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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47. [역경의 열매] 박종호 (1-17) 다시 노래하며 간증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
가스펠 가수 박종호 장로가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춤추는 테너’ ‘한국의 파바로티’ ‘노래하는 거인’…. 가스펠 가수 데뷔 31년차인 내 이름 앞에 그간 붙었던 수식어다. 이제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박종호’. 2016년 간암 판정을 받고 간이식 수술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을 빗대 표현한 말이다. 2년 반이 지난 지금은 건강이 꽤 호전됐다. 수술 후 6∼7개월은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노래하며 간증할 수 있을 정도다. 우스개로 “29세 막내딸의 간을 이식 받았으니 신체 나이도 그만큼 젊어졌나보다”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닐 정도다.
지금은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간암 판정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건강검진을 하다 간암을 발견한 의료진은 “간경화 증세가 심해 간이 다 죽었고 손을 쓸 수도 없다”며 “이식밖에는 답이 없다”고 했다. 간암 1∼3기도 아니고 “간이 다 죽었으니 이식부터 받으라”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50대에 죽음을 맞닥뜨리자 두렵기보단 너무 갑작스러워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도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밤새도록 잠이 안 와 새벽에 눈을 떴는데 문득 내 자신이 죽은 나사로처럼 돌무덤에 갇힌 것 같았다. 온통 사방이 다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나는 종종 집회에서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위기로 사방이 막혔다고 느낄 때 한 번쯤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어보자. 그래도 하늘은 열려있으니”란 식의 조언을 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고난을 당하니 하늘도 닫혀있는 것 같았다. 그저 차가운 돌무덤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때 갑자기 ‘주는 평화’란 찬양이 떠올랐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이 가사는 하릴없이 죽음만 기다리던 내가 고난을 끝까지 이겨내게 한 원동력이 됐다.
내 인생을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역경’보다는 ‘자아와의 갈등’으로 점철된 삶이라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1984년 예수를 본격적으로 믿은 후로 지금까지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가스펠 가수로 활동할 때도 그랬다. 교회가 기독교 문화의 가치를 깨닫지 못할 때, 나는 세상 어디서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했다. 그래서 찬양에 힙합과 트로트 등 온갖 장르를 결합해 무대를 꾸몄다. 기독교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아파트 한 채 값의 비용을 매 음반 제작에 쏟아 부었다.
‘하나님, 내가 할 테니까 잘 따라오기만 하세요.’
이게 내가 34년간 주님을 섬겨온 방법이었다. ‘최고의 하나님을 최고의 방법으로 찬양하자’는 고집으로 12집 앨범을 포함해 30여장의 음반을 냈다. 일각에서는 200만장 가까이 판매되는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지금은 마음가짐이 전혀 다르다. 열정과 추진력을 갖고 최고로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다.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나의 나 된 건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이다. 이제 이 은혜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종호 (1) 다시 노래하며 간증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
* [역경의 열매] 박종호 (2) 나는 '서자 중의 서자'… 예수님 계보가 은혜로워
* [역경의 열매] 박종호 (3) "종호는 세계적 성악가로 자랄 수 있는 아이"
* [역경의 열매] 박종호 (4) 서울대 음대 입학 후 술·담배에 빠져들어
* [역경의 열매] 박종호 (5) 대학 4학년 때 성령체험 '날라리 신자'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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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종호 (17·끝) "찬양하고 기도할 때 아픈 이들이 위로 받기를"
약력=1962년 서울 출생. 85년 서울대 성악과 졸업. 85∼88년 서울시립합창단원. 87년 극동방송 주최 6회 복음성가 경연대회 대상. 88년 1집 앨범 ‘살아계신 하나님’ 발표. 2002년 미국 매네스 음대 성악과 졸업. 현 한동대·전주대 객원교수.
***[역경의 열매] 박종호 (2) 나는 ‘서자 중의 서자’… 예수님 계보가 은혜로워
혈통을 떠나 주님 일꾼으로 쓰여 감사… 배다른 형제자매들 만나 서로 위로
박종호씨가 1964년 2살 생일 기념으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그는 “어릴 때는 얼굴빛이 새카맣고 비쩍 마른 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 방순옥 여사는 이북 출신으로 대한민국 경찰 창설 이래 초창기 교통경찰을 했던 분이다. 얼핏 보면 서양인처럼 착각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본인보다 6살 연상이었던 아버지가 적극 구애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박민택 선생은 일본 오사카외국어대 영문과를 졸업해 미군정 시기 미군부대 소속 치안국 수사과에서 통역관을 지낼 정도로 영어에 능통한 분이었다. 이후 서울사범학교 영어교사를 지냈고 서울 배문고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어릴 적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미국 잡지 뉴스위크를 보며 내게 정치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비상한 머리에 잘난 외모까지 겹쳐 뭇 여성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만나기 전 2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부인은 서울사범학교에서 만난 동료교사였다. 두 번째 부인은 치안국 수사과 활동 시절 만난 경찰이었는데 어머니의 직장 상사였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 때문에 생계는 온전히 어머니 몫이 됐다. 결혼 후 경찰 일을 그만둔 어머니는 밤늦도록 구슬 꿰기, 봉투에 풀칠하기 등 여러 일을 하며 가계를 꾸렸다. 집안 형편이 유복한 편은 아니었으나 살뜰히 살림을 돌본 어머니 덕분에 구김살 없이 자랐다. 고생하며 모은 돈이었어도 내게 쓸 때는 통 크게 지출했다. 어머니는 딱지 하나를 사줘도 청계천 도매시장에서 박스째로 사주시는 분이였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집을 나가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어머니는 종종 ‘너만 아니면 이혼했다’고 쓸쓸히 말하시곤 했다. 이 말을 들을 당시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커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외의 여성과 가정을 꾸렸고 자녀까지 여럿 뒀다는 건 결혼할 때 알았다. 23살 아내와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하려는데 외동아들인 나와 어머니 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호적에 올라와 있었다. 부인은 2명 더 있었고 자녀도 5명이나 있었다. 그길로 아버지에게 달려가 따져 물으니 ‘입양한 아이들’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입양했다는 자녀 중 첫째 아들이 이듬해 미국에서 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오열하는 것을 보며 직감했다.
‘호적에 적힌 이들은 입양한 자녀가 아니구나. 내 배다른 형제자매다.’
속은 것에 대한 배신감에 앞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엄습했다. 하지만 외동아들로 외롭게 자란 내게 형제자매가 있다니 한편으론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이들을 처음 만난 건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첫째 부인의 자녀 둘이 사는 곳을 수소문해 이들과 만났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내 소식을 접했다며 반갑게 맞아줬다. 이때 우리는 같은 아픔을 가진 형제자매로 서로를 따뜻하게 위로해줬다. 국내에 살던 두 번째 부인의 자녀도 이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이렇듯 ‘서자 중의 서자’인 나는 성경 속 예수의 계보가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모른다. 예수님 역시 순수 혈통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 이방 여인의 후손이 이어져 주님이 태어났다. 나란 사람이 나고 자라 주님의 일꾼으로 쓰이는 지금까지의 삶을 ‘은혜’란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3) “종호는 세계적 성악가로 자랄 수 있는 아이”
미션스쿨 숭실중 입학, 예배 경험, 신앙의 기초 쌓고 음악 소질 발견… 예고에 전액 장학금 스카우트 돼
1977년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합창단에서 솔리스트로 공연 중인 박종호 장로.
