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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35
12월6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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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믿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순간적인 선택의 실수 뒤에 오랜 세월 동안 그 혹독한 댓가를 치르시는 분들이 한탄조로 내뱉는 한 마디 말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잠시 눈이 멀었었지!”
“그때 살짝 내 눈에 콩깍지가 끼었었지!”
살아가다 보면 잠시 우리 눈이 멀 때가 있습니다. 눈은 버젓이 뜨고 있지만 눈이 머는 순간 말입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이 온전히 빼앗길 때 그렇습니다.
잠시 후의 결과가 불을 보듯이 뻔하기에,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나방이 죽음인지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육체적 눈은 떠 있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상식의 눈이 감겨져 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즘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별의 별 웃기는 사람들이 자주 매스컴에 등장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며 말, 행동이나 모습은 분명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어찌 보면 그들 역시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그릇된 이념이나 자기 논리에 함몰되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은 국민들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크게 해치는 암적 존재입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국민들은 속이 터지고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본인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존재 자체로 괴로움의 근원이신 그분들이 그 어떤 처벌이나 제재도 받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계시니, 참으로 좋은 시절이 오긴 왔습니다. 십 년 전, 이십 년 전에 그랬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을 만난 눈먼 사람들이 영적이나 정신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가련한 처지, 눈먼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것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자리나 명예를 지나치게 탐한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재물이나 어떤 대상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너무 깊이 함몰되고, 나와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눈먼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앞이 안보이니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번듯한 직장이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삶 자체가 눈물이요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을 대하는 사회적 통념 역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먼 사람을 나병환자와 동급으로 두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심판받고 버림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제물을 바칠 수도 없었습니다.
동료 인간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하고 소외받던 두 눈먼 사람이었기에, 인간에 대한 기대나 희망은 더 이상 지닐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주님께만 두었습니다. 주님만이 자신들의 마지막 보루요 의지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예수님께서는 두 눈먼 사람의 신앙을 확인해보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오 복음 9장 28절) 신앙이 치유와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유출되는 치유와 구원의 힘을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두 눈먼 사람의 강렬한 믿음이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두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굳은 믿음을 드러내보였기에,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새 삶이 주어졌습니다.
두 눈먼 사람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주님 나라의 위력, 즉 하느님의 힘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도 지속적인 주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복음을 굳게 믿고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실 것ㅎ입니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할 때, 눈먼 사람들에게 이루어졌던 치유활동이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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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꿈이 먼저 생긴다>
찰스 두히그의 책 ‘습관의 힘’은 리자 앨런이라는 여성의 사례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녀는 16세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항상 비만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1년 이상 버틴 적이 없고 항상 빚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수치와 무기력감에 걸핏하면 심하게 화를 냈고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급기야 남편도 더 이상 그녀와 살 수 없다며 이혼하자고 하여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34세가 된 리자 앨런은 여러 의사들에게 인터뷰를 받고 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술과 담배를 끊은 상태이며 빚도 청산했고 집도 장만했으며 건강한 몸매로 마라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남편의 이혼통보를 받고 리자는 마지막 통장 잔고를 털어 이집트 카이로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죽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호텔에서 술이 덜 깬 상태로 담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였는데 이상하게 고무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보니 볼펜에 불을 붙여 빨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미쳐간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때 물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와 울음이 터졌습니다.
샤워를 하고 호텔을 나온 리자는 택시를 타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광활한 사막을 보며 묘한 욕망이 솟구쳤습니다. 사막이라도 한 번 횡단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1년 뒤 사막을 걸어서 횡단할 결심을 합니다. 물론 은행에는 한 푼의 잔고도 없는 상태인데다 뚱뚱한 몸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정신을 집중할 삶의 목표가 필요했습니다.
그후 6개월 동안 리자는 담배를 끊고 조깅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분에 식습관이 바뀌었고 일을 대하는 자세와 수면을 취하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덩달아 통장에는 돈이 쌓여갔습니다. 일과도 달라졌고 미래 계획도 바뀌었습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집을 마련했으며 다른 남자를 만나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선발되게 된 것입니다.
리자 앨런이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였을까요? 아닙니다. 횡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사막을 횡단하는 상품이 있었던 것입니다. 11개월 후 다시 돌아온 리자는 6명의 여행객과 함께 에어컨은 물론이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천막과 지도, GPS와 송수신 겸용 무전기까지 설치된 대형 자동차로 즐거운 마음으로 사막을 횡단하였습니다.
