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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20회 : 120개의 대제방, 강화 평야는 바다였다. (2001.6.30.)
방송일: 20010630 조회수 : 192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0000 [역사스페셜 120회]
-120개의 대제방, 강화평야는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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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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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9 (7-8초 정도 보고)
서해 바다 위의 섬 강화도.
평야 18 섬 내부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광활한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
끝없이 펼쳐진 대평야
하지만 먼 옛날, 이곳은 평야가 아니었다.
마니산 13 (좀 보고)
그 동안 강화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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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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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오프닝]
(부감, MC 강화도 지도 위에 서 있고)
혹시 강화도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나라 5대 섬 중의 하나인 강화도는 현재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근세의 유적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소중한 유적이 있는 우리역사의 보물섬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보물섬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한 것은 넓디넓은 평야입니다.
도시를 벗어나 농촌에 가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평야인데 왜 하필 여기에 관심을 두는가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이 강화도가 바로 섬이기 때문입니다.
(뒤에 바다를 보거나 혹은 가리키며)
강화도는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이렇게 3개의 큰 섬과 그 외의 작은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서 있는 이 석모도는 섬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700핵터아르. 무려 2백만 평이 넘는 대 평야입니다.
섬 속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넓은 땅이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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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항공 촬영 송가평 8 (3-4초 후)
취재진은 석모도를 항공 촬영해 보았다
평야 표시 9 산과 산 사이에 자리잡은 송가평이 한눈에 들어왔다 . 무려 2백만 평에 달하는 대 평야다
둑 표시 10 송가평 가장자리에 해안선을 따라 둑이 길게 띠처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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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둑 팬 옛날 둑 17 (7-8초 보고)
그런데 최근 쌓은 둑 너머 해안가에 취재진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피디 남선생 걸어가고 6 (보고)
둑 ,무너진 돌들 8 지금은 거의 무너져 내렸지만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 해안을 따라 쌓은 둑이 분명했다
돌팬 피디 서 있고 9 (2-3 초 후)
둑을 쌓은 방법도 예사롭지 않았다. 둑의 재료로
돌 만지고 11 쓰기 위해 일부러 돌을 잘게 깬 흔적이 역력했다
만약 나라에서 이 둑을 쌓았다면 역사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기록 14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있었다. 숙종 36년 석모도에 둑을 쌓기 위해 천명의
인력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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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팬 서울대 팀 6 (2-3 초 후)
취재팀은 서울대 지리학과와 함께 석모도 송가평
장비 설치하고 11 의 토양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만약 조선시대에 둑을 세워 바다를 막았다면 원래 이곳은
갯벌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력기 4 (보고)
파이프 틸 다운 10 지름 10센티미터의 파이프를 이용한 시추작업이 시작됐다
파이프 멈춰있고 4 땅 표면은 무척 딱딱한 편이었지만 파이프 내려가고 8 어느 지점을 지나자 파이프가 손쉽게
들어갔다 그만큼 땅이 무르다는 뜻이었다.
파이프 밟고 있는 남자 3 (보고)
C/G 파이프 11 (2-3 초 후)
실험용 파이프를 지표면에서 지하 5미터 지점까지 시추했다.
구멍 막는 사람들 8 시추작업이 끝나자 이번엔 토양의 성분이 변하지 않도록 파이프를 밀봉하는 작업이 이루어
졌다
팻말 팬 실험실 7 (3-4 초 후)
취재진은 곧바로 송가평에서 채취한 토양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피아노 줄로 가르고 4 (보고)
파이프 열고 4 (보고)
파이프 팬 18 육안으로도 송가평의 토양은 모래나 일반 흙과는 달리 아주 미세한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고)
유근배 교수 말하고 갯벌층이죠. 갯벌은 그 무엇으로 알 수 있냐면 알갱이의 크기로 알 수 있습니다.
하천에 의해서 퇴적이 된 것은 조립이죠. 굵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씹어보면 아삭아삭 소리도
나지 않아요. 거의 미끈미끈해요
피디와 교수 서있고 11 지하 5미터 지점까지 토양의 성분이 서로 다른지는 육안으로 구분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C/G 파이프 11 (2-3 초 후 )
1.5m지점까지는 붉은색이었던 흙이 그 밑부터는 청록색이었다.
유근배 교수 말하고 벼 뿌리가 여기까지 들어와서 여기까지가 뿌리의 영향을 받아서 지속적으로 산소가 공급이
됐기 때문에 유기물들이 말하자면 산화가 돼서 붉은 층이 나타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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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 걸어가고 6 실험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취재진은
할배 보이고 5 대대로 석모도에 살고 있는 청주 한씨 집안을 찾았다.
