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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13-17절.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약설교
1. 오늘 말씀은 성경의 전체의 요절이라고 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들어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 같이 한 번 외워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2. 오늘 요절에 나오는 <이처럼 사랑하사>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은, 그 앞 절에서 말씀한 대로, 모세가 놋 뱀을 장대에 매단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잘 알기 위해서, <이처럼>이란 말은 두 팔을 벌리고,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3. 보통 인간은 로마서 5장 7-8절 말씀처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나와 무관한 사람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죽는 사람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평생 희생하신 부모님이나 형제나 친척을 위해서는 혹 대신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자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 나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 나라를 볼 때, 죄 많은 인간들이 얼마나 보잘것없이 보이셨겠습니까?
(1) 비행기를 타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를 달리다가 힘차게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땅에 있는 사람이나 집들이 잘 보이다가도, 더 높이 올라가면, 사람은 잘 안 보이고, 집들도 조그맣게 보이고, 산과 강들만 보입니다.
그러다가, 더욱 높이 올라가면, 강들도 안 보이고 산과 바다나 구름만 보입니다.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2) 이처럼, 하늘나라에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아예 잘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할렐루야!
(3)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자체가 기적이고 크신 사랑입니다.
요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년)의 <걸리버 여행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풍랑에 배가 파선되어, 어느 섬나라에 표류했습니다.
그런데, 그 섬나라는 키가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섬나라의 소인들은 자기 섬나라의 바닷가에 떠 내려 온 거인을 보고, 저 먼 별나라에서 온 괴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서,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깬 거인은 묶어 놓은 밧줄을 모두 풀어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소인 나라 마을로 걸어갑니다.
소인들은 괴물 같은 거인이 자기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 지르고 활을 쏘고 야단들입니다.
거인은 작은 벌레 같은 소인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소인 나라 사람들이 쌓아놓은 음식을 꺼내서 먹었습니다.
소인들은 이 거인이 먹는 음식량을 보고 놀랍니다.
조금 배가 부른 거인이 이제는 외로워서 소인을 사랑하고 싶어서,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놓아도,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하고, 도무지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이 거인이 한번 말을 하면, 소인들에게는 큰 천둥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도무지 서로 대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
(4) 그렇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과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인간 나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자체가 기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5) 거인이 소인 나라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소인들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거인이 소인 나라의 강물을 걸어서 건너면, 소인들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거인이 소인 나라의 산을 손으로 움켜쥐고 옮기면, 소인들은 <기적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불치병을 고치시고, 물 위로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면,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는, “이 책에 기적들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지만, 하늘나라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는 독특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 제가 어릴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버스도 다니지 않고, 전기도 없는 시골에서, 기차 타고 서울에 갔다 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는데, 서울역에는 <다이얼 미싱> 네온사인이 돌아가고 있었고, 산업박람회가 처음 열려서 <럭키 치약>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이라고 해봤자 4대문 안뿐이었고, 4대문 밖에는 농사짓고, 호박넝쿨이 주렁주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도 안 다닌 어린이였을 때는, 동네에서 서울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남대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서울의 남대문에 문턱이 있네 없네 하면서,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다.
(2) <여러분 남대문에 문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지요, 없지요.
모두들 다 잘 아시군요.
(3) 그러면, 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미국에서 오셨습니까, 이스라엘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미국이요? 이스라엘이요?
네, 하늘나라에서 오셨지요.
(4) 오늘 1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인자>라는 사실입니다.
(5)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나라도 아시고, 세상 나라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셨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는 길을 잘 안내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늘나라에 가는 유일한 길이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6.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세상 나라에서 왕위에 올라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나라에서 섬김을 받고, 왕위에 오르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죄인들 대신에 대속물로 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장대에 매단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늘 14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1) 중국에서 황제는 <천자>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황제>를 천자라고 합니다.
로마에서도, <황제>를 천자라고 했습니다.
(2) 일본 남자들은 자신이 천자의 백성으로서, 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신의 아들인 황제를 위해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 남자들은 자기 신과 황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민족입니다.
(3)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황제의 지위에 올라가서 대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4)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은 1400여년 전에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장대에 매달은 사건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지날 때, 불뱀에게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놋 뱀을 바라본 자마다 죽을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본 사람은 상처가 낫고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놋 뱀을 쳐다보라는 말을 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날아다니는 독사인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뱀 소리도 듣기 싫고, 뱀을 쳐다보라는 말은 더욱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고 살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당시에 가장 혐오스러운 십자가 사형을 당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 구원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5)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자, 사람들은 모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을 모르고, 그토록 잔인하게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먹으로 예수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머리에 무서운 가시관을 눌러 씌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고통하고 계신 예수님께 머리를 흔들어 대면서 조롱했습니다.
(6) 그러나, 이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토록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사람들은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어찌 할꼬....>
사도행전 2:36-37.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7)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 대신 희생시키신 것은 얼마나 마음 아픈 희생이고,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모릅니다.
<예화>
18층에 사는 어느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가 돈과 보석을 훔쳐 가고, 가보로 내려온 도자기를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저 밑에서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밤중에 들렸습니다.
18층에서 창 너머로 줄을 타고 내려가던 강도가 5층에 걸려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면서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저씨는 그 강도가 미워서, 밧줄을 더 내려주지 않고, 못 들은 체하였습니다.