리자 엘런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표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삶의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막에 떨어져있는 스마트폰이 사람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스마트폰이 있는데 하나는 그냥 생겨났다고 믿고 하나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냥 생겨났다고 믿는 스마트폰은 목표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냥’ 생겨났으니 생겨난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되었다고 믿으면 그 창조자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떤 목적으로 창조했는지를 끊임없이 찾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대충 살다 죽으라는 마음으로 낳을까요? 잘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낳습니다. 무언가를 창조할 때는 그 창조된 것이 가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화가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없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모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 더 가치 있게 쓰이기를 원하며 피땀을 쏟습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실 때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창조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땀과 피를 쏟는 사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귀한 소명을 저버리고 열매나 따먹는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계획을 찾고 그 목적대로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반드시 그 믿음에 걸맞은 소망이나 도달하고 싶은 꿈을 갖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니 원하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눈을 치유해주십니다. 모든 삶의 기적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 자비로운 분이셔서 나는 반드시 좋은 이유가 있어서 창조된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밀이 곡해되어 당신이 병을 치유해주는 것에 이용당할까봐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않자 그분이 마귀를 쫓아낼 때 사탄의 힘으로 그러는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신 뜻이기에 그분을 찬미합니다. 핵심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가 믿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분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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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멀음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창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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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영적으로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하고 인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줄 작품을 예언합니다. 많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주님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예언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니다. 피조물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변화의 은혜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이익을 얻으려고 땅을 제멋대로 다루거나 착취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언자는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보여 주신 충실한 사랑에 눈을 연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였던 것처럼 겸손한 이들은 주님을 유일한 안내자로 알아 모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친밀감을 느끼며 기뻐하는 가난한 이들이 겸손한 이들 곁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는 치유와 구원의 좋은 결실을 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 둘의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활동은 육체의 치유보다 더 심오합니다. 곧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믿음은 눈먼 사람 둘에게 육체의 눈을 열어 준 것이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눈먼 사람의 눈이 믿음으로 열린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물만을 보는 우리는,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려면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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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단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여기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자기들의 눈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몰라서 그러신 것은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하신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례성사 예식을 보면, “믿습니까?”라고 질문하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세례 받을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믿는다고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그 믿음은 차츰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집니다. 따라서 박해 때에, 또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을 때에 자신의 믿음을 감추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믿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믿고 청한 대로 내가 너희를 고쳐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이 말은, 엄하게 명령하셨다는 뜻입니다.) 뒤의 16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을 하신 뒤에,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마태 16,16-20) 눈먼 사람들에게도 같은 지시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그리스도(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다면, 정치적인 탄압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크게 방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는데도, 그 두 사람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퍼뜨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눈을 고쳐 주셨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기쁨에 넘쳐 있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또 자기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증언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고, 무슨 사심이나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 두 사람의 행동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앞의 7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신앙인이 된다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이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요한 6,68) 먼저 믿고 실천하면, 나중에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1-12)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알아가는 생활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깨달으면서 나아가는 생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말한 ‘깨달음’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또는 체험하려면, 먼저 그 사랑을 믿고, 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의 교리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신비들’입니다. 그 신비들은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여러 가지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계명들은 상황에 따라서 납득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그래서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 라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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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제가 이태리에서 한창 공부를 하던 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테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IS에 의해 일어난 테러들은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불규칙적으로 발생했고 그로인해 유럽에 있던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테러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2015년 11월, 파리에서 총기 및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나 129명이 사망했고 2016년에는 벨기에의 공항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32명이 사망했습니다. 같은 해에 프랑스의 니스에서는 트럭이 돌진해 84명이 사망했으니 유럽에 있던 모든 이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테러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역시 혹시라도 일어날 테러에 대비해 공항은 물론이고 모든 기차역과 지하철역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바티칸 광장 앞에는 장갑차가 서 있을 정도였습니다. 공항에서 아주 조금의 의심쩍은 움직임만 있어도 곳곳을 수색하느라 모든 업무가 마비되곤 했습니다.
