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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1대 군주.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명나라가 하사한 공민왕(恭愍王). 고려에서 올린 시호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 경효왕(敬孝王)이라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제25대 충렬왕의 고려 시호인 경효왕(景孝王)과 혼동할 수 있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고려식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말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 종신(終身)하며 정권을 장악한 군주였기에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2. 존호
기나긴 여몽전쟁이 끝나고 원 간섭기에 들어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자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됐다. 그 일환으로 고려는 5묘제 태묘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못하게 됐고,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충렬왕부터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의 고려 국왕들은 묘호가 없다.
이후 《고려사》 <예지> -태묘- 조에는 공민왕이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서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이었다. 잘 보면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를 회복했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했기 때문인데,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여력이 남아 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래서 종묘 제도는 천자의 것을 따르되 묘호를 새로 올리지는 않았고,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들에게 독자적인 시호를 올려 자주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공민왕 본인 역시 묘호가 없고 명나라가 우왕 11년에 내린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만 존재한다. 다만 우왕이 재위 2년에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약칭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시호는 있으며, 명나라가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지는 이 이름으로 주로 불렸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나중에라도 묘호가 올려졌다면 좋았겠지만 다음 왕인 우왕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폐위당했고, 그 다음 왕인 창왕은 <우창비왕설>에 휘말려 폐위 후 처형당했으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도 조선 건국으로 인해 폐위당하면서 묘호를 올릴 사정이 되지 않았다. 이후 들어선 조선 왕조 역시 자신들의 건국 정당성을 위해 고려 왕조의 묘호 없는 왕들에게 묘호를 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 묘호가 없는 고려 국왕들은 오늘날까지도 시호로만 불리고 있다. 그나마도 휘를 그대로 쓴 우왕이나 창왕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
3. 평가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狎昵頑童 以逞淫穢 使酒無時 歐擊左右。又患無嗣 旣取他人子 爲大君 而慮外人不信 密令嬖臣 汚辱後宮 及其有身 欲殺其人 以滅其口。悖亂如此 欲免得乎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 같은 무리한 건축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논평-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反元) 정책을 펼친 고려의 회광반조를 상징하는 인물로 불리는 한편, 아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공민왕이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바로 의심이 많아 신하를 함부로 죽이거나 숙청하는 일을 자주 벌였다는 것이다. 그 예로 들 만한 사건이 당시 '3원수'라 불리며 홍건적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당대의 명장인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정세운을 한꺼번에 왕명을 빌미로 사실상 처형시킨 사건인데, 이들은 권력을 탐했던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인물들로써 후에 이러한 모략이 밝혀졌고, 김용도 본인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탓에 공민왕의 지시를 받은 최영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다만 이런 무장 세력들의 대한 숙청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임진왜란 시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키워간 무인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 당시 무신들의 회의 기구였던 정방을 가장 먼저 없애버렸다. 그가 얼마나 무장 세력들을 경계하고 있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
게다가 고려 전체를 뒤흔들며 시궁창 속으로 몰아넣었던 무신정권이 끝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득배 등의 자식들을 공민왕이 위로했던 것은 이런 불가피한 숙청 이후의 나름의 속죄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공민왕 사후, 고려 정계에서 무장 세력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이들을 견제하던 이인임마저 무진피화 사건으로 인해 몰락한 이후, 권력은 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최영과 신예 이성계가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 결과를 볼 때 무장 세력들에 대한 경계는 타당한 것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러한 공민왕의 끊임없는 의심은 신하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에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결정적인 이유로 제기되기도 했다.