중학교에 진학하기 몇 해 전에 중학입시제도가 시험제에서 추첨제로 바뀌었다. 후암동 평지의 용산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정작 내게 배정된 학교는 해방촌 꼭대기의 숭실중학교였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 따라 성당에서 성만찬 몇 번 구경한 게 전부였던 나는 숭실중에서 제대로 된 개신교 예배를 경험했다. 미션스쿨인 숭실중은 일주일에 16번 예배 및 기도모임을 가졌다. 그때는 선생님이 시키니 멋모르고 기도했지만 이런 시간들이 모여 신앙의 기초가 쌓인 것 같다.
숭실중은 음악적 소질을 계발토록 기회를 제공한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합창반이 유명했는데 나는 2학년 때 단원으로 합류했다. 곧 학급 지휘자를 맡았고 학교 ‘80주년 기념 음악회’ 때는 솔리스트로 나섰다. 이듬해엔 동양방송(TBC)이 주최하는 전국 학생음악 콩쿠르에 나가 입상했다.
중학교 진학 전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건 한국방송공사(KBS)가 주최한 ‘누가 누가 잘하나’란 전국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하면서 알았다. 당시 심사평은 이랬다. “KBS가 학생 노래 경연대회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소리가 크고 노래를 멋지게 한 남학생은 처음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노래로 후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음악을 전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는 명문 A예고의 음악부장이 학교로 와 나를 찾았다. TBC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았던 분이었다. 그분은 대뜸 “너를 스카우트하러 왔다. 너희 음악 선생님과 같이 의논해보자”고 말했다. ‘운동선수도 아닌 내게 스카우트 제안이 오다니.’ 심장이 쿵쿵 뛰며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크게 반대했다. 서울대 법대에 가서 검사가 될 애를 노래나 부르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스카우트 제안을 한 교사에게 “나도 교사를 해봤지만 노래 잘해봤자 학교에서 교편 잡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 얘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수 있는 수준이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종호라면 세계적 성악가로 자랄 수 있는 아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내 수긍하고 예고 진학을 허락했다.
당시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그때 성악과 동기 중 유일한 여성 전액장학생이 성악가 조수미였는데 스카우트된 건 아니었다.
화려하게 진학했지만 1979년 친구들과 벌인 시험지 도난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걸려 결국 중도 퇴학당했다. 내가 직접 시험지를 훔치지는 않았다. 당시 교실에서 자며 등사실에 몰래 들어간 친구를 기다렸는데 객기를 부려 주동자라 밝힌 게 화근이었다. 이튿날 바로 퇴학 처분이 났는데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된 건 보결로 대기하는 인원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배문고 야간에 겨우 들어가 고교 과정을 마치고 음대 입시를 준비했다.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입시에 더 치열하고 간절히 매달렸다.
퇴학한 지 33년이 흐른 2012년에야 나는 그간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A예고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이제야 졸업장을 받다니 웃기기도 했다. 퇴학 당시는 수치스런 기억이었지만 그 상처로 대학 입시에 힘을 기울였던 걸 생각하면 아주 아픈 추억은 아닌 것 같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4) 서울대 음대 입학 후 술·담배에 빠져들어
밤에 실컷 술 마시고 냄새 풍기며 주일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 그래도 품어주신 성도들께 감사
박종호 장로가 서울대 재학 당시 학교 강당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 당시 그의 꿈은 오페라의 대가가 되는 것이었다.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한 A예고에서 불명예 퇴학당한 후 나는 복수하듯 대학 입시에 매달렸다. 목표는 서울대 음대였다. 입시를 준비 중이던 1980년 B대에서 주최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대상을 받아 장학생으로 입학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좋은 조건이었지만 ‘A예고 퇴학생’이란 오점을 씻으려면 꼭 서울대에 가야만 한다고 믿어서였다. 서울대에 입학해 보란 듯이 내 실력을 입증하는 게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 나는 열망하던 서울대 음대에 합격했다. 퇴학을 당해 인생이 다 끝난 것 같던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서울대 입학은 어둡고 긴 터널에서 만난 한줄기 빛과 같았다. 희망만 있으면 죽어가는 인생도 언제고 다시 살 수 있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이런 환희도 잠시, 대학 입학 후 나는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다. 매일 담배 두 갑씩 태우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실기시험 결과는 항상 좋았다. 입학 이후 A학점 아래로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2학년 때는 전 학년 중 제일 높은 실기 점수를 받아 삼익악기가 후원하는 1년 장학금을 받았다.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했고 실기 시험 전에는 나름 신경을 쓰긴 했지만 무엇보다 목소리의 힘이 컸다. 나는 학교 안팎에서 ‘목소리는 타고 났다’는 평을 들었다. 입만 벌리면 좋은 소리가 났으니 좋은 결과를 내는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동기들은 줄곧 술·담배를 하면서도 실기에 강한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다.
나는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교회에 다니며 성가대에 서고 있었다. 믿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면 교회에서 ‘성가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상태였지만 생활비는 알아서 충당해야 했던 내게 이만큼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는 없었다. 나는 성가대 지휘 겸 솔리스트로 한 주에 ‘두 탕’을 뛰었다. 밤새도록 디스코텍에서 놀다 이른 오전에 사우나에 가서 몸을 푼 뒤 교회에 갔다. 주일 오전 연습은 참여하지도 않고 예배 직전 가운을 걸치고 성가대에 합류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뺨이 불그스름한 채 성가를 부르는 나를 보고도 교회의 목사님과 권사님, 장로님은 매주 손을 잡아주시며 찬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분명 몸에서 술 냄새가 날 텐데도 ‘어린놈이 주일날 아침부터 술 마셨느냐’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종종 ‘야유회 가게 돈 좀 주세요’라고 말하면 혈기 넘치는 청춘들이 술 사먹을 줄 알면서도 웃으면서 속아주는 분도 계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술에 취해 흥청망청하면서도 매주 성가를 불렀던 이 교회는 서울 종로구 초동교회다. 성도들의 조건 없는 사랑 덕에 나는 대학생활 내내 이 교회 성가대원으로 섬길 수 있었다. 부족한 청년을 믿어주고 기다려준 초동교회는 내게 모교회와 같다. 과연 나라면 술 냄새 풍기며 교회에 드나드는 청년들을 그렇게 품어줄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물을 허물로 보지 않고 사랑으로 덮어준 교회와 성가대 분들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5) 대학 4학년 때 성령체험 ‘날라리 신자’ 벗어나
어머니 위경련에 “귀신아 떠나라” “이젠 안 아프다” 곧바로 병 고쳐…전도자로 살기 위해 신학원 진학
박종호 장로가 1990년대 초반 한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단과 함께 찬양을 하고 있다.
