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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휴거와 대환난(1)/ † 이기는 이들의 휴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18절은 휴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1 또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 같이 너희는 조용히 지내며 너희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것은 너희가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정직하게 걷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3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마케도니아 전역,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생시에 주님의 재림을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11-12절은 광신적으로 종말이 도래한 것으로 기대하면서 더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태도를 바로 잡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막을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단정히 하라고 말하며, 자기가 맡은 일에 힘쓰서 물질적인 가난을 물리쳐서 그들에게 본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은 고쳐지지 않고 점점 악화된다(살후3:6-15).
그 당시 믿는 이들은 그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했다. 13절에서 주님과 사도 바울은 믿는 이들이 죽는 것을 잠자는 것으로 여겼다.
16절의 “나팔 소리”는 마지막 나팔, 곧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불러 모으기 위한 나팔이다. 17절의 “채여 올라가”는 저항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빨리 잡아채어진다는 의미이다. 또한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는 요한계시록 12장에 있는 사내아이, 곧 이기는 이들은 대환난 전에 삼층천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가 휴거된다. 그러나 나머지의 휴거는 공중에서 주를 만난다.
계시록 12장 5절은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철장(鐵杖)으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자더라. 그녀의 아이가 채여 올라가 하나님께 이르고 그분의 보좌에 이르더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사내아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 더 강한 부분을 상징한다. 사내아이가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내아이가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장 1-14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3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속이리라. 6 또 너희가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을 들을 터이나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말라.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고통의 시작이니라. 9 그때에 그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고통 받게 하고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고 서로 배반하여 넘겨주며 서로 미워하고, 11 많은 거짓 예언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
12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그런즉 예언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너희가 보거든 (누구든지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 라고 말한다.
위의 3절의 ”오시는 때“는 헬라어로 “파루시아”이며 “임재”(나타남, 와서 있음, 함께함)를 의미한다. 제자들의 질문은 세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는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마태복음 23장 32-39절까지의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둘째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 셋째는 모든 시대가 종결될 때의 징조이다.
마태복음 24장 4절에서 25장 46절까지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이 세 가지 문제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이다. 이 임재(파루시아)는 사내아이의 휴거(계12:5)와 첫 열매들의 휴거(계14:1-4)로 시작하여, 그분께서 성도들과 함께 지상재림으로 끝날 것이다. 그분의 파루시아 기간에 초자연적인 재난들로 시작될 대환난이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공중재림, 공중으로 휴거, 그리스도의 심판대, 어린양의 혼인잔치 등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이 이 땅에 재림하시기 직전에 믿는 이들을 하늘에 들어 올리시고, 그 후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4장 21절은 “이는 그때 아주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재림직전에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대 환난이 있을 것인데, 대환난 직전과 과정 중에 그리고 직후에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휴거라고 한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으며 또한 우리의 소망하는 바는 휴거이지만, 창세 이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공할 대환난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이 환난을 시험이라고 부를 수 있고, 혹은 그것을 7년 중 마지막 삼년 반이라 해도 된다. 휴거와 대환난이 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휴거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환난을 통과해야 하고, 환난을 통과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휴거되어야 한다.
휴거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많은 종류의 견해들이 있는데, 각각의 견해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을 만한 신학자이거나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와 동일한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경멸하거나 이단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결코 마음대로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거나 이단이라거나 그들의 주장을 엉터리니 교활한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말아야만 한다.
내가 이런 말을 독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휴거에 대한 각가지 많은 견해들이 존재하는데, 서로의 견해가 다를 때는 대부분 어김없이 자기의 견해만 옳고 나머지의 견해를 이단시하는 경향들을 수없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교파로 분열된 개신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서로를 이단시하고 단절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편견을 가진다면, 그분들은 물론 주님께도 미안한 일이 된다. 나의 연구 자세는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많은 견해를 겸허하게 비교하고 소화한 후에 나에게 주시는 하나의 분명한 단안을 내리는 것이다. 모든 견해가 모두 옳을 수는 없다. 그런데 많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크게 세 가지의 견해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의 견해가 다 옳을 수는 없다. 또한 세 가지의 견해가 다 틀리지 않다면 오직 하나가 옳은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틀린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알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하여 확신이 올 때까지 영으로 기도하면서 단안을 내려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권위가 있다.
우리가 과연 누구의 견해가 가장 충분하며, 누구의 견해가 믿을 만한지 를 보려면 오직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성경 지식이 나름대로 탁월하였으며, 누가 들어도 이름을 알만한 대단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사이비 이단들의 황당하고 이상한 주장들은 제외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세 가지 다른 견해>
(1) 어떤 신학자들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곧 진실로 거듭난 사람과 진실로 새 생명을 영접한 사람은 모두 대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온 교회가 다 대환난 전에 휴거된다는 해석이다.
