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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은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jhy
영남 동도회첩 (甲戌年 再會)
이 동도회는 1634년(인조 12 갑술) 여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던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가 무사히 귀국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장예원에서 회합을 가졌다. 회원은 35인 이였다. 영남 좌도 인물 31명과 우도 인물 4명이다
서문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지었다.
同道會帖序
吾嶺人仕于京者。爲同道會。古事也。於今宦遊。落落無幾。視古殆十之一。而?掌從事。簪?甚罕。玆會之不講也久矣。談者介介焉。今年夏。奏請副使金公孝仲 榮祖 準事旋?。?土所同慶。而相愛之私相慶亦情也。同道如干人。相與約會于掌苑署。執爵而賀金公。時?賓之十一日也。外官之來奉賀箋也。上舍自泮至。坐用齒。循鄕黨也。慰遠行而?阻?。修古事而存厚誼。甚盛擧也。在坐者咸曰此會不可不識。屬余掌其事。遂鳩造此帖。且記其顚末云。
1. 前 參奉 김효선(金孝先) 자는 선원(善源) 戊辰 영천(榮川)
김효선(金孝先) 1568(선조 1 무진)
본관은 청도(靑道). 자는 선원(善源). 호는 반학헌(伴鶴軒)
조부는 대사성 병산(??山) 김난상(金鸞祥). 아버지는 호변(虎變)이다.
참봉을 지냈다.
2. 軍資監 正 정언굉(鄭彦宏) 자는 여확(汝廓) 己巳 함창(咸昌)
정언굉(鄭彦宏)1569년(선조 2)∼1640년(인조 1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여확(汝廓),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승조(承祖)이며, 어머니는 함녕김씨(咸寧金氏)로 염(恬)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고, 1609년(광해군 1) 학록(學錄)겸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 이듬해 학정(學正)·박사에 승진되었다.
다음해 승문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에 이어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1613년 호조정랑에 체직된 뒤 곧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에 전직되었다.
1614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혼조(昏朝)의 기미가 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고성군수에 특채되어 그간 혼조로 인하여 퇴폐되었던 군정(郡政)을 일신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이 되어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문경의 조령(鳥嶺)에 도착하였으나,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군자감정 겸 선공감정(繕工監正)에 배수하였다.
이듬해 청송부사가 되었다가 1631년 예빈시정(禮賓寺正), 이듬해 승문원판교에 각각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맹세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서계문집》 2권이 있다.
3. 司導寺 正 황상겸(黃尙謙) 자는 자익(子益) 癸酉 풍기(豊基)
황상겸(黃尙謙) 1573(선조 6)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자익(子益). 호는 매창(梅?)
조부는 금계 준량(黃俊良). 아버지는 이(怡)
광해군(光海君) 2년(1610) 생원시에 합격하고, 광해군(光海君) 4년(1612)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11년 평안도사. 인조 9년 군자감 정. 사옹원 정. 인조 12년 사도시 정(司導寺 正)
4. 長興庫 奉事 이의준(李義遵) 자는 의중(宜仲) 甲戌 안동(安東)
이의준(李義遵) 1574(선조 7 갑술)~1635(인조 13)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의중(宜仲). 호는 한애(寒厓)
조부는 한(漢). 득춘(得春)의 장남. 백부 학천(鶴川) 봉춘(逢春)의 문인.
金得硏?李時明 등과 교유.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생원시 합격.
장흥고 봉사. 종묘서 직장 역임.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종묘의 신위를 강화도로 모셔 보호하였다. 권기 · 류우잠(柳友潛)과 함께 영가지를 편찬하였다
5. 부호군 김영조(金榮祖) 자는 孝中 丁丑 영천(榮川)
김영조(金榮祖)1577년(선조 10)∼1648년(인조 2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산음현감 유연당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문인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지평·부수찬·장령·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내용이 경망하다 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하사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
6. 전 군수 박경범(朴景范) 자는 子仰 丁丑 영천(榮川)
박경범(朴景范) 1577(선조 10 정축)
본관 고령(高靈). 자는 자앙(子仰)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경기좌도수운판관 박려(朴?)이고 형은 고송(孤松) 박성범(朴成范)
7. 전 좌랑 조희인(曺希仁) 자는 여선(汝善) 戊寅 상주(尙州)
조희인(曺希仁) 1578(선조 11 무인)~1660(현종 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선(汝善). 호는 묵계(?溪)
조부는 언홍(彦弘). 아버지는 몽신(夢臣). 외조부는 신주(申澍)
형은 매호(梅湖) 우인(友仁). 우복 정경세 문인
광해군(光海君) 8년(1616)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仁祖) 5년(1627)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유. 인조 11년 병조좌랑. 인조 15년 성균사예. 배천군수(白川郡守)
인조 21년 형조정랑. 인조 22년 합천군수.