‘날라리 신자’로 살던 내가 회심하게 된 건 1984년 대학 4학년 때의 ‘성령체험’ 덕분이었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유학비용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추가로 알아보다가 경기도의 한 개척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가게 됐다. 다른 교회보다 보수가 높아 무작정 결정한 일이었다.
개척예배 당일 그 교회에 갔더니 전도사가 담임으로 있었다. 그분에게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하루는 교회에서 시각장애인이 눈을 떴다고 했다.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웃긴다, 진짜.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나. 자기들끼리 짜고 하는 걸 모를 줄 알고.’
그러던 어느 날 전도사가 자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그러더니 대뜸 “박 선생님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물론 받지도 않았지만 그게 뭔지도 몰랐다. 하지만 잘못 말했다가 성가대 지휘자 자리가 사라질까봐 성령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전도사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떠나갈 지어다”를 외치더니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구호를 외치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따라하다 보니 전도사가 ‘방언을 받았다’고 말해줬다.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는데 받았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서울의 집까지 서둘러 들어갔는데 도착하니 어머니가 방에 쓰러져 계셨다. 위가 아프다고 하는데 위경련 같았다. ‘자정이 다된 시각에 병원 문이 열렸을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교회에서 본 게 떠올랐다. 어머니께 내 눈을 보라고 한 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마의 배를 아프게 하는 더러운 것들아 떠나가라”고 외쳤다.
“아직도 아프시냐”고 묻자 어머니는 “이젠 안 아프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계속 어머니께 질문했고 어머니는 아프지 않다는 말씀을 반복했다. 그저 흉내만 냈을 뿐인데 병이 고쳐지다니, 예수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성경도 진짜인가.’ 대학 동기나 선배가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전도하면 허무맹랑하다며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일 이후 성경을 읽자 신기하게도 그 내용이 믿어졌다. 천지 창조와 예수의 구속, 부활을 보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100년도 살지 못할 인생에 미련한 투자를 하느니 이 세상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 가치 있는 일은 전도자가 돼 예수를 전하는 것이었다.
영원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로 한 후 이탈리아 유학을 포기했다. 대신 교회 새벽예배에 다니며 선후배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주변에선 ‘종호가 미쳤다’는 소문이 났다. 아랑곳 않고 전도를 하니 성가대에서 같이 봉사했던 후배들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전도자로서 선교만 하고 싶었던 나는 서울대 근처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고려신학원에 진학했다. 성령체험으로 예수를 믿게 됐지만 체계적으로 말씀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였다. 영원한 삶을 위해 투자하고 주님만을 위해 노래하겠다는 ‘영리한’ 선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6) 피아노 반주자에 반해 “하나님, 저 여자 내 겁니다”
부담 컸던 아내 교회 발길 끊어… 금식기도 끝에 만나 “결혼합시다” 34년간 함께한 아내에 고마움
박종호 장로가 1985년 2월 서울 관악구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 아내와 함께한 모습. 결혼식은 이보다 한 주 전에 올렸다.
내 삶의 동반자인 아내 김선아는 1984년 12월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던 경기도의 한 개척교회에서 만났다. 아내는 교회 내 유치원 교사였다. 유치원 교사들은 주일마다 교회로 와 성가대석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내 눈에 띄었다. 피아노 앞에서 반주를 하는데 뚜껑 사이로 비스듬히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외모가 반듯하니 잘생겨 눈에 띄었다. 나는 찬양하다가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 저 여자 내 겁니다.”
찬양을 마친 뒤 설교 시간에 나는 성가대 활동을 함께하는 학교 성악과 후배들에게 쪽지를 돌렸다. ‘성가대 첫줄 왼쪽 세 번째 앉은 여성분께 예배 마치고 나갈 때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능글맞은 후배들은 내 부탁대로 낮고 굵은 목소리로 ‘형수님’이라며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내는 처음 본 남자들이 자신을 형수님으로 부르는 걸 듣고 아연실색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슬쩍 다가가 ‘반갑습니다, 자매님’이라고 악수를 청했다. 엉겁결에 악수를 받는 아내를 보며 또 다시 생각했다. ‘당신은 내 여자’라고.
나중에 아내에게 물어봐 안 것이지만 그 당시엔 나를 보며 무조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100㎏을 훌쩍 넘는 덩치 큰 사내가 돌연 다가왔으니 아무래도 부담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주 예배부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흔들림 없이 아내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 교회 사모가 아내를 괜찮은 여성이라며 만나보라고 추천한 것도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나는 아내와의 인연이 하나님 뜻인가 싶어 3일간 금식하며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아내는 아예 교회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금식이 끝나는 대로 아내에게 연락해 서울 반포의 한 레스토랑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 나오긴 했지만 아내는 땅만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나도 공연히 천장만 바라보며 물만 석 잔을 비웠다. 그러다 아내가 어렵게 입을 뗐다.
“금식하신다면서요.” “네, 김 선생님 때문에 했습니다. 결혼합시다.”
무슨 용기에선지 갑자기 청혼을 한 것이다. 다시 대화가 끊겼다. ‘호감이 있는데 괜찮다면 한번 사귀어보지 않을래’라고 묻는 게 맞는데 그때는 이 말이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식사 후 우리 집으로 같이 갈 것을 제안하자 아내는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얼마 뒤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막무가내였지만 신기하게도 양가 어른은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 당시는 졸업 전이라 결혼비용도 넉넉지 않아 내가 쓰던 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혼수도 화장대 하나가 전부였다.
졸지에 아내는 만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남자와 결혼날짜를 잡았다. 이 역시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한 덩치 하는 내가 금식하며 매달리는 게 안쓰러워 보였다고 했다. 연애기간이 짧다 못해 거의 없이 혼인을 올리게 된 아내에게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우리는 평생 연애하며 살자’고.
올해로 결혼한 지 34년을 향해간다.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미안한 일 천지다. 아내는 꽃 같은 20대에 자녀 3명을 낳고 살림을 꾸렸다. 연애도 못하고 격식 있게 살지 못했어도 내 곁을 지켜준 아내에겐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7) 경연대회서 대상, 전업 복음성가 가수의 길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자” 아내 말에 서울시립합창단 그만두고 솔로앨범 발매하자 폭발적 반응
박종호 장로가 1987년 극동방송이 주최한 제6회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참가곡 ‘내가 영으로’를 부르고 있다.
결혼 후 신학원에 다닐 무렵 성악과 선배로부터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을 소개받았다. 믿을만한 선배의 추천이었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부터 ‘전도단’이라고 하니 이단 종파 같아 거부감이 들어서였다.