저 역시 테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가능하면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선호했고 검문검색으로 인해 행정업무가 지체된다고 하더라도 불평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 극대화 된 이유는 언제 어디서 누가 테러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살고있던 로마는 그리스도교 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으므로, 언제 이슬람 급진 세력에 의해 테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이상할게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학을 할 때 만난 나이지리아 친구가 로마에 놀러왔습니다. 대도시에 여행을 온 만큼 그의 배낭은 꽤나 컸으므로 짐을 나눠 짊어지고 오랜만의 재회를 반가워하며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군인 두 명이 다가와 계속해서 저희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자, 나이지리아 친구가 저에게, 자기는 피부색이 어둡고 수염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테러범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데, 특히 오늘은 이 커다란 가방이 문제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 역시 피부가 어둡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던 일이 떠올라 그 친구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물론 위험을 방지하고자 했던 행동이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인종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나 돌이켜보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가능한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 안에서의 걱정과 의심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시내를 다닐 수 있었고 결국 이태리에서는 아무런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실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갑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도보로 걸어다니는 것도 모두 안전이 보장되어 있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매우 불행해집니다. 만약 우리가 일상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음을 신뢰하지 않으면, 자녀를 밖에 함부로 내보낼 수도 없고 대중교통을 함부로 이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차를 직접 운전하면 괜찮을 것 같지만 교통사고 역시 나만 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매우 조심스러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아무런 의심이 없을 때 올곧이 세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훨씬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기 전에 항상 이러한 믿음을 중요시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기적을 베푼 뒤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당신의 존재와 힘을 “아무런 계산 없이”받아들이고 있냐는 질문입니다. 상대를 신뢰하려면 아무런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잰다면 그것은 계산적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믿음이 되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며 결국 그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그것은 완전한 신앙이 되고 당장 기도가 들어지지 않아도 그분의 뜻을 기다리게 되며 결국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방식대로 그분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미사 중에 주님께 원하는 것을 청하며, 다시 한 번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에 대한 응답을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주시는 절대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이 ‘예, 주님!’ 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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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있던 로마 제국 시대와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냐”라는 박해자들의 물음에 “예,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붙잡히셨을 때 다른 질문들에는 이래저래 둘러대셨지만 ‘그리스도인이냐’라는 질문 앞에서는 거침없이 ‘그리스도인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연로한 나이에 순교한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배반하라는 협박 앞에, ‘평생을 사는 동안 그분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어찌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힘차게 답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고백은 평상시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목숨을 앗아가게 할 수 있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자신 있게 이 고백을 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려움을 떨쳐 버린 까닭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성호 한번 긋는 것이 눈치 보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할 때 머뭇거려진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안에서 자신 있게 성호 한번 긋고, 힘차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예,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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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님]
<마음의 소경>
오늘 이 글을 읽기 전에 길에서 돈을 구걸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가끔 그런 분을 목격하셨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길에 앉아서 모자 하나 놓고 구걸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분들은 찾아다니면서 적극적으로 구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분들에 대한 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과연 진짜 어려운 사람들인지, 아니면 장애가 있거나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지….
그런 의심 때문에 그분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꽤 많이 보았습니다. 실제로 가끔 뉴스에서 앵벌이라든가 교통비가 없다고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돈을 받아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심할 때는 장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구걸이 끝나면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불쌍한 마음에 돈을 주고 싶다가도 찜찜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의심에 사로잡혀 불편해하기 보다는 빨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의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확실한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서, 아님 걸인자격증? 사실 한번 의심이 들면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도 그 의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아무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고 그 의심이 결국 큰 괴로움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만일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믿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예, 믿습니다, 주님.”이라고 응답할 수 있다면 오늘 두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고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청하지 않고 우리의 눈만 믿고 산다면 우리는 평생 주님을 찾지만 주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소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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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는 마태오 6,22-23에서 눈에 대하여 이렇게 설파(說破)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읽은 ‘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도솔)에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외계의 별들은 우리의 눈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내계(內界)를 밝히는 사랑의 빛이 되었다.”(36쪽)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두 눈을 통해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내 가슴 속에서 반짝이고, 나는 그 빛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냥 눈이 아니고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린 눈을 통해서 그들 가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 가슴 안에 자리 잡은 예수님은 그들 인생의 주인이 되고 길잡이가 됩니다. 그들은 가슴 속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예수님 때문에 늘 밝고 행복합니다.
