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판에는 왜 가로 세로 19줄씩 그려져 있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는 완전한 정설은 없습니다.
다만 주역의 논리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점만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19곱하기 19는 361인데 이 중 태극에 해당되는 중앙의 한 점을 빼면 360이 됩니다. 360은 지구의 공전주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통 일 년을 의미합니다.
바둑의 네 귀 화점은 춘하추동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아래의 글을 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19줄 바둑판은 언제 탄생했나=논문에 따르면 19줄 바둑판은 중국 수(隋)나라 때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권력자 밑에서 일하던 점술사들이 달력과 별자리 등을 감안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니오카 교수는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면 바둑판이 점을 보는 도구나 달력으로 사용된 것은 틀림없다”며 “당시 바둑판은 17줄이었는데 점술사들이 달력을 바꾸면서 권력자들을 설득, 강권을 동원해 19줄로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현기경’ 같은 많은 중국 고전에는 1년이 360일로 나타나 있다. 바둑판에서 천원(天元)을 빼면 360이 된다. 또 바둑판의 9개 화점은 별을 뜻하며, 4개의 방향은 동서남북을, 4개의 귀는 사계절을 표현하고 있다. 달력의 숫자와 별자리 표식을 위해 바둑판 모양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9줄 바둑판이 출발점인가=바둑판 출토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한(漢)나라 경제(景帝·재위 BC 157~141년) 유적에서 나온 것으로 17줄 바둑판이다. 일본 나라(奈良)의 정창원(正倉院)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판이 있는데 7세기쯤 한국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이 바둑판은 19줄이지만 테두리가 없다. 즉 선이 그려져는 있으나 판의 거의 끝부분이어서 돌을 놓을 수가 없다. 이는 17줄 바둑판이 실제 사용되었다는 증거로, 달력이나 점을 목적으로 테두리 부문에 19줄째 선을 추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정창원에 남아있는 2개의 바둑통에는 알이 각각 300개인데, 이 역시 17줄 바둑판에 걸맞은 것이다. 중국 수나라 때 바둑판에도 테두리가 없어 이 타입이 표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PS : 19줄 바국판이 7세기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면 그 백년 이전에 한국에서 사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19줄 바둑판은 수나라(AD 580-618)에서 시작한 것이라기 보다 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가리산신령]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최초의 바둑판이 9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는 요즘의 체스판 같은 단순한 모양의 게임판이 존재했고, 말레이시아의 전통게임이나 티베트의 방(方) 같은 게임이 기원전 8세기쯤 9줄 바둑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게임의 흥미를 위해 줄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게임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처음부터 복잡한 17, 19줄 게임이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바둑의 발전사=바둑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요·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이다. 이는 중국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세본(世本)’을 근거로 한 것인데 책 속에 바둑관련 내용이 적혀 있다. ‘세본’은 춘추전국시대 것이고, 바둑에 관한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책자이다. 그러나 ‘요순설’은 신화를 근거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근거가 애매하다는 중론. 바둑에 관한 고대문헌에는 내용이 틀렸거나 심지어는 날조된 경우도 있다는 것. 예를 들면 가장 오래된 기보로 여겨지는 손책(孫策)과 여범(呂範)의 대국(AD 200년쯤)도 후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단순히 시중에 떠도는 소문만을 근거로 하거나 신화 정도에 불과한 것을 마치 있는 실제 사실처럼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BC 551~479년) 시대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바둑에 관한 확실한 언급이 있어 이 시기에 바둑이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19줄 바둑판은 마지막 형태일까=아마도 19줄 바둑판은 더 이상 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애호하고 있으며 많은 프로기사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19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게임의 측면에서 보면 바둑은 구성이 잘 되어 있다. 설령 우연과 강권으로 진화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19줄 바둑은 최종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원래 바둑판의 중심은 《역경(易經)》에서 말하는 ‘태극’으로 361호 가운데 천원을 빼면 360이 되며, 30일 1개월을 12개월로 곱한 수인 360일과 일치하고, 4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며, 화점이 제4선과 제4선의 교차점에 있는 것도 4계절에 비겨서 설정한 것이다. 4귀의 화점은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상징한다.'
다음은 논자들의 의견입니다.
- 오청원 기성(棋聖)의 수필에 기술된 내용을 인용하면 ... 요제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인(仙人) 포이(蒲伊)에게 제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어딘가 후미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순(舜)을 암시적으로 지목하면서 두 딸과 함께 순에게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도록 권하였다. 아울러 요제의 아들 단주의 신상에 대하여도 걱정하면서 그의 성품에 적합한 혁평, 즉 바둑을 가르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요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선인 포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물의 수는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반면(바둑판 위)에는 361路의 눈이 있고 1이라는 수의 근원은 天元(가운데 점)으로부터 발하며 사방을 제압한다. 360이라는 수는 하늘이 일회전하는 일수를 표현하며 네 귀로 나누어지는 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한다. 외주(外周)의 합계가 72路인 것은 1년을 72절후로 구분하는 것과 같으며 360개의 바둑알이 흑백 반반인 것은 음과 양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승우 바둑이야기』, 2000.2. )
- 고대 문헌인 적정록(適情錄)에 실려 있는 삼원기례국(三元起例局)을 보면 바둑판이 옛날에 무엇에 쓰였는지를 짐작케 하여준다. 또한 여기서 三元은 天, 地, 人이고 바둑판의 중앙을 天元이라하는 이유도 여기서 유래한다.
