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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이 단편문은 가끔 보아 오지만 전체를 다 보지 못했지요.
유독 기독교로부터 야단을 맞더군요.
아래글은 성경을 신봉하는 분으로부터의 신나이에 대한 나름 모순을 지적하는 글이군요.
이분 글을 읽고 오라~ 한번 읽어바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영성에 대한 글은 다 각자의 믿음이니 한번 살펴보고 책사서 읽어보세요^^
‘신과 나눈 이야기’ 비판
믿음의 부재와 공허감 사이에 끼어든 영적 사기상품
이 책에 나오는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과연 이 시대에 닐 도널드 월시라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인류에게 전달하려고 하신 것인지를 식별해야만 했습니다. 이 책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면 적어도 이전에 인간필자들을 통해 영감으로 주신 [성경]과 조화로워야 하는 것이며, 설령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영적진리의 기준으로 이 책을 바라보았으며, 그 외에도 본문 내용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는 점을 발췌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는 어떤 책인가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 with God)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114주 연속 베스트 셀러에 올랐으며, 미국에서 250만 부, 일본에서도 5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까지 20여 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그를 연구하는 스터디 그룹이 전세계에 270여 개나 되며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닐 도날드 월쉬(Neale Donald Walsh)이다. 이 책을 집필하게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저자가 직접 밝히고 있다.
“지난날 지역 라디오방송 진행자로 있으면서 다섯 번의 이혼으로 매달 아홉 명의 자녀에게 양육비를 보조해줘야 했다. 그러나 건강과 직장을 잃고 점점 인생이 망가져 가던 49세의 어느 날, 신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쓰다가 뜻하지 않은 신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이 책에는 내가 지금껏 생각하고 알고 있던 것들을 훨씬 뛰어넘는 개념과 사실들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1992년부터 3년동안 신에게 질문하고 신이 말한 것을 받아적기만 했다고 한 대화내용은 [신과 나눈 이야기], [신과 나누는 우정], [신과 나눈 교감]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고,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세상의 영적 치유를 도울 목적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 재단]을 설립했으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계시록]을 토대로 한 강연과 워크샵을 진행하며 명상에도 전념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
저자는 평탄치 못한 인생의 고통에서 신에게 항의하는 중에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점이다. 삶의 어려움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신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쓰는 중에 놀랍게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았다는 점이다. 현재 수많은 독자들의 최고의 찬사와 함께 매니아층이 형성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책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게시하고 연구하는 커뮤니티가 활발히 형성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 게시하는 동기를 설명하는 인터넷의 한 게시판의 글을 인용한다.
“이 책이 제목에는 "신과 나눈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사기"가 아니냐 혼자 착각해서 쓴 것 아니냐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어찌했든 지금까지 내가 심취해온 동양 사상등에 상당히 가까우면서 더욱 더 진보적이고 파격적이며 내용 자체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내용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기존 종교 교리보다 100배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상관이랴! 예수의 말이든 부처의 말이든 아니면 한 미치광이의 말이든 누가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본인 자신에게 와 닿으며 인정할 수 있는 훌륭한 말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위에 인용한 글의 내용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진정성 여부는 상관없다는 것, 그리고 내용자체가 훌륭하다,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또한 동양사상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대다수의 독차층에게 호평을 받는 이유는 유사한 상징적 의미의 표현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가지 매력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상당부분 영적인 내용으로 보이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가끔씩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분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싶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제목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보여주는 것처럼 ‘신과의 대화’이다. 다음은 본문 내용중의 일부이다.
“신에게 더없이 기쁜 순간은 너희가 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지금 존재하는 방식대로 세상을 창조한 건 너희다...나는 너희가 원하는 걸 원한다.”
“너희가 진실로 굶주림의 종식을 원하는 바로 그 날, 더 이상 굶주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사건이나 모험은 참된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기 위해 너희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타인의 경험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효과를 얻고 있으며 독자들의 서평이 이러한 현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성경도 읽어보고 명상도 해보았지만 신에 대해 알 수가 없었습니다....이책을 읽고 나면 먼저는 신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신을 믿고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읽고나면 신을 부정할수 없게되는 완벽하다고 할정도의 책이라고 봅니다....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오는 책입니다.
“신의 말씀의 폭포수를 한번 꼭 보시고 절대사랑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을 할 때는 생각하지 말고 행동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책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모든 지구인들이 꼭 다 보길 권하고 싶습니다...무인도에 간다면 이 책은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렇다. 이 책에 나오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불교의 부처님도, 혹은 다른 어떤 특정 종교에서 숭배하는 신도 아니다.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성경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을 창조주이자 단지 관찰자로만 존재하는 신이며, 인간에게 모든 창조력과 선택권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점이 읽는 이의 종교 유무나 종류에 관계없이, 어떤 선입견없이 인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나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주장대로 신의 말을 받아적기만 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영감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모세에게 주어진 십계명’에 대해서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과거의 인간필자들을 통해 이천년 넘게 영감으로 기록하게 한 [성경]과 조화로워야 하는 것이며, 설령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영적진리의 기준으로 이 책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창조주이자 관찰자로서의 신, 윤회사상을 말하는 신
이 책에 나오는 신은 자신의 속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성경 내용과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닮은꼴로 너희를 창조했다.”