8. 삼척부사 권준(權濬) 자는 도보(道甫) 戊寅 단성(丹城)
권준(權濬)1578년(선조 11)∼1642(인조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보(道甫), 호는 상암(霜?).
아버지는 판관 세인(世仁)이며. 외조부는 이공헌(李公憲)이녀 처부는 조응도(趙凝道)
한강 정구 문인.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광해군(光海君) 5년(1613) 문과에 급제한 뒤 전적이 되었다. 그때 정치가 문란하여 황덕부(黃德符)·이위경(李偉卿) 등이 작당하여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623년 학정(學正)으로서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뒤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인조 9년 공조정랑. 성균사예 그뒤 파주목사 삼척·광주· 등지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잘 다스려 치적이 뛰어나 안팎에서 표창하였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는 동(銅)에다 업적을 새겨 덕을 칭송하였다.
9. 參禮察訪 민희안(閔希顔) 자는 경우(景愚) 戊寅 자는 회중(晦仲)
민희안(閔希顔) 1578(선조 11 무인)
본관은 여흥(여흥. 榮川). 자는 경우(景愚). 호는 지천(砥川)
아버지는 민세겸(閔世謙).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문인
생원으로 인조(仁祖) 7년(1629) 문과에 급제
삼예도찰방. 인조 18년 공조좌랑. 인조 19년 고원군수(高原郡守) 인조 23년 성균관직강. 해미현감(海美縣監)
10. 宜寧縣監 김경조(金慶祖) 자는 효길(孝吉) 계미 영천(榮川)
김경조(金慶祖)1583(선조 16, 계미)∼1645(인조 23).
본관은 풍산(?山). 자는 효길(孝吉). 호는 심곡(深谷).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의 넷째 아들. 1609년 생원시 합격.
1629년 內侍敎官에 제수되고 主簿를 거쳐 1633년 의령현감에 부임하여 善政을 베풀었다. 1640년 尼山현감이 되었다
11. 軍器監 僉正 여작(呂焯) 자는 회중(晦仲) 丙戌 성산(星山)
여작(呂?) 1586년(선조19) 성주 수촌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회중(晦仲). 호 호계(虎溪).
생원(生員) 윤서(允恕)의 아들. 원정(圓亭) 희림(希臨)의 증손.
1620년에 여헌 장현광 문하에 입문.
인조(仁祖) 2년 (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인조3년 省峴察訪兼校書博士 가되고. 인조6년 성균관전적. 형조정랑. 충청도사. 인조13년 하동현감. 교서관 교리. 봉례. 성균관 사예를 지냈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석촌과 같이 스승 여헌선생의 의병진에 참여 하였다.
12. 前 正郞 홍익한(洪翼漢) 자는 백승(伯升) 丙戌 영천(榮川)
홍익한(洪翼漢)1586년(선조 19)∼1637년(인조 15).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찬성 숙(淑)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며, 백부인 교위(校尉)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전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淸軍)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으며, 그곳에 붙들려 갔어도 청장 용골대(龍骨大)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이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3. 전 참봉 성여춘(成汝椿) 자는 馨叔 癸未 상주(尙州)
성여춘(成汝?) 1583(선조 16)~1662(현종 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형숙(馨叔). 호는 서강(西崗)
조부는 세평(世平). 아버지는 남(?).
인조 19년 금정찰방. 군수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4. 生員 최동집(崔東集) 자는 진중(鎭仲) 丙戌 대구(大丘)
최동집(崔東?) 1586년(선조 19 병술)∼1664년(현종 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
아버지는 현령(縣令) 최계(崔誡)이다.
한강(寒岡)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어 대군사부가 되었다.
