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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정은 사막 한 가운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문명 최초의 수학이 등장한 것을 목격한 후, 우리는 그리스에서 수학이 정신을 갖추고 정연한 논리를 펼치는 현장을 봅니다. 이후 수학의 발전은 동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를 사랑하고 영혼을 믿었던 놀라운 민족이 만들어낸 숫자, 0의 발견은 인류의 정신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럽으로 갑니다. 여기서 수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1696년 스위스 바젤, 부유한 가문의 한 귀족이 편지를 씁니다. 당대의 이름난 수학자들에게 내는 수학문제입니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1667~1748), 물론 그는 정답을 압니다. 편지 끝에 이런 말도 함께 덧부치죠. 이 문제를 통해 우리는 어린 아이와 어른을 가려낼 것입니다. 정답을 맞추면 영원한 명성을 얻을 것이다. 마감기한은 6개월이었습니다. 베르누이의 문제를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겉봉에 그렇게 썼습니다. 베르누이의 문제는 온 유럽에서 이른바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온 유럽에 내노라 하는 수학자들에게 문제가 배달됐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은 지금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문제만 배달 되는데 몇 달이 걸렸죠. 거물 수학자 베르누이가 낸 문제, 풀기만 하면 최고 중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높이가 다른 두 점, A와 B가 있습니다 (파리 에펠탑 꼭대기가 A, 밑에 대각선에 한 지점이 B), A와 B를 잇는 최단 강하선, 즉 물체를 가장 빨리 내려오게 하는 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직선이 답이라면 문제를 내지도 않았겠죠.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도 문제를 받았습니다. 법률가, 종교가, 외교관인 그는 수학실력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라이프니츠, 첫번째 정답자였습니다.
하지만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답이 오지않자 베르누이는 마감기한을 연장합니다. 사실 베르누이가 이 문제를 낸건 누군가를 겨냥한 것이었죠. 이 문제를 꼭 받아야 할 사람, 그는 바다 건너 영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르누이의 문제가 그의 손에 도착한 건 해를 넘긴 후였습니다. 문제를 보고 그는 베르누이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영국 정부에서 화폐주조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아주 바빴습니다. 그러나 퇴근 후 꼼짝도 않고 앉은지 몇시간 만에 문제를 다 풀어버립니다. 그때까지 베르누이가 낸 문제를 맞힌 수학자는 이른바 세상에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 중에 겨우 4명 뿐이었습니다. 다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주가 걸렸죠. 그런데 영국의 이 수학자는 하룻밤 만에 그 문제를 풀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안지를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없이 베르누이에게 보냅니다. 정답이었습니다. 끝까지 다 본 베르누이는 그것을 누가 보냈는지 그냥 압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안다. 사자는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입니다. 뉴턴과 쌍벽을 이룬 첫번째 정답자 고트프리드 라이프니츠(1646~1716), 두 사람은 수학사에서 가장 치열한 대결을 하게 돼죠.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대결은 베르누이가 낸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베르누이가 낸 문제는 도전자들이 싸이클로드를 알고 있는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싸이클로드는 자전거가 달릴 때 나타내는 궤적이죠.
자전거 바퀴의 한 거점을 정합니다. 바퀴가 갈 때 이 점은 일정한 곡선을 그립니다. 이 곡선을 싸이클로드 라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저 끝까지 공을 굴렸을 때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였습니다. 이 쪽은 싸이클로드 곡선이고 이 쪽은 직선입니다. 자, 그럼 두 공을 동시에 출발시켜 보겠습니다. 직선 보다는 싸이클로드 곡선이 더 빠르죠. 제일 빠른 선을 안다는 것은 최소값을 안다는 겁니다. 즉 미적분을 안다는 것이죠. 베르누이는 도전자들이 미적분을 아는지 시험했던 거죠.
