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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의 구체적인 방법들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1-14)
□여러분 지금 야곱이 뭘 보고 있어요?
꿈에 사닥다리 그거는 누구도 얘기 대답할 수 있는 대답이에요.
그건 아이들도 질문하면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요.
좀 더 들여다보세요.
13절에 여호와께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그리고 또요 13절까지 가지 말고 11절 12절까지 거기 안에서요.
여호와께서 서 계신 거 보고 또요 12절 13절 모두에게서 또요.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네네 당연하죠.
근데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아이들 이제 평신도들도 보면 다 대답할 수 있어요.
조금 더 들여다보세요. 본문을 보면
□ 질문/ 지금 12절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 있기만 하세요.
아니면 사닥다리 위에서 야곱과 대화하세요. “나는 여호와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할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주님이 누구한테 하세요?
꿈 속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시나요?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야곱에게 말씀하시나요?
그렇죠. 자세히 보기 위해서 조금 어려운 분석을 해보는 겁니다.
근데 사닥다리 위에 주님이 가만히 서 계시는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 주님만 보였어요.
아니면 사각다리 위에 계신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는 거예요?
그 누구에게 말씀하세요?
야곱입니다. 야곱에게 말해요. 그러면 야곱은 그 말씀하시는 내용을 야곱은 꿈꾸는 야곱은 지금 어떻게 듣고 있나요?
그러면 지금 잠 안 자는 야곱이 듣는 거예요. 잠자는 야곱이 듣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잠자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잠자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야곱이 꿈꾸면서 듣는 거예요.
잠자는 야곱이 듣는 거예요. 잠자는 야곱이 듣는 모양을 이 잠자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잠자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야곱이 잠자면서 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세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야곱이 꿈꾸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서 말씀하시는 그 모습만 본 거예요.
잠자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본 거예요.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이해되시나요?
도대체 야곱의 꿈 중에서 본 게 뭘 봤느냐? 부터 확인해야 되는 거거든요.
이게 그냥 하나님이 사닥다리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만 들었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말하는 걸 들어요.
너가 너가 너가 하면서 그런 다음에 보면 15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하고 다 말씀하시거든요.
그러고 16절에서 야곱이 잠이 깨거든요. 그러니까 야곱이 꿈꾼 게 뭘 꿨냐 하는 거죠.
우선 잠자는 자기가 포함되어 잠자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사닥다리 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본 건지, 그냥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만 본 건지 그걸 확인해 보셔야 돼요.
여기 생각보다 분석할 게 많죠.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요.
잠이 깬 다음에 야곱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뭐라고 말해요?
여기! 거기가 여기가 됐습니다. 여기 제시어는 내가 알지 못해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잠자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요?
거기서 꿈꾸었기 때문에 꿈꾼 곳이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니면 꿈속에서 자기가 자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오신 곳이 야곱이 잠자는 그곳이에요.
아니면 야곱이 꿈꾼 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야곱은 꿈속에서 그 장소에 오신 하나님을 본 건가요?
아니면 그냥 꿈속에서 하나님만을 본 건가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되세요?
그 다음 계속 17절입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7)
두 가지로 말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는 하늘의 문이에요.
분명히 이렇게 두 가지로 말했는데 하나님의 집과 하늘의 문으로 말했는데 시간이 없기 때문에 결론만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로 보시는가 하면 22절 야곱이 돌을 세워놓고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오.
하늘의 문은 어디로 갔습니까? 분명히 야곱이 참여해서 깨어서는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있는데 22절에서는 돌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문은 사라졌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성경 연구의 실제적인 방법들
(1)
(2) 문법 지식을 활용하라
a. 사용된 동사들의 시제(時制)에 유의하라.
창 12:1 요8:57,58요일 2:14, 21, 26 [The Johannine Aorist]
b.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의 수(數)를 정확히 파악하라.
