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은 천희 5년(1021) 임강군(강서성 청강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진사가 된 지 2년 후에 서하와의 강화가 체결되어 막대한 세공의 지출과 군비의 지출 등으로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왕안석은 당시의 황제 인종에게 상소를 올려 소수인의 폭리를 억제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한 법제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안석 화상
그로부터 10년 후인 치평 4년(1067) 영종이 죽고 신종(神宗)이 19세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는 나날이 쇠퇴해가는 국위를 비통히 여겨 어떻게 하든 국가를 재건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69년 왕안석을 부재상에 발탁하고, 이듬해에는 재상으로 임명하여 법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왕안석이 생각한 정책은 이른바 ‘신법(新法)’이라 불리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부국강병책이었다.
왕안석은 먼저 재정 관리의 개혁에 착수하여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국가의 재정 사무를 통할하여 새로운 재정 법규를 제정하고 시행을 맡는 관청으로 설치 후 불과 1년 만에 4할의 경비를 절감하는 데 성공하였다.
송 신종
왕안석을 등용해 재정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신종
왕안석이 실시한 신법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청묘법(靑苗法)’이었다. 청묘법이란 단경기(端境期)1) 에 국가가 낮은 이자로 농민에게 곡식과 돈을 빌려주어 농민을 고리대금의 착취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농민들은 보통 지주들로부터 돈과 곡식을 빌려 추수 때 갚았는데, 그 금리가 무려 6, 7할에서 심한 경우는 10할이었다. 엄청난 착취였다. 청묘법의 실시로 그 이율은 2할 이하로 떨어져 농민들이 큰 혜택을 받았다.
다음으로 ‘면역법(免役法)’을 시행했는데, 이 법은 돈을 내면 무상 노역을 면제하는 제도였다. 그때까지 무상 노역이 면제되었던 관원이나 사원의 특권 계급에게서도 그에 상응하는 화폐를 징수하여 이 돈으로 노역 희망자를 고용함으로써 농가의 무상 노역에 의한 부담이 경감되었다.
또 ‘시역법(市易法)’, ‘균수법(均輸法)’은 물자 유통과 물가 조정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대상인들의 매점 매석에 의한 물가의 조작을 방지하는 법이었다. ‘방전 균수법(方田均輸法)’은 대지주들의 탈세를 방지하는 법으로써 농지의 측량을 실시하여 은전(隱田)2) 을 적발하고 불합리한 세제를 시정하였다. 이 밖에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치장법(置將法)’등 군사력의 증강을 도모하는 새로운 군사제도도 실시되었다.
왕안석의 이 같은 신법은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나, 대지주·대상인·고리대금업자 등은 목전의 이익이 줄어들자 강하게 반대하였다.
왕안석을 신법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구법(舊法)의 대표자는 사마광(司馬光)이라 할 수 있다. 사마광은 천희 3년(1019) 출생으로 왕안석 보다 두 살 위였다. 섬주(산서성 하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모두 진사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소아격옹도(小兒擊甕圖)’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어렸을 때 뜰에서 친구들과 놀던 중 한 아이가 물독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나 사마광은 침착하게 돌을 던져 물독에 구멍을 내고 물을 빼어 그 아이를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마광을 대표로 신법을 반대한 인물로는 한기, 여회(呂誨), 소동파(蘇東坡), 구양수(歐陽修) 등을 들 수 있다. 황족이나 궁정 안에서도 반대자가 많았다. 반대파들은 신법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깨뜨리고 세상의 인심을 어지럽게 할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화산(華山)3) 이 무너지고 혜성이 나타나며 가뭄이 오래 계속되는 것도 모두 왕안석의 신법이 가져오는 재앙이라고 비난하였다.
반대파의 대신 정협(鄭俠)은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신법을 폐지하고 왕안석을 몰아내면 반드시 10일 이내에 비가 내릴 것이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거든 내 목을 쳐도 좋다.”
