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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7월 12일 일요일 설악산
사니조은 님과 자차 이용
산행 코스 : 오색에 주차하고 산악회 버스 이용 소공원으로 이동 – 천불동 계곡 – 무너미고개 –
소청 – 중청 – 대청봉 – 오색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226540
거리 19.5 km
소요 시간 12h 58m 41s
이동 시간 10h 5m 6s
휴식 시간 2h 53m 35s
평균 속도 1.9 km/h
최고점 1,737 m
총 획득고도 1,211 m
난이도 힘듦
금요무박 설악산 산행이 폭우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토요일의 날씨를 보건데 국립공원의 입산통제가 괜히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일요일 산행지로 설악산을 택했다. 나의 산친구 사니조은 님에게 연락하니 금방 호응이 온다. 사니조은 님은 설악산을 누구보다 더 좋아하여 스스로 설산(雪山)이라고 부른다.
11시에 우리 집으로 차를 갖고 와서 주차하고 내 차로 가자는 말에 낮술을 해서 안된다고 한 말을 내가 잘못 알아들었다. 11시 조금 넘어 전화가 와서 도착했다기에 어디냐고 했더니 복정역이라고 한다.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알아차리고 서로 이동시간을 줄이는 차원에서 잠실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색에서 소공원으로
잠실역에서 곧바로 올림픽 대로로 빠져나와 서울 – 양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에서 다시 국도로 갈아탄다. 늦은 시간에도 적지 않은 차들이 고속도로를 밝힌다. 설악산 도착하기 전 마지막 휴게소인 설악 휴게소에 들러 김밥과 물을 샀다. 아직 산악회 버스들이 도착하지 않은 휴게소는 한적하다. 산악회 버스가 들어서면 정신없이 분주해질 터이니 지금 이 시간은 폭풍전야와 같은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오색으로 넘어가 이제는 문을 닫아 을씨년스럽기만 한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종일 주차하면 주차료가 5,000 원이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허가가 났다면 지금쯤 시장통처럼 바쁘게 돌아갈텐데 환경 단체와 여론에 의해 무산되었으니 오색리 주민들도 다른 방도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겠다. 점봉산 산행만 허용된다면 오색리 사람들은 팬션이나 식당을 잘 운영하여 앞으로 오래도록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터이다.
남설악 탐방 안내소 (오색 탐방소) 앞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 새벽 3시가 임박하자 산악회 버스가 하나 둘 미끌어져 들어온다. 대부분의 설악산 탐방객들은 한계령이나 이 곳 오색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여기서 설악동으로 가는 버스는 거의 텅 비어서 간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산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소공원까지 태워 달라고 하니 서슴없이 차에 타라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우리가 그 산악회 회원인줄 착각했었다. 대구에서 온 KJ 산악회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소공원으로 이동하여 3시 40분 천천히 산행을 시작한다.
소공원에서 천불동으로
오늘 우리가 가는 코스는 무박 산행 코스 중 아마도 제일 쉬운 길일 터이다. 천불동 계곡을 거쳐 대청봉을 넘어 오색으로 내려가는 코스다. 1998년이던가? 내가 이전 직장에 다닐 때 회사에서 속초로 야유회를 갔었다. 밤새 먹고 마시고 화투와 카드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틈에 잠을 부둥켜 안고 뒤척이다가 새벽 5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부서장이셨던 이 부장님과 두 명의 여자 동료분 이렇게 넷이서 설악산 산행을 하기로 하고 내 차로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덤벼들었던 것 같다. 부장님과 J 양은 중간에 다시 되돌아갈 심산이었고 나와 K 양은 산을 넘어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창 단풍철이서 등산객이 무척 많았다. 뚜렷이 길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따라 천불동 계곡을 걷다 보니 양폭 산장을 지났고 또 한참 가다 보니 무너미 고개를 넘어섰다. 앞으로의 여정이 어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뒤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네 사람은 그냥 대청봉을 넘어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역시 인파에 휩쓸려 힘들게 소청봉에 올랐고 다시 대청봉에 올랐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대청봉의 바람이다. 작은 돌가루가 날아서 맨살을 때리는 듯 세게 몰아치던 바람이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이, 아니 그 때는 사진기도 없이 갔었다, 대청봉에서 한계령으로 내려오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이미 모두 지쳐버려 몸은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부장님은 무릎이 아파서 더욱 힘들어하셨다.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고 옆에서 부축하면서 산행을 시작한지 13시간 만인 오후 7시쯤 오색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오색 약수터 온천으로 들어가고 나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설악동으로 돌아가 차를 회수했다. 산에 가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우리는 새벽을 달려 천안에 도착했다. 힘든 여정이었던 만큼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설악산을 종주한 것이었고 그 후 다시 설악산에 갈 기회가 없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누가 어제 비 때문에 설악산 탐방을 금지했다고 믿겠는가? 기온도 많이 내려가서 영상 15도 아래다. 바람이 불면 춥다는 느낌이 든다. 여름날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산행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보인다. 한산하면 좋지 뭐. 공기는 신선하고 기분도 상쾌하다.
