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2011)도 어김없이 각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발표되었다. 시를 지망하는 문학도에 있어서 1월 1일은 새해를 여는 하루임과 동시에 그간 공들여온 자신의 작품이 어떤 결과를 맺었는지를 바라보며 다시 습작에 몰두케 하는 날이다. 많은 신문사 가운데 나는 조선, 동아, 한국, 서울, 경향일보의 당선작을 분석하여 그들이 어떤 이미지와 상징으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는지, 나의 글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려 한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은 집이나 오래된 공간에 붙어 소란을 피우는 영혼인 폴터가이스트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써내는 산문시에 대해 그다지 좋지 못한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이 시는 곧잘 와 닿지 않았다. 시적 화자에게 거칠 것 없이 접근하여 전체적으로 불안한 상황과 심리를 빚어내고는 있지만, 시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를 드러내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형체 없는 두려움의 표상인 폴터가이스트는 시적 화자가 영위하고 있는 생활을 무수히 제약하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홀가분하게’ 떠나간다. 성은주 씨의 작품이 불안한 속을 드러내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전체적인 구조가 그저 유령이 왔다가 떠나는 것이 전부이기에 나는 시를 읽는 내내 뚜렷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은 조선일보의 것과 다르게 한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따듯/오리의 목을 자르자’라는 첫 구절에서, 삶을 단칼에 절단 내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고 단번에 멎지 않는 생명의 힘으로 발버둥치는 오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시적 화자는 목이 잘린 채 발버둥치며 죽어가는 오리를 보면서, 곧 힘이 다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생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을 힘 있게 형상화했다. 게다가 머리 부분의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지금껏 날아오르거나 물갈퀴를 젓던 오리의 유장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피가 쏟아져 대야에 고이는 게 아니라 그동안 오리를 살아있도록 만든 힘이 ‘비명’처럼 엎질러지고 이러한 상황을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으로 비유한 유병록 씨의 작품이 매우 인상깊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인 ‘검은 구두’는 제목임과 동시에 제재이기도 하다. 친구의 문상을 갔던 날,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신발을 보고 시의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신발에게는 우리 같은 인간들처럼 계급이 있지 않다는 말로 처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신발은 동굴, 수행자, 교차로, 코끼리 등의 알기 쉬운 비유로 시를 한 행씩 걸어 나간다. 유홍준 시인의 <喪家에 모인 구두들>을 얼핏 떠올리게도 하지만 유홍준 시인이 喪家의 신발장에 모여든 신발들과 그에 얽힌 이미지들을 절제의 미를 살려 간결하지만 더욱 분명하게 이루어냈다면, <검은 구두>를 쓴 김성태 씨는 전체적인 시행들이 유려하게 흘러가는 데에 중점을 둔 나머지 말이 너무 많아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구두>는 시인이 자신의 시로 하고자 했던 말이 아주 쉽게 드러나 있으므로 지금까지 읽어온 당선시들 중 가장 명확하게 읽히는 장점이 있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당선시는 내가 써오던 작품처럼 분량이 몹시 긴 편이었다. 각각의 행이 가진 글자 수도 많아서 시를 쓰다가 떠오른 말을 분별없이 마구 끄집어낸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안전하게 시를 끌어나가기보다, 이길상 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시적 화자이면서 동시에 저자이기도 한 자신의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시적 화자는 지금껏 기댈 곳도 없는, 어떤 분명한 삶의 보장 없이 사막처럼 황폐하고도 아득한 시간을 지내왔다. 자신 앞에 펼쳐진 현실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그때마다 세상의 외곽으로, 한 편의 고독처럼 밀쳐지기도 했다. 이길상 씨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함을 아주 절실하고 핍진하게 시로 옮겼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결과 없이 지금껏 살아왔지만, 화자에게 아직 포기할 마음은 없는 듯 근 30행에 달하는 시는 나에게 그 끝에 더 할 말이 남은 넋두리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무언가에 대한 신선한 인식이라든가 수려한 문체로 인한 가벼움이 아닌, 지나온 고독한 인생을 절실하게 이어 붙여 한 편의 시로 내놓은 패기에 심사위원들이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생각된다.
경향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의 제목은 <직선의 방식>이다. 시의 제목에서 최근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김언 시인의 <기하학적인 삶>이 떠올랐다. 마치 잠언의 구절 같은 묵직하고도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여, 부드럽고 감성적인 시의 언어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인생이라는 화두를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이만섭 씨의 <직선의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선의 곧은 형상을 보고 정직하다고 말하는 첫 5행은 마치 독자에게 강력히 설파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산문화된 행이라 독자의 시선을 다소 강제적으로 끌어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직선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형상에서도 드러나지만 지평선 끝에서 떠오르는 달의 모습이나 별빛이 사람들의 눈에 맺히는 순간까지도 모두 직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휘거나 왜곡되지 않고 올곧게 날아오는 광선(光線)임과 동시에 이러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일상의 모든 것들은 수직과 수평으로 존재한다는 다소 철학적인 결론까지도 갖고 있다.
다섯 개 신문사의 당선작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각각 절실함이나 힘 있는 인식 등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시인 자신들의 생애와 여정을 시로써 구현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의 의미 확장에서 기인했다. 나는 다섯 편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욱 선명하게 형상화시켜서 보여주는 존재라는 말을 실감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이나 상처들은 때론 가까운 신발장에 ‘조문하러 온 신발들’처럼 모여 있기도 하고, 영원히 하늘을 바라보며 팔을 벌린 채 서 있을 가로수들처럼 ‘직선의 힘’으로 꼿꼿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나에게는 시적으로 구현해 낼 훌륭한 상처들이 없다. 내가 살아오면서 무심코 지나쳐버린 아픔들은 없었는가. 똑바로 걸어갈 것을 거부하며 우회로를 택해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 가시밭길은 정말 없었는가. 지금껏 너무 시를 작위적으로 써 왔다.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상황이 아닌 시를 위해 억지로 직조한 듯한 풍경으로 써냈다. 앞으로 내가 갖추어야 할 것은 상처와 아픔을 인정하는 법일 것이다. 그간 지나치게 묵직하고 진중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작 첫 번째 행의 이미지에 계속 멎어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봐야겠다.