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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의 조상은
귀상족(貴尙族),휴밀족休密族),도밀족(到密族),돈밀족(敦密族),쌍미족(雙彌族) 등이 있다.
(돈밀족은 돈황(敦煌)이 기원이라는 말, 밀(密)이라는 말도 그 근원이 돈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쌍미족(雙彌族)은 북인도의 영향을 받아 양미간 가운데에 점을 찍어 표시한 종족을 말한다.
미오야마국(미오사마국,미오서마국)이 대표적.)
이들은 대월지족이 되어 사마르칸트로 가서 박트리아 왕조와 귀상왕조(쿠샨왕조)를 세운다.
중원으로 들어와 귀상왕조를 이어간다.
귀주성으로 귀상족이 가장 많이 들어가 귀주성이 되었다.
진번한 24국들에서 彌가 많이 나오는 것은
쌍미족(雙彌族)의 후예라는 뜻이다.
대월지는 다시 예지국,대예지,다예지,예예국,아영,알영,알지,대알지 등으로 분화한다.
이로써 루란국(樓蘭國), 소하국(小夏國), 후하/대하국, 성촉>성한, 촉한, 예촉 등으로 분열한다.
휴밀족의 후예 휴도왕(휴저왕)의 태자 김일제가 청해 저족 출신으로
청해성 일대에 살았다가 한무제 유철 때 몽염 장군에게 동생 김륜과 함께 잡혀 들어가
손자 김당과 매형 왕망이 서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왕망)를 세우는 것이다.
대월지가 중원으로 들어오고 나서 감숙성, 섬서성의 북천축국,
청해, 사천, 귀주, 호남성의 중천축국,
운남, 광서, 광동성 강서성의 남천축국,
절강, 복건성의 동천축국이 세워진다.
이것이 오월의 강남 강동 진출로 중국 역사에 기록된다.
그리고 범천축국(凡天竺國)이 있었다.
성한, 열한, 세한의 후예가 혁련발발, 혁련정으로 성한으로 들어가 점령하고
무열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김춘추는 성한을 세운 이웅의 후예다.
신라로 들어와 성을 김씨로 바꾼 것이다.(제천지윤전칠엽)
성한왕은 이웅(李雄 )을 말한다.(성한/成漢304~347)
298년에 일어났던 후촉/성촉의 이특(李特~303)을 점령하고 이어받았다.
진주(秦州 : 감숙성 동부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사천성 성도(成都/청두)인 촉(蜀)으로 들어왔다.
그 후 이웅과 이류(李流)가 303년에 성도(청두)와 익주(溺州)를 점령하고
304년에 성도왕(成都王)으로 즉위하여 306년에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정하였다.
334년에 이웅의 형의 아들인 이반 즉위,
334년에 이웅의 아들인 이월(李越), 이기(李期)가 반정을 일으키고 이기가 즉위한다.
338년에 이기의 폭정으로 숙부인 이수李壽)가 다시 반정을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다.
이수는 국호를 한(漢)으로 고친다.(성한/成漢304~347)
343년 이수를 이은 이세(李勢)도 폭정을 일삼다가,
347년 동진의 환온(桓溫)에게 멸망당한다. (이세가 세한이다.)
원래 환온[예촉]은 초국>촉나라 후예로 사천성 성도에 살 때 성촉의 제후로 떨어졌다.
(초국楚國>촉蜀>예촉)을 재건하려고 전진의 부견의 침공을 피해 강서성 예장지방인
동진으로 들어가 권력을 주무르며, 전진의 제후국인 후연, 남연을 격파한다.
[예촉은 안휘성 서화 기자 조선[구 하남성 상구현]에서 제나라에 점령되어 살다가
기원전 초나라가 침공하여 호남성으로 강제 이주당한 후 세력이 불어 초나라의 제후로 살면서
초나라 멸망 이후 기원후 초국을 세웠는데, 사천성 초나라 성도 지역에서 유비가 촉을 건국하자,
이민족 제후(예촉)로 들어가 활동한다.
성촉도 유비의 제후로 활동하는 이민족 국가였다.]