“신이 창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사랑은 궁극의 실체다. 그것만이 유일하고 그것만이 전부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을 지은 후에 방관 혹은 ‘관찰자’로만 존재한다고 한다.
“만일 신이 너희 삶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존재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나는 너희가 뭘하든 마음쓰지 않는다.”
그는 창조주로 벌을 내리는 신이 아니다. 그의 신은 창조주이지만 관찰자일 뿐이다. 그러면서 오직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점도 성경과 유사한 점이다.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들도 주려한다. ‘가장 고귀한 생각’이란 예외없이 기쁨이 담겨 있는 생각이며, ‘가장 명확한 말’이란 진리를 담고 있는 밀이며, ‘가장 강렬한 느낌’이란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 느낌이다.
기쁨과 진리와 사랑.
이 셋은 서로 뒤바뀔 수 있으며, 하나는 언제나 다른 것들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 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이 지침들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가 내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인지 결정하고 나면,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닌가 뿐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삶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체험하고 영혼의 언어인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벌하는 신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살아가고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은 그 인간을 벌하지 않으며 인간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으로서 순회할 뿐이라고 한다. 관찰자, 윤회사상을 말하는 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성경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개인의 몫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신
이 책 전반부에는 신이 자신의 상태를 ‘성삼위일체’라고 표현하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는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yment)인 체험이다. 왜냐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은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embody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is-ness)이다.”
도데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읽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매력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성서의 필자이신 자상하신 하나님이 과연 이런 식의 설명을 하시는 분이신지에 관한 점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없는 용어이며, 주류 기독교계에서 정의한 하나의 ‘개념어’이다. 하나님께서 교계에서 정리한 이러한 ‘개념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더구나 이 책에서 서술된 내용은 주류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개념과도 무척이나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것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학적인 수준과 모순
이 책에는 편안히 읽기에는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과학적 용어를 임의로 사용한 설명들이 나온다. 1권의 초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순수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가 맨 먼저 물질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체계와 그 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진정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위에 나온 인간의 과학기술과 이론을 이야기할 리 만무하다. 그 이유는 인류의 과학이론은 항상 진행형으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며 진리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뉴우턴의 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무너졌으며, 상대성이론 역시 인간의 지능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하나의 잣대이며 최근에는 흔들리고 있는 한 이론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상대성체계를 만들었다’는 표현은 이 책 저자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대성이론을, 그것도 기초적인 이해도 없이 마치 철학적인 개념으로 쓴 것 같아보여 씁쓸한 마음까지 든다. 다른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다.
“너희 과학자들 중 일부는 물질과 에테르를 본다....”
‘에테르’라는 것은 전자기 마당의 매체로 가상된 매질(媒質)이며, 오래전, 빛의 속성을 파동이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가상적 매질개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마이컬슨의 실험으로 그 모순이 발견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됨으로써 더 이상 거론할 가치도 없이 폐지된 이론이다. 이것 역시 저자의 과학지식의 수준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예에 불과한 것이다.
이외에도 군데군데 과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한 부분들에서 저자의 지식수준은 그대로 드러난다. ‘빛은 질량을 가진 입자’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기초한 과학상식 정도만 알았어도 이러한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소위 자연재해라는 것은 원소(element)들이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생명은 파동이고 진동이며, 존재하는 전체의 심장부에서 울려나오는 고동이다.”
“...우주의 대칭성, 그 도안의 완벽함을 알게된다면, 너희의 현실로는 우주의 진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급기야 저자는 최근의 트랜드인 SF적인 외계문명의 신비로 들어가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다른 행성의 문명들 대다수가 기술에서 너희보다 휠씬 앞서 있다.”
“...너희 행성의 집단의식 수준은 미개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지금의 너희 기술은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너희 능력을 능가하는 지점으로 육박하고 있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이 책은 무신론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에 호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는데,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이 책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알게되었으며 이 책에서 얻을 수 있고,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즉, 무신론자에게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신론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 - 바로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신론자들이 이 책을 읽게됨으로 인해 성경의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성경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처음배운 지식이 선생노릇한다’는 말이 있다. 이 책에서 신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얼핏 성경과 비슷한 척 하면서 성경의 중요한 진리 부분을 가리고, 부정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그리스도인은 이 책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반 성경이자, 동양철학이 가미된 뉴에이지 사상이다. 하나님을 사칭하여 거짓예언을 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적절하고 화려한 문체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며, 명상, 범신론적 풍조를 퍼뜨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가능성조차도 가로막고 있다.
