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이해>
1. ‘판소리’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예술 중 하나이다.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진행하는 소리와 이야기의 무대는 단촐하지만 무한히 크고 넓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체성과 진정성은 흥미로움을 넘어 깊은 감동까지 불러일으킨다. 판소리에서 ‘1고수 2명창’이라 하지만 핵심은 명창이다. 명창은 평범한 목소리를 넘어선다. 오랜 수련과 신체적 고통을 겪은 후에 득한 특별한 소리는 보통 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높은 예술적 성취를 만나게 해준다. 소리꾼은 창과 사설(아니리) 그리고 동작(발림)을 통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떤 무대 장치도 필요없이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의 사연을 능숙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2. 판소리에 관한 문헌 중 가장 이른 것은 18세기 영조 30년에 발간된 만화본 <춘향가>이다. 지금의 춘향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판소리의 시작은 숙종 말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판소리는 가면극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 속에서 탄생한 민중예술이다. 상업의 발달과 민중들의 의식 향상은 기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했고 커진 욕구는 예술적 형태로 변환된 것이다. 이 시대에 기존 사회를 비판한 가면극과 판소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예술과 사회의 연관성을 확인하게 한다. 판소리의 기원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가 기원설’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에 익숙한 ‘무가’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종교적·주술적 성격을 벗어나 세속적·비판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송만재의 <관우희>에는 판소리 열 두마당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판소리가 얼마큼 민중사회에 확산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는가를 추정할 수 있다.
3. 판소리 확산의 주역은 민중만이 아니었다. 판소리는 민중들의 소박하고 거친 말 뿐 아니라 상당히 세련되고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많은 양반들이나 아전과 같은 중인들의 참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양반들의 참여는 ‘판소리’의 성격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초기의 판소리는 아마도 과거 전해 내려오는 설화와 굿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좀 더 생생한 민중들의 생활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생함은 때론 생경하고 거친 특징으로 인해 예술적 감각을 상실한다. 이것을 보충한 것이 양반들 특히 몰락한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내용적으로 유교적 규범을 배경으로 하지만, 규범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당시 사회를 비판하면서 가치를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특징이 민중들과 양반 모두에게 사랑받는 예술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판소리의 구성을 보면 전체적으로 완결되고 통일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기본적인 틀 속에서 독립적이고 개성적인 부분적 구성이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판소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관성보다는 내용과 감정의 극대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이다. 가령 춘향의 모습은 다양하고 비합리적이다. 어떤 곳에서는 요조숙녀의 단아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른 장면에서는 포악하고 공격적인 태도로 전환된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인물이나 다른 판소리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통일성이 아니라 ‘상황적 진실성’이다. 그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비장과 골계의 반복, 유식한 말과 상스러운 말의 교차, 이러한 구성적 변화는 각각의 부분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전체적으로 일정한 리듬을 형성하며 관객들의 흥미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5. 판소리는 조선 후기 사회적 산물이었다. 상업의 발달과 민중의식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판소리에는 유교적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민중들의 비판적 태도가 담겨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대에 등장한 가면극과 비교한다면 다른 특징을 보인다. 두 장르 모두 유교적 조선에 대한 불만과 변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강도는 분명 다르다. 가면극이 좀 더 직접적이고 공격적으로 유교적 질서를 공격하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판소리의 담론은 약한 편이다. 이런 차이는 판소리에 많은 양반들이 참여했고 비록 비판적 시선을 가질지라도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시각을 갖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판소리에 실질적인 후원자들이 양반들이었다는 것도 비판적 시각의 한계를 가져왔을 것이다. “서민층의 지원으로 확고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양반지배 체제와 관념적 사고방식의 허위를 비판하는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가다듬은 도시가면극에 비한다면, 판소리의 유동성은 경험적 갈등론의 구현에서도 도시가면극처럼 과감한 자세를 가질 수 없게 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역사적 변화 속에서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온다. 일제강점기 가면극은 당국의 탄압에 의해 거의 소멸되었지만, 판소리는 나름 창극이나 국극과 같은 다양성 확대를 통해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판소리의 문학적 특징을 민중의 ‘발랄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판소리의 내용 속에서 등장하는 모순적인 에피소드, 등장인물의 비합리적인 성격 변화, 일관되지 않고 엉뚱하기까지 한 상황의 등장 등은 판소리의 ‘발랄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눈으로 접하는 예술이 아니다. 직접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 펼쳐지는 현장 예술인 것이다. 그런 장소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내용의 통일성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 속에서 표현되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공감의 중요성이다. “판소리를 지배하는 양식적 원리는 이야기 속의 여러 상황이 지닌 의미·정서를 강화·확장하여 ‘부분이나 상황의 독자적인 미와 쾌감을 추구’하는 지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판소리는 민중들의 이러한 요구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소리하고 이야기하면서 민중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과거 판소리는 전편을 공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각각의 대표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부분이 독자적인 재미를 가져야 했고 판소리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개작되고 편집된 것이다. 판소리의 완창무대는 1970-80년대 박동진과 같은 소리꾼의 시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7. 여기에서 판소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동리 신재효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창 출신의 아전이었던 신재효는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판소리에 관한 책과 작품을 직접 저술했을 뿐 아니라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여 현재의 판소리를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재효가 판소리의 위상을 높였고 양반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발전을 가져온 측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신재효가 추구했던 합리성과 양반들과의 친화성은 판소리의 민중적인 발랄성과 생생함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신재효의 판소리 정리를 통해 오랫동안 전승되었던 판소리들이 사라진 것이다. 현재 이름이나 사설만 전해오는 판소리들은 대부분 민중들의 생명력과 발랄함 그리고 성적인 활력이 넘치는 작품들이 많다. 신재효가 정리한 <춘향가> 또한 <완판본 열녀춘향가>와 비교하면 민중들의 발랄한 감정을 제거하고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예술의 생동성을 축소시켰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판소리를 민중의 집단으로 그리고 민중의 집단의식의 구현체로서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 그리하여 형상과 기교에만 얽매여 버리고 말았다. 감격과 비판의식을 갖지 못함으로써 민중의 발랄성을 간과한 결과를 초래했다.”
8. 분명 판소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속예술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국의 문화를 굳건히 지킨 힘과 저력을 지닌 갖고 있는 예술 장르이다. 판소리의 전승은 수많은 소리꾼들의 연속적인 계승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우리 소리의 위대함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9세기 판소리 최고의 전성기 때 사라진 민중적 판소리의 실체는 못내 아쉬움을 가져온다. 민중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이 좀 더 효과적으로 결합된 예술의 성립이 탄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가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지배층과의 타협이 때론 예술의 발랄함을 축소시켰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판소리의 생명력은 시대적 요구에 유연하게 결합된 결과였는지 모른다. 조선 후대 민중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가면극이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고 후대 1970-80년대 민중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다시 부활했지만 현재 또다시 쇠퇴하고 있음을 볼 때 변화하고 있는 민중과 예술의 관계는 언제든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변되고 재정립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면 예술의 성격과 본질도 바뀌어 버리는 것이며 그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생존하거나 소멸되는 것이다.
첫댓글 "생존하거나 소멸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