촉한 멸망 이후 감숙성 동부 6군, 내몽고 사라선맹에서 남하한 이민족들(성한)이 사천성 성도로 들어와
이특의 성촉을 차지하고 예촉을 제후로 떨어뜨리면서 대성>성한으로 국호를 바꾼다.
그래서 예촉의 환온이 전진[부견]이 일으킨 영가의 난을 피해 동진 제후로 들어가 성촉[성한]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 이후 혁련발발이 감숙성 동부 6군/내몽고 사라선맹에서 다시 성한으로 들어가
무혈혁명으로 차지하고, 하>후하>대하를 건국한다.
그 후 혁련발발이 후진의 제후로 활동하다가 유송의 유유에게 후진이 멸망하자 독립하여
섬서성 서안을 점령하고 실크로드 도착 중심지인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 진평 2군으로
군대를 보내 점령하러 갔다가 실크로드 중심지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으나,
서안에서 내란이 일어나 혁련발발이 서안에서 죽는다.
그 후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동진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가 되려다가
북위 출신 유유의 진압으로 동진 황가 일행, 강서성 예씨[예장라씨(나씨)], 강소성 서북 안휘 동남부의
양하사씨, 사탁, 사택씨, 사마씨와 함께 요녕성 심양의 옛 낙랑국에 남아있던 낙랑 잔류인을 복속하여
후동진을 세운후 고구려 고국원왕에 밀려 낙랑인과 함께 해주 안악의 낙랑국으로 들어갔다가
백제를 거쳐 익산 금마 연립 마한국(하한)으로 들어온다.
강소성 팽성출신의 유유가 동진 황제를 폐하고 유송(남송(宋))을 건국한다.
환온의 선조는 초나라 때 끌려간 기자 조선의 후예 서불한우로국인중 우로국인이었다.
삼국시대 유비의 촉나라 이민족 제후로 활동하다가 촉나라가 망하자 예촉을 재건하였다가
감숙성 동부 6군에서 남하한 이특의 성촉/후촉을 점령한 성한(이웅)의 제후로 떨어지자,
청해성, 감숙성을 장악하고 비단길, 초원의길 교통로를 장악한 전진(부견)의 남북조 천하통일 전쟁 때
전진의 침략을 피해 강소성 남경 동진으로 들어가 제후로 활동하며 막후 실력자로 부상하며
황하강 이남 안휘성의 남연을 격파하여 멸망시키고, 산동성, 하북 동남단 중산의 후연 모용수를
줄기차게 공격하였다.
이후 사천성 성도[청두]로 진군하여 예촉을 제후로 떨어뜨렸던 성한을 이세때 멸망시켰다.
이것이 유비의 촉나라 공식 이름이 "촉한"인 이유이다.
환온의 아들 환현 일파와 강소성 서북부 회수/사수지방의 사안, 사현가문의 양하사씨는
유유의 동진 장악으로 동진 황제 일가와 함께 강소성 남경에서 대련반도 조양, 심양의 옛 낙랑국으로 들어가
낙랑 잔류인을 복속하고 후동진을 세운후, 고구려 고국원왕 사유에 밀려
해주 낙랑국으로 들어가 동수때 낙랑인 숫자가 더 많아지자 다시 낙랑국으로 고쳐 낙랑왕에 오르고
고국원왕 사유가 해주 안악을 점령하고 안악궁을 세우자, 백제 근초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익산 금마 연립 마한국[하한/수도 금성]과 나주지방으로 남하한다.
하한은 백제의 동성왕, 위덕왕, 그리고 신라 진지왕 때 침공을 당해 일부가 신라 금성으로 들어가
금성라씨로 분화하고 나주 침미다례국에서는 예장라씨, 나주라씨, 그리고 익산 금성라씨 등으로 분화한다.
하한의 사씨, 사탁씨(사택씨)는 남마한 침미다례국[나주~사천]의 사탁씨로 분화하고
진흥왕의 팽창기 때 여수, 사천의 사탁부가 신라 사탁부로 들어가 진평왕으로 오르는 세력이었다.)
