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히로시마 81년, 아직 갚지 못한 원죄 — 조선인 피폭자와 후손에 대한 피해보상, 미국의 모순을 치유하는 길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그로부터 81년, 그 피해자 중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는 10만 명에 달한다. 해마다 이맘때 합천에서는 그 희생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린다. 원폭으로 인한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치유하는 자리다.
5년 전인 2021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화상 세미나가 열려 마쓰무라 다카오 명예교수(게이오기주쿠대학)가 '미국의 원폭투하 책임과 한일연대'라는 제목의 발제를 하였다.
강제징용문제는 대한변협의 최봉태 변호사가 밝힌 대로, 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틀 안에서 일본 정부나 기업이 강제징용 노동자를 자발적으로 구제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마쓰무라 교수는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마쓰무라 교수는 원폭투하를 둘러싸고 미국의 고의성과 기만성을 강조하였는데, 미국이 원폭투하의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일본이 일찍 항복하지 않도록 조인서 내용에 '천황제 존속' 조항을 일부러 삭제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 이전에 원폭투하를 독려한 정부 아닌 세력이 있었고 그것이 대금융자본이라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 '대금융자본의 획책'은 아는 이는 알고 있지만, 학자가 논문에서 정식으로 언급한 것을 필자는 처음으로 보았다.
원폭 위력 확인하려 고의적 인명살상을
원래 미국의 책임이 큰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군사기지를 원폭투하의 주타겟으로 했다 하더라도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하면 막대한 인명이 살상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원폭의 위력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대량 인명살상을 도모한 것은,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인류사의 전대미문의 과잉무력행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대량학살의 의사결정에 민간의 금융자본이 투하를 독촉하는 역할을 했다는 마쓰무라 교수의 설명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 결정 어디에도 조선인은 고려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당사자도, 항복 협상의 주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10만 명이 죽거나 병들었다. 이것이 원죄의 가장 이르고 가장 무거운 얼굴이다 — 타자의 생명은 부차적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체계. 그리고 이 인식체계는 81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형태만 바꿔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2015년 오산기지에 배달된 살아있는 탄저균, 지난달 같은 기지에서 흘러내린 백린, 그리고 2019년 하노이 회담 직전 북한 해안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하고 사체를 수장한 뒤 그 사실을 은폐하려 보도 기자에게 소환장을 날린 사건까지. 히로시마의 무고한 조선인과 오산의 무고한 조개잡이 주민 사이에는 81년의 시차가 있을 뿐, 당사자가 아닌 이의 생명은 셈에 넣지 않아도 된다는 같은 계산법이 흐른다.
돌이켜 보면, 후쿠시마 사고의 원죄가 어디에 있는지 뿌리를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 금융자본이 지금은 핵에너지에 빨대를 꽂았다. 가령 후쿠시마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은 사고 전까지 수십 년간 독점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자의 지위를 이용해 높은 전기요금, 낮은 운영비용으로 최대한 이윤을 만들어 내었다. 금융기관들이 대주주로서 주식보유 비중이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후쿠시마 사고 후에는 일본정부가 세금으로 만들어진 약 90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면서 대주주의 지위를 정부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손실을 보전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런 운영모델이 각국 정부의 지원 속에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1979년 스리마일 사고 이후 원전 건설을 더 이상 하지 않은 미국 정부 역시 트럼프 정권 때에는 텍사스 핵발전소 건설에 참여하는 금융기관들에 대해 정부가 보증을 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이런 보증은 결국 금융기관들이 원전에 투자했을 때 리스크 비용까지를 감안해 이윤을 보장해 주겠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지구촌을 궁지에 몰아온 금융자본세력이 일찍이 원폭투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에, 81년이 지난 지금에도 섬뜩한 위협을 느낀다.
현재의 지구촌은 에너지전환이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위기가 올 때까지 자본세력은 이득을 먼저 챙겨왔다. 원전사고나 방사성폐기물 같은 손실은 민중이나 다음 세대에 떠넘기겠다는 전형적인 비윤리적 행태다.
문제는 미국이다. 핵무기확산 금지를 내세우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재료를 생산하는 핵에너지를 부추겨온 모순을 미국은 80년 넘게 저질러 오고 있다. 핵우산을 강조하면서 핵무기 재료인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를 외국에 수출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니, 모순되고 미친 짓이다.
무엇보다 전쟁당사자로서의 일본이지만, 민간인의 원폭피해 보상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원론적으로 민간인 각자는 당연히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민간인의 권리를 미국은 강화조약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배상받을 천부적 권리가 있다는 본질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핵무력 행사를 본질적으로 억제하는 기제가 된다.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있다
잠재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주는 단서가 조선인 피폭자와 후손에게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대로라면, 일본 최고재판소도 2007년 4월 이 조약으로 전쟁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실체법적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짚어야 한다. 1951년 이 조약이 체결될 때, 대한민국은 애초에 그 당사국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서명국 명단에서 빠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간 상호 청구권 포기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조선인 개인의 대미(對美) 청구권까지 지울 수는 없다. 이것은 일본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청구와는 전혀 다른 트랙이다. 원폭을 설계하고 투하를 결정하고 실행한 나라, 미국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길이 논리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무차별적인 핵무기 공격으로,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2, 3세대들까지도 평생을 괴롭히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식민지배하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미국은 지금이라도 그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
그동안 미국 법원은 국가의 전투행위에 관한 소송 대부분을 각하해왔다. 그러나 이 장벽이 소송의 승패를 가를 뿐, 청구권 자체의 정당성을 지우지는 못한다. 하지만 원폭투하문제는 다르다.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도 덮지 못하는 과오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무대는 법정 하나만이 아니다. 국제 여론, 미국 의회를 향한 입법 촉구와 배상기금 제안, 그리고 지구촌 시민사회가 함께 지켜보는 자리 — 이 모두가 이 오래된 부채를 계속 살아있는 의제로 만드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배상 받기를 관철시켜야 한다. 이 배상이 이루어지면 인류사의 또 하나의 족적이 될 것이다. 조선인 피폭자와 2세, 3세들이 미국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을 때 언젠가는 일본 민간인 개개인도 그 보상이 원리적으로 가능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각인되는 권력자 측의 핵사용의 위험과 부담이 탈핵으로 가는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평화로 가는 첩경인 것이다. 합천의 피폭자 후손의 증언과 피해보상요구가 핵을 통제하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미국을 바로잡는 길은 '배상'을 관철하는 것
지금 한반도에서는 백린과 탄저균이, 조지아주에서는 쇠사슬에 묶인 기술동맹의 엔지니어들이, 워싱턴에서는 비무장 민간인을 수장한 사건에 대한 응징 대신 그것을 보도한 기자에 대한 소환장이 발부되고 있다. 160년전 셔먼호와 신미양요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한반도를 주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보아온 그 오래된 관성이, 81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이미 조선인들에게 적용됐던 그 인식체계와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
권력은 두려움으로는 지탱되어도 경멸로는 지탱되지 못한다. 분노는 아직 상대에게 기대를 거는 재협상의 언어이지만, 경멸은 그 기대를 완전히 접은 이별의 언어다. 미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변명이 아니라 청산이다. 81년간 미뤄온 조선인 피폭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그 청산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징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8월 6일, 합천의 위령제 앞에서 다시 묻는다. 미국은 이 오래된 빚을 언제까지 셈에 넣지 않을 것인가. 원죄는 세월이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갚아야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