남명렬/배우: 이 당시 학자들 관심은 움직이는 세계가 있었습니다. 직선 보다 더 빠른 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봐서 이미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성과에 기여한 첫번째 인물, 누굴까요?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철학자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낯선 도시에서 길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철학자는 여기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저는 열차역을 찾습니다. 물어 물어 가는데 영 쉽지가 않네요. 직진~ 왼쪽~위로~아~ 위쪽~겨우 찾아왔네요. 경도와 위도, 사실 두개의 숫자만 알고 있으면 우리는 어디든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위치가 움직이면 숫자도 계속 변합니다. 이건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찾아가는 철학자가 생각해 낸 거죠. 데카르트市 프랑스, 이 마을은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1802년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갈릴레오, 케풀러, 셰익스피어, 몽테뉴가 있었던 17세기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그도 철학자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위대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 얘기에 그가 왜 등장할까요. 이 집을 들어가 보면 이유를 알겠네요. 데카르트 생가,
실비 풀리겐/데카르트 박물관장: 들어오세요. 보시다시피 작은 시골에 있는 집입니다. 16세기에 지어졌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데카르트는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그의 전 생애가 이 집안에 있습니다. 그는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고 최후는 스웨덴에서 마쳤습니다. 거기서 가져온 유골의 복제품까지 있네요. 데카르트는 평생 늦잠을 잤습니다. 그의 밀랍 인형도 졸고 있네요. 오후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공상을 하며 보냈습니다. 게을러 보이지만 길일을 찾는데는 누구보다 부지런한 사람이었죠.
박물관장: 데카르트는 예수회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여기 보이는 대학자들의 책들을 공부했죠. 세네카, 다캉, 비르질 같은 철학자들입니다. 이 책들을 다 읽었지만 데카르트는 싫증을 냅니다. 그는 수학을 좋아했기 때문이죠. 논리의 명백함 때문에 데카르트는 수학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철학, 법학, 종교학, 정치, 인간이 그렇게 많은 진리를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철저히 모든 걸 의심합니다. 유일하게 의심하지 않고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그는 수학을 붙잡습니다.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다 버린 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행과 모험을 꿈꾸는 17세기, 데카르트는 군대에 갑니다. 데카르트는 네델란드 용병에 지원합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 사람들과 만나죠. 어느날 그의 군대가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됐습니다.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남은게 없었던 청년, 그는 여전히 수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기 한 점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할까. 왼쪽~ 더 왼쪽~ 윗쪽~ 조금 더 위~ 너무 모호합니다. 데카르트는 정확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X축의 수평선과 Y축의 수직선, 열십자(+)가 만나는 점을 원점이라고 한다면 점은 두 개의 숫자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5, 3 이래요.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바뀌는 주식시세, 변화하는 숫자는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듭니다. 45320 44450 45210 45730 45430 45150 45100 44980 44600 44750 44890 45200 45450 이 숫자만으로는 주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죠. 데카르트의 좌표 덕분에 이렇게 (그래프로)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움직임을 좌표 위 그래프로 나타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프는 양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흐름을 보여주죠. 움직이는 방향이 한 눈에 보이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위치를 수로 표시할 수 있다. 이것 만이 좌표의 장점은 아닙니다. 데카르트는 좌표에서 기하와 수가 합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데카르트의 시대까지 1800년 동안 수학을 지배한 것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쓴 원론입니다. 그는 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죠. 원의 정의(유클리드)-어떤 선으로 둘러싼 도형이 있어서, 한 점에서 직선들을 그었을 때 그 도형에 놓이는 부분이 모두 서로 같으면 그 도형을 원이라 부른다. 한번 들어서는 이해가 안갑니다. 데카르트는 그 긴 정의를 좌표 위에 올려봅니다. 즉 숫자를 넣어주는 거죠. 어떻게 될까요. 각 점들은 수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점들을 모두 모으면 하나의 식이 나옵니다. x제곱+y제곱=r제곱 이것이 데카르트의 원입니다. 간결합니다. 더디게 발전하던 수학이 한 차원 올라갑니다. 수학자들은 곡선에 까지 눈을 돌립니다. 수학은 이제 움직이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저는 지금 하노버로 갑니다. 하노버까지 60여 킬로미터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겠네요. 시속 60킬로미터 이건 평균 속도입니다. 계속 60으로 가는 건 아니죠. 속도는 끊임없이 바뀝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의 속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같은 시기에 두명의 수학자가 답을 찾았습니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 독일의 라이프니츠, 먼저 라이프니츠를 만나 볼까요. 독일 하노버, 이 대학은 하노버 대학이라고 부르다가 2008년부터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 대학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사람이름을 부치는 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죠. 이 도시에 라이프니츠의 이름이 붙은 연구소만 무려 서른개가 넘습니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죠. 그중 라이프니츠의 평생이 담겨 있는 곳, 그의 이름이 붙은 도서관입니다.