하늘에는 반달이 구름사이를 드나들고 달빛 비친 길이 랜턴 빛 없이도 걸을 만하다. 가끔 있는 물웅덩이를 피해가며 계곡길을 따라 걷는다. 그 동안 꽤 많은 비가 내린 듯 왼쪽 계곡 물 흐르는 소리에 귀가 간지럽다.
4시 30분 거의 한 시간 걸려서 도착한 비선대에 물 흐르는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여명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전람회길로 들어가는 토막골 입구를 지나고 공룡능선 안쪽의 범봉으로 오를 수 있는 설악골 입구를 지나는데 네 명의 남녀 산꾼들이 앉아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설악골을 훔치려는 모양이다. 이렇게 물이 불어 있을 때 좁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이 조금 위험해 보이지만 젊은 사람들이서 몸 움직이는 것이 훨씬 자유로울 테니 어쩌면 이런 날씨에 계곡 탐방도 재미있을 법하다.
천불동(千佛洞) 계곡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천불동 계곡의 진면목이 어둠 속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낸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층층 괴암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계곡 물은 친구와의 대화를 묻어버릴 만큼 큰 소리로 흐른다. 귀면암이 양폭 대피소 이전에 있는가 그 이후에 있는가 서로 의견이 다르다. 나는 양폭 대피소를 지나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두 번째 오름 위에 뾰족히 솟은 바위 봉우리가 귀면암이다. 바위 모양이 귀신의 얼굴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는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을 따 온 것이라 한다. 귀면암 아래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 귀면암 바위 벽에는 작은 동판이 붙어있다. 1984년 8월 21일 제 10호 태풍 홀리가 계곡을 휩쓸 때 등산객을 안전하게 유도하여 대피시키고 자신은 계곡물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명을 달리한 고(故) 류 만석 씨의 넋을 기리는 글이 적혀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태풍이 오기 전 등산을 왔던 단체 등산객들이 갑자기 내린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정작 자신은 계곡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것이라 상상해본다. 류 만석씨는 당시 설악산에 들어와 살면서 등산객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산행 안내도 해주던 사람이었다 한다.
귀면암에서 나무계단을 내려가 계곡을 따라 걷는다. 오련폭포(五連暴浦)는 다섯 개의 작은 폭포가 이어져 있다는 뜻일텐데 다리 위에서 볼 때는 어떤 것이 폭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지금처럼 안전한 철계단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이 계곡을 탐방했을 지 상상해본다. 지금 안전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길이 아니라 어쩌면 계곡을 따라서 걸었을 것 같다. 폭포를 만나면 잠시 옆길로 벗어났다가 다시 계곡을 타고 갔을 것이다. 귀면암 뒤쪽의 좁은 협곡을 힘들게 지났을테고 작으나마 다섯 개의 폭포가 있는 곳은 또 어렵게 비켜가면서 오련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지금은 큰 바위봉우리 중간쯤으로 계단을 설치해 놓아 편안하게 그리고 빨리 지나갈 수 있지만 이 계단이 없던 시절에 이 곳을 지나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폭 대피소에서 달콤한 휴식
오련폭포가 끝나고 양폭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완전히 밝았다. 큰 물이 지나가고 난 뒤의 신선함이 묻어난다. 어제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하루 종일 걸은 데다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잠이 솔솔 쏱아진다. 양폭 대피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 대피소를 여러 번 지나다녔지만 정작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공원 관리 직원이 안에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일반 등산객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외부 발코니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배낭을 벗어 두고 잠시 누워 잠을 청했다. 안대를 쓰고 모자로 얼굴을 가리니 금방 잠들 수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시끌시끌한 분위기에서 눈을 뜨니 사니조은 님이 이제 가자고 보챈다. 카메라를 든 사진사와 몇 명의 등산객이 올라와 쉬고 있는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다. 15분쯤 잠을 잔 것 같은데 몸이 개운하다.