창 22:5 눅 22:31,32
(3) 반복되는 단어나 구절에 유의하라 "인자의 온 것은”"예수의 발치에""보내시는 하나님"
(4) 성구사전(Concordance)을 사용하라“끝”(마 24:1~14): telos, sunteleia"짐" (갈 6:2, 5): baros, phortion
(5) 주요 성구사전들(Concordances)
(6) 성경 원어 실력을 활용하라
(7) 서로 다른 원어들의 의미에 유의하라
(8) 주요 성경원어 사전들(Lexicons)
(9) 성경(백과사전을 활용하라)
a. 단어별 연구: 은혜, 언약, 속죄
b. 영역별 연구: 식물, 동물, 광물
c. 주제별 연구: 성소, 계명, 안식일
d. 계통별 연구: 12지파, 12제자
e. 인물별 연구: 모세, 다윗, 바울
1. 본문을 자세히 읽어라.
어떤 본문을 자세히 읽을 때 무엇이 반복되는지도 주목하셔야 되고 무엇이 없는지도 주목하셔야 합니다.
왜 앞에는 나왔던 단어가 뒤에는 없을까 그 이유도 함께 찾아내셔야 합니다.
본문의 반복과 본문의 부재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굉장한 의미들이 있죠. 그래서 랍비들은 여기 본문에 하나님의 문이라 하늘의 문이라고 하는 단어가 없다고 하는 사실에 깊은 의미를 부여해서 많은 것들을 찾아냅니다.
실제로 성경 주석을 해보면 얼마나 신대한 의미들이 담겨져 있죠 그래서 우리는 본문 내 주석을 하면서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이 반복되는지 무엇이 없는지 등등에 아주 주목하면서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발견이 돼야 의미 부여가 됩니다. 그것은 구태여 지금까지 못 찾아낸 건 얼마든지 찾으실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여기서 한 단계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는 게 우리가 소위 신학을 한 신학도들이 이제 활용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죠.
지금까지는 1부는 본문을 자세히 읽어라라고 하는 내용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2부는 문법 지식을 활용하라. 이게 이제 남 목사님에게 내가 나눠주는 거기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질문 하나 좀 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흔히 돌베개라고 번역되는 베개가 그가 성경을 보는 제 결론은 우리는 다 이렇게 머리에다 베는 베개로 생각했는데 머리맡에 둔 어떤 보호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 원어도 찾아보니까 베개라는 말은 그냥 한국말 성경이 그냥 첨가한 것으로 보이고요.
베개라는 말 자체가 머리 두는 곳 이런 뜻으로 또 머리 곁에 이렇게 다양하게 쓰였는데 이걸 베개라고 번역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예 언급하신 내용과 관련해서 다음 슬라이드에서 언급해서 같이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본문에 나타나는 의미들을 좀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목해서 자세히 읽는 게 중요하고요.
그 다음에 우리 목사님이 질문한 것처럼 어떤 단어들의 의미를 전문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자료들을 활용해야 돼요.
이제 그럴 때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조금 아는 것의 차이가 없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사용하시는 베들레헴 성경을 저도 사용해요.
베들레헴 등, 바이블렉스 좋은 도구들입니다.
조금만 비교해 보면 부지런히 한 7~6개의 번역성경만 비교해 봐도 본문의 의미가 굉장히 선명해지죠.
이게 창세기 12장 1절에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옛날 개역한글이 그렇게 돼 있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시제가 미래로, 미완료기 때문에 미래로 번역돼 있어요.
근데 저는 그것이 시제가 미래일 뿐만 아니라 “지시하리라” 는 번역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라아”예요. 저 정확히 하면 “보여줄”입니다.
남 목사님도 여러분이 자료를 받아보면 창세기 12장 1절을 히브리서 11장 8절과 연결시켜서 아브라함이 떠날 때 어디로 갈지 모르고 떠났다는 사례도 설명해요.
저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죠. 아브라함은 떠날 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지시할로 설명하면 그렇게 번역돼요.
근데 그것을 지시할이 아니라 히브리어는 원어인 “보여줄” 시제가 중요합니다.