계속된 선배의 권유에 못 이겨 아내와 함께 화요모임에 갔다. 도착해 보니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찬양하고 있었다. 예배 방식도 신선했다.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끝났다. 설교는 예수전도단 설립자인 오대원(David Ross) 목사가 했는데 듣다보니 가슴을 울리는 감격이 느껴졌다. 나도 청년들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펑펑 울었다. 사랑하는 하나님만 평생 찬양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화요모임에서 예배하며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꾸고 있을 무렵 첫째가 태어났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을 건사하는 것도 절실한 일이었다. 찬양에 몰두하는 내게 대학 동기들이 서울시립합창단에 원서를 함께 내러 가자고 권했다. 안 간다고 했더니 나 대신 원서를 제출해줬다. 그 덕에 나는 1985년 서울시립합창단원이 될 수 있었다. 예수전도단을 소개해 준 선배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본인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보내줘 레슨도 하게 됐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도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평생 선교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었다.
하루는 대학 동기인 최덕신 전도사가 극동방송 제6회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했다. 최덕신은 대회가 열린 87년에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이미 85년부터 전국을 다니며 찬양사역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86년 예수전도단에서 찬양사역자 최인혁 전도사와 듀엣으로 앨범을 낸 경험이 있었다. ‘한국의 존 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란 콘셉트로 찬양앨범을 제작했는데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하자 최덕신은 나를 위해 ‘내가 영으로’를 작곡했다. 나는 이 곡을 참가곡으로 선택해 대회에 참가했다. 본선은 평소 다니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덕분에 떨리진 않았지만 가사를 잊을까 걱정돼 무대 저편을 바라보며 찬양을 불렀다. 처음 화요모임에 갔을 때 들었던 느낌, ‘하나님이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란 생각이 스쳤다. 곡을 마치자 객석에서 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이 상은 나를 전업 성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최덕신의 권유도 있었지만 아내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음대 지망생 레슨과 서울시립합창단원으로 소득이 안정돼 있는데 당시로서는 개념도 생소한 찬양사역을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자 아내는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자”고 말해줬다.
무슨 용기에서 한 얘기인지 모르겠으나 아내의 이 말을 계기로 모든 일을 그만두고 솔로앨범을 준비했다. 최고의 실력가와 함께 최고의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가진 돈의 10배 정도 예산을 잡고 제작했다. 88년 발매된 1집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클래식하면서도 팝적 요소를 지닌 찬양곡을 내놓자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기독교서점들에 이 앨범을 찾는 요청이 꽤나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런 성원으로 1~2년 뒤엔 일반 음반 매장에서도 내 앨범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8) 美 CCM 뮤지션과 협업한 음반 국내에 반향
첫 앨범 대히트 속 본격 찬양 사역… CCM 적극 받아들인 2·3집도 인기, 복음성가로 음악계 인정 받아 뿌듯
박종호 장로가 1993년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에서 찬양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1988년 내 이름으로 낸 첫 앨범인 ‘살아계신 하나님’이 소위 ‘대박’이 나면서 본격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연 콘서트에는 객석 4000석이 공연장 개방 5분 만에 채워졌다. 자리가 모자라 2층 난간에도 여러 사람이 걸터앉을 정도였다. 오후 7시 공연인데도 대여섯 시간 전부터 공연장 앞에서 진을 치고 대기한 중·고등학생들도 꽤 많았다.
이제 무대 위 조명 아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만개의 눈동자가 나만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떨렸다.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곡이 바뀔 때마다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노래했다. ‘네 찬양을 듣고 있으면 참 행복해지는구나.’ 주님이 이렇게 생각하신다는 마음으로 무대에서 그분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한창 사역을 하면서 미국의 현대기독교음악(CCM)을 접하게 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가수의 음반을 들어보니 우리나라의 복음성가와는 차원이 달랐다. 영화에서 쓰일 법한 서라운드 음향이 지원됐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력해 앨범을 만들었다. 이걸 들으니 마음에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미국처럼 최고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노래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마침 미국 CCM 현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듬해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크리스천 아티스트 세미나’에 나와 찬양사역자 송정미, 가수 하덕규가 초대된 것이다. 국내에 ‘한국컨티넨탈싱어즈’를 설립한 마이크 하크로우의 초청 덕분에 가능했다.
세미나에서는 미국 전역에서 온 6개 CCM 그룹이 40분씩 무대를 꾸미는 공연이 일주일 내내 열렸다. 팝이나 록부터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장르가 무대 위에서 연주됐는데 이들 중에는 그래미상을 받은 그룹도 있었다. 수준 있는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은 나는 2집 ‘나를 받으옵소서’를 이때 만난 미국 CCM 연주자들과 함께 제작했다. 팝스타 마이클 잭슨 등과 작업한 정상급 드러머와 기타, 베이스 연주자들의 연주에 최덕신의 곡이 더해져 2집도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91년 나온 3집 ‘Hymns’도 월트디즈니에서 영화음악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데이비드 클라이즈데일 등 미국의 실력파 연주자 및 합창단, 오케스트라단과 함께 만들었다. 국내에서 듣기 힘든 사운드와 편곡이어서 그런지 교계 안팎에서 후한 평가를 받았다.
3집을 내놓고 나서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어떻게 해야 이런 음향을 만들 수 있느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홍연택 선생과 국립합창단 지휘자 나영수 선생이었다. 복음성가가 다른 전문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으니 뿌듯했다. 하나님께 제일 좋은 것을 드리고자 했을 뿐인데 세상에도 영향력을 끼치니 얼마나 보람찼는지 모른다.
최고의 것을 고집하다보니 어려움도 있었다. 앨범 하나를 만드는 데 억대의 돈이 들어갔다. 앨범을 낼 때마다 아파트 한 채에 버금가는 빚이 생기는 꼴이었다. 하지만 앨범 제작에 있어 양질의 음향은 포기할 수 없었다. 젊은 사역자였던 내게 비용 문제는 언제나 큰 부담과 고민을 안겼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칠 곡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후 앨범들에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9) 찬양을 트로트·로큰롤로 편곡 공연 큰 인기
언론 주목 받아 지상파도 출연, 하지만 스폰서 없어 계속 적자…교회 안팎 무관심에 점차 지쳐가
박종호 장로(왼쪽 세 번째)가 콘서트장에서 나비넥타이와 멜빵바지를 입고 트로트와 로큰롤 등의 장르로 편곡한 찬양을 부르고 있다.
기존 앨범은 테너가 부를 법한 음역대가 높은 곡이 대부분이었다면 4집 ‘abba’에는 누구나 따라 부르기 좋은 곡들을 수록했다. 5집 ‘좁은 길’은 팝적 요소를 가미한 찬양을 담아 발매했다. 대중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박종호는 클래식’이란 인식이 강해서였다. 6집 ‘주를 위해’에선 이전처럼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분위기의 찬양곡을 제작하니 반응이 다시 좋아졌다.
