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 일어나기 2年前에 湖叟公과 여러 賢人들이 對備策 論議
松壕 柳汀의 글을 모은 松壕遺集에 실린 湖叟公의 詩文은 ‘湖叟先生實紀’에 紹介되어 있으나 놀라운 事實은 湖叟公과 士友 몇 몇 분이 壬辰倭亂이 일어나기 2年 前에 倭賊이 侵入해올 것을 豫見하여 變亂의 對備策을 論議하였고, 壬亂때는 모두가 倡義하였다.
特히 冊의 內容에 湖叟公께서 中國의 古事를 引用하시며, 患亂에 對한 對備策을 說破하심의 先見之明에 感歎을 禁할 수 없다.
다음은 松壕遺集에서 關聯內容을 拔萃 移記해 본다.
*7人의 漢詩는 이미 2016년 6월 17日字로 카페에 紹介 되었다.
*註 : o松壕遺集이란? 松壕 柳汀(1537~1597)의 글을 모은 책이며 한국국학진흥원이 국역본을 출간했다. 문화류씨 문중이 소장해 온 필사본 <송호유집> 상·하 2책을 저본(底本)으로 했다. 책 속에는 그가 남긴 시문 138제(題) 168수를 비롯해 1590년 3월20일부터 1597년 9월 22일까지 7년 6개월에 이르는 일기가 수록됐다
1.松壕遺集 日記 中의 壬辰倭亂을 豫見한 對話內容
o是歲七月望金光福,金春龍,鄭三顧,金仁濟,鄭世雅,曺德驥,琴蘭秀七人以遊山之行扶策來訪於松壕精舍出邀留宿時明月上簾羙酒盈樽舉盃屬客夜巳半酒三行金兄元瑞誦罷赤壁賦二篇停盃謂余曰.
*이해(壬辰倭亂이 일어나기 2년 前인 1590年) 7月 15日에 金光福, 金春龍, 鄭三顧, 金仁濟, 鄭世雅, 曺德驥, 琴蘭秀 7人이 山을 遊覽 가는 길에 지팡이를 짚고 松壕精舍로 來訪하였기에 나가 맞이하여 留宿하게 되었다. 이때 밝은 달이 발 위로 떠오르고 좋은 술이 동이에 가득하여 술잔을 들어 손님들에게 勸하였다. 밤이 子正을 넘어 술이 세 차례 돌고 나자 金元瑞 형이 赤壁賦 두 篇을 다 외우더니 술잔을 멈추고 나에게 말하였다.
o羙哉山水之固先大監參判公卜築於玆地者非但仁智之自樂是乃術數之所推而一以叙隱遯之志也一以爲子孫保家廟之計也豈不偉哉豈不盛哉且四方囂說離甚驚惶何闕扵閒人耶琴兄聞之愀然發嘆曰吾軰年皆六十居在各處而數年間若有世變則今日之顔面不可復對其將奈何.
*“아름답도다 山水의 堅固함이여! 先大監 參判公께서 이 땅에 집터를 잡은 것이 단지 仁智를 즐기시려고 했을 뿐 아니라 이는 바로 術數로 推理하신 것 입니다. 한편으로 隱遁의 뜻을 편 것이고, 한편으로는 子孫들이 家廟를 保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計策이 있습니다. 어찌 偉大하고 盛大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四方에서 들리는 雜多한 말이 매우 놀랍지만 閑暇하게 사는 사람에게 무슨 相關이 있겠습니까”
琴兄이 듣고 나서 근심스런 表情으로 “우리 나이가 다 예순이고 각각 다른 곳에 살고 있는데 수년 사이에 世上에 變亂이 있게 된다면 오늘 만난 얼굴을 다시 對할 수 없을 것이니 將次 어찌 해야 하겠는가?” 라고 歎息하니
o鄭兄和叔答曰昔諸葛公隱居草廬卧看荆益之圖已料鼎峙之勢姜太公鼓刀渭濱坐設六百之釣已知豹變之機則當此灾異之時士君子豈無默圖之策耶
*鄭和叔(鄭世雅)兄이 答하였다.“옛날에 諸葛孔明은 草廬에서 隱居하면서 荊州와 益州의 地圖를 누워서 보면서 이미 서로 對峙할 形勢임을 헤아렸고, 姜太公은 渭水가에서 칼을 치고 노래 부르며 소를 잡는 일을 하다가, 앉아서 3千 6百 번 낚시를 던지며 이미 크게 變할 幾微를 알았습니다. 지금 災變이 일어나는 때를 當하여 士君子가 어찌 黙黙히 圖謀하는 計策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註 : o초려(草廬) : 짚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집.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o형주(荊州)와 익주(益州) : 중국의 옛 지명.
