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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낭산 이기순의 `내 나라 내 땅` 원문보기 글쓴이: 낭산
부끄럼 없는 순결시인 윤동주
1917년 중국 연변 용정의명동촌에서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1941년 연희전문 《문우》지에 「자화 상」,「새로운 길」을 발 표. 「십자가,「또 다른 고향」「 별헤는 밤」「서시」등을 지음 1942년 참회록」지음 동경 릿쿄(立?)대 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학과에 편입. 1943년 검거와 동시에 많은 책과 작품, 일기를 압수당함. 1944년 2년형의 언도를 받고 후꾸오까(福?)형무소에 투옥 1945년 2월16일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운명 1947년 정지용의 소개로「쉽게 씌여진 시」발표되며 세상에 알려짐 1948년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간행. 1968년 연세대학교 구내에 윤동주 시비 건립 1985년, 연변의 인사들에 의해 시인의 묘소 와 묘비 발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를 상징하는 대표시 <서시(序詩)> 전문이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고 작품을 골라낸 후 머리글로 삼기 위해 쓴 작품이다. 본래는 제목이 없는 이른바 ‘무제’ 작품인데, 1948년 유일무이의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면서 책머리에 사용하고부터 ‘서시’로 굳어졌다. 제목의 의미처럼 살아가면서 삶의 지표로 삼기에 어울리는 탓일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즐겨 암송하는 시 작품 중에 하나가 되었다. 논어의 ‘앙천부지무괴(仰天俯地無愧)’ 말과 같이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더라도 양심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순결한 삶을 갈망하는 시인의 고뇌가 나타난다. 한 점의 구름, 작은 나뭇잎을 살랑거리게 하는 미세한 바람일지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순수와 순결은 그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인생관 그 자체다. 별의 이미지를 통해 일말의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는 결백한 삶의 지향점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자라는 어두운 시대적 상황이 젊은 지식인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며 괴롭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친필 원고 윤동주의 집안은 증조 때 함경북도 종성에서 만주의 자동으로 이주하고 다시 조부께서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으로 이사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중국의 연변 용정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 여사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8세 때 고종사촌 외사촌 형제들과 함께 명동소학교엘 입학했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한 평생의 동지다.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도 이때의 동창 친구다. 14세 때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의 은진(恩眞) 중학교를 입학했다가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다시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다녔다. 서울 진학을 앞두고 의학 공부를 강하게 요구하는 부친과 의견 대립하다 본인이 연희전문 문과를 택했다. 연희전문 2학년 때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하며 북아현동 서소문 등의 숲길을 즐겨 산책하며 시상을 정리했다. 시인 정지용을 찾아가 시를 공부하고 담론을 나눈 것도 이 시기다. 윤동주의 작품 중 많이 알려진 시들, <자화상>, <새로운 길>, <십자가>, <별 헤는 밤>, <간> 등이 주로 연희전문 문예지 ‘문우’에 발표했던 것들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19편을 선별해 첫 시집 출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2년 개관된 서울 청운동의 윤동주 문학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서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은 윤동주의 시편 중 가장 서정성이 뛰어난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계획했던 시집의 권두에 <서시>를 두고 그에 대응하여 권말에 이 작품을 놓기로 했던 만큼 자신도 이 작품을 아끼고 사랑했다. 북간도의 소학교 시절 친구들을 회상하고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낭만적인 작품이다. 그들이 모두 밤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하나의 별들이며, 별을 헤아리며 잠시 추억 속으로 젖어드는 자신도 또 하나의 별이다. 별은 순수의 존재이고 시인이 갈망하는 이상과 동경의 세계다. 날이 새면서 별이 스러지듯이 아름다운 이름들, 나의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흙으로 덮히고 사라진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꿈꾸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돋아날 것이라는 기다림은 시대의 어둠을 견디어내는 시인의 의지다. 용정중학교 교정의 윤동주 시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한 달 반 동안 고향을 다녀간 윤동주는 1942년 일본 토쿄의 릿교(立敎)대학 영문학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해 10월 교토에 있는 도지샤(同志社)대학 문학부로 편입한다. 유학시절 윤동주는 특별한 이유없이 불량 조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오르려고 가족들에게 전보 연락도 해놓고 배표까지도 사두었는데, 난데없이 가택 수색을 받아 책과 일기, 작품까지 모두 압수당하고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에는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고 적혀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갑자기 옥사하였다 .만 나이 27세의 짧은 생애였다. 부친과 당숙이 시신을 인수하여 고향 용정에 안장했다.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대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달 바람‘이라는 통지가 사망 이후 뒤늦게 날아왔다고 한다. 