당신의 눈을 통해서 무엇이 당신 가슴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지 살펴보시겠습니까? 눈이 멀어서 잘 안 보이신다고요? 큰일 났군요. 그러면 이렇게 외치면서 예수님께 다가가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 환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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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먼 사람 둘과 눈뜬 사람 하나>
마태오 9,27-31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눈먼 사람 둘과 눈뜬 사람 하나>
눈먼 사람
둘이 있었다네
그들은
눈은 멀었어도
서로를 보았다네
그들은
눈이 멀었기에
서로만을 볼 수 있었다네
그들은
자신들을 보아주지 않는
모두를 보고 싶었다네
그들은
모두를 봄으로써
모두에게 보이고 싶었다네
눈뜬 사람
하나가 있었다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눈먼 사람 둘을 보았다네
그는
눈먼 사람 둘을 봄으로써
눈먼 사람 둘이 자신을 보게 했다네
그는
눈먼 사람 둘을 봄으로써
그들의 보고 싶은 마음도 보았다네
그는
눈먼 사람 둘에게
그들의 마음을 보라 했다네
눈먼 사람 둘이
눈뜬 사람 하나를 보았다네
눈뜬 사람 하나가
눈먼 사람 둘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라네
눈먼 사람 둘과
눈뜬 사람 하나가
서로를 보았다네
눈먼 사람 둘과
눈뜬 사람 하나가
서로의 마음을 보았다네
눈뜬 사람 하나가
눈먼 사람 둘에게
자신을 닮아 보라했다네
눈먼 사람 둘이
눈뜬 사람 하나를 닮아
모두를 보게 되었다네
눈먼 사람 둘이
모두를 봄으로써
모두에게 모두를 보라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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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내 아들에게 속한 일….>
성당에 아이를 들쳐 메고 온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보니까 아이가 종종 장난삼아 몸을 뒤로 젖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보니까? 아이가 너무나 재밌어합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팔로 아이를 단단히 받쳐주면서 힘들어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젊은 아줌마가 할머니가 힘들겠다고 하면서 대신 아이를 업어 줍니다. 그런데 아이는 결코 재밌어하는 (뒤로 젖히는)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왜요? 아이는 젊은 아줌마를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느님께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모습입니다.
걱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믿음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이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즉, 자신들이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물으셨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그들은 자신 있게 “예, 주님!”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고쳐 주시리라 믿었고, 그 믿음대로 치유 받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먼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것은 주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어느 본당에 있을 때, 공소에 가서 대림 특강을 하고 신자들 판공 성사를 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밤 11시였습니다.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이제 생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말이지. 그때 ‘마귀’라는 것이 제 귀에 대고 “너는 많이 부족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 맞아. 나는 많이 부족해.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부족한 분이신가?” 모든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아무 말을 못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마귀는 고운님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 온종일이라도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만, 고운님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충분함에 대해 말하는 순간 마귀는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멈칫하게 됩니다. 그러자 제 마음 안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던 상황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족한 고운님들 자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집스럽게 우리 마음만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함에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 내 아들에게 속한 일이다.”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주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일이기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눈을 뜨게 하소서. 귀를 열게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반드시 고운님들의 믿음대로 됩니다. 그러니 고운님들의 큰 믿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고운님들을 위해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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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7)
♧♧ 시편 65편 9절….
"땅 끝에 사는 이들이 당신 표징들을 보고 놀라워하리이다. 당신께서는 동녘과 서녘 끝을 환호하게 하십니다."
이는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이방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상징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방 민족들의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 당신(주님) 표징...
‘표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트’는 ‘징조’ ‘표시하다.’ ‘부호로 나타내다.’ ‘흔적을 내다.’ 라는 뜻의 ‘우트’에서 파생된 말고, 희랍어로는 ‘세메이야’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이 땅의 역사에 섭리하셔서 당신의 권능을 그러내는 기적, 곧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증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표징’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머무르게 하신 권능의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 동녘과 서녘 끝을 환호하게 하십니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의 뜻은 ‘해 뜨는 데서와 해 지는 데서도 저들이 즐거워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누리가 하느님의 권능의 섭리를 바라보거나 듣고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환성을 올린다는 말입니다.(이사야서 24장 15-16절. 참조) 혹 어떤 이는 이 구절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장차 세상 모든 민족이 메시아를 경배하게 될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 시편 65편 10절….
"당신께서는 땅을 찾아오셔서 물로 넘치게 하시어 더없이 풍요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개울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께서는 곡식을 장만하십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이렇게 마련해 주십니다."
10절부터 마지막 14절까지 에서는 하느님,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불신자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일반 은총’에 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 하느님의 개울...
