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산면 유량리 장흥위씨 3세 효열각
부산면 73-2(용동길 9)번지 부산면 행정복지센터 앞 동산에 위치한다. 회은(悔隱) 위원량 선생이 건립한 목조기와 건물로 면적은 12㎡이며, 담벼락을 축조하고, 외문을 설치하여 안과 밖을 구분하였다.
내부에는 비신이 85㎝ 가량되는 3기의 오석비가 세워져 있다.
①孝子 贈嘉善大夫戶曹參判魏公有權之碑이다. 송재(松齋) 위유권(魏有權 1829~1873)이 아버지 일재(逸齋) 위응조(魏膺祚 1803~1859)와 어머니 영광김씨에게 효행을 하였다.
②孝子 孝陵參奉魏公啓善之碑 이다. 경은(耕隱) 위계선(魏啓善 1858~ 1917)이 아버지 위유권과 어머니 인천이씨에게 효행을 하였다.
③烈女孺人濟州梁氏之碑이다. 위계선의 손부(孫婦) 제주양씨(1903~1921)가 남편 위형환(魏衡煥 1901~1925)에게 행한 열행(烈行)이다.
특히 효열이 한 집에서 세사람이 배출되었고, 제주양씨는 남편이 위독하여 백방으로 애를 써도 완쾌되지 못하자 자기의 남은 생명을 남편에게 이어준다는 뜻으로 열아홉의 젊은 나이에 자결하여 남편의 병이 완쾌되어 장수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내부 벽에는 송재(松齋) 위유권에 대한 기문 편액 2점, 경은(耕隱) 위계선에 대한 기문 편액 2점, 제주양씨에 대한 기문 편액 3점 등 총 7점의 기문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①송재위공효행기는 1929년(己巳) 3월 하순 통훈대부전의금부도사 연안 이백연(李白蓮) 삼가 기록(謹記)하다.
②송재위공실기후는 불정자 윤영구(尹寗求, 1868~1941) 쓰(書)다. 해평인으로 대한제국말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이다.
③경은위공효행기는 통훈대부전의금부도사 연안 이백연(李白蓮) 삼가 기록(謹記)하다. 위희량 쓰(書)다. 위희량(魏禧良 1888~1953)의 호는 계암(溪巖), 장흥읍 행원리 태생이다.
④경은위공실기는 1928년(戊辰) 11월(仲冬) 일 정헌대부의정부찬정 박기양 짓(撰)다.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의 자는 범오(範五), 호는 석운(石雲)이다.
⑤양씨의열각기는 호산 송영대 기록(記)하다. 호산(壺山) 송영대(여산인 宋榮大 1851~?) 자는 계창(季昌)이다.
⑥열부양씨전은 1927년(丁卯) 2월 상순 장흥인 고광선(高光善 1855~?) 선생이 기록(誌)하다. 위희량 쓰(書)다.
⑦열부양씨정각기는 1928년(戊辰) 제천수 민영완(여흥인 閔永琬 ?~1976, 독립운동가) 선생 기록(記)하다. 위희량 쓰(書)다.
3세 효열각 내부에 상량문 기록이 없어 정확한 건축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소장된 기문 편액, 주변에 위계선의 실적비와 위원량의 선행비를 세운 시기 등을 보아 1927년(丁卯)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효열각 옆에는 위계선의 부모에 대한 효행과 빈민을 돕는 선행 등을 기록한 孝陵參奉魏公啓善實蹟碑가 세워져 있다.
비는 1927년(丁卯) 7월(梧秋) 1일(初吉) 장흥인 고광선(高光善 1855~?, 호 : 弦窩) 선생이 기록(誌)하다. 영성인 정창한(丁昌漢 1882~1953, 호 : 一夢, 용산면 인암 태생) 선생이 썼(書)다. 부산면, 장평면, 장동면, 안양면, 회천면 등 5개면에서 협력하여 세(竪)웠다.
앞에는 위원량의 선행을 기록한 前參奉魏公元良善行碑가 세워져 있다.
前성균관박사 청송(靑松) 심선택(沈璿澤) 짓(撰)다. 심선택(1871~ 1943)은 청송인, 호는 긍동(肯東), 장성군 태생, 일제 강점기 관료이다. 1930년(庚午) 4월 일 부산면에서 세(竪)웠다.
---댓글---
부산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위치한 3세 효열각과 실적비, 선행비는 금년 8월 탐방했었습니다..
내부에 출입할 수 있는 시건 장치가 없고, 측면과 후면은 시멘트(하단)와 나무벽(중·상단)으로 전면은 나무 창살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사진촬영시 창살 사이로 두팔을 넣고 뻗어 여간 불편이 따릅니다..
그런데 2018년 3월 부산면장 명의로 연혁을 알 수 있게 정사각형 함석 안내판을 효열각 전면에 세웠습니다. 기록 내용 중, 건립연대가 1927년이 아닌 1727년으로 200년이나 앞당겨져 있습니다. 장흥군청(부산면)의 조속한 시정을 바랍니다.~
회은 선생과 관련해서 제일 궁금한 사항으로는 "천석꾼" 에 대한 내용일거라 생각됩니다..
천석꾼은 선친되신 경은 위계선을 호칭한다고 합니다. 당시 장흥군에서 제일 넓은 농토는 지명대로 장평면 지역 들판입니다. 이 지역을 포함하여 부산면, 장동면 등에 많은 농지(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산물은 3세 효열각 옆에 위치한 위계선 실적비이며, 빈민 구제 등 선행을 실천하여 부산, 장평, 장동, 안양, 회천 등 5개 지역 면에서 협력하여 실적비를 세웠습니다.~
효열각의 가장 큰 과제는 관리 대책입니다. 현 소유는 후손으로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여력이 미치지 못한 실정입니다. 목조기와 건물로 90년이 넘는 세월에서 편액 등 내·외부 여러 시설물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금번 기회에 장흥군의 현장 확인을 통한 후속 관리대책 마련이 절실히 요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