무열황제(武烈皇帝) 혁련발발은 열한(熱漢)이다.(381~425/재위407~425)
이것이 김춘추와 문무왕이 말한 성한, 세한, 열한이다.
성한왕 이웅(成漢王 李雄 304~334)
성한의 마지막왕 이세한.(勢漢343~347)
성한을 무너뜨리고 후하>대하를 세운 무열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열한(熱漢)이다.
왜냐하면 혁련발발이 무혈혁명으로 성한을 점령하고 후하를 세우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하여 모신 것이다.
백제로 들어왔다가 하한과 나주의 침미다례로 남하하는 환온(桓溫), 환현 일파의 예장라/나씨,
그리고 안휘 동남, 강소 서북의 양하사씨 사안, 사현 장군 가문의 후예와는 원수지간이 된다.
원래 환온의 예촉과 이특의 성촉을 성한의 이웅이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동진의 사현 장군이 전진/후연/남연의 100만 대군을 안휘성 합비 비수일대의 수현에서 격파할 때
환온은 예촉이 후촉/성촉>성한에 멸망당하자, 성한의 제후로 떨어져 있다가 촉(초국)을 재건하기 위해,
동진으로 들어가 제후로 있으면서 막후 실력자로 부상하여 실권을 행사한다.)
성촉>대성>성한의 이세(세한)때 동진의 제후이자 실권자인 환온桓溫)이 고향이었던
사천성의 촉(蜀)으로 가서 성한의 이세를 몰아내고 멸망시켰다.
이특을 이어 이웅, 이류가 환온 가문의 촉나라 수도인 청두(성도/成都)와
제2도시인 익주(溺州)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성한의 5대 황제 이세한이 망하자 그 후예들이 달아나서 신라로 들어왔던 것이다.
문무왕릉비에 새겨진 제천지윤전칠엽(祭天之胤傳七葉’)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들이 서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우는 세력이다 보니,
다시 나라 이름을 사천성 성도시에서 성한(漢)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김춘추에게 왜 태종무열왕이라는 왕호를 내렸는지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한(成漢)
1대 태종(太宗) 무황제(武皇帝) 이웅(李雄) : 306-334 = 성한왕
2대 애황제(哀皇帝) 이반(李班) : 334
3대 폐제(廢帝) 이기(李期) : 334-338
4대 중종(中宗) 소문황제(昭文皇帝) 이수(李壽) : 338-343
5대 이세(李勢) : 343-347 =세한
6대 이순(李恂):420~421
후하>대하-무열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407-425. =열한.
김춘추 선조 가문이 이세(李勢)이후로 이주해온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남은 세력은 나라가 끊어졌다가 6대 이순을 1년간 모시고 끝이 난다.
중간에 기년이 비기 때문에 그 후예들이 신라로 들어와
실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왕호를 사용하게 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무열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은 흉노로 불리우며 대선우(單于)라고 칭했다.
중국 역사에서는 마지막으로 선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 남흉노 국가로 알려져 있다.
후진(後秦/강족인 요장(姚萇)이 384년에 부견을 죽이고 건국,
417년에 동진(東晉)의 유유(劉裕)에게 멸망)에서 독립하여 후하(後夏)를 건국하였다.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장안(長安/서안)을 점령하고 북위(北魏)와 대립하였다.
감숙성의 북량(北凉)을 정복하고 토번을 복속시켰다.
고구려의 후예 고운의 북연과 동맹을 맺고, 산서성 일대를 공격하여 산서성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그의 아버지 혁련위진은 거비족의 후예였다. (남흉노)
거비족은 철불부이다. (전조/前趙)
혁련위진(赫連衛辰)은 중원의 영향을 받아 유위진(劉衛辰)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아서
이 당시 유위진은 유연족(柔然族)과 융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혁련발발도 유발발(劉勃勃)로 이름을 바꿨다.(혁련위진을 환제(桓帝)로 추존)
후진의 요장에게서 독립한 후 스스로를 대선우(大單于) 대하천왕(大夏天王)이라고 칭하고
용승(龍昇)을 도읍으로 삼았다.