얼마 견디다 못한 강도는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내려가서 보니 그 강도는 다름 아닌, 자기 집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집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고, 아이고, 내가 자식을 죽였다, 이 죽을 놈의 애비가 자식을 죽였다, 이 죽을 년이 내 아들을 죽였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울었습니다.
(8) 대나무 고을 담양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대나무로 찔러 중태를 입혔습니다.
아들이 학교 친구랑 대밭에 들어가서 죽순을 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을 먹고서, 대나무 밭 바깥에서 대밭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밭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니까, 아버지는 죽순 도둑이 들어온 줄 알고, 긴 대나무 장대로 대밭 안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찔렀습니다.
그러자, 대밭 안에 있던 사람이 하마터면 옆구리를 찔려서 중상을 입을 뻔했습니다.
그 상처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대밭 주인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자기가 실수로 외아들을 죽일 뻔했다고 얼마나 울며불며 후회했습니다.
(9) 조선 선조임금 때, 김익순(1764-1812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익순은 홍경래 난 때, <방어사> 직을 맡았었는데, 역적에게 항복하고서도 충신 <정가산>의 훈장을 가로챘습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서, 그 가정은 몰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조정에서는 과거 시험을 보는데, 시제가 ‘정가산의 충절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상을 탄핵하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병헌(1807-1863년)라는 사람이 그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했습니다.
김병헌은 있는 글 솜씨를 다 해서, 김익순의 죄상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장원 급제를 하고 돌아온 김병헌이 홀로 계신 어머니께 장원급제 했음을 알리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에게 시제가 무엇이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김병헌은 <역적 김익순 타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방바닥을 치면서 대성통곡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아들은 어머니께 <어인 영문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수십 년간 숨겨온 가정 비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김익순이라는 분이 김병헌의 친할아버지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병헌은 그 길로 집을 나가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방랑 시인 김삿갓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할아버지를 두 번 죽인 죄인이라는 아픈 마음을 안고,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김삿갓은 57세로 화순 동복에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김병헌이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가슴 뭉클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돌아가신 주님께 한평생 감사하면서,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7.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게 하사, 화목케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2) 사랑의 주도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3)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믿는 자마다>란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 유무식의 차별이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4)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믿는 것은 곧 영접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는, ‘믿는 것’은 마음으로 영접하고, 교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5)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한히 오래 사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죄 많고, 질병 많고, 마귀가 있는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은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생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살다가 천국에 가서 영생 복락을 누립니다.
영생이란 죄와 질병과 마귀가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3:36.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한복음 5:24.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영생이므로,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날마다 영생을 누리며 삽니다.
요한일서 5: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생명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영생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천국 기업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영생을 맛보며 사는 것은, 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6) 사람이 천국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은, <죄의 사면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죄를 사면시켜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면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엄격히 말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면장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지옥에 갑니다.
(7) 예화
미국 오하이오 주에 조셉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교회를 착실하게 다니다가, 하루는 친구의 꾀임에 빠져서, 도적질하는데 망을 보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 가난한 친구는 아이를 낳고 아내를 치료할 돈이 없어서, 직장 금고를 털었습니다.
조셉은 친구에게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그만 경비원에게 놀란 친구가 경비원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친구도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조셉은 붙들렸습니다.
조셉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주정부 검찰청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셉이 워낙 교회에 충성했던 청년이라서, 교회와 마을에서 주지사에게 살려달라고 탄원서를 냈습니다.
당시 주지사 <어거스틴>은 독립기념일을 기해서, 조셉을 사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가지고, 감옥으로 찾아갔습니다.
원래 사형수의 면회는 목사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지사는 목사 까운을 입고, 죄수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죄수 조셉은 주지사를 보자마자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목사 나부랭이의 설교는 이제 더 이상 듣기 싫으니, 나가라!>
그래도, 주지사는 <어이 청년, 내 말 한마디만 들어주게나>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조셉은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목사 까운을 입은 주지사를 쫓아냈습습니다.
그러자 주지사는 ‘그러면 이 사면장이라도 받게나’라고 사면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조셉은 그 사면장도 전도지인 줄 알고,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지사는 사면장을 가지고 갔으나,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사면장을 전달하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지사가 떠난 후에 간수가 급하게 조셉을 찾아왔습니다.
<야 조셉, 너 무슨 짓을 한 것이야! 방금 주지사께서 너의 사면장을 가지고, 오셨는데, 왜 쫓아 보냈어?>
그 말을 들은 조셉은 땅을 치면서, 후회를 했습니다.
이제, 사형 집행 날이 되었습니다.
사형장에서, 조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형을 당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사면장을 가지고 오신 주지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지옥에 갈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면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부디 사면장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8. 이처럼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고,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English Standard Version: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in order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God did not send the Son into the world to judge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οὐ γὰρ ἀπέστειλεν ὁ Θεὸς τὸν Υἱὸ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ἵνα κρίνῃ τὸν κόσμον,
not for sent the God the Son into the world that He might judge the world
‘보내신’이란 동사(ἀπέστειλεν)는 부정과거로서(sent)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단호하게 세상에 보내신 역사적인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심판하려’란 동사(κρίνῃ)는 부정과거 가정법(He might judge)으로서 ‘심판하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ἀλλ’ ἵνα σωθῇ ὁ κόσμος δι’ αὐτοῦ.
but that might be saved the world through Him
‘구원을 받게’란 동사(σωθῇ)도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 동사로서(might be saved)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면, 기회가 없습니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