윤동주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독극물 주사를 맞았다는 의문이 수없이 제기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명동촌 입구의 생가 마을 안내석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륙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작품 <쉽게 쓰여진 시>가 유학 시절 썼던 시편이다. 1942년 6월 3일 릿교대 시절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심한 성격의 그는 작품마다 지은 날짜를 말미에 적어두었다. 친구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상급학교 진학도 못한데 비해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유학 생활을 하는 자신의 입장이 한편으로는 죄스러운 것이다. 대학노트를 끼고 다니며 시나 쓴다고 어쭙잖게 거들먹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에 대해 엄격했다. 현실적 부정의 자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모교가 용정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윤동주의 숨결이 살아있는 생가와 모교, 묘소를 둘러보리라 만주 용정을 찾아간다. 국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이 복지만리 새로운 땅을 찾아 유랑길을 떠났던 북간도. 고구려 영토 우리의 땅이었고 지금도 연변 3개성이 조선족 자치주로 남아있지만, 우리의 국권이 미치지 못하는 애한이 서린 남의 나라 땅이다. 한반도의 종산 백두산을 들렀다가 윤동주기념관을 찾았다. 위치는 길림성 용정시 용정중학교. 모교 은진중학교가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바뀌고 교문을 들어서면 본관 건물 앞 중앙에 우뚝한 윤동주 시비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2단으로 된 검은색 받침돌 위에 백색 대리석 비면엔 <서시>를 새겨두고 머리 위로 초승달 모양의 갓을 올렸다. 건물 2층에 마련해 둔 ‘윤동주 기념관’은 규모도 자그마하고 진열된 유품이나 자료들도 미흡하기 그지없으나, 이국땅에 이 정도라도 갖추고 있는 게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런 일이냐. 연변 땅 조선족 교민들의 자존심과 민족애 덕분이다.
연변 용정시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용정시 외곽 명동촌에 위치하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반듯한 기와집으로 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부자집 모습임을 쉬 짐작할 수 있다. 용정으로 시사가기 전 15세까지 살던 집으로, 1981년에 무너진 것을 1994년 복원했다고 한다. 마당 입구에 ‘윤동주 고향집’ 나무판자 팻말이 서있고, 건물은 추위가 심한 북방지역이라서 대청마루가 있는 구조는 아니다. 그의 묘소는 생가로부터 걸어서 20여 분 남짓의 거리로 동산공원 중앙의 위치다. 외삼촌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의 묘지란다. 전에 사진으로 볼 때는 봉분도 다 허물어지고 잔디도 듬성듬성 공동묘지의 여느 무덤과 다름없더니, 이제 막상 와서 보니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 동안 묘소가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반듯하게 깎은 화강암 둘레석에 제절까지 검은돌로 석축을 쌓았다. 왼켠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제법 자랐고, 양쪽으로 주목 어린 나무를 심어 두었다. 대개의 유적은 본래의 제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자리를 옮기면 그 의미가 퇴색하고 가치도 떨어지는 법이다. 그렇더라도 윤동주의 생가야 어쩔 수 없지만, 묘소만큼은 국내로 옮겨 모시는 게 어떨까. 2012년 서울 청운동에 ‘윤동주 문학관’도 건립하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손질해 두었으니, 이곳에 유택을 마련해 드리는 것도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또 하나 그를 기리는 문학적 명소를 마련해 주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명동교회 공동묘지에 위치한 윤동주 묘소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 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로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마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왜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懺悔錄>은 1942년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지은 작품이다. 근래 들어와 새롭게 알려진 이야기 하나. 일제 말 혹독한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 윤동주 집안도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성씨를 바꾼 사실이 알려졌다. 윤동주를 일본으로 유학시키기 위해 불가피 행해진 일이었다고 하지만 윤동주 자신에게는 이 같은 일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 인한 심리적 여파가 갈등과 고뇌를 낳고 철저한 자아 반성과 참회로 이진 것으로 보인다. 녹슨 거울처럼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의 백성으로 느끼는 회한과 자괴감에 암흑의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표지석
윤동주의 시 세계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애정, 진실한 자기 성찰 의식,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로 집약된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저항시인으로 거론하지만, 그는 철두철미 순수와 순결의 시인이지 저항시인으로 보기엔 미흡하다. 이육사, 이상화처럼 실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도 아니고, 작품에서도 과감한 투쟁의식이나 저항 정신을 드러나게 표현한 것들이 없다. 그의 시편들에 나타나는 의지는 삶에 대한 반성과 결의이지 일제를 향한 치열한 거부감이나 저항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고 억울한 희생이라고 해서 작품까지 미루어 과장하는 것은 바른 평가가 아니다. 종교적 박애사상에 바탕을 둔 순결시인으로 정의하는 것이 윤동주에 대한 정확하고 합리적 평가다.
2013년 낭산 이 기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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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낭산 이기순의 `내 나라 내 땅` 원문보기 글쓴이: 낭산
첫댓글 선생님의 이와 같은 자료를 종편하여 출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