뒤에 팔공산(八公山) 농연(聾淵)가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후손은 백불암 최흥원이다
15. 工曹正郞 이지화(李之華) 자는 이실(而實) 戊子 대구(大丘)
이지화(李之華) 1588년(선조21)∼1666년(현종7)) 성주. 고령 상곡.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圃), 또는 부강거사(浮江居士). 의병장 낙포(落浦) 종문(宗文)의 아들. 외조부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수월당(水月堂) 지영(之英)의 동생.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161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3년 문과에 합격. 예문관검열, 성균전적, 병조좌랑,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을 공격하다가 해를 입어 낙향한 후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계에 나아갔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스승 여헌 장현광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주로 군향(軍餉)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후 형조좌랑, 호조정랑, 공조정랑,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역임하고 병자호란 때에는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후 파주목사(坡州牧使), 김해부사(金海府使), 창원부사(昌原府使), 병조참의, 정주목사(定州牧使)를 지낸후 1654년(효종 5) 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全城李氏世稿에 다포집(茶圃集)이 있다.
自同道會暮歸[同道會識文、姜寒沙大遂所製。墨帖今遺傅、而與此詩月日少異、未知何故。]
有美三淸洞、時維九月天。蘭亭少長會、洛社耆英筵。
濟濟靑襟士、??朱?賢。淸時同道宴、吾亦與周旋。
16.進士 전형(全滎) 자는 달보(達甫) 己酉 초계(草溪)
전형(全滎) 1609(광해원년)~1660(현종원년)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두암(斗岩)
조부는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아버지는 수족당(睡足堂)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의 문인 이며 1636년(인조14)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김세렴(金世濂)과 함께 일본을 다녀오시고 1648년(인조26) 성균진사가 되었으며 서예가로 명망이 높아 조선금석총람에도 등제되었으며 김해 김수로왕비문을 비롯한 다소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다
1855년(철종6) 영남 사림에 의해 도계서원(道溪書院) 제향되었으며 유허비가 있 斗岩文集이 있다
17. 사산감역 김염조(金念祖) 자는 효수(孝脩) 己丑 안동(安東)
김염조(金念祖)1589(선조 22, 기축)∼1652(효종 3).
본관은 풍산(?山). 자는 효수(孝脩) 호는 학음(鶴陰).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의 第7子. 수현(壽賢)에게 출계.
1635년 생원시 합격. 사산 감역 종친부 典籤 1636년 果川縣監 재직시, 관악산에서 오랑캐와 대치?항전하여 과천을 사수하였고. 1639년 定山郡守 재임시 향교를 중수하여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641년 安山郡守 재임시 흉년을 만난 군민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구휼하였다 증직: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18. 前 佐郞 김업(金業) 자는 용화(用和) 庚寅 예천(醴泉)
김업(金??) 1590(선조 23 경인)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용화(用和), 호는 만취헌(晩翠軒)
조부는 김경언(金慶言), 아버지는 김덕남(金德男)
생원으로 인조(仁祖) 5년(1627) 문과에 급제
19. 修撰 강대수(姜大遂) 자는 학안(學顔) 辛卯 합천(陜川)
강대수(姜大遂)1591(선조 24)∼1658(효종 9). 합천 흑석
본관은 진주(晋州).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사간 익문(翼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부친 당암(戇菴)공의 명으로 17세에 부지암에서 여헌 장현광 선생 문하에 입문.
1610년(광해군 2)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동계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우복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서로는 《한사집》 7권 3책이 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20. 進士 김요(金遼) 자는 재중(載仲) 壬辰 상주(尙州)
김요(金遼) 1592(선조 25 임진)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재중(載仲)
아버지는 서애 문인 집의 우연(愚淵) 김지복(金知復)
인조(仁祖) 8년(1630) 진사시 합격
21. 司宰監 直長 하진(河溍) 자는 진백(晋伯) 丁酉 진주(晋州)
하진(河?)1597년(선조 30 정유)∼1658년(효종 9).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진백(晋伯), 호는 태계(台溪).
대사간 결(潔)의 7세손으로, 공효(公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윤기(尹起)의 딸이다. 이각(李殼)의 문인이다. 어렸을 때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24년(인조 2)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에 이르렀다가 아버지의 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상을 마친 뒤 병조낭관·헌납·지평을 역임하다가 신병과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다시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 사은한 다음 김자점(金自點)의 전횡을 탄핵하고 즉시 사임, 귀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장령·사간·집의로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관후한 성품으로 직언을 잘하였다.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태계문집》 4책이 있다.