양폭 대피소는 양폭(陽瀑布) 가까운 곳에 있는 대피소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양폭포에 대비되는 음폭포(陰瀑布)는 천불동 계곡의 지류인 염주골과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천불동 계곡 탐방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양폭 대피소는 1967년 개소하여 2006년 증.개축하였으며 그 후 민간위탁방식으로 운영하다가 2008년 설악산 국립공원 공단이 맡아 운영하였다. 2012년 1월 21일 밤 원인불명의 화재로 인해 대피소는 전소(全燒)되었고 이후 2013년 11월 24일 10명을 수용하는 대피소로 다시 지어졌다.
돌 웅덩이가 움푹 파인 약 20여 미터 높이의 양폭(陽瀑)과 그 형태나 크기가 비슷한 천당폭포(天堂瀑布)를 지나고 계곡의 양 옆으로 뾰족뾰족 튀어나온 암릉을 감상하며 오른다. 얼마 후 9시가 임박하여 마침내 천불동 계곡을 벗어나 무너미고개에 이른다.
백두대간 능선길 무너미고개
무너미고개는 천불동 계곡과 공룡능선 그리고 희운각대피소로 이어지는 삼각지다. 대청봉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이 무너미고개를 지나 신선대를 거쳐 공룡능선으로 달린다. 무너미 고개라는 이름은 물이 넘는다는 뜻이겠으나 백두대간의 기본 개념은 ‘산은 결코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山自分水嶺)’는 것이니 그 이름 자체가 참 아이러니하다.
얼마전 북한의 지질학자들이 금강산의 암릉이 생겨난 원인 규명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북한은 금강산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일환으로 금강산 일만 이천 암봉의 생성원인으로 소빙하시대의 유빙(流氷)을 들었다. 즉, 계곡 가득 얼음으로 덮여 있다가 얼음이 녹으면서 계곡의 흙은 물론 바위까지 깍아가면서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 근거로 바위에 일정한 방향으로 나 있는 깍인 흔적을 적시하였다. 금강산과 이어져 있는 설악산도 이와 같은 원리로 천불동 계곡을 비롯한 암릉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얼음이 녹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천불동 계곡의 얼음은 무너미고개까치 차 올라 물이 가야동 계곡으로 흘러내리지 않았을까? 물론 너무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마지막 빙하시대가 28,000 년 전이었다고 하니 그 때 누가 이 설악산에 올라와 물이 가야동 계곡으로 흐르는 것을 목격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 우리 선조들은 혹시 그런 개연성을 알아차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무너미고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희운각 대피소
2만 8천년 전 빙하시대의 얼음덩어리가 녹으면서 깍아낸 신선대의 환상적인 암릉을 구경하고 희운각 대피소를 향한다. 희운각 대피소는 막하 공사중이다. 작년에 뉴스에서 들었던 것처럼 희운각 대피소의 기능을 확장시키려는 모양이다. 즉, 중청 대피소의 숙박 기능을 없애고 희운각 대피소의 침상 수를 늘린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코로나 사태로 인해 당분간 숙박을 수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지금은 조리실과 임시화장실만 개방하고 나머지는 폐쇄하였다.