보여줄 가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인 것이 분명한데, 보여주는 것은 거기 가서 보여준다는 뜻이 되는 거죠.
그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라는 말도 그러므로 재해석이 되는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갔다고 이렇게 설명하면서 믿음을 설명하는데 그 말은 가나안 땅으로 가서, 가게 될 그 땅이 어떤 땅인지도 모르지만 가라고 하는 뜻이 되는 거죠.
놀랍게도 화잇이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동사의 시대를 주목하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게 문법적 지식인데 문법 몰라도 역본만 비교해 봐도 분명해져요.
그래서 주석 설교를 잘하는 방식은 방법이 없어요.
적어도 5개 이상 우리가 하나의 프로그램 가지고 역본 한 성경 한 텍스트에 대해서 5개 본문만 비교해 보면 굉장히 많은 의미가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여기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이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라.
창세기 22장 5절에 뭡니까?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개정)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개역)
아케다 이야기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개역한글에는 “우리가”를 알아 볼 수 없이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만 돼 있죠.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돌아온다는 말 앞에 반드시 복수동사죠.
영어 성경은 we will come back to you.””(Gn 22:5, NIV11) 이렇게 돼 있죠. 그 아이를 죽여서 내가 아이 데리고 올게 이 말이 그대로 나타나겠죠.
근데 개역한글에는 우리가 돌아온다는 우리가라고 하는 주어가 생략됨으로 인해 아들이 살려서 아들까지 돌아오게 해줄 거라는 믿음을 창세기 22장 5절에서 아브라함이 표현했다는 것이 파악될 길이 없었습니다.
그걸 개역개정 성경은 바로잡아서 “우리가”라는 주어를 넣었죠.
그게 우리가로 개정개정으로 바뀌기 전에도 저는 여러 번 여러 번 1996년도 영남합회 경주에서 하던 야영 집회에서부터 설명했죠. 아브라함은 이때 이미 부활의 소망을 22장 5절에서 고백했다.
대단히 새롭고 번역 성경의 한계를 극복하는 신선한 의미를 던져줄 수 있죠.
그래서 그 단수인지 복수인지 그런 수를 번역 성경을 보면 다 파악할 수 있거든요.
아까 말한 것처럼 반복된 단어가 대단히 중요하고요.
그 다음에 성구 사전을 사용하라 이런 말씀을 우리 남 목사님에게 주석을 하기 위해서 언급을 했는데 우리 마태복음 24장 1절로 14절 잘 알죠.
24장 3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잖아요.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개정)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렇게 묻죠.
끝에 끝이라는 단어가 쉰텔레이아 예요.
συντέλεια
쉰텔레이아 sunteleia
완료 completion, 끝, 마감 close, 성취 consummation.
예수께서 많은 징조들을 언급한 다음에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그다음에 24장 14절인가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개정)
이게 텔로스죠.
τέλος 텔로스 telos
끝 end, 결론, 종결conclusion, 마침 close, 목표, 목적goal.
그래서 구분하죠. 쉰텔레이아는 긴 끝이고 텔로스는 딱 끝나는 끝이죠.
나는 그걸 일찍이 1986년도에 시조에다가 글을 쓰면서 말세와 세말로 구분했습니다.
쉰텔레이아는 말세고, 텔로스는 세말이다. 전쟁 지진 기근 100번 일어나도 세말은 오지 않는다.
텔로스는 오지 않는다. 왜 전쟁 지진 기근은 다 쉰텔레이아의 징조지 텔로스의 징조는 하나밖에 없다.
그게 온 세상에 전파되는 거다.
전쟁, 지진 기근 일어난다고 우리가 하늘 갈 때가 가까워졌다고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말할 때가 아니고, 순텔레아의 징조는 다 우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징조다.
재림의 징조는 하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세말의 징조인 천국 복음을 전하는 거다.
재림 성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세를 달리할 수 있죠.
제가 재림 준비하기 후에 이곳저곳 환란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는 분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의 징조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거예요.
말세의 징조를 끝내려면 세말의 징조를 이루어야 하거든요.