성격 면에서도 꽤나 문제가 많았는데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기에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도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성격은 공민왕이 어린 시절부터 무려 10년씩이나 원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한데다가 즉위 이후에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든든한 지지 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국정을 주도하던 대신들의 대부분은 공민왕이 척결해야 할 권문세족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신하들 또한 공민왕 입장에서는 왕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모후인 명덕태후 또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었던 점과 공민왕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 합쳐져 우유부단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 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공민왕이 이루어낸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 약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신흥 무인들에게 존경받는 무장이었던 유탁,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에게 존경받는 유숙까지 숙청해 버린 바람에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실린 공민왕에 대한 평가가 추락하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이 두 사서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도 공민왕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된 말년에 대한 왜곡 가능성과 조선의 평가가 어땠든 간에 공민왕은 객관적인 교차검증을 하면 할수록 비판점이 오히려 더 쏟아지는 판국이다.
실질적으로 개국공신들의 스승이자 상관들인 인당, 정세운, 안우, 이방실, 유숙, 유탁, 홍언박, 김득배 등 명망 있던 여러 문•무 신료들이 결과적으로는 공민왕의 손에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위 말기의 평이 조선 왕조의 손을 떠나서 좋은 평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정치적인 숙청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해야 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태종 이방원이 일종의 모범 사례인데 지나친 숙청은 신하들에게 두려움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까지 품게 만들며 쿠데타의 빌미가 될 수 있다. 훗날 말년의 공민왕을 살펴보면 본인이 권력을 쥐어주고서도 믿지 못해 숙청한다든지, 자신의 힘에 좀 가깝다 싶으면 무작정 죽여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이 보인다.
신하들을 복종시켜야 할 그의 리더십도 굉장히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덕흥군을 따라 고려에 침입한 최유도 한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조일신 본인의 뜻만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반란이 발생했고, 더군다나 주요 타겟은 공민왕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이 아닌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세력이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조일신의 난에 공민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거나 혹은 반원 세력을 탐탁치 않아하던 공민왕의 의중을 알아챈 조일신이 선수를 쳤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조일신을 직접적으로 제압한 것은 공민왕의 사주를 받은 최영과 이인복이었다는 사실이 반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공민왕이 반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거나 직접적으로 지원을 했더라도 아직까지는 고려 조정 내에서 친원파 권문세족들의 힘이 큰 시기였다는 것과 원나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일신을 제압했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공민왕은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거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일 정도의 뚝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민왕은 즉위 후 기철 일파 척결을 포함한 반원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늘 자신의 입지에 대해 불안해했으며, 원, 명과의 외교적 갈등이나, 조정 내부의 정쟁은 그의 섬세한 성격상 본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즉, 고려 말의 혼란한 외교관계와 더불어 이미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존재하지 않는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을 견뎌내기에는 공민왕의 성격이 너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공민왕의 명으로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에 선봉에 섰던 유인우 역시 나중에는 공민왕을 배신하고, 덕흥군의 편에 붙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근본적으로 공민왕 주변에 형성된 측근 세력 자체가 미래의 출세를 위해 공민왕에게 의탁했던 호종공신이나 자신의 외척 등으로 좁았던 것도 문제였다. 이마저도 공민왕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여튼 이러한 연유로 큰 권력을 쥐어주고 적절한 시기에 숙청을 반복했고 이러한 점은 최측근들조차 추후에 공민왕의 통수를 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의 육성이 당시까지는 미비했다. 동시 공민왕이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공민왕 자신의 사상에서도 성리학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기존의 한•당 유학의 전통과 불교에 심취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공민왕과 비슷한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던 기성 유학자들은 기존 권문세족과 일정 부분 유착 관계에 있어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정도전, 윤소종, 정몽주, 권근, 조준과 같은 소장 성리학파 세력들은 공민왕 대까지는 젊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려웠고, 공민왕 말기에는 국왕이 실의에 빠진 채 신하들을 불신해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신진 사대부들은 공양왕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정도전, 조준 등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고려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아예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건국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
더불어 원,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무장들의 수훈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며,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져 군비 조달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원의 제도 하에서 사병 집단을 거느리던 장수들을 통제하거나 사병을 혁파하기도 어려워져 개혁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공민왕은 계속 현실적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세력 유지와, 개혁을 위한 기성세력 제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며 현실적 힘도 제약되었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전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성계가 군권을 거의 장악했던 공양왕 대였으며, 그때조차도 기성세력의 무수한 반발이 있었다.