22. 成均館 學諭 한극술(韓克述) 자는 광보(光甫) 戊戌 상주(尙州)
한극술(韓克述) 1598(선조 31 무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광보(光甫), 호는 소호(蘇湖)
조부는 한효간(韓孝幹). 아버지는 한서(韓瑞). 외조부는 정종계(鄭宗繼)
우복 정경세 문인
인조(仁祖) 2년(162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仁祖) 8년(1630) 문과에 급제
인조 15년 성현찰방. 성균관 전적 인조 16년 병조좌랑. 인조 17년 수성찰방
인조 23년 호조좌랑. 24년 예조좌랑. 1649(효종 1) 홍원현감(洪原縣監).
23. 公淸都事 도신수(都愼修), 자는 영숙(永叔) 戊戌 대구(大丘)
도신수(都愼修)1598년(선조 31)∼1650년(효종 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조부는 도원결(都元結). 아버지는 도여유(都汝兪). 외조부는 이우겸(李友謙)
동생은 도신여(都愼與)
악재(樂齋) 서사원(徐思遠).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관되고, 인조 10년 삼예찰방. 18년 서흥부사등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수령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달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24. 童蒙敎官 정사무(鄭思武) 자는 희익(姬翼) 己亥 예천(醴泉)
정사무(鄭思武) 1599(선조 32)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희익(姬翼). 처부 박동선(東善)은 대사헌으로 서계
박세당의 조부이며 서계는 고모부인 공에게 배웠다
인조 13년 사근도찰방
25. 注書 이상일(李尙逸) 자는 여휴(汝休) 庚子 선산(善山)
이상일(李尙逸)1600년(선조 33)∼1674년(현종 15)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림(汝林), 호는 용암(龍巖).
현령 민선(敏善)의 아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18년(광해군 10)광해군 때 난정을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에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입시(入侍)하여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써내려가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말 한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감사를 대신하여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명을 잡았으나 그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일당의 죄를 거론하여 김자점을 귀양가게 하였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함으로써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승지·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에는 황해도감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이었던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하여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승지에 제수되었다.
26. 생원 박안복(朴安復) 자는 이득(而得) 辛丑 영천(榮川)
박안복(朴安復) 1601(선조 34)~1652(효종 3) 봉화읍 화천리 四桂堂 (사계당)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이득(而得), 호는 초당(草堂)
조부는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 아버지는 박간(朴??). 외조부는 변경응(邊慶膺)
인조(仁祖) 2年(162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同17年(1639)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성균전적(成均典籍)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郎)을 역임(歷任)하고 鄕里에 돌아와 後學培養에 힘썼다.
성품(性稟)이 효자상순(孝慈祥順)하고 붕우(朋友)를 사귐에 지극히 근신(勤愼)하였으며 등분(等等)없이 공평하여 모든 사람이 외경(畏敬)하였다 한다.
27. 生員 박정시(朴廷蓍) 자는 길부(吉孚) 辛丑 예천(醴泉)
박정시(朴廷蓍) 1601(선조 34)~1672(현종 13)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길부(吉孚)
문재공(文齊公) 충좌(忠佐) 후손. 조부는 수경(守敬) 아버지는 증 집의 영(瑛)
외조부는 이영문(李榮門). 처부는 장천복(張天福)
인조(仁祖) 11년(1633)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여
인조 19년 성균관학유로 분관되고, 20년 학록. 1648년(인조 26) 결성현감(結城縣監)
1652년(효종 3) 홍청도도사. 형조정랑. 영암군수. 숙종 6년 선공감 첨정.
숙종 7년 태안군수.
28. 進士 김욱(金頊) 자는 신백(愼伯) 壬寅 성산(星山)
김욱(金頊) 1602(선조 35)~1655(효종 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신백(愼伯) 호는 사월당(沙月堂)
조부는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아버지는 김효가(金孝可).
외조부는 박경명(朴景命). 처부는 하경수(河景受)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인조(仁祖) 2년(162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년 현릉참봉이 되고
인조(仁祖) 17년(163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박사 승정원주서.
인조 22년 병조좌랑. 동연 4월 평안도사. 인조 24년 사헌부지평. 병조좌랑.
