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은색 봄비
저-유가형 5시집
출-시와 반시
독정-2023.12.5.
작가는 『나비 떨잠』 『찬바람 늑대』 『밤이 깊으면 어떴씁니까』 명패를 단 집을 세 채 지녔다. 집터가 있는 곳도 시집, 동시집, 수필집 장르로, 여러 장르의 집터에 터를 잡고 드나들며 글을 쓰는 재능 부자 작가다. 집터가 다양하듯이 소재 또한 다양한 것에서 작품을 길러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삭아삭 초록 향이 나던 당신이지만 팔십 평생 살고 보니 그 짠한 후줄거림!-이라며 남편에 대한 애정을 ‘오이장아찌’시에 담고, 표제가 된 ‘은색 봄비’부터 비슬산 참꽃을 가슴에 싸안으며 쓴 ‘꽃분홍 보자기’며 작은 국수로 은유한 ‘폭포’까지 눈은 늘 자연에 머물러 산다.
-대지의 젖꼭지를 아프게 움켜쥔 채 빨아대던/갓 씻은 색 유리알 같은 빨간 떡잎/꼼지락꼼지락 배냇저고리 겨우 벗어놓고/아직도 가시지 않은 젖내 나는 모가지를/ 간들간들 까만 베레모 덮어쓴 연둣빛 입술-‘봄 드라마’에서 보듯, 시인은 자연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드라마처럼 읽어내는 시력을 지녔다.
-손님 불 들어가요/ 종업원의 반쯤 벗겨진 목양말이/ 바쁘다 바빠//(중략)
아버지 불 들어가요? 아버지 불 들어가요?//(중략)
지글거리는 눈물/비통한 이승과의 이별이 지글거린다.//(중략)
장어 등껍질이 볼록 솟아 젓가락에 붙어있다.-시 ‘장어 구이집’에서
불에 타는 장어 등껍질이나, 저승에 들 때 화장터에서 아버지 시신에 불 들어가던 기억이나 뭐가 다르랴? 생명 소멸의 허무를 비유, 은유법에 넣어서 시로 버무리며 인생 허무 같은 군더더기 한 마디 없이 ‘남은 자들은 허이~ 허이~ 허공에 손을 넣을 뿐’이라는 함축된 표현으로 시를 감싼다. 때로는 경상도 사투리로 범벅을 만들어 쓴 시가 범벅처럼 구수하게 읽힌다
-(중략) 아이고! 비끼라 보자/나뚜소, 내가 할낀데 어무이 와카교?/
치맛자락 불구멍 낼라 단디 걷어붙이고/ 한쪽 발은 부뚜막에 야무딱지게 올리고/ 알프리하게 떠 넣어야제/ 수제비 잘 익어 하늘 가로 다 동동 떠 가는 것 좀 바라야/ 웬 일고? 연기도 안 나는데 눈물은 와 나노?/ 우습제이? (중략)
시인의 신선한 발상에 가장 감탄한 시는 ‘신의 컴퍼스’다. 신이 컴퍼스를 들고 세상을 만든 터에 비행기, 빗방울, 달과 해도 동그라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발견!
-(중략) 나고 죽는 일 또한 하나의 컴퍼스 안/ 동그라미 속에 또 동그라미 벗어나지 못하는/ 동그라미 금 밖으로 못 나가는 삶- ‘신의 컴퍼스’에서
시인의 삶을 돌아보니 상담사 자격증을 가졌고 생명 기증까지 서약한 것이 나랑 공통점이긴 하지만, 봉사를 찾아 시간과 몸을 날리며 살아온 그녀의 발자취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삶이다. 받은 달란트에 감사해서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를 해온 분이다. 나도 그녀에게 상담 전화를 한 적 있다. 몽골 여행을 함께 가기 전, 화장실이 밖에 있는 몽골의 밤에 수다스러운 오줌 버릇이 걱정이라고 전화했다가 ‘뭐가 걱정이야? 오강을 준비해 가요.’ 시원하게 해결책을 주던 분이셨다. 거기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소록도를 찾아가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30여 년 넘게 봉사해 온 삶이니….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주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불평의 말 한마디도 씹히지 않았다. 감사를 품고 곱게 잘 살아온 마음 바탕의 집터에서 시를 생산해 냈기에 유기농을 먹듯 선뜻 시속에 빠져들며 힐링을 즐기고 시속의 향기를 온기로 받아 치유도 얻는다. 신이 가진 동그란 컴퍼스 안에서 이웃을 찾아 나서는 터전의 반경도 선생님처럼 좀 더 넓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키우게 되는 날, 시인과 시집에 감사를 올린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