할배랑 피디 앉아있고 할아버지가 들어 오신지가 300년이 넘었어요
내가 12대 됐으니까, 1대를 30년 잡으면 360년 돼죠.
족보 보고 12 청주 한씨는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강화도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 석모도 천째 마을.
피디랑 할배 서있고 7 천째마을은 석모도에 생긴 첫 번째 간척촌이다.
지팡이로 가르키고 12 한상화 할아버지의 조상이 건너온 이후 석모도엔 조금씩 논이 늘어났다고 했다.
갯벌을 메워나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말하고 개가 큰 게 있어 가지고, 조금씩 점차적으로 막아서 평야가 됐거든요
논 7 숙종시대 둑을 쌓기이전부터 민간인들의 간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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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떠내고 5 한편 서울대에서는 토양분석실험이 진행됐다
물 붓고 4 토양의 수분을 하루이상 건조시키고 과산화수
과산화수소수 붓고 6 수소수로 유기물을 제거한 후, 송가평 토양의 성
거품 든 비이커 5 분을 분석한 결과, 갯벌 흙인 미사질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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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배 교수 인터뷰 저런 층은 입도가 점토와 세사가 섞여 있는 저런층은 전형적인 뻘층입니다.
간석지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저런 것은 물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갯벌 간석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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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송가평 17 (3-4 초 후)
조선시대 석모도 사람들은 양쪽 해안선을 따라 길게 둑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갯벌을 메워 오늘날의
대평야 송가평이 이루어졌다
바다 되고 10 둑을 쌓기 이전, 송가평은 바다였던 것이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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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
(조선후기 지도 보이고)
이것은 조선후기의 지도입니다.
조선후기 지도에는 이 부분이 송가도, 석모도, 어유정도 이렇게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습니다
섬과 섬 사이에는 니(泥)라고 적혀 있는데 니는 갯벌을 의미합니다.
조선후기만 해도 이곳에 바닷물이 왔다갔다했다는 뜻인데요.
자 이곳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볼까요?
(조선 후기지도와 현재의 지도 비교하고)
현재에는 이 세 개의 섬이 석모도라는 하나의 섬이 되어 있습니다.
갯벌이 있던 곳은 완전히 메워져서 현재를 평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쪽에 제방을 세워서 바다를 막은 결과 두 개의 섬이 연결됐을 뿐만 아니라
2백만 평이 넘는 대규모 평야가 생긴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인데요.
그렇다면 강화도 본 섬에 있는 이 수백만 평의 평야도 석모도 송가평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메운 땅은 아닐까요.
만약 이 강화도의 대 평야들이 바다를 메운 곳이라면 강화도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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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바닷길 6 (3-4초 후)
취재팀은 교동도로 향했다.
갈매기 날고 3 (보고)
교동 보이고 7 강화도의 부속섬인 이 교동도에 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 평야가 있다고 한다
(보고)
피디 노인과 걸어가고 8 교동도의 대평야 염주평에는 특이한 지역이 있다 교동면 대룡리 .
논 팬 5 일명 조개맨들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할배 인터뷰 이름이 조개맨들이예요. 조개맨들. 조개껍질이 많다고 이름이 조개맨들로 지어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하여간 어딜가나 조개껍질이예요
논바닥의 조개껍질 11 마을주민의 설명대로 한창 농사를 짓고 있는 논바닥여기저기에서 조개껍질이 눈에
띄었다
피디 조개 줍고 12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조개껍질.
이렇게 논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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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대학교 5 (2-3 초후)
교동의 조개껍질이 과연 어느 시대의 것인지를
팻말 팬 실험실로 14 알기 위해 취재진은 여수대학교 해양시스템학부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보고)
껍질 닦고 4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순물을 제거한 후
염산 떨어지고 4 에 염산으로 조개껍질을 완전히 녹여야 한다
비이커 팬 탄소 모으기 16 (3-4 초 후)
그 다음엔 조개껍질의 분해된 원소 중에서 탄소만을 모으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실험모습 3 보름 동안의 실험 결과,조개껍질에서 탄소결정체
탄소결정체 6 를 추출했다. (보고)
반감기 6 이제 남은 작업은 반감기를 이용한 연대측정이다
이연규 교수 설명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자하는 연대측정이 나왔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1297 플러스 마이너스
103년 정도 나와 있는데 그게 우리가 지금 구하려고 하는 강화도 패각의 연대가 되겠습니다.
글씨 5 1200년 전의 조개껍질. 이것은 조개껍질이 발견
논 트래킹 8 된 교동 평야가 적어도 1200년 전에는 바다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후기 지도 20 강화도에서 바다를 메운 곳이 얼마나 될까?