o위수(渭水) : 중국 황허강(黃河江)의 큰 지류(支流)
o猶子伯春顧謂.曺兄彦成曰敦詩書設禮樂尙有郤穀之餘謀定社稷安國家自裕陳平之所藴望湏諸兄仰慕宗殻投筆之懷意效終軍請纓之意如何
*조카 伯春이 曺彦成을 돌아보며“詩書를 敦篤히 하고 禮樂을 좋아하면서도 극곡(郤穀) 처럼 여분의 計策이 있어야 하고, 社稷을 공고(鞏固)히 하고 國家를 平安하게 하는 데는 陣平처럼 쌓은 것이 넉넉해야 한니다. 바라건데 諸兄들은 종각(宗慤)이 투필(投筆)한 마음을 우러러 흠모(欽慕)하고 終軍이 청영(請纓)한 뜻을 마침내 본받을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註 : o극곡(郤穀) : 춘수시대 晉니라 대장. 그는 시, 서, 예, 악에 능한 유장(儒將)의 대명사. o진평(陣平) : 전한의 양무사람 소시 때는 가난했지만 한고조를 도아 6가지 계책으로 창업공신이며 한나라 왕실을 안정시켰다. o종각(宗殼)의 투필한 마음 : 중국 남북조 때 장군으로 소년시절에 자신의 포부를 말하면서 장풍을 타고서 만리의 파도를 깨부수고 싶다고 했다. o종군(終軍)이 청영(請纓)한 뜻 : 종군은 한무제 때 사람으로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한 투지를 말함.
o鄭兄和叔曰國以民爲天民以食爲天故趙民特頼邯鄲之實周師自飽餱糧之櫜則調丙之策活民之方先漕轉後器械者豈非兵家之急務乎見今比歲登稔相仍陳積則莫如窖粟鑄兵以備不虞各自銘念如何.
*鄭和叔 兄이 말하였다.“나라는 百姓을 하늘로 여기고 百姓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趙나라 百姓은 한단(邯鄲)이 充實했던 것을 힘입었고, 周나라 軍事는 전대(橐)의 후량(餱糧)으로 스스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軍士를 訓練시킬 計策과 百姓을 살릴 方途는 먼저 漕轉을 한 뒤 器械를 準備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兵家의 急先務가 아니겠습니까. 現在 連이어 豊年이 들어 穀食이 쌓여있으니 穀食을 움에 貯藏하고 兵器를 鑄造하여 萬一의 事態에 對備하도록 해야겠습니다. 各自 銘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註 : o한단(邯鄲) :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도읍지, 진나라 왕릉이 한단을 공격하여 실패하자 “한단은 창고가 충실하여 공격하기 쉽지 않다”라고 했다. o후량(餱糧) :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지니고 다니는 마른 양식 o조전(漕轉)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2.參加者 人的事項
o柳汀(1537~1597) : 관향은 文化, 형조참판 유광선의 子다. 자는 여원汝元, 호 松壕.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적이 쳐들어오자 경주 심원(深源)에서 독서하던 것을 접고, 4월 18일부터 아들(영춘)과 조카(백춘, 득춘)를 데리고 의병장 尹弘鳴·李應春·蔣希春과 함께 항전하다가 1597년 9월 61세로 전사하였다.
o鄭和叔(1535~1612) 본관은 迎日. 자는 和叔, 호는 湖叟. 시호는 剛義, 永川에서 世居하였다. 여러 의병대장들과 합세하여 영천성과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 천거되었으나 황산도찰방을 잠시 지내고 사임한 뒤,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증 병조판서.
o金光福(1529~?) : 자는 景源, 호는 竹圃이다. 우계당 金洵의 아들. 포항시 기계면 출신. 임진왜란 때 부친의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서생포, 등 여러 전투에 참가. 선무원종공신 2등 책록 됨.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됨, 경주 鶴南祠에 제향
o金春龍(1558~?) : 자는 元瑞, 호는 杏坡, 본관은 경주이다. 군자감 부정 應虛의 아들로 경주시 안강읍 출신이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동생 金慶龍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송라도 찰방을 지냈다.