하(夏=後夏)에서 나라 이름을 대하(大夏)로 바꾼다.
그리고 유발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시 혁련발발로 되찾았다.
혁련발발의 선조는 그리스인들과의 융합으로 태어난 종족이다.
대하인의 조상이 대월지이며, 사마르칸트로 진출하였다가 돌아오면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그리스인들과 융합하여 만들어진 종족이었다.
대월지가 중원으로 다시 진출하여 들어올 때
사마르칸트에 오래 남았다가 신강성 서북부, 감숙성 서북부, 내몽골 서북부 루트로 들어오는
북월지의 후예였다.
그 후 량, 북량, 토번, 촉, 후촉/성촉, 백적, 북적, 말예, 서하(西夏)등 유연족과 융합하게 된 것이다.
말예, 전조족은 유연족이다.
이곳에 한(韓)도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의 직계 조상이다.
나라가 크게 한, 전조, 말예, 유연 등으로 나뉘어진다.
후진(요장)이 동진의 유유에게 멸망당하자,
418년에 하(夏)나라는 남하하여 통만성(統萬城)을 수도로 삼고
연호를 진흥(眞興)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북량과 토번 그리고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을 점령할 때,
북연(北燕)과 동맹을 맺었고, 또한 사천성의 성도인 성촉/성한을 무혈 입성하여 차지하였다.
량>북량, 백적, 서하, 전조, 유연은 대하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북연은 동맹을 맺었고, 한(韓), 말예(靺濊)는 독자 세력 내지는 일부가 제후로 들어간다.
말예는 말갈과 예족/예맥족을 말한다.
424년 섬서성 장안(서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고,
425년에 혁련발발이 죽자 무열황제(武熱皇帝)로 추존되었다.
혁련창(425~428)은 혁련발발의 셋째 아들로 2대 황제(선우)가 되었다.
혁련창은 425년에 비호하(庇護下)에서 북위에 패하여 회계왕(會稽王428~430)으로 떨어졌다.
그 다음에 진왕(秦王430~434)으로 올라선다.
(회계지방의 중심은 감숙성 란주시, 장액시 주변 일대)
그후 5만을 이끌고 두개의 길로 감숙성 완천(원천)의 서진(西秦)을 공격하여,
포한(抱罕)을 함락하고 서평(西平)까지 손에 넣었으나,
북위는 그 사이에 제1차 원정군을 보내 하(夏)나라를 공격하여 여러 성을 점령하였다.
427년에 북위는 제2차 원정군을 보내 통만성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하여 안정(安定)을 수도로 삼고 저항하였으나,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해 와해되었다.
428년에 혁련창은 북위에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혁련정은 감숙성 평양시(平凉市/평량시)로 탈출하여 대선우에 즉위하였으나,
434년 북위에 패해 살해당하였다.
3대선우(황제)가 혁련발발의 5째 아들이 혁련정(赫連定428~431)이다.
이로써 대하(大夏)는 끝이났다.
문무왕릉비에 새겨진 투후 제천지윤전칠엽(土侯祭天之胤傳七葉)의
성한왕
세한
열한은
이웅 이세 무열황제 혁련발발을 말하는 것이었다.
선비어 투후는 한자로 토후(土侯)라고 쓴다.
혁련위진 혁련발발은 대월지의 후예로 북월지에서 왔다. (후발주자)
사마르칸트에서 동진하여 감숙성 서북부, 내몽골 서북부로 들어갔다가 남하하여 내려온
북월지의 후예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그리스인들과 융합하였다가 후발 주자로 들어오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섬서성 연안시 일대까지 들어와 살면서 전조의 조환에게 협력하면서 남흉노 세력으로 알려진다.
이특의 성촉을 이웅이 빼앗고 그후예 이류에게 촉나라를 빼앗겼던 환온은
쌍미족 후예로 판단되는 무열황제 혁련발발이 성한을 다시 무혈 점령하고 후하를 세우며
이들과 융합하자, 동진으로 들어가 제후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성한을 토벌하러 가면서
호북성과 사천성사이의 삼협을 통과할 때 원숭이 고사 사건(호로자식- 원숭이를 사로 잡은 놈)을 겪고 나서
이들을 "쌍열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해댔다.