조선후기 강화도 지도에는 해안선 곳곳에서 둑을 쌓아 바다를 막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둑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릉언이다
막은 골 글씨 팬 마을 9 가릉언이 있는 강화군 화도면에는 이곳이 간척지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있다
막은 골 주민 인터뷰 이 고장이 송강포구예요, 개성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면서 짐을 실어 나르고 그랬던
지역인데 이 제방을 막으면서 막은골이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팬 논 16 조선시대 포구였던 이곳은 가릉언이 세워지면서 대 평야로 그 모습이 변했다.
그로부터 마을이름도 송강포구에서 막은 골이 된 것이다.
가릉언 팬 선두언 6 조선후기 지도를 보면 가릉언의 맞은 편에는 선두포 둑이 있다.
트래킹 7 취재진은 선두포 둑으로 향했다.
끝없이 이어진 넓은 마을 보이고 4 평야의 끄트머리에서 선두포 마을을 만났다
할배 인터뷰 이게 다 바다인데 덕포라는 데는 떡해 먹는데
고 선두포는 배가 들어와서 잠자고 가는데예요
둑 틸 다운 10 현재 선두포 둑은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둑 앞은 갯벌이었다고 한다
아줌마 인터뷰 여기서 갯지렁이 잡고 다했죠. 바다는 이 너머로 바다고요. 바닷물이 둑 위까지 찼더랬죠.
그런데 여길 막으면서 다 없어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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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지 18 조선시대의 지리지 중경지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가릉언과 선두포 둑을 쌓기 이전
마니산 일대가 바닷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지도 16 조선후기 지도에도 마니산일대와 강화도 사이에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수로가 나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항공촬영 선두평 27 조선후기 가릉언과 선두포 둑을 세우면서 마니산 일대와 강화도 사이에는 대 평야가
만들어지고 결국 두 개의 섬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강화도에 건설된 둑은 모두 120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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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설치하고 9 둑이 건설되기전 강화도의 모습을 알기 위해 취재진은 강화도 평야의 고도를 측정해보기로 했
갯벌바닥에 서있고 8 다. 우선 둑 위에 설치한 카메라에서 갯벌까지의 높이는 -3.80미터
논에 서있는 사람 줌아웃20 이번엔 둑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논바닥 높이를 측정해 보았다.
(4- 5 초 보고)
역시 둑 위에 설치한 카메라에서 논바닥까지의 수치 보이고 5 높이는 -2.4미터
C/G 9 측정결과,1.5킬로미터 떨어진 논바닥과 갯벌의 높이 차는 1.4미터에 불과했다.
그런데 강화도
물 들어오고 10 조수간만의 차는 최고 10여 미터. 만조시 해수면보다 낮은 평야는 간척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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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원 인터뷰 해안가의 낮은 농지들은 간척농지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인데 그 고도가 바다 쪽의 갯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낮은 곳도 있습니다. 이런것들이 우리 나라 해안의 갯벌을 매립해서 만든 간척농지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인 특징입니다.
강화도에서는 이렇게 해안의 간척농지가 강화도 전체면적의 한 1/3쯤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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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촬영 논 12 120개의 둑을 쌓기 이전, 강화도는 현재 면적의 3분의 1이 바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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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현재 강화도 위성사진이 있고)
자 ,이것은 현재의 강화도를 위성에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조선시대 강화도에 쌓은 제방이 120개라고 하는데, 이 제방을 쌓아서 평야가 만들어진 곳을 지도에서 지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간척사업 이전의 강화도 모습으로 )
제방을 쌓기 전 강화도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요.
어떻습니까?
현재의 강화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이 커다란 변화가 자연현상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둑 공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요.
(선두축언시말비 세워지고)
이것은 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비석입니다.
선두언 축언시말비, 선두언이라는 둑 건설을 기념해서 세운 비입니다.
비문의 내용을 볼까요?
(글씨 뜨고)
준공일은 강희 46년 즉 1707년 5월, 착공일은 1706년 9월,
이 공사에 동원된 인부는 1일 부역 11만명
이들의 식량으로 쌀 2천 석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둑을 세우기 위해 9개월에 걸쳐 11만 명이 동원됐다!
한마디로 대규모 공사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의 둑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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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길 팬 비석 8 (2-3 초 후)
강화군 길상면에는 먼 옛날부터 이 지역에 세워
선두포축언시말비 9 진 각종 비석들이 모여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선두포축언시말비.