페터 마르마인/도서부관장: 이제 라이프니츠의 유산이 보관되어 있는 방으로 가겠습니다. 플렉씨가 문을 열어줍니다.
수학자는 죽으면 무엇을 남길까요?
도서부관장: 라이프니츠의 유산 중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계산기입니다.
1694년 최초로 사칙연산을 했던 계산기, 곱셈 나눕셈을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그 당시엔 대단히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워 완성되기까지 몇십년이 걸렸죠. 이걸로 어떻게 계산을 했을까요. 1234x23을 해보죠. 먼저 고리를 돌려 1234의 1 2 3 4를 맞춥니다. 23의 1 단위 3을 세번 돌리고 10단위로 옮긴 후 두번 돌립니다. 28382 정답입니다. 컴퓨터의 할아버지쯤 되겠네요.
도서부관장: 계산기는 라이프니츠의 유산 중 가장 눈에 띄는 기계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원고들입니다. 굉장히 많은 양의 원고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십만쪽 이상의 원고들을 남겼는데 만오천편 이상이 동시대 학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입니다.
십만쪽의 원고를 알파벳 순서로 정리해 놓은 서랍, 뉴턴의 이름도 보이네요. 라이프니츠의 원고는 너무 방대해서 아직도 정리 중에 있습니다. 15만점이나 되지만 그의 저작물은 노트나 편지, 메모들뿐입니다. 수학 철학 과학 모두 잘 했지만 그 어떤 분야에서도 체계적인 논문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대학자 뉴턴에게서 받은 편지도 두 통 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받은 이 편지는 나중에 일어나는 저작권 싸움에 빌미가 됩니다. 라이프니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처럼 모든 학문을 다 배우고 꼭 그것을 연결시켰던 학자입니다. 스물 아홉의 어떤 천재적인 생각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죠. 그것은 움직이는 것에 관한 것, 미분이었습니다. 미분으로 우리는 순간 속도를 알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좌표를 이용해 가로를 거리라 놓고, 세로축을 시간으로 놓습니다. 하노버까지 60킬로미터를 한 시간만에 갔으니 시속 60, 평균속도입니다. 그러나 달리는 내내 속도는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가운데 지점을 통과할 때는 얼마였을까요?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입니다. 하노버까지 60킬로미터를 한시간만에 갔으니 시속 60, 좀 더 정확한 속도를 구하려면 이 간격을 좁히면 됩니다. 이 간격의 속도는 시속 65킬로미터이네요. 좀 더 좁히면 시속 68, 더 좁히면 시속 68.5, 이 간격을 좁히면 좁힐수록 우리는 더 정확한 속도의 값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히 그 지점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평균속도가 한없이 가까워지는 어떤 일정한 값을 순간 속도로 받아들인 것이죠. 이것이 미분입니다 (극대와 극소, 접선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방법).
1675년 라이프니츠는 이 놀라운 성과를 학술기요라는 잡지에 싣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학은 움직이는 걸 다룬 적이 없습니다. 라이프니츠에 이르러 우리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흐르는 액체의 부피, 가격의 순간변화율, 대기압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수학은 이때 다시 탄생했습니다. 미분이 오늘날 이렇게 중요해지리라는 걸 당시의 학자들은 알았을까요? 라이프니츠는 알았습니다. 미분법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을 직감했죠. 자신의 연구가 인류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로 라이프니츠는 부풀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미 몇 년전 그와 똑 같은 생각을 한 수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라이프니츠는 표절자로 몰리게 돼죠. 라이프니츠가 논문을 내기 십년전, 영국의 이 수학자도 미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고향인 이곳 그랜섬에서 만들어졌죠. 뉴턴의 생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입니다. 여기서 만유인력을 발견했죠. 뉴턴이 살아있을 때처럼 실내는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습니다. 그날은 갈릴레오가 죽은 날이기도 하죠. 학자로서는 축복이겠지만 어린 시절은 사실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스티븐 스노벨렌/뉴턴생가 관리소장: 뉴턴의 어머니는 뉴턴이 태어나던 해 4월에 결혼했습니다. 뉴턴은 열달을 다 못채운 미숙아였지요. 살아난 것 자체가 행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뉴턴에게는 아주 불행한 일이었지요.