산속에 들어가서 30년이 아니라 300년을 살아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재림 준비가 안 된 거죠.
재림 준비는 복음을 전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섬기는 두 교회 기도회 제목을 우리 직원에서 결의해가지고 그 기도회의 총 주제를 “선교가 재림 준비이다.” 이렇게 제목을 바꿨어요.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시는 우리 김종석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몽골 선교사인 조앤 팀 선교사님을 모셔서 지지난 주말에 정말 뜨거운 집회를 했어요.
이게 다 이런 성경 이해의 연장선인 거죠. 이런 기별들을 우리 백성들에게 이제 깨우치고 또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제 성구 사전과 성경 사전을 동원해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를 새롭게 해주는 것은 대단히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최창현 목사님 창세기 28장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여러분 그거 역본으로 한번 비교해 보세요. 우선 사닥다리부터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 술람 sullam 이라는 단어는 많은 영어 성경에서 사닥다리로 번역되지 않아요.
ladder로 번역되지 않아요. 아주 다양하게 번역돼 이게 정말 사닥다리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런 것들은 사실은 설교에 사용하기보다는 논문을 쓸 때 우리가 확인해야 할 내용들이죠.
어떤 굉장한 사실들을 성도들의 신앙과 믿음을 확인 작은 차이로 그들의 성경 이해를 도와주기보다는 때로는 이렇게 어떻게 좀 혼돈스럽게 할 때는 정보를 제한할 필요는 있죠.
저의 학위 논문 중에 박사학위 논문의 한 부분에서 이 술람 sullam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한참 분석합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에서 그 회개라고 하는 단어를 회개라고 번역하지 않은 다른 경우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일관되게 모든 역본들이 베개라고 번역했다면 또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거죠.
그리고 역자들의 의미 예를 들어서 우리가 희망이란 단어는 개역한글에 구약에 한 번 신학에 한 번밖에 안 나와요.
근데 개역개정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여러분 왜 희망이란 단어를 안 쓰고 소망이란 영어를 선택했는지 우리는 어차피 번역 성경을 보니까 때로는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면서 그런 것에 대한 의미까지도 찾아서 짚어서 강조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회개라는 의미를 회개라고 표현하지 않고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이 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되어진다면 그걸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근데 그것이 정치적 사상을 진행하는데 오히려 좀 무의미가 된다면 정부의 제안도 우리가 선택할 필요가 있겠죠.
여기 이제 이 부분도 우리 남 목사님이 지금 전개해 준 겁니다.
성구 사전 사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요. 그 원어 사전을 우리가 원어 실력을 활용하라.
지금 우리가 이제 알파벳 히브리 알파벳 알고 헬라 알파벳만 알아도 우리가 그 원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경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걸 다 해결하는 방식이 역본 비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금만 부지런하면 굉장히 의미들이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에 성경 백과 사전들을 활용하라 이 하나하나를 다 설명드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들이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하겠죠.
이 모든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예수님께서 해석할 때 딱 지켰던 두 가지 원리가 있죠.
예수의 성경 해석 원리
Gegraptai: It is writhen, "기록되었으되 "
Plerothe: It is fulfilled, “이루려 하심이라”
끊임없이 그분이 말씀하시면서 첫째 개그랍 타이, 두 번째 플레이로데이 끊임없이 개그랍 타이 플레이로데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실 때 이런 개그랍 타이 기록되었으되 이건 뭡니까?
주님이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실 때는 다 재해석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들이 복음서 기자들이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서 플레이로데이라고 씁니다.
역시 재해석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예수께서 구약을 인용해서 당신의 소위 메시아성을 증명하시고 복음서 기자들이 플레이로데이 하면서 구약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증명해줬던 것과 같은 공식을 우리도 따라해야 하는 것이죠.
그 세 가지를 딱 압축한 3대 해석 원칙을 요 세 가지로 말하죠.