조선시대 대역사였던 이 공사를
비 타이트 7 총 지휘한 사람은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었다
강화산성 14 강화산성의 보수공사를 완성시킨 이도 민진원이다 .숙종대에 강화유수를 지낸 민진원은 영조시대
에는 정승까지 오르는데 그 문장과 글씨가
서문 7 뛰어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규장각 서가 4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민진원의 글을 모은 문
책 틸다운 빼고 10 집이 소장돼 있다. 민문충공주의. 이 문집속에 선두포 둑공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글씨 빠지고 17 숙종 32년, 민진원은 왕에게 둑 공사를 시작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자막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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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웅 교수 인터뷰 공사의 계획단계에서부터 공사진척상황, 공사
준공시까지의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들, 실제적인 공사 내용들을 소상하게 기록해서 중앙부서에다 보고한 내용
들을 전부 모아다가 단암 선생의 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단암주의에다 전부 집대성 해놨습니다.
따라서 선두포 공사가 그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상당히 난공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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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8 선두포 둑은 현재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둑 비탈 8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둑을 쌓을 당시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 서있고 1대 1.5정도의 기울기로 경사면을 만들었을 것으로 이것보다는 조금 더 급합니다
비탈 팬 9 최근까지 보수작업이 여러 번 이루어진터라 조선시대의 둑 쌓는 방법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개흙 팬 20 강화도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둑을 통해 그 방법을 알아보기로 했다. (2-3 초후)
둑의 재료 중 우선 눈에 띄인 것은 둑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갯벌 흙이었다.
유근배 교수 인터뷰 간석지의 흙들은 가는 모래와 점토가 섞여 있거든요.
이걸 머드라고 하는걸 모래와 점토가 섞여 있는걸 머드라고 합니다.
저런 것들은 아주 이상적인 벽돌 흙입니다. 빨간 벽돌같은 것을 보면 바로 저런 형태의 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걸 구으면 아주 좋은 벽돌이 돼죠. 그 얘긴 다시 말하면 저런 흙 같은 경우엔 말라 있으면 오히려
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염생식물 보이고 12 염분이 많은 땅에 자라는 갈대와 같은 염생 식물도 둑의 재료로 사용됐을 것이다.
이것은 흙이 잘 뭉치도록 해준다.
C/G 판축 12 (3-4 초 후)
조선시대의 둑은 우선 내부에 갯벌 흙을 차곡차곡 다져서 쌓았다
염생식물 7 갯벌 흙 속에는 염생 식물을 넣었고
돌쌓고 10 마지막으로 내부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렇게 주위에 견고한 돌담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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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면 올라가고 9 선두포 둑의 높이는 최고 15미터. 이 거대한 둑을 쌓기 위해 치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졌다
민문충공주의 11 민진원의 기록에 의하면 둑을 쌓기 전 수심을 측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밧줄에 돌을 매달아
수심을 측정한 결과
11 그 깊이가 2파에서 6-7파에 이르렀다. 1파가 1미터 50센티미터라고 할 때 깊은 곳은 10미터를 넘는다
수세 나오고 10 수심뿐만 아니라 물살의 세기도 파악했는데 수세가 빠르지 않고 완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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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웅 교수 인터뷰 제일 수입이 깊은 데는 10미터가 넘었습니다.
14미터. 이렇게 수심이 되는 갯골을 메우는 공사. 하지만 썰물 때 공사를 했다고 해도 10미터 정도
물이 빠져도 4.5미터 수심을 유지합니다. 그냥 주먹구구식 방법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따라서 공사 착공 전에 이미 구체적인 조사계획을 세웠습니다. 조사는 어떤 조사를 했는가 하면 조류속도 측정을
했고, 지질 조사도 했고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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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문충공주의 16 또한 민진원의 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
발패야장조작기계. 둑 공사에 기술자를 동원, 기계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갯벌에 돌 나르고 13 실제로 갯벌 위에 둑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무거운 돌은 어떻게 운반했을까?
갯벌에 글 나오고 17 민진원의 기록에는 당시 돌을 운반하는 방법이 적혀있다.
(한글자막 나오면)
갯벌이라 돌을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반드시 판자를 깐 후에야 돌을 운반할 수 있습니다.
