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한문(漢文)은 유구한 “동이족“의 글
중국인들이 우리를 낮추어 부르는 동쪽 오랑캐인 東夷(동이)의 夷는 중국인들이 중간 시조로 받들고 있는 하나라를 세운 시조, 즉 우임금의 이름이며,동이족의 우두머리인 神農(신농)이 삼황오제시대를 장식하는 첫 제왕이며, 창힐에게 명하여 한자를 만들었으며, 중국인 들이 시조로 추앙하는 黃帝(황제)는 신농의 사위였으며, 실제 제왕의 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신농 때 처음 만들어진 문자는 황제의 5세손인 계(啓)가 하나라를 세우고 제왕이 되면서 제위를 직계 아들에게 세습하게 하면서, 세월이 지나며 자기 직계 조상위주로 역사를 뒤바꾸고 만 것이다.
갑골 문자가 중국 문자 창조의 시초가 아니라. 현재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병명(三兵銘)에 새겨진 것은 1000년 전 삼황오제 시대에 새겨진 상고문자이니, 최초의 문자는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 때에 만들어 졌다한다.
이는 중국의 학자 낙빈기(본명은 장박군 1917~1994)가 평생을 연구한 "금문신고"라는 책을 통해 밝힌 것임.
한자 한문은 그 유래가 “은” 나라의 갑골문자이다. 은(殷)나라라 함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 직후인 약 3천 년 전 동이겨레(東夷)를 말한다. 중국 동쪽 동아시아의 특이한 백두산 발해만 족을 동이겨레라 하고 한족(漢族)들은 “뚱이”라 부르며 중국 북쪽의 오랑캐요 “도둑놈”의 부족이라 낮추어 부르고 있다. 한족들은 자기 주변 모든 나라를 오랑캐라 불러온다.
그들은 도적(盜賊)을 화자(花子) 또는 뚱이(東夷)라고 불렀지만 공자, 맹자는 스스로의 조상이 동이족과 무관치 않으며 동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으며 동이나라를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예의와 범절에 밝은 나라라고 동경해 마지않았다. 앞서 말한 하나라(夏) 은나라(殷) 주나라(周)도 엄밀하게 말하면 동이족(東夷族)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즉 연관성이 깊다. 또 요임금, 순임금도 동이족의 황제라는 설까지 있다.
옹기와 항아리를 굽던 황하 이북의 땅이 산동성(중국) 일대가 옛 동이족들의 본거지 즉 고토(故土)였던 것이며 발자취가 산재되어 있다.
남동(南東) 만주 지역 일대가 바이칼호수 부근에 동진(東進)해 왔던 알타이어(語)권의 부족들 - 엄밀하게 말하면 동이족들이 남동만주, 발해, 황하북쪽으로 이동(태양이 뜨는 쪽) 전선을 넓혔던 것이다. 또 중원대륙, 즉 중국 대륙의 선주민이 동이족이어서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이 아메리카, 인디언이었던 것을 떠 올려 연상해보면 어느 정도 가늠이 간다.
훗날에 굴러들어 온 한족(漢族)이 박혀 살고 있는 동이족을 뽑아 내 동이족 역사를 다듬어 자기들 잣대와 비위에 맞는 부분을 스스로의 역사, 문화, 문자(文字)로 재편한 것이 한족(漢族)의 본 모습이다.
북부여→고구려→백제의 이동노선이 토박이 동이족→발해의 민족통합과 이동노선상의 문화변천사, 즉 알타이어족의 행방(行方)이다.
중국의 사가(史家)이자 문자(文字) 학자인 “금문(金文)”을 전공한 “낙빈기” 선생이 한문의 시원(始原)이 동이족에서 유래되었다고 실토했다.
남이 장군의 기개가 하늘을 찌른 시문인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가는데 모자랐다는 명시문은 바로 동이족의 기개를 그려 놓은 것이다.
중국 본토의 도시, 지명에 한반도의 도시 지명과 꼭 같은 곳이 여러 군데 나타나는 것도 한번 깊이 문화사적으로 추구해 볼만하다.
황제 헌원군과 동이족의 시조(始祖)인 치우 천황군과는 수십 년 간 피투성이가 되어 치열한 적수(敵手)로서 탁록 전투에서 겨루어 불구 대천지원수이건만 치우천황을 중국은 지금 삼조당(三祖堂)에 모시고 자기들 조상이라고 위패를 들여 모시기 시작했다.