인조 25년(1647) 공조정랑. 겸춘추. 동년 4월 흥해군수(興海郡守)가 되고
효종 1년(1649) 4월 선산부사가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자 동년 12월
대구부사가 제수되었다. 1655(효종 6년) 2월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부임하여
효종 6년 4월 17일 임소에서 졸하였다
29. 生員 여효증(呂孝曾) 자는 노이(魯而) 甲辰 성산(星山)
여효증(呂孝曾)1604년(선조37 갑진)∼1679년(숙종5) 성주 수촌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노이(魯而), 호는 서암(西巖),
아버지는 찬(燦)이며 성주(星州)에서 태어났다.
1626년 23세에 여헌 장현광 선생에게 나가서 학문을 배웠다.
1633(인조 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5(인조 13)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포부가 풍부하나 부귀와 공명(功名)의 욕심이 없었으므로 권세 있는 집에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길에 나선 지 40년이 되어도 고관(高官)에 오르지 못하였고 내직으로 전적(典籍), 직강(直講), 좌랑(佐郞), 예조(禮曹)·형조정랑(刑曹正郞), 감찰(監察), 사도시정(司導寺正), 예빈시정(禮賓寺正),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 고성현령(固城縣令), 청주판관(淸州判官), 금교찰방(金郊察訪), 임천군수(林川郡守),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냈다. 고성(固城)에는 송덕비가 세워졌고 임천(林川)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막고 유임을 원하였다. 스승 여헌 선생을 천곡서원(川谷書院)에 배향(配享)하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신도비(神道碑)의 전자(篆字)를 썼고 운암(雲菴)에서는 향사를 중건하였으니 선현을 사모함이 이와 같았고, 교원(校院)에서 강학하며 후학을 계몽하는 입법으로서 원규(院規)를 제정하였다. 여러 군의 수령을 지내면서 추호도 재물을 탐하지 않았기에 가난하고 누추함을 면치 못하였다.
선생에게 올린 제문이 있다. 문집으로 서암집 (西巖集)이 있다.
30. 進士 이유석(李惟碩) 자는 대이(大而) 甲辰 고령(高靈)
이유석(李惟碩)1604(선조 37갑진)∼1657(효종 8). 고령 관동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대이(大而),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국포(菊圃) 문룡(文龍)이며, 어머니는 진양하씨로 취해(就海)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9년(인조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었고, 그뒤 춘추관기사관, 사간원과 사헌부의 여러 언관직을 지냈다. 이어 외직인 전라도사로 나아가 군비증강에 힘썼으며, 1651년 함평현감을 거쳐 안주판관·영암군수를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영암군수로 있을 때 만기가 되고 친환(親患)으로 귀가하였다가 공무를 이탈한 죄로 유배 도중, 친상을 당하여 풀려난 뒤 곧 세상을 떠났다.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어 영암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매헌집》이 있다. 묘갈은 면우 곽종석이 찬하였다
31. 漢城參軍 서변(徐?) 자는 자경(子慶) 乙巳 대구(大丘)
서변(徐?)1605년(선조 38 을사)∼1656년(효종 7).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조부는 함(涵), 아버지는 사건(思建)
인조(仁祖) 8년(1630)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서학교수가 되었다.
그 뒤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경성통판(京城通判)에 승진하였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있으면서, 귀인(貴人) 조씨(趙氏)의 옥사에 관계되어 유배된 그녀의 아들 징(?)과 숙(潚)을 용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을 유배에서 풀 것을 주장하였다.
1656년 천안군수로 재직하던 중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왕의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실수로 신하라고 자칭하였던 사실을 빌미로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吳挺一)을 비롯하여 허적(許積)·원두표(元斗杓)·한전(韓?)·윤세교(尹世喬) 등이 모역한다고 고발하였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심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예조참의를 추증받고, 대구 옥계서원(玉溪書院)에 향사되었다.
32. 進士 도신여(都愼與) 자는 명숙(明叔) 乙巳 대구(大丘)
도신여(都愼與) 1605(선조 38 을사)~1675(숙종 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軒).
아버지는 여유(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이씨(驪興李氏)로 우겸(友謙)의 딸이다.
종숙 성유(聖兪)에게 입양되었다.
악재(樂齋) 서사원(徐思遠).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
165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창락찰방(昌樂察訪)·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예조좌랑·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예조정랑에 재임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 기년복(朞年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또 기년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33. 生員 김주(金주) 자는 여정(汝定). 丙午 예천(醴泉)
김주(金?) 1606년(선조 39)∼1681년(숙종 7). 거주지 예천.