판자 깔리고 7 이런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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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지 14 임원경제지에는 조선시대에 둑을 쌓는 다양한 공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공법 중에는 나무기둥
을 세우는 견춘, 돌을 쌓는 석둔
복우 나오고 7 그리고 복우는 돌을 넣은 망태기를 쌓는 방법을 말한다
트래킹 6 (2-3 초후)
취재진은 둑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간척
제방에 돌망태들 있고 10 공사현장에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복우를 확인 확인할 수 있었다
돌 망태 타이트 팬 8 (보고)
공사소장 인터뷰 자그만 돌을 갖다 놓으면 파도에 다 떠내려가기 때문에 크게 한꺼번에 묶어 가지고 갖다놓으면
안정되고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게 만든 구조물이다 /이게 그 전에는 싸리로도 만들고 새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부 철사로 만든 돌망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돌 망태 빠뜨리고 10 둑의 기초를 쌓는데 사용하는 돌망태 ,조선시대의 기술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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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20 (3-4 초 후)
조선시대 둑을 쌓는데 있어 가장 큰 관건은 바닷물로부터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어떤 방법이 사용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목민심서 표지 4 목민심서에는 둑을 쌓는 방법에 대한 정약용의
글 나오고 7 생각이 담겨있다. 정약용은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한 대를 쌓아야 한다고 했는데
한 대나오고 8 이 한 대란 무엇일까? 정약용은 한 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 대 설명 나오고 16 한 대는 삼각대인데 그 일각으로 직접 조수의 충돌을 받는다.
조수가 다른 모서리에 부딪치면 그 힘은 좌우로 나뉘어 두 날개처럼 가로로 달린다.
기초석 나오고 11 그리고 이 한 대의 기초에는 2천근 즉 9백킬로그램이 넘는 큰 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중기 설계도 15 (2-3 초후)
또 정약용은 한 대를 세우는 데에 거중기를 사용 할것을 제안하고 있다. 정약용이 고안한 이 거중
거중기 풀샷 5 기는 여러 개의 지렛대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
움직이는 사람들 12 어 올리도록 한 오늘날의 기중기와 같은 장치다.
실제로 이 거중기는 수원성을 쌓는 데에 큰 힘을 발휘했다
C/G 한 대 8 정약용의 기록을 토대로 한 대를 복원해보자
7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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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웅 인터뷰 조수의 유세가 꼭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으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짐으로써 한 대 뒤쪽에 강한 풍랑에 의한 유속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까 한대 주변
에는 유속이 감소가 되어 가지고 퇴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대 주변의 깊은 령이 메이게 됩니다.
그래서 유속을 분산시킴으로써 제방이 받을 수 있는 파력을 줄이도록 한 공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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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 보이고 8 조선시대의 둑에는 한 대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돌 타이트 13 강화도 송가평 둑에 남아 있는 이 돌담이 그것이다. (보고)
마치 둑에난 뿔처럼 직각으로 쌓은 이 돌담을 현대에는 그로인이라 부른다.
그로인 풀샷 14 그로인을 세우면 파도에 둑이 씻겨 내려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로인 안쪽으로 퇴적이
이루어져 둑이 더욱 안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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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웅 교수 인터뷰 앞에서 진행하는 파도를 직접 제방에서 받으면 흙인 제방인 경우에는 파괴가 되기 때문에
전면에 돌로써 쌓아서 파랑을 막는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해안선을 따라서 쌓은 그로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로인 배면에 일반적으로 유속이 감소가 되기 때문에 모래들이 퇴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퇴적이 됨으로써 더욱더 제방의 보호를 해주는 그러한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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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MC 둑 위에 서 있고, 멀리 한대와 그로인 보이고 )
강화도에 건설된 선두포 둑은 길이 460미터, 높이 15미터의 거대한 둑입니다
단지 규모만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저기 앞을 보십시오.
앞에 있는 저 삼각형의 구조물이 한대입니다.
당시 제방을 쌓을 때의 관건은 파도로부터 제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비결이 바로 저 한 대인대요. 한 대를 제방 앞에 세움으로써 파도의 힘을 반으로 나누게 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제방을 다 쌓은 후에는 이렇게 제방 앞에 일렬로 돌을 쌓아두었습니다.
과거에는 이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대에는 이런 공법을 그로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 역시 파도로부터 제방이 깎이지 않도록 고안한 것입니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런 공법들이 전해져 온 것입니다.
(둑에서 내려오고)
자 아래에서 보니까 둑이 더 거대해 보이는데요, 이 둑도 담장을 세우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둑 단면도가 쑥 보이고)
자 지금 보시는 이것은 둑의 단면도입니다.
둑의 내부는 흙을 차곡차곡 다진 흔적이 보입니다.
갯벌의 흙을 이만큼 쌓고 마른 후에 또 쌓았다는 뜻인데, 이것은 갯벌의 흙이 마르면 벽돌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 주위에는 파도에 흙이 씻겨나가지 않도록 돌을 빙 둘러서 쌓았는데요.