삼조당의 해괴한 역사변조 자체가 옛 쇼비니즘적 중화사상의 발로이자 마각(馬脚)이 들어난 실례(實例)이다.
고구려 역사 찾기에 덧 부쳐서 동이족의 조상 치우천황을 우리 동이족 후손들이 바로 모시는 일도 아울러 전개해야 된다.
의부(義父) - 의붓아버지 - 의 홍패를 떠메고 춤을 추는 <남의 성, 남의 조상>을 따르며 남의 글을 숭상하고 있는 얼간이 - 얼이 나간 사람 - 들이 우리나라에 많다. 제 정신은 없고 온통 남의 정신,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꼴이 되어 가고 있다.
근래 천자문(千字文)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만 얼추잡아 140여종이 넘는다는 것도 우리겨레 글인 갑골문의 변형인 한자(漢字) 배우기의 열기(熱氣)를 알 수가 있다.
남의 글이라고 등한시 했던 것을 우리 위장에서 소화해 내는 몸짓이리라.
조상들이 마시고 피를 조성했던 바이칼 호수, 흑룡강 강물을 이 시점에서 다시 상기하자.
“샤먼”이라고 백안시하는 문화인류학, 종교애비의 갈래도 그 사실 아득한 사이베리아(시베리아) 광야의 소나무 숲과 동토(凍土)의 풍습 즉 우리와 남이 아닌 풍습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유구한 문화판도 위에서 문화의 큰 보자기를 짜내어 싸가지고 문화떡을 먹지 않는 한 그런 요소들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지금 이 시점은 노일 전쟁 끝의 어수선한 초연냄새가 되살아나고 있는 시대이자 한족(漢族)의 정복왕 무제(武帝)가 그의 패권주의 복안(腹案)을 가지고서 동방의 동이족 문화사를 거두절미 했던 역사 날조 작업시대 상황과 80%가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경고하는 바이다.
독, 항아리 빚는 기술, 딱 나무로 한지를 걸러 만드는 기술, 8만대장경과 판짜기 기술, 큰 활을 능수능란하게 쏘는 궁술(弓術), 좁은 1mm 수준의 누비옷을 떠내는 섬세한 손 끝, 황토방 거주 풍습 이런 것이 우리들 유전자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우리들 유전자 속에는 어느새 켓첩이 아닌 고추장, 간장, 된장, 새우젓의 진액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서양세계의 표준말이자 글자의 근원이 라틴어인 것처럼 아라비아 숫자가 아랍인들의 수리(數理)학 인 것처럼 이제 한문(漢文)은 백두산 민족이 “갑골문자”를 개량하여 밥먹 듯 사용한 “뜻글”이니 만큼 이질감을 탈피하고 친근감으로 우리 고유문화의 큰 보자기에 싸서 우리의 유산으로 삼아야 된다.
- 19세기 말 동이족의 은허(殷墟)에서 거북 등딱지에 쓰인 서글이 대량 발견되니 이를 은허서글(殷墟書契)이라고 일컬케 되었으며 이 발굴로 인하여 중원대륙(中原大陸)이 동이의 서글문화권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이었음이 입증(立證)된 것입니다.
‘書契(서글)’이 동이문자임을 주장하는 근거
1. (글→書)은 BC 3,800년 전 한웅천황 시대에 신지현덕에 의하여 초창되었다는 점.
2. 중국이 시조로 받드는 황제 헌원은 한웅천황 시대보다 약 1,200년 후인 BC 2,600년경의 인물이며 치우천황시대에 헌원, 항힐, 대요 등이 삼천궁에 와서 자부선인으로부터 칠회제신의 달력과 삼황내문경을 배워갔다는 점.
3. 전한(前漢)보자 약 300년 전인 춘추시대에 이미 공자(孔子)가 이 서글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니 ‘한(漢)’나라 글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점.
4.중국인은 ‘글’이라는 입성(入聲:‘ㄹ,ㅂ,ㄱ‘ 받침소리)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점.
5. 청(淸)나라 때에 만든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실린 한자(漢字→서글)50,000자 중 중국어로 발음이 불가능하여 무음화(無音化)된 자(字)가약 30%가 된다는 점.