이 같은 반대파들의 강경한 반발 앞에 신종은 동요의 빛을 보였으나, 왕안석은 끝까지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계속 신법을 추진해 나갔다. 조정의 구신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자 왕안석은 젊은 관리를 등용하여 신법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신법당(新法黨)’이라 부른다.
반대로 신법을 반대하는 세력은 고급 관료들, 외척, 황제의 측근들이었는데, 이들은 신법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자 크게 반발한 것이다. 인종의 미망인 황태후 고씨(高氏)도 그의 친정이 신법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보게 되자 신법을 몹시 혐오하였다.
때마침 가뭄이 계속되고 요나라와의 관계가 다시 긴장되어 인심이 흉흉해지자 반대파는 이를 모두 왕안석의 탓이라 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왕안석은 마침내 1074년 강녕(남경)의 지방 장관으로 좌천되었다.
왕안석의 옛 집
처음 신법이 채용되어 왕안석의 집권 시대가 되자 사마광은 관직을 사임하고 낙양으로 돌아가 그의 필생의 역저인 편년체 역사책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희녕 7년(1074) 왕안석의 실각이 곧바로 신법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법당의 한강(韓絳)과 여혜경(呂惠卿) 등이 계속 조정에 남아 여전히 신법에 의한 정치를 추진하고 있었다.
구법당은 그들이 주장한 대로 지금까지의 전통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 뿐 신법보다 훌륭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국가를 어떻게든 부흥시켜야겠다는 당시의 황제 신종과 백성들의 공통된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왕안석은 실각한 이듬해 다시 조정에 복귀하여 재상이 되었다. 왕안석이 없이는 역시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안석에 대한 신종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신종이 왕안석을 강녕에 좌천시킨 것은 어쩌면 황후나 황태후의 불만을 일시적으로 냉각시키기 위한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상으로 복귀한 왕안석은 전과 같은 패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법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신법당 가운데 참지정사로서 신법 추진의 핵심 멤버였던 여혜경은 원래 관료 출신으로서 신법의 추진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출세해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자 왕안석의 반대파로 둔갑하여 왕안석이 극비에 붙이고 있던 일들을 누설하였다. 그리고 ‘왕안석에게 반역의 죄’가 있다고 참소까지 하였다. 이로써 신법당은 분열의 위기를 맞아 신법 시행에 점점 불리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왕안석이 복귀한 이듬해 그의 아들 왕방(王雱)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왕방은 진사시에 급제하여 경의국 수찬의 벼슬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2년 전에도 동생 왕안국을 잃었다. 왕안석은 이 같은 가정의 비극에 영향을 받았음인지 사임을 원하여 강녕(남경)의 종산에 들어가 은서 생활을 하였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북송의 한림학사 장택단이 청명절의 북송의 도성 모습을 그린 그림
1085년 신종이 죽고 10세의 철종이 즉위하여 태황 태후 고씨(高氏)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태황 태후는 일찍부터 신법에 반대하여 왕안석을 몰아내고 조상 전래의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여러 번 신종에게 울면서 호소한 적이 있었다. 태황 태후가 섭정하면서 맨 먼저 한 일은 구법당의 사마광을 재상으로 기용한 일이었다.
사마광이 재상의 자리에 오른 후 1년 사이에 16년(1069~ 1085)간 실시되었던 신법의 대부분이 폐지되고 신법당의 관리들도 대부분 좌천당했다. 사마광은 구법당과 대지주·대상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만가(萬家)의 생불(生佛)’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그는 신법의 폐지를 자기 일생의 사업이라 생각하고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신법을 뿌리 뽑기 전에 내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철종의 원우 원년(1086) 4월, 왕안석은 강녕에서 신법이 사실상 모두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가운데 병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취옹정
당송대의 유명한 문인 구양수가 스스로 호를 취옹이라 하였다. 정자 하나를 짓고 〈취옹정기(醉翁亭記)〉란 시를 읊었다.
[출처] 왕안석의 신법|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