거기다가 공민왕 본인부터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호종공신 혹은 인척 등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고, 편 가르기, 숙청, 암살, 배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들로 국정을 운영하였던 것도 자충수였다. 결국 이 일련의 잔혹한 숙청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없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신임할 수 있는 신하들도 같이 사라져버린 셈이다.
신돈을 기용했을 때도 이런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권문세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판하며 타락한 고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동시에 신진 사대부들이 권문세족들을 비판하지만, 막상 신진 사대부들조차 권문세족과 서로 통혼하기를 원하며, 심지어 권력을 잡으면 권문세족과 똑같아진다는 식이었다. 또한, 통치자의 역할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말하기보단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의 이 발언은 어찌 보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고 없는 신돈이라는 외부인사를 기용해 개혁을 다시 시도했지만 신돈마저 권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그도 숙청한 후엔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신돈 숙청 후 자제위를 동원해 엽색 행각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지만 어느 정도 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 역시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 주었고, 이는 조선 건국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생각보다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되어 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무신 정권, 몽골, 권문세족으로 인해 처참하게 망해버린 고려의 국력을 꽤 회복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창전동에 위치한 공민왕 사당.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에 내응하기도 했고, 그런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만 21세의 나이로 공민왕 앞에서 격구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니, 이러한 인연들 그리고 이성계가 공민왕을 진짜 고려의 왕다운 왕으로 여겼는지 종묘에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고려사》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자신들의 손으로 멸망시킨 왕조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 종묘에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대우한 조선이었지만 그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힐난했다. 역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이 성군으로 평가받은 경우는 없다. 물론 공양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민왕을 진정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기도 하므로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우왕부터 신돈의 핏줄로 조작해야 했기에 당연히 부왕인 공민왕의 재위 후반기 부분부터 지어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민왕의 평을 담은 《고려사》는 세종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지만 완성본은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나왔기 때문에 세종은 살아서 이 책을 못 봤다. 생전 세종의 성격을 고려할 때 완성되었다면 또 수정하라고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전조의 사서라고 해서 무조건 조작부터 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못한 시선이다. 그 증거가 분명치 않은 사건인 우왕의 출생에 관한 건이라든지, 공민왕이 자제위를 시켜 후궁들을 범하게 했다든지 등 공민왕이 말년에 보인 엽색 행각이나 방종이 조작이라고 해도 나머지 사건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김득배, 안우, 이방실의 숙청 건, 신돈을 중용했다가 내친 건과 같은 것들은 조작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이다. 김득배, 안우, 이방실은 이성계, 최영, 정도전 등과 같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였고, 특히 김득배의 제자는 조선 초기에 재평가받으며 존숭되기까지 했던 정몽주였는데 일찍이 그는 김득배의 문생이어서 이 일을 한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특히 후대로 가면서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몽골 출신이라는 것에 더해 윤이•이초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표전문 사건이 1차 왕자의 난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등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
확실히 3원수 숙청 건만 놓고 보면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 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는 평가도 틀린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언젠가 측근들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나 변명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평가의 경우, 명군으로 호평받는 고려 광종이나 조선 태종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며, 사실 저런 면이 없는 군주는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문 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후에 화근이 될 수 있는 측근 및 신하들을 쳐낼 수 있을 때인지를 적절히 판단하는 것에 더해 그 측근을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쳐낼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몫이다. 결국 공민왕은 그 판단을 그르쳐버렸고 이 탓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홍륜에게 역으로 시해당했던 것이다. 조선 성종 때가 되면 공민왕은 수양제급으로 묘사되었고, 영조 대에는 《영조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되는 임금으로까지 격하되었다. 실제로 광해군을 공민왕과 맨 처음 비교한 것은 조선 왕조였을 정도.