6. ‘강희자전’은 청나라 강희 55년(서기 1716년)에 한림학자 30인이 종래의 모든 자전류를 망라하여 만든 한자자전의 집대성(集大成)입니다. 급기야는 서기 1911년 손문(孫文)의 신해혁명 이후인 1918년 11월 23일에서야 한자 최초의 중어발음기호인 주음자모(注音字母)를 만들어 쓰다가 그나마 대륙에서는 다시 영문발음법으로 재(再) 제정(制定:1958년)하여 쓰게 된 점.
7. ‘강희자전’의 발음법(절운)은 우리민족의 현재 발음과 일치하고 있으니 서글(〓한자)은 우리 동이문자임이 분명한 점 등이다.
위의 도표에서 중국인들이 일개자(壹個字:한 글자)의 음(音)을 이음절(貳音節)이상으로도 발음하는 예를 보았으니 이제는 중국인들이 중국어를 표기할 문자가 없었으므로 부득이 우리 동이족이 창제한 ‘서글’을 가차(假借:빌려)하여 한어(漢語:중국어)를 표기하였다는 확신을 가지셨으리라 믿습니다.
한자와 동이족
한자의 원형으로 알려진 갑골문자가 발견된 것은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1899년 학질에 걸린 청나라 국자감제주 왕의영은 본초강목의 처방에 따라 오래된 거북 뼈를 사서 달여 마시려다 용골이라 불리던 짐승 뼈에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다. 후에 유철운에 의해 그때까지 알려진 어떤 문자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아냈다. 왕의영은 제자 유악과 함께 그 뼈의 출처를 찾았는데, 다름 아닌 고대 은 왕조의 수도였던 은허였다.
그런데 근래 은나라를 동이계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 주목된다. 은나라는 하북 등 발해 연안 지역에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갑골문도 동쪽으로 갈수록 다수 발견되는데, 발해 연안과 산동 하남 그리고 요녕과 길림 지방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갑골을 동이계 문자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중국학자들은 갑골문에 알타이어의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갑골문은 복사가 신에게 미래의 일을 묻는 복문사로서 부호가 아니라 그림으로 묘사한 상형문이다. 상형문은 본래 고립어 구조로서 특정어의 요소를 찾기 어렵게 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불과 100여 년 전에야 한자의 기원을 알게 된 것도 은나라의 이민족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숫자를 셀 때도 중국인들은 새끼줄에 매듭을 짓는 결승방식으로, 갑골문의 숫자를 사용했던 동이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민족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을 보면 확신이 더해진다. 지금의 천부경은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고조선의 사관이었던 '신지'의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 현재 여러 판본이 세간에 공개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정몽주로 잘 알려진 고려 육은의 한사람 민안부가 지은『농은유집』에 전한 것이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인 삼신의 우주관과 환에서 시작되어 한으로 매듭지어지는 신비로운 역사의 창조원리가 요약돼 있다. 헌데 이 천부경을 채우고 있는 문자들을 보면, 은나라의 갑골문자와 매우 흡사하다.
역사서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민족의 시초 나라였던 배달국을 연 환웅천황이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이를 기록하였다고 나오는데, 바로 천부경의 글이 녹도문인 것이다. 배달국이 건국된 지 이미 5,900년이 지났으니 하나의 문자가 개발되어 지기까지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은나라보다도 더 기원이 올라가게 된다. 이 녹도문이 중국의 화하족이나 여러 민족들에게 전파가 되게 되는 일례를 보자면,
한단고기 삼성전기 하편
천하가 셋으로 나누어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록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 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하려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게 의존했으나 이를 수 없었고 또 창힐에게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 두 나라는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符圖 의 글을 배웠다. 당시 제후들은 (신지녹도 문을 가진 치우환웅을) 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효東有倉詰西有軒轅自相以兵慾專其勝而未也.初軒轅稍後起於蚩尤每戰不利慾依大효而未得又依倉詰而不得二國皆蚩尤之徒也大효嘗學干支之述倉詰受符圖之文當時諸候岡不信事者亦以此也)
(부도의 符는 天符印의 符를 말하고 圖 란 그림이란 말이니 이는 그림글자인 신지녹도전자를 말한다)
환단고기 진위 여부를 떠나, 천부경의 녹도문과 은나라 갑골문자의 일례를 보면 우리가 여지껏 써온 문자가 새삼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라틴어가 전 유럽의 언어가 된 것처럼 우리의 문자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자가 되었다. 한자는 중국만의 나랏말씀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