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법문 074-01 /퇴옹 성철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2) 마조스님 01
마조(馬祖道一)스님은
지금부터 1200여 년 전
당(唐) 정원(貞元) 4년(AD.788)
80세에 입적하였는데
육조스님 제자되는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이
법을 깨치게 되는 기연[得法機緣]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보면
선(禪)이란
활동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이
한 군데 체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기 마련이고 도태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논과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향상의 분(分)이 있거니와
정진하지 않고 방일하는 사람은
결국 전에 닦았던 경계조차도
미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쉬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선(禪)은 활동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는 것은
좌선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좌선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선은
곧 선을 참구하는 것인 만큼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오로지 마음을 순일히 하여
자기가 의심하는 화두(話頭)에
몰두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마조스님의 득법기연인
남악선사와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선의 진의(眞意)를 알 수 있습니다.
남악스님이
숭산(嵩山)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수도하는 도일스님의
법기(法器)를 알고
도일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바로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대덕(大德)은
무엇 하려고 좌선을 하십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스님이
기왓장을 가져와서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문 바로 앞에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큰스님은 무얼 하시려고
기왓장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갈고 있습니다.”
“기왓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까.”
“그러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를 이루려고 합니까.”
이 한마디에
도일은
큰스님이 기왓장을 갈고 있는
진의(眞意)를 알았습니다.
다시 남악스님이 물었습니다.
“우마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
“부처를 찾는 데에 있어
좌선만 고집하면
설사 만 겁을 지내도 깨치지 못한다.”
도일스님은
남악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마음을 깨쳐서
뒷날 남악스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덕전등록'
남악회양장(南嶽懷讓章)
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하였기 때문에
강서마조(江西馬祖)라고 불리며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한
석두 희천(石頭希遷)
과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의 쌍벽
이라 불리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고,
그 중에서 뛰어난 이가 88명인데
이 88명이 천하에 흩어져서
육조 조계선을 천하에 유포시켰습니다.
선종을 천하에
유포시켜서 알게 한 것은
마조스님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나고
조동종(曹洞宗)도
이와 관련이 많습니다.
마조스님의 성품은 인자하며
얼굴이 특이하고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으며
혀를 내밀면 코를 덮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스님은 종
문(宗門)의 걸출로서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의 공로자라고 평하는 동시에
큰제자를 많이 두기로
마조스님 만한 이가 없다고도 평합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하면
종문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이 많이 없고
마조어록(馬祖語錄)
이라고 하는
간단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도(道)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 하니라.
단지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할 때
전체가 다 도(道)이다.
도(道) 이대로가 법계(法界)이니
내지 항사사 같은
묘한 작용이
법계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어찌 이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무진등(無盡燈)이라 할 것인가.
일체만법이
다 심법(心法)이요
모든 이름이 심명(心名)이니
만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이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 말씀하셨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는 까닭에
사문(沙門)이라 한다.
若欲直會其道인댄
平常心이 是道이다
謂平常心이 無造作하야
無是非 無取捨하며
無斷常 無凡無聖하니라
經에 云하대
非凡夫行이며
非賢聖行이 是菩薩行이라 하니라
只如今
行住坐臥와 應機接物이 盡是道라
道卽是法界니
乃至 河沙妙用이 不出法界니라
若不然者인댄
云何言心地法門이며
云何言無盡燈이리요
一切法이 皆是心法이요
一切名이 皆是心名이니
萬法이 皆從心生이라
心爲萬法之根本이니
經云
識心達本源故로
號 沙門이라 하니라.
[馬祖語錄;傳燈錄 28,
大正藏 51, p. 440上]
도(道)란
평상심(平常心)을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
고 하니까
평상심이란
일상 보통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옷 입고 밥 먹고
성내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의 활동이
도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平常心)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곧
양변을 여읜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기틀에 대응하고
물건을 접촉함[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식망견
(業識妄見)을 말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진여대용
(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마조스님이 말씀한 도란
생멸견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를
도라고 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 이대로가
법계라 하였습니다.
법계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중도입니다.
일체법이 마음법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란
자성이라 해도
진여라 해도
뭐라 이름붙여도 괜찮은데
양변을 여읜 중도
즉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한 개의 색, 한 개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
[一色一香無非中道]
는 것과 같은 말이며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니,
이 마음이라는 것이
중도불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
본원에 도달한 사람,
즉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이
사문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출가한 사람은
누구든지 평상심,
말하자면
양변을 여읜 중도를 깨쳐야지
이것을 깨치기 전에는
사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道)라 한다고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자기의 망견이요 곡해지
마조스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규봉스님이
4종복기를 비판할 때도
생멸견해에서
마조스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홍각범(洪覺範)스님이
“규봉은 절대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 했고,
영원 청(靈源淸)스님도
“규봉이
생멸°변견적인 해석을 한 망견이지
마조스님이 뜻은 모른다”
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에 입각한
평상심의 진여대용이지
생멸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