희운각 대피소는 산악인들의 대피소로서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69년 2월 14일 밤 우리나라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20명이 천불동 계곡 끝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열 명은 이미 대청봉에 올라가 야영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열 명이 계곡에서 야영중이었다. 그리고 계곡에 있던 열 명은 밤중에 일어난 눈사태에 매몰되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시신은 눈이 어느 정도 녹은 3월 3일에야 수습되었고 3월 5일 설악동 노루목에서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원정대 훈련에 참가하고 싶었으나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참여하지 못했던 이 정훈(당시 경희대 치대 1학년) 님은 그 해 2월 23일 현장을 찾아 갔다가 이미 고인이 된 산우들을 회상하면서 설악가 가사를 지었다 한다. 한 편 산악 훈련장에 걸맞는 대피소 하나 없어 발생한 참사를 안타깝게 여긴 희운 최 태묵 선생은 사비를 들여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계곡(죽음의 계곡) 아래에 대피소를 지었다. 국립공원에서는 그의 호를 따서 희운각(熙雲閣)이라 명명하였다.
소청봉을 거쳐 대청봉으로
희운각에서 물을 보충하고 소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중간에 있는 나무데크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은 탓인지 아직도 졸음이 쏱아진다.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해보는데 양폭 대피소에서 만났던 사진 작가 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사니조은 님과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에 눈 언저리에 앉아있던 잠꼬리가 달아나 버린다. 사니조은 님이 타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소청으로 오른다.
조금 오르다 보니 먼저 올라갔던 사진 작가님이 조망이 트인 바위에 앉아 공룡능선 쪽을 바라보고 있다. “뭐 멋진 것이라도 있나요?” 하고 그 사람 곁에 앉아 보니 동해에서 만들어진 하얀 구름이 범봉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 사진 작가님은 대포처럼 긴 렌즈를 치켜들고 운해가 일고 있는 공룡능선을 지켜본다.
“사진은 해가 뜰 때 역광이 비쳐야 제대로 나옵니다.” 내게는 전혀 의외의 이론이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늘 역광을 피해서 찍는데 역광을 받으면 피사체가 어둡게 나오기 때문이다.
“일단 해가 뜨고 나면 작품 사진은 제대로 안나옵니다. 모두가 평면으로 보이니까 그냥 일차원적인 장면만 찍을 수 있지요.” 정말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렇게 운해가 끼면 입체감이 살아나기 때문에 작가들은 운해가 일어나면 작품을 찍는거지요.” 나에게는 운해가 끼면 그냥 멋있는 풍경이 연출되고 그런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 좋은데 전문적인 작가들은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재주를 가진 모양이다.
사진 작가님은 그 자리에 좀 더 오래 머물면서 운해가 공룡능선을 넘어오는 장면을 찍겠다고 하기에 우리는 대청봉을 거쳐 오색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소청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두 세 군데 조망처가 더 있어서 그 때마다 공룡능선 쪽을 살피는데 시시각각 하얀 구름은 더욱 부풀어 올라 공룡능선의 1275봉과 마등령 등 높은 봉우리 몇 개만 남기고 삼켜버린다. 마치 수많은 군사를 거느린 군대가 파죽지세로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는 느낌이다. 이건 운해(雲海)전술이다.
소청에서 중청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에서 뒤돌아보니 운해는 이미 공룡능선을 넘어 내설악마저 덮어버릴 듯이 밀려온다. 보통 전쟁에서도 저 정도로 밀리기 시작하면 이미 졌다고 보아야 한다. 방어하는 쪽에서는 이미 저항할 동력을 상실한 채 자포자기 상태가 될 것이다. 천불동쪽도 운해가 덮여 화채능선까지 흰 구름이 차지하고 화채봉 정상 부위만 남았다.
대청봉은 꽃밭이다.