4. 기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군주였는데, 특히 그림에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있으며 아끼는 신하 염제신(염흥방의 아버지)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공민왕이 직접 다룬 것으로 전해지는 거문고가 충청남도 예산군의 수덕사에 있다. 공민왕 사후, 길재를 통해 조선 왕실에서 거문고를 소장해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의친왕 이강이 당시 수덕사의 승려인 만공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공민왕 사당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초 서강 일대에 광흥창을 지을 때, 한 마을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면 광흥창과 서강 일대가 평안할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이후 꿈에서 깨어난 노인이 밖으로 나가 보니 공민왕의 영정이 발견됐고, 그 자리에 공민왕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10월 21일에 공민왕 사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사당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암살당한 것으로 확실히 밝혀진 왕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에, 박정희 대통령 이전까지는 한국사에서 공식적으로 암살된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5. 가계
정실왕후(제1비) :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제2비 : 혜비 이씨(惠妃 李氏)
제3비 : 익비 한씨(益妃 韓氏) - 덕풍군 의(德豊君 義)의 딸. 혜비, 정비, 신비와 다르게 공상을 파했다(=정실부인이 아니다)는 서술이 없는데, 이것이 창왕 재위기 적통으로 인정돼서인지, 아니면 불륜으로 인해 아내로 간주되지조차 않아서인지는 불명이다. 공양왕 시기에는 (왕녀를 양육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세록보다 격이 낮은 토지 하사로 대우했으나 진상을 하다가 강등된 것인지, 녹봉을 주다가 강등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부터 대우가 없다가 토지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같이 토지를 하사받은 신원필의 경우, 대우가 없다가 토지를 지급받기 시작한 케이스이다.
제4비 : 정비 안씨(定妃 安氏)
제5비 : 신비 염씨(愼妃 廉氏) - 서흥 염제신의 딸. 혜비와 같이 공민왕 사후 출궁해서 여승이 되었다.
제6비 : 궁인 한씨(순정왕후-順靜王后) - 공민왕 사후 우왕이 추존. 반야의 존재 자체가 조작이고, 궁인 한씨가 우왕의 친모가 맞다는 주장도 있다.
후궁 : 반야(般若)
아들 : 우왕(禑王) 모니노 (牟尼奴)
6. 대중매체에서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초반부 아직 이성계가 관직에 나가기 전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업적이 주요하게 다뤄진다. 아예 드라마가 배경 내레이션 후 고려로 돌아오기 직전의 공민왕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고우영 만화 《수레바퀴》 1권에서는 말년의 공민왕을 노망난 쇼타콘으로 묘사했다.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파워업 키트 추가 시나리오 4번(1370년)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공민왕 말년의 난행을 감안하여 그런지 능력치는 다소 수수한 편이다. 문화 특기가 있어 명나라와 교역을 통해 문화 능력치를 높이는데 활용하면 좋으나 수명을 장담할 수 없어 일단 아이부터 가져야 한다. 수하 장수로 이성계와 최무선이 있는데 이성계 때문에 그럭저럭 게임을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화포병을 편성할 수도 없고 병과 특성은 보병 C, 기병 C, 기병 D, 수군 C.
기본 병과인 경보병, 단궁병으로만 초반을 이끌어야 하는 데다가 주변의 명나라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도 강적인지라 쉽다고는 할 수 없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 이미 사망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노국대장공주가 생존해 있으며 고려 출신으로 되어 있다. 파워업키트에서 해당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명나라와 무로마치 막부의 파상공세가 펼쳐져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의 막장 상황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먼저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무로마치 막부에 전력을 집중하는게 정석적인 공략법.