성경을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지 않고 고전 문학으로 해석하고 그렇죠 하나의 종교적 문헌으로 해석하고 마치 셰익스피어 문집 보듯이 해석하고 이렇게 하죠.
그런데 성경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전제하고 이 본문을 해석하는 세 가지 해석 원칙이 있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3대 해석 원칙
(1) 문법적 해석원칙
(2) 역사적 해석원칙
(3) 신학적 해석원칙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문법적 해석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뭐예요? textual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다음에 거기서 Inter textual 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다음에 역사적 해석 원칙이 뭔가 그게 컨텍스트를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단어 연구하셔야 합니다. 문맥 연구하셔야 합니다.
이게 노래인지 역사적 문헌인지 문단 나누기가 많이 잘 돼 있으니까 이제는 그런 걸 알아차리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게 문학 연구라고 그럽니다.
문학연구(literary study)
단어 연구 지금 번역어가 맞는지 안 맞는지 그 비슷한 단어는 뭔지
제가 저하고 출애굽기 연구하신 분들 끊임없이 제가 이야기하죠.
성소, 성전, 장막, 회막, 성막이 다 같은 게 아니거든요.
물체는 하나인데 단어가 다르거든요. 법궤, 증거궤, 언약궤 물건은 같은데 표현이 다르거든요.
이게 표현이 다를 때는 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출애굽기 공부하면서 또 강조했던 한 예로 성경에서 모세와 아론을 하고 기록됐을 때 하고 아론과 모세 이렇게 기록됐을 때가 다르다고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언제나 출애굽 텍스트에서 나오고, 아론과 모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족보 기록할 때만 아론과 후손이에요.
당연합니다. 한 집안의 족보 기록할 때는 아론이 형이니까 아론 먼저 쓴 거예요.
성경은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하게 표현도 달리해놨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총회에서도 우리 교단에서도 더 이상 성서 영감을 사상 영감으로 표현 안 해요.
사상 영감이 틀려서가 아니고 사상 영감은 내용만 맞으면 영감이다, 영감은 내용만 맞다 이렇게 제안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상 영감이지만은 표현도 연관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문학적 표현, 단어 표현의 의미마저도 함께 주목하고 찾아내야 성경의 충만한 의미를 다 찾아낼 수 있다고 하는 차원에서 영감을 사상 영감이라는 용어로 제한하여 사용하는 것을 제한된 의미를 전달하는 사상 영감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안 쓰죠.
단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문맥 연구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동그라미 하나 있으면 그것마저도 주목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단어가 사용된 능력의 문맥에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되고 먼 문맥과 가까운 문맥에서 찾아야 합니다.
똑같은 하늘이라는 단어를 성경 전권에서 성경 사전을 가지고 찾는 것은 멈추고, 똑같은 하늘이라는 단어가 창세기 5장 안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창세기 제 1부인 1장과 11장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창세기 안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모세5경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구약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신약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확대해가면서 한 단어의 의미를 가깝고 먼 문맥에서 파악해 봐야 합니다.
이런 걸 시간이 없어 못하더라도 살펴봐야 된다고 하는 인식을 알아차리고 성경 본문을 읽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 다음 문장을 읽을 때 제가 끊임없이 성경 주석하면서 우리 클래스에서 강조합니다.
제가 이게 갑자기 말씀드리다 보니까 생각나는데 그 끝에 말씀드려야 되겠네요.
문학 요구입니다. 성경 읽으면서 화자와 저자를 네레이트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 1절
창세기 3장 6절에 여러분하고 이제 워크샵 할 시간이 없네요.
3장 1절에 들은 즉 뱀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이건 해설이에요.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그 다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건 스피치입니다.
화자입니다. 우리가 문학 비평에서 셰익스피어 문집을 비평할 때도 화자와 저자는 내레이터를 확실하게 구분하죠.
성경을 해석할 때도 문학, 성경에 해설과 화자를 확실하게 구분해가지고 그걸 분석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서 표현이 댓구법으로 이루어졌는지 반응이 대구인지 종합대구인지 교차댓구인지 파악해야 사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분명해지죠.
