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848년에 멕시코의 캘리포니아를 빼앗은 직후 그곳에서 금이 발견되어 이른바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휘그당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태평양철도법(Pacific Railroad Acts)을 추진했다. 휘그당은 연방정부 국고에서 철도건설 자금을 지출하고자 했으나 민주당은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미국 헌법은 열거주의여서 연방 정부에게는 헌법에 열거된 권한만 있고 그 외는 각 주의 권한에 속한다. 철도건설 같은 국토개발 사업에 국고를 지출하는 것은 헌법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민주당이 휘그당의 정책에 반대한 이유가 헌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부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휘그당은 북부 노선을 원했다. 당시 연방 세입의 90 퍼센트는 남부에서 들어오는 수입 관세였는데 남부에서 거둔 돈으로 북부에 유리한 사업을 하려는 것에 남부인들이 반대한 것이다. 남부인들은 남부 노선을 원했으나 남부 노선은 노예제의 확대를 촉진할 것이므로 북부인들이 반대했다. 이런 사정으로 대륙횡단철도는 10년 동안 아무 진전이 없었다.
링컨은 1848년 11월의 선거에서 연방하원의원 재선에 실패했으나 정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대륙횡단철도 북부노선을 연방 예산으로 건설하자는 휘그당의 정책을 열심히 지지했다. 링컨은 휘그당과 자신의 열망이 헌법에 의해 가로막힌 것에 분개하고 숱한 연설에서 헌법을 비난했다. 그에게는 연방 헌법만이 아니라 주 헌법도 걸림돌이었다. 주정부의 보조금 지급과 관련된 극심한 부패로 인해 이 무렵에는 대부분의 주들이 주 헌법을 수정하여 납세자의 세금이 국토개발에 지출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남부의 탈퇴로 연방의회에 공화당 의원만 남게 되자 태평양철도법은 헌법 개정도 없이 1862년 5월 6일 하원을 통과하고 6월 20일 상원을 통과했다. 북부연방 의회는 유니언퍼시픽과 센트럴퍼시픽 두 철도회사에 대한 수백만 달러의 보조금 지출을 승인했다. 유니언퍼시픽은 동쪽 구간을 맡고 센트럴퍼시픽은 서쪽 구간을 맡았다. 1862년 12월 2일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그리고 1863년 1월 8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각각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미국 역사에서는 링컨이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여 서부개발을 촉진했다고 입이 마르게 칭송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시기적으로 적절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861년 12월 28일 영국정부와 뉴욕의 은행협회가 북부연방에 대한 대출을 정지하여 링컨은 전비 조달에 허덕이고 있었다. 한편 북군의 거듭된 패배로 1862년이 끝나갈 무렵 군사적 정세는 최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서부에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되는 공사를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서부개발이 전쟁보다 시급할 리 없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사를 연기하는 것이 상식이라 할 것이다. 모종의 흑막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역사에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링컨은 절친한 친구인 그랜빌 닷지를 군대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방군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유니언퍼시픽의 건설 감독을 맡겼다. 닷지는 철도 노선 인근 땅에서 농부들과 인디언들을 무력으로 쫓아냈다. 닷지와 유니언퍼시픽 회사는 보조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철도 노선을 쓸데없이 우회시키고 가장 값싼 자재를 쓰고 철저한 시공보다는 작업 속도를 높이는 데에 주력했다. 부설된 철도 길이에 따라 보조금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닷지는 한 겨울에도 얼음과 눈 위에 철도를 부설했다가 봄에 해빙되면서 공사를 다시 했고 이를 빌미로 보조금을 더 챙겼다. 회사의 간부들도 각자 자재회사를 차리고 부풀린 가격으로 자재를 공급했다. 공화당 의원들과 정부 관리들은 앞 다투어 뇌물을 챙겼다.
남북전쟁이 끝나자마자 1865년 7월 미국은 평원 인디언을 상대로 대대적인 인종말살 전쟁을 개시했다. 평원 인디언에 대한 전쟁은 오로지 철도부설을 위한 것이었다. 남부에서 악명을 떨쳤던 셔먼이 인디언 토벌을 책임졌다. 셔먼은 총사령관 그랜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인디언 도둑떼가 철도 건설을 방해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인디언을 여자와 아이들까지 멸종시키는 전쟁을 열심히 전개할 것입니다.”
셔먼은 휘하 군대에 이렇게 지시했다.
“인디언 촌락을 공격할 때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구분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으면 즉각 죽여라.”
미국은 평원인디언을 대량 살육하고 그들의 땅을 몰수하여 철도회사에 제공했다. 셔먼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 인근에 방대한 토지를 시세의 3분의 1로 매입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인디언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농경지에서 쫓겨난 인디언들은 들소를 사냥해서 식량으로 삼았는데 미국 정부는 인디언을 굶겨 죽일 목적으로 들소를 대량 살육했다. 들소떼가 기차 운행에 방해된다는 이유도 있었다. 4천만 내지 5천만 마리였던 들소는 10년 만인 1875년에는 1천 마리만 남았다.
동서 양쪽에서 전진해온 철도는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토리에서 만나 오마하에서 새크라멘토까지 2,827 km의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 무렵 두 철도회사는 모두 파산에 직면했고 정부는 계속해서 보조금을 쏟아 부었다. 그 뒤 20년 동안 추가로 세 개 노선의 대륙횡단철도가 정부보조금으로 건설되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보조금 지원에 동의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고 관리들도 일상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이런 식의 부패로 미국 경제는 수십 년 동안 질척거렸다.
민주당이라고 해서 청렴했던 것은 아니지만 링컨에서 시작된 정부권력의 확대와 중앙집중으로 부패의 규모는 수십 배 늘어났고 그 중심에 대륙횡단철도가 있었다. ‘로비스트’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율리시즈 S. 그랜트 대통령이다. 그는 워싱턴의 의사당 로비에서 의원들에게 뇌물을 바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로비스트’라고 불렀다.
철도건설 보조금을 둘러싸고 만연한 부패는 1872년에 세상에 드러나 정계를 뒤흔들었다.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로 알려진 부패 사건에는 부통령, 국회의원들, 그랜트 대통령의 측근들이 관련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유니언퍼시픽 철도회사는 파산했고 그랜트 행정부(1869~1877)는 부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떤 산업이든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과 부패가 따른다. 이런 현상의 극단적인 사례는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산업이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결과는 경제적 파탄과 사회 전반의 부패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정부 지원이 없었다면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견해는 옳지 않다. 영국의 철도는 모두 민간 자본으로 건설되었다. 미국의 기업가 제임스 J. 힐은 인디언을 죽이거나 보호지역에 가두는 대신 인디언에게 돈을 지불하고 인디언 지역을 관통하는 권리를 확보해서 정부보조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그레이트 노던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했다. 게다가 그레이트 노던 철도는 효율성과 수익성이 매우 높았다.
철도 공사장의 중국인 노동자들 - 1만 4천명이 투입되어 3천명이 죽었다
대륙횡단철도 풍자 삽화
대륙횡단철도 완공 - 1869. 5. 10
대륙횡단철도 완공식 - 1869. 5. 10 유타주 프로몬토리
대륙횡단철도 - 와이오밍 주
대륙횡단철도를 바라보는 인디언들
학살된 들소 두개골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들소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노선
인디언 영웅 성난말(크레이지 호스) 석상 - 블랙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