두 앨범에서의 색다른 시도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진 못했지만 이후 앨범과 공연에서는 변화와 파격을 계속 시도했다. 1993년 ‘4,5집 기념 전국 투어 콘서트’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포로 구성된 ‘HIS 찬양팀’과 공연했다. 찬양팀은 공연 전 영어 랩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가사가 정말 은혜로웠다. ‘나는 미국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간 예수를 모르고 살았다. 음악이 좋아 대중가수를 지망했으나 주님을 만난 지금은 하나님만 찬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를 ‘사탄의 음악’으로 매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전국 투어 전 교회에서 찬양집회를 했는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어떻게 사탄의 음악을 하느냐”는 반발이 나온 것이다. 영어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랩이란 음악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빚어진 촌극이었다. 이 일은 일파만파 커져 이후 8개 도시에서 예정된 공연이 취소됐다. 무대에 선 교포 청년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미숙한 대처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당시는 랩을 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교회는 이런 흐름을 배격했다. 드럼도 교회에서 연주하지 못하게 했다. 피아노도 술집에서나 연주되는 악기로 취급받아 중세교회에서 배척당한 역사가 있다. 찬양에 있어 악기나 음악 장르가 중요한 건 아니다. 다루는 사람의 신앙과 가사가 중요한 것이다. 피아노나 힙합에는 죄가 없다. 클래식 음악만 교회에 알맞은 건 아니다. 일부 교회가 편협하게 문화를 대하는 게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났다.
교회가 찬양사역자를 홀대하는 현실도 나를 지치게 했다. 연예인이 간증할 땐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찬양사역자에겐 ‘찬양을 왜 돈 주고 들어야 하느냐’거나 마치 쌈짓돈 주듯 사례하는 교회가 적지 않았다. 그만큼 찬양사역과 문화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CCM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국 오케스트라 편곡 전문가와 협업해 나온 7집 ‘Hymn 2’를 발매한 후 서울 숭의음악당에서 콘서트를 준비했다. 미국처럼 대형공연을 마련해 청년들에게 예수를 온몸으로 찬양하게 하고 싶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가수 하덕규의 공연 연주팀을 동원했다. 찬양을 트로트나 로큰롤로 편곡해 무대에서 춤추며 부르는 파격도 선보였다.
공연은 3일간 5100석이 매진됐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파격 연출로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아 지상파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이 같은 성공에도 공연 때마다 계속 적자가 났다. 스폰서 없이 자비로 콘서트를 준비한 데다 예매하면 비용을 절감해줬는데 대부분의 표가 예매로 팔려서였다. 교회 안팎에 후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런 무관심과 빚의 압박이 반복되자 ‘교계 문화부흥’을 외치던 나도 서서히 지쳐갔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0) 음향장비 들고 전국 동네 교회 순례 ‘사역 2기’ 시작
갈피 못잡고 해외 전도여행 중 미국인 사모가 하나님 뜻 전해줘 서울 아닌 복음 전할 곳 떠올라
박종호 장로 부부가 1997년 국제예수전도단의 미국 하와이 코나 열방대학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당시 모습.
1993년 숭의음악당 콘서트에서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걸 본 후로는 대형 공연에 무게를 두고 사역을 펼쳤다. 대중가요 콘서트보다 재밌는 공연을 기획해 예수를 모르거나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교회 집회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공연장을 찾는 기독 청년들은 점점 늘었지만 교회엔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지극히 성경적인 내용을 담은 포스터라도 십자가나 기독교 등 직접적인 표현이 없으면 교회에 붙이지 못하게 했다. 수준 있는 연주를 선보이고자 빚을 내 고가의 음향기기를 가져가고 실력 있는 반주자와 동행해도 사례는 여전히 박했다. 이윽고 ‘교회에 갈 때마다 상처를 받느니 공연에 집중해 건전하고 수준 있는 기독교 문화를 이끌어 가자’고 다짐했다.
그랬더니 “박종호 집회는 비싸다” “건방지다”라며 비난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하지만 정작 이런 소리를 내는 교회들은 연락한 적도 없던 곳이 대부분이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등 주로 대형공연장에서 대중가수 이상으로 화려한 공연을 했으니 교회에 초청하려면 거금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방지다’는 평가는 꽤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저 대중음악보다 더 멋지게 하나님을 전하고자 빚까지 져가며 최선을 다해 공연을 마련했을 뿐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에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비방하기까지 했다. 대중가요 가수에 비해 성가가수를 제대로 대해주지 않는 교회의 행태도 변함이 없었다.
이런 현실의 벽을 체감하니 더 이상 성가가수를 할 자신이 없어졌다. 아예 찬양사역을 그만둬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탈리아와 미국 유학길을 알아봤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 필요한 건 배움이 아니라 쉼이고 영적 재충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97년 가족과 함께 국제예수전도단의 미국 하와이 코나 열방대학으로 제자훈련을 받으러 떠났다.
하와이에서의 3개월 훈련과 필리핀과 홍콩에서의 2개월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이었다. 훈련을 끝내기 전 한 미국 목회자 부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기도 중 미국인 사모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종호는 마치 큰 호숫가를 서성이며 어떻게 호수를 건널지 고민하는 사람 같다. 하지만 걱정 마라. 당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다.”
나는 이를 듣자마자 아내와 펑펑 울었다. 당시는 찬양사역을 더 해야 할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이들 부부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파악하고 이야기를 해 준 것이었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다시금 국내에서 진행할 찬양사역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서울이 아닌 내 나라 구석구석 찬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호의 성가곡은 알지만 박종호를 직접 본 적은 없는 곳. 군이나 읍 단위의 작은 동네 교회로 음향장비를 들고 찾아가 내가 만난 주님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박종호의 자아는 죽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역 2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1) 더 멋진 목소리로 찬양 위해 美로 유학 떠나
시골교회 집회 후 도시 콘서트 투어…문득 전문적으로 성악 공부 생각, 고음 발성의 한계 극복 원해
박종호 장로가 2010년 서울 종로구 상명대 상명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종호 뮤지컬 콘서트’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미국 하와이에서 5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전국의 읍면 단위에 있는 교회를 찾아다녔다. 해당 교회에서 요청이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원도 인제 양구 속초 태백 강릉 등 평소에 쉽게 갈 수 없는 지역의 교회에 일일이 연락해서 찾아가 찬양집회를 열었다. 대형콘서트에서 사용하던 스피커를 싣고 굽이굽이 시골 교회로 찾아가면 어린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한자리에 모여 나를 반겨줬다. 신앙 간증과 찬양이 어우러진 집회를 끝내면 성도들이 치커리 미역 식혜 등 토산품을 사례로 챙겨줬다. 대형공연장에서 하는 콘서트와는 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남들은 웬 생고생이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 시골교회에서의 찬양집회는 오히려 ‘위로의 시간’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의 한 성결교회로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다. 찬양집회를 마치자 장로인 어르신이 한 집사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모처럼 서울에서 이름이 알려진 손님이 왔다고 명태국을 대접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 11시쯤부터 온 성도가 그곳에 모여 명태국을 먹었다. 그때만큼은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식구(食口)였다. 먼 길 오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대형공연장에서 콘서트를 하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전국 70여곳의 시골 교회로 찬양집회를 다녔다. 찬양을 들으며 행복해 하는 시골 교회 성도를 보며 내 마음 역시 행복으로 차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에 힘입어 1997년 8집 ‘지명’을 발표하고 전국 12개 도시로 콘서트 투어를 했다. 8집 전국 콘서트 때는 댄스팀을 동원해 공연을 꾸몄다.