-뉴턴은 이곳에 할머니와 함께 남겨집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 이복동생들과는 친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이 뉴턴을 생각하기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뉴턴의 방, 이 시절 그의 놀이 상대는 몽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죠. 이 방은 뉴턴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세상에 궁금한 것은 많았습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건 빛이었죠. 눈으로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실험해 보았습니다. 가능한한 눈의 뒤쪽 가까이 찔러 넣으며 빛이 어떻게 보이는지 관찰했죠. 눈이 멀지도 모르는 위험 같은 건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생가 옆엔 뉴턴 만큼 유명한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50년을 기념해 나무 위원회가 영국의 가장 위대한 나무 중 하나를 선정했죠. 정말 소문처럼 그 위대한 발견이 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있었을까요. 어쨌던 여기에서 뉴턴은 친구들과는 떨어진채 사색을 즐겼습니다. 책 속에도 가르침이 있었지만 미래에 과학자가 될 이 아이는 모든 주변 현상에 관심을 가졌죠. 떨어지는 사과,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체였습니다. 사과는 직선으로 떨어지지만 행성은 타원으로 돕니다. 케플러가 밝혀냈죠. 타원으로 돌 때 행성은 늘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빠르고 어떤 때는 느립니다. 타원이 돌 때 순간의 속도,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뉴턴은 미분을 사용합니다. 뉴턴의 용어로는 유유리입니다. 1665년 그는 속도에 대한 변화들을 유유리라 정합니다.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빨랐지요. 17세기 영국 왕립협회는 유럽 학문의 중심이었습니다. 1703년부터 25년간 아이작 뉴턴은 이 왕립협회의 회장이었죠. 이때 라이프니츠는 일반 회원이었습니다. 뉴턴은 미분의 개념을 발견한지 20년만에 동료들의 권유로 한권의 책을 출판합니다. 정식제목은 자연철학에 대한 수학적 원리입니다(프린키피아).
키스 무어/왕립학회 도서관장: 이 책은 왕립학회에 있는 가장 유명한 고문서들 중 하나입니다. 아이작 뉴턴이 지은 프린키피아입니다. 프린키피아는 왕립학회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첫번째 판의 원고입니다.
뉴턴이 직접 육필로 쓴 원고입니다.
도서관장: 이 책의 제목은 자연철학에 대한 수학적 법칙들입니다. 뉴턴은 이 책에서 수학적 표현들을 이용해 우주의 원리를 풀고자 했습니다.
만유인력도 관성의 법칙도 행성의 타원궤도문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미적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미적분을 알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책이죠. 라이프니츠보다 10년 빨리 생각했지만 사실 출판은 늦었습니다. 20년에 걸쳐 쓰인 이 책은 200년에 걸쳐 읽혀지고 있는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뉴턴이 요즘 학자였다면 재빨리 자신의 연구결과를 학회지에 발표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내성적이고 은둔자형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적분 저작권을 두고서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학자들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을 베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추종자들은 생각이 달랐죠. 뉴턴이 베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싸움은 대륙과 영국간의 싸움으로 번집니다. 베르누이는 라이프니츠 편이었습니다. 우선권 논쟁이 치열하던 때 싸이클로드 문제를 냈지요. 뉴턴이 미적분을 알고 있는지 떠본 겁니다.
남명렬: 라이프니츠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왕립협회에 청원을 합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이 왕립협회의 회원이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일반회원이었고 뉴턴은 당시 왕립협회 회장이었어요. 왕립협회는 조사위원회를 열어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발표를 합니다.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턴이다.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의 두번째 발견자가 되었습니다. 왕에게 2등은 필요 없습니다.
