근기 따라 제도하기 위해서 설법한 것은 여래의 자비를 드러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의 일승은 사향사과, 사념처와 함께 쓰여 도달하는 경지이고, 『반야경』의 일승은 반야바라밀에 포섭된다. 그러나 『설무구칭경』은 대승을 우위에 두기 때문에 성문승을 폄하한다. 『화엄경』과 『법화경』의 일승은 '삼승과 일승'의 관계에서 차이가 있다. 『법화경』은 동교일승(同敎一乘)으로 삼승과 일승이 차별화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화엄경』은 별교일승[일승원교]라고 하여 일승이 삼승을 넘어서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즉 일불승은 '가르침은 하나'라는 의미로 『법화경』에서만 나오는 개념은 아니지만 『법화경』의 일승이 강조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경문에 경설 되어 있고 내용면에서 포괄적이면서 통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2)『법화경』의 일불승
『법화경』제2「방편품」에 설시되는 일불승은 삼지삼청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전제한다. 일승묘법(一乘妙法)은 통일적 진리이며 사물 각각을 지탱하는 법을 제법이라든가 일체법으로 총칭하는데 그것들을 밑바탕에서 통일하고 있는 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법화경』의 일불승은 세 가지로 논의할 수 있다. 첫째는 교법이다. 둘째는 불성이다. 셋째는 제법실상이다. 첫째 일불승은 교법(敎法)의 의미 가 있다. 즉 이승이나 삼승에 있어서 일불승의 방편의 가르침이다.
사리불아, 여래께서는 다만 일불승(一佛乘)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이요, 다른 승은 없거늘, 어찌 이승(二乘), 삼승(三乘)이 있겠느냐?
일불승은 말 그대로 불(佛)의 입장에서 '유일한 가르침'이다. 바로 부처되는 길은 '오직 하나의 실천법'이라는 것이다. 일(一)의 의미는 밑바탕의 통일된 하나이다. 즉 누구에게나 부처가 되는 불종자(佛種子)가 편재해 있다는 것이다. 불종자를 지닌 중생이 번뇌를 제거하면 여래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게 된다.
이 모든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느니라 … 사리불아, 나도 지금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이 갖가지 욕망과 마음 깊이 집착하는 바를 알아서 그 성품에 따라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과 방편력으로 법을 설 하느니라. 사리불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다 일불승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여기서 '다만 보살을 교화한다'는 것은 여래의 교법은 오직 일불승이고, 보살도를 실천하는 '보살'만이 도달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승은 아라한의 길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길'로 가야 한다. 보살은 신력견고자(信力堅固者)라는 문구와 함께 경설된다. 결국 믿음이 확고하고 보살도를 실천해야 일불승에 도달해 일체종지를 얻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에 들도록 하는 여래의 교법인 일승법은 여래나 중생에게 공통적으로 상호 왕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통일적 개념인 일승법은 그런 의미에서 평등하다. 평등한 측면은 『법화경론』에 비유로 논의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비유는 소[牛]에 의거하면 우유와 낙(酪)과 생소(生酥)와 숙소(熟酥) 및 제호(醍醐)가 있는 것과 같다. 제호가 제일인데 소승은 우유와 같고, 대승은 제호와 같다.
우유를 정제하면 낙(酪), 생소(生酥), 숙소(熟素), 제호(醍醐)의 제품이 나오는데 모두 우유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범부와 성문, 벽지불의 법신이 평등하고 차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맛이 좋은 제품은 제호가 되며 이것은 일불승을 말한다.
둘째는 일불승의 불성적 의미이다. 『법화경』에는 불성(佛性, Buddha-d hātu)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불자(佛子, sugatasya)322)라는 용어가 있다. 이 불자는 부처님의 자식으로 선언적 불자의 성격이다.