이런 모든 걸 위해서 우리가 전공으로서 신학을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 다 활용하시면 의미가 굉장히 깊으십니다.
그 다음에 표현 잘 이해하셔야 돼요.
성경에도 굉장히 표현 방식이 있어요. 강조법이 있고 예를 들어 한 단어로 두 단어로 하나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한 단어로 번역되는데 원어가 2개인 경우가 있어요.
아까 텔로 똑같이 끝인데 하나는 텔로스고 하나는 순텔레아잖아요.
이럴 때도 그 의미를 이렇게 추적해 가야 합니다. 이러면 일반인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선한 기별들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가 이렇게 사는 날 동안 계속 새로운 것을 이렇게 파내서 전할 수 있어요.
예컨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이런 게 문자적 표현이 아니고 강조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해요. 이거 잘못 해석해가지고요. 우리 60년대 어떤 분이 우리 형제 중에 자기 오른손 범죄하고 왼손 왼눈 범죄하고 이거 양심에 갇혀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 끊은 형제가 있었어요.
진짜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한 주도 안 돼가지고 우리 다 눈 빠지고 사지 다 잘라지고 남아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 성경 표현법을 이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니까 그런 거 다 이해하셔야 합니다.
문맥의 종류도 파악하셔야 되고요. 역사적 해석 원칙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성문 할 때 뭐가 나타나는지 이거 알아야 됩니다.
성경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과 장소를 이해하는 것이 실질적인 지식이 된다.
그 다음에 모세가 쓴 것하고 베드로, 바울이 쓴 게 뭐가 다른지 그걸 구분해서 보는 눈이 설교자들에게 필요하죠.
마지막으로 신학적 해석 원칙 인트로텍트롤입니다.
성경과 성경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이 서로 교환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적용해서 종합적으로 파악해내는 접근이 우리에게 필요하죠.
이 모든 걸 방법론을 알아도 결국 문제는 시간의 문제네요.
맞습니다. 여기서 제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설교 주제를 설교 본문을 미리 택하면 그렇죠 이번 주에 할 걸 이번 주에 택해서 살펴보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좋은 게 그래서 안식일 예배 같은 대예배 설교의 시리즈는 소위 절기 일련의 스케줄에 따라 우리가 어떤 그때 그때 해당되는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 외에 제일 좋은 거는 책 설교인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요.
오늘날 개신교회 설교가들이 강해 혹은 주석 설교를 시리즈로 내놓고 있죠.
그래서 우리 교인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 할 때 일반 개신교 목회자들의 시리즈 강해 주석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 시도를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침례 교회의 이동원 목사 지구촌 교회 유튜브에 올라와 있죠.
그다음에 CBS에서 하는 성서학당의 김기석 목사 거의 모든 주석 설교가 올라와 있습니다.
장로 교회죠 그 다음에 감리 교회 주석 설교 올라와 있죠?
정태근 목사 여러분 그런 그런 주석 설교 시리즈들이 유튜브에 지금 착뜩 올라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이 우리들에게 도전을 던지죠.
가서 우리들이 하는 어떤 제목설교 같은 걸 듣고 같은 주제를 치면 수많은 일반 개신교 목회자들의 주석 강의 설교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금세 비교할 수 있는 거죠.
놀랍게도요.
우리가 주석 설교를 준비하고 증언의 말씀과 비교해서 마지막에 제일 마지막에 증언의 말씀이 주는 빛으로 우리가 비추어서 함께 살펴보게 되면 그것이 주는 충만함은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저와 함께 지금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 주석강해 클래스에 동참하고 있는 감리교회 목사님이 어제 보내준 드립니다.
김 박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출애굽기 강의를 듣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아쉬움 속에 끝이 났는데 제가 마지막 시간을 스킵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끝 마무리가 좋아야 하는데 1%의 마무리 수거가 100%의 효과를 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총정리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재림성도들과 목사들이 부럽습니다.