이 욕의 유래는 이렇다.
또 환온(桓溫)은 고향이었던 사천성 청두(成都/성도)의 촉(蜀)나라(예촉)를 되찾기 위하여,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특의 성촉을 빼앗은 성한의 이웅(성한왕), 이류, 이세(세한)세력을 정벌하러
양자강 중류의 호북성과 사천성 경계에 있는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환온의 병사 하나가 벼랑 아래에 늘어진 덩굴 줄기에 매달려서 장난치고 있는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태우고 협곡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어미 원숭이가 소리를 지르며 환온의 배를 쫓아왔다.
오랜동안 따라오던 원숭이는 배가 강기슭에 다다르자 배로 펄쩍 뛰어들어왔으나,
새끼를 품에 안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환온은 죽은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모두 끊어져 있었다.
환온은 대노하여 병사를 엄벌에 처하고 새끼 원숭이는 풀어주었다.
이 말에서 호로자식[猢虜子息-원숭이를 사로잡은 놈]이 나왔고,
또 "애를 끓는다."애가탄다"."너무 애통해서 창자가 끊어진다"라는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단장의 메아리라는 말이 있었다.
특히 6.25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고 유명한 고개도 있었다.
미아리 고개만 넘으면 북진할 수가 있는데 이곳을 점령하지 못해 애를 끓고 있었다고 해서 나온 말이었다.
또 피난민이 이 고개를 넘어가야만 인민군을 피할 수가 있는데,
치열한 포화속이라 인민군이 쫓아오는데 넘어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서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 유래는 환온의 원숭이 고사인 단장(斷腸)에서 이 말이 유래된 것이었다.
호로자식이란 말이 성한을 치러가는 도중에 나왔기 때문에 "쌍열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였다.
감숙성 동부 6군에서 남하한 이특의 성촉은 환온의 예촉과 유비의 이민족 제후국가였고,
유비의 촉나라가 망하자 사천성 성도(청두), 익주, 강주, 자동, 영안등을 영토로 성촉, 예촉등을
세우고 살았으나 감숙성 동부6군과 내몽고 서남부 파단길림사막의 사반지방인 사라선맹에서
남하한 이웅이 이특의 성촉을 차지하고 예촉을 제후로 떨어뜨렸고
이웅의 성한은 이특의 이씨로 개명하고 성촉>성한을 점령했으나 후일 하>후하>대하로 혁련발발이
나라 이름을 바꾸면서 역시 예촉을 제후로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동진 제후로 들어간 환온은 전진, 전연, 후연, 남연, 성촉/성한을 격파하는 선봉장으로 활동한다.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까지 진출하여 남연을 멸망시키고 이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선다.
환온의 아들 환현이 동진의 강소성 남경(건강/견강)으로 들어가 황제자리를 넘보다가
북위 출신 강소성 팽성의 유유에게 제거당하고 유유는 황제를 몰아내고 송(宋/남송/유송)나라를 건국한다.
(유유는 구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으로 천도함-기자 조선 탄생지/현 안휘성 서화.
실크로드 비단길, 초원의길 문물의 최종 소비종착지)
이 나라를 조광윤의 송(宋)나라와 구분하기 위하여 유송(劉宋420~479)이라고 부른다.
(조광윤(趙匡胤)이 후주(後周)의 선위를 받아 세운 송나라(960~1279).
월맹으로 들어가 레(黎)왕조와 후레(後黎)왕조를 세우는 북월지 세력은
후레자식[後(Le·黎려/레)子息]으로 알려진다.
또 길림성 동모산 대중상의 후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고왕 대조영 아들 대무예(무왕)가
산동성 등주시를 공격하여 장악하고 낙양, 서안의 당나라로 들어가는 발해만을 통제하여
대신라 무역을 독점했고, 고구려 유민 이정기와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지는 치청천국>
후제가 강동9주를 차지하고 섬서성 서안까지 처들어가 당현종과 양귀비를 파천시키고
대운하를 봉쇄하여 맹위를 떨쳤기 때문에 후려자식[後麗子息]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전진의 북조통일에 밀려 동진 제후로 들어와 각 제후들의 군부독재에 시달리다
예촉의 환현 일파, 사안, 사현 장군의 양하사씨는 동진 황족 일행을 이끌고 대련반도로 피난을 가서,
옛 낙랑국 자리로 들어가 낙랑국 잔류인[요녕성 조양>심양]을 점령하고 후동진국(後東眞國)을 세운다.
