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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21코스 북한산 도봉 코스는 깊은 역사의 울림이 있는 길이라는 테마를 가진 만큼 역사문화유적지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어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왕 된 연산군의 묘와 세종대왕의 둘째딸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공주의 묘가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왕실묘역뿐 아니라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어 온 원당 샘과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수령 870년에 달하는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서 우리의 삶과 이야기를 알차게 나눌 수 있는 역사문화길이다.
서울둘레길에서 만나는 도봉구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산이자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의 이름을 따서 도봉구라 하였다.
도봉구의 서남부는 강북구와 경계를 형성하는 우이천이 흐르고, 북부는 경기도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도봉구의 동쪽은 낮은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강원도 원산에서 시작하여 서울까지 이어지는 추가령 구조곡의 남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구조곡의 골짜기를 따라 중랑천이 흐르고 있으며, 중랑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저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불암산(508m)과 수락산(637.7m) 등이 있다.
북한산우이역을 들머리로 21코스 북한산 도봉코스는 우이동 고개 왕실묘역길 아치 파고라 우측에 있는 27번째 스탬프를 찍고 시작한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 서울둘레길 2.0 마지막 코스를 시작한다.
오르막길이 끝나면서 좌측으로 우이암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쉼터가 있지만 우측으로 이어간다. 곧바로 좌측으로 내리막 계단길이다.
정경부인 전주 최씨의 묘지가 잠시 발걸음을 붙잡는다. 정경부인이라면 꽤 높은 직위인데 후손들이 버림받은 묘가 을씨년스럽다. 정경부인은 남편의 고신에 따라 주어지며, 문무관의 처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만인의 존경을 받던 지위였다 한다.
정1품의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내에게는 '정경부인'이란 봉작을 주었고 그 외 남편의 직위에 따라 부부인, 정부인, 숙부인 따위의 품계가 있다고 한다. 정1품(正一品)은 18개의 품계에서 제일 높은 등급이며 오늘날의 총리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길을 내려서면서 우측으로 원당마을로 들어선다. 연산군묘 재실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난폭했던 왕 그리고 가장 유명한 왕 연산군, 강화나들길에서 만나는 연산군 유배지가 생각난다.
원당샘 공원에서 만나는 원당샘이다. 600여 년 전 파평윤 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하였다고 하며,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불리고 수 백 년 동안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2009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아 2011년 지하수를 연결하여 원당샘이 마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복원하였다고 한다.
원당샘 옆으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수령 870년에 달하는 방학동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주를 볼 수 가 있다. 유주(乳柱)란 ‘젖기둥’이라는 뜻으로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은행나무 유주는 성균관대학교 명륜당에 있는 서울 문묘 은행나무와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있는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가 있다. 고창 선운산의 은행나무 유주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은행나무 유주와 별 차이가 없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은행나무에 유주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줄기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자가 치유의 방법으로 나무 진액이 흘러나와 만들어졌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연산군 묘역으로 올라선다.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재위 1494∼1506)과 왕비인 거창군 부인 신씨 등이 안장된 연산군 묘역이다.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다.
묘역은 대군의 예우로 장례하여 곡장, 묘비, 상석, 장명등, 향로석, 문석인, 제실 등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과 무석인, 석마, 석양 등은 없다.
연산군 묘역 아래에 의정궁주 조 씨 묘가 있다. 1422년 변계량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의 빈을 뽑기로 하여, 2월 28일 의정궁주 조 씨가 간택되었으나 태종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5월 10일 태종이 죽자, 조 씨는 입궁하여 9월 25일 의정궁주가 되었다. 1453년 큰오빠 조순생이 계유정난 당시 안평 대군의 일파로 몰려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다. 궁주 조 씨 또한 1454년 세상을 떠났다. 묘역이 위치한 땅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었는데,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 대군이 맡도록 하여 이곳에 궁주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하단에 묘가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묘다. 연산군의 장녀 휘순공주와 사위구문경의 묘이다.
연산군 묘역을 뒤로 방학로를 건너서면서 만나는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다. 정의공주는 조선 4대 국왕 세종의 차녀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지장보살 본원경"을 간행하였다.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에 능하였다.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과 토착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양효공 안맹담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가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정의 공주와 혼인, 부마가 되어 죽성군에 봉해지고, 1432년(세종 14)에 연창군에 봉해졌다. 평소 초서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에도 통달하였다고 할 정도로 풍류에 밝았다고 한다.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사천목씨 재실이 보인다. 사천 목씨는 처음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온 학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나 목충(睦沖)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목효기를 시조로 한다.
고려 시대에는 목충, 목인길, 목자안 등이 왜구 평정에 공을 세웠다.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선조 대에 대사간·도승지를 지낸 목첨, 효종 대 지중추부사를 지낸 목서흠,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낸 목장흠, 예조참의를 지낸 목대흠, 숙종 대 좌의정을 지낸 목내선 등이 고관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사천 목씨 묘역에는 한성 판윤 목진공, 목서흠과 두 손자 목임기, 목임일, 목임일의 아들 목천현의 묘 및 6기의 비석이 있다. 서울특별시문화재 기념물 제2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이 마중 나온다. 방학동이라는 이름은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방아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방학리로 고쳐지면서 지금의 방학동이 되었다.
멧돼지 방어용 철책문은 닫쳐있다. 통과 후에는 닫아줘야 한다. 문기둥이 보이고 싱그러운 숲길은 봄이면 철쭉꽃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버려진 듯한 포도밭을 통과한다.
방학동길은 다른 구간과는 달리 오르내림이 심하다. 지루하다 싶을 때 바가지약수터에 내려선다. 바가지약수터에서의 물 한모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오르막길이 끝이 날 것 같던 방학동길이 내리막길로 바뀌고 이어 서울둘레길 최고의 명소 중 하나로 꼽히는 쌍둥이전망대를 오른다. 쌍둥이전망대는 두 개의 기둥을 연결한 특이한 생김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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