‘개울’에 해당하는 ‘펠레그’의 원래 의미는 ‘원천’ ‘근원’으로서, 고대 근동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하느님의 개울’은 풍부한 비를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개울’은 비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학자들은 ‘하느님의 개울’은 구름과 대기권에 하느님이 물을 저장해 놓으셨다가 내리는 비를 아름다운 시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마를 줄 모르는 은총을 저장해 두는 곳, 곧 신령한 축복의 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65편 11절….
"그 고랑에 물을 대시고 두둑을 고르시며 비로 부드럽게 하시어 새싹들에게 강복하십니다."
철따라 단비를 내리시어 곡식이 자라게 하심으로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일반적인 은총의 섭리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악인이든 의인이든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용한 양식으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교훈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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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 시절에 사고로 청각 장애인이 된 에디슨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청각 장애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연구하는 데 힘들지 않습니까?”
에디슨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소리에는 신경 안 쓰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완전히 사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만이 역사 안에서 놀라운 한 획을 긋게 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불평불만을 가지면서 절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은 그냥 사라지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 마음으로 의지를 세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거친 삶을 헤쳐서 앞으로 나아가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굳건하게 세울 수가 있을까요? 바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굳은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눈먼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소문만 듣고 힘껏 외치는 그의 절박한 마음이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자비가 언제 이루어지길 원했을까요? 몇 년 뒤일까요? 아니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치유 받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신 뒤에야 치유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눈먼 사람들은 실제로 믿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런 치유 기적을 보았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믿고 나서 청해야 하며,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님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원하는 것을 얻어야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먼저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믿겠다고 외치는 것이 아닐까요? 젊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습니다. 지속적인 우정, 끊임없는 감동 같은... 이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을 요구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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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랑>
몇 년 전, 인천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어떤 할머니와 중년의 자매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소후원금으로 적은 액수이지만 봉헌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오신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할머니께서 매일 폐지를 모으세요. 이렇게 폐지 모은 것을 봉헌하시겠다고 해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폐지를 모은다고 해서 많은 액수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1kg의 폐지를 모으면 30원 받는다고 하더군요. 수레에 한가득 실어봐야 30kg 정도 될까요? 온종일 폐지를 주워도 4,000원 벌기가 힘든 구조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모은 돈을 모두 봉헌하신 것이었지요. 자기 한 몸을 위해 쓰기에도 부족한 돈을 오히려 남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분이었습니다.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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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철 스님은 선승으로 유명했습니다. 오랫동안 면벽 수도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이 승복 사이로 손을 넣어서 몸을 긁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스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어찌 대낮에 몸을 그렇게 긁으십니까?’ 그러자 성철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도 한번 물려 봐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나오나.’ 오랫동안 수도 생활을 했어도 감정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화나는 건 화나는 겁니다.
28년 사제 생활을 했어도, 강론을 통해서 용서와 인내를 말했지만 정작 저 자신도 감정 조절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 성당에 미사를 가려고 나왔는데 차를 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차 뒤에 누군가 차를 주차하고 갔습니다. 아마도 미사 시간이 급해서 일단 차를 대고 미사에 간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이런 경우가 더러 있으니, 미리 차를 옮겨 놓았으면 좋았습니다.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택시나 우버를 타고 가면 좋았습니다. 다행히 다른 신부님의 차를 빌려 타고 갈 수 있었지만 20분 동안 애가 타고, 화가 났습니다.