조양에서 동수가 태어나 동진국왕으로 있다가 고구려 고국원왕에 밀려 심양으로 밀려났다가
해주로 들어온다.
해주로 들어오자 낙랑국인 숫자가 더 많게 되었다.
그래서 국호를 다시 낙랑국으로 고친다.
그때 근초고왕이 올라가서 해주를 점령하고 동수를 제후로 두게 된다.
동수 군대가 행차하는 동수묘 그림 고분이 대련반도 조양에서 발견되었는데,
해주 안악 3호분에도 똑같은 쌍둥이 묘가 발견되었다.
벽화속에서 발견된 "番ㅓ개곰"이라는 글자는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해주 안악 3호분 동수묘 "番ㅓ개곰" = 번개곰.
그 당시에 극소수의 한글을 쓰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동진인이라는 것은 더욱 믿겨지지 않았다.
자세히 알고 보니 환온의 선조는 촉[예촉]의 후예였고, 사마염(서진/西晉), 동진의 사마예(東晉),
사안, 사현장군의 양하사씨 는 사탁씨에서 사택씨로 바뀌고, 환온, 환현가문은 예장라씨로 성이 바뀌기 전의
우리 선조였다는 사실이다.
사마혁, 사마덕종, 사마덕문의 사마씨 황제가문은 일본으로까지 이주한다.
예식진 등의 선조는 예촉에도 있었고, 하남성 정주시 한성 백제에도 있었다.
이들의 선조가 정주 한성백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실담어인 범천축국(凡天竺國)의 범어의 기본 글자를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잦은 전쟁과 실크로드 상실 등으로 상업이 쇠퇴하면서 완전히 소멸한 글자를,
세종이 이지란등 숙여진 후예에게 국정문자를 배워두었다가 독자적으로 자음과 모음을 만든 후에
부가음을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옛 글자를 모방하여 극적으로 다시 되살려 낸 것이다.
예씨의 선조는 대월지에서 분화하는 대예지, 다예지, 예예국 등으로 분화하는 세력이었다.
주몽(朱蒙)의 부인이 예씨 부인(禮氏夫人)이다.
월지의 후예라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주몽(고원족>고려족)과 유리왕이 황룡국으로 들어가 점령하고
유리왕이 왕좌에 오르는 나라가 황룡국이다.
황룡국은 원래 월지가 세운 나라였다.
월맹도 북월지를 시조로 두고 고집하고 있는데,
월맹인은 섬서성 한중시( 汉中市) 락양현 (악양현/略陽縣)에 있는 북월지국이었다.
이들은 내몽골 서부 아랍선맹/사라선맹/아라선맹 자치기의
파단 길림사막(巴丹吉林沙漠)으로 진출했을 때는 적곡성(赤谷城)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이곳을 오손족이 빼앗아 살게 된다.
그러다가 오손족은 월지의 반격을 받고 감숙성 서북부로 밀려났다가,
모돈 선우와 동맹을 맺고 다시 쳐들어가서 월지의 적곡성을 빼앗고 수리하여 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월지는 신강성 서북부로 밀려났다가 사마르칸트로 진출하여,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당시 우즈베키스탄까지 진출했던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인들이 돌아가지 않고,
사마르칸트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고 살게 되는데,
월지가 이곳을 점령하여 실크로드 중간 세금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형성하면서
귀상족 등 각제족으로 분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에 키르키즈 공화국의 이식쿨(이식홀)호수에 졸본아타가 있다.
졸본이 이들의 이동에 따라 지명이 그대로 옮겨간 것이다.
현지화되면서 촐본아타(금성의 아버지)로 변하였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졸본왔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