12시 경이 되어 중청대피소에 도착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은 탓에 배가 고파오지만 우리는 몰려오는 운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점심 먹는 것을 미루고 우선 대청봉에 올라가기로 했다. 헬기장 주면에서 네귀쓴풀과 등대시호 등 설악산의 귀한 꽃을 사진에 담았다.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에 이번에는 두 명의 사진사들이 눈잣나무 숲을 향해 서서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광경을 구경했다. 대포처럼 긴 렌즈를 받쳐들고 셔터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옆에 서서 구경을 하다가 무엇을 찍느냐고 물어보니 잣까마귀를 찍는다고 한다. 새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맨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사진 작가님들은 계속 셔터를 눌러댄다. 우리가 옆에서서 관심을 보이자 사진 작가님은 카메라에 찍혀 있는 새 사진을 보여준다. 잣까마귀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모습과 잣 방울을 물고 있는 모습 등이 아주 자세하게 찍혀 있다. 정말 신기하다. 나는 이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블로그(달맞이꽃 개화: https://ecochulwoo.tistory.com/3502?category=358766)를 알려준다.
오늘 산행에서 내가 보고자 한 것은 설악의 바람꽃이다. 2017년 여름에 이 꽃을 처음으로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렸다. 그 후 해마다 여름이면 이 바람꽃을 보려고 설악을 찾았는데 2 주 전에 왔을 때는 이제 피기 시작했던 터라 좀 더 많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대청봉 중간쯤 올랐을 때 길 가에 하얗게 핀 바람꽃이 화사하게 웃는다. 노란색 꽃술과 하얀 꽃잎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듯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른 봄부터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만주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모데미풀, 나도바람꽃 등 수많은 바람꽃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고 지면서 여름까지 달려왔는데 이제 7월의 따가운 햇볕 아래 바람꽃의 진수인 설악산 바람꽃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른 쪽 눈잣나무 숲 윗쪽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 빈 공간이 온통 바람꽃으로 덮여 있다. 밧줄로 막아 놓아 일반 등산객들의 출입을 통제하지만 나는 굳이 금줄을 넘어 바람꽃 꽃밭으로 들어간다. 아직 작은 꽃봉오리가 8월 중순까지 이어서 피어날 것 같다. 꽃 중의 꽃 설악바람꽃을 맘껏 감상한다.
바람꽃을 실컷 보았으니 이제 오늘 산행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저 덤이다. 이제 공룡능선과 신선대 그리고 화채능선이 모두 발 아래 놓여있다. 그런데 이제는 화채봉이 완전히 운해로 뒤덮여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화채봉 뿐만 아니라 화채능선 대부분이 구름위로 뽀얗게 솟아있다. 그리고 공룡능선쪽도 마찬가지다. 이미 공룡능선을 넘어 내설악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을 줄 알았던 구름들이 서풍에 밀려 다시 후퇴하고 있다. 공룡능선의 전선이 서부군과 동부군간 각축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능선을 넘어갔던 구름떼 중에서 일부는 흩어지면서 뿌옇게 보인다. 내 짐작으로는 초기에 동해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맹렬한 기세로 백두대간을 넘어설 수 있었으나 전선이 확대되면서 뒷심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보니 강한 바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서풍에 밀려 전선을 뒤로 물린 것이다. 전쟁에 이기려면 선봉의 기세도 중요하지만 늘 후방에서 밀어주는 지원이 끊기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색리로 하산한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붐비지 않는 정상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모처럼 한가하게 인증사진도 찍는다. 누군가 정상석에 기름을 부어 오염시켰다는 뉴스를 상기하며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이미 깨끗하게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느긋한 산행이다. 꽃을 보며 구름을 보며 아름다운 일요일 설악산을 만끽한다. 오후 1시 30분 오색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오색리에 있는 남설악 탐방안내소까지 5 km 내내 내리막 길이다. 내리막이니 훨훨 날아서 두 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산행을 하다 보면 내리막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빠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 우리를 앞질러 가던 사람들이 얼마 못 가서 쉬고 있다. 또 다리를 절면서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올라갈 때는 무릎 연골에 부담이 적지만 내려갈 때는 근육이 지쳐버려 온 몸의 무게가 연골에 집중되는 모양이다.