이 둑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수준 높은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벼, 쪽으로 가고)
자, 강화도에 둑을 세운 후 둑 안쪽은 이렇게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강화도는 경지면적의 3/4이 논이고 우리 나라 섬 중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섬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제방을 쌓기 전에 이곳은 갯벌이었고, 그렇다면 소금기가 무척 많은 땅이었을텐데요.
어떻게 이 땅에서 벼가 자랄 수 있을까요?
(선두둑 수문 쪽으로 가고)
둑에 있는 이것은 수문입니다. 선두포둑에는 동쪽과 서쪽 두 군데에 아주 커다란 수문을 설치해 놓고 있는데요.
간척지에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수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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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수로 바닥 팬 8 (3-4 초 후)
선두포 둑의 옛수문이 남아있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았다
일제시대 수문보이고 14 (2-3 초후)
현재 수로의 한쪽 벽면에 남아 있는 이 수문은 일제시대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벽 팬 돌 줌인 13 그런데 일제시대의 수문 옆에 조선시대 수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돌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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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 4 (2-3 초후)
그 실마리를 찾은 곳은 우리 나라 인공저수지 중
수로 팬 수문 9 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벽골제였다.
수문 틸다운 7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서있는 장생거는 벽골제의 두 번째 수문이다
나무에서 홈 9 취재진이 주목한 것은 돌기둥 사이에 굵은 나무판자가 끼워져 있는 점이었다.
나무 팬 홈 틸업 10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이렇게 판자를 끼우고 판자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사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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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돌 앞의 두 사람 4 하지만 갯벌위에서는 하나의 큰 기둥을 세우기가
돌 만지고 8 어렵기때문에 선두폭 둑의 수문은 여러개의 돌을 쌓아 기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죠. 겹쳐서 올라가야 되는 그런 꼴이 되겠죠. 한 덩어리로 수문의 문설주를 만든다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
하죠
돌 타이트 9 갯벌에 수문을 세우는데에는 무엇보다 튼튼한 지반이 필수적이었다
기록 8 민진원의 기록에 의하면 수문을 세울 자리로 암반층을 선정했음을 알 수 있다
암반 11 민진원의 기록대로 수문의 흔적밑에는 거대한 암반층이 있었다.
(보고)
고재웅 교수 인터뷰 암반이 없을 때 같으면 돌 수문이란건 생각을 못하겠죠. 무게가 도저히 연약지반에서는 지탱
이 안되니까
길이 재보고 8 민진원의 기록에 의하면 수문의 크기는 가로 4.5미터 세로 6미터
C/G 벽에서 돌 나오고 8 이제 수문의 원래 형태를 복원해 보자
돌 쌓이고 15 먼저 양옆에 홈이 파인 돌을 6미터 길이로 쌓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문의 역할을 하는 판자를 끼워
넣는다
(보고)
수문 움직이고 12 수문을 내려서 바닷물을 막고 배수를 할 때는 이렇게 수문을 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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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 13 (4-5 초후 )
갯벌에 둑과 수문을 쌓음으로써 만들어진 농경지는 강화도 면적의 3분의 1. 그 중 논이 76%를
정미소 14 차지하고 있다.
간척지에서 이렇게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그 토양에 있었다
유준상 박사 인터뷰 간척지는 특별히 상부로부터 내려와서 축적된 여러 가지 무기양분이 많습니다.
벼 자라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칼륨이라든가 석회라든가 마그네슘 함량이
적정수준을 상회하고 있어서 벼가 자라는데 좋은 조건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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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팬 9 하지만 둑을 쌓은 후에 곧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농부 모 옮기고 15 지난 94년 방조제가 건설된 영산강 유역.
이듬해부터 농사를 시작한 이곳에서는 모내기 대신 볍씨를 직접 뿌리는 담수직파를 하고 있다
농부 인터뷰 기계로 심다보니까 뿌리가 깊게 들어가거든요.
깊게 들어가면 염분의 성분을 모가 더 받죠.
그래서 모가 자라기 힘듭니다. 담수직파는 씨를 로터리 작업한 상태에서 뿌려놓은 상태입니다.
바로 땅 표면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활하게 큽니다
모 뿌리 보이고 6 땅위에 직접 씨를 뿌리면 벼 뿌리가 깊게 내리지 않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개흙 만지고 8 하지만 간척지에는 여전히 소금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를 씻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농부 인터뷰 초기에는 간척지는 개간하는데 염분 때문에
2-3년간 고생을 했죠. 계속 양수작업해서 물을 댔습니다. 지금도 가뭄 때문에 염분이 많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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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트래킹 9 300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이 갯벌을 농경지로 바꾼 방법도 이와 같았다
(기록 봐도좋고 읽어도 좋고)
기록 15 반드시 제언 안에 도랑을 파고 물을 끌거나 물웅덩이를 만들어 저수한 후에야 염분도 씻고
가뭄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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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우 교수 인터뷰 우리 나라 경우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써 물을 대줌으로써 염분을 희석시켜서 땅속의
염분을 낮추는 방법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척지가 농지로서 활용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물이
확보돼서 염분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요건이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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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팬 7 (2-3 초후)
오래 전부터 간척이 시작된 강화도에서는 갯벌의
수로 보이고 15 소금기를 씻기 위해 다양한 수리시설을 개발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수로다.