나는 공연과 집회는 성격이 확연히, 아니 아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가 모여 예배하는 장소지 공연 무대가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는 내가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를 간증한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그야말로 제대로 갖춰지고 연출된 ‘쇼’를 하려고 한다. 콘서트는 돈을 내고 즐기기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집회와 달리 설교나 간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연주와 조명 등을 세심히 연출해 감동과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공연도 결국은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8집 전국 콘서트 역시 대형공연장 위주로 준비했다. 지난 앨범 때처럼 모두 자비로 빚을 져 공연 준비를 하다 보니 예상보다 관객 수가 적으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순천 광주 등 5개 도시를 끝내고 나니 거의 1억원의 손해가 났다. 다행히 나머지 8개 도시에서는 적지 않은 관객이 동원돼 콘서트를 연 이래 처음으로 빚을 만회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앨범과 콘서트를 준비하며 바쁘게 지냈지만 마음 한편에는 성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늘 있었다. 더 유명한 성가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소리의 정점이 어딘지 보고 싶어서였다. 발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가 내고 싶은 소리를 멋있게 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찬양사역을 시작한 지 11년이 지난 99년 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고별 콘서트’를 열었다. “더 멋진 목소리로 80세까지 찬양하겠습니다.” 고별 콘서트에서 내가 관객에게 한 약속이다. 공연을 마무리한 후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기대하며 온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2) 美 유학 중 뇌출혈… 한국 성도들 중보기도로 치유
숨가빴던 삶과 사역 돌아본 계기… 죽음 문턱 다녀온 깨달음으로 대표곡 ‘하나님의 은혜’ 만들어
박종호 장로가 2011년 연미복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하고 ‘더 스토리-아름다운 세상’ 콘서트의 포스터용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매네스 음대 프로페셔널 스터디 과정 입시를 준비키 위해 나는 가족과 함께 미리 현지에 도착해 가창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혈압도 높고 당뇨와 신장병도 있으니 건강에 유의하라”고 조언했다. 건강이 염려된 나는 집 근처 체육관에 나가 매일 운동을 했다. 그랬더니 한 달도 안 돼 모든 게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체중도 10㎏ 정도 줄었다.
2000년 2월 어느 날이었다. 만족스런 소리가 나 마음껏 노래한 뒤 자다가 오전 5시쯤 일어났는데 숨이 깊게 쉬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를 깨워 911을 부르도록 했다. 갑자기 오른쪽 눈이 뒤집어져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뇌졸중 증세였다. 911 구조대가 오자마자 산소 호흡기를 달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미국 와서 꿈을 펼치려 했는데… 내가 서른아홉에 죽는구나.’
앰뷸런스에 누워 병원에 가는 동안 뇌출혈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간의 찬양사역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니 다행히 뇌혈관은 터지지 않았다고 했다. ‘일시적 뇌출혈 증상(TIA)’인데 잠시 뇌에 산소 공급이 안 돼 시신경을 다친 것이라 했다.
마침 내가 병원으로 이동할 때 한국에서 처남이 안부 전화를 했다가 이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한국은 그날이 주일이었다. 온누리교회에 다니던 처남은 ‘박종호가 위독하다’며 교회에 중보기도를 요청했고 성도들은 나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줬다. 이때 성도들의 기도로 지금껏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쾌유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 일을 계기로 내 삶과 사역을 다시금 돌아보게 됐다. ‘지난 14년간 하나님 일 한다고 껄떡대고 다녔다. 죽음 문턱까지 다녀오니 모든 게 다 하나님 은혜였다.’
이때 얻은 깨달음으로 만들어진 곡이 바로 10집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에 삽입돼 널리 알려진 찬양곡 ‘하나님의 은혜’다. 이 곡과 10집에 같이 들어간 또 다른 대표곡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도 이즈음 만들어졌다. 예수전도단에서 만난 30년 지기 찬양사역자 고형원 선교사가 곡을 썼다.
당시 고형원은 캐나다에 있어 팩스로 곡을 받았는데 멜로디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가사가 범상치 않았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태초의 하나님이 수면 위에 가득 임했듯 하나님의 영이 예배자에게 가득 임하는 게 보고 싶다는 게 고형원의 바람이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나는 이 곡을 앨범 타이틀로 정했다.
유학 전 발매한 9집 ‘새벽날개’ 수록곡 ‘물이 바다 덮음 같이’도 고형원의 곡이다. 이 곡 역시 멜로디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란 가사를 보니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곡을 듣고 부르는 모든 이들도 내가 느꼈던 마음에 공감할 것이라 믿는다.
그해 5월 다시 입시를 준비해서 원래 가고자 했던 학교와 과정에 입학해 성악 공부를 이어나갔다. 강의를 들은 지 2~3주가 지나니 벌써 소리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수업을 듣다 돌아보니 대학 동창의 제자뻘 되는 학생 여럿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동기들이 교수가 됐을 나이에 시작한 뒤늦은 유학생활이었지만 좋은 환경에서 다시 배울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3) 美 매네스 음대 졸업 후 한인교회 찾아 찬양
고달프게 사는 한인 성도들 위로… 예수전도단 선교사 고난 듣고 한인교회에 도움 호소해 후원 결실
박종호 장로가 한국예수전도단에 헌금해 지어진 인도 꼴르나랴 고아원에서 원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
“5년만 일찍 학교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종호는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어.”
미국 매네스 음대 루스 팰컨 교수가 수업시간마다 내게 한 말이다. 팰컨 교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를 주로 공연하는 소프라노였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5년이 아니라 50년을 늦게 왔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분임을 나는 안다. 서두르지 않으시지만 결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이러한 믿음 아래 2002년 5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뒤늦은 유학생활을 끝마쳤다.