오색으로 내려가는 코스에서 대청봉 기준 500 미터 지점까지는 야생화 화원이다. 큰 나무가 없어 햇볕이 많이 드는데다 겨울철 눈이 많이 쌓여 풀들이 눈 속에서 충분한 수분을 얻으며 지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박새꽃은 올 해 풍년 들었다. 어딜 가나 녹색으로 소담스럽게 핀 박새꽃이 꽃밭의 주인공처럼 서 있다. 설악산의 명품 꽃인 네잎갈퀴나물 보라색 꽃도 이제 피기 시작했다. 일 주일 또는 이 주일 후면 온통 보랏빛 꽃밭을 이루어 놓을 것이다. 물레나물이 무리지어 자라는데 아직 꽃 봉오리만 맺혀 있다. 다른 곳에는 이미 져버린 금마타리 노란 꽃이 아직도 성성하다. 꽃봉오리만 보이던 도라지모시대 꽃이 한 송이 피었다. 이제 바야흐로 모시대 꽃의 시대가 펼쳐지고 곧 이어 금강초롱도 피어날 터이다. 꽃 모양이 마치 뱀이 크게 입 벌린 모양과 닮았다 하여 이름붙여진 참배암차즈기 꽃도 피기 시작했다. 봄에 꽃이 피었던 두루미풀과 자주솜대는 동그란 열매를 옹골지게 맺고 있다. 이 모든 귀한 꽃들이 대청봉 주변에서 힘들게 올라온 산객들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어디 이뿐이랴. 백당나무 꽃이 아직도 피어 있고 꽃개회나무 꽃도 피기 시작했다. 인가목은 이제 꽃이 지고 열매가 달렸다. 보면 볼수록 그리고 걸음을 늦출수록 더욱 많은 꽃과 나무가 신비한 모습으로 산객의 눈 앞에 나타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으나 모처럼 물이 많은 날이니 설악폭포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오후 3시 설악폭포에 도착했으나 앞서 가던 사니조은 님이 보이지 않는다. 설악폭포의 위치에 대해 서로 엇갈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계곡쪽을 유심히 살피면서 걸어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걸음을 늦추면서 길 가에 핀 노루오줌 꽃을 감상한다. 이 곳에는 습기가 많아서 그런지 핑크빛 노루오줌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평지성 내리막 편안한 길의 끝에 있는 작은 고개 쉼터에 도착했을 때 사니조은 님이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면서 왜 이리 늦느냐고 핀잔이다. 그는 설악폭포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그냥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늘 오색에서 버스를 내려 짙은 어둠속에 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이 길을 오르기만 했지 정작 내려가는 것은 세 번째다. 한 번은 이십년 전 (1998년)의 일이었고 두 번째는 2년전 겨울 산행 때였다. 거꾸로 이 길을 걸어 대청봉으로 올라간 것은 열 번도 넘을 터이니 중간중간 나타나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다. 짙은 녹음에 덮인 돌길을 조심하면서 천천히 내려간다. 그리고 오후 4시 40분 마침내 남설악 탐방소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한다. 설악동 소공원을 출발한 지 13시간 정도 걸렸고 대청봉에서 1시 30분에 출발했으니 세 시간쯤 걸린 셈이다. 많은 풍경과 꽃을 사진에 담으면서 여유롭게 걸어온 하룻길이다.
이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떨지 몰라 사니조은 님에게 시장하냐 물으니 괜챦다 한다. 대청봉에서 점심을 먹고 또 내려오면서 계란으로 간식까지 챙겨 먹었으니 나도 배고픈 줄 모르겠다. 서울에 도착하여 대중교통이 끊겨 여러 번 고생했던 경험을 상기하며 우선 서울로 가서 저녁을 먹자고 하니 사니조은 님도 기꺼이 동의한다. 오색에서 5시에 출발한 차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양양으로 가서 고속도로를 탔다. 의외로 차가 많이 막힌다. 중간에 잠시 휴게소에 들렀는데 5시간 넘게 걸렸다. 10시쯤 복정동에 도착하여 예전에 들렀던 순대국밥 집에 들러 빠른 저녁을 먹고 사니조은 님을 장지역에 내려주고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