바닷물이 지나는 갯골을 막아 이렇게 하천으로 이용했다
논 팬 물광 보이고 7 교동면 지석리에는 논 한가운데 큰 웅덩이가 있다.
물꽝 팬 15 물광이라 불리는 이 웅덩이는 소규모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한 일종의 개인저수지라고 할 수 있다
주민 인터뷰 예를 들면 만평 가진 사람은 천5백평 파고 적은 사람은 적게 파서 여기다 담수했다가 그 이듬해
못자리부터 모내는거 ,이용을 하죠
논 팬 17 하천이 적은 강화도는 조선시대만 해도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다. 가뭄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아예 논을 저수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을 논보라고 하는데
C/G 논에 물 담고 10 겨울철, 논에 물을 담아두었다가 이듬해 그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것이다
용두레가 부르고 22 (4-5 초후)
조선시대의 강화도 농민들은 당시의 양수기인 용두레를 이용해 쉼 없이 간척지의 소금기를 씻어냈다.
강화도의 풍요로운 벼농사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주민 용두레歌 부르고 (현장음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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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MC 용두레가 보고 있고)
(MC 단암주의 책 들고)
(各營及本府軍兵募軍烟軍 十日萬名一日赴 )
민진원의 선두포 둑에 관한 공사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공사인력으로는 본부의 군병과 모군 연군을 동원했고 그 숫자가 1일 부역 11만 명이었다"
이중에서 연군은 임금노동자를 의미합니다. 강화도 둑 공사를 위해 강화도 수비를 맡은 군사력은 물론 임금
노동자까지 동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민진원은 공사가 완공된 후에 개간한 땅을 두고 백성들 사이에 토지 분쟁이 있을 것이니 미리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요.
중앙정부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서 병조판서를 강화도에 보내 유수인 민진원과 상의하게 했다고 합니다.
(江華府船頭浦新堰節目)
그리고 공사가 끝난 후 정부에서는 강화부선두포신언절목을 만듭니다.
이것은 간척지에 관한 일종의 법률로써
-양반이나 상민을 막론하고 근실하게 영농할 자를 뽑아 경착케 하라
-제언내의 신개간지는 법전의 규정에 따라 3년까지는 세금을 걷지 말라는 내용 등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간척과 현대의 간척이 똑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제방을 쌓고 갯벌을 개간하는 것이 국가의 중대사업이었던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제방을 쌓는 일은 비단 국가의 독점사업만은 아니었습니다.
송찬섭 선생님. 일반 백성들도 제방 쌓기에 많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송찬섭 선생 인터뷰: 실제로 토지에 대한 수요이다. 농민들에서부터 양반, 관료, 지
주, 상인 모든 층에서 토지를 굉장히 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서 기존의 토지는 소유권이 있었다. 그런데 간척지의 경우는 아직까지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그런 토지를 개간하겠다고 나서서 0를 맡고 땅을 전수를 받으면 개간에 따라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다.
아하, 그랬군요. 그래서 민진원은 토지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제언절목을 제정하자고 정부에 제안했던
것이군요.
자, 이번엔 120개가 넘는 제방이 강화도에 몰려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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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두사람 계단 오르고 6 (2-3 초후)
지난 1970년 강화도 북산 중턱에서 오래된 건
고려궁지 9 물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결과 이곳은 700여년 전 고려의 왕궁터로 밝혀졌다
터 팬 14 개성의 궁궐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는 강화의 고려 궁궐.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 였다
전쟁자료화면 10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이후 고려왕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몽골에 대한 장기항전에 들어갔다
갑곶해협 15 수도 개경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험난한 해협이 가로지르고 있는 강화도는 해전에 약한 몽골의
기마병을 막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윤용혁 교수 인터뷰 강화 천도할 때의 개성인구가 10만호였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10만호를 10만명으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고 문자그대로 10만호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쨌든 강화천도에 상당히 많은 인구가 일시에 강화섬에 유입된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일 이십만 정도는
유입이 됐다 이렇게 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을 때에 대단히 여러 가지 생활상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이규보 묘 9 고려왕실과 함께 건너온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는 이곳 강화에서 생을 마쳤다.