o曺德驥 : 관향은 창녕. 자는 汝售 또는 彦成. 호는 楓溪. 임진왜란 때 창의하다.
o琴蘭秀(1530~1606) : 관향은 봉화, 자는 聞遠, 호는 惺惺齋. 퇴계문인, 생원, 정유재란 때 창의, 봉화 현감 역임, 증좌승지. 文集-惺齋集
3.壬辰倭亂 前의 湖叟公과 여러 賢人들의 憂國衷情 詩 中 湖叟公의 詩
1)단석산(斷石山)에서 지은 詩
김유신장군이 6년간 수도 끝에 용천검을 얻어 절단 한 바위
神翁書授讀兵年 신령이 준 병서를 읽던 때에
貫日孤忠已感天 해를 꿰뚫는 충정 이미 하늘을 감동시켰고
百鍊龍泉能斷石 백 번 단련한 용천검으로 돌을 끊었으니
萬旗圍壘一無全 일만 깃발의 적진이 하나도 온전하지 못 했네
*註 : o용천검(龍泉劍)-고대의 보검으로 김유신이 신령으로부터 받은 칼을 비유한 것이다.
o단석산(斷石山)의 전설 :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에 있으며, 경주의 오악(五嶽)의 하나이다. 일명 月生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김유신이 15세 때에 화랑이 되어 17세에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략에 삼국통일의 뜻을 품고, 이 산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께 고구려, 백제, 말갈을 물리 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4일 만에 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가상히 여겨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神劍)을 주어 고구려, 백제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도하였는데 김유신이 이 칼로 무술연마를 하면서 바위를 베어 산더미같이 쌓였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단석사가 창건되었고 이산도 단석산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신선사(神仙寺)가 있다.
2)치술령(鵄述嶺)에서 望夫石을 보고
박제상의 부인과 세 딸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의 망부석
蠢爾蠻夷在島中 무지몽매한 오랑캐가 섬 속에 있는데
誰能驅海振英風 누가 바다로 달려가 장한 기풍을 떨치랴
忘身殉國能全節 몸을 잊고 나라 위해 절개를 지켰으니
堤上千年一箇雄 박제상은 바로 천년의 영웅이라네
o註 : o치술령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광역시 두동면의 경계선에 있는 765m의 산 고개.
o망부석의 유래 설화.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王弟)를 구해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아니하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서 또 다른 왕제를 구해 보낸 뒤에 일본에서 신라의 신하를 고집하고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되고, 그곳 마을사람들은 부인을 칭송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鵄)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가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그들 모녀는 치술령신모(鵄述嶺神母)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o박제상 : 신라의 충신으로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 도원(挑園). 석당(石堂) 등이다. 박혁거세 9세손이고 영해박씨의 시조이다. 삼국유사에는 눌지마립간 즉위 10년(426)에 왕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다.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던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가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왜왕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참형 당함.
3).佛國寺 影池樓에서
불국사와 석가탑(무영탑)
o佛國寺 影池樓에서 지은 詩
良友不期來 좋은 친구들이 약속한 듯이 와서
登樓笑把盃 누각에 올라 웃으며 술잔을 잡네
群賢次第坐 여러 훌륭한 분들 차례로 앉으니
摠是濟川才 모두 다 냇물을 건널 인재들이네
*註 : o냇물을 건널 인재 : 나라의 재상이나 장수를 비유하는 말이다. 은나라 고종이 부열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내가 만일 큰 내를 건너게 되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겠다”라고 한 말이다.
o영지(影池)의 전설 : 경주시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이다.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불국사 석가탑을 지으려고 불러온 백제 장인 아사달(阿斯達)의 아내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찾아 왔을 때 절의 스님이 탑의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못에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하였다. 아사녀는 날마다 못을 들어다보며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몇 달이 지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아사녀는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빠져 죽었다. 공사를 마친 아사달은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영지로 달려갔으나 아사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슬퍼하던 이사달은 영지 주변에서 바위에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한 뒤 못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석가탑을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영탑이라고 하고 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資料整理> 14世孫 炳極
o‘다음카페’에 게시 되어있다.
*영일정씨삼휴정화수회 2016년 6월 16일 자.
*영일정씨영천화수회 2016년 6월 17일 자.
*삼체계(전문이 게시됨) 2016년 6월 9.16.17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