(2) 또 한 부류는 온 교회가 모두 대환난을 통과한 다음에야 휴거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의미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곧 진실로 거듭난 사람과 진실로 새 생명을 영접한 사람들도 모두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휴거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다.
(3)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의 이기는 사람들만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고,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환난을 통과해야만 휴거될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휴거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듭난 모든 사람마다 다 대환난 전에 들림 받는 것은 아니며, 거듭나고 또 깨어 예비하여 하루하루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대환난 전에 휴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났지만 깨어 예비하지 않고, 또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대환난 전에 휴거되지 못할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온 교회가 다 대환난 전에 들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소수의 믿는 이만이 대환난 전에 들림 받는다는 말이다. 또한 온 교회가 모두 대환난을 통과해야만 휴거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환난 직전과 통과하는 도중에, 통과하고서야 휴거될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성직자라고 모두가 쉽게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것을 아닐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휴거는 크게 세 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지난날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나는 위의 (3)의 부류를 지지한다. 따라서 순수한 성경말씀에 따라 이제 (1)(2)의 관점을 잊어버리고, (3)의 관점에서 휴거에 대한 분명하고 순전한 말씀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오직 순수한 성경의 말씀만을 주의하자.
<이기는 자들의 휴거>
이제 위의 (3)의 관점에서, 우리는 휴거의 두 방면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이기는 자들의 휴거와 대다수 성도들의 휴거이다. 여기서 휴거에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은 오직 두 번만의 휴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들의 휴거에도 세 가지 범주가 성경에는 쓰여 있기 때문이다. 곧 첫 열매의 휴거는 사내아이의 휴거와 다르다.
사내아이(계12:5)는 부활한 죽은 이기는 자들로 구성되지만, 첫 열매(계14:1-5)는 살아있는 이기는 자들로서 결코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계시록 12장에서 “해로 옷 입은 여인”처럼 “사내아이”도 상징임을 알게 된다. 계시록에서 사내아이는 이미 태어났으며 출생으로 이미 출산이 되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그분은 부활안에서 맏아들이 되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히브1:5; 사도13:33). 사내아이도 역시 부활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계12:11절은 “사내아이의 한 부분인 이기는 자들이 죽기까지 충성했으며, 어린 양의 보혈과 그들의 증거하는 말과 죽기까지 자신들의 목숨(혼)을 사랑치 아니하므로 원수를 이겼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내아이에 포함된 모든 이들이 죽기까지 충성스러웠음을 가리킨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내아이는 모든 죽은 이기는 자들을 포함하며,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인 첫 열매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내아이와 첫 열매에 추가하여 15장에는 또 다른 무리의 이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와 그의 표시, 곧 그의 이름의 수와 그의 형상을 이긴 나중 이기는 자들, 곧 대환난 중에 순교한 자들로서, 그들은 휴거되어 유리 바다 위에 서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분명히 이기는 자들에 관해서도 최소한 서로 다른 세 가지 휴거가 있다. 이 외에도 11장에는 두 증인의 개인적인 휴거가 있다.
이기는 자들의 휴거는 휴거의 첫 부류이며, 대다수의 성도들의 휴거는 계시록에서 추수로(14:15) 생각되는 두 번째 부류이다. 레위기 23장 10절에서 우리는 땅에서 익은 곡식들을 휴거의 예표로 볼 수 있다. 어떤 곡식들은 일찍 익고 어떤 것들은 늦게 익는다. 먼저 익은 것들은 첫 열매로 여겨진다. 구약 시대에 첫 열매들은 언제나 곡간으로 가져가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지고 갔다.
출애굽기 23장 11절은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말한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토지로부터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곡식은 추수의 때까지 익어야만 한다. 추수 후에는 수확하여 곡간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예표이다.
여기서 수확물은 하나님의 백성이며(고전3:9), 수확물의 처음 익은 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직접 가져가게 될 첫 열매이다. 이런 후에 대부분의 익지 않는 파란 곡식들은 익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곡식들이 다 익었을 때 대다수의 성도들이 추수되어 공중으로 올리우게 될 것이다. 여기서 공중은 곡간에 해당된다.
그 당시 대부분의 농장은 곡간이 농가와 농토 사이에 있었다. 추수된 것들은 곡간에 들이지만, 첫 열매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갔다. 지난날 많은 성경연구가들이 휴거에 대하여 나름의 해석을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수확의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룬 것 같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그분께서 땅에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계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농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계시록 14장에서 우리는 “첫 열매와 추수”를 본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휴거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성경을 철저하게 읽고 연구해 본다면, 기존의 해석들의 한계와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 해석들이 진화되고 있음을 본다. 곧 계시 위에 계시로 성경의 말씀들이 열려왔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로 확정하거나 고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말씀은 살아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시대가 지남에 따라 계시에 계시를 낳아 그 해석이 진화되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도 기존의 계시 위에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