차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이웃의 마음에 나쁜 감정을 무심하게도 내려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이 아파서 누워있는 아내에게 ‘병원 가지 그랬어.’라는 말은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피곤했나 보네’라고 말하면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할 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2등한 아들에게 ‘이제 1등 해야지’라는 말도 있지만, 먼저 ‘수고했다. 엄마는 언제나 너를 믿는다.’라는 말이 더 좋을 겁니다. 늦게 들어온 딸에게 ‘지금 몇 시냐?’라고 따지기 전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도 가족들의 마음에, 동료들의 마음에, 교우들의 마음에 불법 주차를 한 적이 많습니다. 저의 이기심이라는 차를 떡하니 대놓고 나왔습니다. 저의 편견이라는 차를 대놓고 나왔습니다. 거짓이라는 차를 대 놓은 적도 있습니다. 저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긴 적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때문에 힘들어했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난처한 적도 있었을 겁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의 위선과 가식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저도 보지 못하면서 남들이 못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보는 겁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 빈익빈 부익부의 눈으로 보기 전에 공생, 공유, 희생, 사랑, 나눔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아담은 잘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와에게 떠넘기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카인은 잘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잘 볼 수 있었기에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웠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겨 주셨습니다. ‘얼굴 잘생긴 것보다는 몸 건강한 것이 더 좋고, 몸 건강한 것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시작됩니다. 기도로서 자라납니다.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집니다. 성체성사로 하나가 됩니다. 사랑으로 열매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다른 것들 때문에 눈이 멀곤 합니다. 돈에 눈이 멀기도 하고, 출세에 눈이 멀기도 하고, 권력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원망과 미움에 눈이 멀기도 하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눈을 뜨고 있지만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오늘 자비를 청한 소경처럼 주님께 참된 신앙의 눈을 뜰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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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 만남이 답이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신 일화입니다. 지체없이 떠오른 강론 제목은 ‘개안의 여정’입니다. 참 기분좋고 적확한 제목이라 주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 일화를 대할 때 마다 사용하는 '개안의 여정', 강론 제목입니다. 이어 부제는 ‘주님과 만남이 답이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눈이 열리고 이런 주님과 만남과 더불어 함께 가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개안의 여정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매일, 평생, 죽는 그날 까지 끊임없이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개안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이야말로 활짝 열린 심안, 영안을 지니신 분이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실상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눈이 열릴 때 주님을 닮아 연민 가득한 주님의 눈길이, 눈빛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예수님을 닮아 활짝 열린 눈을 지니신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어제 목요일 교황님의 시의적절하고 감동적인 12월 기도 지향에서 확실히 깨닫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눈길입니다.
“변두리에 있는, 방기된, 버림받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모든 어린이가 하느님께 올리는 부르짖음이다. 그들 각자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바로 무방비의 상태로 우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이 어린이들 하나하나의 눈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보신다. 모든 나라가 오늘날 고통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의 미래에 우선권을 두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참으로 우리의 눈이 열릴 때 비단 버림받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모든 버림받은 이들이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눈길이자 눈빛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이들이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모두가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요 부단히 개안의 여정을 밟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 먼 두 사람은 보고자 하는 열망에 깨어 있었기에 주님을 만나자 부르짖습니다. 눈 먼 두 사람의 부르짖음의 기도는 그대로 열망의 표현이자 믿음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우리가 미사가 시작되면서 바친 자비송입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평생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집안에 까지 집요하게 주님께 다가오는 맹인들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말씀에 이어 눈이 열리니 얼마나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장면인지요. 저절로 눈 뜬 두 사람에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이 흘러 나왔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똑같은 주님께서 무지에 눈먼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육안은 날로 어두워져 가도 사랑의 심안의, 영안은 날로 밝아지고 깊어져 주님의 눈길로, 눈빛으로 바뀌어가면 좋겠습니다. 색맹色盲도, 문맹文盲도 문제지만 주님을 모르는 ‘무지의 맹盲’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만남의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의 마음과 더불어 심안心眼과 영안靈眼도 자비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리라 믿습니다. 날로 주님을 만나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눈빛으로 바뀌어 갈 때, 저절로 무지로부터 해방될 것이니,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영적 목표도 없을 것이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개안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분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부분입니다.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개안의 여정에 대한 참 아름다운 상징적 묘사입니다. 오늘 대림시기 복음도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이 주님을 통해 실현됨을 보여 줍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날 때 대역전大逆轉의 내적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 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그날’이 바로 대림시기 ‘오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우리의 귀와 눈을 열어 주시고, 겸손한 우리에게 기쁨에 기쁨을 더해 주시며, 가난한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득 선사하십니다. 날로 우리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의 눈빛과 눈빛을 닮아가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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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 이었답니다. 저는 그 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요.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 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육적인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각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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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기적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마태 9,27)
눈먼 사람 둘이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외칩니다. 누군가 그분이 지나신다고 알려주었나 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언급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지요. 두 눈먼 사람은 오늘 독서 말씀의 한 대목, "그날에는 ...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그동안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치유자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청한 이의 믿음이 함께 적극 호응할 때 이루어졌지요. 기적에는 구하는 이의 "믿음"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되리라"가 아니고 "되어라"입니다. 그저 "될 것이다" 정도의 미래형 어미가 아니라 명령형입니다. 너희가 믿고 있는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그들이 믿는 내용을 향해 "되어라"하고 명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마태 9,30)
마르코 복음에서 주로 언급되는 메시아 비밀 사상이 마태오 복음에서도 이처럼 드러납니다. 진정한 메시아는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 이르러야 참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칫 결과나 효과에 열광하는 맹신주의에 빠져 믿음이 왜곡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까지는 제자들과 악령들, 기적을 입은 이들은 침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31)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단단히 이르신 바를 따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절실하고 굳건했으나 들음과 따름, 즉 순종은 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복음사가는 침묵합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는 않았습니다.
