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릉면 봉길리 30-1
십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다가 바닷가에서 무당이 굿하는 장면을 봤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다.
바닷가에서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곳이다.
이제는 제법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관리가 되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만파식적'의 한자를 풀이하면 '커다란(萬) 파도(波)를 잠재우는(息) 피리(笛)'라는 뜻이에요.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는 책에 실려 전해 내려오지요. 어떤 이야기인지 알아보아요.신라, 백제, 고구려로 나뉘어 있던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아들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바위의 둘레가 200미터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그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미터 높이 1.45미터 너비 2.6미터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요즘 드론 촬영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스토리텔링 가득하고...주변 이견대와 감은사와 더불어 함께 영상을 만들어
영상관 하나 마련해서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멀리 보고 있자니 아쉬움이 컸다.
김춘추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김법민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이다.
예전 드라마 선덕여왕이 유행하던 때에는 이 복잡한 관계를 쉽게 다들 이해하고 있었는데...
미실이 고현정 누님은 요즘 뭐 하시나... 갑자기 궁금하네...
태종무열왕(김춘추 654-661) : 최초의 진골출신왕(이전까지는 성골만 왕이됨), 나당동맹 체결, 백제 멸망 660
문무왕(661-681) : 계림도둑부 설치 663 - 고구려 멸망 668 - 매소성 전투 675 기벌포 전투 676
당을 요동으로 밀어내고 삼국통일 완성 676
삼국통일 : 민족 최초의 통일 / 당군을 자주적으로 몰아냄 /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민족문화의 토대 마련
삼국통일의 한계 : 대동강~원산만 이남 영토 한정 / 외세(당)의 개입
그래도 이정도는 알아야 한국사 시험을 보지....
자 이제 문무대왕릉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이견대로 이동한다.
경북 경주시 감포음 동해안로 1480-12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바로 이렇게 입구가 있다.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제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문무왕에 감사하는 의미로 감은사 절을 짓고
용이된 문무왕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나중에 이곳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카더라 통신의 와전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으로 화랑도 세속오계를 교육하자면 불교의 힘도 필요하고 전설도 필요한 거겠지...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받았다고 한다.
국뽕을 고취시는데 정말 완벽한 스토리텔링을 통일신라는 가지고 있었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게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1970년 발굴조사로 이견대 건물 터를 확인하였고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새롭게 다시 지은 것이다.
경주인들의 자부심은 문무대왕의 유언에서 최부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이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닐지...
신라 신문왕(681-692)은 왕권전제화를 확립하였다.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 등을 평정하고 많은 귀족세력을 탄압하여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는데
이견대, 감은사지 삼층석탑, 옥대와 만파식적 같은 국뽕을 자극하는 유물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어쨋든 전제왕권 강화와 관련하여 신라 신문왕은 시험에 잘 출제되는 왕이다.
진골귀족들을 숙청하고 말 잘 듣는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에게서 지역 노동력 착취를 빼앗았다.
중앙 정치조직을 14부로하고 지방제도 9주 5소경과 군사제도 9서당 10정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성균관의 뿌리인 국학을 예부(禮部) 소속의 정식기관으로 제도화한 것도 신문왕이다.
고구려 태학과 구분하여 암기해야 함 ㅋㅋ
이제 감은사지로 이동한다.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3
삼국유사에 문무와이 침입한 왜병을 진압하기 짓기 시작하였으나 중도에 죽게되어
아들 신문왕이 즉위 다음에에 감은사를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감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
감은사지는 사적 제31호로 1960년과 1979~80년 두 번에 걸쳐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문무대왕릉에서도 이견대에서 다른 방문객을 단 한명도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저 멀리 보이는 주차장의 우리차 한대 뿐...
무료 주차장 사용과 무료 관람...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과 같은 가람식 배치 삼층석탑이다.
불국사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관람해 보는 것은 어떨지...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동탑과 서탑은 함께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서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사리장엄구는 사리기를 보호하는 금동사리외함으로 보물 제366호로
현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매우 큰 탑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 중석 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미터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다음백과]
문무대왕릉과 이견대와 이웃하고 있어서 함께 방문하기도 좋고...
그리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곳이 아니어서 한적하고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경주의 몇 안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다만 경주시내와 양동마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접근성이 용이하지는 않다.
다만 예전에는 산을 삥삥 돌아서 꽤 오래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터널이 생겨서 예전보다 금방 도착했다.
솔직히 유적지의 상업화라는 것이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절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어불성설이긴 하다.
몽고침입 때 황룡사와 감은사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지만
불에 타 사라진 목탑인 황룡사구층목탑에 비해 감은사지에 삼층석탑 두 개는 살아남았다.
황룡사역사문화관처럼 감은사역사문화관이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