졸업 직후 하나님은 뉴저지주의 한 교회 무대로 이끄셨다. 미국 유학의 첫 열매를 교회에 드린 셈이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이 큰 축복임을 알았지만 내면으로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기독 문화를, 복음성가 가수를 대중문화 가수보다 얕잡아보는 교회의 시선을 다시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미국에서 이민자로 어렵게 살아가는 한인교회 성도들을 보며 눈 녹듯 사라졌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한인교회 찬양집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회엔 100여명의 성도가 모였는데 대부분 집회 내내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성도 가운데는 미군과 결혼해 이민 온 여성도가 적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국어 찬양을 듣고 고향이 생각나 한없이 울고 계신 것이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한 교회에서 찬양했을 때다. 그곳에도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한 여성, 생계를 위해 때로는 막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이민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교회 목사는 폐암 말기였고 사모는 한인식당에서 일하며 성도들을 섬기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모조리 쓰는 이들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때 ‘고통 받는 주님의 종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어 뇌종양 치료도 못 받고 때때로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한다는 한국예수전도단(YWAM) 소속 선배 선교사 소식은 더욱 찬양사역의 길로 발걸음을 떼게 한 촉진제가 됐다. YWAM은 ‘믿음선교’의 원칙이 있다. 선교사에게 긴요한 것이 있어도 후원요청을 따로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방식이다. 이런 믿음은 매우 귀한 것이지만 뇌종양 환자로 영국 무슬림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 선교사는 내가 사랑하는 선배 선교사로 친한 형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한인업소 주소록을 구입해 미국 50개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전화를 돌렸다. 응답을 한 교회를 찾아 외롭고 고달픈 이민자들을 위해 찬양을 불렀고 마지막엔 이들에게 가난한 선교사를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한인교회 성도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2002년부터 매달 1만2000달러를 YWAM에 보낼 수 있었다. 이 후원금은 현재 YWAM 해외 선교사의 건강검진비로 쓰인다. 일부는 탄자니아와 인도에 고아원과 우물을 세우는 데 쓰였다. 찬양으로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게 보이면서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4) 한국 돌아와 활발히 사역하던 중 간경화 진행
“건전한 기독교 문화 전하자” 몸 생각 않고 방송·공연·집회…담당의사 “간이 거의 다 죽었어”
박종호 장로가 2008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박종호 & Friends’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모습.
찬양집회 후 음반 판매 수익과 성도의 헌금을 십시일반 모아 선교지에 보내는 사역은 2008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됐다. 그해 CBS FM ‘박종호의 가스펠 아워’ 진행을 맡게 돼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가까운 친구 목사의 조언이 계기가 됐다. “이제는 한국이 선교지가 됐다. 초등학교 근처 길에도 음란광고물이 붙는 실정”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교회와 사회에 건전하고 수준 높은 기독교 문화를 전해보자는 마음이 다시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 라디오 진행과 교회 찬양집회, 대형공연장 공연을 병행했다.
교회로 찬양집회를 다니다보니 이전과는 달리 교회 음향과 조명 시설이 많이 향상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전상을 보며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이전 편에서도 말했지만 찬양집회와 콘서트는 아예 성격이 다르다. 교회는 공연하는 곳이라기 보단 순수한 예배의 자리이길 바랐다. 예배에서 중요한 건 예배자의 중심이지, 쇼의 기교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나였지만 정작 교회 규모가 작은 곳은 집회 신청조차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형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여럿 열어 ‘우리처럼 작은 교회에선 초청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적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일단 교회로부터 요청이 들어오면 그곳이 어디든지 찾아갔다. 전 성도가 30명인 서울 관악구의 한 상가 교회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음향 장비와 엔지니어, 매니저 등 공연 스태프 5명과 찬양을 했다. 이 모습을 보고 매니저가 “여기서 세종문화회관 공연처럼 목소리를 내면 어쩌느냐”고 농담 섞인 핀잔을 줬다. 나 역시 “30명이면 어떠냐. 4000명이든 30명이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감동은 동일하다”라고 웃으며 답했다.
찬양집회 말미엔 미국에서처럼 한국예수전도단(YWAM) 선교사를 위해 모금을 요청했다. 한국교회 성도 역시 선교 후원 요청에 뜨겁게 응답했다. 이러한 성도들의 헌신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보낸 규모와 비슷하게 YWAM 후원을 매달 이어갈 수 있었다.
집회 공연 방송 등 사역을 활발히 펼치는 가운데 내 몸에는 이미 간경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2016년 2월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으면서 알게 됐다. 그간 병원에서 지방간 등이 의심된다는 주의는 받았지만 한 번도 질병 진단을 받은 적은 없었다. 소고기 15인분을 먹어도, 커피에 설탕을 밥숟가락으로 넣어먹어도 병이 없었다. ‘하늘이 내려준 건강 체질’이라고 자만했는지 몸 생각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한 게 화근이었다.
의사인 사촌 매형의 조언대로 그분이 속한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3일 뒤 다시 방문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가보니 매형과 담당의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간이 거의 다 죽었어.” 무겁게 입을 뗀 매형의 말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1.5배 정도는 큰 내 간이 간경화로 대부분 굳었다고 했다. 굳지 않는 간에 종양이 번졌는데 이걸 떼내면 간이 남아나질 않는다고도 했다. 수술도 항암치료도 불가해 무조건 간 이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매형을 비롯해 의사 7~8명이 내 앞에서 치료방향을 두고 논의하는 걸 보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수술도 불가능하다니, 이젠 정말 별 도리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5) 딸의 목숨 건 간 이식으로 죽음 문턱서 살아나
암 진단부터 회복할 때까지 한국교회 성도와 단체들은 병원비 모금과 중보기도로 성원
박종호 장로가 간 이식 수술을 앞두고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습.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는 걸 알았지만 나이 쉰 넷에 죽음을 마주하자니 허무감이 밀려왔다. 암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니, 마치 드라마에서나 접하던 이야기 아닌가. 돌연 배를 갈라 간의 암 덩어리를 잘라내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그러다 이내 수술도 항암치료도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간경화와 간암 진단을 받은 뒤 간 이식으로 유명한 종합병원을 찾았다. 아내는 의료진에게 간 이식 수술을 위해 자신의 간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간 이식은 그렇게 진행되는 게 아니라며 수여자뿐 아니라 공여자도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내는 미국에 있는 첫째와 둘째 딸을 불렀다. 워낙 몸무게가 나가다보니 한 사람만 기증해서는 이식할 간이 부족할 수 있어서였다. 검사를 하니 두 딸의 간으로 이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각각 서른 살, 스물일곱 살인 딸 둘은 아빠를 살리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겠다고 나섰다. 만일 수술이 잘못되면 수술 도중이나 이후에 죽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둘째 딸은 얼마나 무섭던지 수술동의서 서명 직전 ‘난 못 하겠다’는 말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언니와 손을 잡고 태연한 척 서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했단다. “하나님, 아빠와 언니, 저까지 수술하면 엄마가 너무 힘드니 언니는 말고 내 간 하나로 다 이식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수술 당일, 둘째 딸은 수술이 시작된 지 12시간이 지나서야 수술실에서 나왔다. 보통 8~10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보다 더 지연된 것이었다. 둘째 딸이 나온 뒤엔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 16시간 동안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중환자실에 옮겨진 나는 누군가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눈앞엔 집도의가 서 있었다. 그는 “수술이 잘 끝났다. 둘째 딸 간이 크고 좋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제야 둘째 딸만 수술대에 오른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목숨을 건 자식의 희생에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한국교회 성도의 기도 및 성원은 암 진단부터 회복 때까지 나를 지켜준 원동력과 같다. ‘박종호가 간암 투병 중인데 수술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국민일보와 극동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교회 내 중보기도 및 병원비 모금 운동이 본격 시작됐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와 배우 고은아 권사, 한국예수전도단 등이 수술비를 보내왔다. 찬양사역자 고형원 전용대 송정미 최인혁 최덕신 하덕규 등이 주축이 돼 수술비를 모금하고 회복을 기도하는 자리도 열렸다. 간 이식 수술 열흘 전 서울 서초구 횃불선교회관에서 열린 ‘박종호의 프렌즈-박종호 다시 노래 부르게 하라’ 집회였다. 이곳에 1000여명이 모여 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이 밖에도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음을 안다. 지금도 국내외 교회로 찬양집회를 나가면 완쾌를 위해 기도해준 분들을 만난다. 중환자실에서 나와 무균실에서 회복 중일 때도 병실 안에 아지랑이가 떠다니는 것을 봤다. 허깨비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족한 종을 중보기도로 살린 한국교회 성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6) 험난한 재활 과정서 ‘종호야 애썼다’ 음성
주님 격려에 벅찬 감동의 눈물, 나지 않았던 목소리도 점차 회복… 목숨뿐 아니라 노래도 허락하셔
박종호 장로(왼쪽 세 번째)가 지난해 2월 서울 여의도침례교회에서 열린 ‘박종호 초심 감사예배’에서 찬양사역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기도하는 모습.
