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積善)의 덕(德)
나는 할머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수년 전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그런 할머니가 여태껏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 건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애절한 사연을 단종 실화처럼 풀어내 들려주시곤 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새댁이 된 어머니는 할머니에 대한 고단한 시집살이의 추억은 뒤로 미뤄둔 채 늘 그리운 표정으로 그때의 일화를 밥상에 반찬처럼 올려 주시는 게 아닌가.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할머니에 대한 추모의 정은 심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이하는 것처럼 늘 아련함 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부간에 좋은 정 미운 정을 평생 간직하며 좋은 사연들만 들려주신 어머니는 당신의 시어머니가 인생의 길잡이였다는 걸 늘 우리에게 강조하고 심어 주신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요즈음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자랑스러운 우리 집안의 내력이 되어 가보처럼 빛나고 있다.
때는 1950년대 후반 피난에서 돌아온 강원도 산골 동네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피임이라는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암울한 시절, 집집이 생겨난 아이들은 연년생에 칠팔 남매가 보통에 속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큰아들이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는다. 삼촌과 조카가 한집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살림을 내지 못한 아들네 가족까지 입에 풀칠해야 할 식솔은 보통 십여 명을 넘었고, 강냉이밥조차도 모자라 보릿고개가 되면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든 형편없든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한동네에 살던 고모네 집은 늘 가난했다. 열두 명이나 되는 대 가족에 먹을 게 부족한 건 뻔한 이치였다. 당시 이 댁에는 둘째 며느리가 되어 영월에서 시집온 엄 씨 성을 가진 새댁이 있었다. 시하층층 시집 어른과 낯선 시집살이에 땟거리조차 없어 늘 초췌하고 야위어만 갔다.
이를 본 할머니는 사돈이 된 그 새댁을 불러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나면 먹을 게 별로 없다는 비참한 말을 듣게 된 할머니는 그 새댁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밥을 차려주고 얼른 우리 집으로 건너오라고’.
그날 이후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떠주고 남은 밥 누룽지에 물 한 바가지를 부어 끓인 후 주걱으로 벅벅 긁어서 그 새댁에게 먹도록 했다. 바가지를 부여잡고 단 꿀 빨듯 하는 그 새댁을 보며 할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이렇듯 몇 년을 보낸 그 새댁 네는 도시로 이주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자동차 수리 기술을 익힌 남편은 성실하고 기술도 좋았는지 이십 년이 지난 70년대 중반 그 도시에서 제일 큰 자동차 수리공장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인생의 큰 반전 이 아닐 수 없다. 고생 끝에 이룬 영광이었고 신화를 이뤘다고 모두 수근 됐다.
아들은 유명한 대학을 나와 시의원으로 활약하고 의사 사위에 남부러울 거라곤 하나도 없는 강원도 소도시에 명문 집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소설을 써도 시원찮을 영월에서 온 새댁 네가 이룬 성공 신화의 드라마였다.
그분들과 근근이 연락을 취하며 살던 우리에게는 어머니만이 아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작은 선행쯤으로 치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허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걷기조차 못 하게 된 나는 시의원으로 활동하던 새댁 네의 아들에게 전화하게 된다. 젊은 나이에 무조건 수술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위의 권고로 좋은 병원을 알아보려는 단순한 부탁이었다. 그 아들은 신경외과 원장인 매제에게 부탁하며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를 한다.
입원 다음 날부터 나는 이미 할머니가 된 영월 새댁의 지극한 문병을 받게 된다. 새댁 할머니는 사골국에 멸치, 복음 그리고 온갖 맛 난 음식을 들고 수시로 찾아와 자식 대하듯 하는 게 아닌가. 의아한 원장 사위가 장모님에게 묻는다 “어머니 저 환자분하고 어떤 사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세요.”라고.
백발의 장모는 “저 환자 할머니 덕에 오늘날 이처럼 잘살고 있다 죽어도 잊지 못할 은인의 손자라고” 말이다.
그때 그 시절 할머니가 끓여주신 강냉이 누룽지를 먹고 살아야만 했던 처참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그분은 그 은혜를 죽기 전에 이렇게라도 갚아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이리라. 장모님의 소중한 은인이라는 걸 안 원장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한 달간 입원비는 고사하고 치료비 일체를 감면해 주는 게 아닌가.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살아생전 베풀었던 적선의 덕을 손자인 내가 받은 셈이다. 어떻게 생기신 할머니일까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옛말에 후손이 잘되는 건 선대의 선행 덕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난다는 업보의 확신에 머리칼마저 쭈뻣 거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