(노이슈태터 교회 독일 하노버),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작은 교회에 묻혔습니다. 왕립학회의 판정으로 라이프니츠의 충격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171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엔 비서 한명만 참석했을 뿐 말년은 고독했습니다. 미적분의 중요성을 알았고 끝까지 매달렸지만 생존에 미적분은 라이프니츠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영국 런던), 영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뉴턴은 여기에 묻혔습니다. 셰익스피어, 바이론, 헨델, 처칠, 영국의 위대한 사람들의 묘가 있는 곳, 뉴턴은 가장 큰 자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누릴 영광을 다 누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누웠습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소모적으로 보이지만 학자로서는 당연한 싸움이었죠. 삶과 죽음은 뉴턴의 승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퉜던 미적분의 생애는 다릅니다. 라이프니츠 김나지움, 두 사람의 미적분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입니다. 전 세계의 수학강의실에서 쓰는 미적분은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입니다. 디에프인티그럴 이 같은 기호도 라이프니츠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라이프니츠와 뉴턴 두 사람이 동시에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미적분은 교실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움직이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왔습니다.
남명렬: 신기한 일입니다. 묘하게도 같은 시기 다른 장소에서 하나의 생각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이전의 세계를 뒤바꿀만한 어마어마한 생각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각은 이 세상에 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다가 무르익고 무르익어서 동시대에 터져나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씨앗은 두명의 천재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뒤바꾸어 놓았죠. 그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로켓을 쏘고 행성을 탐사하는 세계, 그건 그들이 보여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아마추어 수학자가 낸 문제, 그 봉인은 3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위대한 수학문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푸앵카레의 추측, 끝. (EBS 다큐프라임 1298회에서 정리).
①인류 문명 최초로 수학이 이집트에서 등장한 이후 그리스로 갔다가 인도로 왔다가 다시 유럽으로 갔다. 여기서 수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1696년 스위스 바젤, 부유한 가문의 한 귀족인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1667~1748)가 당대의 이름난 수학자들에게 수학문제 편지를 썼다. 물론 그는 정답을 안다. 편지 끝에 이런 말도 함께 덧부친다. 이 문제를 통해 우리는 어린 아이와 어른을 가려낼 것이다. 정답을 맞추면 영원한 명성을 얻을 것이다. 마감기한은 6개월, 베르누이의 문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이었다. 실제로 겉봉에 그렇게 썼다. 당시 교통수단은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문제만 배달 되는데 몇 달이 걸렸다. 문제는 간단하다. 높이가 다른 두 점, A와 B가 있다 (파리 에펠탑 꼭대기가 A, 밑에 대각선에 한 지점이 B), A와 B를 잇는 최단 강하선, 즉 물체를 가장 빨리 내려오게 하는 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직선이 답이라면 문제를 내지도 않았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도 문제를 받았다. 법률가, 종교가, 외교관인 그는 수학실력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라이프니츠, 그가 첫번째 정답자였다.
②. 사실 베르누이가 이 문제를 낸건 바다 건너 영국에 살고 있는 아이작 뉴턴의 실력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답이 오지않자 베르누이는 마감기한을 연장한다. 베르누이의 문제가 뉴턴의 손에 도착한 건 해를 넘긴 후였다. 문제를 보고 그는 베르누이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영국 정부에서 화폐주조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아주 바빴다. 그러나 퇴근 후 꼼짝도 않고 앉은지 몇시간 만에 문제를 다 풀어버렸다. 그때까지 베르누이가 낸 문제를 맞힌 수학자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 중에 겨우 4명 뿐이었다. 다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주가 걸렸다. 그런데 영국의 뉴턴은 하룻밤 만에 그 문제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답안지를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없이 베르누이에게 보냈다. 정답이었다. 끝까지 다 본 베르누이는 그것을 누가 보냈는지 그냥 알았다. 그리고 말했다.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안다. 사자는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이었다. 뉴턴과 첫번째 정답자 고트프리드 라이프니츠(1646~1716), 두 사람은 수학사에서 가장 치열한 대결을 한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대결은 베르누이가 낸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③ 베르누이가 낸 문제는 도전자들이 싸이클로드를 알고 있는가 라는 문제였다. 싸이클로드는 자전거가 달릴 때 나타내는 궤적이다. 자전거 바퀴의 한 거점을 정한다. 바퀴가 갈 때 이 점은 일정한 곡선을 그린다. 이 곡선을 싸이클로드 라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저 끝까지 공을 굴렸을 때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였다. 이 쪽은 싸이클로이드 곡선이고 이 쪽은 직선이다. 두 공을 동시에 출발시켜 보자. 직선 보다는 싸이클로드 곡선이 더 빠르죠. 제일 빠른 선을 안다는 것은 최소값을 안다는 거다. 즉 미적분을 안다는 것이다. 베르누이는 도전자들이 미적분을 아는지 시험했다. 이 당시 학자들 관심은 움직이는 세계가 있었다. 직선 보다 더 빠른 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봐서 이미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성과에 기여한 첫번째 인물은 17세기 당대 가장 뛰어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1596~1650)다.