장장 16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했지만 무균실에 입원해 퇴원할 때까지 진통제 주사는 단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이 또한 기적이었다. 반면 내게 간을 떼어준 둘째 딸은 미칠 듯이 아팠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딸의 간이 6개월여 만에 회복돼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가 직장에 복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수술 한 달 뒤 휴대전화를 켜보니 전화기가 계속 울렸다. 그동안 나를 위해 기도한 분들의 연락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었다. 주님이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푸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멋대로 살았던 나를 주님께서 아름답게 쓰시고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을 지금껏 살려내셨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수술 이후엔 혈액과 분비물을 빼내기 위해 1년 동안 간과 복부에 호스를 낀 채 살았다. 또 회복을 위해 매일 하루에 3시간씩 걸어야 했다. 퇴원 이후엔 햇빛에 노출될까 한여름에도 꽁꽁 싸맨 채 매일 산책했다.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라 햇빛을 쐬었다가 피부암에 걸릴 수 있어서였다. 매일 국수 반 그릇에 다량의 약을 먹으며 3시간씩 걷는 생활을 반복하니 일 년 새 40㎏ 가까이 체중이 줄었다. 어떨 땐 너무 힘들고 처지도 비참해 하염없이 울며 걷기도 했다.
그러던 2016년 여름, 마음에 ‘종호야 애썼다’라는 소리가 느껴졌다. 그 순간 무릎관절이 아픈 것도 아닌데 힘이 탁 풀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나님이 수고했다고 격려해준 데 벅찬 감동이 올라와 또다시 눈물이 났다.
수술 직후 6~7개월간 나지 않았던 목소리도 걸으면서 점차 회복됐다. 그간 목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나서 ‘하나님이 목숨만 살려주셨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수술 집도의에게 평생 노래는 하지 못하는 것이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는 성대는 안 건드렸어요. 계속 노래하세요” 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수술한 지 8개월쯤 되자 예배 도중 갑자기 터지듯 목소리가 나왔다. 그 순간 기절할 것 같이 기뻤고 또 눈물이 났다. 목숨뿐 아니라 노래도 허락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 나온 눈물이었다.
수술 10개월여 뒤인 2017년 2월엔 찬양사역자 고형원 송정미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침례교회에서‘초심’을 주제로 회복 감사예배도 드렸다. 이 때 몸무게가 73㎏ 정도였다. 1000여명의 성도들이 변한 내 모습을 보고 놀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치 청년으로 돌아간 듯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목소리가 나오고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고민이 됐다. 주님이 새로이 주신 삶을 허투루 쓸 순 없어서였다. 얼마 동안 기도하니 ‘그냥 하던 거 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오로지 주님을 찬양하며 다시 살려주신 은혜를 간증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한국예수전도단 선교사들을 돕는 것. 그 일을 다시 감당하라는 부름이었다. 이전처럼 여러 생각 않고 주신 마음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지난해 하반기부터 찬양사역을 시작했고 지금껏 국내외 교회를 다니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찬양집회에서 투병 기간 느낀 점을 간증하고 예전 못지않은 선교비를 매달 후원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역경의 열매] 박종호 (17·끝) “찬양하고 기도할 때 아픈 이들이 위로 받기를”
나의 찬양 품어주신 분들께 감사… 하나님은 나를 매순간 지켜주셔 그분 인도대로 어디서든 찬양할 것
박종호 장로가 지난해 4월호 월간 신앙계 표지 촬영 당시 찍은 사진.
수술을 받은 지 2년 7개월이 다 돼간다. 몸이 정상으로 회복된 지금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기대한다.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니 하나님을 황소 끌고 다니듯 한 것 같다. 너무 죄송한 마음뿐이다. 이제는 인도하심대로 어디에서든 찬양하고 간증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가스펠 가수 박종호를 아껴주시고 나의 찬양을 꾸준히 사랑해준 이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런 찬양은 그간 한국 교계에 없었다’며 30여년 전 박종호에게 후한 평가를 내려준 팬들에게 참 감사할 뿐이다. 당시 중고생이던 이들이 이제 40~50대가 돼 지금껏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역시 없었을 것이다. 자아와의 갈등 속에서 치열하게 만들어낸 가스펠 곡들을 사랑으로 품어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돌아온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시고 우리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 어떤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이를 기억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길 바란다.
특별히 암이나 불치의 병으로 투병하는 분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다. 지난해 가을 ‘하나님의 은혜’를 작곡한 사랑하는 후배 작곡가 신상우가 간암 투병 5개월 만에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 이렇듯 주변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꽤 있다. 똑같이 기도를 해도 누구는 낫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는다. 그래도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는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
요양원에서 암 투병 중인 한 집사는 내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를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죽음을 초월해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이분이 진정 승리자란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의 결정권은 우리에게 없지만 그래도 치유의 소망을 품고 기도했으면 한다. 그리고 내 작은 재능으로 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함께 웃고 노래하며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십자가는 본디 치욕스러운 형틀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의미가 반전됐다. 수치스런 십자가에 희망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주님은 이렇듯 의미 없는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한 목사가 수술 후 8개월 만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끼는 만년필은 고장 났다고 버리지 않는다. 고쳐서 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낀다는 이 말에 한없이 울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아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해 매일 눈물을 흘리는 나는 이제 ‘은혜의 바보’가 된 것 같다.
주님이 아끼시는 게 비단 나뿐이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엄청나게 아끼신다.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 형틀에 죽이기까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신다.
나의 바람은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 아픈 이들이 위로받고 치유되는 기적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주님의 은혜로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 그래서 주변인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산 증거’가 되길 소망한다. 혹 치유되지 않더라도 영혼을 책임지는 주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영원토록 임하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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