( 바둑 연구가 양동환氏 의견 )
바둑판은 19X19입니다. 19X19는 361이죠.
361=360+1 가운데 천원을 제외하고 360개의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운데 한 점은 중심(지구, 태양, 우주)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360은 전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죠.
지구가 공전하는데 365.25일이 걸리구요. 이건 지구의 모양이 완전한 구체가 아니기 때문에 365.25일이라고 하구요. 지구의 모양이 완전한 구체일 때는 360일이 공전주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원 28수의 천문에 응하는 점이 바둑판에 있기도 합니다.
[수(隋, A.D.581 ~ A.D.618)]
- 전쟁과 침략을 좋아하던 황제들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통일제국
서기 581년, 북조의 대승상인 수왕(隋王) 양견(楊堅)은 주 정제(周靜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隋)’라 개칭하니, 이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다. 그는 정권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전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일으켜, 589년에 남방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정권인 진(陣)나라를 공격하여 남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위진 이래 근 4백 년간의 분열 국면은 종결되었다.
수 양제(隋煬帝)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경(東京)을 건설하고, 운하를 파고, 대대적으로 양자강 남북 경제 문화의 교류를 진행하여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였다. 그 밖에도 수 문제가 시작한 제도는 수 양제 시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과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수나라 초기의 제도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제도로 넘어가는 하나의 필요한 과도기가 되어 주었다. 수 양제는 또한 서역 및 동남아시아 인근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수 양제 말년에 수나라의 영토는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나라는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쌓였던 재화가 급속히 소진되고, 수 문제 때에 다져 놓았던 정국 또한 수 양제 시기에 급박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수 양제가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일삼고, 그의 짧은 일생 동안 세 번이나 강남의 도시들을 순행하였으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고, 거국적으로 큰 공사를 일으켰으며, 젊은이들을 모두 병사로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논과 밭이 황폐해지니 이로서 수나라 전역에서 수나라 정권에 반항하는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 더하여 수나라 지배계급의 내부 분열은 수나라의 통치를 신속하게 와해시켰다.
급기야 618년, 이연(李淵)은 수 공제(隋恭帝) 양유(陽侑)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어 당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唐, A.D.618 ~ A.D.907)]
- 이태백의 시와 양귀비의 미모로 상징되는 중국 역사 최고의 전성기
당나라는 중국 봉건 사회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로, 건국 초기에 사회의 안정과 정치적 개명을 몹시 중시하였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에는 오곡이 풍성하고 백성이 안락한 생활을 누린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를 이루었으며, 현종(玄宗) 황제 이융기(李隆基)의 치세에는 국력이 몹시 강성하여 역사에서는 이를 ‘개원의 성세’(開元盛世)라고 칭한다.
정치상에 있어서 당은 위진(魏晋) 이래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진일보 개선된 과거제를 시행하여 양호하고도 질서 있는 정부 관리 시스템을 건립하였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세금제도에 있어 균전제(均田制)를 추진하고 조용조(租庸調)를 실행하며, 황무지의 개간과 농업 및 잠업(蠶業 - 누에치기)을 장려하여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었다. 당의 문화와 과학 사업 역시 공전의 번영을 이루었는데, 특히 시가(詩歌) 발전에 있어서는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으로 발전하였다.
당나라 시대는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주변 인접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당의 번영과 강성한 배후에는 심각한 내우외환이 잠복하고 있었으니, 이융기 집정 후기의 당조는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755년 폭발한 장장 8년간의 ‘안사(安史 -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전부 소진시켰으며 당나라는 이로써 재기불능이 되었다. 후에 비록 헌종(憲宗)의 중흥이 있었지만 구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875년에 폭발한 ‘황소(黃巢)의 반란’은 당나라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당은 이로써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벌들에 의한 혼란과 전쟁 속에 빠져버려 이름만 존재하는 멸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907년, 주온(朱溫)은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압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만든 다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니, 이로써 당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오대십국(五代十國, A.D. 907 ~ 960)]
― 안록산의 난에 의한 당나라의 멸망이후 송나라 건국 때까지의 혼란의 시대.
당나라 시대 말기, 중국 대륙 각지에 형성된 군벌호족 세력은 그 기세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서기 907년, 당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은 당 애제(唐哀帝)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후량(後粱)을 건립하니 이로서 중국은 오대십국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907년에서 960년까지 중국 황하 유역에는 후량,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다섯 왕조가 연이어 출현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五代)’라 칭한다. 이와 동시에 남방에서도 전촉(前蜀), 오(吳),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등 아홉 개의 군벌호족들이 할거(割據 - 지역을 서로 나누어 차지함)하여 수립한 정권이 출현하였으며, 여이게 산서 지역에 건립한 북한(北漢)을 합쳐 역사상 ‘십국(十國)’이라 칭한다.
오대십국은 중국이 위진남북조(위진남북조) 이후 다시 분열과 혼란에 빠진 시대였다.
각지의 백성들은 분열과 할거로 인해 초래된 여러 재난에 저항하였으며, 또한 중국인들의 힘을 모아 거란족의 침략에 따른 약탈을 막기 위한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대 후기에 이르러 통일의 추세는 날로 명확해졌다. 이에 979년에 이르러, 북송이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일하니 오대십국의 할거는 이로서 종말을 고했다.
오대십국 시대에 북방은 전쟁과 난리가 빈번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운데 반하여, 남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 전체의 경제중심은 황하 유역에서 장강(양쯔강) 유역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농업, 수공업, 그리고 상업 등이 비교적 발달하였고 해상무역 또한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