『법화경』의 '궁자유(窮子喩)'도 궁자가 나온다. 장자는 이 궁자가 참된 자식임을 알고 모든 재산을 넘겨주게 된다. '궁자유'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한 아들(궁자)는 아버지(장자)와 헤어져 20년이나 지나 타국에서 곤궁하게 지낸다. 아들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는 정착하여 큰 부호가 되었다. 아들은 각처를 유랑하다가 아버지의 성에 오게 되고 아들은 멀리서 아버지의 큰 세력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 붙잡힐까 겁먹고 도망을 친다. 그때 장자는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 아들을 데려오려 하나 아들은 놀라 기절을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려움을 짐작해 방편으로 초라한 형색의 사람을 보내 분뇨를 치우는 일을 하게 하고 품삯을 준다. 어느 때 아버지는 초라한 형색으로 아들에게 접근에게 오래오래 일하도록 당부한다. 그 후 아들은 점차 그 집의 여러 사정과 재산 관리에 능숙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인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아버지는 죽을 때가 다가오자 궁자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처리하도록 말을 꺼낸다. 장자는 죽을 때에 친족과 국왕, 대신 등을 모아놓고 궁자가 자신의 친아들임을 밝히고 모든 재산을 넘겨준다. 궁자는 아버지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본래 바라는 마음이 없었지만 이제 보배창고가 저절로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비유에서 재산을 가진 장자는 부처님이고, 아들은 성문을 비유한다. 오랜 기간 방랑하는 것은 일불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있는 미혹한 세계의 표현이다. '궁자유'는 5단계로 구분되는데, 이를 천태종에서는 5시교판으로 정립하였다. 미혹한 세계는 본래 불성이 존재하는데 알지 못한다. 모든 중생이 본질적으로는 불성의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완성의 부처이다. 미완성의 부처이기 때문에 성불하기 위해서 믿음과 신행이 필요하다. 궁자유의 가난한 아들과 장자의 관계는 믿음이 중요하다.
①장자의 아들이 어리석고 둔하며 용렬해서 나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아버지인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②이십년간 항상 거름을 치우게 하였는데 시일이 지나 마음으로 서로 믿게 되어 출입이 어렵지 않았다.
장자는 아들이 어리석고 둔한 마음으로 인해 믿음을 지니지 못한 것을 알고서 시일을 보내 결국 근기가 성숙해져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①에서 장자의 아들에 대해 '용렬하다[劣]'는 표현이 나온다. 범어로 '하열한 신해(hīnȃdhimuki)'이며, 불신(不信)에 해당되는 범어는 'na sraddad hi'이다.
셋째, 일승이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 표현된다. 『법화경』의 경문은 부처님의 불지혜가 난신난해하다고 언급된 후 제법실상이 나온다. 논리의 부정과 함께 나오는 제법실상은 범어로 'dharmatā' 또는 'dharma-svabh āva'이다. 범어본에 이 용어가 없고, 대신 'sarva-dharma(一切法)'란 말이 나온다. 범본의 'sarva-dharma(一切法)'을 구마라집이 독자적으로 dharma-svabhāva'(諸法實相)로 해석한 듯 보이며 이 용어의 최초 제공자이기도 하다. 『대지도론』은 "법성(法性, dharmatā)이란 제법실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제법실상(dharmatā)이 법성(dharmatā)이라는 말이다. 또한 법성은 'dharma-dhātu'라고 하며, 'dharmatā'은 법상(法相)으로도 번역이 된다. 구마라집이 일체법(sarva-dharma)를 제법실상으로 해석한 근거는 『대반야바라밀경』에서 발견된다.
일체법은 다 공(空)하고, 일체법은 다 무상(無常)을 자성(自性)으로 하고, 일체법은 다 무원(無願)을 자성으로 한다.…일체법은 다 진여(眞如)를 자성으로 하고, 일체법은 다 법성(法性)을 자성으로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일체법(sarva-dharma)은 바로 법성을 말하며 환언하면 제법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2 「방편품」에서 설시되는 제법실상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법은 제일 드물고 어려운 법이어서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제법실상(sarva-dharmān)을 알 수 있다."라고 나온다. 즉 일불승의 일체종지를 지닌 부처님만이 제법실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신행과 심신치유 사례 분석 연구/ 김청진(청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