대림시기에 들어서 제1독서는 연이어 "그날"을 노래합니다. 메시아가 오시어 세상을 정의와 공정으로 다스리시면 "귀먹은 이들도 듣고 눈먼 이들도 보게" 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축시키는 약함과 한계가 사라지고 창조 때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29,19)
겸손한 이에게서 기쁨이, 가난한 이에게서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잘난 체 허세 부리지 않아도, 교만으로 스스로를 높이지 않아도, 없이 살아도, 설령 굶주리고 갖추지 못했어도 그들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가난한 이들의 행복(마태 5,1-12 참조)입니다. 겸손과 가난은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분이 겸손과 가난이시기 때문이지요.
다가올 메시아의 시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어 그분 재림과 함께 완성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의 뜻은 이를 "믿을 때" 비로소 실현될 약속이었기에, 눈멀었던 두 사람 역시 믿음으로 예수님 기적에 협력하여 빛을 얻은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내리실 때는 홀로 주도하시기보다 우리의 믿음을 참여시키십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 뒤에는 그 믿음을 칭송하시며 당신은 뒤로 물러나시지요. 주님의 능력과 우리 믿음이 이루는 이 놀라운 협연은 우리가 미처 의식 못해도 일상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자, 이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께 청하는 바가 있는지 물으십니다. 바라는 바를 믿음을 다해 외치십시오. 저는 오늘 "지금처럼 항상 영원히 당신과 함께, 당신과 하나이길 원합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믿었으니 그대로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마침표를 찍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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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신뢰하십시오. 나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태오 복음에서는 ‘약한(작은) 믿음’이라는 주제가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제자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는 있지만, 그들의 믿음은 약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믿는 것을 가르치신다. 마태오는 폭풍우를 만난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르코와는 다르게 묘사한다.
예수께서는 배에 계시지 않고, 곤경에 처한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호수 위를 걸어 오신다. 그분의 첫 말씀은 이렇다.
“신뢰하십시오. 나요. 두려워하지 마시오!”(마태 14,27)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강한 신뢰감을 일깨웠고, 그는 배를 떠나 예수께 다가간다.
“그러나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보자,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물속에 빠지기 시작하였다.”(마태 14,30)
예수께서는 그를 구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약한 사람아, 왜 의심했느냐?”(마태 14,31) -안젤름 그륀, 「믿음」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약한 우리를 믿음 안에서 강하게 만들고자 하신다. 우리가 큰 어려움에 처할 때, 예수께서 우리를 홀로 놔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아래로 추락할 위험이 있을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것도 겪지 않으리라고 신뢰해도 된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그분의 믿음, 그분이 아버지께 갖고 있는 깊은 신뢰감을 공유하게 된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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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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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다>
그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 얼른 청을 돌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시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또다시, 군중에게서 오는 영광을 철저히 물리치라고 가르치고 계
십니다. 가까이에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 집으로 데리고 가, 보는 이 없는 그곳에서 고쳐 주십니다. 그런 다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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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당근이죠>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당근이죠 ~~^^
눈 먼 두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들어줄 만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되고
들어주리라는 확신과 간절함이 전달될 때
모두 이루어집니다.
네가 믿는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마음에 백프로 공감합니다.
오늘 눈 먼 두사람의 태도에서 그 동안
볼 수 없던 힘듦과 눈뜨고 싶다는 간절함이
예수님께 전해졌고, 눈을 뜨게 해주면
누구보다 감사하며 살 것이라 여깁니다.
"이루어주십니다 ~ 나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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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 28)
공감과 이해
존중과 배려의
주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믿음입니다.
마음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믿지 않기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림시기는
믿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우리의
막막함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믿음은 역동적인
주님의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를 보게합니다.
믿음은 주님께
다가서는
긴 용기입니다.
믿음은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다시
가르쳐줍니다.
사람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믿음의 회복이
사람의 회복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이며
믿음의 관계는
서로를 볼 수 있는
삶의 진정한
관계입니다.
대림시기는
진정한 믿음을
직면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 주님!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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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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