늘 김 박사님의 지혜의 말씀을 가까이에서 들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감리교 출신 화잇여사의 말씀에 근거해서요.
화잇이 감리교 출신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열왕기상10장 8절에 시바 여왕이 이런 고백을 하잖아요.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요. 복되도다 당신의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자기 나라에서 솔로몬의 명성을 들을 때마다 긴가 민가 설마 설마 하고 믿지 않던 여왕이 직접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 내가 그동안 들은 것은 실제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토설했지요. 제가 시바 여왕의 심정 그런 기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들어올 수 있어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끝내 떨쳐버릴 수 없는 아쉬움
하여튼 감사 또 감사 또 감사할 뿐입니다.
김 박사님 감사합니다.
감리교 목사가 자기 동료들 다 데리고 이 강의 듣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화잇이 감리교 출신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말하면서 여러분 화잇의 이건 그냥 우리들의 신앙을 돈독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고요.
한 사람을 성서학자로부터 한 사람의 성서학자로서 제가 정말 지성을 동원해서 고백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제가 지금 강의하는 이 주석 성경을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 텍스트와 대화하면서 자기의 관심사와 자기의 어떤 교리적 그걸 가지고 성경을 이용해서 짜맞춰가지고 어떤 교리를 만들고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사람들에게 조금 격하게 표현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그냥 딥다 이야기하는 그런 분이 아니고 성경 텍스트의 세계를 충만하게 우리에게 시리즈로 풀어준 게 부조와 선지자, 선지자 왕, 시대의 소망, 실무교훈, 산상보훈, 사도행전 그거는 정말 놀라워요.
저는 이것을 우리 동역자들하고 우리 재림교회 성도들과 우리 우리 후배 목사님들하고 이렇게 나누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이것을 그야말로 불교 스님 종파를 달리하고 교파를 달리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이걸 나누고 싶어요.
너희들은 이게 틀렸고 우리는 이게 옳아서 우리 교회 오라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이런 충만한 영감적 성경 이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감리교 목사님 반응처럼 정말 복되도다 재림교회요라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와의 성경 연구에 조인하고 싶고 그들을 우리로 이렇게 여러분도 우리 재림교회에 이게 옳은 걸 가르치는 게 있어 이런 접근이 아니고
“우리 재림교회에 이런 말씀이 있거든!”이라고 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 그대로 전문가 제가 그래서 자꾸 이게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과의 방에서도 거기는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고 불교 신자도가 와 있고 장로교 신자도가 와 있고 무신론자도 와 있거든요.
우리 아랫집에 전세 들어와 있던 분이 지금 그 클래스에 계속 들어오는데 그분들은 나를 목사라고 안 불러요.
교수님이라 그러고 박사님이라 그러거든요. 전문가로서 만나는데 우리 교우님들이 자꾸 목사님 목사님 하니까 이게 안식교 성경 공부였구나 이렇게 어색해져요.
그분들이 저는 그 한 분을 배려해서라도 우리 교단에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전문적인 성경 클래스가 있다 하는 안내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그 장을 제공하는 것을 제가 은퇴 이후에 제가 해야 하는 소위 제 사역의 방향이요.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들을 자꾸 이제 접촉해 보려고 이제 그러는 거죠.
그런 장을 마련하고 그래서 우리 목회자 성경 클래스에 제가 처음부터 이걸 수요일에 하지 말고 목요일에 했어야 되는데 싶어요.
수요일에 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일반 교회 목회자들이 거기 못 와요.
수요일날 예배가 있으니까 근데 어차피 시작했기 때문에 수요일로 가긴 가는데 여하튼 이게 이게 개신교 목회자가 이게 한 강좌를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접근도 필요해요.
소위 변증적 전도법, 변증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근데 그렇게만 머물지 말고 충만한 말씀 사역으로 우리 목사님들의 그 사역에 영감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읽는 설교 봉사가 강단마다 새롭다.
저는 그런 공동체가 우리들의 사역으로 우리들의 브랜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주 뜨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의 요청에 응하면서 또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