결 론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확신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동양철학을 적절히 부가시켜 혹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이야기책이다. 뉴에이지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에서 유행하는 라헬리언무브먼트나 사이언톨로지 같은 류와 유사하다.
모든 범신론적인 사상이나, 도나 기를 중시하는 부류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신과 나눈 이야기’ 시리즈는 범신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특이하다. 그러나 자신이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점에서 심각한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 저자의 진정성은 무엇일까?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초월, 명상중에 흔히 발생하는 지식에너지의 정렬이나 극대화의 작용으로 인해 무아상태의 집필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기획서적인지 분명치 않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드리고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믿음의 세계에서 방황한다고 한들, 한낮 인간의 뇌신경세포에 들어있는 정보를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한 이런 책을 읽고 영혼의 갈증이 해소될 것 같은가? 엄청난 부수의 책을 출판하면서 발생시킨 환경파괴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으로 한 순간이라도 방황하게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면 아찔한 마음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현대인의 믿음의 부재와 공허감 사이에 끼어든 영적 사기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주어졌다.
그 진리와 유사한 다른 가짜들이 출현하는 이유는 바로 그 ‘하나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담긴 성경을 해석하고 자신들의 생각들을 집어넣어 또 다른 책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인간의 지식을 넣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이 인간의 지식 때문이다. 그 인간의 지식에는 오류가 있다. 자칭 재림예수가 수천명에 이르는 난맥상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다.
저자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모든 인생이 제각각인 것은 창조주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자유의지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말한다.
진정으로 신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향해 가고 싶다면 그분께서 직접 남기신 성경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우리는 그 과정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흡으로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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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비판 및 제언을 수용합니다. 황명석 / 011-598-5060 / calamus1@hanmail.net
옹호의 글도 퍼옵니다^^
신과나눈이야기는 누구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단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신과나눈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가 중요하고
무엇을 얻고자 이책을 읽고있는야에 따라 결과도 달리온다고 봅니다.
님의 비판은 성경을 100%로 신뢰하고자 한 중심으로한 전제하에
이책을 읽었거나 살펴본사례입니다.
저도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작되었는지 여러각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실제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성경 하나만을 중심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우주 또한 여호와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나
우리가 신성함을 입은 우리 자신을 통해서 전해져오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은 역대 종교지도자들에의해 여러번 수정 재편되어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글들은 로마신화하고 너무 흡사합니다.
전에 신화에 나오던 것들을 모아서 만든 합작품처럼 보이며
아비뇽유수때 더욱 그 모습과 본질은 변해버리게 되죠.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우리도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영은 영으로 통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하나님과 교통하길 원합니다.
지나간 죽은 하나님은 소용없습니다.
역대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기위해 인류는 죽은 하나님을 더 내세웠습니다.
인류는 살아있고 전진합니다.
이러한 인류와 누가 함께합니까?
하나님이 같이 가고 있다고 생각 하지 않으십니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에너지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구약에서 신약처럼 말이죠.
구약이 필요한 신약은 때가되었기때문이어서라기보다.
구약가지고 더이상 안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죠.
구약으로 당시 인류의 영적 양식으로 채울수 없는 시기에서의
영적 갈망에서 초래된것이 예수의 출현이었던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전통입니까? 보수입니까?
조직화된 관념화된 종교입니까?
성경속에 갇힌 하나님을 찾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님은 그것을 전제로 할 뿐입니다.
지금 인류는
종교를 초월한 회칠한 무덤인 성경을 초월한 각 개개인 자신의 내면안에 있는
지금의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저도 신나이 를 쭉 보고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맞다 틀리다가 아닙니다. 더 넓은 시야 그리고 생각의 협소함을 벗어 나게 한 내용들 입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바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동서양 할것없이 좋은글들은 다 통하나 봅니다.
신나이가 이론서 라면 본 카페 내용들은 그 법칙을 실제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응용하는 실용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오르곤에너지 바로 자연에 무한히 존재하는 그 에너지를 직접 가져다 쓰는것 입니다.
그 에너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흐르게 함으로 자신의 시간표를 재 창조 합니다.
인과 법칙을 벗어나 자신의 맘대로 시간표를 만듭니다.
"이런거 저런거 해주세요" 라는 말이 " 다음에는 내가 뭘 할까?" 라는 거로 바뀌는거죠.
본 카페는 서로간의 사랑 이라는 딱 하나의 공통 분모로 모두 모였습니다.
종교가 무엇이던 돈이 있던 없던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값없이 건강 하자! 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시간표를 만드는 일까지 한번 쭉 살펴 보시고 선택 하시는
그런 부폐 같은 카페 입니다.
선택은 자유 입니다.
제 삶은 어쨌든...암튼...ㅎㅎㅎ...신나이 이후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유익한 내용이겠지요? ㅎ
먹어 봐야 맛을 알지요
보는 자와 들은 자의 차이이고
산자와 죽은자의 차이 입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먹어서 소화가 잘되야 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