비석 틸다운 10 당시 이규보가 남긴 글은 새로운 수도에서 부딪쳐야했던 생활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 나오고 17 저는 송곳하나 세울만한 땅이 없이 녹봉만을 의지해오다가 녹봉마저 뜸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며
늙은 몸이 쓸모가 없어져 탄마저 구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기가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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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 교수 인터뷰 조금이라도 이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측면이 강화도에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는 것.
그 가운데는 간척을 통해서 경작지를 확보하는 이런 작업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이 됐었고
그래서 40년 동안 강화도에 있으면서 강화도 지형이 크게 바뀔 정도로 많은 간척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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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절요 18 고려사절요는 당시 정부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에 둑을 쌓아 우둔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공촬영 우둔전으로 11 취재팀은 고려시대에 쌓은 둑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다 팬 성벽 12 강화군 불은면.
우둔전 바깥 해안쪽에서 취재팀이 발견한 것은 해안을 따라 서있는 성벽이었다
남궁순 설명하고 9 (3-4 초 후)
고려시대 이곳에 외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조선시대의
돌 만지는 손 9 성벽만이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성벽 팬 9 고려시대 해안가에 쌓은 이 외성은 단순히 방어벽만은 아니었다
윤용혁 인터뷰 내성 중성 외성해가지고 3중으로 성을 쌓은 것으로돼 있고 그가운데 외성이 바닷가로 해안을
따라서 쌓은 성이 외성입니다만은 원래 강화도의 지형이 해안 굴곡이 아주 심한 지형인데 외성을 쌓게되면
자연히 해수유입을 차단하는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돼서 그래서 자연히 외성을 구축하는 것은 방어시설 설비를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하고 동시에 외성을 구축함으로써 간척이 부수적으로 가능해지는 효과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바다 팬 덕진진 11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강화도는 국방의 요새이
자 왕의 피난처로서 주목받는다
포 13 효종 이후 조선왕조는 강화도의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요충지에 진과 보를 신설하고 체계적인 방어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트래킹 8 덕진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계룡돈대가 있다.
언덕 팬 계룡돈대 15 (4-5초 보고)
돈대는 감시초소인 망루와 포대의 기능을 결합한 당시로서는 신개념의 군사시설이다.
두사람 비 앞에 있고 8 계룡돈대는 강화도의 돈대 중에서 유일하게 축성연대를 알 수 있는 비문이 남아 있는데
비석 8 숙종5년인 1679년 경상도 군위어영 군사가 이 돈대를 세웠다
조선후기 지도+돈대 7 (3-4 초후)
강화도에 돈대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대
돈대 두르고 15 그 숫자는 무려 49개에 이르렀다
(2-3 초 후)
그야말로 강화도를 하나의 군사요새지로 만든 것이다
돈대 항공샷 9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돈대가 있는 곳엔 반드시 둑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재웅 교수 인터뷰 산양쪽 산록에 돈대가 두 개 있었는데 이 돈대를 연결하는 도로가 없어 가지고 일반적으로
한바퀴 도는데 20리가 소요되는 길을 걸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국방적인 임무에 종사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선두포를 공사함으로써 400미터로 거리를 단축시켰습니다.
길 트래킹 6 간척지의 둑은 돈대를 연결하는 군사도로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논 항공촬영 20 (4-5 초 후)
120개의 둑이 세워진 후 당시의 강화도를 이중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병자이후 조정은 사전의 참사를 거울삼아 기계를 시설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만일에 경우에는 백년을 견디도록
하였으며 강도에 쌓아놓은 양식이 기백만 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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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클로징]
(咽喉之地 )
한반도에서 강화도가 차지하는 위치는 흔히 인후지지,
마치 사람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해상교통의 요지, 그리고 섬이라는 이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강화도는 우리역사
에서 늘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돼 왔는데요.
(保藏處 뜨고)
또 조선시대에는 강화도가 보장처 중의 하나였습니다.
보장처란 전란 시에 임금과 조정이 난을 피하기 위해 대피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임금은 40일간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고 합니다 .
(변화되기 전의 강화도)
강화도에 수많은 제방이 세워진 것도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강화도가 고려의 임시수도가 되면서 식량난을 해결할 필요가 생겼고 또 조선시대에는 강화도를 군사요새화 하기
위한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제방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800년 전의 강화도를 오늘날의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은 120개의 제방입니다.
무심코 지나버릴 수 있는 이 제방 하나가 조선시대 과학적인 토목기술은 물론 그 시대사까지 보여주는 우리역사의
소중한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변화되기 전의 강화도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