④ 데카르트는 예수회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자들 세네카, 다캉, 비르질 같은 철학자들의 책들을 다 읽었지만 싫증이 났다. 그는 수학을 좋아했다. 논리의 명백함 때문에 수학을 좋아했다. 데카르트는 철저히 모든 걸 의심한다. 유일하게 의심하지 않고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그는 수학을 붙잡는다.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다 버린 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행과 모험을 꿈꾸는 17세기, 데카르트는 군대에 간다. 데카르트는 네델란드 용병에 지원한다. 유럽의 여러 도시 사람들과 만난다. 어느날 그의 군대가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됐다.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남은게 없었던 청년, 그는 여전히 수학을 생각하고 있다. 저기 한 점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할까. 데카르트는 정확한 방법을 찾아낸다. X축의 수평선과 Y축의 수직선, 열십자(+)가 만나는 점을 원점이라고 한다면 점은 두 개의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 이 점은 5, 3 이래요.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바뀌는 주식시세, 변화하는 숫자는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들다. 숫자만으로는 주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데카르트의 좌표 덕분에 그래프로 한 눈에 볼 수 있다. 모든 움직임을 좌표 그래프로 나타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프는 양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흐름을 보여준다. 움직이는 방향이 한 눈에 보이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⑤ 위치를 수로 표시할 수 있다. 이것 만이 좌표의 장점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좌표에서 기하와 수가 합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데카르트의 시대까지 1800년 동안 수학을 지배한 것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쓴 원론이다. 그는 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원이란 어떤 선으로 둘러싼 도형이 있어서, 한 점에서 직선들을 그었을 때 그 도형에 놓이는 부분이 모두 서로 같으면 그 도형을 원이라 부른다. 한번 들어서는 이해가 안간다. 데카르트는 그 긴 정의를 좌표 위에 올려본다. 즉 숫자를 넣어주는 거다. 어떻게 될까요. 각 점들은 수로 표시할 수 있다. 이 점들을 모두 모으면 하나의 식이 나온다. x제곱+y제곱=r제곱 데카르트의 원이다. 간결하다. 더디게 발전하던 수학이 한 차원 올라간다. 수학자들은 곡선에 까지 눈을 돌린다. 수학은 이제 움직이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⑥ 하노버까지는 60여 킬로미터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시속 60킬로미터가 평균 속도다. 계속 60으로 가는 건 아니고 속도는 끊임없이 바뀐다. 그럼 이 순간의 속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같은 시기에 두명의 수학자가 답을 찾았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 독일의 라이프니치, 먼저 라이프니치를 만나보자. 독일 하노버, 이 대학은 하노버 대학이라고 부르다가 2008년부터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 대학으로 바뀌었다. 대학에 사람이름을 부치는 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이 도시에 라이프니츠의 이름이 붙은 연구소만 무려 서른개가 넘는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이 붙은 도서관도 있다.