게임 <원조비사>(징기스칸 3: 고려의 대몽항쟁)에서는 정치 B, 전투 C, 지휘 B, 매력 A로 쓸만해서 대부분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을 일부러 죽이고 공민왕을 군주로 삼아서 플레이하거나 공민왕을 부하로 삼아서 플레이를 해봐도 잘하는 편이다.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정보석이 연기했다. 초기부터 정세운이나 이제현, 이인복을 제외한 대신들을 쉽사리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원나라에서부터 자신을 호종했던 조일신과 김용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김원명 등이 사직을 청하자 쉽사리 윤허하던 공민왕이 이제현과 그 뒤를 이어 이인복이 사직 요청을 해오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민왕이 얼마나 그들을 믿었는지 알려주는 부분.
2008년 개봉한 영화 <쌍화점>에서는 공민왕이 모티브가 된 고려 왕을 배우 주진모가 연기했다. 참고로 수위가 높아서 오히려 고증 비판은 적은 편이며, 선전물에서는 공민왕과 자제위 언급이 나온다.
2012년 SBS 드라마 <신의>에서는 배우 류덕환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의 묘사는 공민왕을 참고할 것.
2013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배우 류태준이 연기했다. 《고려사》의 기록대로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삐뚤어지다가 급기야 자제위의 홍륜을 상대로 남색을 하게 되는데 노는 모습이 상당히 변태스럽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인임의 사주를 받은 이인임의 내연녀인 가상의 고려 최고 무당이 음모를 꾸며 홍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2013년 MBC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배우 최정원이 연기했다. 본방에는 안 나오고 51회 재방송에 잠깐 등장한다. 기황후가 요염하게 앉아 있을 때 방신우가 강릉대군이라고 소개한다. 기황후는 "고려 왕으로 책봉해 줄테니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면서 고려 왕으로 책봉하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황후의 친정을 몰살시킨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김명수가 연기했다. 1화, 2화는 공민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만큼 사실상 1화, 2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하들의 정쟁에 모든 의욕을 잃고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건설에만 몰두하는 폐인으로 등장. 신하들 가운데 믿을 사람이 없어 자제위를 친위 세력으로 두었고 의심증이 있어 믿었던 신하들을 도륙했던 것은 역사와 같다. 그러나 난행을 일삼다가 살해당한 정사와 달리 명덕태후와 정도전의 일갈에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내치고 정도전에게 자신의 뜻을 담은 그림을 하사하며 대궐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모니노와 약속하는 등 정사를 바로 잡을 의지를 다졌으나 내쫓길 위기에 처한 이인임의 모략으로 홍륜에게 살해되었다. 홍륜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노국대장공주의 환청 혹은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공민왕이 목소리를 듣고 공주라고 부른 다음에 홍륜이 들어와 칼을 겨누자 분노하여 크게 소리치나 결국 살해당한다.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해 공민왕을 차도살인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직접 등장은 하지 않고 시해 당시 홍륜이 "죽였다"고 외치는 장면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등장 인물인 우왕의 "공민대왕"이라는 언급으로도 간접 등장한다. 그 외에도 당시에 영향력을 많이 끼친 인물이니 여기저기서 언급으로 자주 등장한다.
2019년 중국드라마 <대명풍화>에서 정통제가 탈문의 변을 준비하며 장군 석형에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자신의 아들을 백안첩목아(공민왕)에게 맡기라고 명했다.
대체역사소설인 《환제국사》의 주인공은 신들의 힘으로 공민왕으로 태어났다.
애니메이션 <흙꼭두장군>에서 흙꼭두장군이 지키던 쌍릉이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쌍릉을 모티브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위화도 회군 당시 서경에서 주색잡기를 하던 우왕이 환관들 중 한 명을 칼로 베어 죽이고 "이 환관 놈들이 부왕 폐하를 시해했다"고 언급한다.
9. 관련 인물
김용
노국대장공주
반야
신돈
우왕
윤소종
이성계
이인임
정지
최만생
홍륜
상지은니묘법연화경
제1차 요동정벌
홍건적
흥왕사의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