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의 미아리 고개』(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는 「이해연」이
1956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미아리 고개"에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6·25의
한(恨)을 투영(投影)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북쪽 관문인 이 고개
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철삿줄로 꽁꽁 묶여 뒤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끌려간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요?
1950년 6월 27일 밤 국군의 "미아리" 저지선(沮止線)에서는
맹렬한 포격전(砲擊戰)이 벌어졌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새벽에는 한강 인도교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끊어졌으며, 피난에 나선 무고한 인명(人命)이 대거 희생
됐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자 서울은 딴 세상이 됐습니다. 그 생생한
목격담을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이 꼼꼼하게 일기에 남겼습니다.
“포성(砲聲)이 뜸해지기에 밖을 내다보니 '낙산' 위에 늘어섰던
포좌(砲座)가 간 곳이 없다. 미아리 고개로 자동차보다도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가 아닌가 싶다.
전찻길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다.
밤 사이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 만 것이다.”
6월 28일 소련제 T-34형 탱크가 줄지어 넘어온 "미아리 고개"는
그 후 민간인들이 북으로 끌려가는 길목이 됐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 정권은 먼저 정치인과 명사(名士)들을 잡아
갔습니다. 서울에는 '김규식' · '조소앙' 등 독립 운동과 민족
통합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머물고 있었죠.
‘남행열차’를 타지 못한 국회의원도 60여 명 이나 됐습니다.
북한은 선전전(宣傳戰)에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차례차례 평양
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6·25 전쟁 당시 납북 피해자는 8만 명
이상으로 드러났는데, 전쟁 발발부터 서울 수복까지 3개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끌려갔습니다. 공무원·의사·변호사· 교육자 등 사회
지도층 인사가 다수 포함됐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
지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미아리 고개"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됐습니다. 고개 인근에 살던 주민의 증언(證言)입니다.
“끌려가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림잡아 헤아릴 수도 없었지요.
손목을 묶을 쇠사슬이 모자라 소 끄는 밧줄로 엮어 끌고 갔고,
뒤처진 사람들은 구덩이에 몰아넣고 학살해 부근의 산마다
시체들이 즐비했었지요.”([중앙일보] 1990년 6월 21일)
"미아리 고개"는 그렇게 눈물 고개, 이별 고개가 됐습니다. 미군
기밀문서에 따르면, 1950년 10월 '평안남도 대동군'의 한 언덕에서
납북 공무원 2,000여명이 한꺼번에 학살 당했다고 합니다. 대다수
납북 피해자는 전쟁 통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출처: 월간 중앙 2022년 6월호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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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 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영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 섣달 기나긴 밤 북풍 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 섣달 기나긴 밤 북풍 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 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