⑦ 라이프니츠는 계산기를 남겼다. 1694년 최초로 사칙연산을 했던 계산기, 곱셈 나눕셈을 못했던 그 당시엔 대단히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컴퓨터의 할아버지쯤 된다. 계산기는 라이프니츠의 유산 중 가장 눈에 띄는 기계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원고들이다. 라이프니츠는 십만쪽 이상의 원고들을 남겼는데 만오천편 이상이 동시대 학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다. 스물 아홉의 청년에게 천재적인 생각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에 관한 것, 미분이었다. 미분으로 우리는 순간 속도를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좌표를 이용해 가로를 거리라 놓고, 세로축을 시간으로 놓는다. 하노버까지 60킬로미터를 한 시간만에 갔으니 시속 60, 평균속도다. 그러나 달리는 내내 속도는 변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가운데 지점을 통과할 때는 얼마였을까?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하노버까지 60킬로미터를 한시간만에 갔으니 시속 60, 좀 더 정확한 속도를 구하려면 이 간격을 좁히면 된다. 이 간격의 속도는 시속 65킬로미터다
⑧ 1675년 라이프니츠는 이 놀라운 성과를 학술기요라는 잡지에 싣는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이었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학은 움직이는 걸 다룬 적이 없다. 라이프니츠에 이르러 우리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흐르는 액체의 부피, 가격의 순간변화율, 대기압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수학은 이때 다시 탄생했다. 미분이 오늘날 이렇게 중요해지리라는 걸 당시의 학자들은 알았을까? 라이프니츠는 알았다. 미분법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을 직감했다. 자신의 연구가 인류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로 라이프니츠는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이미 몇 년전 그와 똑 같은 생각을 한 수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표절자로 몰리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논문을 내기 십년전, 영국의 뉴턴도 미분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는 뉴턴의 고향인 그랜섬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여기서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그날은 갈릴레오가 죽은 날이기도 하다. 학자로서는 축복이겠지만 어린 시절은 사실 행복하지 못했다.
⑨. 17세기 영국 왕립협회는 유럽 학문의 중심이었다. 1703년부터 25년간 아이작 뉴턴은 이 왕립협회의 회장이었다. 이때 라이프니츠는 일반 회원이었다. 뉴턴은 미분의 개념을 발견한지 20년만에 동료들의 권유로 한권의 책을 출판한다. 제목은 자연철학에 대한 수학적 원리입니다(프린키피아). 이 책은 왕립학회에 있는 가장 유명한 고문서들 중 하나이다. 뉴턴은 이 책에서 수학적 표현들을 이용해 우주의 원리를 풀고자 했다. 만유인력도 관성의 법칙도 행성의 타원궤도문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나왔다. 미적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미적분을 알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책이다. 라이프니츠보다 10년 빨리 생각했지만 사실 출판은 늦었다. 20년에 걸쳐 쓰인 이 책은 200년에 걸쳐 읽혀지고 있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뉴턴이 요즘 학자였다면 재빨리 자신의 연구결과를 학회지에 발표했을 것이다. 그는 아주 내성적이고 은둔자형 성격이었다. 그러나 미적분 저작권을 두고서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국의 학자들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을 베꼈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의 추종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뉴턴이 베꼈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싸움은 대륙과 영국간의 싸움으로 번진다. 베르누이는 우선권 논쟁이 치열하던 때 싸이클로드 문제를 냈다. 뉴턴이 미적분을 알고 있는지 떠본 거다. 라이프니츠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왕립협회에 청원을 한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이 왕립협회의 회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일반회원이었고 뉴턴은 당시 왕립협회 회장이었다. 왕립협회는 조사위원회를 열어 보고서를 제출해서 발표를 한다.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턴이다.
⑩ 두 사람의 싸움은 학자로서는 당연한 싸움이었다. 삶과 죽음은 뉴턴의 승리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다퉜던 미적분의 생애는 다르다. 두 사람의 미적분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다. 전 세계의 수학강의실에서 쓰는 미적분은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다. 오늘날 우리는 라이프니츠와 뉴턴 두 사람이 동시에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미적분은 교실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우리를 움직이는 세계로 데려왔다. 신기한 일이다. 묘하게도 같은 시기 다른 장소에서 하나의 생각이 나왔다. 그것도 이전의 세계를 뒤바꿀만한 어마어마한 생각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생각은 이 세상에 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다가 무르익고 무르익어서 동시대에 터져나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 씨앗이 두명의 천재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 세상에 우리는 산다. 로켓을 쏘고 행성을 탐사하는 세계, 그건 그들이 보여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