본관은 의성.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극계(克繼). 오우당 김근의 종제이고, 여헌문인 이후의 종숙이며, 사위는 식산 이만부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학유(學諭)와 전적을 거쳐 직강(直講)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김천·무장·연안·양산과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함평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불구당집》이 있다.
* 여헌선생 문인록
김주의 자는 여정이며 호는 불구당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에 이르고, 증직이 예조참판이다. 의성 김씨로 선조 병오년(1606 선조39) 생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절륜하고 의로움이 남다르고 효성과 우애를 겸비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 23세에 인동 부지암으로 선생을 찾아와 뵙고 성리학을 배웠다. 갑술년(1634)에 생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 망와 김영조와 화포 홍익한 등과 동도회(同道會)를 만들었다.
갑오년(1654 효종5) 시폐에 대한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렸고, 청나라에서 명을 치기위해 군사를 보내라고 위협하자 조정에서 감히 불가함을 말하지 않았으나 공이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치적을 올리니 백성들이 거사비를 금석에 새겼다. 참판 귀와 김굉이 지은 선생의 유사(遺事)에
이르기를 “ 여헌선생 문하에서 정인군자의 도를 얻어서 행동함에 절도가 있고 의리를 중히 여기고 사를 배척하였다. 자손은 예천 방송(芳松)에 산다.
34. 全羅道事 조시일(曺時逸) 자는 일휴(日休) 丁未 합천(陜川)
조시일(曺時逸) 1607(선조 40 정미)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일휴(日休)
조부는 조명인(曺命仁). 아버지는 여헌 문인 조정생(曺挺生)
인조(仁祖) 7년(1629) 문과급제
인조 13년 공청도도사. 18년 함경도사. 인조 19년 형조좌랑. 예조좌랑
35. 掌苑 別坐 조균(趙?) 자는 성경(成卿) 庚戌 상주(尙州)
조곤(趙?) 1610(광해 2)~1663(현종 4).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성경(成卿)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둘째 아들이며 18세 때 종조부인 가규(可畦) 조익(趙翊)의 사손(嗣孫)으로 출계하였다. 양가의 외삼촌이 김자점(金自點)으로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김자점의 농권(弄權)을 비판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후에 자점이 패망하였어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옹원(司饔院)과 인조 15년 선공감 직장. 선공감(繕工監)의 직장(直長), 인조 20년 청암도(靑巖道) 찰방(察訪), 종묘서령(宗廟署令), 인조 27년연천현감(漣川縣監)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일처리가 질서정연하였고, 매우 청빈하여 생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형님에게 환원함으로써 생가의 조카인 용슬헌공에게 물려주었다.
비변사등록 효종 3년(1652) 4월 3일
아뢰기를
"방금 경상감사의 첩보를 본즉 '병조의 통보로 인하여 역적 자점(自點)의 복마(卜馬) 10필의 행방을 조사할 때, 자점의 종 득남(得男)의 초사에 「자점이 광양(光陽)에서 체포되어 올라올 때 그 명령을 듣고 복마 1필에 짐을 실어 상주(尙州) 읍내 서문 밖 자정의 동복누이 조곤(趙?)의 양모(養母) 집에 들였다」라고 하므로 상주군에 조사하여 물으니 그 1 바리 외에 또 3 바리가 드러나서 실어다 관고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물 4 바리를 믿을만한 군관을 별도로 정하여 해조로 압령하여 보내도록 본도 감사에게 분부할 것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備邊司啓曰, 卽接慶尙監司牒報, 因兵曹移文, 逆賊自點卜馬十匹去處査問之際, 自點奴得男招內, 自點, 自光陽被捉上去時, 聽其令以卜馬一匹?載, 領納于尙州邑內西門外自點同生妹趙?養母之家云云, 査問尙州, 則其一?外, 又三?現出載來, 藏置官庫云, 其卜物四?, 別定可信軍官, 押領上送于該曹事, 本道監司處, 分付之意, 敢啓。傳曰, 知道。
36. 訓練院 奉事 심자광(沈自光) 자는 중옥(仲玉) 壬辰 합천(陜川)
심자광(沈自光) 1592(선조 25 임진)~1636(인조 14 병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호는 송호(松湖)
162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훈련원정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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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은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j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